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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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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지(和紙)는 7세기 무렵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된 종이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한 일본 고유의 종이를 의미한다. 헤이안 시대에 제지 기술이 개량되어 닥나무, 삼지닥나무, 꾸지나무 등을 원료로 하여 얇지만 질기고 수명이 긴 특징을 갖게 되었다. 전통적인 제조 방식인 '나가시즈키' 기술을 통해 종이 섬유층을 강화하여 종이의 품질을 높였다. 화지는 서예, 목판화, 지폐, 건축 자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문화재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서양식 종이의 보급과 인구 감소 등으로 인해 일본 내 화지 생산은 감소 추세에 있으며,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유지하는 곳도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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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지
개요
유형일본 종이 (전통 종이)
재료닥나무 껍질
상세 정보
정의는 전통적으로 닥나무 껍질로 만든 일본 종이임.
특징섬유질이 길고 질김.
독특한 질감과 따뜻한 색감.
다양한 종류와 용도.
용도서예
회화
공예
건축 (창호지 등)
보존 (문화재 보존 등)
관련 문화오리가미 (종이접기)
쇼지 (障子, 미닫이 창)
우키요에 (浮世絵, 일본 풍속화)
역사
유네스코 지정일본의 수제 화지 (2014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종류
주요 종류고이조가미 (厚様紙, Koizogami)
간자라시 (寒晒, Kanzarashi)
기요하라고미 (清原紙, Kiyoharagomi)
스기하라가미 (杉原紙, Sugiharagami)
미노와시 (美濃和紙, Minowashi)
지요가미 (千代紙, Chiyogami)
추가 정보
참고화지는 종이 보존에 사용됨.
미노 시의 화지는 유명함.

2. 역사

7세기 무렵, 종이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고,[16] 일본인들은 헤이안 시대에 종이 제작 방법을 개량하여 화지를 개발했다. 고사기에 따르면, 응신 천황 16년(285년)에 한국(백제)인 왕인이 중국의 서적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져온 것이 일본에서의 서적 최초 전래로 여겨지지만, 『천자문』의 저자는 응신천황보다 100년 후의 인물이므로, 고증학적으로는 오류이다. 고증학적으로는, 4세기에서 5세기에는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일본 제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25] 크게 나누면 일본에서 자연 발생했다는 설과, 외래인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25] 어느 경우든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며, 빠른 것은 3~4세기로 보는 설도 있다.[25]

이세(三重현)에서의 와시 제작


5세기에 들어서면 일본에서 제지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중요한 기록이 등장한다.[26] 『일본서기』에 따르면, 리추 천황 4년(403년)에 처음으로 국사(史官)를 배치하여 언사(言事)를 통해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공권력에 의해 종이로 기록하는 것이 시작되어 제지의 필요성이 생겨났다고 추측된다.[26] 참고로, 이 연대에 대해서는 『고사기』와 수십 년의 차이가 있다.[17][26]

6세기 초에는 후쿠이현 이마타치정(2005년 합병으로 에치젠시의 일부가 됨)에서 제지가 시작되었다는 전승이 있다.[26][27] 6세기 중반이 되자, 긴메이 천황 원년(540년)에 秦(진)·漢(한) 사람인 귀화인이 호적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다.[26] 이때 사용된 종이는 郷戸(고우토)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秦(진) 사람이 일본에서 종이를 만들었다고 추측된다.[26] 한편,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센카 천황 3년(538년)[18]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때 백제의 제지 기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6]

제지 기술의 역사는 중국 후한 시대 채륜의 개량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의 제지 기술 전래는 스이코 천황 18년(610년)에 고구려를 경유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공식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일본서기』에 있다. 또한, 게이타이 천황 7년(513년)에 오경박사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고, 한자와 불교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경이 불교 보급에 큰 역할을 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무렵 이미 제지 기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推古天皇) 18년 봄 3월 고구려 왕이 승려 담징(돈징), 법정을 공납하였다. 담징(돈징)은 오경에 능통하였고, 또한 채색과 종이, 먹을 잘 만들었으며, 아울러 수차의 동력을 이용한 맷돌(臼, 우)을 만들었다. 수차식 맷돌 제작은 이때가 처음이다.” 아스카 시대인 스이코 천황 18년(610년)에 고구려 승려 담징(돈징)은 종이와 먹을 잘 만들 수 있었고, 수평형 수차 동력을 이용한 특수한 맷돌도 만들었는데, 맷돌 제작만은 일본 최초라고 특기되어 있다. 이 맷돌의 용도에 대해서는 안료 제조용, 사찰의 두유 제조용, 제지 원료의 해섬용 등 여러 설이 있으며 확정되지 않았다.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종이는 정창원(正倉院)에 남아 있는 미노국(美濃國), 筑前國(치쿠젠노쿠니), 豊前國(부젠노쿠니)의 호적 용지이다. 또한 가장 오래된 사경인 西本願寺(니시혼간지) 소장의 『諸仏要集教(쇼부츠요슈쿄)』는 훌륭한 사경 용지에 쓰여 있으며, 서진(西晋) 원강(元康) 6년 3월 18일(296년 5월 7일)의 명기가 있다.

제지 기술이 전래된 지 약 100년 후에 본격적인 국산지 생산이 시작되었다. 『정창원문서』에 따르면, 덴표 9년(737년)에는 미작, 출운, 파마, 미농, 엣전 등에서 종이 뜨기가 시작되었다.

『대보율령』에 따라 국사(『고사기』『일본서기』)와 각지의 『풍토기』 편찬을 위해 도서료가 설치되었고, 종이 제조와 조달도 관장하였다.

도서료에는 34명의 정원 중 사경수가 20명, 제지 작업을 하는 조지수가 4명이었다.[19] 또한 도서료 아래 산성국에 "지옥원"과 "지호"라 불리는 50호의 종이 뜨기 전문가를 두고, 연간 생산량을 2만 장으로 규정하여 조세를 면제하고 관용지를 뜨게 하였다. 이 외에도 각지에서 종이를 뜨게 하여 이를 "조(租)"로서 징수하였다.

덴표 11년(739년)에는 사경사가 설치되어 사경 사업으로 인해 종이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도서료해』의 호키 5년(774년) 항목에 따르면, 종이 산지로는 미작, 파마, 출운, 축자, 이가, 조총, 무사, 미농, 시노노, 우에노, 시모츠케, 엣전, 엣추, 엣토, 사도, 단고, 나가토, 기이, 오미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종이가 아직 수량이 적은 고급품이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일반적인 용도에는 저렴하고 튼튼한 목간이 사용되었다. 또한, 한 번 사용된 종이 중에는 그 뒷면을 재활용하여 다른 필기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지배문서).

이 시대의 종이를 이용한 문화는 국가가 불교를 믿었던 것과 관련하여 주로 불교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종이와 천, 옻칠을 재료로 한 지태불과 많은 경전이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호키 원년(770년)에 제작된 백만탑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나라 시대에는 제지(製紙)를 "조지(造紙)"라고 불렀지만, 헤이안 시대가 되면서 『연희식』에서 발(簀)을 "종이를 뜨는 재료"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종이를 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고, 『겐지모노가타리』에는 당(唐)의 종이보다 상질의 종이가 뜨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헤이안쿄 천도 직후 다이도(일본) 연간(805년 - 809년), 야마시로국에 있던 지도(紙戸)가 폐지되고, 대신 관립 제지 공장으로 '''지옥원(紙屋院)'''(かんやいん, しおくいん)이 설치되어, 일본 독자적인 제지법인 "흘림 뜨기" 기술이 확립되었다. 805년에서 809년경에 일본에서 개발된 제지 기술은 나가시즈키/流し漉き일본어라고 불렸는데, 기존의 타메즈키/溜め漉き일본어 기법에 점액을 첨가하여 종이 섬유층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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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 시대에는 방을 가르는 칸막이에 붙이는 비단 직물의 대용으로 중국에서 수입한 문양과 도안이 운모로 문질러진 두꺼운 화지를 사용했으나, 제지 기술의 향상으로 두꺼운 종이의 제지가 가능해지면서 화지가 국산화되었다. 서화용지의 안피지(후에 조선지에도)에 꽃무늬(화지의 문양과 도안)를 호분에 아교를 섞은 것을 발라 매꿈질한 후, 운모 가루를 당초나 귀갑 등의 문양 목판으로 찍어낸 이러한 화지는 본토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가라가미" 또는 "가라가미"라고 불렸고, 더 나아가 가마쿠라 시대에 장지가 보급되면서 "가라가미"는 병풍의 총칭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지야인(紙屋院)의 설립과 흘림 뜨기의 확립으로 인해, 한지는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고, 지야인 외에도 44개소에서 제지가 이루어지면서 목간 사용에서 한지 사용의 시대로 이행하여, 한지를 풍부하게 사용한 왕조 문화가 꽃을 피웠다.

