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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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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마즈에는 일본 에도 시대에 발생한 지진을 주제로 제작된 판화로, 특히 1855년 안세이 대지진 이후 유행했다. 가시마 신궁의 요석과 지진 메기의 결합, 그리고 흑선 내항과 같은 사회적 사건들이 나마즈에의 모티프가 되었다. 나마즈에는 지진의 원인, 복구 과정, 그리고 사회 풍자를 담았으며, 지진 메기를 악과 선의 양면으로 묘사했다. 이 판화는 서민들의 심리적 치유와 세상 개혁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며, 풍자적인 요소와 정보성을 특징으로 한다. 나마즈에는 에도 시대 후기 정보화 사회의 산물이며, 제작자는 불분명하지만, 우키요에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에는 일본 민속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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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즈에
일반 정보
메기 그림
에도 시대 말기의 메기 그림
유형풍자화, 민화
기원안세이 대지진 이후
주제메기
관련 사건안세이 대지진
설명
목적재해의 원인 설명
사회 비판
행운 기원
특징민간신앙 반영
다양한 메기 묘사
지진에 대한 해석 다양성
시대적 배경에도 시대 말기 사회상 반영
주요 등장인물메기
에비스
다이코쿠텐
가시마 대명신
역사적 맥락
발생 배경안세이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유행 시기안세이 대지진 직후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
사회적 영향재건 의지 고취
사회 비판 의식 확산
민중의 불안 해소
현대적 의미재해와 사회에 대한 풍자와 교훈
예술적 특징
표현 기법단순하고 익살스러운 그림체
과장된 표현과 상징 사용
다양한 색상과 구도 활용
주제의식권력 비판
사회 부조리 풍자
민중의 소망 표현
종류
대표적인 예메기와 가시마 대명신
메기와 칠복신
메기와 인간의 싸움
참고 문헌
관련 자료가토 미쓰오, 『지진과 민중』, 1995년
다카다 마모루, 『에도의 유행병』, 1995년
기타하라 이토코, 『재해와 일본인』, 2013년
호소다 히로코, 『메기 그림: 지진 봉납과 민중의 소원』, 2016년
오쿠보 준이치, 『메기 그림의 우키요에사』, 2021년
박병도, 『지진과 사회상』, 2021년
외부 링크
관련 자료코토뱅크: 메기 그림
일본어
일본어 명칭鯰絵 (なまずえ)
로마자 표기Namazue

2. 역사

일본에서는 원래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를 큰 뱀(용)으로 여겼다. "대지를 동물이 지탱하고 있으며, 이것이 움직이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신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이 동물을 뱀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에이 원년(1624년)에 제작된 『대일본국 지진의 그림』에는 일본 열도를 용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머리와 꼬리가 겹쳐지는 히타치국요석이 그려져 있다. 아사이 료이가 간분 2년(1662년)에 발생한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을 기록한 『요석』에도 "용왕이 화를 낼 때 대지가 흔들린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뱀이 메기로 바뀌는 전설이 나타났다.치쿠부시마 연기』에는 용이 큰 메기로 변하여 비와호의 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전설의 영향으로 지진 신화에서 대지를 지탱하는 뱀이 지진 메기로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마쓰오 바쇼하이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대지진이 연이어 일어나 용이 승천하려나(시슌)
길이 30m의 메기일 테지(토세이)
(엔포 6년(1678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진 메기가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후 가시마 대명신과 요석 신앙과 결합하여 "평소에는 가시마 대명신이 요석으로 누르고 있던 큰 메기가 날뛰어 지진이 일어난다"는 독특한 지진 신화가 만들어졌다. 미야타 노보루는 가시마 신궁의 메기 남자 전설이 이러한 신화 성립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간에이 10년(1533년) 지진 때 가시마 신사 신관이 가마를 메고 재앙을 물리쳤다는 전승, 그리고 가시마 신관을 메기라고 부르는 전설이 있었다.

