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호노리오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교황 호노리오 2세는 1124년부터 1130년까지 재위한 인물이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추기경으로 활동하며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 특사로 활약했다.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이탈리아 영토 소유권을 두고 대립했으며, 로마 귀족 가문 간의 갈등과 교황청 내부의 분열을 겪었다. 호노리오 2세는 성전 기사단을 인가하고, 동방 문제와 잉글랜드, 스페인과의 관계를 조율했으며, 1130년 사망 후 후계자 분쟁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30년 사망 - 시구르 1세
시구르 1세는 1103년부터 1130년까지 노르웨이를 통치한 국왕으로, 노르웨이 십자군을 이끌어 '요르살라파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치세는 노르웨이 왕국의 황금기로 여겨지지만 왕위 계승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는 평가도 받는다. - 1130년 사망 - 테레사 데 레온 왕녀
레온 왕 알폰소 6세의 서녀 테레사 데 레온 왕녀는 포르투갈 백작 엔리케와의 결혼으로 포르투갈 백작 부인이 되었고, 남편 사후 아들 아폰수 1세의 섭정으로 포르투갈 백작령을 통치하며 영토 확장 야망을 추구했지만, 이복여동생과의 권력 다툼과 아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수도원으로 추방되는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 볼로냐 광역시 출신 - 줄리아노 사르티
줄리아노 사르티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로, 골키퍼로 활약하며 피오렌티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선수로도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 활동하다 2017년에 사망했다. - 볼로냐 광역시 출신 - 잔니 모란디
잔니 모란디는 1960년대 데뷔하여 수많은 히트곡과 산레모 음악제 우승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이탈리아의 대표 가수이자 배우, 텔레비전 진행자이다. - 12세기 교황 -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알렉산데르 3세는 1159년 선출된 로마 가톨릭 교황으로, 프리드리히 1세가 지지하는 대립 교황들과의 갈등 속에서 재위 기간을 보냈지만 베네치아 조약으로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북방 선교와 교회 개혁, 여러 국가와의 관계 설정에 기여했다. - 12세기 교황 -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인노첸시오 2세는 1130년부터 1143년까지 재임한 교황으로, 대립교황의 등장과 교회 분열,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소집을 통한 사태 수습 및 교회 개혁 시도,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 거행, 템플 기사단 권한 강화 등 외교적 활동과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교황 호노리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호노리오 2세 |
본명 | 람베르토 스칸나베키 |
출생일 | 1060년 2월 9일 |
출생지 | 교황령 피냐노,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130년 2월 13일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신성 로마 제국 |
재임 시작 | 1124년 12월 21일 |
재임 종료 | 1130년 2월 13일 |
선임자 | 칼릭스투스 2세 |
후임자 | 인노첸시오 2세 |
서임 | 1117년 |
추기경 임명 | 1099년 |
추기경 임명자 | 우르바노 2세 |
이전 직책 | 산타 프라세데 성당의 추기경 사제 (1099–1117) 오스티아 교구의 주교 (1117–1124) |
2. 생애 초기
훗날 교황 호노리오 2세가 되는 람베르토 스카나베키는 이탈리아 이몰라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성직에 입문, 교황청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서임권 투쟁 시기에 교황 특사로서 보름스 협약 체결에 기여하는 등 교황권 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1. 출생과 초기 경력
람베르토 스카나베키는 오늘날 이탈리아 이몰라 인근의 작은 시골 마을인 파냐노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날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볼로냐 교구의 수석부제품을 받으면서 성직에 입문하였고, 1099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산타 프라세데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76] 교황 파스칼 2세는 1117년 람베르토를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으로 승격시킨 후 라테라노 대성전의 의전사제로 임명하였다.[77] 1118년부터 1119년 교황 젤라시오 2세가 피신할 당시 그와 동행하였으며, 임종을 지키기도 하였다.1119년 1월 29일 클뤼니에서 젤라시오 2세가 선종한 후, 람베르토 추기경과 팔레스트리나의 주교급 추기경 코노는 교회법에 따라 새 교황 선출 작업에 착수하였다. 람베르토 추기경은 새 교황으로 선출된 비엔의 교구장 기를 1119년 2월 9일 데려와 교황 갈리스토 2세로 교황좌에 착좌시켰다.
