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가쓰히로
1. 개요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일본의 야구 선수, 지도자, 구단 경영인으로 활동했다. 선수 시절에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주로 1번 타자 또는 2루수로 활약했으며, 1975년에는 센트럴 리그 2루수 최다 보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한신 타이거스와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감독, GM 등을 역임했으며, 한신에서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오릭스에서는 2006년에 감독을 맡았다. 2012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초대 GM으로 취임했으나, 2015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 이름 | 나카무라 가쓰히로 (中村勝広) |
|---|---|
| 출생일 | 1949년 6월 6일 |
| 사망일 | 2015년 9월 23일 (향년 66세) |
| 출생지 | 지바현 산부군 구주쿠리정 |
| 사망지 | 도쿄 |
| 신장 | 177 |
| 체중 | 65 |
| 포지션 | 2루수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71년 NPB 드래프트 2위 |
|---|---|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 (1972-1982) |
| 첫 출장 | 1972년 4월 9일 |
| 마지막 출장 | 1982년 8월 28일 |
| 타율 | .246 |
|---|---|
| 홈런 | 76 |
| 안타 | 648 |
| 코치 | 한신 타이거스 (1980-1988) |
|---|---|
| 감독 | 한신 타이거스 (1990-1995) 오릭스 버펄로스 (2006) |
| 올스타 선정 | 3회 (1972, 1975, 1977) |
|---|
| Baseball-Reference (영어) | 선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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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법원
광주고등법원은 1952년에 설치되어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를 관할하며, 제주와 전주에 원외재판부를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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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년
1502년은 율리우스력으로 수요일에 시작하는 평년으로, 이사벨 1세의 이슬람교 금지 칙령 발표, 콜럼버스의 중앙아메리카 해안 탐험,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상관 설립, 크리미아 칸국의 킵차크 칸국 멸망, 비텐베르크 대학교 설립,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신대륙 도착 등의 주요 사건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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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시노 겐지
도마시노 겐지는 198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89년 신인왕을 수상하고 빠른 발과 수비력을 갖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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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 히데키
나가오카 히데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 및 2루수로 활동하며 2022년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고 2024년 최다 안타 타이틀을 획득했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2. 선수 경력
현역 시절 나카무라는 주로 1번 타자를 맡았으며, 사카키바라 요시유키와 함께 1, 2번 타자 콤비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전 경기에 출장하여 장타력은 높지 않았지만 끈기를 보였다. 같은 해 시즌 초회 선두 타자 홈런 6개를 기록해 구단 신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1972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후쿠모토 유타카가 기록한 당시 최다 기록(8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었다.
견실한 수비에도 정평이 있어 1975년 6월 4일 야쿠르트전에서는 1경기 11보살로 당시 일본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키노시타 토미오, 오카다 아키노부, 코사카 마코토, 타나카 히로야스가 타이기록을 세웠고, 2013년 9월 18일 혼다 유이치가 12보살로 경신했지만, 센트럴 리그 기록은 여전히 나카무라가 보유하고 있다.
2.1. 프로 입단 전
지바 현립 나루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체육 전공으로 진학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4학년 가을 시즌에 2루수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리그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경기 수 | 타수 | 안타 | 타율 | 홈런 | 타점 |
|---|---|---|---|---|---|
| 52 | 172 | 51 | .297 | 4 | 33 |
197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와세다 대학교에서는 주장을 맡았기 때문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장래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대학 동기로는 내야수 모치즈키 히로시, 카네코 카츠미, 타나카 노부키가 있다.
2.2. 한신 타이거스 시절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와세다 대학 시절 주장을 맡았던 경력 덕분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차기 한신의 지도자로 거론되었다. 입단 첫 해인 1972년부터 오픈전에서 활약하며, 드래프트 1위 야마모토 카즈유키, 3위 모치즈키 미츠루와 함께 "오랜만의 루키 풍작의 해"라고 불렸다. 개막전부터 2루수, 1번 타자로 발탁되어 노다 유키토시, 안도 모토오와 주전 경쟁을 펼쳤고, 올스타 게임에도 팬 투표로 선출되어 첫 출전을 달성했다.
1974년에는 주전 2루수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1975년에는 전 경기에 출장하여 처음으로 규정 타석 (14위, 타율 .280)에 도달했고, 개인 통산 최다인 16홈런을 기록했다. 출루율은 오 사다하루, 타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에 이어 리그 4위를 기록했다.
