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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마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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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온마쓰리는 일본 교토에서 열리는 축제로, 863년 역병을 물리치기 위한 고료에(御霊会)에서 유래했다. 이 축제는 야사카 신사의 신여 행차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야마보코(山鉾)라는 수레 행렬이 특징이다. 야마보코는 각 마을의 개성을 담아 제작되며, 순행 순서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다. 축제는 7월 한 달 동안 다양한 행사로 진행되며, 특히 야마보코의 조립 과정과 츠지마와시(辻回し) 기술은 관람객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기온마쓰리는 일본 전역의 다양한 축제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도 전통을 이어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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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마쓰리
기본 정보
기온 축제 요이야마
요이야마 기간의 기온 축제
기념일7월 한 달
개최 장소교토
종교적 성격종교 행사
시작일7월 1일
종료일7월 31일
축제 개요
일본어 명칭祇園祭 (기온마쓰리)
주요 행사야마보코 순행
축제 기간7월 한 달
주요 행사 기간요이요이요이야마 (宵々々山)
요이요이야마 (宵々山)
요이야마 (宵山)
기타 행사병풍 축제 (屏風祭り)
먹거리야키토리
타이야키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
통칭오이데, 오카에리
축제 특징
최초 개최869년
참고위키백과는 인터넷 백과사전이며, 기온 축제 이미지 투고 사이트가 아닙니다.

2. 역사

간노 에이토쿠(狩野永徳)가 그린 '락중락외도 병풍'(洛中洛外図屏風, 일본 국보)에는 기온에(祇園會)의 모습이 담겨 있다.


기온마쓰리(祇園祭)는 교토에서 매년 열리는 일본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로, 그 기원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869년, 세이와 천황은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 야사카 신사의 신인 스사노오에게 기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5] 당시 사람들은 역병이 원한을 품은 악령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 각 지역을 대표하는 66개의 장식된 창을 신센엔(神泉苑)에 세우고, 야사카 신사의 미코시(휴대용 신사)를 함께 모시는 의식을 거행했다.[6]

이후 기온마쓰리는 역병이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었고, 1000년부터는 매년 열리는 정기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닌의 난( 아시카가 막부 시대)으로 인해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까지 약 30년간 중단되었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부활되었다.[3]

기온마쓰리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단과 부활을 반복했다. 에도 시대에는 세 차례의 대화재(1708년 호에이 대화재, 1788년 덴메이 대화재, 1864년 돈돈야케)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되었다. 특히 1788년 덴메이 대화재 때는 피해가 심각하여 일부 수레는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막말 시기에는 금문의 변으로 인한 화재로 큰 피해를 보았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제도 변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역 사회의 노력으로 극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으나, 전후에 다시 부활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온마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古都 (고도)''에도 등장하며, 지다이 마쓰리, 아오이 마쓰리와 함께 "옛 수도의 3대 축제" 중 하나로 묘사된다.[7]

2. 1. 기온고료에(祇園御靈會)의 기원

863년(조간 5년), 역병 유행에 따라 조정이 신센엔(神泉苑)에서 처음으로 고료에(御霊会)를 개최한 것이 기온고료에의 기원이다.[66] 당시 사람들은 역병이 원혼의 저주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었다.[67] 이후 역병이 계속되자, 역신인 고즈덴노(牛頭天王)를 모시고 고료에를 통해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869년(조간 11년), 우라베 히로마로(卜部日良麿)는 66개의 창을 세우고 각 나라의 악령을 창에 옮겨 정화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약사여래(薬師如来)를 본지로 모시는 고즈덴노를 기리며 3개의 신여를 봉헌하여 고료에를 행하였다. 이 의식이 기온마쓰리의 기원으로 여겨진다.[6]

고료에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헤이안쿄(平安京)의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 헤이안쿄는 본래 내륙의 습지로 고온다습한 기후였고, 인구 집중과 상하수도 미비 등으로 인해 말라리아, 천연두, 인플루엔자, 이질, 홍역 등의 질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음양사들은 이러한 재앙이 사와라 친왕(早良親王)을 포함한 여섯 명의 원혼에 의한 것으로 여겼다.

970년(안나 3년)부터 매년 축제가 열리게 되었으며, 신불습합음양도, 수험도의 의식이 포함되었다. 기온마쓰리가 여름에 개최된 이유는 상수도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철에 전염병이 많이 유행하여 많은 이들이 탈수 증세 등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2. 2. 야마보코 행렬의 성립

기온고료에(祇園御霊会)는 초기부터 현대까지 기온신사(祇園社)의 신여 행차(神輿渡御)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현재와 같은 야마보코(山鉾)가 언제부터 함께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코(鉾)의 오래된 형태는 현재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아와타 신사(粟田神社)를 비롯하여 교토 주변과 시가현에 걸쳐 분포하는 켄보코(剣鉾)에 남아 있으며, 기온고료에의 보코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9]

현재 야마보코 행렬의 원형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 하나조노 천황 신기(花園天皇宸記) 원공 원년 7월 24일(1321년 8월 18일)조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보코를 둘러싼 '보코슈'(鉾衆) 주위에서 '코츠츠미'(鼓打)들이 풍류의 무곡을 공연했다고 한다.[70] 남북조 시대에는 부유한 상인 계층이 서로 풍류 배행을 선보였고, 무로마치 쇼군가에서 준비한 '''''쿠세마이구루마'(久世舞車)나 오토네리좌(大舎人座, 현 니시진)가 마련한 '사기마이'(鷺舞) 등 다양한 형태의 추가 공연 예술이 활발히 진행되었다.[71]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를 중심으로 하는 구 시모교 지역에 상공업자들로 구성된 자치 조직이 성립되면서, 각 마을은 개성을 살린 야마보코를 만들어 행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단독으로 행진하던 장대 형태의 보코와 갓코마이(羯鼓舞)를 공연하는 치고(稚児)를 태운 옛 행렬차가 합쳐져 지금과 같은 보코행렬이 성립되었다. 여기에 주로 사루가쿠노(猿楽能) 연목을 모방한 조형물인 '야마'(山)가 더해짐으로써,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오늘날의 야마보코 행렬과 유사한 형태가 나타났으며, 이를 락중락외도(洛中洛外図)에서 확인할 수 있다.[72]

