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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고이치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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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토 고이치(1939년)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1972년 처음 당선되어 2012년까지 야마가타현을 대표했으며, 방위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을 지냈다. 그는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며 평화를 지지했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중국과의 관계 증진에도 힘썼다. 2000년에는 '가토의 난'으로 정치적 입지를 잃었으며, 납치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201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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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고이치 (193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토 고이치 1985년 사진
1985년, 수상 관저에서
직위
내각관방장관내각: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임기 시작: 1991년 11월 5일
임기 종료: 1992년 12월 12일
전임: 사카모토 미소지
후임: 고노 요헤이
방위청 장관내각: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임기 시작: 1984년 11월 1일
임기 종료: 1986년 7월 22일
전임: 구리하라 요시유키
후임: 구리하라 요시유키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담당)내각: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
임기 시작: 1978년 12월 8일
임기 종료: 1980년 7월 17일
전임: 모리 요시로
후임: 가와라 리키
중의원 의원선거구:
야마가타 3구 (2003년-2012년)
야마가타 2구 (1972년-1996년)
야마가타 4구 (1996년-2002년)
임기 시작: 1972년 12월 10일
임기 종료: 2002년 4월 9일
전임: 다선거구
후임: 사이토 준
임기 시작2: 2003년 11월 10일
임기 종료2: 2012년 11월 16일
전임2: 지카오카 리이치로
후임2: 아베 주이치
인물 정보
출생일1939년 6월 17일
출생지야마가타현쓰루오카시
사망일2016년 9월 9일
사망지도쿄도
학력도쿄 대학 법학부
하버드 대학교
정당자유민주당
자녀3명 (딸 가토 아유코 포함)
부모가토 세이조 (부)
형제가토 고로 (둘째 형)
경력
국가 공무원외무성
일본 국회의원중의원 의원
소속 정당
학위 및 훈장
학사법학 (도쿄 대학, 1963년)
학사법학 (도쿄 대학, 1964년)
기타 직책
자유민주당 간사장총재: 하시모토 류타로
임기 시작: 1995년 10월
임기 종료: 1998년 7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총재: 고노 요헤이
임기 시작: 1994년
임기 종료: 1995년 10월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리총재: 미야자와 기이치
임기 시작: 1992년 12월
임기 종료: 1993년 8월
웹사이트

2. 생애

가토 고이치는 1939년 6월 17일 나고야시 히가시구 시라카베에서 태어났다.[2] 이후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가토 세이조는 정치인으로, 1946년부터 쓰루오카 시장을 지냈으며,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추천으로 구 야마가타현 제2구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1952년 쓰루오카 제3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아버지의 당선 이후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사하여 고지마치 중학교로 전학했다. 고지마치 중학교 동급생 기시다 신에게 표준어를 배웠으며, 1955년 고지마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히비야 고등학교 동급생으로는 야스오카 고지, 토네가와 스스무, 야마오 산세이, 구로이와 지쓰코 등이 있었다. 1958년에 동교를 졸업했다.

도쿄 대학 이과 1류에 응시했으나 불합격 후 보충과에 소속되었고, 이듬해 1959년 도쿄 대학 문과 1류에 합격했다. 히비야 고교 동창이자 외교관이 된 와타나베 신의 권유로 도쿄대 수영부에 입부했으며, 세미 지도 교관은 사카모토 요시카즈였다. 당시 활발했던 안보 투쟁의 데모에 참가하기도 했다.[3][4] 1963년 도쿄 대학 법학부 제3류(정치 코스)를 졸업했다. 아사히 신문사 입사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외무성의 외교관 시험에는 불합격했다.

이후 법학부 제2류(공법 코스)에 내부 학사 입학하였고, 외무성을 재응시하여 합격했다. 1964년 도쿄대 법학부 제2류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 타이완 대학과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했다. 196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홍콩 부영사 재직 중 결혼했고, 1970년 귀국하여 외무성 아시아국 중국과 차석 사무관이 되었다. 이 시기에 아버지 가토 세이조가 사망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영어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중국과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 1. 초기 생애

1939년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 시라카베에서 가토 세이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2] 이후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서 성장했다. 1952년 쓰루오카 제3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자유당 공천을 받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 구 야마가타현 제2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된 뒤 가족이 모두 도쿄도로 이주했다. 가토도 이때 고지마치 중학교로 전학갔으며, 기시다 신에게 표준어를 배웠다고 한다. 1955년 고지마치 중학교 졸업 후에는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58년에 졸업했다.

도쿄 대학 이과에 지원했으나 떨어졌고, 다음 해 문과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1963년 아사히 신문 입사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외교관 시험에는 떨어졌다. 1964년 다시 외교관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외교관으로 재직할 때 국립 타이완 대학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67년 홍콩 부영사로 있을 때 결혼했다. 1970년 일본에 돌아와 아시아국 중국과 차석사무관이 되었고, 얼마 뒤 아버지 가토 세이조가 사망했다.

2. 2. 학력 및 경력

가토 고이치는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외무성에 입성했다. 외교관으로 재직하며 국립 타이완 대학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6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일본으로 돌아와 아시아국 중국과 차석사무관이 되어 중국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3. 정치 경력

