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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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 시게루는 1901년 사가현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일본 자유당, 일본진보당, 민주당을 거쳐 자유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노동상, 내각관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건설상과 내각관방장관을 지냈고, 1976년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여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그는 오키나와 반환, 중일 국교 정상화 등 굵직한 현안 해결에 기여했으며, 실용주의적이고 온건한 정치 스타일로 '명 의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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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시게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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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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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保利 茂 |
로마자 표기 | Hori Shigeru |
출생 | 1901년 12월 20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사가현히가시마쓰우라군 가라쓰시 |
사망 | 1979년 3월 4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미나토구니시신바시 (도쿄 지케이카이 의과대학 부속 병원) |
학력 | 주오 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 졸업 |
주요 경력 | |
전직 | 호치 신문 기자 도쿄니치니치 신문 기자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중의원 의원 비서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농상대신 비서 |
소속 정당 | 무소속 → 일본진보당 → 민주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호리 G → 후쿠다파) |
배우자 | 호리 유타카 |
자녀 | 장남: 호리 고스케 (제54-55대 자치대신) |
칭호/훈장 | 종2위 [[파일:JPN Toka-sho BAR.svg|40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경제학사 (주오 대학) |
의정 활동 | |
직책 | 제59대 중의원 의장 |
임기 시작 | 1976년 12월 24일 |
임기 종료 | 1979년 2월 1일 |
직책 2 | 제37대 행정관리청 장관 |
내각 | 제2차 다나카 제1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2 | 1973년 11월 25일 |
임기 종료 2 | 1974년 7월 16일 |
직책 3 | 제8・33-34대 내각관방장관 |
내각 3 |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제3차 사토 내각 |
임기 시작 3 | 1951년 12월 26일 - 1952년 10월 30일 1968년 11월 30일 |
임기 종료 3 | 1971년 7월 5일 |
직책 4 | 제29대 건설대신 제9대 긴키권정비장관 제5대 주부권개발정비장관 제18대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내각 4 |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4 | 1967년 11월 25일 |
임기 종료 4 | 1968년 11월 30일 |
직책 5 | 제19대 농림대신 |
임기 시작 5 | 1953년 6월 22일 |
임기 종료 5 | 1954년 12월 10일 |
내각 5 | 제5차 요시다 내각 |
직책 6 | 제5대 노동대신 |
내각 6 | 제3차 요시다 제2차 개조 |
임기 시작 6 | 1950년 5월 6일 |
임기 종료 6 | 1951년 12월 26일 |
기타 직책 1 | 중의원 의원 사가현 전현구 당선 횟수 12회 |
임기 7 | 1944년 12월 - 1947년 3월 31일 1949년 1월 24일 - 1963년 10월 23일 1967년 1월 30일 - 1979년 3월 4일 |
기타 직책 2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14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총재: 사토 에이사쿠) |
임기 8 | 1971년 6월 - 1972년 7월 |
기타 직책 3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7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총재: 이케다 하야토) |
임기 9 | 1960년 - 1961년 |
2. 생애
호리 시게루는 1901년 12월 20일 사가현 가라쓰시에서 태어났다.[3] 그는 1924년 주오 대학을 졸업했다.[3]
=== 학창 시절과 기자 생활 ===
호리 시게루는 1901년 12월 20일 사가현 히가시마쓰우라군 오니즈카촌(지금의 가라쓰시)의 영세 농가에서 태어났다.[3]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고등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일했다.[5] 17세에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 대학 교수 니시오카 다쓰로의 보증으로 전문학교입학자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학교 입학 대신 주오 대학 경제학부 야간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3]
주오 대학 졸업 후, 호치 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제2차 호헌 운동, 가토 다카아키 연립 내각 출범 등 격동의 시대를 취재했다.[5] 호리는 "취재 기자로서는 제법 유능했다. 나는 평생 신문기자로서 붓을 들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5] 이후 도쿄니치니치 신문(지금의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등에서 기자 생활을 이어갔으나,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사내 항쟁으로 인해 퇴사했다.