오닌의 난으로 33년간 중단된 후, 1500년(메이오 9년)에 기온마쓰리가 재개되었다. 복구 과정에서 무로마치 막부의 봉행중이었던 마쓰다 부젠노카미 요리스케는 과거의 야마보코(山鉾)들에 대해 '고로(古老)의 자'로부터 청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온마쓰리 야마보코사(祇園会山鉾事, 야사카 신사 문서)로 기록하였다.[73] 이 자료는 오닌의 난 이전의 60개(전반 32개, 후반 28개)의[74] 야마보코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료이다. 또한 요리스케는 최초의 추첨식을 자신의 집에서 개최하고,[75] 기온마쓰리 집행에 타인의 주도권을 부여하여 상인들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만들기 위한 지침을 마련하는 등, 현재까지 이어지는 야마보코의 수와 명칭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76]

1533년(덴분 2년), 엔랴쿠지의 고발로 기온사의 제례가 중단되었으나, 상인들은 "신사가 없어도 야마보코 행진만은 하고 싶다"는 선언을 내놓아, 야마보코 행사가 이미 상인들이 주도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해석된다.[79]

2. 3. 근세 이후의 발전

1920년대의 기온마쓰리


에도 시대에 발생한 교토의 세 차례 대화재는 기온마쓰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708년(호에이 5년) 호에이 대화재 때는 야마보코(山鉾) 형식이 소박하여 복구가 빨랐지만, 1788년(덴메이 8년) 덴메이 대화재는 피해가 심각하여 칸코보코(函谷鉾) 복구에만 50년이 걸렸다. 이후 야마보코는 가세이 문화의 영향으로 대형화되고 화려해졌으며, 많은 히키야마(曳山)가 치도리 하푸(千鳥破風)를 장착하여 보코(鉾)와 비슷해졌다. 그러나 타카야마(鷹山)는 1826년(분세이 9년) 큰 비로 장식품이 손상된 후 행렬에서 제외되었다.

막말 금문의 변으로 1864년(겐지 원년) 발생한 돈돈야케(どんどん焼け)로 야마보코를 가진 마을들이 큰 피해를 보았지만, 나기나타보코(長刀鉾) 등 일부는 거의 무사했다. 이어진 메이지 유신 혼란기에는 기쿠스이보코(菊水鉾) 등 여러 야마보코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야마보코 순행을 지원하던 기초 마을 제도가 폐지되어 행사가 위협받았지만,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구되었다. 순행 코스가 여러 차례 변경되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1943년(쇼와 18년)부터 1946년(쇼와 21년)까지 중단되었다가 전후에 부활했다. 1980년대에는 중단되었던 '야스미야마(休み山)'가 차례로 부활했고, 고도 경제 성장기 교통 문제로 전축제(前祭)와 후축제(後祭)를 통합하여 공동 순행한 시기(1966년(쇼와 41년)~2013년(헤이세이 25년))를 거쳐, 2014년(헤이세이 26년)부터 후축제가 재개되는 등 전통 보존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3. 명칭

기온마쓰리(祇園祭)라는 명칭은 야사카 신사(八坂神社)가 신불습합(神仏習合) 시대에 비에이산에 속해 기온사(祇園社)라고 불리던 데서 유래한다. 기온사의 제신(祭神)인 고즈텐노(牛頭天王)는 불교(仏教)의 성지인 기온정사(祇園精舎)의 수호신으로 여겨졌기에 기온신(祇園神)이라고도 불렸다. 신사 이름과 주변 지명도 기온(祇園)이 되었으며, 제례 이름도 기온고령회(祇園御霊会)가 된 것이다. '''기온(祇園)'''의 어원에 대해서는 기온정사 항목을 참조하면 된다.

이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따른 신불분리(神仏分離)령에 의해 신사 이름이 야사카 신사(八坂神社)로 바뀌면서, 제례 이름도 불교적 색채를 제거하기 위해 "기온고령회(祇園御霊会)"에서 "기온마쓰리(祇園祭)"로 변경되었다(단, "祇園"이라는 명칭 자체는 앞서 언급한 대로 불교 유래임).

4. 행사 일정

다음은 기온마쓰리의 주요 연례 행사 일정이다.


  • 7월 1일~5일: 기뿌이리(忌布入), 참여하는 각 지역의 축제 개막식
  • 7월 2일: 구지토리시키(くじ取り式), 행렬 순서를 정하는 추첨, 시청에서 진행
  • 7월 7일: 아야가사보코(綾傘鉾)의 치고(稚児) 어린이들의 신사 참배
  • 7월 10일: 미코시(御輿)를 맞이하는 등롱 행렬
  • 7월 10일: 미코시 아라이(御輿洗い), 가모가와(鴨川)의 신성한 물로 미코시(御輿)를 씻는 의식
  • 7월 10일~13일: 꽃가마 제작
  • 7월 13일 (오전): 나기나타보코(長刀鉾)의 치고(稚児) 어린이들의 신사 참배
  • 7월 13일 (오후): 구세 신사(九世神社)의 치고(稚児) 어린이들의 신사 참배
  • 7월 14일: 요이요이요이야마(宵々々山)
  • 7월 15일: 요이요이요이야마(宵々々山)
  • 7월 16일: 요이야마(宵山)
  • 7월 16일: 요이미야 신신 호노 신지(宵宮神幸火祭), 예술 공연
  • 7월 17일: 야마보코(山鉾) 행렬
  • 7월 17일: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미코시(御輿) 행렬
  • 7월 18일~20일: 꽃가마 제작
  • 7월 21일: 요이요이요이야마(宵々々山)
  • 7월 22일: 요이요이요이야마(宵々々山)
  • 7월 23일: 요이야마(宵山)
  • 7월 24일: 야마보코(山鉾) 행렬
  • 7월 24일: 하나가사(花傘) 행렬
  • 7월 24일: 야사카 신사(八坂神社)로 향하는 미코시(御輿) 행렬
  • 7월 28일: 미코시 아라이(御輿洗い), 가모가와(鴨川)의 신성한 물로 미코시(御輿)를 씻는 의식
  • 7월 31일: 에키 신사(戎神社)에서 폐막식

5. 각종 행사

기온마쓰리는 크게 야사카 신사(八坂神社)가 주최하는 행사와 산보코초(山鉾町)가 주최하는 행사로 나뉜다. 일반적으로는 산보코초가 주최하는 행사를 "기온마쓰리"로 인식하며, 그중 산보코(山鉾) 행사만이 중요무형민속문화재(重要無形民俗文化財)로 지정되어 있다.