가토 고이치는 아버지 사후 지역구를 물려받아 1971년 차기 총선 출마를 표명했다. 그의 아내는 훗날 총리대신을 지내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딸과 소꿉친구였고, 아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었기에 결혼식 때 나카소네가 신부의 부모 대신 참석했다. 나카소네는 가토에게 자신의 파벌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가토는 하시모토 히로시의 소개로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에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다나카의 비서인 하야사카 시게조는 가토의 지역구인 야마가타현 제2구는 다나카의 파벌에 속하는 사람이 없어 가토를 영입하기에는 다나카도 부담스럽다며 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인 굉지회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오히라는 가토의 아버지와 초선 동기이기도 했기에 가토는 오히라의 파벌에 들어갔다. 훗날 가토는 회상록 등을 통해 자신이 정치인이 되었던 것은 닉슨 쇼크처럼 미국이 중요한 외교 사항을 일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충격으로 관료로서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972년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자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1978년 내각관방부장관이 되었다. 1980년 나리타 공항 문제와 관련하여 산리즈카 투쟁 해결을 위해 반대파와의 물밑 교섭에 나서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1984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 때 방위청 장관으로서 처음 입각했다.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다시 입각했으며 이때 가토 담화라고 알려진 '한반도 출신자의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내각관방장관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일부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표명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법적 책임 인정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창당 이래 처음 야당으로 추락한 자민당은 1994년 7월 10개월만에 여당에 복귀했고 가토는 고노 요헤이 총재 아래서 정조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자민당은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자사사 연립 정권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가토는 자사사 연립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994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해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가토는 "이곳에 오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다", "내년은 종전한지 50년이 된다. 일본에선 50년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지 의논하고 있으며 일중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된 루거우차오를 방문한 것은 의의가 깊다"고 말했다. 이러한 행보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95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당시 같은 파벌이던 고노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고 하시모토가 총재직에 오르자 간사장에 취임했다. 다음해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과의 양당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거 직후 자민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지만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와 함께 신진당의 의원들을 영입하는 공작을 벌여 자민당은 단독으로 중의원 과반수 복귀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1998년 7월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당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고 함께 물러났던 하시모토의 후임으로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하여 이를 이루어냈다. 그해 12월 굉지회 회장인 미야자와 기이치가 회장직에서 물러나자 이를 물려받아 염원하던 굉지회 회장직에 취임했다. 한편, 1995년 총재 선거에서는 같은 굉지회 소속의 고노 요헤이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하기도 했다.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기간 중에 민주당 대표인 하토야마 유키오로부터 자민당을 탈당한 뒤 비자민수반 지명 후보가 될 것을 기대받았지만 본인은 일축했다. 낮은 지지율에도 정권을 유지하는 모리 요시로에 반발하여, 야마사키 다쿠와 함께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 시 본회의에 결석하거나 찬성할 의향을 보였다.

199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때 오부치가 자자공 연립 정권을 지지하자 이에 반발하여 야마사키와 함께 출마했으나 패배했고 재선에 성공한 오부치는 개각을 하면서 가토와 야마사키의 파벌을 냉대하여 당내 비주류로 입장이 바뀌었다. 2000년 총리로 취임한 모리 요시로가 낮은 지지율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이어갈 뜻을 보이자 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찬동할 뜻을 보였다. 이른바 가토의 난을 일으킨 것인데 노나카와 고이즈미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그 후유증으로 굉지회는 분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가토는 정치적 입지를 크게 잃게 되었다.

2001년 12월 중의원 테러대책특별위원장에 취임했다. 2002년 3월 비서가 탈세 의혹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굉지회 회장직을 사임하고 자민당도 탈당했다. 다음 달에는 의원직에서도 물러났다가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무소속으로 당선돼 국회에 복귀했다. 하지만 총재 후보로서의 지위는 이걸로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이후 자민당에도 복당한 뒤 굉지회 최고고문이 되었다. 하지만 2005년 9월 굉지회 최고고문직을 사임하고 굉지회도 탈퇴했다. 나중에 굉지회의 계보를 잇는 세 파벌(아소파, 고가파, 다니가키파)의 통합에 관한 대굉지회 구상이 부상하자 가토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이 파벌에 복귀하는 것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이후 줄곧 무파벌을 유지했다.

2006년 8월 15일 17시 50분 경에 자택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자민당의 이나다 도모미는 이를 두고 선생의 집이 전소됐다고 가볍게 표현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2007년 2월 자민당의 야마사키, 민주당의 센고쿠 요시토, 에다노 유키오, 공명당의 히가시 준지, 사회민주당쓰지모토 기요미 등과 함께 초당파적 스터디그룹인 라의 모임을 만들었다.

2008년 7월 일중우호협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닛폰BS방송에 출연하여 "납치 피해자는 북조선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한과의 외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고이즈미 내각 당시 관방부장관이던 아베가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의 안을 뒤엎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납치 피해자 가족 등 관련 단체가 거세게 항의하자 가토는 일본이 약속을 어겨 북한이 일본을 불신하게 되었기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되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2009년 1월 야마가타현지사 선거가 열리자 현직 지사였던 사이토 히로시를 지지했지만 사이토는 낙선했다. 그해 9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당선되어 13선 의원이 되었다. 2010년 2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비서가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토야마는 과거 가토의 비서가 기소되었을 때 비서가 죄를 지었으면 의원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는데 하토야마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길 거부하자 가토는 "어째서 과거와 현재의 발언이 다른가. 총리가 됐다고 책임을 지지 않는건가"라고 비판했다.

2010년 8월 한일 병합 100주년을 계기로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한국인과 그 자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충분한 배상을 촉구'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일 과거사의 해결과 미래를 향한 평화의원회의'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의 위법성, 전후 보상과 위안부 문제, 재일 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문제 등의 해결 방법에 관해 논의했는데 당시 평화의원회의에 참여한 의원 중 유일한 자민당 의원이었다. 이는 가토가 자민당 내에서도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는 자민당 집행부와 야마가타현지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같은 지역구의 참의원이었던 기시 고이치가 이에 반발하며 사카타시장을 지낸 아베 주이치를 지지하여 자민당 후보가 분열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가토는 반 자민당 세력을 결집한 아베에게 패배했으며 73세 이상의 후보자는 비례대표 출마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자민당 규정에 따라 비례대표로 부활하는 것에도 실패하여 최종적으로 낙선했다. 당시 선거에서 가토는 자민당 후보로서는 도호쿠 지방에서 유일하게 낙선했다.

가토 고이치는 1972년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처음 일본 국회에 당선되어, 그의 고향인 야마가타를 대표했으며, 2002년 4월 스캔들로 사임한 이후 19개월을 제외하고 2012년까지 계속해서 이 지역을 대표했다. 가토는 자유민주당의 고치카이(당시 오히라) 파벌에 속했으며, 이 파벌은 세 명의 일본 총리인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미야자와 기이치를 배출했다. 이 파벌의 힘은 가토에게 승진할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여러 내각 직책을 맡았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그는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1992년, 그는 당의 전통적인 지배력이 도전받고 있을 때 자유민주당의 간사장에 선출되었다.

