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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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의는 촉한의 장수로, 연주 진류군 출신이다. 유비의 촉 침략 당시 유비에게 항복하여 토역장군이 되었고, 이후 호군, 관중도독, 도정후, 좌장군 등을 역임했다. 제갈량 사후에는 거기장군 겸 옹주자사를 지내며 한중을 지켰다. 박애의 인물로 알려졌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에게 투항하여 제갈량의 북벌에 참여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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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오의 |
| 본명 | 오일 |
| 이명 | 자원(子遠) |
| 출생지 | 하남성개봉시 |
| 사망지 | 섬서성한중시 |
| 사망 년도 | 237년 |
| 소속 국가 | 촉한 |
| 민족 | 한족 |
| 가족 관계 | |
| 자매 | 목황후 |
| 친척 | 오반 |
| 관직 및 직위 | |
| 초기 관직 | 중랑장 |
| 주요 경력 | 토역장군 호군 관중도독 좌장군 독한중 거기장군 겸 옹주자사 |
| 최종 직위 | 거기장군 |
| 작위 | 도정후 고양향후 제양후 |
| 군사 경력 | |
| 참전 | 제갈량의 북벌 등 |
| 주요 활동 | |
| 230년 | 좌장군 임명 |
| 234년 | 거기장군 및 옹주자사 임명, 한중 도독 겸임 |
| 237년 | 사망, 왕평이 한중 도독 계승 |
2. 생애
오의는 연주 진류군(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출신으로,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으며, 유언의 아들 유장 밑에서 중랑장을 지냈다. 212년(건안 17년) 유비가 촉을 침략하자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이후 유비 휘하에서 활약하며 촉한 건국에 기여했다.[18][19]
익주 평정 후, 오의는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누이는 유비와 혼인하였다. 221년(장무 원년) 관중도독(關中都督)을 맡았고, 223년(건흥 원년)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20] 230년에는 남안군에서 위연과 함께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고양향후(高陽鄕侯)로 진봉되고 좌장군에 올랐다.[21] 234년 제갈량 사후에는 거기장군 겸 옹주자사, 가절(假節)을 받고 독한중직을 수행했으며, 제양후(濟陽侯)에 이르렀다. 237년 사망하였다.[11]
오의는 박애(博愛)의 인물로 알려졌으며, 전공(戰功)도 있었고, 황제의 외척이라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정사(正史)에 그 개인의 전(傳)이 세워져 있지 않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오의에 대한 전기가 실려 있지 않았으나,[2]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주석으로 달려 ''삼국지'' 제45권에서 발견된다.
2. 1. 초기 생애와 유비와의 만남
오의는 연주 진류군(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출신으로,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18] 유언의 아들 유장 때 중랑장을 지냈다. 212년(건안 17년) 유비가 촉을 침략하자, 유괴, 냉포, 장임, 등현과 함께 광한군 부현(涪縣)에서 유비를 막으려 했으나 패하고 항복했다. 이후 유비에게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되었다.[19]2. 2. 촉한에서의 활약
연주 진류군(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출신으로,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18] 유언의 아들 유장 때 중랑장을 지냈다. 212년(건안 17년) 유비가 촉을 침략하자 유괴, 냉포, 장임, 등현과 함께 광한군 부현(涪縣)에서 유비에게 저항했으나 패배하고 투항하여 토역장군(討逆將軍)에 임명되었다.[19] 익주가 평정된 후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과부였던 누이는 유비에게 재가하였다.221년(장무 원년) 관중도독(關中都督)을 맡았다. 223년(건흥 원년)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20] 230년 남안군에서 위연과 함께 위나라 후장군 비요, 옹주자사 곽회를[21] 격파한 공으로 고양향후(高陽鄕侯)로 진봉되고 좌장군에 올랐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거기장군 겸 옹주자사에 가절(假節)까지 받고 독한중직을 수행하였다. 작위는 제양후(濟陽侯)에 이르렀다. 237년 사망하였다.
건안 17년(212년),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자 방어에 나섰지만 막지 못하고 항복했다. 건안 19년(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오의를 호군(護軍)·토역장군(討逆將軍)에 임명하고, 여동생 오씨를 부인으로 삼았다.[16]
건흥 6년(228년), 가정 전투 때, 제장(諸將)은 선봉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위연이나 오의를 천거했지만, 제갈량은 듣지 않고 마속을 임용하여 대패를 겪었다.
건흥 8년(230년), 위연과 함께 강중(羌中)으로 진출하여 위의 비요를 격파하고 좌장군으로 승진하여 고양향후(高陽鄕侯)(연주 진류군)에 봉해졌다.