산보코초가 주최하는 행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산보코 행사이며, 이는 산보코가 설치되는 시기에 따라 전제(前祭, 사키노마쓰리)와 후제(後祭, 아토노마쓰리)[10]로 나뉜다. 산보코 행사는 요이야마(宵山, 전야제. 전제: 7월 14일 - 16일, 후제: 7월 21일 - 23일)와 산보코 순행(山鉾巡行, 전제: 7월 17일, 후제: 7월 24일)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야사카 신사 주최의 신사 행사로는 신교도고(神輿渡御, 신행: 7월 17일, 환행: 7월 24일)와 신교세(神輿洗, 7월 10일, 7월 28일) 등이 유명하다. 또한, 하나가사 연합회(花傘連合会)가 주최하는 하나가사 순행(花傘巡行, 7월 24일)도 야사카 신사 측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요이야마에는 오래된 가문이나 점포에서 전해 내려오는 병풍 등의 보물을 공개하기 때문에 병풍제(屏風祭)라는 별칭이 있다. 산보코 순행에서는 다양한 미술 공예품으로 장식된 중요유형민속문화재(重要有形民俗文化財)인 산보코가 거리를 순행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미술관"이라고도 불린다.

기온마쓰리는 여러 삼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 교토 삼대 축제 (다른 축제는 가미가모 신사(上賀茂神社) · 시모가모 신사(下鴨神社)의 아오이마쓰리(葵祭),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의 지다이마쓰리(時代祭))
  • 일본 삼대 축제(다른 축제는 오사카의 텐진마쓰리(天神祭), 도쿄의 산노마쓰리(千代田구)(山王祭 (千代田区)), 칸다마쓰리(神田祭))
  • 일본 삼대 끌기산 축제 (다른 축제는 기후현(岐阜県)다카야마시(高山市)의 다카야마마쓰리(高山祭), 사이타마현(埼玉県)치치부시(秩父市)의 치치부야마쓰리(秩父夜祭))
  • 일본 삼대 아름다운 축제 (다른 축제는 앞서 언급한 다카야마마쓰리와 치치부야마쓰리)


이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축제 중 하나이다.

오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해 기온마쓰리가 한때 중단되었지만, 서민들에 의해 부활되었다.

863년(貞觀 5년) 궁정에서 신젠엔(神泉苑)에서 처음으로 고료에(御霊会)를 거행했다. 고료에는 역병이나 죽은 사람들의 원령을 달래기 위한 제사였다.[12] 당시 역병은 원한을 남기고 죽은 사람들의 원령의 저주라고 여겨졌다.[13] 그러나 이후에도 역병이 계속 유행하자 우시고우텐노(牛頭天王)를 모시고 고료에를 행하여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869년(貞觀 11년), 오슈(陸奥)에서 조간 지진(貞觀地震)이 발생하여 쓰나미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지각 변동이 계속되고 사회 불안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전국의 영제국(令制国)의 수를 나타내는 66개의 창(矛)을 세우고, 그 창에 여러 나라의 악령을 옮겨 깃들게 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더러움을 쫒고, 신여(神輿) 3기와 약사여래(薬師如来)를 본지(本地)로 하는 우시고우텐노(牛頭天王)를 모시고 고료에를 거행했다. 이 869년(貞觀 11년)의 고료에가 기온마쓰리(祇園祭)의 기원으로 여겨지며, 2019년(令和元年)에는 제사 1150주년을 기념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료에가 생겨난 직접적인 배경은 헤이안쿄(平安京)가 원래 내륙 습지였기 때문에 고온다습한 지역이었던 점, 건도(建都)로 인한 인구 집중, 상하수도 시설의 부족 등으로 인해 말라리아(瘧), 천연두(裳瘡), 인플루엔자(咳病), 적리, 홍역 등이 대유행한 것이다. 그 원인이 나가오카쿄(長岡京) 천도 공사 중 발생한 후지와라노 타네쓰구(藤原種継) 암살 사건에서 무죄를 호소하며 죽은 와라 친왕(早良親王) 등 6명의 원령(怨霊)의 소행이라는 음양사(陰陽師)들의 卜占(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970년(安和 3년)부터 매년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제례는 신불혼합(神仏混淆)일 뿐만 아니라, 음양도(陰陽道)와 수행도(修験道)의 의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여름에 제사가 행해진 것은 상수도나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한여름에 많은 감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탈수 증상 등으로 사망한 것이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된다.

876년(貞觀 18년) 하리마노쿠니(播磨国) 히로미네진자(広峯神社)에서 우시고우텐노(牛頭天王)가 교토로 옮겨져[14] 현재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기온샤(祇園社)로 불리며 간신인(感神院)이라 하여 히에이잔(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에 속했다. 중세를 거치면서 기온샤는 엔랴쿠지의 말사(末寺)로 여겨지며 산몬(山門, 엔랴쿠지)의 락중(洛中) 지배의 거점이 되었다. 히요시곤겐(日吉権現)의 산왕제(山王祭)가 행해지지 않을 때는 기온고료에(祇園御霊会)도 연동하여 중지·연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온고료에는 창건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온신사(祇園社)의 신여행행(神輿渡御)을 중심으로 하지만, 현재와 같이 산보(山鉾)가 함께하게 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보(鉾)의 오래된 형태는 현재도 교토시 히가시야마구(東山区)의 아와타 신사(粟田神社)를 비롯하여 교토 주변에서 시가현(滋賀県)에 걸쳐 분포하는 검보(剣鉾)에 남아 있으며, 기온고료에의 보도 이와 유사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5]