가토는 1995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같은 굉지회 소속의 고노 요헤이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다. 하시모토가 총재로 취임하자 가토는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가토는 같은 자유민주당 개혁파인 오자와 이치로와 때로는 어려운 관계를 맺었는데, 오자와는 다나카/다케시타 주류 파벌 내에서 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1993년, 오자와는 자민당에 남는 대신 당에서 분리되어 일본신생당을 창당했다. 이는 가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배신으로 여겨졌다. 가토가 2000년에 비슷한 입장에 처했을 때, 그는 반대파로 넘어갔다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다. 90년대 후반, 자민당이 오자와의 자유당과의 합병을 고려했을 때, 가토는 오자와를 자민당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가토와 오자와는 경제 및 정치 개혁에 대한 매우 유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종종 숙적으로 묘사된다(외교 정책에서 가토는 오자와보다 다소 덜 강경하며, 일본의 보다 신중한 국제적 역할을 옹호한다).

2002년에는 사무소 대표에 의한 소득세법 위반의 책임을 지고 탈당, 의원직을 사직하여 총재 후보로서의 지위는 종료되었다.

2006년 8월 15일, 가토 고이치의 쓰루오카에 있는 자택 옆집과 사무실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 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61주년 기념일이었다. 수사 결과 방화로 결론지어졌으며, 용의자는 2006년 9월에 기소될 예정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용의자는 극우 단체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가토의 자택에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12월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야마가타 3구에서 무소속인 사카타 시장 아베 주이치에게 패배하며 의석을 잃은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3. 1. 초선 및 초기 활동

1971년 아버지 사망 후 지역구를 물려받아 차기 총선 출마를 표명했다. 가토의 아내는 훗날 총리대신을 지내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딸과 소꿉친구였고 아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결혼식 때 신부의 부모 대신 나카소네가 참석했다. 이 인연으로 나카소네는 가토에게 자신의 파벌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가토는 나카소네와는 잘 안 맞는다며 이를 거절하고 외무성 중국과장을 지낸 하시모토 히로시의 소개로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에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다나카의 비서인 하야사카 시게조가 가토의 지역구인 야마가타현 2구는 다나카의 파벌에 속하는 사람이 없어 가토를 영입하기에는 다나카도 부담스럽다며 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인 굉지회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오히라는 가토의 아버지와 초선 동기이기도 했기에 가토는 오히라의 파벌에 들어갔다. 훗날 가토는 회상록 등을 통해 자신이 정치인이 되었던 것은 닉슨 쇼크처럼 미국이 중요한 외교 사항을 일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충격으로 관료로서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5][6]

1972년 12월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야마가타현 2구에서 첫 당선되었다.[7] 1978년 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이 되었다.

3. 2. 주요 보직 및 활동

1971년 아버지 사망 후 지역구를 물려받아 차기 총선 출마를 표명했다. 가토의 아내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딸과 소꿉친구였고, 아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결혼식 때 나카소네가 신부의 부모 대신 참석했다. 나카소네는 가토에게 자신의 파벌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가토는 하시모토 히로시의 소개로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에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다나카의 비서인 하야사카 시게조가 가토의 지역구인 야마가타현 제2구는 다나카의 파벌에 속하는 사람이 없어 가토를 영입하기에는 다나카도 부담스럽다며 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인 굉지회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오히라는 가토의 아버지와 초선 동기이기도 했기에 가토는 오히라의 파벌에 들어갔다. 가토는 회상록을 통해 자신이 정치인이 되었던 것은 닉슨 쇼크처럼 미국이 중요한 외교 사항을 일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충격으로 관료로서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972년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1978년 내각관방부장관이 되었다. 1980년 나리타 공항 문제와 관련하여 산리즈카 투쟁 해결을 위해 반대파와의 물밑 교섭에 나서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1984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 때 방위청 장관으로서 처음 입각했다.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다시 입각했으며 이때 가토 담화라고 알려진 '한반도 출신자의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내각관방장관 발표'가 이루어졌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창당 이래 처음 야당으로 추락한 자민당은 1994년 7월 10개월만에 여당에 복귀했고 가토는 고노 요헤이 총재 아래서 정조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자민당은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자사사 연립 정권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가토는 자사사 연립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994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해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가토는 "이곳에 오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다", "내년은 종전한지 50년이 된다. 일본에선 50년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지 의논하고 있으며 일중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된 루거우차오를 방문한 것은 의의가 깊다"고 말했다.

1995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당시 같은 파벌이던 고노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고 하시모토가 총재직에 오르자 간사장에 취임했다. 다음해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과의 양당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거 직후 자민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지만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와 함께 신진당의 의원들을 영입하는 공작을 벌여 자민당은 단독으로 중의원 과반수 복귀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1998년 7월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당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고 함께 물러났던 하시모토의 후임으로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하여 이를 이루어냈다. 그해 12월 굉지회 회장인 미야자와 기이치가 회장직에서 물러나자 이를 물려받아 염원하던 굉지회 회장직에 취임했다. 하지만 199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때 오부치가 자자공 연립 정권을 지지하자 이에 반발하여 야마사키와 함께 출마했으나 패배했고 재선에 성공한 오부치는 개각을 하면서 가토와 야마사키의 파벌을 냉대하여 당내 비주류로 입장이 바뀌었다. 2000년 총리로 취임한 모리 요시로가 낮은 지지율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이어갈 뜻을 보이자 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찬동할 뜻을 보였다. 이른바 가토의 난을 일으킨 것인데 노나카와 고이즈미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그 후유증으로 굉지회는 분열하고 말았다.

2001년 12월 중의원 테러대책특별위원장에 취임했다. 2002년 3월 비서가 탈세 의혹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굉지회 회장직을 사임하고 자민당도 탈당했다. 다음 달에는 의원직에서도 물러났다가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무소속으로 당선돼 국회에 복귀했다. 하지만 총재 후보로서의 지위는 이걸로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이후 자민당에도 복당한 뒤 굉지회 최고고문이 되었다. 하지만 2005년 9월 굉지회 최고고문직을 사임하고 굉지회도 탈퇴했다. 나중에 굉지회의 계보를 잇는 세 파벌(아소파, 고가파, 다니가키파)의 통합에 관한 대굉지회 구상이 부상하자 가토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이 파벌에 복귀하는 것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이후 줄곧 무파벌을 유지했다.