1978년까지 주전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견실한 수비로 1970년대 후반 한신 타이거스를 이끌었다. 특히 1978년에 기록한 시즌 수비율 .995는 당시 2루수 일본 신기록이었다.
1979년에는 사카키바라 요시유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1루수로도 기용되었지만, 출전 기회는 크게 줄었다.
1981년 코치를 겸임했고, 1982년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코치에서도 물러났다. 현역 시절에는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 14번을 달았다.
3. 지도자 및 경영인 경력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성실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선수 시절 기숙사 생활에서도 성실한 우등생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신에서는 감독과 GM으로 2위, 오릭스에서도 GM으로 2위를 달성했지만, 팀 성적이 부진할 때는 "패배광"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부유층 출신, 와세다대학 출신의 후보 선수, 2군 감독 출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실화", "진상" 등 인간 관계를 추측하는 잡지에서는 "전형적인 예스맨"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다카라지마사 『별책 다카라지마 프로 야구<이면 읽기>독본』(1998년)에는 "구마가 그(나카무라)에게는 조정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구단과 언론과의 사이에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내용이 있다.
간사이 독립 리그의 고베 9 크루즈 소속이었던 요시다 에리에 대해, 2009년 리그 개막전 등판 당시 "만약의 일을 생각하면 무섭고, 타자도 어렵다. 화제를 만드는 의도는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가"라고 말하며 부정적인 야구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신 GM으로 취임하기 직전까지 MBS 라디오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던 인연으로, GM 취임 후에도 『가메야마 쓰토무의 가메토모 Sports Man Day』(감독 시절 제자이자 해설자 시절 동료였던 가메야마 쓰토무가 진행하는 스포츠 정보 프로그램)에서 독점 취재를 통해 GM의 입장에서 정기적으로 코멘트를 발표했다.
2012년 8월, 침체된 팀을 재건하기 위해 한신은 나카무라에게 구단 최초로 GM 취임을 요청했고, 8월 28일에 이를 수락, 9월 5일에 정식 취임식을 가졌다. 한신 GM 취임 후 1군 원정에 자주 동행했다. 2015년 9월 23일, 팀의 도쿄 원정 중 숙소 호텔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급성 심부전이었다. 처음에는 급성 심부전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뇌출혈로 발표되었다.
2015년 9월 30일에 지바시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야구계 관계자 약 250명이 참석했다. 한신 구단은 11월 19일에 고시엔 구장에서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는 "작별의 모임"을 개최했다.
한신 구단은 장례식 다음 날인 2015년 10월 1일에 인사 이동을 발표하고 당분간 GM직을 폐지했다. 그러나 가네모토 도모노리 1군 감독의 요청으로 10월 26일에 가케후 마사유키와 2군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까지 1군 감독이었던 와다 유타카는 12월 1일자로 오너 부속 시니어 어드바이저(SA)로 취임하여, GM 시대 나카무라의 역할을 사실상 계승했다.
작가 야마다 다카미치는 "많은 한신 팬들에게 나카무라 GM은 암흑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3.1. 한신 타이거스 코치 및 감독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을 맡아 1986년에는 웨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88년에는 1군 작전 수비 주루 코치(도중에 수석 코치)를 맡았으나,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과의 충돌로 1년 만에 사임했다. 1989년에는 마이니치 방송(MBS) 해설위원과 스포츠 닛폰 평론가를 역임했다.
1989년 10월 18일 한신 감독으로 복귀했다. 장기 집권을 전제로 한 기용이었고, 견실함을 인정받아 팀 재건을 기대받았다. 취임 첫 해인 1990년에는 2년 만에 최하위에 그쳤고, 그 해 오프에 실행한 트레이드로 획득한 선수들(다이에에서 니시카와 요시아키, 후지모토 슈지, 롯데에서 다카하시 요시히코)은 이듬해 1991년에 전혀 기대에 부응하는 성적을 내지 못해 2년 연속 최하위로 끝났다.