현재의 산보 순행의 원형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 『화원천황신기(花園天皇宸記)』 겐표(元亨) 원년7월 24일(1321년8월 18일)조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보를 둘러싼 "보중(鉾衆)" 주변에서 "고다(鼓打)"들이 풍류의 무곡을 연주했다.[16] 남북조 시대에는 부유한 상인 계층이 경쟁적으로 풍류 박자물을 만들어 내고, 무로마치 쇼군가가 조진한 "구세마이샤(久世舞車)"나 다이샤닌자(大舎人座)(현재: 니시진(西陣))이 내놓은 "사기마이(鷺舞)" 등 다양한 형태의 부제의 예능이 성행하였다.[17]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를 중심으로 하는 (구)하쿄(下京) 지구에 상공업자(초슈(町衆))의 자치 조직 료소쿠초(両側町)가 성립되면서, 마을마다 독창적인 산보(山鉾)를 만들어 순행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단독으로 순행하던 막대 모양의 보와, 캇코부(羯鼓舞)를 연주하는 아이를 태운 야타이(屋台)가 합쳐져 현재와 같은 보샤(鉾車)가 성립되었고, 사루가쿠노(猿楽能) 연목을 본떠 만든 "산(山)"이 더해져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락중락외도(洛中洛外図)에 보이는 것과 같은 오늘날로 이어지는 산보 순행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18]

오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한 33년의 중단을 거쳐, 1500년(메이오(明応) 9년) 기온회가 재흥되었다. 메이오(明応) 연간에 계속된 재이(災異), 특히 1498년(메이오(明応) 7년)의 도카이 대지진·대쓰나미로 인한 열도 규모의 대재해 발생이 제례의 부흥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부흥에 있어서 무로마치 막부 봉행중(奉行衆) 마쓰다 부젠노카미 요리나가(松田豊前守頼亮)가 과거의 산보에 대해 "노인"으로부터 듣고, 오닌의 난 이전의 60기(전제 32기, 후제 28기)[19]의 산보를 아는 유일한 사료로 여겨지는 "기온회 산보사(祇園会山鉾事)"(야사카 신사 문서)를 기록하고, 최초의 쿠지토리식을 요리나가 사택에서 행하는 등[38] 기온제 재흥에 힘썼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산보의 수와 명칭이 고정된 것도 이때였다.[21] 요리나가는 자신의 재직 중에 기온제가 재흥된 것은 명가(冥加)라고 기록했다.[22][23]

1533년(텐분 2년) 엔랴쿠지(延暦寺) 측의 고소로 기온신사의 제례가 중지되었지만, 상인들은 "신사 행사 없이도 산보 순행은 하고 싶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산보 행사가 이미 상인 중심의 축제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24] 텐분 호케잇키(天文法華一揆) 한가운데, 엔랴쿠지와 결탁한 막부의 기온회 중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신사는 중지되었지만) 산보 순행은 행해졌다. 이는 상인의 자치적인 성격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5. 1. 나가타보코초 어린이 오센도(長刀鉾町稚児お千度)

長刀鉾町稚児|나가타보코초 어린이일본어 오센도는 7월 1일에 장도보코초(長刀鉾町) 어린이가 야사카 신사에 참배하여 축제의 무사를 기원하는 의식이다.[11] 어린이는 가무로(禿) 2명을 데리고 신사에 참배한다.[11]

어린이는 하얀 쓰무기에 가타기누를 입고 에보시를 쓴 후 금색 부채를 들고, 가무로는 미즈하쿠초 차림으로 오스베라카시 머리에 우치와오기를 든다.[11] 신사의 본전에서는 궁사(宮司)가 축문을 올리고, 무녀가 가시와데를 울리고 미코시를 씻는 미코시아라이에 사용하는 물을 뿌리는 의식을 행한다.[11]

5. 2. 쿠지토리시키(くじ取り式)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를 중심으로 하는 (구)하쿄(下京) 지구에 상공업자(초슈(町衆))의 자치 조직 료소쿠초(両側町)가 성립되면서, 마을마다 독창적인 산보(山鉾)를 만들어 순행하게 되었다. 야마보코(山鉾)의 행렬 순서를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의식인 쿠지토리시키(くじ取り式)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이어진 것이다.[38] 1500년(메이오(明応) 9년)에 무로마치 막부 봉행중(奉行衆)인 마쓰다 부젠노카미 요리나가(松田豊前守頼亮)가 자신의 사택에서 최초로 쿠지토리시키를 행하였다.[38] 현재는 교토 시장이 봉행(奉行) 역할을 맡는다.

5. 3. 치고샤 산(稚児社参)

稚児社参|ちごしゃさん일본어7월 13일 장도보(長刀鉾) 어린이와 7월 14일 구세고마가타(久世駒形) 어린이가 신사에 참배하는 절차이다.

5. 4. 호코타테・야마타테・히키조메(鉾建て・山建て・曳き初め)

산보(山鉾)는 7월 10일부터 각 초에서 조립에 들어간다. 이것을 야마타테(鉾建て)라고 부른다. 보(鉾)는 나가나타보코(長刀鉾) 등 일부를 제외하고 축제 때마다 새로 조립한다. 조립에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밧줄만으로 고정하는 '밧줄 매기(縄がらみ)'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흔들림을 완화하고, 목재의 접합부에 유연성을 부여하여 강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밧줄 매기는 에도 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 기술로, 숙련된 장인들이 담당한다.[15]

보(鉾)는 구조상 심목(心木)을 세우고 나서 조립하지만, 에야마(曳山)는 심목을 세우지 않고 지샤(地車) 위에 직접 조립한다. 가장 먼저 조립되는 것은 나가나타보코(長刀鉾)이며, 10일 아침에 시작하여 그날 안에 끝난다. 다른 보(鉾)는 12일부터 13일에 걸쳐 조립된다. 야마(山)는 12일부터 조립에 들어가지만, 오후네보코(大船鉾)는 14일부터 조립한다.[16]