19세기 초, 분세이 오미 지진(1819년)을 계기로 재해 가와라반에 처음으로 메기 그림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젠코지 지진(1847년), 오다와라 지진(1853년) 등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나마즈에가 그려진 가와라반이 발행되었다. 덴포 개혁(1842년)으로 출판 통제가 강화되면서 무허가 출판물이 증가했는데, 유아사 토시코는 이러한 현상이 안세이 대지진 이후 나마즈에가 대량 유통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안세이 대지진(1855년)으로 나마즈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진 직후부터 다양한 주제와 내용의 나마즈에가 제작되어 당시 사회상과 민중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안세이 대지진 이후 1891년(메이지 24년) 노비 지진 때 다시 메기 그림이 나타났다. 『단단진문』 메이지 24년 11월 14일호에 실린 메기 그림은 쌀값 폭등을 풍자하며, 메기와 멧돼지가 쌀가마니 지게 막대기를 짊어진 모습을 그렸다.

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 때도 메기 그림이 등장했다. 『시사만화』(시사신보 일요판 부록) 다이쇼 12년 10월 7일호에 게재된 『2분 전의 지진이 곤베이 님의 내각을 낳았다』는 지진으로 탄생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을 풍자한 그림이다. 이후에도 수년 동안 지진 피해를 기억하기 위해 메기 그림이 등장했다.

자유민권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고위 관료 풍자화에 메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메이지 시대 관리가 메기 수염을 길렀기 때문이다.

2. 1. 지진 메기의 성립

일본에서는 원래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를 큰 뱀(용)으로 여겼다. "대지를 동물이 지탱하고 있으며, 이것이 움직이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신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이 동물을 뱀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에이 원년(1624년)에 제작된 『대일본국 지진의 그림』에는 일본 열도를 용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머리와 꼬리가 겹쳐지는 히타치국요석이 그려져 있다. 아사이 료이가 간분 2년(1662년)에 발생한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을 기록한 『요석』에도 "용왕이 화를 낼 때 대지가 흔들린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뱀이 메기로 바뀌는 전설이 나타났다.치쿠부시마 연기』에는 용이 큰 메기로 변하여 비와호의 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전설의 영향으로 지진 신화에서 대지를 지탱하는 뱀이 지진 메기로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마쓰오 바쇼하이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대지진이 연이어 일어나 용이 승천하려나(시슌)
길이 30m의 메기일 테지(토세이)
(엔포 6년(1678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진 메기가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후 가시마 대명신과 요석 신앙과 결합하여 "평소에는 가시마 대명신이 요석으로 누르고 있던 큰 메기가 날뛰어 지진이 일어난다"는 독특한 지진 신화가 만들어졌다. 미야타 노보루는 가시마 신궁의 메기 남자 전설이 이러한 신화 성립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간에이 10년(1533년) 지진 때 가시마 신사 신관이 가마를 메고 재앙을 물리쳤다는 전승, 그리고 가시마 신관을 메기라고 부르는 전설이 있었다.

2. 1. 1. 가시마 신궁과 요석

요석은 고대 일본의 석신 신앙이 불교의 금강보석 개념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중세부터 가시마 신궁은 이 금강보석이 있는 장소 중 하나로 알려졌다. 가시마 신궁의 요석이 지진을 억제한다는 신앙 또한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겐케이쿄키 분로쿠 5년(1596년) 윤7월 15일 조항에는 지진 방지 주문으로 유명한 다음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흔들려도 설마 빠져나가지 못하리 요석, 가시마의 신이 있는 한"

2. 1. 2. 뱀에서 메기로

에도 시대 초기까지는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가 큰 뱀(용)이라고 생각했다. "대지를 동물이 지탱하고 있으며, 이것이 움직이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지진 신화는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지만, 이 동물을 뱀으로 하는 신화는 동아시아 각지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것이다간에이 원년(1624년)에 제작된 『대일본국 지진의 그림』에서는, 일본 열도를 용사가 둘러싸고, 그 머리와 꼬리가 겹쳐진 히타치국요석이 그려져 있다。 아사이 료이가 간분 2년(1662년)에 발생한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의 전말을 기록한 『요석』에서도 "용왕이 화낼 때 대지가 흔들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진 신화·민간 신앙과는 별개로, 뱀이 메기로 바뀌는 전설이 중세까지 성립한다。 『치쿠부시마 연기』에는 용사가 큰 메기로 변하여 비와호의 주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설의 영향을 받아 지진 신화에서 대지를 지탱하는 큰 뱀이 지진 메기로 바뀌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를 시사하는 논술은 마쓰오 바쇼하이쿠에서 찾을수 있다