개량된 와시는 신사의 ''고헤이'', ''오누사''(ja:大麻 (神道)), ''시데''와 같은 종교 의식 장식에 사용되었고,[6] 헤이안 시대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장식된 와시로 ''고킨와카슈''와 같은 아름다운 책들이 제작되었다.[8]

; 단지(檀紙)

: 이 시대 귀족 계급에서는, 한자를 사용하는 남성은 곡지(穀紙)를, 가나 문자를 사용하는 여성은 단지(檀紙)를 사용했다. 이 시대의 단지는 닥나무가 아닌 꾸지나무에서 제조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 단지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 또한, 단지는 표면에 누에고치와 같은 거칠고 윤기 있는 주름이 물결치는 곳에서 송피지라고도 불리며,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으로 역수입되었다.

; 가나 문자와 편지

: 이 시대 여성은, 편지를 얇은 색지를 두 장 겹쳐 가나 문자로 쓰고, 끝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아나카시코 아나카시코"라고 썼다.

: 정식 편지는, 한 장의 종이를 그대로 사용하여 세로로 쓰기 때문에 똑바로 쓴 글이라고 한다. 또한, 가로로 둘로 접어, 접은 부분을 아래로 하고 쓰는 접지도 있었고, 접지를 두 장으로 잘라낸 잘라낸 종이, 이것을 가로로 이은 이은 종이, 더 나아가 이것을 감은 감은 종이도 있었다.

; 비지(斐紙)

: 간피(雁皮)를 원료로 하여, 얇은 종이, 중간 종이, 두꺼운 종이 세 종류가 제조된 비지가 이 무렵 유행했다. 간피(雁皮)는 일본 독자적인 제지 원료이며, 흘림 뜨기에 의한 높은 기술로 제조되는 얇은 종이에 특징이 있다.

: 남성이 주로 후쿠사(懐紙)로 두꺼운 단지를 애용한 데 반해, 여성은 얇은 비지를 애용했고, 『우쓰보 모노가타리(うつほ物語)』와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 기록이 보인다.

: 사이초(最澄)는 엔랴쿠(延暦) 23년(804년)에 유학 승려로서 중국에 건너갔을 때, 쓰쿠시 비지 200장을 헌상했다.

; 후쿠사(懐紙)

: 헤이안 귀족은 항상 품에 종이를 접어 넣어, 손수건과 같은 용도 외에, 과자를 집거나, 술잔의 테두리를 닦거나, 즉석에서 와카(和歌)를 적는 등의 용도로도 사용하여, 당시 귀족의 필수품이었다.

: 후쿠사는 "후토코로가미(ふところがみ)", "카이시(かいし)", 또 접어서 품에 넣는 곳에서 "다토우가미(畳紙)", "테가미(手紙) (다의어)"라고 칭하며, 후에는 와카 등을 정식으로 읊어 바치는 에이소료시(詠草料紙)를 의미하게 되었다.

: 남성은 단지를, 여성은 얇은 비지를 사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정식의 에이소료시에는 색이 다른 얇은 종이를 두 장 겹쳐 사용했다.

; 에이소료시(詠草料紙)

: 시집용 종이인 에이소료시에는, 우운(打雲), 비운(飛雲), 먹흘림 등의 여러 가지 제지 기술과, 자르기 이어붙이기, 찢기 이어붙이기, 겹치기 이어붙이기 등의 가공 기술이 사용되었다.

: 우운이란, 미리 뜬 간피지 위에, 파랑이나 보라색으로 염색한 섬유를 가늘고 길게 가로로 흘려, 뜨는 통 안에서 아래쪽에 천천히 치듯이 채우면, 염색한 섬유가 구름 모양으로 떠오르는 기법이다.

: 먹흘림이란, 먹물 방울을 수면에 떨어뜨리고, 그 위에 송진을 떨어뜨려 먹물을 흩뜨리고, 이것을 반복하여 숨을 불어넣어, 물의 흐름을 표현한 먹물의 무늬를, 간피지로 흡수하여 옮기는 기법이다.

: 자르기 이어붙이기란, 종이를 비스듬히 자르고, 자른 부분을 조금 엇갈리게 겹쳐 풀칠하는 기법이다.

: 찢기 이어붙이기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찢은 종이를 풀칠하여, 긴 섬유의 다리가 불규칙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재미를 연출하는 기법이다.

: 겹치기 이어붙이기란, 여러 장의 종이를 조금씩 엇갈리게 풀칠하는 기법으로, 농담을 칠한 네 장의 얇은 종이와 한 장의 흰 종이를 사용하여, 색의 농담의 차이를 차례로 겹치면, 흐림 무늬가 된다.

: 이 외에도, 금은박이나 금은분에 의한 가공 종이 등, 여러 가지 에이소료시가 만들어졌다.

; 색지

: 왕조 문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흰색 종이보다 점차 여러 가지 색깔과 성질을 가진 종이를 사용하게 되어, 염색 종이와 가공 종이 등으로 제지되어, 천황의 선명(宣命) 용 종이로서, 붉은 종이, 녹황색 종이 등이 사용되었다.

: 후에는 얇은 종이를 두 장 겹쳐 사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계절에 맞춰 위쪽은 홍매, 아래쪽은 소방(蘇芳)의 "홍매가사네(紅梅がさね)", 위쪽은 흰색, 아래쪽은 파란색의 "우노하나가사네(卯の花がさね)", "하기가사네(萩かさね)", "코요미가사네(紅葉かさね)" 등 여러 가지 조합이 개발되었다.

; 문화재

: 한지를 사용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장식경(装飾経)과 회권(絵巻物)이 있다.

대량 생산되었다고 해도, 한지는 여전히 귀한 물건이었으며, 선물로서의 가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사용한 고지를 다시 풀어서 재활용하는 엷은 먹빛 종이(우스즈미시)가 보급되었다.

원경(元慶) 4년(880년)에 후지와라노 다미코(藤原多美子)가 승하한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의 편지를 모아 다시 풀어서, 그 종이에 법화경(法華経)을 사경하여 공양하였다(『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이 시대에는 탈묵기술(脱墨技術)이 없었으므로, 다시 풀어 만들면 종이의 색깔은 엷은 검은색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종이를 엷은 먹빛 종이(薄墨紙)라고 불렀다.

한때 지야인지(紙屋院紙)는 관립 제지 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로 고급 종이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말기가 되자 각지의 장원(일본)에서 제지가 이루어지면서 원료가 부족해지자, 지야인에서는 주로 고지(古紙)나 반고지(反故紙)를 재활용하여 닥지를 뜨게 되었다. 그곳에서 제작된 엷은 먹으로 쓴 종이(수운지(水雲紙))는 옛날, 오래된이라는 뜻을 가진 "숙(宿)"자를 붙여 "숙지(宿紙)"라고 불리게 되었고, 더 이상 옛 고급 종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 전역에 와시 기술을 보급한다는 당초의 사명을 완수한 지야인(紙屋院)은 남북조 시대(일본)에 폐지되었다.