조립이 끝나면, 순행 경로를 따라 시험 삼아 끌어보는 히키조메(曳き初め)를 실시한다. 히키조메는 보(鉾)의 경우 12일과 13일에, 야마(山)의 경우 13일에 실시한다. 히키조메는 일반인도 참가할 수 있으며, 특히 여성도 참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12일 오후에는 나가나타보코(長刀鉾)의 히키조메가 진행되며,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다.[17]

5. 5. 나카노초 오쿠미(中之町御供)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를 중심으로 하는 (구)하쿄(下京) 지구에 상공업자(초슈(町衆))의 자치 조직 료소쿠초(両側町)가 성립되면서, 마을마다 독창적인 산보(山鉾)를 만들어 순행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단독으로 순행하던 막대 모양의 보와, 캇코부(羯鼓舞)를 연주하는 아이를 태운 야타이(屋台)가 합쳐져 현재와 같은 보샤(鉾車)가 성립되었고, 사루가쿠노(猿楽能) 연목을 본떠 만든 "산(山)"이 더해져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락중락외도(洛中洛外図)에 보이는 것과 같은, 오늘날로 이어지는 산보 순행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18]

5. 6. 쇼미야사이(宵宮祭)

기온마쓰리에서 쇼미야사이(宵宮祭)는 천영제(遷霊祭)라고도 불리며, 신령을 본전에서 신여(神輿)로 옮기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데, 신령을 옮기는 순간이 클라이맥스이다.

5. 7. 요이야마 기간(宵山期間)

요이야마 기간에는 산보(山鉾)를 장식하고, 기온바야시(祇園囃子)를 연주하며, 각 마을 회관에서는 소장품을 전시하고 부적 등을 판매한다. 일부에서는 병풍제(屏風祭)라 하여, 오래된 가옥이나 상점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보를 공개하기도 한다.[15]

5. 7. 1. 호코・히키야마 참배(鉾・曳山の拝観)

요이야마 기간에는 몇몇 호코와 히키야마에 일반인이 올라가 볼 수 있다. 다만, 나가나타보코(長刀鉾)를 비롯하여 여성이 탈 수 없는 곳도 있다.[15] 탑승하려면 각 호코와 히키야마에서 판매하는 지마키 등을 구입해야 한다.

5. 8. 야마보코 순행(山鉾巡行)



야마보코 순행(山鉾巡行)은 기온마쓰리의 핵심 행사로, 산보코초(山鉾町)가 주최한다. 산보코 행사는 산보코가 설치되는 시기에 따라 전제(前祭, 사키노마쓰리)와 후제(後祭, 아토노마쓰리)[10]로 나뉘며, "요이야마(宵山, 전야제. 전제: 7월 14일 - 16일, 후제: 7월 21일 - 23일)"와 "야마보코 순행(전제: 7월 17일, 후제: 7월 24일)"이 유명하다.

에도 시대 교토의 대화재 중 1788년(덴메이 8년) 덴메이 대화재는 칸코보코(函谷鉾) 복구에만 50년이 소요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후 야마보코는 가세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대형화, 화려해졌다. 막말 금문의 변으로 인한 1864년(겐지 원년) 돈돈야케(どんどん焼け)로 피해를 입었으나, 나기나타보코(長刀鉾) 등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혼란기에는 여러 야마보코가 중단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야마보코 순행을 지탱하던 기초 마을 제도가 폐지되어 위협받았지만, 복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1943년(쇼와 18년)~1946년(쇼와 21년) 중단되었다가, 전후 중단되었던 야마보코들이 1980년대 부활했다. 1966년(쇼와 41년)~2013년(헤이세이 25년) 공동 순행을 거쳐, 2014년(헤이세이 26년)부터 후제가 재개되는 등 전통 보존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야마보코와 야마(山)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구분야마보코야마(山)
무게약 12톤[1]1,200~1,600kg[9]
높이약 27미터[1]약 6m
바퀴 지름약 1.9미터해당 없음
인원약 30~40명이 끌고, 보통 두 명이 쐐기로 조종[1]끌거나, 밀거나, 옮기는 데 14~24명



기온마쓰리는 교토 삼대 축제, 일본 삼대 축제, 일본 삼대 끌기산 축제, 일본 삼대 아름다운 축제 중 하나로, 일본 대표 축제이다. (교토 삼대 축제: 가미가모 신사(上賀茂神社) · 시모가모 신사(下鴨神社)의 아오이마쓰리(葵祭),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의 지다이마쓰리(時代祭) / 일본 삼대 축제: 오사카 텐진마쓰리(天神祭), 도쿄 산노마쓰리(千代田구)(山王祭 (千代田区)), 칸다마쓰리(神田祭) / 일본 삼대 끌기산 축제, 일본 삼대 미제: 기후현(岐阜県)다카야마시(高山市) 다카야마마쓰리(高山祭), 사이타마현(埼玉県)치치부시(秩父市) 치치부야마쓰리(秩父夜祭))

기온마쓰리는 869년(貞觀 11년) 조간 지진 등 전국적인 지각 변동과 사회 불안 속에서, 악령을 쫒고 우시고우텐노(牛頭天王)를 모시는 고료에(御霊会)를 거행한 것이 기원으로, 2019년(令和元年) 1150주년을 기념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 중심 상공업자(초슈(町衆)) 자치 조직 료소쿠초(両側町) 성립으로 마을마다 독창적인 산보(山鉾)를 만들어 순행했다. 오닌의 난(応仁の乱)으로 33년 중단 후, 1500년(메이오(明応) 9년) 상인 중심으로 부활했다. 1533년(텐분 2년) 상인들은 "신사 행사 없이도 산보 순행은 하고 싶다" 성명, 산보 행사가 상인 중심 축제임을 보여주었다.

5. 8. 1. 야마보코 순행 관람 포인트

(기온마쓰리 문서의 야마보코 순행 관람 포인트 섹션은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작성할 수 없습니다.)

