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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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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해 회사는 1711년 영국 정부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이다.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고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여 부채를 상환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스페인과의 아시엔토 조약을 통해 노예 무역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의 부진과 복권 채권의 성공으로 금융 회사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1720년에는 주가 조작과 투기 광풍으로 남해 회사 거품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하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 사건 이후 로버트 월폴이 사태를 수습하고 회계 감사 제도가 등장하는 등 금융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남해 회사는 이후 북극해 포경 사업에도 진출했으나 실패했고, 1853년 해산될 때까지 정부 부채를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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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회사 - [회사]에 관한 문서
회사 개요
정식 명칭 (영어)The Governor and Company of the merchants of Great Britain, trading to the South Seas and other parts of America, and for the encouragement of the Fishery
약칭남해 회사 (South Sea Company)
라틴어 표어A Gadibus usque Auroram (가디스에서 새벽까지)
유형주식회사
설립1711년 1월
설립자알려지지 않음
해산1853년
소재지런던
국가그레이트브리튼
산업노예 무역
투기
포경업
제품알려지지 않음
역사적 맥락
배경18세기 경제 투기 거품

2. 설립 배경

남해 회사는 1711년 영국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당시 영국은 지출의 9% 이상을 채무 상환 이자와 군사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공공 부채를 정리할 목적으로 남해 회사를 설립하였다. 부실 채권 및 증권의 일부를 강제로 남해 회사 주식으로 전환시키고, 국고 지원과 남해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여 이자 지급 등에 사용함으로써 채무를 정리하고자 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가 제안했다는 설도 있다.

1710년 로버트 할리가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국가 재정을 개선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새 의회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대북방 전쟁 등 두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압박에 직면하여 국가 재정 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할리는 국가 부채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부채 증가와 과도한 지출에 대한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1711년 1월, 하원은 전체 부채 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위원회에는 할리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회계 감사관과 정치인들이 참여하였다.[8]

할리는 말버러 공작 휘하 영국군에 대한 급여 지급을 위해 30만파운드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자금은 에드워드 기번, 조지 캐스월, 호어 은행의 개인 컨소시엄을 통해 제공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운영하던 복권 사업이 부진하자, 할리는 존 블런트에게 티켓 판매 권한을 부여했다. 1711년 3월, 복권 판매가 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며 잉글랜드 최초의 성공적인 국가 복권이 되었다.[9] 이후 더 큰 규모의 복권이 발행되었고, 티켓 가격은 100GBP, 최고 상금은 2만파운드였다. 상금은 여러 해에 걸쳐 연금 형태로 지급되었으며, 정부는 상금을 차입금으로 보유했다. 블런트는 99.3만파운드의 티켓을 판매하는 등 복권 판매는 성공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망명한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존 로가 은행을 설립하고, 1718년 12월에는 프랑스 국립 은행인 방크 로얄(Banque Royale)이 되었다. 로는 프랑스 경제를 통제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로의 성공은 블런트와 동료들이 사업을 확장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23]

1719년 2월, 크래그스는 하원에 1710년 복권 이후 발행된 연금을 사우스 시 주식으로 전환하여 국가 부채를 개선하는 새로운 계획을 설명했다. 의회법에 따라, 회사는 양도된 연금 100GBP당 1,150GBP의 신규 주식을 발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정부는 생성된 주식에 대해 연 5%를 지불할 것이며, 이는 연간 청구서를 절반으로 줄일 것이다. 전환은 자발적이었으며, 모두 전환될 경우 250만파운드의 신규 주식에 달했다. 회사는 정부에 5%로 최대 75만 GBP까지 추가 신규 대출을 제공해야 했다.[24]

3월에는 제임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영국 왕위를 되찾기 위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글렌 쉴 전투에서 패배했다. 1719년 7월, 사우스 시 회사는 대중에게 제안을 발표했다. 소드 블레이드 회사는 왕위 요구자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반적인 행복감은 사우스 시 주식 가격을 봄에 100GBP에서 114GBP로 상승시켰다. 연금 수령자들은 여전히 같은 금액의 주식으로 지급되었으며, 회사는 발행 전에 가치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유지했다. 약 3분의 2의 유효 연금이 교환되었다.