2. 1. 제지 기술의 전래와 초기 발전 (7세기 - 헤이안 시대)

7세기 무렵, 종이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고,[16] 일본인들은 헤이안 시대에 종이 제작 방법을 개량하여 화지를 개발했다. 고사기에 따르면, 응신 천황 16년(285년)에 한국(백제)인 왕인이 중국의 서적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져온 것이 일본에서의 서적 최초 전래로 여겨지지만, 『천자문』의 저자는 응신천황보다 100년 후의 인물이므로, 고증학적으로는 오류이다. 고증학적으로는, 4세기에서 5세기에는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일본 제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25] 크게 나누면 일본에서 자연 발생했다는 설과, 외래인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25] 어느 경우든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며, 빠른 것은 3~4세기로 보는 설도 있다.[25]

5세기에 들어서면 일본에서 제지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중요한 기록이 등장한다.[26] 『일본서기』에 따르면, 리추 천황 4년(403년)에 처음으로 국사(史官)를 배치하여 언사(言事)를 통해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공권력에 의해 종이로 기록하는 것이 시작되어 제지의 필요성이 생겨났다고 추측된다.[26] 참고로, 이 연대에 대해서는 『고사기』와 수십 년의 차이가 있다.[17][26]

6세기 초에는 후쿠이현 이마타치정(2005년 합병으로 에치젠시의 일부가 됨)에서 제지가 시작되었다는 전승이 있다.[26][27] 6세기 중반이 되자, 긴메이 천황 원년(540년)에 秦(진)·漢(한) 사람인 귀화인이 호적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다.[26] 이때 사용된 종이는 郷戸(고우토)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秦(진) 사람이 일본에서 종이를 만들었다고 추측된다.[26] 한편,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센카 천황 3년(538년)[18]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때 백제의 제지 기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6]

제지 기술의 역사는 중국 후한 시대 채륜의 개량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의 제지 기술 전래는 스이코 천황 18년(610년)에 고구려를 경유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공식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일본서기』에 있다. 또한, 게이타이 천황 7년(513년)에 오경박사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고, 한자와 불교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경이 불교 보급에 큰 역할을 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무렵 이미 제지 기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推古天皇) 18년 봄 3월 고구려 왕이 승려 담징(돈징), 법정을 공납하였다. 담징(돈징)은 오경에 능통하였고, 또한 채색과 종이, 먹을 잘 만들었으며, 아울러 수차의 동력을 이용한 맷돌(臼, 우)을 만들었다. 수차식 맷돌 제작은 이때가 처음이다.” 아스카 시대인 스이코 천황 18년(610년)에 고구려 승려 담징(돈징)은 종이와 먹을 잘 만들 수 있었고, 수평형 수차 동력을 이용한 특수한 맷돌도 만들었는데, 맷돌 제작만은 일본 최초라고 특기되어 있다. 이 맷돌의 용도에 대해서는 안료 제조용, 사찰의 두유 제조용, 제지 원료의 해섬용 등 여러 설이 있으며 확정되지 않았다.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종이는 정창원(正倉院)에 남아 있는 미노국(美濃國), 筑前國(치쿠젠노쿠니), 豊前國(부젠노쿠니)의 호적 용지이다. 또한 가장 오래된 사경인 西本願寺(니시혼간지) 소장의 『諸仏要集教(쇼부츠요슈쿄)』는 훌륭한 사경 용지에 쓰여 있으며, 서진(西晋) 원강(元康) 6년 3월 18일(296년 5월 7일)의 명기가 있다.

제지 기술이 전래된 지 약 100년 후에 본격적인 국산지 생산이 시작되었다. 『정창원문서』에 따르면, 덴표 9년(737년)에는 미작, 출운, 파마, 미농, 엣전 등에서 종이 뜨기가 시작되었다.

『대보율령』에 따라 국사(『고사기』『일본서기』)와 각지의 『풍토기』 편찬을 위해 도서료가 설치되었고, 종이 제조와 조달도 관장하였다.

도서료에는 34명의 정원 중 사경수가 20명, 제지 작업을 하는 조지수가 4명이었다.[19] 또한 도서료 아래 산성국에 "지옥원"과 "지호"라 불리는 50호의 종이 뜨기 전문가를 두고, 연간 생산량을 2만 장으로 규정하여 조세를 면제하고 관용지를 뜨게 하였다. 이 외에도 각지에서 종이를 뜨게 하여 이를 "조(租)"로서 징수하였다.

덴표 11년(739년)에는 사경사가 설치되어 사경 사업으로 인해 종이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도서료해』의 호키 5년(774년) 항목에 따르면, 종이 산지로는 미작, 파마, 출운, 축자, 이가, 조총, 무사, 미농, 시노노, 우에노, 시모츠케, 엣전, 엣추, 엣토, 사도, 단고, 나가토, 기이, 오미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종이가 아직 수량이 적은 고급품이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일반적인 용도에는 저렴하고 튼튼한 목간이 사용되었다. 또한, 한 번 사용된 종이 중에는 그 뒷면을 재활용하여 다른 필기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지배문서).

이 시대의 종이를 이용한 문화는 국가가 불교를 믿었던 것과 관련하여 주로 불교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종이와 천, 옻칠을 재료로 한 지태불과 많은 경전이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호키 원년(770년)에 제작된 백만탑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나라 시대에는 제지(製紙)를 "조지(造紙)"라고 불렀지만, 헤이안 시대가 되면서 『연희식』에서 발(簀)을 "종이를 뜨는 재료"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종이를 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고, 『겐지모노가타리』에는 당(唐)의 종이보다 상질의 종이가 뜨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헤이안쿄 천도 직후 다이도(일본) 연간(805년 - 809년), 야마시로국에 있던 지도(紙戸)가 폐지되고, 대신 관립 제지 공장으로 '''지옥원(紙屋院)'''(かんやいん, しおくいん)이 설치되어, 일본 독자적인 제지법인 "흘림 뜨기" 기술이 확립되었다. 805년에서 809년경에 일본에서 개발된 제지 기술은 나가시즈키/流し漉き일본어라고 불렸는데, 기존의 타메즈키/溜め漉き일본어 기법에 점액을 첨가하여 종이 섬유층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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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ing1 =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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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 시대에는 방을 가르는 칸막이에 붙이는 비단 직물의 대용으로 중국에서 수입한 문양과 도안이 운모로 문질러진 두꺼운 화지를 사용했으나, 제지 기술의 향상으로 두꺼운 종이의 제지가 가능해지면서 화지가 국산화되었다. 서화용지의 안피지(후에 조선지에도)에 꽃무늬(화지의 문양과 도안)를 호분에 아교를 섞은 것을 발라 매꿈질한 후, 운모 가루를 당초나 귀갑 등의 문양 목판으로 찍어낸 이러한 화지는 본토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가라가미" 또는 "가라가미"라고 불렸고, 더 나아가 가마쿠라 시대에 장지가 보급되면서 "가라가미"는 병풍의 총칭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지야인(紙屋院)의 설립과 흘림 뜨기의 확립으로 인해, 한지는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고, 지야인 외에도 44개소에서 제지가 이루어지면서 목간 사용에서 한지 사용의 시대로 이행하여, 한지를 풍부하게 사용한 왕조 문화가 꽃을 피웠다.

개량된 와시는 신사의 ''고헤이'', ''오누사''(ja:大麻 (神道)), ''시데''와 같은 종교 의식 장식에 사용되었고,[6] 헤이안 시대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장식된 와시로 ''고킨와카슈''와 같은 아름다운 책들이 제작되었다.[8]

; 단지(檀紙)

: 이 시대 귀족 계급에서는, 한자를 사용하는 남성은 곡지(穀紙)를, 가나 문자를 사용하는 여성은 단지(檀紙)를 사용했다. 이 시대의 단지는 닥나무가 아닌 꾸지나무에서 제조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 단지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 또한, 단지는 표면에 누에고치와 같은 거칠고 윤기 있는 주름이 물결치는 곳에서 송피지라고도 불리며,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으로 역수입되었다.

; 가나 문자와 편지

: 이 시대 여성은, 편지를 얇은 색지를 두 장 겹쳐 가나 문자로 쓰고, 끝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아나카시코 아나카시코"라고 썼다.