5. 8. 2. 야마보코 순행 관련 사람들

야마보코 순행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 끌이(曳き方): 야마보코를 끄는 역할을 한다.
  • 선창(音頭方): 야마보코의 진행 방향을 지시하고,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 악사(囃子方): 야마보코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바퀴 담당(車方): 야마보코의 바퀴를 관리하고 방향 전환을 돕는다.
  • 지붕 담당(屋根方): 야마보코의 지붕 위에서 안전을 책임지고, 장식 등을 관리한다.
  • 인형 담당(人形方): 야마보코에 장식된 인형을 관리하고 보수한다.
  • 짊어지기(舁き方): 야마(山)를 짊어지는 역할을 한다.
  • 마을회 임원(町会役員): 야마보코 순행을 총괄하고, 각 마을을 대표하여 행사를 진행한다.

5. 9. 하나가사 순행(花傘巡行)

1966년에 후제(後祭) 야마보코 순행(山鉾巡行)이 전제(前祭)에 통합되면서, 그 대안으로 시작된 것이 하나가사 순행(花傘巡行)이다.[10] 야마보코 순행이 웅장한 남성들의 축제라면, 하나가사 순행은 어린이 신여(神輿)를 선두로, 사자춤(獅子舞), 사기오도리(鷺踊), 고전 예능, 어린이들의 검무, 무녀 행렬, 그리고 기온마쓰리의 부인회 등 주로 여성들이 참가하는 화려한 행렬로 구성되어 야마보코 순행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하나가사 순행은 원래 야마보코 순행과 같은 코스로 진행되었으나, 교통 체증 등의 문제로 2006년부터 코스가 변경되었다. 2018년에는 폭염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2023년에 부활하면서 시조테라마치(四条寺町)를 동쪽으로 가는 경로가 추가되었다.

6. 야마보코(山鉾)

무로마치 시대에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를 중심으로 하는 (구)하쿄(下京) 지구에 상공업자(초슈(町衆)) 자치 조직인 료소쿠초(両側町)가 성립되면서, 각 마을은 독창적인 야마보코(山鉾)를 만들어 순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써 단독으로 순행하던 장대 형태의 보코와 갓코마이(羯鼓舞)를 공연하는 치고(稚児)를 태운 옛 행렬차가 합쳐져 지금과 같은 보코 행렬이 성립되었다. 여기에 주로 사루가쿠노(猿楽能) 연목을 모방한 조형물인 '야마'(山)가 더해짐으로써,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는 오늘날의 야마보코 행렬과 유사한 형태가 나타났으며, 이를 간노 에이토쿠(狩野永徳)가 그린 '락중락외도(洛中洛外図) 병풍'(일본 국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72]

오닌의 난으로 33년간 중단되었다가 1500년(메이오 9년)에 기온마쓰리가 재개되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봉행중이었던 마쓰다 부젠노카미 요리스케는 과거 야마보코에 대해 '고로(古老)의 자'로부터 청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온마쓰리 야마보코사(祇園会山鉾事, 야사카 신사 문서)"를 기록했다.[73] 이는 오닌의 난 이전 60개(전반 32개, 후반 28개) 야마보코를[74]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료이다.

1533년(덴분 2년), 엔랴쿠지가 기온사의 제례를 중단시켰으나, 상인들은 "신사가 없어도 야마보코 행진만은 하고 싶다"고 선언하여, 야마보코 행사가 이미 상인 주도 축제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79]

에도 시대 교토의 세 차례 대화재는 야마보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788년(덴메이 8년) 덴메이 대화재는 피해가 심각하여, 칸코보코(函谷鉾) 복구에만 50년이 걸렸다. 이후 야마보코는 가세이 문화의 영향으로 대형화되고 부품 및 장식품이 화려해졌다.[76]

막말 금문의 변으로 발생한 1864년(겐지 원년) 돈돈야케(どんどん焼け)로 야마보코를 가진 마을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메이지 유신 혼란기에 기초 마을 제도 폐지로 행사 지속이 위협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구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1943년(쇼와 18년)~1946년(쇼와 21년))되었다가 전후 1980년대에 중단된 야마보코가 차례로 부활했다.

6. 1. 야마보코 목록(山鉾一覧)

기온마쓰리의 야마보코는 전제(前祭)와 후제(後祭)로 나뉘어 순행한다. 각 야마보코는 고유한 명칭과 유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제비뽑기를 통해 순서를 정하지만, 일부는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정해진 순서대로 순행한다.
전제(前祭) 야마보코

명칭제비뽑기위치 및 특징
나기나타보코(長刀鉾)선두를 이끄는 야마보코. 하야시가타(囃子方)와 치고(稚児)를 태운다.
호카보코(放下鉾)아악(雅楽)의 태평악(太平楽)에서 유래한 진보코(真鉾)를 사용한다.
이와토야마(岩戸山)아마테라스의 아마노이와토(天岩戸) 전설을 재현한다.
후네보코(船鉾)진구 황후신라 정벌을 모티브로 한 배 모양의 야마보코.
기쿠스이보코(菊水鉾)기쿠스이 정(菊水井)에서 유래한 보코(鉾).
야마부시야마(山伏山)야마부시(山伏)의 모습을 묘사한다.
시조카사보코(四条傘鉾)가사보코(傘鉾)와 보테후리(棒振り)로 구성된다.
쓰키보코(月鉾)쓰쿠요미를 모시는 야마보코.
니와토리보코(鶏鉾)고사기(故事記)에 나오는 간코도리(諫鼓鶏)를 모티브로 한다.
칸코보코(函谷鉾)맹상군의 고사에서 유래한 보코(鉾).
하쿠라쿠텐야마(白楽天山)하쿠라쿠텐(白楽天)과 도린 선사(道林禅師)의 문답을 묘사한다.
아라레텐진야마(霰天神山)덴진(天神) 신앙과 관련된 야마보코.
호쇼야마(保昌山)후지와라노 야스마사와 하카마다레 야스스케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아시카리야마(芦刈山)요교(謡曲) 아시카리(芦刈)를 소재로 한다.
쓰루야마(占出山)진구 황후신라 정벌 전 점을 친 이야기를 묘사한다.
유즈키야마(油天神山)덴진(天神) 신앙과 관련된 야마보코.
기타칸논야마(北観音山)요로보살(楊柳観音)을 모시는 야마보코.
미나미칸논야마(南観音山)요로보살(楊柳観音)을 모시는 야마보코.
모치쓰키야마(孟宗山)맹종(孟宗)의 효행을 묘사한다.
가쿠쿄야마(郭巨山)곽거(郭巨)의 효행을 묘사한다.
타이시야마(太子山)쇼토쿠 태자와 관련된 야마보코.
야마다치야마(木賊山)요교(謡曲) 도쿠사(木賊)를 소재로 한다.
하쿠가야마(伯牙山)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를 묘사한다.