건흥 9년(231년) 이엄이 파면되었을 시점에는 좌장군·형주자사·고양향후였다.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의 사후, 독한중(督漢中)·차기장군·가절(假節)·옹주자사(雍州刺史)가 되었고, 제양현후(濟陽縣侯)(연주 진류군)에 봉해졌다. 오의의 부장으로 왕평이 한중태수가 되어 한중을 수비했다.
건흥 15년(237년)에 사망했다.
3. 평가
고상하면서도 강직했으며 널리 사랑하는 마음씨도 있었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어하면서도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228년 제갈량이 첫 북벌을 개시했을 때 사람들은 노련한 위연이나 오의가 그 선봉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22]
계한보신찬에서는 "매우 강개한 인물이며, 박애의 마음을 가졌다. 약한 군대를 이끌고 강한 적을 제압했으며, 위기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칭찬받고 있다.
4. 이름 표기
《삼국지》에서는 일률적으로 오일, 《화양국지》에서는 일률적으로 오의라 하였다. 후대 사서들은 오일과 오의를 혼용하였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사마의의 이름인 懿(의)를 피휘한 것이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삼국지》의 다른 부분에선 懿, 昭(소), 炎(염) 모두 잘만 쓰고 있어 피휘는 아님을 알 수 있다.[23] 사마의의 아들이 사마소, 손자가 사마염이며 사마염이 서진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였다.
5.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오의(吳懿)로 표기되었다. 낙성 전투에서 등현이 전사하는 등 전황이 불리해지자 오란과 뇌동을 부장으로 삼고 유순과 함께 원군으로 참전한다. 장임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유인한 장비를 협공하여 궁지에 몰아넣지만, 때마침 도착한 조운에게 사로잡혀 항복한다.[17]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 종군하여 오반과 함께 제갈량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한다.[17] 제갈량 사후 거기장군이 되어 한중을 지키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17]
- '''제62회''': 장숙이 동생 장송의 밀서를 유장에게 전달하고, 유비의 익주 점령 야욕이 드러나면서 방어전의 총대장이 필요하게 된다.[17] 유순이 자원하지만, 이를 억누르고 그를 대신하여 전선에 파견된다.[17] 이때 부관으로 오란·뇌동을 추천한다.[17]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유궤·장임·냉포 등과 대응책을 협의하고, 냉포의 건의를 받아들여 물 공격을 계획한다.[17]
- '''제63회''': 냉포가 위연의 방해로 실패하고, 후속 부대로 파견된 오란·뇌동도 황충에게 쫓겨나 계획은 좌절된다.[17] 오의는 다음 작전을 협의하지만, 장임의 건의에 따라 그가 복병으로 나선다.[17] 장임은 방통을 유비로 착각하여 사살한다.[17] 유비를 죽였다고 생각한 오의 등은 성에서 전군을 이끌고 나가 유비 군대를 맹렬하게 몰아낸다.[17] 결과적으로 유비는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형주의 원군을 기다려 진군할 계획을 다시 세운다.[17] 형주에서 출발한 제갈량은 장비 등을 이끌고 익주에 들어가 엄안을 격파한다.[17]
- '''제64회''': 주장이 유순으로 교체되고, 오의는 장임에게 명령받는 입장이 된다.[17] 유비 군의 야습에 피로가 쌓여 패색이 짙어진다.[17] 장임은 유비 한 명만을 노려 죽이려 하지만, 장비의 군대에 가로막힌다.[17] 항장 엄안이 가는 곳마다 태수를 설득하여 제갈량의 군대가 빠르게 도착한다.[17] 양군은 총력전을 벌여 오의·유궤·오란·뇌동이 위연·황충 두 장수를 협공하여 한 번은 격파한다.[17] 그러나 오란·뇌동은 두 장수를 쫓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항복한다.[17] 오의는 장임·탁응 등과 함께 유비와의 마지막 결전에 도전하지만, 장임이 제갈량의 함정에 걸려 생포되자 전의를 잃고 탁응 등과 함께 유비에게 항복한다.[17] 장임은 항복을 거부하고 참수되고, 성을 지키던 유궤 또한 장익에게 살해당한다.[17] 유순은 성도로 도망친다.[17] 오의는 엄안과 함께 유비 군대를 선두에서 이끌고 익주 공략을 수행하게 된다.[17]
- '''제91회''':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시작하자, 오의는 중참군으로 동행한다.[17]
- '''제99회''': 조진을 대신하여 사마의가 위의 서방 사령관이 되자, 제갈량은 방어 계획을 전개한다.[17] 오의는 오반·마충·장억 등과 함께 장합과 대릉을 요격하여 양동 작전을 성공시킨다.[17]
- '''제100회''': 제갈량의 계략에 따라 오반·관흥·요화와 함께 조진의 부장인 진량의 군대를 매복하여 격파한다.[17] 항복한 위군 병사를 이끌고 조진의 본진에 잠입하지만, 이 계획은 사마의에 의해 간파되어 실패한다.[17]
- '''제102회''': 위군이 위수를 따라 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 제갈량의 명령에 따라 오반과 함께 다리를 불태우는 임무를 맡는다.[17]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사마의에게 간파되어 오반이 위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오의도 다리 불태우기에 실패한다.[17]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17]
6. 가계
- 누이: 목황후
- 손자: 오교(吳喬)[24]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2]
문서
(失其行事,故不為傳。) Sanguozhi vol. 45.