=== 정계 입문 ===
1934년 7월, 친분이 있던 야마자키 다쓰노스케가 농림대신에 취임하자 그의 비서가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5][6] 1944년 12월, 고향인 사가현에서 중의원 보궐선거가 시행되자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5][6]
종전 후,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일본자유당에 참가하려 했으나 야마자키의 권유로 일본진보당에 입당했다.[6]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공직 추방의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치러진 총선에서 당선되었다.[6]
당 총재였던 마치다 주지도 공직 추방을 당하자 시데하라 기주로가 후임 총재가 되었는데, 호리는 이누카이 다케루 등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반시데하라 파벌인 신진회를 결성하고 아시다 히토시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창당에 참여했다.[6] 1947년 2월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상공정무차관이 되었으며,[6] 3월에 진보당이 해산하자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같은 해 4월에 치러질 총선 유세 중 공직 추방을 당했다가[6] 이듬해 해제되었다.[6] 1948년 4월에는 정치 자금 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 환문되었다.[7]
=== 요시다 내각 ===
1950년 민주당이 분열하자 호리 시게루는 민주당 연립파를 구성한 뒤 요시다 시게루의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여 자유당 창당에 함께했다.[3] 호리는 요시다로부터 능력과 끈기 있는 성격을 높이 평가받아[3] 같은 해 5월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에서 노동상으로 첫 입각했고, 1951년 12월에는 내각관방장관으로 발탁되었다.[4][3] 요시다는 호리에게 "단순한 보좌역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신이 만약 총리대신이었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서 일해달라"라며 격려했다.
요시다 내각에서 호리는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히로카와 고젠과 함께 '4봉행'으로 불렸다. 마쓰노 쓰루헤이가 공직 추방에서 해제돼 자유당에 들어와 요시다의 정치 고문이 되자, 호리는 두 사람의 연락책도 맡았다. 마쓰노 외에도 전전의 거물 정치인들이 공직 추방에서 조금씩 해제되면서 차례차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요시다에게 퇴진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오아사 다다오가 마쓰무라 겐조 등 옛 입헌민정당 계열 정치인들을 규합해 신정 클럽을 만든 뒤 국민민주당과 합당해 1952년 2월에 개진당을 창당했다. 한편 자유당 내에서는 요시다가 하토야마파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요시다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마쓰노의 의견을 받아들여 불시 해산을 단행했다. 해산을 위한 준비는 호리에게 맡겼다.
1952년 8월 26일 임시국회가 소집되자 오노 반보쿠가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불과 이틀 뒤에 요시다는 갑자기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국 헌법」 제7조에 근거한 첫 해산으로 야당은 물론 자유당의 하토야마파도 반발했다. 해산을 사전에 알고 있던 건 호리, 이케다, 사토, 마쓰노 정도였으며 간사장 하야시 조지, 총무회장 마스타니 슈지, 그리고 오노조차도 요시다가 해산을 추진하는 걸 알지 못했다. 특히 의장으로 선출된 지 불과 3일밖에 되지 않은 오노는 격노하여 호리를 맹비난했다.
=== 요시다의 퇴진 이후 ===
1954년 조선 의옥 사건으로 제5차 요시다 내각이 불신임 위기에 처하자, 요시다 시게루는 퇴진했다. 이후 호리 시게루는 한동안 정계에서 멀어졌다.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된 후,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탄생하자 이에 참여했다. 사토파에 속했으며, 다음 해에 결성된 자민당 사가현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제1차 이케다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에 기용되었으나, 1963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1964년 총재 선거에서 이케다 하야토가 3선을 노리자, 호리는 사토 에이사쿠의 출마를 종용했다. 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요시다 시게루를 설득하면서까지 이케다와 사토의 중재에 나서면서, 호리는 다나카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케다는 3선에 성공했지만 후두암으로 곧 물러났고, 사토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1966년 8월, 사토는 개조내각을 꾸리면서 호리를 농림상으로 기용하고자 했으나, 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와 간사장 다나카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 사토 내각 ===
1967년 총선에서 10만 표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3] 그 해 11월 제2차 사토 내각 (제1차 개조)에서 건설상으로 취임했다.[3]
1968년 11월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개조)에서 두 번째 내각관방장관 임기를 시작했다.[3] 당시 66세였던 호리는 고령을 이유로 사퇴하려 했으나, 사토 총리는 "한 번 정도는 같이 고생해 주는 것도 좋잖아"라며 권유하여 관방장관직을 수락했다. 전임 관방장관인 기무라 도시오는 부장관으로 강등되어 호리를 보좌했고, 호리는 사실상 부총리급 대우를 받았다.[10] 호리는 통상적인 행정 사무는 기무라에게 맡기고 중요 과제에만 집중했다.