2. 2. 교황 특사 활동
람베르토는 교황 갈리스토 2세를 따라 프랑스로 간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서임권 논쟁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황제는 제국 내 주교 후보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주장했고, 람베르토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교황 특사로 선택되었다. 1119년 갈리스토 2세는 람베르토에게 하인리히 5세와 서임권 문제를 합의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하였다.람베르토는 1122년 9월 8일 마인츠에서 열릴 회의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주교가 참석할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마인츠의 아달베르트 대주교가 불참하자 징계 조치를 내리려 했고, 밤베르크의 오토 주교의 중재로 분란을 막을 수 있었다.[78]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권과 속권의 대립이 마무리되었으며, 1123년 9월 23일에는 람베르토의 공이 큰 갈리스토 협약(Pactum Calixtinum)이 발효되었다.
3. 교황 선출
1124년 교황 칼릭스토 2세가 사망하면서, 교황청 내부 및 로마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9] 우르바노 2세와 파스칼 2세 재임 기간 동안 이탈리아 성직자 중심의 추기경단이 강화되면서 로마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들은 프랑스나 부르고뉴 공국 출신 추기경들을 경계했고, 교황청 서기였던 아메리크 드 부르고뉴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추기경들은 자신들의 후보를 교황으로 선출하고자 했다.
1124년 12월 16일, 람베르토(훗날 교황 호노리오 2세)를 포함한 모든 추기경들은 라테라노 대성전 남쪽에 있는 성 판크라시오 수도원 경당에 모였다. 거기서 피에를레오니 가문의 지지자인 요나탄 추기경의 제안으로, 추기경들은 산타나스타시아의 추기경 사제인 테오발도 보카페치를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했고, 그는 첼레스티노 2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2] 그러나 프란지파니 가문 지지자들의 무장 세력이 들이닥쳐 첼레스티노 2세에게 부상을 입히고, 람베르토를 호노리오 2세로 선포했다.
로마는 파벌 간의 내분에 휩싸였고, 결국 첼레스티노 2세의 지지자들은 그를 버렸고, 호노리오 2세만이 교황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호노리오 2세는 모든 추기경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사임했지만, 즉시 만장일치로 재선출되어 1124년 12월 21일에 축성되었다.
3. 1. 추기경단의 분열과 로마 귀족들의 대립
교황 칼릭스토 2세가 1124년에 사망한 후, 교황청 내부의 압력과 로마 귀족 간의 지속적인 갈등이 폭발했다.[9] 우르바노 2세와 파스칼 2세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이탈리아 성직자들의 추기경단이 확대되면서 로마 지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 추기경들은 최근 칼릭스토 2세에 의해 임명된 추기경들, 주로 프랑스 또는 부르고뉴 공국 출신들과 만나는 것을 꺼렸다. 원로 추기경들은 이 새로운 추기경들을 위험한 혁신가로 여겼고, 그들의 영향력 증대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교황청 서기인 아메리크 드 부르고뉴 추기경을 필두로 한 북부 추기경들은 선출된 교황이 자신들의 후보 중 한 명이 되도록 확실히 하려고 했다. 양쪽 모두 로마의 유력 가문들의 지원을 바랐다.