1992년에는 외야 수비 주루 코치 겸 작전 코치로 시마노 이쿠오가 취임했고, 배터리 코치는 나카무라의 제안으로 아리타 슈조가 취임했다. 그 해부터 고시엔 구장의 럭키 존이 철거되어 기존의 타격 중시 전술에서 투수를 중심으로 하는 수비 중시 전술로 전환했다. 나카무라는 신조 쓰요시의 자질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주전으로 기용했다. 이 해에는 나카타 코지, 유후네 도시로, 나카고메 신, 노다 코지 등 투수진의 활약과 신조, 가메야마 쓰토무, 야마다 가쓰히코 등의 젊은 선수들의 약진으로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9월 초에는 선두를 달리던 야쿠르트의 9연패와 한신의 7연승으로 단숨에 선두로 뛰어올랐으나, 마무리 투수 타무라 츠토무가 혹사로 인해 부상으로 이탈하고, 젊은 선수들이 압박감에 부진에 빠져 우승을 놓쳤다. 10월 7일 야쿠르트전에서 2점 리드를 9회 1사 1, 2루 상황에서 유후네를 등판시켜 역전 끝내기 패배를 당한 지휘에 비난이 쏟아졌다.
1993년에는 63승 67패로 4위에 그쳤다. 득점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마츠나가 히로미를 획득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4년에는 신인 야부 케이이치의 활약 등으로 팀 방어율은 리그 2위로 회복했지만, 타선의 부진으로 4위에 머물렀다.
1995년에는 개막부터 5연패를 기록하는 등 부진했고, 7월의 올스타전 전 고시엔 9연전이 0승 8패 1무라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 나카무라는 7월 23일에 시즌 중 휴양을 선언했다. 휴양에 앞서, 자력 우승 가능성이 사라진 7월 17일에 구단 사장 미요시 카즈히코와 긴급 회담을 가진 구단주 쿠마 슌지로가 기자단에게 "그의 지휘는 엉망이네"라고 발언했고, 이것이 나카무라의 사퇴로 이어졌다고 한다.
감독 시절 나카무라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패배가 잦아지자 경기 중에 "암흑의 사자 필요 없어"라는 플래카드를 내거는 팬이 나타나기도 했다.
3.2. 오릭스 버펄로스 GM 및 감독
2003년 가을, 오릭스 블루웨이브 이사 전무 겸 GM으로 취임했다. 구단 재편을 거쳐 2005년 시즌 종료 후 오기 아키라 감독이 퇴진하자, 구단주 미야우치 요시히코의 정책에 따라 후임 감독으로 낙점되어 11년 만에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사 직을 사임했다. 2006년 시즌에는 5위를 기록하며 부진한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1년 만에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구단에 남아 수석 고문을 거쳐 구단 본부장으로 취임했으며, 2008년부터 2009년까지는 이사를 겸임했다.
2005년 10월 7일, 2006년 시즌부터 오릭스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관서 지방답게 개성이 강한 집단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스프링 캠프에서는 2루수 히라노 케이이치를 중견수로, 3루수였던 고토 미츠토시를 2루와 유격수로 기용하고,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가입에 대비했다. "과거의 요미우리와 같은 팀이 2개나 생겼다"고 언급했지만, 나카무라는 캠프 중에 부상을 당했다. 시즌에 들어서도 기요하라와 나카무라는 부상으로 자주 전력에서 이탈했다. 또한, 클리프 브럼보와 카림 가르시아가 부진했고, 신규 외국인 선수인 제이슨 그라보스키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믹스 모던 타선'이라고 명명된 강력 타선 구상이 무너졌다.
교류전 전후까지는 3위를 유지했지만, 타니 요시토모 등 주력 선수들의 부진과 이탈, 선발 투수진의 부진, 후반에는 키타가와 히로토시의 부상 이탈 등으로 팀이 부진에 빠졌다. 또한, "부진한 베테랑을 기용하고,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젊은 선수를 주축으로 기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8월 말, 부상 선수가 많다는 이유로 미야우치 구단주는 한때 연임을 시사했지만, 이후 라쿠텐과의 3연전에서 퍼시픽 리그 팀 최초로 라쿠텐전 3연패를 당하자 "예상 이상으로 약하다"고 발언하며 거취는 불투명해졌다. 9월 말 시점에서 최하위 라쿠텐과의 게임 차가 좁혀지며 최하위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는 위기 상황에 놓였으나, 5위 자리를 지켜냈다. 결국 9월 27일 시즌 최종전 후에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감독 사임을 발표했다.
