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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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조는 1369년에 태어나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을 보좌하며 예악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권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차례 좌천되기도 했으나,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그는 구임법 제정, 《속육전》 편찬, 동북방 방어, 인재 등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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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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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허조 |
원래 이름 | 허조(許稠) |
출생일 | 1369년 5월 17일 |
사망일 | 1439년 12월 28일 |
본관 | 하양(河陽) |
학력 | 1390년(고려 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 |
종교 | 유교(성리학) |
직책 | 문신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허귀룡(許貴龍) 어머니 이씨 부인(李氏 夫人) |
친인척 | 친조부 허윤창(許允昌) 증조부 허수(許綏) 외조부 이길(李吉) |
형제 | 형 허주(許周) |
경력 | |
임기 | 1438년 5월 ~ 1439년 3월 |
2. 생애
허조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예악 제도를 정비하고 유교 윤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415년 한성부윤·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제조를 역임하였다.
허조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왕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데 힘썼다. 그의 노력은 조선 초기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학문
1369년 경상도 하양현(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하양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허귀룡(許貴龍)이고, 어머니는 흥양 이씨(興陽李氏)이다. 권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1383년 진사시에,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39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특히 『소학』과 『중용』을 즐겨 읽었다. 성품은 강직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전해진다.
2. 2. 조선 개국 초기의 활동
1392년 조선 개국 후 좌보궐, 봉상시승을 지내며 지제교를 겸하여 예악 제도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 의식을 개정했고,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 즉위 후 사헌부잡단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이후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을 지내며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갈 때 집의로서 서장관을 수행하며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귀국 중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2. 3. 태종 시대의 시련과 복귀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이후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명나라에 세자가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며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귀국 중에는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을 제향하고 양웅을 몰아내었다.
1408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趙大臨事件)에 연루되어 춘주(春州)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이후 이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간곡히 요청하기도 하였다.
2. 4. 세종 시대의 활약과 업적
1418년 세종 즉위 후 공안부윤(恭安府尹)·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속육전』의 편수에도 참가하였다.
1426년 참찬·빈객을 거쳐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 순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 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에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해에 죽었다.
2. 5. 외교와 국방
허조는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406년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상세히 조사했다. 귀국길에는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 제도를 개혁했다.1428년에는 동북 방면의 방어를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433년 세종이 파저강 야인(野人) 이만주를 공격하려 할 때는 후환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2. 6. 말년과 죽음
1438년 세종을 도와 신숙주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해에 죽었다.소학·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 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 묘소
허조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으며, 2013년 8월 28일 파주시의 향토유적 제29호로 지정되었다.
4. 평가 및 업적
허조는 조선 초기 예악 제도를 정비하고,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4. 1. 조선 초기 예악 제도 정비
조선 초기 예악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청백리로 명망이 있었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의 의식을 개정했고, 1422년 《신속육전》 편수에 참가했다.4. 2. 청백리로서의 명망
조선 초기에 예악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청백리로서 명망이 높았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고, 1422년 《신속육전》(新續六典) 편찬에 참가했다.4. 3. 유교 윤리 확립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의 의식을 개정했고, 1422년 《신속육전》 편수에 참가했다.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허수(許綏) | |
증조모 | 순흥 안씨(順興安氏) | 안향(安珦)의 딸 |
조부 | 허윤창(許允昌) | |
조모 | 익산 이씨(益山李氏) | 이성직(李成稷)의 딸 |
아버지 | 허귀룡(許貴龍) | |
어머니 | 흥양 이씨(興陽李氏) | 이길(李吉)의 딸 |
형 | 허주(許周) | |
동생 | 허척(許倜) | |
여동생 | 조안평(趙安平)에게 출가 | |
부인 | 영해 박씨(寧海朴氏) | 박경(朴經)의 딸 |
아들 | 허후(許詡) | |
아들 | 허눌(許訥) | |
딸 | 최유종(崔有悰)에게 출가 | |
딸 | 정잠(鄭箴)에게 출가 | |
딸 | 윤미견(尹彌堅)에게 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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