[3]
문서
(以[劉]焉為益州牧, ...) Zizhi Tongjian vol. 59.
[4]
문서
(子遠名壹,陳留人也。隨劉焉入蜀。) Sanguozhi vol. 45.
[5]
문서
(焉時將子瑁自隨,遂為瑁納后。) Sanguozhi vol. 34.
[6]
문서
(興平元年,癕疽發背而卒。州大吏趙韙等貪璋溫仁,共上璋為益州刺史, ... 璋,字季玉,旣襲焉位, ...) Sanguozhi vol. 31.
[7]
문서
(璋遣其將劉璝、冷苞、張任、鄧賢、吳懿等拒備,皆敗,退保緜竹;懿詣軍降。) Zizhi Tongjian vol. 66.
[8]
문서
(劉璋時,為中郎將,將兵拒先主於涪,詣降。) Sanguozhi vol. 45.
[9]
문서
(先主定益州,以壹為護軍討逆將軍,納壹妹為夫人。章武元年,為關中都督。) Sanguozhi vol. 45.
[10]
문서
(建興八年,與魏延入南安界,破魏將費瑤,徙亭侯,進封高陽鄉侯,遷左將軍。) Sanguozhi vol. 45.
[11]
문서
([建興]十二年,丞相亮卒,以壹督漢中,車騎將軍,假節,領雍州刺史,進封濟陽侯。十五年卒。) Sanguozhi vol. 45.
[12]
문서
「呉懿」は『[[華陽国志]]』や『[[三国志演義]]』の表記。一般的に、三国志では[[司馬懿]]の諱を避けたがために、「懿」を「壹」に変えたと解釈される。確かに三国志の魏書は司馬懿を「司馬宣王」と書くが、会話文中では「司馬懿」と書く場合もある。蜀書では地の文でも「司馬懿」と記載する場合もあり、後主伝では「呉壹」「司馬懿」、王平伝では「呉壹」「司馬宣王」と記載する。なお、呉壹は魏書・呉書では登場しない。唐の[[顔師古]]は、班壹([[班超]]の祖先)と[[聶壹]]([[張遼]]の祖先)とを挙げて「今、流通する[[漢書]]の写本は、(司馬懿の諱を避けたと早合点して)壹を懿に改めるものが多い」と批判するが、呉壹もこの風潮から免れなかったと推測される。
[13]
문서
『呉氏統譜』は呉莧と記す。
[14]
문서
『呉氏統譜』は呉教と呉彦の二子を記す。
[15]
문서
穆皇后伝が引く『蜀世譜』([[孫盛]]著)による。
[16]
문서
『[[華陽国志]]』巻六・劉先主志、「偏將軍將軍呉懿爲關中都督」。名前の序列は諸葛亮・許靖・張飛・馬超の次で魏延・李厳・馬良・楊儀の上にある
[17]
문서
穆皇后伝が引く『蜀世譜』([[孫盛]]著)による。
[18]
문서
《삼국지》34권 촉서 제4 선주목황후
[19]
문서
《화양국지》5권 공손술유이목지(公孫述劉二牧志)
[20]
문서
《화양국지》7권 [[유후주]]지
[21]
문서
《삼국지》40권 촉서 제10 위연
[22]
문서
《삼국지》39권 촉서 제9 [[마량]] 제속
[23]
서적
《삼국지집해》
[24]
문서
[[손성]], 《촉세보》(蜀世譜) ; 배송지 주석, 《삼국지》34권 촉서 제4 선주목황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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