당시 사토 내각은 학생 운동을 진정시키고 안정된 국내 정세를 바탕으로 오키나와 반환에 주력하여 70년 안보를 무사히 넘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대학운영임시조치법 제정을 추진했다. 문부성 안은 자민당 내에서 학내 폭력 단속에 미흡하다는 반대에 부딪혔으나, 호리는 문부성 간부, 대학 당국자, 학생 대표 등과 협의하고, 고토다 마사하루 경찰청 장관, 하타노 아키라 경시총감과 협의하여 "다소 미온적이더라도 대학 당국의 자주적인 노력을 촉진하는 문부성 안으로 가자"라고 결단했다. 당내 반발을 억누르고 제출된 법안은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 8월 3일 국회를 통과했다.[8] 이후 학생 운동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1969년 11월 14일, 사토 총리의 방미에 맞춰 총리의 임시 수석 대리로 지명된다[9]。
1971년 7월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출범과 함께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다.[3] 간사장으로서 호리의 역할은 오키나와 반환 협정 국회 승인, 사토 총리의 원만한 퇴진과 후쿠다 다케오로의 정권 이양이었다. 그러나 참원선에서 야당 공투가 성공하여 자민당 의석이 감소하고, 시게무네 유조가 의장에서 물러나고 고노 겐조가 취임하는 과정에서 호리의 중재가 실패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0]
같은 달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방중이 발표되면서, 일본은 닉슨 충격을 경험했다. 일본 내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 여론이 높아지자, 호리는 비밀리에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중국 측은 이를 속임수라며 거부했다.[10]
=== 다나카 내각과 후쿠다 내각 ===
1972년 총재 선거에서 호리 시게루는 사토 에이사쿠의 뜻을 받아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다.[11] 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 파벌의 다수를 이끌고 총재 선거 출마를 시도하자 다나카 파벌이 결성되기 전에 파벌 내 비 다나카 지지 의원들을 규합하여 "슈잔 클럽"(호리 파벌)을 결성했다.[11] 그러나 다나카 지지를 막지 못하고 후쿠다는 낙선했으며, 총재 선거 후에 후쿠다 파벌에 합류했다.
1973년 11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에서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했다.[3]
1974년 7월에 치러진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미키 다케오가 환경청 장관을 사임했고, 후쿠다 다케오도 대장대신 사임 의사를 밝혔다.[11] 호리는 후쿠다의 사임을 만류했으나 후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호리도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임했다.[11] 그 해 말, 다나카 금맥 문제가 표면화되어 다나카가 퇴진하면서, 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와 함께 미키 다케오를 후임 총재로 추대하는 시나 재정을 이끌어냈다.[11] 이 과정에서 시나는 호리에게 잠정 내각을 맡길 것을 구상했고 가네마루 신이나 다무라 하지메는 아예 호리를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보였기에, 호리는 총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11]
미키 내각에서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회담하여 "호리 서한" 이후의 염원을 이루었다.[12]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미키 끌어내리기가 일어나자, 시나, 후나다 나카, 소노다 스나오 등과 함께 거당체제협의회를 결성해 미키 퇴진에 앞장섰다.[11]
호리는 미키의 후임으로 후쿠다를 추대하고자 했고, 가네마루 신의 중재하에 두 사람이 회담했다.[11] 이후 호리는 다나카 로쿠스케를 통해 오히라 마사요시 설득에 나섰고, 니시무라 에이이치를 통해 다나카의 동의도 얻었다.[11] 10월 2일, 호텔 퍼시픽 도쿄에서 호리, 후쿠다, 오히라, 소노다, 스즈키 젠코가 회동해 미키의 후임으로 후쿠다를 추대하되 2년 뒤에 오히라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합의, 즉 다이후쿠 밀약을 체결했다.[11]
=== 중의원 의장 ===
1976년 12월, 미키 다케오가 퇴진하고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호리는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재임 기간: 1976년 12월 24일 - 1979년 2월 1일)[3] 의장 재임 중 대화를 중시하는 원만한 국회 운영을 위해 노력했으며, 여야 백중세 상황 속에서도 야당은 호리의 중후한 인품에 경의를 표하며 국회 운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3]
자민당의 지지세가 회복되자 후쿠다파에서 중의원 해산을 통해 의석수를 늘려 재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2년 뒤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다이후쿠 밀약을 위배하는 것이었기에 호리는 해산을 만류했다.[3] 1978년 봄 무렵 해산 논의는 잦아들었지만, 이는 후쿠다에 대한 오히라의 불신을 키웠다.