후제(後祭) 야마보코

명칭제비뽑기위치 및 특징
하시벤케이야마(橋弁慶山)고조대교(五条大橋)에서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무사시보 벤케이의 만남을 묘사한다.
기타칸논야마(北観音山)요로보살(楊柳観音)을 모시는 야마보코.
미나미칸논야마(南観音山)요로보살(楊柳観音)을 모시는 야마보코.
스즈카야마(鈴鹿山)스즈카고젠(鈴鹿御前)을 모시는 야마보코.
하치만야마(八幡山)하치만 신(八幡神)을 모시는 야마보코.
조묘야마(浄妙山)헤이케 이야기의 쓰쓰이 조묘(筒井浄妙)와 이치라이 법사(一来法師)의 싸움을 묘사한다.
고이산(鯉山)요교(謡曲) 고이(鯉)를 소재로 한다.
구로누시야마(黒主山)오토모노 구로누시(大伴黒主)를 묘사한다.
에키진자야마(役行者山)엔노 교자(役行者)를 모시는 야마보코.
오후네보코(大船鉾)진구 황후신라 정벌을 모티브로 한 배 모양의 야마보코.


야스미야마(休み山)


  • 후겐조야마(布袋山)
  • 다카야마(鷹山)
  • 이케노오야마(池尾山)
  • 가라쓰야마(唐津山)
  • 야오야야마(八百屋山)

현존하지 않는 야마보코

  • 니시키오지야마(錦小路山)
  • 겐지야마(源氏山)
  • 쓰치구모야마(土蜘蛛山)
  • 가스가야마(春日山)
  • 가스가류진야마(春日竜神山)
  • 미요시야마(三吉山)
  • 가미오야마(蟷螂山)
  • 시조카사보코(四条笠鉾)
  • 아야카사보코(綾傘鉾)


※표시는 제비뽑기를 하지 않는 야마보코를 의미한다.

6. 2. 야마보코 순행 순서(山鉾の巡行順)

기온마쓰리의 야마보코 순행은 전제(前祭)와 후제(後祭)로 나뉘어 진행된다. 각 순행의 순서는 대부분 제비뽑기(くじ取り式)를 통해 결정되지만, 제비뽑기를 하지 않는 야마보코(山鉾)도 있다. 이를 '제비뽑기 불필요'(くじ取らず)라고 한다.

순서전제(前祭) (7월 17일)후제(後祭) (7월 24일)
제비뽑기 불필요
(くじ取らず)
나가나타보코(長刀鉾), 선두 야마보코, 간코보코(函谷鉾), 호카보코(放下鉾), 이와토야마(岩戸山), 기타칸논야마(北観音山), 미나미칸논야마(南観音山)하시벤케이야마(橋弁慶山), 선두 야마보코, 기타칸논야마(北観音山), 미나미칸논야마(南観音山), 스즈카야마(鈴鹿山), 하치만야마(八幡山), 오후네보코(大船鉾)



1500년(메이오 9년), 오닌의 난 이후 33년 만에 기온마쓰리가 재개되었을 때, 무로마치 막부의 봉행중이었던 마쓰다 부젠노카미 요리나가가 최초의 제비뽑기를 자신의 집에서 개최했다.[38] 그는 기온마쓰리가 상인 중심의 축제가 되도록 이끌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야마보코의 수와 명칭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21]

1533년(덴분 2년)에는 엔랴쿠지의 고발로 기온사의 제례가 중단되었으나, 상인들은 "신사가 없어도 야마보코 행진만은 하고 싶다"는 선언을 통해 야마보코 행사가 이미 상인들이 주도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24]

6. 3. 가이쇼(会所)

야마보코 운영 기지인 가이쇼(会所)는 야마보코초(山鉾町)에 설치되며, 그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도로에 면한 정면에 지붕의 용마루가 있는 표동형 마치카이쇼(表棟型町会所)와, 도로에 면한 정면에 지붕의 처마가 있는 오쿠동형 마치카이쇼(奥棟型町会所)가 있다.[18]

각 야마보코의 가이쇼는 다음과 같다.

야마보코위치가이쇼 형태
나가나타보코(長刀鉾)시조 거리 남쪽, 무로마치 거리 동쪽표동형 마치카이쇼
하카보코(函谷鉾)시조 거리 남쪽, 무로마치 거리 서쪽표동형 마치카이쇼
가키츠바타 산(蟷螂山)니시키코지 거리 남쪽, 무로마치 거리 동쪽표동형 마치카이쇼
아시카리야마(芦刈山)아야노코지 거리 북쪽, 니시노토인 거리 동쪽오쿠동형 마치카이쇼
쓰키보코(月鉾)시조 거리 남쪽, 무로마치 거리 서쪽표동형 마치카이쇼
야마부시야마(山伏山)무로마치 거리 동쪽오쿠동형 마치카이쇼
기쿠스이보코(菊水鉾)무로마치 거리 동쪽오쿠동형 마치카이쇼
시조카사보코(四条傘鉾)시조 거리 남쪽, 무로마치 거리 동쪽표동형 마치카이쇼
유레이야마(油霊山)아부라노코지 거리 동쪽오쿠동형 마치카이쇼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시조무로마치(四条室町)를 중심으로 하는 (구)하쿄(下京) 지구에 상공업자(초슈(町衆))의 자치 조직 료소쿠초(両側町)가 성립되면서, 마을마다 독창적인 산보(山鉾)를 만들어 순행하게 되었다.[18]

6. 4. 요리초(寄町)

기온마쓰리는 야사카 신사(八坂神社)가 주최하는 행사와 산보코초(山鉾町)가 주최하는 행사로 나뉜다. 야마보코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요리초(寄町) 제도이다. 요리초는 각 야마보코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조직으로, 재정 지원, 인력 제공, 행사 준비 등 야마보코 운영 전반을 담당했다.