1124년까지, 로마의 지역 정치에는 두 개의 주요 파벌이 지배하고 있었다. 프란지파니 가문은 요새화된 콜로세움 주변 지역을 통제하며 북부 추기경들을 지지했고,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테베레 섬과 마르켈루스 극장 요새를 통제하며 이탈리아 추기경들을 지지했다.[10] 1124년 12월 13일 칼릭스토 2세가 사망하자, 양 가문은 교회의 규범에 따라 3일 안에 다음 교황을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레오 프란지파니가 이끄는 프란지파니 가문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후보인 람베르토를 지지하기 위해 선거를 지연시키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산 스테파노 인 첼리오몬테의 추기경 사제인 사코 데 아냐니를 차기 교황으로 선출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3. 2. 혼란스러운 선거 과정
1124년 무렵 로마에는 프란지파니 가문과 피에를레오니 가문이라는 두 개의 큰 집단이 정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콜로세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프란지파니 가문은 비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을 지원했고, 테베레 섬과 마르켈루스 극장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이탈리아 추기경들을 지원했다.[10] 양측은 교회법에 따라 3일 이내에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프란지파니 가문은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인 람베르토를 홍보하기 위해 교황 선거 날짜를 미룰 것을 계속 요청했으나, 민심은 산 스테파노 인 첼리오몬테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인 삭소 데 아냐니를 후임 교황으로 이미 점찍어놓은 상황이었다.12월 16일 람베르토를 포함한 추기경들은 라테라노 대성전 남쪽에 있는 산 판크라시오 수도원 내 경당에 모였다. 그곳에서 피에를레오니 가문 편이었던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 요나타스의 제안에 따라,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테오발도 부카페치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테오발도 부카페치 추기경은 스스로 첼레스티노 2세라고 명명하였다.[12]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테오발도가 붉은 망토를 입고 사람들이 테 데움을 부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프란지파니 가문의 비호를 받는 무리가 습격해서 테오발도를 공격해 부상을 입힌 다음 람베르토야말로 새 교황이라고 주장하였다. 부상을 당한 테오발도는 교황직 수락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피에를레오니 가문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13]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람베르토가 새 교황으로 선포되었다. 람베르토는 자신의 새 이름을 호노리오 2세라고 명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로마는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아이메릭 추기경과 레오 프란지파니는 로마 시장 우르바노를 포함한 피에를레오니 가문과 좋지 않은 관계였던 이들에게 접촉하여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결국 테오발도를 추대했던 이들마저 그를 포기하면서, 호노리오 2세만이 교황좌를 요구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로 교황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호노리오 2세는 추기경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교황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직후 다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1124년 12월 21일에 공식적으로 즉위하였다.
4. 교황 재위 기간의 주요 활동
호노리오 2세는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활동을 펼쳤다.
-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이탈리아 영토 소유권을 두고 대립했으며, 하인리히 5세 사후에는 황제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로타르 3세를 지지했다.
- 이탈리아 남부 문제: 캄파니아 지역의 남작들을 진압하고, 몬테카시노 수도원 분쟁을 해결했으며,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와 협상하여 아풀리아 공작령을 승인했다.
- 프랑스 내부 갈등: 프랑스 왕 루이 6세와 주교들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교회 개혁을 지지하고 왕권의 간섭을 견제했다.
- 잉글랜드와 스페인과의 관계: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 간의 수위권 분쟁을 중재하고, 스페인의 무어인과의 투쟁을 지원했다.
- 성전 기사단 인가와 동방 문제: 성전 기사단을 공식 인가하고, 예루살렘 왕국 내 분쟁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이 외에도 클뤼니 수도원 개혁, 프레몽트레회 설립 인가, 낭트 공의회의 행위 확인,[44] 브르타뉴 공작 지원,[45] 레랭 제도 수도사들을 위한 십자군 원정 장려[46]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4. 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호노리오 2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대립하였다.[79] 토스카나의 마틸데는 임종 직전 자신의 영토를 교황에게 양도하였는데, 하인리히 5세는 1116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다.[80] 하인리히 5세는 토스카나의 도시 국가들과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점령한 지역마다 자신의 대리인을 세워 간접 통치하였다. 이에 호노리오 2세는 토스카나 지역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알베르토를 토스카나 후작에 임명하여 신성 로마 제국이 임명한 토스카나 후작 콘라트 폰 샤이에른에 맞서도록 하였다. 또한 하인리히 5세는 보름스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 호노리오 2세를 분노하게 하였다. 한편 서임권 투쟁을 틈타 황제에 의해 서임된 주교들은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황제의 묵인 아래 지역 교회의 재산들을 수시로 강탈해갔다. 이에 참다 못한 각 지역 교회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교황에게 호소하였다.[81]