대지진이 연이어 일어나 용이 승천하려나(시슌)
길이 30m의 메기일 테지(토세이)
(엔포 6년(1678년))


이러한 경위를 거쳐 지진 메기가 성립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키타하라는 대략 17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2. 1. 3. 지진 메기와 가시마 신앙의 결합

가시마 대명신과 요석에 결부된 지진 메기는 "평소에는 가시마 대명신이 요석으로 억누르고 있던 큰 메기가 날뛰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지진 신화를 형성했다. 미야타 노보루는 이러한 신화가 성립된 배경에 가시마 신궁의 메기 남자 전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간에이 10년(1533년)에 발생한 지진 때, 가시마 신사의 신관이 가마를 메고 재앙을 물리쳤다는 전승이 있으며, 가시마의 신관을 메기라고 하는 전설도 있었다. 케야 마코토는 간분에서 엔포 시기 즈음에 가시마와 지진 메기를 연결시킨 속신이 정착되었다고 말한다.

2. 2. 재해 가와라반(瓦版)과 나마즈에의 탄생

19세기 초, 분세이 오미 지진(1819년)을 계기로 재해 가와라반에 처음으로 메기 그림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젠코지 지진(1847년), 오다와라 지진(1853년) 등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나마즈에가 그려진 가와라반이 발행되었다. 덴포 개혁(1842년)으로 출판 통제가 강화되면서 무허가 출판물이 증가했는데, 유아사 토시코는 이러한 현상이 안세이 대지진 이후 나마즈에가 대량 유통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젠코지 지진 재해 가와라반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모습으로 지진 메기가 그려져 있다. 재해 당시 젠코지에서는 50일간의 어개장이 진행 중이었고, 전국에서 7천에서 8천 명의 참배객이 방문했다. 지진으로 젠코지 주변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젠코지 본당은 피해를 면했고, 이곳으로 피신한 5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신자는 화를 면했다. 이 일은 젠코지 신앙을 칭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21년 현재, 젠코지 지진과 관련된 메기 그림은 3점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메기와 대치하는 것은 아미타여래이다.

오다와라 지진과 관련된 '상주 하코네산 오다와라 어성하 대지진의 그림'이 게재된 단색 가와라반에는 지진에 대한 기술은 없지만, 피해 상황을 전하는 그림과 함께 표주박 메기를 모티브로 한 메기·요석·가시마 다이묘진의 3요소를 가진 메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2. 3. 안세이 대지진과 나마즈에

안세이 대지진(1855년)으로 나마즈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진 직후부터 다양한 주제와 내용의 나마즈에가 제작되어 당시 사회상과 민중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2. 3. 1. 지진과 복구 과정, 그리고 나마즈에의 변화

안세이 대지진은 1855년 10월 2일에 발생했는데, 지진 직후부터 나마즈에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지진 발생 직후에는 지진 메기를 악으로 묘사하고 퇴치하는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지진 메기가 가시마 다이묘진에게 사죄하는 그림이나 사람들이 지진 메기를 매질하는 그림 등이 있었다. 가시마 다이묘진이 메기를 벌하는 모습을 그린 나마즈에가 많았는데, 이는 10월이 이즈모 대사에 신이 모이는 가미나즈키여서, 민중들이 "가시마 다이묘진이 부재 중 지진 메기가 움직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구가 본격화되면서 피해자들은 복구 경기로 돈을 버는 사람과 일자리를 잃고 곤궁해지는 사람으로 나뉘었고, 나마즈에에 그려진 사람들도 구분되어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지진 메기는 곤궁한 사람들로부터 벌을 받는 존재이면서, 지진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제지하는 작품 등이 나타났다. 목수들을 비롯한 장인들은 돈을 버는 입장으로 그려졌고, 유녀가 돈을 번 장인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 돈을 버는 쪽에 합류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지진 직후의 충격에서 벗어나 복구 경기에 흥하게 되자, 지진 메기를 복의 신으로 취급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돈을 번 장인이 축연을 여는 그림이나, 지진 메기에게 예를 표하는 그림 등이 나타났다. 또한 서민들에게도 구제·시행이 이루어지면서, 지진 메기를 세상을 바로잡는 존재로 보는 작품이 등장한다.

