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경우는 1380년대 출생으로 추정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고려의 밀직부사 남을번의 손자이자 개국공신 남은의 아들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판서, 판중추원사를 역임했다. 단종 즉위 후 동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세조 즉위 후 의성군, 의령군, 의산군으로 봉해졌다. 1450년 담양군 이건과 혼담이 오갔으나 무산되었고, 1454년 단종의 명으로 관복에 흉배단령을 착용했다. 1467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안호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 문종 - 세조 (조선)
세조는 조선의 제7대 왕으로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다. - 조선 문종 - 현덕왕후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어머니로,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 후 왕후로 추존, 세조 즉위 후 폐위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어 명예를 회복한 인물이다. - 조선 태조 - 태조 (조선)
고려 말 무신으로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왕위 계승 갈등으로 인해 상왕으로 물러났다. - 조선 태조 - 완풍대군
완풍대군 이원계는 고려 말 무신이자 이성계의 이복 형으로,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다 사망 후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완산군에 봉해졌고 조선 개국 후 완산백에 추봉, 여러 사당에 배향되었다. - 조선 세조 - 윤곤
윤곤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 후 완산부윤, 대장군 등을 지냈고,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명나라 사신,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무신, 정치인, 외교관이다. - 조선 세조 - 계유정난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의 고명대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위에 오르고 훈구파의 권력 독점을 야기하며 조선의 정치 구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경우 | |
---|---|
기본 정보 | |
자 | 태수(泰叟) |
호 | 지재(止齋) 묵재(默齋) |
생몰년 | 1430년 ~ 1493년 |
주요 활동 | 조선의 문신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남경복(南景福) |
어머니 |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 |
배우자 | 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 |
아들 | 남언공(南彦恭) 남곤 |
딸 | 박영(朴 영)에게 출가 |
관력 | |
과거 | 1453년(단종 1년) 진사시 합격 1466년(세조 12년) 별시 문과 급제 |
주요 관직 | 홍문관 수찬(修撰) 사간원 헌납(獻納) 성균관 직강(直講)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판 대사헌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
시호 | 정평(靖平) |
2. 생애
남경우는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41년(세종 2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 중추원사, 형조참판,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고 경주부윤으로 나갔다가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1454년(단종 2)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사관은 그가 성품이 우직하고 다른 기예는 없으며 목불식자(目不識字) 수준의 일자무식이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했다고 조롱하였다.[4]
1454년(단종 2) 지중추부사 재직 중, 학생 심중륜(沈中倫)과 노비 문제로 쟁송을 일으켜 몇 개월간 송사를 계속 진행하다가 비판받았다. 세종대왕의 서자 담양군 이거(潭陽君 李渠)와 딸 사이에 혼담이 오갔으나, 1450년 담양군이 갑자기 죽어 혼인은 취소되었다.
이때 담양군과 약혼했던 남경우의 딸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예조는 남경우의 딸이 이미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날까지 정하였으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인지(鄭麟趾)는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문종은 남경우의 딸이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담양군과 약혼했던 남경우의 딸은 심온(深溫)의 손자 심미(深湄)와 혼인하였다. 1454년 12월 1일 단종의 명으로 관복에 흉배단령(胸背團領)을 부착하면서, 조선 관리들은 흉배단령을 착용한 관복을 입게 되었다.
1455년(단종 3)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세조 즉위 후 창덕궁(昌德宮)에서 열린 잔치에 참여하였다. 1457년(세조 3) 의성군(宜城君)에 봉작되고, 의령군(宜寧君)으로 개봉되었다가,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의산군(宜山君)으로 임명되고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이듬해 의령군으로 개봉되었고, 다시 의성군(宜城君)으로 작호가 바뀌었다. 1460년(세조 5) 판중추원사 겸 병조판서(判中樞院事兼兵曹判書)가 되었다. 성품이 조급하며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종1품에 이르자 평판이 좋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
남경우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아 1383년생 설과 1393년생 설,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는 기준이 70세라 하므로 1387년생 설이 있으며 생일은 미상이다. 조선 전기 관료들의 이력을 담은 청선고 (淸選考)에 의하면 그가 고려(高麗) 시대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는 설이 등재되어 있으나[3], 어느 왕 때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고려 밀직부사이자 조선 건국 후 의령부원군 검교문하성시중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남을번(南乙番)이고, 아버지는 개국공신 남은(南誾)이다. 남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아버지 남은이 정도전, 심효생 등과 같이 이방원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때는 이미 그의 두 동생이 태어난 상태였다.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가 호군(護軍), 대호군 등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년) 6월 29일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2. 2. 관료 생활
문음으로 관직에 나가 호군(護軍), 대호군 등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년) 6월 29일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3] 이후 1441년(세종 23) 7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된 뒤 경창부윤(慶昌府尹), 중추원사를 거쳐, 형조참판, 사헌부지평 등을 두루 거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10월 1일 단종 즉위 직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1454년(단종 2) 지중추원사가 되었다.[4] 그해 11월 11일 다시 지중추원사가 되자 사관은 그가 성품이 우직(愚直)하고 다른 기예(技藝)는 아무것도 없으며 목불식자(目不識字) 수준의 일자무식이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음덕(蔭積)으로 벼슬을 했다고 조롱하였다.1454년(단종 2) 지중추부사로 재직 중, 학생 심중륜(沈中倫)과 노비문제로 쟁송을 일으켜 몇 개월간 송사를 계속 진행하다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455년(단종 3) 3월 7일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세조 즉위 후 세조가 창덕궁(昌德宮)에서 4대 공신 및 후손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행 상호군(行上護軍)으로 잔치에 참여하였다. 1460년(세조 5) 판중추원사겸병조판서(判中樞院事兼兵曹判書)가 되었다. 거칠고 데면데한 성격에, 성품이 조급하며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관품이 종1품에 이르자 주위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한다.