1125년 5월 23일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면서 이러한 다툼은 종식되었지만, 호노리오 2세는 곧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권력 투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며 자신의 조카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호엔슈타우펜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독일의 제후들 중 친교회적 성향을 지닌 이들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였으며,[82] 프리드리히가 하인리히 5세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특사로 파견 나온 제라르도 추기경과 로마노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신성 로마 제국의 대상서국장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아달베르트의 주재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작센 공작 로타르를 독일의 새 왕으로 선출하였다.[83] 로타르의 요청에 따라 교황 특사로 파견된 제라르도 추기경은 두 명의 주교와 함께 로마로 가서 호노리오 2세의 재가를 받아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거 결과를 교황에게 재가받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에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큰 성과를 올린 호노리오 2세는 1126년 7월경 로타르를 로마로 초대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로타르는 호노리오 2세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보름스 협약에 따라 주교 선출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교에 대한 임명식도 축성식 이후에 하기로 하였으며, 황제에 대한 맹세도 충성이 아니라 존경으로 대체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로타르는 당장 로마를 방문할 상황이 아니었다. 콘란트 호엔슈타우펜이 반란을 일으켜 1127년 12월 스스로 독일 왕을 칭한데 이어, 1128년 7월 29일에는 이탈리아 몬차에 가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의 주재로 소집된 독일 주교회의는 콘란트를 파문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 결의는 1128년 4월 22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로마에서 소집된 시노드에서 호노리오 2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84] 또한 호노리오 2세는 크레마의 요한을 피사로 보내 콘라트를 독일 왕으로 추대한 밀라노 대주교 안셀모를 파문하기 위한 시노드를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콘란트는 외부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졌으며, 로타르는 무사히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85]
4. 2. 이탈리아 남부 문제
호노리오 2세가 즉위 후 당면한 문제 중 하나는 사병을 동원하여 농부와 여행자들을 괴롭히는 캄파니아 지역 남작들을 처벌하는 것이었다.[86] 1125년 교황군은 체카노의 영주들을 평정하고, 마엔차, 로카세카, 트레비넬라치오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다. 1128년에는 세니를 점령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세니의 남작이 전사하였다.[87]호노리오 2세가 특히 주목한 곳은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요새였던 푸모네였다. 이 요새는 지역 귀족들이 대립교황의 명의로 점령한 후 계속 그들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1125년 7월, 10주에 걸친 교황군의 공성전 끝에 푸모네는 함락되었다. 호노리오 2세는 푸모네를 접수한 후 치안을 안정시키고 반역자였던 이전 소유주들에게 요새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를 몬테카시노에서 데려올 것을 명령하였다.[88]
이후 호노리오 2세는 몬테카시노의 아빠스 오데리시오 디 상로에게 관심을 돌렸다.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 시절부터 호노리오 2세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오데리시오를 경계했다.[89] 과거 호노리오 2세는 산타 마리아 인 팔라라 성당에 묵을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오데리시오가 이를 거부했고, 호노리오 2세는 이 모욕을 잊지 않았다. 1125년 오데리시오가 재정 지원을 요청하자 호노리오 2세는 이를 거절하며 복수했고, 오데리시오가 호노리오 2세의 출신을 조롱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90]
호노리오 2세는 오데리시오가 수도원 재정을 착복한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아퀴노 백작 아테눌프가 오데리시오가 교황좌를 노린다고 고발하자, 호노리오 2세는 오데리시오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로마로 소환했다. 오데리시오가 세 차례 소환에 불응하자 호노리오 2세는 1126년 사순 시기에 오데리시오를 파면했다. 오데리시오는 파면을 거부하고 아빠스 직무를 계속하다 파문당했다. 카시노 주민들은 수도원에 쳐들어가 오데리시오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91] 수사들은 니콜로 수사를 새 아빠스로 선출했다.