복구 경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돈을 번 사람들로부터 금은이나 메기가 빼앗기는 작품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곤궁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괴조가 연회하는 돈을 번 사람들로부터 메기를 빼앗아 가는 그림이 있다.

2. 3. 2. 무허가 출판물 단속

나마즈에를 포함한 무허가 출판물의 유통을 문제 삼은 막부는 그림책 도매상에 찍어둔 물건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판목 장인들은 11월 1일에 회합을 열어 당분간 무허가 판행을 묵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을 논의했다. 그러나 결국 "무허가 출판물 판행을 허락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하며, 다음 날 2일에는 찍어둔 물건과 판목 69매를 제출했다

그럼에도 무허가 출판물 유통은 멈추지 않은 듯하여, 11월 5일에는 뜬소문을 단속하는 마을 공고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에도 시내에서는 무책임한 유언비어에 의해 금융업에서 대출 거절이 발생했다。 그림책 도매상도 이에 응하여 11월 10일에는 일체의 무허가 출판물을 내지 않겠다는 증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허가 출판물 유통은 멈추지 않았다. 증서에 위반할 경우 벌금을 지불하는 체계였는데, 11월 1일부터 12월 4일까지 지불된 벌금은 364냥(약 350건 분)에 달했다

그림책 도매상 단속에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북정 봉행소는 12월 4일에는 판원 9명을 체포하고, 판목도 압수했다。 또한 12월 13일부터의 단속으로, 89명의 판원으로부터 328매의 판목이 압수되었다。 이 단속의 결과, 표면적인 나마즈에의 판행은 멈췄지만, 그럼에도 재판(소위 해적판)이나 유사판(일부를 변경한 작품)이 잇따랐다。 나마즈에의 판행은 지진 발생 3개월 후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 4. 이후의 나마즈에와 그 영향

안세이 대지진 이후 1891년(메이지 24년) 노비 지진 때 다시 메기 그림이 나타났다. 『단단진문』 메이지 24년 11월 14일호에 실린 메기 그림은 쌀값 폭등을 풍자하며, 메기와 멧돼지가 쌀가마니 지게 막대기를 짊어진 모습을 그렸다.

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 때도 메기 그림이 등장했다. 『시사만화』(시사신보 일요판 부록) 다이쇼 12년 10월 7일호에 게재된 『2분 전의 지진이 곤베이 님의 내각을 낳았다』는 지진으로 탄생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을 풍자한 그림이다. 이후에도 수년 동안 지진 피해를 기억하기 위해 메기 그림이 등장했다.

자유민권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고위 관료 풍자화에 메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메이지 시대 관리가 메기 수염을 길렀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대량 유통된 메기 그림은 홍역 그림이나 당황 그림 등 막부에서 유통된 풍자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카토는 이후 풍자화에 미친 영향으로 2자 간 갈등을 전투로 비유한 작품, 권 그림으로 우열을 나타내는 작품, 순위로 빈부 격차를 대비시키는 작품, 세 사람의 취기로 민중의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작품, 가부키나 연예를 흉내 낸 대사가 있는 작품 등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또한 카토 등은 메기 그림을 포함한 풍자화를 메이지 이후 등장하는 신문 니시키에의 전 단계로 보았다.

3. 특징

나마즈에 그림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당시 서민들이 친숙하게 접했던 것을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가토 미쓰오는 모티프가 된 소재를 과거의 재해 쇄지(瓦版), 에도에서 유행했던 풍속・세상, 평판이 좋았던 우키요에・풍자화・쇄지(瓦版), 키뵤시나 가부키의 장면, 유행가 등의 대중 예능으로 크게 나눈다고 설명한다.


  • '''9-1.''' 『도외 무사 어대의 젊은 떡』
  • 노부나가, 미쓰히데, 히데요시가 만든 떡을 앉은 채로 이에야스가 손에 넣는 풍자화이다.
  • '''9-2.''' 『삼직 기쁨 떡』
  • 직공들이 떡을 찧어, 나마즈에게 대접하며 진재의 예를 올리고 있다.