: 정식 편지는, 한 장의 종이를 그대로 사용하여 세로로 쓰기 때문에 똑바로 쓴 글이라고 한다. 또한, 가로로 둘로 접어, 접은 부분을 아래로 하고 쓰는 접지도 있었고, 접지를 두 장으로 잘라낸 잘라낸 종이, 이것을 가로로 이은 이은 종이, 더 나아가 이것을 감은 감은 종이도 있었다.

; 비지(斐紙)

: 간피(雁皮)를 원료로 하여, 얇은 종이, 중간 종이, 두꺼운 종이 세 종류가 제조된 비지가 이 무렵 유행했다. 간피(雁皮)는 일본 독자적인 제지 원료이며, 흘림 뜨기에 의한 높은 기술로 제조되는 얇은 종이에 특징이 있다.

: 남성이 주로 후쿠사(懐紙)로 두꺼운 단지를 애용한 데 반해, 여성은 얇은 비지를 애용했고, 『우쓰보 모노가타리(うつほ物語)』와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 기록이 보인다.

: 사이초(最澄)는 엔랴쿠(延暦) 23년(804년)에 유학 승려로서 중국에 건너갔을 때, 쓰쿠시 비지 200장을 헌상했다.

; 후쿠사(懐紙)

: 헤이안 귀족은 항상 품에 종이를 접어 넣어, 손수건과 같은 용도 외에, 과자를 집거나, 술잔의 테두리를 닦거나, 즉석에서 와카(和歌)를 적는 등의 용도로도 사용하여, 당시 귀족의 필수품이었다.

: 후쿠사는 "후토코로가미(ふところがみ)", "카이시(かいし)", 또 접어서 품에 넣는 곳에서 "다토우가미(畳紙)", "테가미(手紙) (다의어)"라고 칭하며, 후에는 와카 등을 정식으로 읊어 바치는 에이소료시(詠草料紙)를 의미하게 되었다.

: 남성은 단지를, 여성은 얇은 비지를 사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정식의 에이소료시에는 색이 다른 얇은 종이를 두 장 겹쳐 사용했다.

; 에이소료시(詠草料紙)

: 시집용 종이인 에이소료시에는, 우운(打雲), 비운(飛雲), 먹흘림 등의 여러 가지 제지 기술과, 자르기 이어붙이기, 찢기 이어붙이기, 겹치기 이어붙이기 등의 가공 기술이 사용되었다.

: 우운이란, 미리 뜬 간피지 위에, 파랑이나 보라색으로 염색한 섬유를 가늘고 길게 가로로 흘려, 뜨는 통 안에서 아래쪽에 천천히 치듯이 채우면, 염색한 섬유가 구름 모양으로 떠오르는 기법이다.

: 먹흘림이란, 먹물 방울을 수면에 떨어뜨리고, 그 위에 송진을 떨어뜨려 먹물을 흩뜨리고, 이것을 반복하여 숨을 불어넣어, 물의 흐름을 표현한 먹물의 무늬를, 간피지로 흡수하여 옮기는 기법이다.

: 자르기 이어붙이기란, 종이를 비스듬히 자르고, 자른 부분을 조금 엇갈리게 겹쳐 풀칠하는 기법이다.

: 찢기 이어붙이기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찢은 종이를 풀칠하여, 긴 섬유의 다리가 불규칙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재미를 연출하는 기법이다.

: 겹치기 이어붙이기란, 여러 장의 종이를 조금씩 엇갈리게 풀칠하는 기법으로, 농담을 칠한 네 장의 얇은 종이와 한 장의 흰 종이를 사용하여, 색의 농담의 차이를 차례로 겹치면, 흐림 무늬가 된다.

: 이 외에도, 금은박이나 금은분에 의한 가공 종이 등, 여러 가지 에이소료시가 만들어졌다.

; 색지

: 왕조 문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흰색 종이보다 점차 여러 가지 색깔과 성질을 가진 종이를 사용하게 되어, 염색 종이와 가공 종이 등으로 제지되어, 천황의 선명(宣命) 용 종이로서, 붉은 종이, 녹황색 종이 등이 사용되었다.

: 후에는 얇은 종이를 두 장 겹쳐 사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계절에 맞춰 위쪽은 홍매, 아래쪽은 소방(蘇芳)의 "홍매가사네(紅梅がさね)", 위쪽은 흰색, 아래쪽은 파란색의 "우노하나가사네(卯の花がさね)", "하기가사네(萩かさね)", "코요미가사네(紅葉かさね)" 등 여러 가지 조합이 개발되었다.

; 문화재

: 한지를 사용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장식경(装飾経)과 회권(絵巻物)이 있다.

대량 생산되었다고 해도, 한지는 여전히 귀한 물건이었으며, 선물로서의 가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사용한 고지를 다시 풀어서 재활용하는 엷은 먹빛 종이(우스즈미시)가 보급되었다.

원경(元慶) 4년(880년)에 후지와라노 다미코(藤原多美子)가 승하한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의 편지를 모아 다시 풀어서, 그 종이에 법화경(法華経)을 사경하여 공양하였다(『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이 시대에는 탈묵기술(脱墨技術)이 없었으므로, 다시 풀어 만들면 종이의 색깔은 엷은 검은색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종이를 엷은 먹빛 종이(薄墨紙)라고 불렀다.

한때 지야인지(紙屋院紙)는 관립 제지 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로 고급 종이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말기가 되자 각지의 장원(일본)에서 제지가 이루어지면서 원료가 부족해지자, 지야인에서는 주로 고지(古紙)나 반고지(反故紙)를 재활용하여 닥지를 뜨게 되었다. 그곳에서 제작된 엷은 먹으로 쓴 종이(수운지(水雲紙))는 옛날, 오래된이라는 뜻을 가진 "숙(宿)"자를 붙여 "숙지(宿紙)"라고 불리게 되었고, 더 이상 옛 고급 종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 전역에 와시 기술을 보급한다는 당초의 사명을 완수한 지야인(紙屋院)은 남북조 시대(일본)에 폐지되었다.

2. 2.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의 발전 (무로마치 시대 - 에도 시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인들은 종이 제작 방법을 개량하여 와시를 개발했다.[6][7][8][9] 개량된 와시는 신사의 종교 의식 장식에 사용되었고,[6] 헤이안 시대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장식된 와시로 ''고킨와카슈''와 같은 아름다운 책들이 제작되었다.[8]

무로마치 시대에는 와시가 결혼식이나 선물을 할 때 사무라이 계급의 의례용 오리가미로 사용되었고,[6]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취미용 오리가미인 오리즈루 등이 개발되었다.[10] 에도 시대에는 와시로 만들어진 많은 서적과 대중을 위한 우키요에 판화가 목판화를 이용하여 출판되었다.[11]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종이의 소비 계층이 무사로 확대되었고, 얇은 종이보다 두껍고 실용적인 튼튼한 종이가 요구되어 스기하라시와 미노 와시가 유통되었다. 화지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업자들에 의해 紙座(카미자)가 형성되어 생산과 유통을 지배했다. 이들은 본소에 상품과 자역(座役)을 바치는 대신 영업과 신분 보장을 받았다. 대표적인 紙座로는 숙지상하좌(宿紙上下座), 나라 남시(南市)의 紙座, 육파라미쓰지를 본소로 한 종이 뜨는 자(紙漉座) 등이 있다.

