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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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경우는 1380년대 출생으로 추정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고려의 밀직부사 남을번의 손자이자 개국공신 남은의 아들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판서, 판중추원사를 역임했다. 단종 즉위 후 동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세조 즉위 후 의성군, 의령군, 의산군으로 봉해졌다. 1450년 담양군 이건과 혼담이 오갔으나 무산되었고, 1454년 단종의 명으로 관복에 흉배단령을 착용했다. 1467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안호이다.

남경우
기본 정보
한자南景祐
본관의령(宜寧)
태수(泰叟)
지재(止齋)
묵재(默齋)
생몰년1430년 ~ 1493년
주요 활동조선의 문신
가족 관계
아버지남경복(南景福)
어머니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
배우자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
아들남언공(南彦恭)
남곤
박영(朴 영)에게 출가
관력
과거1453년(단종 1년) 진사시 합격
1466년(세조 12년) 별시 문과 급제
주요 관직홍문관 수찬(修撰)
사간원 헌납(獻納)
성균관 직강(直講)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판
대사헌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시호정평(靖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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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남경우는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41년(세종 2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 중추원사, 형조참판,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고 경주부윤으로 나갔다가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1454년(단종 2)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사관은 그가 성품이 우직하고 다른 기예는 없으며 목불식자(目不識字) 수준의 일자무식이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했다고 조롱하였다.

1454년(단종 2) 지중추부사 재직 중, 학생 심중륜(沈中倫)과 노비 문제로 쟁송을 일으켜 몇 개월간 송사를 계속 진행하다가 비판받았다. 세종대왕의 서자 담양군 이거(潭陽君 李渠)와 딸 사이에 혼담이 오갔으나, 1450년 담양군이 갑자기 죽어 혼인은 취소되었다.

이때 담양군과 약혼했던 남경우의 딸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예조는 남경우의 딸이 이미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날까지 정하였으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인지(鄭麟趾)는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문종은 남경우의 딸이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담양군과 약혼했던 남경우의 딸은 심온(深溫)의 손자 심미(深湄)와 혼인하였다. 1454년 12월 1일 단종의 명으로 관복에 흉배단령(胸背團領)을 부착하면서, 조선 관리들은 흉배단령을 착용한 관복을 입게 되었다.

1455년(단종 3)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세조 즉위 후 창덕궁(昌德宮)에서 열린 잔치에 참여하였다. 1457년(세조 3) 의성군(宜城君)에 봉작되고, 의령군(宜寧君)으로 개봉되었다가,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의산군(宜山君)으로 임명되고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이듬해 의령군으로 개봉되었고, 다시 의성군(宜城君)으로 작호가 바뀌었다. 1460년(세조 5) 판중추원사 겸 병조판서(判中樞院事兼兵曹判書)가 되었다. 성품이 조급하며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종1품에 이르자 평판이 좋지 않았다.

2.1. 초기 생애

남경우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아 1383년생 설과 1393년생 설,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는 기준이 70세라 하므로 1387년생 설이 있으며 생일은 미상이다. 조선 전기 관료들의 이력을 담은 청선고 (淸選考)에 의하면 그가 고려(高麗) 시대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는 설이 등재되어 있으나, 어느 왕 때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고려 밀직부사이자 조선 건국 후 의령부원군 검교문하성시중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남을번(南乙番)이고, 아버지는 개국공신 남은(南誾)이다. 남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아버지 남은정도전, 심효생 등과 같이 이방원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때는 이미 그의 두 동생이 태어난 상태였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가 호군(護軍), 대호군 등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년) 6월 29일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2.2. 관료 생활

문음으로 관직에 나가 호군(護軍), 대호군 등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년) 6월 29일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1441년(세종 23) 7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된 뒤 경창부윤(慶昌府尹), 중추원사를 거쳐, 형조참판, 사헌부지평 등을 두루 거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10월 1일 단종 즉위 직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1454년(단종 2)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11월 11일 다시 지중추원사가 되자 사관은 그가 성품이 우직(愚直)하고 다른 기예(技藝)는 아무것도 없으며 목불식자(目不識字) 수준의 일자무식이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음덕(蔭積)으로 벼슬을 했다고 조롱하였다.