베네딕도회를 굴복시키기로 결심한 호노리오 2세는 니콜로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카푸아 수도원 분원의 세니오렉투스를 새 아빠스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92] 오데리시오와 니콜로 지지자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발생했지만, 호노리오 2세는 오데리시오를 물러나게 하고 니콜로마저 제명했다. 1127년 호노리오 2세는 세니오렉투스를 직접 아빠스로 서임하고,[93] 수사들에게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지만, 수사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몬테카시노 문제를 처리한 후, 호노리오 2세는 이탈리아 남부로 관심을 돌렸다. 1127년 아풀리아 공작 굴리엘모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루지에로가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령을 차지했다. 루지에로는 굴리엘모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지만, 호노리오 2세는 굴리엘모가 사후 자신의 영지를 성좌에 양도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94] 1127년 교황군이 아르피노에서 패배하자마자,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노르만족이 루지에로와 손잡는 것을 막기 위해 베네벤토로 떠났다. 루지에로는 아풀리아 공국을 점령하고 호노리오 2세에게 선물을 보내 자신을 아풀리아의 새 공작으로 인정하면 트로이아와 몬테푸스코를 양도하겠다고 제안했다. 노르만족의 통합을 염려한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에게 이탈리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1127년 11월 호노리오 2세가 루지에로를 파문하자, 많은 노르만족 영주들이 교황 편에 가담했다.[95] 루지에로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돌아가던 중 베네벤토를 위협하게 했다. 호노리오 2세는 카푸아의 로베르 2세와 동맹을 맺고, 로베르토 2세를 카푸아 공작으로 임명한 후 루지에로에 맞서기로 결의했다.
1128년 5월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루지에로 2세는 교황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면서 교황령 근거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양측은 브라다노 강에서 마주쳤지만, 루지에로 2세는 교황군이 곧 와해될 것을 예상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교황의 동맹군 일부가 이탈하여 루지에로 2세에게 투항했다.[96] 호노리오 2세는 심복인 아이메릭 추기경을 첸시오 2세 프란치파네와 함께 사절로 보내 루지에로 2세와 협상하도록 했다. 협상 끝에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 2세에게 신앙 고백과 충성 맹세를 하는 조건으로 아풀리아 공작령 승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호노리오 2세는 베네벤토로 가서 카푸아 공작 로베르토 2세의 이익을 보호해주기로 약조하고, 1128년 8월 22일 베네벤토 근처 사바토 강에 있는 마조르 다리 위에서 루지에로 2세와 만났다. 그곳에서 호노리오 2세는 공식적으로 루지에로 2세에게 아풀리아 공작령을 하사하고, 시칠리아 왕국과 교황령 사이에 평화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로마로 돌아온 호노리오 2세는 베네벤토 귀족들이 교황이 임명한 총독을 살해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97] 진노한 호노리오 2세는 베네벤토를 응징하겠다고 선언했고, 베네벤토 주민들은 용서를 구하며 새 총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호노리오 2세는 제라르도 추기경을 새 총독으로 보냈고, 1129년 베네벤토를 다시 방문하여 과거 추방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일 것을 요구했지만, 주민들이 거부하자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 2세에게 1130년 5월 베네벤토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 전에 선종하였다.
4. 3. 프랑스 내부 갈등
프랑스의 루이 6세와 프랑스 주교들 간의 분쟁에 호노리오 2세가 개입하게 되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교회 개혁에 영향을 받은 파리 교구장 에티엔 주교는 프랑스 교회에 대한 왕권 간섭을 막고자 하였다.[99] 루이 6세는 에티엔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교회 개혁을 방해했다. 루이 6세는 에티엔 주교의 교회 개혁에 동참한 상스 대주교 앙리를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하여 교회 내에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호노리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왕권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지키려는 두 주교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01]라바르댕의 힐데베르트 또한 프랑스 왕의 압력을 받게 되자, 호노리오 2세는 1125년 르망의 주교였던 힐데베르트를 투르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102] 1126년 루이 6세는 힐데베르트가 투르 대주교가 되는 것을 반대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대주교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3] 힐데베르트는 자신이 교구장으로서 내리는 결정마다 로마에 상고가 계속되는 것에 대해 호노리오 2세에게 불만을 표하기도 하였다.[104]