2006년 8월 15일 17시 50분 경에 자택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자민당의 이나다 도모미는 이를 두고 선생의 집이 전소됐다고 가볍게 표현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2007년 2월 자민당의 야마사키, 민주당의 센고쿠 요시토, 에다노 유키오, 공명당의 히가시 준지, 사회민주당쓰지모토 기요미 등과 함께 초당파적 스터디그룹인 라의 모임을 만들었다.

2008년 7월 일중우호협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닛폰BS방송에 출연하여 "납치 피해자는 북조선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한과의 외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고이즈미 내각 당시 관방부장관이던 아베가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의 안을 뒤엎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납치 피해자 가족 등 관련 단체가 거세게 항의하자 가토는 일본이 약속을 어겨 북한이 일본을 불신하게 되었기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되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2009년 1월 야마가타현지사 선거가 열리자 현직 지사였던 사이토 히로시를 지지했지만 사이토는 낙선했다. 그해 9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당선되어 13선 의원이 되었다. 2010년 2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비서가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토야마는 과거 가토의 비서가 기소되었을 때 비서가 죄를 지었으면 의원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는데 하토야마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길 거부하자 가토는 "어째서 과거와 현재의 발언이 다른가. 총리가 됐다고 책임을 지지 않는건가"라고 비판했다.

2010년 8월 한일 병합 100주년을 계기로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한국인과 그 자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충분한 배상을 촉구'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일 과거사의 해결과 미래를 향한 평화의원회의'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의 위법성, 전후 보상과 위안부 문제, 재일 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문제 등의 해결 방법에 관해 논의했는데 당시 평화의원회의에 참여한 의원 중 유일한 자민당 의원이었다.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는 자민당 집행부와 야마가타현지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같은 지역구의 참의원이었던 기시 고이치가 이에 반발하며 사카타시장을 지낸 아베 주이치를 지지하여 자민당 후보가 분열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가토는 반 자민당 세력을 결집한 아베에게 패배했으며 73세 이상의 후보자는 비례대표 출마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자민당 규정에 따라 비례대표로 부활하는 것에도 실패하여 최종적으로 낙선했다. 당시 선거에서 가토는 자민당 후보로서는 도호쿠 지방에서 유일하게 낙선했다.

가토 고이치는 1972년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처음 일본 국회에 당선되어, 그의 고향인 야마가타를 대표했으며, 2002년 4월 스캔들로 사임한 이후 19개월을 제외하고 2012년까지 계속해서 이 지역을 대표했다. 가토는 자유민주당의 고치카이(당시 오히라) 파벌에 속했으며, 이 파벌은 세 명의 일본 총리인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미야자와 기이치를 배출했다. 이 파벌의 힘은 가토에게 승진할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여러 내각 직책을 맡았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그는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1992년, 그는 당의 전통적인 지배력이 도전받고 있을 때 자유민주당의 간사장에 선출되었다.

3. 3. YKK와 2000년 리더십 도전

1995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같은 굉지회 소속의 고노 요헤이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다. 하시모토가 총재로 취임하자 가토는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1998년에는 염원하던 굉지회 회장에 취임했지만, 이듬해 199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자유당, 공명당과의 연립 정권을 목표로 하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에 반발하여 야마자키 다쿠와 함께 출마했지만 패배했다. 총재 선거 종료 후, 오부치로부터 "당신은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잖아"라는 격노를 당했으며, 내각 개조에서 가토파, 야마자키파는 냉대를 받아 당내 반주류파로 전락했다.[24]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기간 중에 민주당 대표인 하토야마 유키오로부터 자민당을 탈당한 뒤 비자민수반 지명 후보가 될 것을 기대받았지만 본인은 일축했다. 낮은 지지율에도 정권을 유지하는 모리 요시로에 반발하여, 야마자키 다쿠와 함께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 시 본회의에 결석하거나 찬성할 의향을 보였다(가토의 난). 그러나, 노나카 히로무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한 파벌 분열 공작으로 가토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 굉지회가 분열되었다. 가토파는 소파벌로 전락했으며, 측근인 시라카와 가쓰히코가 낙선하여 국정의 자리에 없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02년에는 사무소 대표에 의한 소득세법 위반의 책임을 지고 탈당, 의원직을 사직하여 총재 후보로서의 지위는 종료되었다.

2008년 6월 9일, 야마자키 다쿠와 아오키 간오의 중재로 모리 요시로와 회담하여, 가토의 난에 대해 "폐를 끼쳤다"고 사죄했다[25]. 8월에는 가토의 난을 되돌아보며, 가토에게 기대를 걸었던 젊은이에 대해 "사죄 행각이라고 칭하며 전국 65곳을 돌며 메일을 보내준 사람들과 이야기했다"고 말했다[26].

과거 보수 본류 파벌인 굉지회의 흐름을 잇는 3파벌(아소파・고가파・타니가키파) 간에 굉지회 재결집 구상(대굉지회 구상・중굉지회 구상)이 제기되는 가운데, 가토는 파벌 분열의 원인을 만든 장본인이었고, 아소・고가 양파 중에는 가토에게 불신감을 품고 있는 자도 있었다. 2008년 1월 16일의 타니가키파와 고가파의 합류의 정식 합의에 관해서는, 합류를 보고한 타니가키에게 "목에 걸려 있던 가시가 빠진 느낌이다. 매우 안심하고 있다"고 합류를 환영했지만, 자신의 파벌에의 복귀에는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이후에도 무파벌로 활동했다[27]

과거 가토와 야마자키, 고이즈미의 맹우 관계는 세 사람의 머리글자를 따서 Y(야마자키) K(가토) K(고이즈미)로 YKK로 불렸다. 다케시타 파벌 지배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세 사람은 뜻을 같이했다. 가토의 난 이후에도 세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었지만, 3명 중 가장 총리에 가깝다고 여겨졌던 가토가 의원 사직 등으로 힘을 잃어가는 한편, 고이즈미가 총리가 되는 등 상황이 변하면서 가토가 고이즈미의 정책을 비판하게 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야마자키를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가토는 하시모토 정권 하에서 간사장 요직에 취임하여, 포스트 하시모토의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다케시타 파벌(당시, 오부치 파벌)의 유력자로부터 총재로 추대되기도 했지만, 다케시타 파벌의 영향력을 받은 총재는 안 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포스트 하시모토의 유력 후보였으며, 간사장 시대에는 다케시타 파벌과 관계를 구축했지만, 총재는 다케시타 파벌의 영향을 받지 않는 형태로 취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공언했다. 한때 N(나카무라 키시로)를 더해 '''NYKK'''라고도 불렸다.