1489년의 기록에 따르면, 스기하라지 1묶음을 사는 데 직인 2일 반의 품삯이 필요했을 정도로 화지는 귀중품이었다.[21]

전국 시대에 전국 다이묘는 문서용 종이 확보를 위해 화지 생산을 장려했다. 다케다 신겐이 닥나무와 삼아 생산을 장려한 일화가 알려져 있다.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추진한 낙시 낙좌에 의해 紙座의 특권은 부정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수요 증가로 전국 각지에서 화지 생산이 이루어졌고, 삼엽국화 등 새로운 원료를 이용한 제지도 보급되면서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각 번에서는 화지 생산의 특산품화, 전매제 강화를 추진하였다. 막부의 보호를 받은 도매상 주식 동업자의 독점 판매에 의한 유통 체계가 완성됨에 따라 생산자와 소매상은 자유로운 판매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2. 3. 근현대의 변화와 과제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구미(歐米)에서 펄프를 원료로 한 양지(洋紙)가 수입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일본의 화지(和紙) 제조업자들은 에도 시대의 번(藩)의 전매제(専売制)나 도매상(問屋)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이후 생산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901년 통계에 따르면, 생산업자는 7만 호(戶), 종사자는 20만 명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후반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신문이나 서적 등의 대량 인쇄가 본격화되면서, 양지에 비해 생산 효율이 나쁘고 잉크인쇄기와의 상성이 좋지 않은 화지는 점차 양지에 밀리게 되었다. 이에 맞서 생산업자 측에서는 삼(三椏) 등을 사용한 잉크나 타자기, 인쇄기에 강한 화지 개발로 대응하여 해외 수출도 하게 되었다.

창호지(障子紙)나 우산지(傘紙) 원료로서의 수요와 쇼와 시대 전기에 있어서의 전시 경제(戦時経済)에서 양지 생산 공장의 군수 공장화 등으로 어느 정도 규모는 유지했지만 (1941년 통계에서는 1만 3천 호의 생산업자가 존재한다), 전후 고도 경제 성장기에 있어서 지방의 화지 산지에서 인구 감소에 의한 후계자 부족과 양산(洋傘)의 보급 등으로 대량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일본의 화지 산업은 큰 타격을 받고 흔들렸다. 그 결과, 원료 산지의 쇠퇴와 감소에 제동이 걸리지 않아 국내에서는 앞으로 안정적인 생산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 수복 분야에서 요구되는 에도 시대 이전에 가까운 종이 재료(강한 약품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것) 등은 공급이 어려워지고 있다.

3. 특징

화지는 서양의 종이에 비해 섬유가 길어 얇지만 강하고 수명이 길며 독특한 감촉을 가진다.[14] 목재 펄프를 원료로 하는 서양 종이보다 원료가 한정되어 생산성이 낮아 가격이 비싸다. 전통적인 제조법은 일본 특유의 흘려보내면서 떠내는 기술을 이용하지만, 현대에는 수요가 많은 장지나 서도용 종이를 중심으로 전통적이지 않은 원료를 사용하거나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하기도 한다.[14] 하지만 대량생산된 종이는 얼룩이 생기거나 섬유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어, 이러한 종이를 화지로 부르지 않는 견해도 있다.

화지는 100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고 강인하며 부드러운 특성을 지녀, 일본화 용지, 목판화 용지, 종이접기 재료, 일본 지폐 소재 등으로 사용된다.[15] 에도 시대에는 대량 생산되어 건축 재료, , 침구 등에도 사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인테리어 용품이나 졸업장 용지로도 활용된다.[14]

화지 산지는 일본 전국에 분포하지만, 전통적인 제조법을 따르는 곳은 원료 생산자를 포함하여 감소하고 있다.[14] 1941년 1만 3000개 이상이었던 화지 생산자는 2016년 207개(기계식 포함)로 감소했으며,[14] 화지 원료인 닥나무 생산량도 1965년 3170톤에서 2019년 36톤으로 급감했다.[14] 메이지 시대에 서양 종이가 보급되면서 일본 고유의 종이가 "화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14]

3. 1. 일반적인 특징

화지는 서양의 종이에 비해 섬유가 길어 얇지만 강하고 수명이 길며 독특한 감촉을 가진다.[14] 목재 펄프를 원료로 하는 서양 종이보다 원료가 한정되어 생산성이 낮아 가격이 비싸다. 전통적인 제조법은 일본 특유의 흘려보내면서 떠내는 기술을 이용하지만, 현대에는 수요가 많은 창호지나 서도용 종이를 중심으로 전통적이지 않은 원료를 사용하거나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하기도 한다.[14] 하지만 대량생산된 종이는 얼룩이 생기거나 섬유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어, 이러한 종이를 화지로 부르지 않는 견해도 있다.

화지는 100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고 강인하며 부드러운 특성을 지녀, 일본화 용지, 목판화 용지, 종이접기 재료, 일본 지폐 소재 등으로 사용된다.[15] 에도 시대에는 대량 생산되어 건축 재료, , 침구 등에도 사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인테리어 용품이나 졸업장 용지로도 활용된다.[14]

화지 산지는 일본 전국에 분포하지만, 전통적인 제조법을 따르는 곳은 원료 생산자를 포함하여 감소하고 있다.[14] 1941년 1만 3000개 이상이었던 화지 생산자는 2016년 207개(기계식 포함)로 감소했으며,[14] 화지 원료인 닥나무 생산량도 1965년 3170톤에서 2019년 36톤으로 급감했다.[14] 메이지 시대에 서양 종이가 보급되면서 일본 고유의 종이가 "화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14]

3. 2. 현대 화지의 문제점

4. 제조 방법

''와시''는 일반 종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산되지만, 수작업에 크게 의존한다. 와시 제조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깨끗하고 차가운 흐르는 물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종종 겨울철 추운 날씨에 이루어진다. 차가운 물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여 섬유의 분해를 방지한다. 또한 차가운 물은 섬유를 수축시켜 종이에 바삭한 질감을 부여한다. 전통적으로는 농가의 겨울철 부업으로 농가 소득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닥나무는 일본 종이 제작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섬유이다. 닥나무 가지는 삶아서 겉껍질을 제거한 후 말린다. 그런 다음 알칼리로 삶아 녹말, 지방 및 타닌을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넣어 사용한 알칼리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섬유를 표백하고(화학 약품이나 자연적으로 개울의 보호된 지역에 두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불순물을 손으로 일일이 골라낸다. 그 결과물을 바위나 판 위에 놓고 두드린다.

물에 적신 펄프 덩어리를 물이 담긴 용기에 넣고, 긴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돕는 형성 보조제와 섞는다. 이는 전통적으로 점액성 물질인 토로로 아오이 식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네리'' 또는 PEO(폴리에틸렌 옥사이드)이다. 두 가지 전통적인 종이 제작 방법 중 하나(나가시즈키 또는 타메즈키)가 사용된다. 두 방법 모두 펄프를 체에 떠서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흔든다. 나가시즈키(용기에 네리를 사용하는 방법)는 더 얇은 종이를, 타메즈키(네리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는 더 두꺼운 종이를 생산한다.

4. 1. 전통적인 제조 과정

''와시''는 일반 종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산되지만, 수작업에 크게 의존한다. 와시 제조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깨끗하고 차가운 흐르는 물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종종 겨울철 추운 날씨에 이루어진다. 차가운 물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여 섬유의 분해를 방지한다. 또한 차가운 물은 섬유를 수축시켜 종이에 바삭한 질감을 부여한다. 전통적으로는 농가의 겨울철 부업으로 농가 소득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닥나무는 일본 종이 제작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섬유이다. 닥나무 가지는 삶아서 겉껍질을 제거한 후 말린다. 그런 다음 알칼리로 삶아 녹말, 지방 및 타닌을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넣어 사용한 알칼리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섬유를 표백하고(화학 약품이나 자연적으로 개울의 보호된 지역에 두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불순물을 손으로 일일이 골라낸다. 그 결과물을 바위나 판 위에 놓고 두드린다.

물에 적신 펄프 덩어리를 물이 담긴 용기에 넣고, 긴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돕는 형성 보조제와 섞는다. 이는 전통적으로 점액성 물질인 토로로 아오이 식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네리'' 또는 PEO(폴리에틸렌 옥사이드)이다. 두 가지 전통적인 종이 제작 방법 중 하나(나가시즈키 또는 타메즈키)가 사용된다. 두 방법 모두 펄프를 체에 떠서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흔든다. 나가시즈키(용기에 네리를 사용하는 방법)는 더 얇은 종이를, 타메즈키(네리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는 더 두꺼운 종이를 생산한다.