프랑스 주교들은 왕의 행동에 맞서 파리 교구에 성무 정지를 의결했고, 1129년 루이 6세는 호노리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성무 정지를 유보하게 하였다.[105] 이 소식에 분노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역시 호노리오 2세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호노리오 2세는 1130년 상리스의 스테판에게 루이 6세와 화해하라고 압박했다. 앙리 상리에는 왕으로부터 추가적인 간섭 없이 대주교로서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호노리오 2세는 교황으로서 재임 말년에 루이 6세와 주교들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1127년 호노리오 2세는 브르타뉴 지방의 범죄를 뿌리뽑기 위해 라바르댕의 힐데베르트 대주교가 주재한 낭트 시노드의 결의사항을 확인했다.[106] 같은 해 호노리오 2세는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가 반항적인 봉신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도왔다.[107] 또한 아랍 해적들로부터 끊임없이 피해를 입는 레랭 제도의 수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장려하였다.[108]
호노리오 2세는 앙주의 풀크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노르망디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자 이 사태에 개입했다. 헨리 1세는 풀크의 딸인 앙주의 시빌라와 노르망디 공작의 아들이자 자신과 6촌 관계에 해당하는 윌리엄 클리토가 혼인하는 것에 반대했다.[109] 두 사람이 혼인을 무르는 것을 거부하자, 호노리오 2세는 풀크와 그의 사위를 파문하고 그의 영지 내에서의 성무 집행을 정지하도록 하는 강수를 두었다.[110]
4. 4. 잉글랜드와 스페인과의 관계
캔터베리 대주교좌와 요크 대주교좌 간의 수위권 분쟁은 잉글랜드에서 계속되었다. 1125년 4월 5일, 호노리오 2세는 요크 대주교 서스턴에게 서신을 보내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겠다고 통보했다.[111] 그는 크레마의 요한 추기경을 교황 사절로 파견하여 캔터베리와 요크 간의 분쟁뿐만 아니라 캔터베리와 웨일스 대주교좌 간의 재치권 문제, 캔터베리와 요크의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에 대한 재치권 문제 등을 중재하도록 했다. 호노리오 2세는 잉글랜드의 모든 성직자와 주교들에게 교황 사절을 자신처럼 대우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크레마의 요한은 1125년 록스버러 시노드를 소집했다. 스코틀랜드의 다비드 1세는 스코틀랜드 지역 교회에 대한 요크 대주교의 재치권 주장을 논의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주교들에게 시노드 참석을 요청했다.[112] 호노리오 2세는 요크 대주교좌의 주장을 인정하여 스코틀랜드 주교들에게 서스턴 대주교를 따르도록 요구했으나, 이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113]
이후 요한은 1125년 9월 웨스트민스터 시노드를 소집했는데, 여기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를 비롯한 20명의 주교들과 40명의 아빠스들이 참석했다.[114] 시노드는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여러 주교좌 신설을 결정했지만, 캔터베리와 요크 간의 수위권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115] 대신 요한은 두 고위 성직자에게 자신과 함께 로마로 가서 호노리오 2세 앞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1125년 말 로마에 도착하여 호노리오 2세의 환대를 받고 1126년 초까지 머물렀다. 호노리오 2세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가 요크 대주교를 따르도록 규정했고, 논쟁이 격화되자 서스턴은 윌리엄 디 코빌을 캔터베리 대주교가 아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황 특사로서 따르라고 선언하여 이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116] 호노리오 2세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요크 대주교에게 어떠한 순명 서약도 요구할 수 없으며, 잉글랜드 교회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교황 특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선언했다.
랜다프의 우르반 주교는 1128년과 1129년에 여러 차례 로마를 방문하여 자신의 교구가 캔터베리 대교구에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우르반은 많은 특권을 얻었고 호노리오 2세로부터 격려를 받았지만, 호노리오 2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는 결정은 피하려 했다.[117]
스페인의 경우, 호노리오 2세는 콤포스텔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의 야심을 경계했다.[118] 교황 갈리스토 2세가 그를 스페인의 교황 사절로 임명했지만, 호노리오 2세는 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이를 억제하라고 경고했다. 디에고는 교황 사절로 재임명되기 위해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면서 호노리오 2세를 위한 금화 22개와 교황청 관료들을 위한 금화 80개를 보냈다. 호노리오 2세는 디에고를 추기경에 서임하여 그의 활동을 제한했다.[119]
그럼에도 호노리오 2세는 디에고를 완전히 소외시키지 않았다. 브라가의 대주교가 공석이 된 코임브라의 새 주교를 지명하자, 호노리오 2세는 대주교가 디에고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질책했다. 호노리오 2세는 브라가의 대주교에게 1129년 부활 대주일 후 제2주일에 직접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호노리오 2세는 디에고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여 카리온 시노드(1130년 2월)에서 의장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시노드 기간 동안 그의 도움을 받았다.[120]
호노리오 2세는 스페인의 무어인에 대한 투쟁을 촉진하고, 타라고나에서 무어인에게 사로잡힌 노르만족 기사 로베르 다귀로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다.[121][122] 로베르는 1128년 로마를 방문하여 호노리오 2세에게 선물을 받았다.