2006년 여름,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 총재 선거 출마 의향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번 '에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했다. 아베 정권과도 거리를 두었지만,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 패배를 계기로 비판을 강화했다. 고가 마코토, 야마자키 타쿠와 함께 "신 YKK"로서 회합을 거듭하며, 테러 특수 조치법의 기한 만료를 목표로 타도 내각에 움직이고, 아소 타로 이외의 총재 후보를 옹립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고 여겨졌지만[28], 갑작스러운 아베의 사임으로, 이어진 당 총재 선거에서 신 YKK는 후쿠다 야스오 지지로 흘러 들어갔다. 후쿠다 야스오 내각의 정치 자세에 지지를 표명했다.

2008년, 야마자키 타쿠와 함께 가메이 시즈카, 칸 나오토와 회합을 거듭하며, 4명이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등 총선 전후에 예상되는 정계 재편을 계기로 정치적 영향력 회복을 노리고 있다는 추측도 나왔다(YKKK). 이러한 가토, 야마자키의 동향에 대해, "'옛날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같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게 하고 싶지 않다"(중의원 의원 나카노 마사시)는 비판도 있었다[29]

3. 4. 오자와 이치로와의 관계

가토는 같은 자유민주당 개혁파인 오자와 이치로와 때로는 어려운 관계를 맺었는데, 오자와는 다나카/다케시타 주류 파벌 내에서 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1993년, 오자와는 자민당에 남는 대신 당에서 분리되어 일본신생당을 창당했다. 이는 가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배신으로 여겨졌다. 가토가 2000년에 비슷한 입장에 처했을 때, 그는 반대파로 넘어갔다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다. 90년대 후반, 자민당이 오자와의 자유당과의 합병을 고려했을 때, 가토는 오자와를 자민당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가토와 오자와는 경제 및 정치 개혁에 대한 매우 유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종종 숙적으로 묘사된다(외교 정책에서 가토는 오자와보다 다소 덜 강경하며, 일본의 보다 신중한 국제적 역할을 옹호한다).

3. 5. 스캔들

가토는 정치 경력 동안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수년간 명성에 흠집이 생겼다. 2002년에는 비서 사토 사부로의 탈세 의혹이 불거졌는데, 사토는 공공 계약을 원하는 회사에 가토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토 소비세"를 부과했다. 사토는 또한 1억 엔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았다. 가토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지만, 그의 승인 없이 그의 사무실에서 그렇게 광범위한 부패가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후 가토가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정된 자금으로 도쿄 아파트의 임대료를 지불한 사실이 드러나자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2003년 11월, 가토는 스캔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정계를 떠났다가 무소속으로 국회에 복귀하여, 자민당에 고위 간부로 재입당했다.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 당시, 일본 공산당이 관저의 내부 문서를 입수하여 가토가 내각관방보상비를 여야 정치가가 주최하는 파티 티켓 구매, 회식, 양복 구매 비용, 출신 고등학교 동창회비에 사용한 것, 나아가 사적으로 유용했다고 폭로했다[51]. 다만, 가토 본인은 부인하고 있다.

3. 6. 방화 사건

2006년 8월 15일, 가토 고이치의 쓰루오카에 있는 자택 옆집과 사무실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 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61주년 기념일이었다. 수사 결과 방화로 결론지어졌으며, 용의자는 2006년 9월에 기소될 예정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용의자는 극우 단체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가토의 자택에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3. 7. 정계 은퇴

2012년 12월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야마가타 3구에서 무소속인 사카타 시장 아베 주이치에게 패배하며 의석을 잃은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낙선 후에도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 1월에는 일중우호협회 회장 및 동 협회 방중단 단장으로서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일중우호협회 명예 고문·동 협회 방중단 명예 단장)와 전 방위청 장관 나카타니 겐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일우호협회 회장 탕자쉬안과 회담했다.[14] 2013년 2월에는 무라야마 등과 함께 총리 관저에서 총리 아베 신조를 면회하여 탕과의 회담 내용 등을 보고했다.

같은 해 4월, 후원회 관계자들과의 모임에서 지역에서 사설 비서 역할을 맡고 있는 셋째 딸 가토 아유코를 후계자로 지명하며 사실상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15] 가토 고이치 후원회는 지속적으로 가토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다. 같은 해 6월 26일, 쓰루오카 시내에서 약 200명이 참석하여 "가토 아유코 씨를 격려하는 모임"이 개최되었고, "가토 아유코 후원회"가 새롭게 발족했다. 제46회 중의원 총선거에서의 낙선 이후에는 지지 조직이 약화되어 비서는 전원 가토를 떠났다.[16]

4. 사망

2016년 9월 9일 0시 45분경, 가토 고이치는 폐렴으로 도쿄 시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77세였다. 2014년 여름 임팔 작전에서 순직한 병사들의 위령을 위해 고가 마코토와 함께 미얀마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쓰러져 태국의 한 병원에 입원 후 일본으로 돌아와 요양 생활을 이어갔다.[17][18]

장례식은 자민당과 가토 가문 합동으로 거행되었으며, YKK 멤버였던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비롯해 아베 신조, 아소 다로,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이시하라 노부테루, 마루카와 타마요 등 당시 내각 인사들, 모리 요시로, 아오키 미키오, 노나카 히로무, 고가 마코토 등 가토와 정치적 궤를 함께했던 인물들, 그리고 오자와 이치로, 시이 가즈오, 쓰지모토 키요미, 간 나오토 등 야당 인사들과 주일본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청융화를 포함하여 1,300여 명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9][20][21]

사후, 일본국 정부는 가토에게 정3위를 추서하고 욱일대수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22][23]

가토는 생전에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며 일본의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한다고 믿었다.[18][31] 2014년 신문 아카하타에 기고하여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방침에 대해 징병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고노 담화 재검토 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32]

또한 가토는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 재임 시절인 1992년, 일왕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성사시켜 톈안먼 사건 이후 서방의 경제 제재로 어려움을 겪던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1994년에는 자민당 정조회장 시절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을 방문하여 "아시아 역사적 진실은 단 하나"라는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한편, 가토는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지만, 과거 조선총련 관련 인물과의 친분, 그리고 "납치 피해자를 북한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는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은 피해자 가족과 일본 정부의 비판을 받았으며,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유괴범에게 돌려보내는 부모가 있는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37][38][40]

5. 정치적 입장 및 활동

가토 고이치는 자유민주당의 정치인으로,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활동을 보여왔다.