기쵸(寄町) 제도가 폐지된 후, 야사카 신사의 신자 조직인 세이세이코샤(清々講社)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세이세이코샤는 야마보코 운영 지원뿐만 아니라, 신사 행사 지원, 지역 사회 공헌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온마쓰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7. 지고(稚児)

기온마쓰리에서 지고(稚児)는 신의 사자 또는 신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어린이들이다. 마쓰리 기간 동안 특별한 의상을 입고 다양한 의식에 참여한다.


  • 나가타보코(長刀鉾)의 지고는 매년 선발되는 살아있는 신으로, 특별한 수행을 거쳐 마쓰리에 참여한다. 이 어린이는 나가타보코에 탑승하여 순행을 이끌며, 신성한 구역을 나타내는 시메나와(注連縄)를 자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10]
  • 아야가사보코(綾傘鉾)의 지고는 6명의 어린이로 구성되며, 이들은 막대기를 들고 춤을 추는 등 다양한 민속 예능을 선보인다. [17]
  • 시조우산보코(四条傘鉾)에서는 어린이 대신 성인 남성 2명이 지고 역할을 대신한다.[18]
  • 구세고마가타(久世駒形) 어린이는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제신인 스사노오노 미코토(スサノオ尊)의 아라미타마(荒御魂, 거친 신령)를 상징하며, 말 모양 장치를 목에 걸고 행사에 참여한다.[19]
  • 말장치고(馬長稚児)는 가미가모 신사(上賀茂神社)에서 온 어린이로, 특별한 의상을 입고 말에 타서 행렬에 참여한다.

8. 각종 고전 예능

기온마쓰리에서는 다양한 고전 예능이 공연된다.

예능 종류설명
사기마이(鷺舞)니시진(西陣)의 다이샤닌자(大舎人座)에서 유래한 예능으로, 무로마치 쇼군가에 의해 기온마쓰리에 도입되었다.[17]
코사기오도리(子鷺踊り)사기마이에서 파생된 어린이들의 춤이다.
고마치오도리(小町踊り)어린이들이 추는 춤의 일종이다.
기온마쓰리 온도(祇園祭音頭)기온마쓰리를 주제로 한 노래와 춤이다.
이와미카구라(石見神楽)시마네현 서부 이와미 지방에 전해지는 전통 예능이다.
만토오도리(万灯踊)등불을 들고 추는 춤이다.
화가의 춤(花街の踊り)화류계 여성들이 추는 춤이다.
기온덴가쿠(祇園田楽)덴가쿠(田楽)는 풍년을 기원하며 모내기 등의 농경 의례에서 유래한 예능이다.
로쿠사이넨부쓰오도리(六斎念仏踊り)넨부쓰(念仏)는 불교에서 부처를 생각하며 염불을 외우는 수행법이다.
무사 행렬(武者行列)무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행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능들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에 부유한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풍류 박자물을 만들고, 무로마치 쇼군가가 구세마이샤(久世舞車)를 조진하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17]

9. 여성 금제와 그 완화

女人禁制일본어(여인금제)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관습으로, 여성은 야마보코에 탑승할 수 없었다. 이는 야마보코가 신성한 남성 영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이러한 전통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부 야마보코에서는 여성의 탑승을 허용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어린이의 경우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탑승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야마보코의 조립이나 밧줄 묶기 등 준비 작업에는 여성이 참여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2000년대 초에는 "헤이세이 여자보 청음회(헤이세이 온나보코 사야네카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여성들도 야마보코를 끌 수 있도록 활동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여성 금제에 도전하며, 기온마쓰리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10. 회화 자료

가와야마 카잔(横山華山)의 "기온제례도권(祇園祭礼図巻)"과 "기온제보코조권(祇園祭鉾調巻)" 등이 기온마쓰리를 묘사한 회화 자료로 꼽힌다.[10]

11. 영상 자료

공익재단법인 교토시 문화관광자원보호재단과 교토시 문화재보호과가 운영하는 "교토의 역사와 문화 영상 라이브러리"에서 기온마쓰리 관련 기록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12. 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고도''에서 기온마쓰리는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지다이 축제, 아오이 축제와 함께 "옛 수도의 3대 축제" 중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7]

13. 일본 전국의 기온마쓰리

祇園祭일본어는 일본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축제로, 교토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祇園祭일본어에서 유래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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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Horses, Dragons, and Disease in Nara Japa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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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The Old Capital North Point P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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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문 Matsuri -Essence of Japanese Spirituality- 2014
[10] 문서 近年、マスコミなどで「さきまつり」などと読むケースがあるが、「さき'''の'''まつり」と「の」が入るのが伝統的で正式な呼称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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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狂言『鬮罪人』では、京都の町々が毎年趣向を凝らして山の作り物を考案する場面が描かれており、山鉾巡行の草創期には、人形ではなく扮装した人が乗り、山の題材は固定化されておらず、流動的であったことが窺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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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PDF 鷹山の歴史 ―山の形態変化を中心に―(公益財団法人祇園祭山鉾連合会) http://www.gionmatsu[...]
[21] 문서 『祇園社記』第十五によれば、応仁の乱以前には58基の山鉾があり、「弓矢鉾」「甲鉾」「達磨鉾」「地蔵鉾」「韋駄天山」「弁慶衣川山」「鵜飼舟山」「大鋸引山」「那須与一山」「泉小二郎山」「自然居士山」「朝比奈門山」「天鼓山」などの廃絶した山鉾が列記されている。この中には今では山鉾を出さない町も含ま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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