3. 1. 정보성

에도 시대 후기에 쇄지(瓦版)를 시작으로 하는 정보화 사회가 확립되던 시기에 나마즈에가 판행되었다. 안세이 대지진의 사료로부터 사회적 배경을 분석한 기타하라 이토코는, 재해에 직면한 무사 지식인층은 객관적 사실을 구한 데 반해, 민중은 객관적 사실보다 사회적 사실, 바꿔 말하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보를 원했으며, 그 요구에 응한 것이 나마즈에였다고 지적했다.

가토 미쓰오 또한 나마즈에가 대량으로 유통된 이유에 대해 "민중도 지진 신화가 미신임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그린 나마즈에는 재해를 전하는 미디어가 아니었다"고 한 뒤, 피해자의 불만 해소 및 안심을 얻기 위한 상품으로서 시류를 타 폭발적으로 팔렸다고 했다.

3. 2. 제작자

안세이 대지진 당시 나마즈에는 대부분 무허가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가나자키 로분 등을 제외하고는 제작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당시 활약했던 작가들은 『당대 전성 에도 고명 세부』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요청이 있으면 희극 작가나 화가라도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 희극 작가로는 가사테이 센카, 바이소 겐교가, 화가로는 3대 우타가와 도요쿠니 일문과 우타가와 구니요시 일문의 이름이 거론된다. 당시 풍자화와 마찬가지로 나마즈에도 선행 우키요에를 오마주한 작품이 많은데, 그 원본이 된 것은 우타가와 구니요시와 그 일문의 작품이 적지 않다.

우타가와 구니요시는 나마즈에 붐을 일으킨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 3. 메기의 표현

鯰絵일본어에서는 메기가 물고기 모습과 의인화된 모습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물고기로 그려진 작품에는 지진 신화나 표주박 메기를 모티브로 한 것, 구이 등으로 제공되는 장면이 많다. 의인화된 메기는 사람이나 신들과 함께 등장하며, 지진을 일으킨 것을 뉘우치기도 하고 인간의 일원으로서 일하고 노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기타하라는 큰 메기와 작은 메기(메기 남자)를 구분한다. 큰 메기는 신성한 존재로 세상을 호전시키는 복의 신으로 여겨지는 반면, 작은 메기는 민중의 모습이나 미움받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수수께끼 그림처럼 메기를 직접 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3. 4. 선과 악의 양면성



메기 그림은 메기를 지진의 원흉인 "악"으로 묘사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부와 복을 가져다주는 "선"으로 묘사하는 작품도 있다는 큰 특징을 지닌다(그림 3)。고마츠 카즈히코는 안세이 대지진 후에 이러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메기 그림이 나타났다고 보았다

안세이 대지진이 발생한 에도 시대 후기에는 재해를 주제로 한 니시키에(재해 니시키에)가 많았다. 메기 그림 외에도 천연두 그림, 홍역 그림, 콜레라 그림 등이 있으며, "풍자화" 또는 "세상 그림"으로 분류된다。 재해 니시키에의 대부분은 대상을 "재해의 신"으로 묘사하지만, 메기 그림에만 상반되는 "선"의 면이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다。 아우에헌트는 메기 그림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을 처음 지적하며, 일본 민속 신앙의 양면적인 신 관념이 표출된 것이라 보고 메기를 트릭스터로 파악했다

미야타 노보루는 세상 개혁론을 통해 현실에 절망한 민중이 새로운 세상으로 변혁하려는 사상(미륵 사상)이 표출된 것으로 보았다. 민속학계에서 메기 그림은 세상 개혁론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

키타하라는 재해 유토피아론을 통해, 재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막부의 "구제", 부유층의 "시행", 구제 오두막에서의 연대감, 생존에 대한 안도감 등이 유토피아 의식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재해 유토피아론은 역사학계 등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재해 후 시간에 따라 메기 그림의 테마가 변천한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3. 5. 풍자성