4. 2. 나가시스키(流し漉き)와 타메스키(溜め漉き)



''와시'' 제조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깨끗하고 차가운 흐르는 물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종종 겨울철 추운 날씨에 이루어진다. 차가운 물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여 섬유의 분해를 방지하고, 섬유를 수축시켜 종이에 바삭한 질감을 부여한다.[20] 전통적으로는 농가의 겨울철 부업으로 농가 소득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20]

닥나무는 일본 종이 제작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섬유이다. 닥나무 가지는 삶아서 겉껍질을 제거한 후 말린다. 그런 다음 알칼리로 삶아 녹말, 지방 및 타닌을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넣어 사용한 알칼리를 제거한다. 그 후 섬유를 표백하고, 남아 있는 불순물을 손으로 일일이 골라낸다. 그 결과물을 바위나 판 위에 놓고 두드린다.[20]

물에 적신 펄프 덩어리를 물이 담긴 용기에 넣고, 긴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돕는 형성 보조제와 섞는다. 이는 전통적으로 점액성 물질인 토로로 아오이 식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네리'' 또는 PEO(폴리에틸렌 옥사이드)이다. 두 가지 전통적인 종이 제작 방법 중 하나(나가시즈키 또는 타메즈키)가 사용되는데, 두 방법 모두 펄프를 체에 떠서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흔든다.[20]

나가시스키(流し漉き)란, 종이를 뜨는 과정에서 종이 원료(펄프화된 종이 원료)를 여과성이 있는 대(簀)나 망(網)을 움직여 원료를 대에 떠서 담거나 원료를 대에서 버리는 동작을 반복하여 대나 망 위에 종이 층을 만드는 뜨는 방법이다.[20]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뜨는 방법이며, 일본의 나가시스키와 중국의 나가시스키의 방법은 다르다. 나가시스키는 더 얇은 종이를, 타메스키는 더 두꺼운 종이를 생산한다.

일본의 나가시스키 기술은, 원료에 독특한 점성 물질을 가진 닥나무(일본 雁皮) 원료의 배합으로 지료액에 점성이 생겨, 마치 얇은 제지용 접착제를 사용하여 제지를 한 것처럼 종이를 뜨는 과정에서의 여과성이 향상된 데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20] 제지용 접착제를 사용한 흐름 漉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품질의 얇은 종이(원료는 닥나무(일본)로 추정됨)에 관한 것과 제지용 접착제의 사용(중국)에 관한 것이 헤이안 시대나 당나라 말기에 일본과 중국에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시대 이전에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근세에 사용 기술이 확립되어 현대에 전해지는 흐름 漉기의 제지용 접착제로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 원산의 식물로 강한 점성을 가진 황촉규(황촉규)의 뿌리이다. 그러나 황촉규에는 고온에 의한 현저한 점도 저하가 발생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타이완에서는 말라바 꾸릿(뿌리의 점액)이라는 30~35의 고온 영역에서도 황촉규보다 점도 저하가 적은 접착제가 사용되고 있으며, 일본의 풀피나무(노루오줌)도 여름철에 강한 접착제로 여겨져 나라현 요시노의 산지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20]

제지용 접착제를 적정량 사용하여 뜨면, 뜨고 나온 습지를 그 직전에 뜬 습지에 직접 순차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 간단하게 가능해진다. 쌓아 올린 습지의 덩어리를 “종이상(紙床)”이라고 하며, 종이상은 단단히 압력을 가하여 습지를 모아 탈수하는 것이 용이해지고, 그 이전의 종이와 비교하여 촘촘한 종이가 되고, 모아서 탈수한 후에도 한 장 한 장 떼어낼 수 있다는 특성이 있어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그리고 건조하여 완성된 종이에는 외관상의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종이에 남은 천연의 제지용 접착제 성분은, 종이의 카레(종이 속에 남은 수지 성분이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는 현상)를 촉진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종이에 온화한 발수성을 부여한다.[20]

5. 종류

충분한 가공을 거치면 거의 모든 풀이나 나무로 화지를 만들 수 있다. 닥나무, 삼지닥나무, 그리고 꾸지나무는 대표적인 원료이다.[1]


  • 楮紙: 닥나무로 만들어지며 가장 널리 만들어지는 화지 종류이다. 일반 종이보다 천에 가까운 질긴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방수 처리를 해도 강도가 크게 약해지지 않는다.
  • : 고대에는 라고 불렸다. 雁皮紙는 매끄럽고 윤이 나는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책과 공예품에 사용된다.
  • : mitsumata로 만들어진 Mitsumatagami는 상아색의 고운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서도뿐만 아니라 인쇄에도 사용된다. 메이지 시대부터 지폐 인쇄에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12]
  • 닥종이: 닥나무를 원료로 한 닥종이가 보급되었다.
  • 피지(반피지): 가는잎피나무를 원료로 한 종이로, 질감이 고운 광택이 있다. 조선지라고도 불린다.
  • 기타 원료: 삼, 닥나무(楮), 꾸지나무(三椏), 가는잎피나무(雁皮), 산겨릅나무(檀), 도꼬마리(苦参), 곰취[23], 마닐라삼(マニラ麻) 등이 있다.

5. 1. 원료에 따른 분류

충분한 가공을 거치면 거의 모든 풀이나 나무로 화지를 만들 수 있다. 닥나무, 삼지닥나무, 그리고 꾸지나무는 대표적인 원료이다.[1]

  • 楮紙: 닥나무 종이는 꾸지나무로 만들어지며 가장 널리 만들어지는 화지 종류이다. 일반 종이보다 천에 가까운 질긴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방수 처리를 해도 강도가 크게 약해지지 않는다.
  • : 고대에는 라고 불렸다. 雁皮紙는 매끄럽고 윤이 나는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책과 공예품에 사용된다.
  • : mitsumata로 만들어진 Mitsumatagami는 상아색의 고운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서도뿐만 아니라 인쇄에도 사용된다. 메이지 시대부터 지폐 인쇄에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12]
  • 닥종이: 닥종이는 가장 오래전부터 제작된 종이이다. 원료는 삼(Hemp)이나 저마(Ramie) 섬유로, 삼베 조각이나 헌 어망 등으로 펄프를 만들었다. 점차 취급이 용이하고, 대량 생산에 적합한 닥나무를 원료로 한 닥종이가 보급되었다.
  • 닥종이: 닥나무는 꾸지나무(梶) 나무로, 어린 가지의 나무껍질 섬유를 원료로 하였다. 표면의 질감이 다소 거칠지만, 섬유가 길어 튼튼한 종이가 되었다.
  • 피지(반피지): 가는잎피나무를 원료로 한 종이로, 질감이 고운 광택이 있다. 조선지라고도 불린다.
  • 단지(무로지): 단지는 두껍고 아름다운 흰색이 특징이다. 원료인 (檀)는 주로 활을 만드는 재료였던 노박덩굴과의 낙엽 아교목으로, 그 어린 가지의 나무껍질 섬유를 원료로 사용한다.
  • 기타 원료: 삼, 닥나무(楮), 꾸지나무(三椏), 가는잎피나무(雁皮), 산겨릅나무(檀), 도꼬마리(苦参), 곰취[23], 마닐라삼(マニラ麻) 등이 있다.