3.3. 한신 타이거스 GM
2012년 8월, 한신 타이거스는 침체된 팀을 재건하기 위해 나카무라에게 구단 최초로 GM 취임을 요청했다. 8월 28일에 나카무라가 이를 수락했고, 9월 5일에 정식 취임식을 가졌다.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한신 GM 취임 후 1군 원정에 자주 동행했다. 2015년 9월 23일, 팀의 도쿄 원정 중 숙소 호텔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급성 심부전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급성 심부전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뇌출혈로 발표되었다.
2015년 9월 30일에 지바시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야구계 관계자 약 250명이 참석했다. 한신 구단은 11월 19일에 고시엔 구장에서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는 "작별의 모임"을 개최했다.
한신 구단은 장례식 다음 날인 2015년 10월 1일에 인사 이동을 발표하고 당분간 GM직을 폐지했다. 그러나 가네모토 도모노리 1군 감독의 요청으로 10월 26일에 가케후 마사유키와 2군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까지 1군 감독이었던 와다 유타카는 12월 1일자로 오너 부속 시니어 어드바이저(SA)로 취임하여, GM 시대 나카무라의 역할을 사실상 계승했다.
작가 야마다 다카미치는 "많은 한신 팬들에게 나카무라 GM은 암흑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4. 감독 및 GM으로서의 평가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 신조 쓰요시, 카메야마 츠토무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팀의 세대교체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2년에는 팀을 리그 2위까지 끌어올렸으나, 잦은 패배와 소극적인 선수 기용으로 팬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1992년 우승 경쟁에서 밀려난 후, 베테랑 선수 대신 젊은 선수를 기용한 것에 대해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릭스 버팔로스에서는 감독(2006년)과 GM(2007~2009년)을 역임했다. 감독 시절에는 베테랑 선수 위주의 기용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사임했다. GM 시절에는 무라마츠 아리토, 키쿠치하라 츠요시 등 핵심 선수를 보강하고, '계약금 제로 틀'을 폐지하는 등 과감한 선수 영입과 육성을 통해 팀 전력 강화에 힘썼다. 카네코 치히로, 히라노 요시히사 등 훗날 팀의 주축이 되는 선수들을 드래프트에서 지명하기도 했다.
2012년 한신 GM으로 취임할 당시, 과거 성적 부진을 이유로 팬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있었다. 한신, 오릭스 모두에서 방출된 선수들이 이적 후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드래프트 회의에서 추첨 운이 좋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종합적으로, 나카무라는 선수 육성과 팀 개혁에 강점을 보였지만, 때로는 소극적이거나 베테랑 위주의 선수 기용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5. 논란 및 사건 사고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1989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장기 집권을 목표로 팀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취임 첫 해인 1990년에는 2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고, 이듬해 트레이드로 영입한 선수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1992년에는 시마노 이쿠오를 외야 수비 주루 코치 겸 작전 코치로, 아리타 슈조를 배터리 코치로 영입하고, 고시엔 구장의 럭키 존 철거에 맞춰 투수 중심의 수비 야구로 전환했다. 신조 쓰요시를 주전으로 기용하는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마무리 투수 타무라 츠토무의 부상과 젊은 선수들의 부진으로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특히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투수 교체 실패로 역전패를 당한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1993년에는 오릭스에서 마쓰나가 히로미를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나, 마쓰나가는 부상과 팬들의 비난으로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1994년에도 신인 야부 케이이치의 활약 등으로 팀 방어율은 회복했지만, 타선 부진으로 4위에 머물렀다. 1995년에는 FA로 야마오키 유키히코를 영입했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은퇴했다. 팀은 개막부터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나카무라는 7월 23일에 시즌 중 휴양을 선언했다.
나카무라의 감독 시절, 팀 성적 부진과 선수 기용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92년 우승 실패와 1995년 시즌 중 휴양은 팬들의 큰 실망을 샀다. 구단주 쿠마 슌지로는 나카무라의 지휘에 대해 "엉망"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팬들 역시 나카무라에게 "암흑의 사자 필요 없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무라는 2024년 시즌까지 한신에서 6시즌 연속으로 1군 감독을 맡은 유일한 인물이다.