2014년 6월 27일, 야마자키와의 회식 자리에서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며 "9조가 일본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고 발언했다.[18][31] 또한, 일본 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에 기고하여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방침에 대해 "징병제까지 갈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의 재검토를 추진하려던 아베 신조를 비판했다.[32]

미야자와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임하던 1992년 10월에는 가네마루 신 등의 지원을 받아 일왕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당시 1989년 톈안먼 사건으로 서방 주요국들이 중국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 상황에서, 중국 측의 요청에 따른 일왕 방문은 국제적인 경제 제재 해제에 크게 기여했다. 첸치천,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회상록에서 이 방문이 서방 동맹의 가장 약한 고리인 일본을 이용한 결과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2013년 2월, 중국 해군해상자위대 호위함에 대한 "화기 관제 레이더 조사 문제"와 관련하여 "정말로 중국이 한 걸까…?" 등의 신중한 태도를 보여 일본국 정부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가토 고이치는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했지만, 과거에는 북한에 대해 옹호적인 발언을 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가토는 조선총련의 외교 부문을 담당하는 국제국 출신인 허종만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008년 7월 7일, 일본 BS 방송 프로그램에서 "납치 피해자는 북한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는 발언을 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김정일을 "저 나라는 일종의 천황 폐하와 같은 포지션의 인물"이라고 칭하기도 했다.[37][38] 이러한 발언에 대해 납치 피해자 가족회와 "구하는 모임"은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하며 강하게 비판했고, 당시 아베 신조 또한 가토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38][40] 납치 피해자의 아버지인 지무라 타모츠 역시 가토에게 항의문을 보내 그의 태도를 강하게 규탄했으며,[41] "납치 문제를 생각하는 초고 전국 지방 의원 모임"은 가토의 의원 사직을 요구하기도 했다.[42] 논란이 거세지자 가토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해명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39]

5. 1. 한일 관계

1992년 7월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으로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세부 사항은 논하고 싶지 않지만, (위안부 측이) 강제 연행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이 맞을 것이다"라고 일본 측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43]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사물의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난징 대학살도 (희생자는) 30만 명이라는 사람과 3천 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3천 명이라도 일반 시민학살했다면, 학살당한 쪽은 학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부분을 별로 이런저런 말로, 자세하게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44] 라고 발언했다.

1994년 8월, 자민당 정조회장 시절에는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을 방문하여 "여기에 오는 것은 오랜 소망이었다", "내년은 종전 50주년. 일본에서는 어떻게 50주년을 맞이해야 할지 논의하고 있으며, 중일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된 루거우차오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의의가 깊다"라고 말했다. 외무 관료 시절 하버드 대학교 유학 당시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기 전 1년"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것을 언급하며 "아시아 역사적 진실은 단 하나 (亞州歴史的真実只有一個)"라고 적어 항일 기념관 관장에게 헌정했다.

'한일 과거사 해결과 미래를 향한 평화의원회의'를 만들어 과거사 문제 해결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한일 병합 100주년을 맞아 일본 정부의 충분한 배상을 촉구했다.

5. 2. 헌법 9조

2014년 6월 27일, 야마자키와 회식 자리에서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네"라고 답했으며, "한 글자 한 글자도요?"라는 질문에는 "9조가 일본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고 답했다는 증언이 있다.[18][31]

또한, 5월 18일자 일본 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 일요판에 전 자민당 간사장임에도 기고했다.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방침에 대해 "징병제까지 갈 수 있다"며 반대를 호소하는 한편,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의 재검토를 추진하려던 아베 신조를 비판했다.[32]

5. 3. 중국 관련 발언

1992년 10월, 미야자와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임하며 가네마루 신 등의 지원을 받아 일왕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당시 1989년 톈안먼 사건으로 서방 주요국들이 중국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 상황에서, 중국 측의 요청에 따른 일왕 방문은 국제적인 경제 제재 해제에 크게 기여했다. 첸치천,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회상록에서 이 방문이 서방 동맹의 가장 약한 고리인 일본을 이용한 결과였다고 술회했다.

2013년 2월, 중국 해군해상자위대 호위함에 대한 "화기 관제 레이더 조사 문제"와 관련하여 "정말로 중국이 한 걸까…?" 등의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중국 해군의 화기 관제 레이더 조사를 뒷받침하는 영상이나 사진 등의 증거가 있다는 일본국 정부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5. 4. 북한 문제

가토 고이치는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북한에 대해 옹호적인 발언을 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가토는 재일 한국인 단체 조선총련의 외교 부문을 담당하는 국제국 출신인 허종만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008년 7월 7일, 일본 BS 방송 프로그램에서 "납치 피해자는 북한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는 발언을 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오늘날의 북일 협상 정체의 원인이 일본 정부가 납치 피해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7][38] 또한, 김정일을 "저 나라는 일종의 천황 폐하와 같은 포지션의 인물"이라고 칭하기도 했다.[38]

이러한 발언에 대해 납치 피해자 가족회와 "구하는 모임"은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5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다면 '자신의 의사로 돌아갔다'고 말하게 되고 '납치 문제는 해결 완료'라는 북한의 주장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며 가토의 발언을 "무견식의 극치"라고 맹비난했다.[38]