1978년 8월,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3]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가 재선 도전을 선언하자, 호리는 "나는 2년 전의 일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라며 후쿠다를 냉대하고, 후쿠다 내각 2년 동안 간사장으로 재직한 오히라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당선을 지지했다.[3] 결국 다나카 가쿠에이파의 지원을 받은 오히라가 당선되었다.
=== 정계 은퇴와 사망 ===
1978년 11월, 호리 시게루는 간암으로 입원했다.[13] 다음 달 오히라 마사요시가 총재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라가 총재가 됐으니 내 사명은 끝났다"라고 말했다.[13] 12월 7일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를 위해 병중임에도 의장석에 앉아 사회를 봤으며, 1979년 1월 시정방침연설과 각 당 대표 질문이 끝나자 중의원 의장직을 사임했다.[13]
의장 퇴임 직후인 1979년 3월 4일, 심부전으로 도쿄도 미나토구 니시신바시의 도쿄지케이카이 의과대학 부속 병원에서 사망했다.[13] 향년 77세. 묘는 사가현 가라쓰시 야마모토의 만도쿠지에 있다. 법명은 쇼가쿠인 샤쿠 쇼우이.
문부대신, 자치대신을 지낸 중의원 의원 호리 고스케는 장남이다. 부총리, 자민당 부총재를 지낸 가네마루 신은 호리를 스승으로 받들어 한때 머리 모양까지 흉내 낼 정도로 경도했다고 한다.
2. 1. 학창 시절과 기자 생활
호리 시게루는 1901년 12월 20일 사가현 히가시마쓰우라군 오니즈카촌(지금의 가라쓰시)의 영세 농가에서 태어났다.[3]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고등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일했다.[5] 17세에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 대학 교수 니시오카 다쓰로의 보증으로 전문학교입학자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학교 입학 대신 주오 대학 경제학부 야간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3]주오 대학 졸업 후, 호치 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제2차 호헌 운동, 가토 다카아키 연립 내각 출범 등 격동의 시대를 취재했다.[5] 호리는 "취재 기자로서는 제법 유능했다. 나는 평생 신문기자로서 붓을 들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5] 이후 도쿄니치니치 신문(지금의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등에서 기자 생활을 이어갔으나,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사내 항쟁으로 인해 퇴사했다.