나마즈에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재해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면서도 위정자나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민중들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또한, 재해를 겪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심리적인 치유를 돕는 기능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나마즈에에 나타난 풍자는 지진 재해를 웃어넘기려는 시도였으며, 일종의 사이코테라피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임상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나마즈에의 "놀이" 요소가 지진 재해 체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연 치유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나마즈에는 천벌론의 영향을 받아 위정자에 대한 벌을 묘사하는 낙서낙수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는 해석도 있다. 에도 시대 사람들은 낙서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나마즈에에 담긴 풍자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마즈에 제작자들은 민중을 계몽하려는 의도보다는, 단순히 그림이 잘 팔리기를 바랐을 뿐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4. 모티프

나마즈에 그림은 매우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당시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가토 미쓰오는 나마즈에의 모티프를 다음과 같이 크게 분류했다.


  • 과거의 재해 가와라반: 1855년에 발생한 안세이 대지진 이전의 재해에 대한 정보를 담은 가와라반
  • 에도에서 유행했던 풍속과 세상: 당시 에도에서 유행하던 풍습이나 세상의 모습
  • 평판이 좋았던 우키요에, 풍자화, 가와라반: 인기 있었던 우키요에(풍속화), 풍자화, 가와라반
  • 키뵤시나 가부키의 장면: 키뵤시(그림책)나 가부키(일본 전통극)의 유명한 장면
  • 유행가 등의 대중 예능: 유행가와 같은 대중적인 연예

4. 1. 오쓰에(大津絵)와 표주박 메기

오쓰에에 그려진 표주박 메기는 나마즈에의 주요 모티프 중 하나이다. 표주박과 메기의 조합은 선종의 공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선화로 국보인 표주박과 메기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주제는 물속에 있는 메기를 표주박으로 잡으려는 남자이며, "비늘이 없고 미끄러운 메기를 진흙탕 속에서 미끈거리는 둥근 표주박으로 잡으려 한다.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공안의 취지였다.

오쓰에는 오쓰 숙소의 토산품으로 판매된 민속 회화로 불화가 모티프인 경우가 많다. 표주박 메기도 그중 하나로, 메기를 잡으려는 남자가 원숭이로 바뀌어 있다. 표주박 메기는 오쓰에 10종에도 포함되는 대표적인 화제로, 여행자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오쓰에의 표주박 메기는 수난을 막는 것으로 여겨지며, 지진과는 관련이 없다.

표주박 메기를 모티프로 한 메기 그림은 메기를 잡으려는 인물을 가시마 다이묘진이나 에비스로 바꾼 것이 많으며, 표주박을 요석으로 바꾼 것도 보인다.

4. 2. 지진 예방과 주술

근세 일본에서는 재해를 막기 위해 주술적인 부적이나 노래를 집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으며, 이는 지진 예방에도 적용되었다. 『가나메이시』에도 이러한 주술적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나마즈에(메기 그림)에도 부적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기 퇴치』에는 "동방·서방·남방·북방·중앙"의 문자와 범자, 그리고 "동서남북 천장에 이 부적을 붙여놓으면, 집이 무너지는 걱정은 더 이상 없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진 예방 주술을 모티브로 한 작품도 있다. 무샤 킨키치에 따르면, 지진이 일어났을 때 간사이 지방에서는 "요나오시", 간토 지방에서는 "만자이 라쿠(만세락)"를 주문처럼 외웠다고 한다. 안세이 대지진을 계기로 지진 예방 주술이었던 "요나오시"가 현실 세계의 "세상 바로잡기 소망"으로 변모하여 나마즈에에 그려졌다는 주장도 있다.

만자이 라쿠는 새해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축하의 말을 하고 춤을 추는 문전걸이 예술이다. 나마즈에의 『만자이 라쿠』에서는 가시마 다이묘진이 에보시 차림의 다이후이고, 북을 가진 사이조에게 메기 남자가 그려져 있다.

4. 3. 흑선 내항

안세이 대지진 직전의 흑선 내항(1853년)은 나마즈에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나마즈에는 지진과 흑선을 겹쳐서 표현하거나, 사회 변화에 대한 불안감을 암시하기도 한다.