4. 5. 성전 기사단 인가와 동방 문제

1119년, 몇몇 프랑스 귀족들이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십자군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성전 기사단이라는 새로운 종교 기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들은 교황의 공식적인 인가를 받지 못했다.[123]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일부 기사들이 1129년 트루아 교회회의에 참석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청빈, 정결, 순명을 포함한 기사단 규칙을 만드는 데 찬성하며, 기사단의 존재를 인정했다.[124] 이후 기사단과 규칙은 호노리오 2세의 인가를 받았다.[124]
호노리오 2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종주권자로서 보두앵 2세의 왕 선출을 재확인하고 그를 성전 기사단의 후원자로 지명하였다.[125] 그는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는 다른 제후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갈등을 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간의 오랜 관할권 분쟁은 호노리오 2세에게 항상 걱정거리였다. 그는 전통적으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발렌스의 베르나르의 관할이었던 일부 주교좌에 대한 티레의 새 대주교 말린의 기욤의 권리 주장을 지지하였다.[126] 베르나르가 관할권 포기를 거부하자 기욤은 로마로 가서 호노리오 2세에게 알렸고, 교황은 교황 특사를 팔레스타인에 보내 베르나르에게 순종을 지시했다. 40일 동안 여러 주교들이 기욤에게 순명을 서약하였다.[127] 베르나르는 호노리오 2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지만, 호노리오 2세가 병에 걸려 더 이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5. 사망
1130년 초, 호노리오 2세는 통증을 느낀 지 거의 1년 만에 중병으로 몸져누웠다.[68] 추기경 아에메릭과 프란지파니 가문은 다음 행보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호노리오 2세는 프란지파니 가문이 통치하는 지역에 있는 산 그레고리오 마그노 알 셀리오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호노리오 2세가 선종했다는 소문에, 이미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69]를 지지할 준비를 하고 있던 피에를레오니 가문의 지지자들은 죽어가는 호노리오 2세가 있는 수도원을 습격하여 피에트로의 선출을 강요하려 했다.[70]
1130년 2월 13일 저녁, 호노리오 2세가 선종했을 때 추기경 아에메릭의 계획은 아직 결실을 보지 못했다. 프란지파니 가문을 지지하는 추기경들은 즉시 수도원 문을 닫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음 날, 통상적인 관례와 달리 호노리오 2세는 미리 지명된 추기경들이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된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를 선출하기 위해 서두르는 동안 수도원에서 어떠한 장엄함이나 의식도 없이 신속하게 매장되었다. 동시에, 배제된 추기경들, 대부분 피에를레오니 가문을 지지하는 이들은 아나클레투스 2세가 된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를 선출하여 교회를 다시 분열로 몰아넣었다.[71] 인노첸시오 2세가 선출된 후, 호노리오 2세는 재매장을 위해 수도원에서 라테란으로 옮겨졌다. 그는 남쪽 익랑의 교황 갈리스토 2세의 시신 옆에 묻혔다.
6. 영향
호노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이메릭 추기경뿐만 아니라 프란지파니 가문의 도움도 컸다.[128] 호노리오 2세는 추기경단 대부분을 로마 출신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황 특사는 오로지 교황이 단독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베네딕도회 같은 전통적인 수도회들에게 특혜를 주었던 전임 교황들과 달리 아우구스티노회 같은 신생 수도회들에게 특혜를 주었다.
그와 동시에 프란지파니 가문이 교황궁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맞서던 피에르레오니 가문이 호노리오 2세를 적대시하면서 호노리오 2세는 로마 정치의 혼란에 빠졌다. 호노리오 2세는 피에르레오니 가문이나 프란지파니 가문이나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효과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시내에서 벌어진 여러 싸움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처럼 혼란이 계속되자 로마 시에서는 공화주의 정서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 이후 10년간 로마 코뮌이 들어서게 만들었다.