2. 2. 정계 입문
1934년 7월, 친분이 있던 야마자키 다쓰노스케가 농림대신에 취임하자 그의 비서가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5][6] 1944년 12월, 고향인 사가현에서 중의원 보궐선거가 시행되자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5][6]종전 후,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일본자유당에 참가하려 했으나 야마자키의 권유로 일본진보당에 입당했다.[6]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공직 추방의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치러진 총선에서 당선되었다.[6]
당 총재였던 마치다 주지도 공직 추방을 당하자 시데하라 기주로가 후임 총재가 되었는데, 호리는 이누카이 다케루 등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반시데하라 파벌인 신진회를 결성하고 아시다 히토시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창당에 참여했다.[6] 1947년 2월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상공정무차관이 되었으며,[6] 3월에 진보당이 해산하자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같은 해 4월에 치러질 총선 유세 중 공직 추방을 당했다가[6] 이듬해 해제되었다.[6] 1948년 4월에는 정치 자금 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 환문되었다.[7]
2. 3. 요시다 내각
1950년 민주당이 분열하자 호리 시게루는 민주당 연립파를 구성한 뒤 요시다 시게루의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여 자유당 창당에 함께했다.[3] 호리는 요시다로부터 능력과 끈기 있는 성격을 높이 평가받아[3] 같은 해 5월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에서 노동상으로 첫 입각했고, 1951년 12월에는 내각관방장관으로 발탁되었다.[4][3] 요시다는 호리에게 "단순한 보좌역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신이 만약 총리대신이었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서 일해달라"라며 격려했다.요시다 내각에서 호리는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히로카와 고젠과 함께 '4봉행'으로 불렸다. 마쓰노 쓰루헤이가 공직 추방에서 해제돼 자유당에 들어와 요시다의 정치 고문이 되자, 호리는 두 사람의 연락책도 맡았다. 마쓰노 외에도 전전의 거물 정치인들이 공직 추방에서 조금씩 해제되면서 차례차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요시다에게 퇴진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오아사 다다오가 마쓰무라 겐조 등 옛 입헌민정당 계열 정치인들을 규합해 신정 클럽을 만든 뒤 국민민주당과 합당해 1952년 2월에 개진당을 창당했다. 한편 자유당 내에서는 요시다가 하토야마파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요시다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마쓰노의 의견을 받아들여 불시 해산을 단행했다. 해산을 위한 준비는 호리에게 맡겼다.
1952년 8월 26일 임시국회가 소집되자 오노 반보쿠가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불과 이틀 뒤에 요시다는 갑자기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국 헌법」 제7조에 근거한 첫 해산으로 야당은 물론 자유당의 하토야마파도 반발했다. 해산을 사전에 알고 있던 건 호리, 이케다, 사토, 마쓰노 정도였으며 간사장 하야시 조지, 총무회장 마스타니 슈지, 그리고 오노조차도 요시다가 해산을 추진하는 걸 알지 못했다. 특히 의장으로 선출된 지 불과 3일밖에 되지 않은 오노는 격노하여 호리를 맹비난했다.
2. 4. 요시다의 퇴진 이후
1954년 조선 의옥 사건으로 제5차 요시다 내각이 불신임 위기에 처하자, 요시다 시게루는 퇴진했다. 이후 호리 시게루는 한동안 정계에서 멀어졌다.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된 후,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탄생하자 이에 참여했다. 사토파에 속했으며, 다음 해에 결성된 자민당 사가현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제1차 이케다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에 기용되었으나, 1963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1964년 총재 선거에서 이케다 하야토가 3선을 노리자, 호리는 사토 에이사쿠의 출마를 종용했다. 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요시다 시게루를 설득하면서까지 이케다와 사토의 중재에 나서면서, 호리는 다나카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케다는 3선에 성공했지만 후두암으로 곧 물러났고, 사토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1966년 8월, 사토는 개조내각을 꾸리면서 호리를 농림상으로 기용하고자 했으나, 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와 간사장 다나카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2. 5. 사토 내각
1967년 총선에서 10만 표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3] 그 해 11월 제2차 사토 내각 (제1차 개조)에서 건설상으로 취임했다.[3]1968년 11월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개조)에서 두 번째 내각관방장관 임기를 시작했다.[3] 당시 66세였던 호리는 고령을 이유로 사퇴하려 했으나, 사토 총리는 "한 번 정도는 같이 고생해 주는 것도 좋잖아"라며 권유하여 관방장관직을 수락했다. 전임 관방장관인 기무라 도시오는 부장관으로 강등되어 호리를 보좌했고, 호리는 사실상 부총리급 대우를 받았다.[10] 호리는 통상적인 행정 사무는 기무라에게 맡기고 중요 과제에만 집중했다.