2. 1. 영국의 재정 위기

남해회사는 당시 위기에 빠진 영국 재정을 살리고자 설립되었다. 영국의 재정 상황은 그 지출 중 채무상환이자 지급과 군사비가 9%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압박했다. 이를 우려한 당국이 공공 부채 정리를 위해 1711년 설립했다. 부실 상태에 있던 많은 채권과 증권의 일부를 강제로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시켜 국고 지원과 남해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이자 지급 등을 해서 이를 통해 채무를 정리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남해회사가 만들어낸 이윤에 의해 채권을 정리한다는 착상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정설이 없다. 일부에서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의 아이디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8]

1710년 8월 로버트 할리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정부는 이미 16년 전에 설립된 민간 소유 회사인 잉글랜드 은행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 은행은 정부 대출 기관으로서 독점권을 얻었다.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의 서비스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할리는 국가 재정을 개선할 새로운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1710년 11월에 열린 새 의회는 두 개의 동시 전쟁의 압력으로 고통받고 있던 국가 재정에 집중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1713년에 끝난 프랑스와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1721년까지 끝나지 않은 대북방 전쟁이었다. 할리는 정부 각 부처가 필요에 따라 독립적으로 차입하는 분할된 방식이었던 국가 부채 상황을 설명하는 상세한 보고서를 준비했다. 그는 부채 발생 및 충격적인 지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추가하면서 정보를 꾸준히 공개했고, 마침내 1711년 1월 하원은 전체 부채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 위원회에는 할리 자신, 두 명의 회계 감사관 (정부 지출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음), 에드워드 할리 (재무 장관의 형제), 폴 폴리 (재무 장관의 처남), 재무부 장관, 윌리엄 로운즈 (1696년에 전체 저품질 영국 주화를 재주조하는 데 중요한 책임을 맡았음) 및 존 에이슬라비 (함께 투표하기로 합의한 약 200명의 국회의원 그룹인 10월 클럽을 대표)가 포함되었다.[8]

할리의 첫 번째 관심사는 말버러 공작 휘하에서 유럽 대륙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영국군에 대한 다음 분기 급여로 30만파운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자금은 역사가의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기번, 조지 캐스월, 호어 은행의 개인 컨소시엄에서 제공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정부를 대신하여 복권을 운영했지만, 1710년에는 예상보다 적은 수익을 올렸고, 1711년에 시작된 다른 복권도 부진했다. 할리는 이름과는 달리 비공식 은행이었던 할로우 소드 블레이드 컴퍼니의 이사인 존 블런트에게 티켓 판매 권한을 부여했다. 판매는 1711년 3월 3일에 시작되었고, 3월 7일까지 티켓이 모두 매진되어 최초의 진정한 성공적인 잉글랜드 국가 복권이 되었다.[9]

이 성공에 이어 곧 "2백만 어드벤처" 또는 "클래시스"라는 더 큰 복권이 이어졌는데, 티켓 가격은 100GBP였고, 최고 상금은 2만파운드였으며, 모든 티켓이 최소 10GBP의 상금을 받았다. 상금은 총액으로 광고되었지만, 실제로 여러 해에 걸쳐 고정된 연금 형태로 할부로 지급되었고, 따라서 정부는 전체 가치가 당첨자에게 지급될 때까지 상금을 차입금으로 보유했다. 마케팅은 소드 블레이드 신디케이트의 구성원들이 처리했는데, 기번은 20만파운드의 티켓을 판매하고 4500GBP의 수수료를 받았으며, 블런트는 99.3만파운드를 판매했다. 찰스 블런트 (친척)는 복권의 지불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비용은 5000GBP였다.