논란이 거세지자 가토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니시카와 노리오와의 대론 프로그램에서의 발언 전후 맥락을 게재하며 해명에 나섰다.[39] 그는 자신의 발언이 북한에 "일본은 약속을 어겼다"는 불신감을 심어주어 현재의 협상 정체의 원인이 되었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아베 신조는 "유괴된 아이가 돌아왔는데, 유괴범에게 돌려보내는 부모가 있는가"라며 가토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40] 그는 일본이 납치 피해자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낸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으며, "일본이 약속을 어겼다는 것은 북한의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납치 피해자의 아버지인 지무라 타모츠 역시 가토에게 항의문을 보내 "귀하는 그래도 일본인인가"라고 질타하며 그의 태도를 강하게 규탄했다.[41] 또한, 납치 문제 해결에 힘쓰는 약 200명의 지방 의원들로 구성된 "납치 문제를 생각하는 초고 전국 지방 의원 모임"은 가토의 의원 사직을 요구하기도 했다.[42]

6. 인물 및 평가

가토 고이치는 중도진보 성향의 정치인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지지했다. 개혁적인 성향으로 당내 보수 세력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2010년 8월 19일, 한일 병합 100년을 계기로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한국인과 그 자손들에게 일본 정부의 충분한 배상을 촉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일 과거사 해결과 미래를 위한 평화 의원 회의"에 민주당의 사이토 쓰요시 중의원 의원, 도이 류이치 중의원 의원, 스토 노리히코 중의원 의원, 아이하라 구미코 참의원 의원, 곤노 아즈마 참의원 의원, 나타니야 마사요시 참의원 의원, 일본 공산당의 야마시타 요시유키 참의원 의원, 사회민주당의 아베 도모코 중의원 의원, 사회민주당 당수인 후쿠시마 미즈호 참의원 의원, 무소속의 이토카즈 게이코 참의원 의원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 의원 중 유일하게 자신의 대리인'''을 참가시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과 함께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의 위법성, 전후 보상과 위안부 문제, 재일 한국인의 지방 참정권 문제 등의 해결 방안에 대해 논의하며 긍정적인 행보를 보였다.

방위청 장관 시절, 자위관이나 방위 관료의 보고보다 농림수산 관료의 보고를 듣는 것을 우선시했다. 방위 시설청장으로서 가토를 보좌한 사사 아쓰유키는 저서 『나를 지나간 정치인들』에서 "가토 방위청 장관에게는 국방·안전 보장보다 야마가타의 쌀 문제가 우선 순위로 높았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

1992년 10월까지 일본의 정치가는 기자 회견을 할 때 착석하여 기자 회견 (소위 착석형 기자 회견)을 했지만, 1992년 10월 30일에 관방 장관이었던 가토 고이치가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처음으로 서서 기자 회견 (소위 기립형 기자 회견)을 했다. 이는 지지자로부터 "앉아 있으면 텔레비전 화면이 좋지 않다" 등이라고 지적받은 것을 계기로 가토가 행동에 옮긴 것이 시작이었다. 가토가 기립형 기자 회견을 한 이후, 다른 일본의 정치인들도 기립형 기자 회견을 하게 되었다.[2]

관방 장관 시절, 정례 기자 회견이나 반 기자와의 간담회 때 중요한 정보를 기자에게 일절 누설하지 않고 "그것은 ○○성에 물어보세요" 등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기자들로부터 "양철"이라고 불렸다.[3]

당 간사장 시절 1996년, 전년의 도쿄 협화·안전 2신조의 문란 경영과 관련된 대장성 관료에 대한 접대 문제나 다이와 은행 뉴욕 지점의 불상사에 이어, 주택 금융 전문 회사 국회가 진행 중이었고, 구 대장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4일, 『JNN 보도 특집』 프로그램에서 "금융과 증권은 가능한 한 자유화하고, 대장성 은행국·국제 금융국·증권국을 금융청으로 분리하여, 일본 은행과 함께 오사카로 가져간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발언을 듣고, 다음날 신문 각 지가 "대장성의 권한 분산을 강조"라고 크게 다루었다. 다하라 소이치로는 이를 일련의 대장성 개혁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4]

자신의 저서 등에서 "2ch 유저"라고 공언했던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2ch 유저"를 공언하고 있는 국회의원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아소 다로가 있다.[5]

세이게이 대학 종합연구소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6]

7. 주요 저서


  • 『강한 리버럴』 분게이슌주、2007년 6월、ISBN 4163692401.
  • 『새로운 일본의 모습』 다이아몬드사、2005년 11월、ISBN 4478180431.
  • 『지금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신세기 일본의 설계도』 고단샤、1999년 8월、ISBN 4062098733.
  • 『일본의 정치 : 현장 보고 : 강연과 토론』 메이지가쿠인 대학 입법 연구회 편、신잔사 출판、1995년 5월、ISBN 4797250011.
  • 『테러의 진범』 고단샤、2006년 12월、ISBN 4062137380.


(공저)

  • 『창조하는 리버럴』 신센샤、2008년 11월、ISBN 9784787708175. - 강상중과의 공저、다카하시 아이코 편집.


(번역)

  • 『미소 핵 군축 교섭 : 성공을 향한 걸음』 스트로브 탤벗 저、사이마루 출판회、1990년 3월、ISBN 4377308408.

8. 선거 이력

1972년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65,98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21.15%였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77,496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24.16%였다.

1979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74,382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23.10%였다.

1980년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08,806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33.44%였다.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03,17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34.57%였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12,194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33.30%였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03,71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30.39%였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28,784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44.29%였다.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4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12,03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65.77%였다.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4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31,181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72.14%였다.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3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37,206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58.92%였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3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59,486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69.58%였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3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30,502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56.86%였다.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가타 3구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70,303표를 얻어 낙선하였다. 당시 득표율은 35.24%였다.