1454년(단종 2) 지중추부사로 재직 중, 학생 심중륜(沈中倫)과 노비문제로 쟁송을 일으켜 몇 개월간 송사를 계속 진행하다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455년(단종 3) 3월 7일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세조 즉위 후 세조가 창덕궁(昌德宮)에서 4대 공신 및 후손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행 상호군(行上護軍)으로 잔치에 참여하였다. 1460년(세조 5) 판중추원사겸병조판서(判中樞院事兼兵曹判書)가 되었다. 거칠고 데면데한 성격에, 성품이 조급하며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관품이 종1품에 이르자 주위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한다.

2.3. 사망

1467년(세조 13) 2월 6일에 사망하였다. 바로 시호(諡號)가 내려져 시호는 안호(安胡)라 하였으니, 화목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를 않았다 하여 호화불쟁왈안(好和不爭曰安)의 안(安)이라 하고, 나이가 많도록 오래 살았다 하여 미년수고왈호(彌年壽考曰胡)의 호(胡)라 하였다. 집안 족보에 등장한 최종 관직명인 판중추원사는 증직 벼슬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1383년생 설을 취하면 85세, 1387년생 설을 취하면 향년 81세, 1393년생 설을 취하면 향년 75세가 된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 산 16번지 남희의 묘소 근처에 있다.

3. 논란 및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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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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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비고
할아버지남을번1320년 ~ 1395년 2월 13일
할머니최씨(崔氏)
백부남재1351년 ~ 1419년, 초명은 남겸(南謙)
백모변한국대부인 파평 윤씨윤호의 차녀
사촌 형남경문1370년 ~ 1395년/1403년, 장군 남이의 선조
사촌 형남경무(南景武)
숙부남실(南實)
숙부남지? ~ 1398년, 우상절도사
아버지남은1354년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어머니가순택주 강릉김씨(嘉順宅主江陵金氏)김보손(金寶孫)의 딸
남경수(南景壽)
동생남경복(南景福)
동생남경지(南景祉)
부인진주강씨(晉州姜氏)정당문학 강회백의 둘째 딸
부인원주원씨(原州元氏)중랑장(中郎將) 원침(元忱)의 딸
아들남희(南暿)
며느리진주강씨(晉州姜氏)강회백의 증손자 강윤범(姜允範)의 첫째 딸
의령남씨
사위심미(深湄)심온의 손자, 소헌왕후의 조카
의령남씨
사위사산군 이기(蛇山君 李玘)사산군 이호(蛇山君 李灝) 또는 그의 아버지 의창군 이공(義昌君 李玒)으로 추정되나 누구인지는 불확실
장인강회백1357년 ~ 1402년
처남강석덕1395년 ~ 1459년
처남댁청송심씨사위 심미의 대고모
처남강우덕(姜友德)
처조카이자 사돈강맹경1410년 ~ 1461년
처종손이자 사돈강윤범(姜允範)
외조부김보손(金寶孫)

5. 기타

남효온에 의하면, 그의 친척인 남간이 정병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입직할 때, 미리 준비된 저녁 식사가 부족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평소에 남간과 알고 지내던 궐내의 찬인(餐人)이 저녁상을 갖추어 올렸지만 남간은 이를 받지 않았다. 족형 남경우(南景祐)가 대신 먹고는 남간에게 너스레를 떠니, 남간이 "대형(大兄)은 그러지 마시오. 목이 말라도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지적했다 한다. 渴不飮盜泉之水중국어

족보에 의하면 남간은 남재의 손자이자 남경문의 아들이 된다. 그런데 남경우는 족보상 남은의 아들인데 태조실록에도 남은의 졸기에 남은의 아들로 나타났다.

남효온은 자신의 저서 추강집 7권에 사연을 소개했지만, 어떤 이유로 남간이 5촌 당숙뻘인 남경우에게 숙부가 아니라 형이라 칭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