2. 3. 사망
1467년(세조 13) 2월 6일에 사망하였다. 바로 시호(諡號)가 내려져 시호는 안호(安胡)라 하였으니, 화목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를 않았다 하여 호화불쟁왈안(好和不爭曰安)의 안(安)이라 하고, 나이가 많도록 오래 살았다 하여 미년수고왈호(彌年壽考曰胡)의 호(胡)라 하였다. 집안 족보에 등장한 최종 관직명인 판중추원사는 증직 벼슬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1383년생 설을 취하면 85세, 1387년생 설을 취하면 향년 81세, 1393년생 설을 취하면 향년 75세가 된다.[3]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 산 16번지 남희의 묘소 근처에 있다.
3. 논란 및 의혹
(이전 출력 결과가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이 제공되면 해당 내용을 바탕으로 위키텍스트를 작성하여 출력하겠습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남을번 | 1320년 ~ 1395년 2월 13일 |
할머니 | 최씨(崔氏) | |
백부 | 남재 | 1351년 ~ 1419년, 초명은 남겸(南謙) |
백모 | 변한국대부인 파평 윤씨 | 윤호의 차녀[5] |
사촌 형 | 남경문 | 1370년 ~ 1395년/1403년, 장군 남이의 선조 |
사촌 형 | 남경무(南景武) | |
숙부 | 남실(南實) | |
숙부 | 남지 | ? ~ 1398년, 우상절도사 |
아버지 | 남은 | 1354년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
어머니 | 가순택주 강릉김씨(嘉順宅主江陵金氏) | 김보손(金寶孫)의 딸 |
형 | 남경수(南景壽) | |
동생 | 남경복(南景福) | |
동생 | 남경지(南景祉) | |
부인 | 진주강씨(晉州姜氏) | 정당문학 강회백의 둘째 딸 |
부인 | 원주원씨(原州元氏) | 중랑장(中郎將) 원침(元忱)의 딸 |
아들 | 남희(南暿) | |
며느리 | 진주강씨(晉州姜氏) | 강회백의 증손자 강윤범(姜允範)의 첫째 딸 |
딸 | 의령남씨 | |
사위 | 심미(深湄) | 심온의 손자, 소헌왕후의 조카 |
딸 | 의령남씨 | |
사위 | 사산군 이기(蛇山君 李玘) | 사산군 이호(蛇山君 李灝) 또는 그의 아버지 의창군 이공(義昌君 李玒)으로 추정되나 누구인지는 불확실 |
장인 | 강회백 | 1357년 ~ 1402년 |
처남 | 강석덕 | 1395년 ~ 1459년 |
처남댁 | 청송심씨 | 사위 심미의 대고모 |
처남 | 강우덕(姜友德) | |
처조카이자 사돈 | 강맹경 | 1410년 ~ 1461년 |
처종손이자 사돈 | 강윤범(姜允範) | |
외조부 | 김보손(金寶孫) |
5. 기타
남효온[6]에 의하면, 그의 친척인 남간이 정병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입직할 때, 미리 준비된 저녁 식사가 부족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평소에 남간과 알고 지내던 궐내의 찬인(餐人)이 저녁상을 갖추어 올렸지만 남간은 이를 받지 않았다. 족형 남경우(南景祐)가 대신 먹고는 남간에게 너스레를 떠니, 남간이 "대형(大兄)은 그러지 마시오. 목이 말라도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지적했다 한다. 渴不飮盜泉之水|갈불음도천지수중국어
족보에 의하면 남간은 남재의 손자이자 남경문의 아들이 된다. 그런데 남경우는 족보상 남은의 아들인데 태조실록에도 남은의 졸기에 남은의 아들로 나타났다.
남효온은 자신의 저서 추강집 7권에 사연을 소개했지만, 어떤 이유로 남간이 5촌 당숙뻘인 남경우에게 숙부가 아니라 형이라 칭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참조
[1]
웹인용
강회백
https://web.archive.[...]
2018-07-30
[2]
웹인용
담양군 이거
https://web.archive.[...]
2018-07-30
[3]
문서
청선고 (淸選考)
[4]
기사
남경우·이윤손·김광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단종실록
1454-11-11
[5]
문서
윤호(尹虎)의 장녀는 방순(方恂)의 부인
[6]
문서
남재의 장남 남경문의 4대손이며, 남간의 증손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