5.1. 드래프트 회의 추첨 관련
한신 감독 시절 1989년 드래프트에서 8개 구단이 경합한 노모 히데오, 1990년 드래프트에서 8개 구단이 경합한 고이케 히데오, 1992년 드래프트에서 4개 구단이 경합한 마쓰이 히데키의 추첨에서 모두 패배했다. 1991년 드래프트 4순위 미쓰이 고지의 추첨에서도 탈락했지만, 재지명으로 히야마 신지로를 영입했다.
오릭스 GM 시절 2005년 드래프트에서는 쓰지우치 다카노부의 추첨에서 당첨된 것으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해 드래프트 제비는 당첨과 꽝 모두 NPB 직인이 찍혀 있었고, 소프트뱅크의 오 사다하루 회장도 같은 착각을 하여 이후 제비 디자인이 변경되었다.
5.2. 요시다 에리 관련 발언
요시다 에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
6. 사생활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가와니시 도시오 스카우트가 지명 인사를 갔을 때 역에서 외제차로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삼촌도 지주였다고 한다.
탤런트 오구라 유코와는 먼 친척 관계(조부끼리 사촌)로, 2009년 6월에 처음 만났으며 평소에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전 프로 축구 선수 세키 다카미치도 먼 친척(오구라의 사촌)이다.
슈크림과 진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터뷰에서도 이를 인정했다. 한신 감독 시절에는 진 광고에 기용되기도 했다.
한신 GM 시절에는 음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지만,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상용했다. 혈압 강하제도 복용하며 구단 최초 GM직의 중책을 맡았다.
장남은 오사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오사카 대학 순환기 내과학 특임 조교를 맡고 있다. (장남은 나카무라 가쓰히로의 장례식과 "작별의 모임"에서 상주를 맡았다.)
7. 상세 정보
나카무라 가쓰히로는 한신 타이거스 단장(GM) 취임 후 1군 원정에 자주 동행했다. 2015년 9월 22일부터 미나미 노부오 구단 사장과 함께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원정 경기에 동행했으나, 9월 23일 정오경 도쿄도 미나토구의 숙소 호텔에서 심폐 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사망했다. 사인은 처음에는 급성 심부전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뇌출혈로 발표되었고, 향년 67세(만 66세)였다.
2015년 9월 30일 지바시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야구계 관계자 약 250명이 참석했고, 한신 구단은 11월 19일에 고시엔 구장에서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는 "작별의 모임"을 개최했다. 한신 구단은 장례식 다음날인 2015년 10월 1일에 인사 이동을 단행하고 당분간 GM직을 폐지했다. 그러나 가네모토 도모노리 1군 감독의 요청으로 10월 26일 가케후 마사유키와 2군 감독 계약을 체결했고, 와다 유타카 전 1군 감독은 12월 1일자로 시니어 어드바이저(SA)로 취임하여 나카무라의 역할을 계승했다.
선수 시절 나카무라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했으며, 견실한 수비로도 정평이 있었다. 1975년 6월 4일 야쿠르트전에서는 1경기 11개의 보살로 당시 일본 기록을 세웠다.
GM 취임 당시 인터넷 조사에서 팀이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라고 답한 사용자가 73.3%에 달했다. 작가 야마다 다카미치는 팬들의 반응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거부 반응", "암흑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GM 취임 직후 나카니시 키요오키를 1군 투수 코치로 복귀시켰고, 니시오카 츠요시, 후쿠도메 코스케 등 메이저 리그 경력이 있는 선수들을 영입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에는 오승환, 마우로 고메스를 영입하여 2014년 세이브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성실한 성격과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으며, 선수 시절 기숙사 생활에서도 성실한 우등생으로 평가가 높았다. 그러나 팀 성적 부진 시기에는 "패배광"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간사이 독립 리그의 요시다 에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7.1. 선수 상세 정보
지바 현립 나루토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체육 전공으로 진학했다. 도쿄 6대학 리그에서는 4학년 추계 시즌에 2루수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리그 통산 52경기에 출전해 172타수 51안타, 타율 0.287, 4홈런, 33타점을 기록했다.
197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 3년 차인 1974년에 주전 2루수가 되었다. 1978년까지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1978년에는 시즌 수비율 0.995를 기록, 당시 일본 기록이었다. 1981년 코치를 겸임했고, 1982년 현역 은퇴와 함께 코치직에서도 물러났다.