참조

[1] 뉴스 加藤紘一 自民党元幹事長 死去 http://www3.nhk.or.j[...] NHK 2016-09-10
[2] 웹사이트 愛知県弁護士会会報「SOPHIA」平成18年5月号 憲法問題シリーズ第8回 加藤紘一氏の語る改憲論~憲法9条と安全保障~ https://www.aiben.jp[...] 愛知県弁護士会 2021-03-25
[3] 서적 情と理<上> 講談社
[4] 웹사이트 加藤紘一――総理になり損ねた男と、彼を追い落とした男たちの真情 {{!}} 一故人 {{!}} 近藤正高 https://web.archive.[...] ピースオブケイク 2020-01-01
[5] 문서 自民党という病
[6] 문서 田中角栄とその時代
[7] 뉴스 加藤紘一・元自民党幹事長が死去 00年に「加藤の乱」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6-09-13
[8] 문서 自民党本流と保守本流
[9] 뉴스 加藤紘一・元自民党幹事長が死去、77歳 「YKK」「加藤の乱」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6-09-13
[10] 뉴스 【歴史戦 第1部 河野談話の罪(1)後半】「奴隷狩り」というフィクションから始まった誤解の連鎖、日本攻撃の材料に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6-09-13
[11] 뉴스 加藤氏が自民離党 「党に迷惑」議員辞職は拒否 https://www.jcp.or.j[...] 2023-08-22
[12] 뉴스 自民総裁選の底流 安倍政治の行方1 2006-09-05
[13] 뉴스 加藤紘一氏が山形3区で落選 健康不安説払拭できず http://www.47news.jp[...] 全国新聞ネット 2012-12-17
[14] 뉴스 尖閣問題で意見交換 菅官房長官「大いに話を」 日中友好協会が訪中 https://web.archive.[...] MSN産経ニュース 2013-01-28
[15] 뉴스 加藤紘一氏、事実上の引退…後継に三女 http://www.yomiuri.c[...] 読売新聞 2013-04-18
[16] 뉴스 公認目指す加藤紘一氏の三女…父の秘書全員去る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013-06-27
[17] 웹사이트 「69回目の夏」に~加藤紘一氏、ミャンマーへの旅【2014年9~10月号】 https://www.tbs.co.j[...] TBSテレビ 2016-09-29
[18] 뉴스 加藤紘一さんはミャンマー慰霊の旅で倒れた 最強リベラルの「壮絶な戦死」 毎日新聞社 2016-09-29
[19] 웹사이트 加藤紘一氏への弔辞で山崎拓氏「YKK」というネーミングは君の発案」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6-09-15
[20] 웹사이트 【加藤紘一氏合同葬】YKKの山崎拓氏「『加藤の乱』止めなかった僕が悪かった。すまん」 小泉純一郎元首相「惜しい人を亡くした。残念」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6-09-15
[21] 웹사이트 加藤紘一氏の合同葬、安倍首相や小泉元首相参列 http://www.yomiuri.c[...] 読売新聞 2016-09-15
[22] 뉴스 故加藤紘一氏に旭日大綬章 http://www.jiji.com/[...] 時事通信 2016-10-05
[23] 간행물 官報 2016-01-20
[24] 웹사이트 加藤紘一氏死去 上れなかった政権の坂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6-09-13
[25] 뉴스 【政治家の隠れ家はここだ】「加藤の乱」から8年…大物政治家が和解した料亭 http://sankei.jp.msn[...] 2016-08-13
[26] 간행물 AERA 2008-08-11
[27] 뉴스 時事通信 2008-01-17
[28] 뉴스 産経新聞 2007-09-24
[29] 웹사이트 昔の名前で出ています!? http://www.nakano-ma[...] 2016-10-23
[30] 뉴스 不安な加藤氏の外交的言動 日米同盟弱体化は破局の道 産経新聞 1998-07-14
[31] 웹사이트 【加藤紘一氏合同葬】山崎拓氏が弔辞で明かした秘話 「君は本当に憲法9条改正に反対か」「うん」「一言一句もか」「9条が日本の平和を守っているんだよ」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6-09-15
[32] 뉴스 加藤、古賀、野中氏…元自民幹部 宿敵「赤旗」に続々登場で首相批判+ MSN産経ニュース
[33] 웹사이트 第173回国会 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 第2号 https://kokkai.ndl.g[...] 衆議院 2016-09-15
[34] 웹사이트 第174回国会 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 第7号 https://kokkai.ndl.g[...] 衆議院 2016-09-15
[35] 뉴스 OB外交に自民から苦言「邪魔するな」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6-09-13
[36] 웹사이트 加藤紘一 元自民党幹事長 記者会見 https://www.jnpc.or.[...] 2021-09-08
[37] 뉴스 拉致被害者「戻すべきだった」=日朝交渉停滞の原因-自民・加藤氏 http://www.jiji.com/[...] Yahoo Japan 2008-07-07
[38] 뉴스 加藤氏「拉致被害者を北朝鮮に返すべきだった」発言 家族会・救う会が抗議声明 https://web.archive.[...] 2008-07-09
[39] 웹사이트 加藤紘一オフィシャルサイト http://www.katokoich[...]
[40] 뉴스 安倍前首相「加藤氏の考えは間違い」 - 政治ニュース : nikkansports.com http://www.nikkanspo[...] 日刊スポーツ 2008-07-17
[41] 뉴스 「加藤紘一氏は日本人か」地村さんが抗議FAX http://sankei.jp.msn[...] 産経デジタル 2008-07-11
[42] 뉴스 「北に返すべき」加藤発言に地方議員ら猛反発 http://news.nifty.co[...] NIFTY 200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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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뉴스 韓国国会議員、日本側に慰安婦問題などの議論要求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46] 뉴스 【阿比留瑠比の極言御免】防衛庁長官時代から自衛隊を“軽侮”していた加藤紘一氏 https://www.zakzak.c[...] 2014-08-31
[47] 뉴스 "[政界メモ] 加藤官房長官の米国流会見、やっと地に足着く?" 読売新聞 1992-10-30
[48] 뉴스 お立ち台 閣僚の「立ったまま記者会見」(in.short) AERA 1993-04-13
[49] 뉴스 〈加藤紘一氏死去〉保守本流 地方から問う http://www.kahoku.co[...] 河北新報 2016-09-11
[50] 서적 巨大な落日 大蔵官僚敗走の八百五十日 文藝春秋 1998-08-01
[51] 뉴스 つかみ金的流用のカラクリ示す政府の官房機密費「執行の基本方針」 https://www.jcp.or.j[...] しんぶん赤旗 2002-06-27
[52] 웹사이트 裁判員制度と量刑について考えてみる http://www.katokoich[...]
[53] 간행물 신초45 新潮社 1999
[54] 간행물 신초45 新潮社 1999
[55] 뉴스 가토 고이치 씨 서거 77세 2000년 「가토의 난」 http://www.kahoku.co[...] 가호쿠 신보 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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