당시 사토 내각은 학생 운동을 진정시키고 안정된 국내 정세를 바탕으로 오키나와 반환에 주력하여 70년 안보를 무사히 넘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대학운영임시조치법 제정을 추진했다. 문부성 안은 자민당 내에서 학내 폭력 단속에 미흡하다는 반대에 부딪혔으나, 호리는 문부성 간부, 대학 당국자, 학생 대표 등과 협의하고, 고토다 마사하루 경찰청 장관, 하타노 아키라 경시총감과 협의하여 "다소 미온적이더라도 대학 당국의 자주적인 노력을 촉진하는 문부성 안으로 가자"라고 결단했다. 당내 반발을 억누르고 제출된 법안은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 8월 3일 국회를 통과했다.[8] 이후 학생 운동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1969년 11월 14일, 사토 총리의 방미에 맞춰 총리의 임시 수석 대리로 지명된다[9]。
1971년 7월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출범과 함께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다.[3] 간사장으로서 호리의 역할은 오키나와 반환 협정 국회 승인, 사토 총리의 원만한 퇴진과 후쿠다 다케오로의 정권 이양이었다. 그러나 참원선에서 야당 공투가 성공하여 자민당 의석이 감소하고, 시게무네 유조가 의장에서 물러나고 고노 겐조가 취임하는 과정에서 호리의 중재가 실패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0]
같은 달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방중이 발표되면서, 일본은 닉슨 충격을 경험했다. 일본 내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 여론이 높아지자, 호리는 비밀리에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중국 측은 이를 속임수라며 거부했다.[10]
2. 6. 다나카 내각과 후쿠다 내각
1972년 총재 선거에서 호리 시게루는 사토 에이사쿠의 뜻을 받아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다.[11] 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 파벌의 다수를 이끌고 총재 선거 출마를 시도하자 다나카 파벌이 결성되기 전에 파벌 내 비 다나카 지지 의원들을 규합하여 "슈잔 클럽"(호리 파벌)을 결성했다.[11] 그러나 다나카 지지를 막지 못하고 후쿠다는 낙선했으며, 총재 선거 후에 후쿠다 파벌에 합류했다.1973년 11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에서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했다.[3]
1974년 7월에 치러진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미키 다케오가 환경청 장관을 사임했고, 후쿠다 다케오도 대장대신 사임 의사를 밝혔다.[11] 호리는 후쿠다의 사임을 만류했으나 후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호리도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임했다.[11] 그 해 말, 다나카 금맥 문제가 표면화되어 다나카가 퇴진하면서, 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와 함께 미키 다케오를 후임 총재로 추대하는 시나 재정을 이끌어냈다.[11] 이 과정에서 시나는 호리에게 잠정 내각을 맡길 것을 구상했고 가네마루 신이나 다무라 하지메는 아예 호리를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보였기에, 호리는 총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11]
미키 내각에서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회담하여 "호리 서한" 이후의 염원을 이루었다.[12]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미키 끌어내리기가 일어나자, 시나, 후나다 나카, 소노다 스나오 등과 함께 거당체제협의회를 결성해 미키 퇴진에 앞장섰다.[11]
호리는 미키의 후임으로 후쿠다를 추대하고자 했고, 가네마루 신의 중재하에 두 사람이 회담했다.[11] 이후 호리는 다나카 로쿠스케를 통해 오히라 마사요시 설득에 나섰고, 니시무라 에이이치를 통해 다나카의 동의도 얻었다.[11] 10월 2일, 호텔 퍼시픽 도쿄에서 호리, 후쿠다, 오히라, 소노다, 스즈키 젠코가 회동해 미키의 후임으로 후쿠다를 추대하되 2년 뒤에 오히라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합의, 즉 다이후쿠 밀약을 체결했다.[11]
2. 7. 중의원 의장
1976년 12월, 미키 다케오가 퇴진하고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호리는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재임 기간: 1976년 12월 24일 - 1979년 2월 1일)[3] 의장 재임 중 대화를 중시하는 원만한 국회 운영을 위해 노력했으며, 여야 백중세 상황 속에서도 야당은 호리의 중후한 인품에 경의를 표하며 국회 운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3]자민당의 지지세가 회복되자 후쿠다파에서 중의원 해산을 통해 의석수를 늘려 재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2년 뒤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다이후쿠 밀약을 위배하는 것이었기에 호리는 해산을 만류했다.[3] 1978년 봄 무렵 해산 논의는 잦아들었지만, 이는 후쿠다에 대한 오히라의 불신을 키웠다.