7.1.1. 출신 학교
* 지바 현립 나루토 고등학교
* 와세다 대학
7.1.2. 선수 경력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와세다 대학 시절 주장을 맡았기 때문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차기 한신의 지도자로 물망에 올랐다. 1년차부터 두각을 나타내 3년차인 1974년에 은퇴한 안도 모토오의 뒤를 이어 주전 2루수가 되었다. 이후 1978년까지 정 2루수로서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1970년대의 한신을 지탱했다. 1978년에 남긴 시즌 수비율 0.995는 당시의 일본 기록이었다.
1981년 코치를 겸임했고, 1982년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코치에서도 퇴임했는데, 현역 시절에는 일본에서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인 14번을 달았다.
* 한신 타이거스(1972년 ~ 1982년)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7.1.3. 개인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72년 4월 9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차전(주니치 스타디움), 1번·2루수로서 선발 출장
* 첫 안타 : 상동, 8회초에 미즈타니 히사노부로부터 좌전 안타
* 첫 타점 : 1972년 4월 19일, 대 야쿠르트 아톰스 2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와타나베 다카히로로부터 적시타
* 첫 홈런 : 1972년 4월 27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4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회말에 미즈타니 히사노부로부터 솔로 홈런
* 첫 도루 : 상동, 8회말에 2루 안착(투수 : 미사와 준, 포수 : 기마타 다쓰히코)
* 올스타전 출장 : 3회(1972년, 1975년, 1977년)
7.2. 지도자 및 기타 경력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을 맡아 1986년에는 웨스턴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작전 수비 주루 코치(도중에 수석 코치)에 취임했으나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과 충돌해 1년 만에 사임했다. 1989년에는 마이니치 방송(MBS) 해설자와 스포츠 닛폰 평론가를 지냈다.
같은 해 오프에 다시 한신 감독으로 복귀하여 1992년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1993년 이후로는 B클래스를 전전하며 성적이 침체되었고, 1995년 7월 23일 이후 휴가를 떠나며 후지타 다이라 2군 감독이 대리를 맡았다.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이후 1996년부터 2003년까지 MBS 해설자·스포니치 평론가를 맡았다. 2001년부터는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오사카 로만스에 참가했다.
2003년 가을 오릭스 블루웨이브 이사 전무 겸 GM에 취임했다. 구단 재편을 거쳐 2005년 시즌 종료 후 오기 아키라 감독이 퇴진하며 오너인 미야우치 요시히코의 정책에 따라 후임 감독으로 낙점되어 11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동시에 이사 직을 사임했다. 2006년 시즌 5위라는 부진한 성적에 책임을 지고 1년 만에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이후에도 구단에 남아 수석 고문을 거쳐 구단 본부장으로 취임해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이사를 겸임했다. 오릭스 구단 본부장 퇴임 후 2010년부터 MBS 해설자·스포니치 평론가로 복귀했다.
2012년 8월, 한신은 하위권으로 침체된 팀을 살리기 위해 나카무라에게 구단 최초로 GM 취임을 요청했다. 8월 28일 나카무라 본인이 GM 취임을 수락하면서 같은 해 9월 5일 정식으로 취임식을 가졌다.
2015년 9월 23일, 팀의 도쿄 원정에 동행하여 숙박하고 있던 호텔 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 심부전으로 밝혀졌다.
7.2.1. 지도자
* 1980년 ~ 1982년 : 한신 타이거스 선수 겸임 코치
* 1983년 ~ 1987년 :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 1988년 : 한신 타이거스 1군 작전 수비·주루 코치
* 1990년 ~ 1995년 7월 23일 : 한신 타이거스 감독
* 2006년 : 오릭스 버펄로스 감독
7.2.2. 해설자
마이니치 방송(MBS) 해설자(1989년, 1996년 ~ 2003년, 2010년 ~ 2012년 8월) 및 스포츠 닛폰 평론가로 활동했다.