5. 2. 용도에 따른 분류

화지(和紙)는 충분한 가공을 거치면 거의 모든 풀이나 나무로 만들 수 있으며, 닥나무, 삼지닥나무, 그리고 꾸지나무는 세 가지 인기 있는 원료이다.[1]

  • 楮紙: 닥나무로 만들어지며 가장 널리 만들어지는 일본 종이의 종류이다. 일반 종이보다 천에 가까운 질긴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방수 처리를 해도 강도가 크게 약해지지 않는다.
  • 雁皮紙/Ganpishi일본어: 고대에는 斐紙/''Hishi''일본어라고 불렸다. 매끄럽고 윤이 나는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책과 공예품에 사용된다.
  • 三椏紙/Mitsumatagami일본어: mitsumata로 만들어진 Mitsumatagami는 상아색의 고운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서도뿐만 아니라 인쇄에도 사용된다. 메이지 시대부터 지폐 인쇄에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12]


『정창원 문서』에는 채색지로 식물로 염색한 오색지·채색지·연한 노란색 종이 등 10여 종류가, 가공지로 금은을 장식한 금박 연보라색 종이·금박 연두색 종이·은박 연분홍색 종이 등 10여 종류가, 가공법의 차이로 인쇄지·이어붙인 종이(끝 이어붙인 종이)가, 형태와 성질의 차이로 긴 종이·짧은 종이·반절지·상등지·중등지가, 용도의 차이로 서류용 종이·필사용 종이·표지·칸막이용 종이(칸막이용)의 명칭이 보이며, 일본에서의 제조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이에 기름을 발라 방수 기능을 부여하는 가공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유단은 한 겹의 종이에 기름을 바른 것으로, 주로 깔개나 포장용으로 사용되었다. 유단은 여러 장의 종이를 붙여 들깨기름 또는 감탕을 바르고, 거기에 옻칠을 한 것으로 광택이 있다. 유지용 기름은 아마인유, 들깨기름, 참기름 등의 건성유를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는 다른 성분을 첨가한 가공유를 사용했다. 우산에는 들깨기름을 사용했다.

이 우산용 방수지는 "御から笠紙" 또는 "傘紙"라고 불리며, 조선시대 초에는 경상도의 우산지가 많이 유통되었고,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각지에서도 제조되기 시작하여 경상도의 고노지, 경상북도 영주의 우다지, 충청도의 모리시타지가 우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방수처리를 한 종이를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우산을 만들었다. 뱀눈 우산용 우산지는 본염우다, 아와조메라고 불리며, 경상도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거나 전람회 등에서 사용되는 주요 크기는 다음과 같다.

  • 단자
  • 콩색지
  • 색지
  • 반절
  • 미농판
  • 반접(반절)
  • * 세로·가로 1/2, 1/3, 가로 1/4, 두 겹 접기(서예 크기)
  • 반절 두 폭(반접을 두 개 나란히 한 것)
  • 전지(소화선지, 사척판이라고도 함)
  • 연(전지 세로폭 1/4)
  • 연락(전지 세로폭 3/4, 또는 전지에서 세로폭 1/3 또는 1/4를 잘라낸 나머지 크기)
  • 삼육척(삼척×육척, 대화선, 육척판이라고도 함)
  • 오척판(중화선이라고도 함)
  • 이팔척(이척×팔척. 2.6×8 사이즈로 액자에 넣기도 함. 장판, 팔척판이라고도 함)
  • 2.6×8척(이팔 사이즈로 대용하기도 함)
  • 사×사척
  • 반회지(가나용)
  • 전회지(가나용)
  • 촌송암(가나용)
  • 승색지(가나용)

6. 용도

화지는 20세기 초까지 일본에서 서구식 종이나 다른 재료를 대신하여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13] 당시 일본에는 화지가 유일한 종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지 고유의 특성이 다른 재료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지는 생산량이 적었던 시절에는 귀중품으로 여겨져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는 선물로 사용되었다. 『미도관백기』에는 관불회의 시주료로 장관은 5첩, 나곤은 4첩, 산기#율령제에 있어서의 산기는 3첩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종이 선물 풍습은 무가 사회에도 계승되어 스기하라가미#일속일본·일속일권이라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일속일본의 경우 부채 한 개와 스기하라가미(단지·미노가미·에치젠가미·카이타가미·슈젠지가미) 한 묶음(10첩)을, 일속일권의 경우는 단자(코소데·견직물·축면·갈포) 한 권을 세트로 하여 미즈히키로 묶는 것이 관습이었다.[28][30][29] 또한, 선물을 한지로 포장하는 일도 행해졌으며, 후에 오리가타라는 예법으로 확립되었다.

장지문이 있는 방


일본 기후는 여름에 고온다습한 것이 특징이다. 『도연초』에도 “집 짓는 방법은 여름을 중시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듯이, 예로부터 여름에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주택 건설이 이루어졌다. 일본 가옥은 재료가 풍부하고 습도 조절이 가능한 목재, 풀, 흙, 그리고 화지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고상식 기초 구조에 높은 茅葺(카야부키) 지붕, 긴 처마, 진흙 벽에 다다미, 화지를 붙인 목제 다테구(문짝·창짝 등)는 모두 천연 소재로, 습도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다. 건물이 커지고 지붕이 기와지붕이 되면, 실내에는 화지를 붙인 아카리쇼지(창호지문), 후스마(미닫이문), 츠이타테(병풍), 병풍 등이 배치되어 습도와 온도 조절을 했다.

헤이안 시대 귀족의 저택은 신전조 양식이었으며, 대광간 양식과 같이 구조적인 칸막이가 없었다. 개구부에는 십문이 설치되었고, 내부는 충립, 어렴, 구장, 병풍, 견토, 장지 등의 칸막이(쇼지)로 공간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쇼지에는 비단, 삼베, 갈대 등의 천을 바르고 그 위에 불화, 당화, 대화를 그렸다. 『겐지 이야기』, 『겐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아귀초지』, 『병초지』, 『춘일권현험기 그림』, 『법연 상인 그림 전기』, 『일편 상인 그림 전기』 등에 사용 상황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한지는 문짝 외에도 부채, 종이옷, 종이이불, 종이베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었다. 한지는 원래 삼 껍질을 원료로 제지되었기 때문에 의류나 침구로 이용하는 것은 드문 사용례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한지가 대량 생산된 결과, 일반에 보급되어 문구류 이외에도 이용되게 되었다. 튼튼한 한지는 감물, 한천, 곤약풀 등으로 가공하면 더욱 튼튼해지고 내수성도 향상되므로, 우산, 삿갓, 우의 등의 우구에도 이용되었다.

화지 마스킹 테이프


꾸지(構樹)의 껍질을 원료로 사용한 저급품도 화장지로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한지 다발의 포장지로 사용되었지만, 부드럽고 그 목적에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콧물 닦는 종이, 엉덩이 닦는 종이로 사용되었다. 막말(幕末)부터 메이지 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코를 풀 때 손수건과 같은 재사용 가능한 것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일본인의 관습을 사치스럽게 여겼다. 현재는 티슈와 화장지로 대체되었다.

종이에 기름을 발라 방수 기능을 부여하는 가공은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왜명류취초』에 유단의 이름이 보인다. 유단은 한 겹의 종이에 기름을 바른 것으로, 주로 깔개나 포장용으로 사용되었다. 유단은 여러 장의 종이를 붙여 들깨기름 또는 감탕을 바르고, 거기에 옻칠을 한 것으로 광택이 있다. 유지용 기름은 아마인유, 들깨기름, 참기름 등의 건성유를 사용했고, 조선 시대에는 다른 성분을 첨가한 가공유를 사용했다. 우산에는 들깨기름을 사용했다. 이 우산용 방수지는 "御から笠紙" 또는 "傘紙"라고 불리며, 조선 시대 초에는 경상남도의 우산지가 많이 유통되었고,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각지에서도 제조되기 시작하여 경상도의 고노지, 경상북도 영주의 우다지, 충청도의 모리시타지가 우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방수처리를 한 종이를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우산을 만들었다. 뱀눈 우산용 우산지는 본염우다, 아와조메라고 불리며, 경상남도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최근에는 가장 얇은 일본 종이로 알려진 토사덴구조시(土佐典具帖紙)가 고문서나 그림 등 문화재의 수리·보강에 사용되고 있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의 미술관이나 연구기관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22]

7. 한국과의 관계

8. 주요 산지

여기서는 신궁의 제사용지로 한지를 뜨고 있다.]]