흑선 내항은 미일 화친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안세이 대지진보다 1년 전의 일이다. 흑선 내항은 서민들을 당황하게 하는 동시에 구체제를 흔들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을 예견하는 사건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발행된 메기 그림에는 지진과 흑선을 겹쳐 놓은 듯한 작품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지진 메기를 흑선에 비유한 『대메기 에도의 번성』이나, 지진 메기를 칠복신이 탄 배로 비유한 『번성 보물 배』는 바다 저편에서 부가 온다는 이미지에 흑선 내항을 겹쳐 놓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외에도 지진이나 흑선을 사회를 치료하는 약으로 여긴 작품이 있다. 『진출 메기 약』에서는 약 장수의 입담을 패러디하여 "지진으로 세상에 활력이 들어간다"라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는데, 흑선 내항을 알리는 가와라반(흑선 가와라반)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약 장수 입담 패러디가 보인다.

페리를 직접적으로 그린 작품은 단 한 점만이 현존한다. 『안세이 2년 10월 2일 밤 대지진 메기 문답』은 지진 메기와 페리가 말다툼을 하며 머리 잡아당기기로 힘겨루기를 하는 장면을 그린다. 심판은 메기의 승리를 판정하고 있으며, 이는 흑선 내항보다 지진에 의한 피해가 더 낙관적으로 여겨졌던 당시 세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타하라는 마지막에 적힌 "보고 싶어도 참으세요"라는 한마디에 전망이 보이지 않는 세태에 대한 불안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11.''' 『안세이 2년 10월 2일 밤 대지진 메기 문답』

4. 4. 가부키(歌舞伎)

에도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가부키는 나마즈에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였으며, 관련된 작품이 27점에 달한다. 특히 『잠』은 등장인물인 메기 보즈(坊主)가 지진 메기의 이미지와 겹쳐져 좋은 소재가 되었다. 『비가 오면 곤란해요 노숙 시바라쿠노소토네』가 그 대표작이다.



가부키 『아케가라스 유메 아와유키』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는 『무라사토·토쿠시로 아케가라스 하나야키고로모』가 있다. 이 연극은 8대 단주로가 가에이 4년(1851년)에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지만, 안세이 대지진 전 해에 단주로가 자살했기 때문에 많은 가와라판과 사이에가 발행되었다.

이 외에도 『간진초』, 『우키요가라 히요쿠 이나즈마』, 『가라 센다이하기』, 『요와나미 우키나 요코구시』, 『고다이리키 코이노 후미』 등이 나마즈에의 모티브가 된 가부키 연목들이다.

4. 5. 토테츠루켄(とてつる拳)

세 가지 주먹의 일종인 '토테츠루 주먹'이 처음 공개된 것은 고카 4년(1845년) 정월에 공연된 조루리였다. 4대 나카무라 우타에몬 등 3명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마지막에 여우 권법을 치는 방식이었으며, 이때 불린 노래가 '토테츠루 주먹'이다. 이 모습을 그린 그림만 20~30종이 판행되었고, 그 개사도 수없이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젠코지 지진이 발생한 것은 그 붐이 한창이던 해 3월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초의 메기 그림의 화제도 '토테츠루 주먹'을 모티브로 했으며, 개사를 적은 것도 있다. '토테츠루 주먹'의 유행은 안세이 대지진 때에도 지속되었고, 이 때 판행된 세 가지 주먹을 모티브로 한 메기 그림은 현존하는 것만 8종에 달한다.

4. 6. 유행가

안세이 시대 에도에서는 이세 오도리, 이타코부시, 도도이츠 등의 단가와, 초보쿠레, 초가레, 구도키부시 등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유행했으며, 그 개사곡이 유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유행가의 발신지는 가부키, 조루리, 라쿠고 등의 대중 연예였다. 또한, 가와라반을 파는 요미우리(신문 판매인)는 시세를 개사곡에 담아 노래하며 팔고 다녔는데, 이들이 부르는 것은 스차라카, 선반의 다루마 등의 개사곡인 경우가 많았다.

나마즈에에도 지진을 주제로 한 개사곡이 사서에 적혀 있으며, 이것을 노래하는 길거리 연예인을 화제로 한 작품이 적지 않다. 특히 오쓰에부시를 모티브로 한 작품은 6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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