7.3. 연도별 타격 성적
|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72년 | 한신 | 81 | 209 | 177 | 17 | 31 | 6 | 0 | 3 | 46 | 9 | 4 | 3 | 8 | 0 | 24 | 0 | 0 | 37 | 5 | .175 | .274 | .260 | .534 |
| 1973년 | 74 | 200 | 162 | 18 | 33 | 7 | 1 | 2 | 48 | 9 | 3 | 3 | 7 | 0 | 30 | 0 | 1 | 39 | 3 | .204 | .332 | .296 | .628 | |
| 1974년 | 112 | 362 | 307 | 41 | 71 | 11 | 3 | 11 | 121 | 34 | 8 | 3 | 4 | 1 | 47 | 3 | 3 | 65 | 1 | .231 | .338 | .394 | .732 | |
| 1975년 | 130 | 577 | 475 | 79 | 133 | 19 | 2 | 16 | 204 | 43 | 12 | 8 | 8 | 0 | 91 | 1 | 3 | 72 | 3 | .280 | .399 | .429 | .828 | |
| 1976년 | 128 | 558 | 469 | 85 | 123 | 28 | 5 | 13 | 200 | 35 | 17 | 7 | 11 | 1 | 74 | 0 | 3 | 83 | 7 | .262 | .366 | .426 | .792 | |
| 1977년 | 119 | 468 | 388 | 65 | 94 | 15 | 2 | 12 | 149 | 27 | 15 | 7 | 13 | 2 | 59 | 0 | 6 | 67 | 9 | .242 | .349 | .384 | .733 | |
| 1978년 | 103 | 384 | 320 | 53 | 80 | 13 | 0 | 11 | 126 | 30 | 15 | 6 | 5 | 3 | 54 | 1 | 2 | 48 | 3 | .250 | .359 | .394 | .753 | |
| 1979년 | 61 | 218 | 189 | 18 | 53 | 10 | 0 | 5 | 78 | 21 | 0 | 1 | 6 | 4 | 19 | 1 | 0 | 19 | 2 | .280 | .340 | .413 | .752 | |
| 1980년 | 71 | 126 | 108 | 9 | 25 | 6 | 1 | 3 | 42 | 9 | 0 | 1 | 1 | 0 | 17 | 2 | 0 | 17 | 4 | .231 | .336 | .389 | .725 | |
| 1981년 | 30 | 18 | 15 | 0 | 1 | 0 | 0 | 0 | 1 | 1 | 0 | 0 | 1 | 1 | 1 | 0 | 0 | 4 | 1 | .067 | .118 | .067 | .184 | |
| 1982년 | 30 | 28 | 25 | 1 | 4 | 0 | 0 | 0 | 4 | 1 | 0 | 0 | 0 | 0 | 3 | 0 | 0 | 5 | 0 | .160 | .250 | .160 | .410 | |
| 통산 : 11년 | 939 | 3148 | 2635 | 386 | 648 | 115 | 14 | 76 | 1019 | 219 | 74 | 39 | 64 | 12 | 419 | 8 | 18 | 456 | 38 | .246 | .352 | .387 | .739 |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7.4.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
| 1990년 | 한신 | 6위 | 130 | 52 | 78 | 0 | .400 | 36.0 | 135 | .252 | 4.58 | 41세 | ||
| 1991년 | 6위 | 130 | 48 | 82 | 0 | .369 | 26.0 | 111 | .237 | 4.37 | 42세 | |||
| 1992년 | 2위 | 132 | 67 | 63 | 2 | .515 | 2.0 | 86 | .250 | 2.90 | 43세 | |||
| 1993년 | 4위 | 132 | 63 | 67 | 2 | .485 | 17.0 | 86 | .253 | 3.88 | 44세 | |||
| 1994년 | 4위 | 130 | 62 | 68 | 0 | .477 | 8.0 | 92 | .256 | 3.43 | 45세 | |||
| 1995년 | 6위 | 130 | 46 | 84 | 0 | .354 | 36.0 | 88 | .244 | 3.83 | 46세 | |||
| 2006년 | 오릭스 | 5위 | 136 | 52 | 81 | 3 | .391 | 28.5 | 106 | .253 | 3.84 | 57세 | ||
| 통산 : 7년 | 867 | 373 | 487 | 7 | .434 | A클래스 : 1회, B클래스 : 6회 | ||||||||
* 1990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였다.
* 2004년부터 136경기제였다.
* 1995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에 대한 휴양 생활로 팀을 이탈, 이후 감독 대행은 후지타 다이라가 맡았다.
* 통산 성적은 휴양 중의 53경기를 포함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