참조
[1]
서적
Levillain
[2]
서적
Mann
[3]
서적
Hüls
[4]
서적
Hüls
[5]
서적
Vitae et res gestae Pontificum romanorum et S.R.E. Cardinalium
https://books.google[...]
[6]
서적
Thomas
[7]
서적
Memorie istoriche cocern. le due canoniche di S. Maria di Reno e di S. Salvatore
Bologna
1752
[8]
서적
Mann
[9]
서적
Levillain
[10]
서적
Mann
[11]
서적
Mann
[12]
서적
Thomas
[13]
서적
Mann
[14]
서적
Mann
[15]
서적
Mann
[16]
서적
Mann
[17]
서적
Mann
[18]
서적
Mann
[19]
서적
Mann
[20]
서적
Mann
[21]
서적
Mann
[22]
서적
Mann
[23]
서적
Mann
[24]
서적
Mann
[25]
서적
Mann
[26]
서적
Mann
[27]
서적
Mann
[28]
서적
Mann
[29]
서적
Mann
[30]
서적
Mann
[31]
서적
Mann
[32]
서적
Mann
[33]
서적
Mann
[34]
서적
Mann
[35]
서적
Mann
[36]
서적
Mann, pg. 261
[37]
서적
Mann, pg. 262
[38]
서적
Mann, pg. 264
[39]
서적
Mann, pg. 265
[40]
서적
Mann, pg. 266
[41]
서적
Mann, pg. 267
[42]
서적
Mann, pg. 269
[43]
서적
Mann, pg. 263
[44]
서적
Mann, pg. 268
[45]
서적
Mann, pgs. 268–269
[46]
서적
Mann, pg. 271
[47]
서적
Mann, pg. 272
[48]
서적
Mann, pg. 274
[49]
서적
Mann, pg. 285
[50]
서적
Mann, pg. 286
[51]
서적
Mann, pg. 287
[52]
서적
Mann, pg. 290
[53]
서적
Mann, pgs. 290–291
[54]
서적
Mann, pg. 291
[55]
서적
Mann, pg. 292
[56]
서적
Mann, pg. 289
[57]
서적
Mann, pg. 293
[58]
서적
Mann, pg. 294
[59]
서적
Mann, pgs. 294–295
[60]
서적
The Normans in Europ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0
[61]
서적
Mann, pg. 296
[62]
서적
Mann, pg. 297
[63]
서적
Mann, pg. 298
[64]
서적
Mann, pg. 299
[65]
서적
Mann, pg. 300
[66]
서적
Mann, pg. 301
[67]
서적
Mann, pg. 302
[68]
서적
Mann, pg. 303
[69]
서적
Levillain, pg. 733
[70]
서적
Mann, pg. 304
[71]
서적
Levillain
[72]
서적
Mann
[73]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Honorius II
http://www.newadvent[...]
[74]
서적
Levillain
[75]
서적
Mann
[76]
서적
Mann
[77]
서적
Thomas
[78]
서적
Mann
[79]
서적
Mann
[80]
서적
Mann
[81]
서적
Mann
[82]
서적
Levillain
[83]
서적
Mann
[84]
서적
Mann
[85]
서적
Mann
[86]
서적
Mann
[87]
서적
Mann
[88]
서적
Mann
[89]
서적
Mann
[90]
서적
Mann
[91]
서적
Mann
[92]
서적
Mann
[93]
서적
Mann
[94]
서적
Mann
[95]
서적
Mann
[96]
서적
Mann
[97]
서적
Mann
[98]
서적
Mann
[99]
서적
Mann
[100]
서적
Mann
[101]
서적
Mann
[102]
서적
Mann
[103]
서적
Mann
[104]
서적
Mann
[105]
서적
Mann
[106]
서적
[107]
서적
[108]
서적
[109]
서적
[110]
서적
[111]
서적
[112]
서적
[113]
서적
[114]
서적
[115]
서적
[116]
서적
[117]
서적
[118]
서적
[119]
서적
[120]
서적
[121]
서적
The Normans in Europ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0
[122]
서적
[123]
서적
[124]
서적
[125]
서적
[126]
서적
[127]
서적
[128]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