흘려 뜨는 모습(에치젠와시(越前和紙))
후쿠이현(福井県)에치젠시(越前市) 우다테(卯立) 공예관에서

  • 이와테현(岩手県):히가시야마와시(東山和紙), 나리시마시(成島紙)
  • 미야기현(宮城県):시로이시와시(白石和紙), 야나기유와시(柳生和紙), 마루모리시(丸森紙)
  • 아키타현(秋田県):토지몬지와시(十文字和紙)
  • 야마가타현(山形県):후카야마시(深山紙), 타카마츠와시(高松和紙), 나가사와와시(長沢和紙), 가쓰야마와시(月山和紙)
  • 후쿠시마현(福島県):후쿠시마와시(福島和紙)(노부오와시(信夫和紙)), 토오노와시(遠野和紙), 카미카와사키와시(上川崎和紙), 야마후나이와시(山舟生和紙), 노로사와와시(野老沢和紙), 에비네와시(海老根和紙), 이데가하라와시(出ヶ原和紙)
  • 이바라키현(茨城県):니시노우치시(西ノ内紙)
  • 도치기현(栃木県):토무라시(程村紙), 카라스야마와시(烏山和紙)
  • 군마현(群馬県):키류와시(桐生和紙)
  • 사이타마현(埼玉県):오가와와시(小川和紙)(호소카와시(細川紙))
  • 도쿄도(東京都):군도시(軍道紙)
  • 니가타현(新潟県):오구니와시(小国和紙), 에치고(越後)와시, 코이데시(小出紙), 오오사와시(大沢紙), 이자와시(伊沢紙)
  • 토야마현(富山県):에치고와시(야오와시(八尾和紙)), 고카야마와시(五箇山和紙), 히루야시(蛭谷紙)
  • 이시카와현(石川県):후타마타와시(二俣和紙), 가가간피시(가가와시(加賀和紙))
  • 후쿠이현(福井県):에치젠와시(越前和紙), 와카사와시(若狭和紙)
  • 야마나시현(山梨県):니시지마와시(西嶋和紙), 이치카와와시(市川和紙)
  • 나가노현(長野県):우치야마시(内山紙), 마츠자키와시(松崎和紙), 타치이와시(立岩紙)
  • 기후현(岐阜県):미노와시(美濃和紙), 야마나카와시(히다시(飛騨紙))
  • 시즈오카현(静岡県):스루가시(스루가시(駿河紙))(요코노시(横野紙)), 스루가유노시(駿河柚野紙), 슈젠지시(修善寺紙)
  • 아이치현(愛知県):오하라시(오하라시(小原紙))(모리시타시(森下紙))
  • 미에현(三重県):이세와시(伊勢和紙), 후카노와시(深野和紙)
  • 시가현(滋賀県):모카라가미(揉唐紙), 에슈간피시(江州雁皮紙), 키류시(桐生紙)
  • 교토부(京都府):쿠로다니와시(黒谷和紙), 탄고와시
  • 오사카부(大阪府):미나토시(湊紙)
  • 효고현(兵庫県):스기하라시(杉原紙), 나시오간피시(名塩雁皮紙)(나시오와시(名塩和紙))
  • 나라현(奈良県):쿠니쿠시시(国栖紙), 미쿠시시(美栖紙), 요시노시(吉野紙), 우다시(宇陀紙), 요시노스기카와와시(吉野杉皮和紙), 쿠사키조메와시[24]
  • 와카야마현(和歌山県):다카야마시(高野紙)(후루사와시(古沢紙)), 야스다시(保田紙)
  • 돗토리현(鳥取県):인슈와시(因州和紙)
  • 시마네현(島根県):이슈와시(石州和紙), 이즈모와시, 카치지와시(勝地和紙)
  • 오카야마현(岡山県):비츄와시(備中和紙), 타카오와시(高尾和紙), 츠야마하쿠갓푸시(津山箔合紙)(요코노와시(横野和紙)), 신다이와시(神代和紙)
  • 히로시마현(広島県):오오타케와시(大竹和紙), 키노가와시(木野川紙)
  • 야마구치현(山口県):토쿠지와시(徳地和紙)
  • 도쿠시마현(徳島県):아와와시
  • 에히메현(愛媛県):이요와시, 오오즈와시(大洲和紙), 슈쿠소와시(周桑和紙)
  • 고치현(高知県):토사와시, 오오하마시(大濱紙), 토사세이쵸시(土佐清帳紙)
  • 후쿠오카현(福岡県):야메와시(八女和紙)(치쿠고와시(筑後和紙))
  • 사가현(佐賀県):나오와시(名尾和紙), 시게하시와시(重橋和紙)(카라츠와시(唐津和紙))
  • 쿠마모토현(熊本県):미야지와시(宮地和紙)
  • 오이타현(大分県):타케다와시(竹田和紙), 야요이와시(弥生和紙)(사에키시(佐伯紙))
  • 미야자키현(宮崎県):호호쿠와시(穂北和紙), 미미즈시(美々津紙)
  • 가고시마현(鹿児島県):가모와시(蒲生和紙)
  • 오키나와현(沖縄県):류큐시(류큐시(琉球紙))(바죠시(芭蕉紙)), 게츠토우시(月桃紙)

참조

[1] 서적 Washi: the world of Japanese paper Kodansha International
[2] 웹사이트 Paper conservation by using Japanese paper, washi https://www.ifla.org[...]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ibrary Associations and Institutions
[3] 웹사이트 The elegant and refined world of washi https://www.toki.tok[...] Toki 2015-08-30
[4] 웹사이트 Washi paper in Mino https://www.ana-cool[...] ANA
[5] 뉴스 Government, paper makers welcome addition of 'washi' to UNESCO list https://web.archive.[...] 2014-11-27
[6] 웹사이트 https://guides.lib.k[...] Kyushu University Library 2022-11-14
[7] 웹사이트 https://www.origami-[...] Nippon Origami Association 2022-11-14
[8] 웹사이트 https://pub.nikkan.c[...] Nikkan Kogyo Shimbun 2022-11-25
[9] 웹사이트 https://kotobank.jp/[...] Kotobank./Digitalio, Inc./The Asahi Shimbun 2022-11-25
[10] 웹사이트 https://guides.lib.k[...] Kyushu University Library 2022-11-14
[11] 웹사이트 Edo Picture Books and the Edo Period. https://www.kodomo.g[...] National Diet Library. 2022-11-26
[12] 웹사이트 How Japan's newest yen note came from the Nepali mountains {{!}} CNN Business https://edition.cnn.[...] 2024-07-03
[13] 웹사이트 Review: Enter the dragon: The Citizen AQ 4020-54Y. Best quartz watch in the world? https://deployant.co[...] 2018-05-10
[14] 신문 和紙の未来を考える 日本経済新聞 2021-05-16
[15] 웹사이트 和紙について https://www.morisa.j[...] 株式会社モリサ
[16] 웹사이트 紙の歴史:紙の基礎知識|紙を選ぶ|竹尾 TAKEO https://www.takeo.co[...]
[17] 문서 履中天皇の在位期間と西暦の換算については、履中天皇及び上古天皇の在位年と西暦対照表の一覧を参照。ここでは出典『和紙の源流』の記述に従っている。
[18] 문서 仏教伝来の時期についても諸説あり、538年説、552年説などがある。詳細は仏教公伝#公伝年代をめぐる諸説を参照。
[19] 웹사이트 図書寮(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https://kotobank.jp/[...] DIGITALIO
[20] 웹사이트 流漉(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https://kotobank.jp/[...] DIGITALIO
[21] 논문 戦国期近衛家の家産経済の記録 -『雑事要録』『雑々記』について- 関西大学史学会 1982-12
[22] 웹사이트 https://www.hidakawa[...]
[23] 신문 「フキの和紙 味わい豊か/釧路市、販売再開/模様・手触りに個性、扇子にも」 日本経済新聞 2018-05-22
[24] 웹사이트 吉野町について》産業》手漉き和紙 https://www.town.yos[...] 吉野町役場産業観光課 2024-12-09
[25] 서적 和紙の源流
[26] 서적 和紙の源流
[27] 웹사이트 越前市公式HP 旧今立町 小学校社会科副読本 今立町の歴史年表 http://www.city.echi[...]
[28] 서적 和紙つくりの歴史と技法
[29] 서적 和紙の源流
[30] 서적 紙の文化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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