1978년 8월,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3]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가 재선 도전을 선언하자, 호리는 "나는 2년 전의 일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라며 후쿠다를 냉대하고, 후쿠다 내각 2년 동안 간사장으로 재직한 오히라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당선을 지지했다.[3] 결국 다나카 가쿠에이파의 지원을 받은 오히라가 당선되었다.
2. 8. 정계 은퇴와 사망
1978년 11월, 호리 시게루는 간암으로 입원했다.[13] 다음 달 오히라 마사요시가 총재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라가 총재가 됐으니 내 사명은 끝났다"라고 말했다.[13] 12월 7일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를 위해 병중임에도 의장석에 앉아 사회를 봤으며, 1979년 1월 시정방침연설과 각 당 대표 질문이 끝나자 중의원 의장직을 사임했다.[13]의장 퇴임 직후인 1979년 3월 4일, 심부전으로 도쿄도 미나토구 니시신바시의 도쿄지케이카이 의과대학 부속 병원에서 사망했다.[13] 향년 77세. 묘는 사가현 가라쓰시 야마모토의 만도쿠지에 있다. 법명은 쇼가쿠인 샤쿠 쇼우이.
문부대신, 자치대신을 지낸 중의원 의원 호리 고스케는 장남이다. 부총리, 자민당 부총재를 지낸 가네마루 신은 호리를 스승으로 받들어 한때 머리 모양까지 흉내 낼 정도로 경도했다고 한다.
3. 정치적 유산 및 평가
호리 시게루는 일본 현대 정치사의 격동기에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국가적 과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13] 특히, 오키나와 반환, 대학 분쟁 수습, 중일 국교 정상화 등 난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과 정치력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의 '요시다 학교' 출신으로, 실용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며 정당 간 협력을 중시했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지만, 합리적이고 온건한 자세로 국회 운영을 이끌어 '명 의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3]
"모략가"로 불리며 전형적인 "밀실형", "조정형" 정치인이었으며, 배후에 헌신했다.[13] 그 시점의 정국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보수 본류를 유지하려 했다. 한편, 욕심 없고 담담한 성격으로 사가현 출신다운 "하가쿠레" 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받았다. "백 가지 술책은 한 가지 성실함만 못하다"를 좌우명으로 삼아 정치 활동에 매진했다. "침대 기술자", "책사"로도 평가받았지만, 만년에는 성실하고 중후한 인품이 높이 평가되어 여야를 넘어선 인망을 모아 "명 의장"으로 불렸다.[13]
파벌을 만들지 않고 "정계의 조역"을 자임해왔다. 재계 인사와는 신일철의 나가노 시게오나 일본정공의 이마자토 히로키와 특히 친했고, 두 사람을 간사로 한 재계 인사 모임 "니카카이"를 가졌다. 취미는 골프, 마작, 바둑으로, 호리의 주변에는 인망을 좇는 쓰보카와 신조, 쓰카하라 슌페이, 호소다 키치조, 가네마루 신 등 마작 그룹의 측근들이 항상 모여 있었다.[13]
그의 정치 역정은 대한민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불안 속에서 실리 외교와 국민 통합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호리 시게루의 리더십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4.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4년 보궐선거 | 사가현 제2구 | 무소속 | 무투표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46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일본진보당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49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민주당 | 48,686표 | 12.5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2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당 | 62,737표 | 14.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3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당 | 55,589표 | 13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5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당 | 56,165표 | 13.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8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2,497표 | 1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2,224표 | 1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53,128표 | 12.5 | 6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1967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103,863표 | 2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9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116,173표 | 2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97,704표 | 21.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총선 | 사가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90,208표 | 18.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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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peakers and Vice-Speakers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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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2]
웹사이트
鈴木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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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保利 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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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第3次吉田内閣 第3次改造吉田内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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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inet Secretariat of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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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学力行、新聞記者から政界に 「いぶし銀の調整役」保利茂(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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犬養健と芦田民主党結成に動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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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第2回国会 衆議院 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 第15号 昭和23年4月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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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藤長期政権を要職で支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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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臨時首相代理に保利長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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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中関係打開めざした「保利書簡」 「いぶし銀の調整役」保利茂(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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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角福」調整に腐心、衆院議長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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