2. 2. 남해 회사 설립

남해 회사는 당시 위기에 빠진 영국 재정을 살리고자 1711년에 설립되었다. 영국의 재정 상황은 지출 중 채무 상환 이자 지급과 군사비가 9%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를 우려한 영국 당국은 공공 부채 정리를 위해 남해 회사를 설립했다. 부실 상태에 있던 많은 채권과 증권의 일부를 강제로 남해 회사 주식으로 전환시켜 국고 지원과 남해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이자 지급 등을 통해 채무를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10]

남해 회사가 만들어낸 이윤으로 채권을 정리한다는 아이디어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는 정설이 없다. 일부에서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의 아이디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10]

3. 사업 내용 및 변천

남해 회사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의 협상으로 얻은 아시엔토 무역권, 즉 아프리카와 스페인령 서인도 간의 노예 무역 권리를 통해 이윤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 무역은 스페인이 인정한 무역량이 적었고, 1718년 사국 동맹 전쟁 발발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10]

이러한 상황에서 남해 회사는 시험적으로 도입했던 복권 채권이 성공을 거두자, 무역 회사에서 금융 회사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3. 1. 초기 무역 활동과 아시엔토 계약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협상하여 영국이 획득한 아시엔토 무역권, 즉 아프리카와 스페인령 서인도 간 노예 무역 권리를 행사하여 이윤을 창출하려 했다.[10] 이전에는 이 노예 무역을 각국 상인이 스페인과 계약하여 진행했으며, 영국은 주로 해적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참여했고, 이익이 크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남해 회사는 이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남해 회사가 시험적으로 도입한 "복권 채권"이 성공하면서, 남해 회사는 무역 회사에서 금융 회사로 사업을 전환하게 되었다.

노예 무역이 성립되지 않은 이유는 스페인이 인정한 무역량이 매우 적었고,[10] 1718년에는 스페인과 전쟁(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여 무역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선에 탑승한 아프리카 흑인 노예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은 영국에게 매년 4,800명의 노예를 스페인 식민지에 공급하는 30년 기한의 ''흑인 아시엔토''를 부여했다.[16] 영국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라카스, 카르타헤나, 아바나, 파나마, 포르토벨로, 베라크루스에 사무소를 개설하여 대서양 노예 무역을 주선할 수 있었다. 이들 장소 중 한 곳으로 매년 500톤 이하의 배 한 척(''나비오 데 페르미소'')을 일반 무역 상품과 함께 보낼 수 있었으며, 이익의 4분의 1은 스페인 국왕에게 돌아가야 했다. 아시엔토는 앤 여왕의 이름으로 부여되었으며 이후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16]

1714년, 정부는 이익의 4분의 1을 앤 여왕에게, 추가로 7.5%를 재무 고문인 마나세 길리건에게 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부 회사 이사들은 이러한 조건으로 계약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했고, 정부는 결정을 번복해야 했다.[18]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20만 파운드를 모금하여 계속 운영되었다. 1714년에는 2,680명의 노예가 운송되었고, 1716~17년에는 13,000명이 더 운송되었지만, 무역은 계속해서 수익성이 없었다. 각 노예에게는 33 피에사 데 에이트의 수입 관세가 부과되었다 (품질에 따라 일부 노예는 노예의 일부로만 간주될 수 있었다).[19]

3. 2. 무역의 어려움과 금융 회사로의 전환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은 매년 4,800명의 노예를 스페인 식민지에 공급하는 30년 기한의 ''흑인 아시엔토''를 획득했다. 영국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라카스, 카르타헤나, 아바나, 파나마, 포르토벨로, 베라크루스에 사무소를 개설하여 대서양 노예 무역을 주선할 수 있었다. 이들 중 한 곳에 매년 500톤 이하의 배 한 척(''나비오 데 페르미소'')을 일반 무역 상품과 함께 보낼 수 있었으며, 이익의 4분의 1은 스페인 국왕의 몫이었다. 계약 시작 시 두 번의 추가 출항이 허용되었다. 아시엔토는 앤 여왕의 이름으로 부여되었고 이후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16]

7월까지 회사는 필요한 아프리카 노예를 자메이카에 공급하기 위해 왕립 아프리카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16세 이상 노예는 10GBP, 16세 미만 10세 이상 노예는 8GBP에 거래되었다. 노예의 3분의 2는 남성, 90%는 성인이었다. 회사는 첫해에 자메이카에서 아메리카로 1,230명의 노예를 환적했으며, 선장의 지시에 따라 추가되었을 수도 있는 노예도 있었다. 첫 번째 화물이 도착했을 때, 현지 당국은 아시엔토를 수락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아직 스페인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예는 결국 서인도 제도에서 손해를 보고 판매되었다.[17]

1714년 정부는 이익의 4분의 1을 앤 여왕에게, 추가로 7.5%를 재무 고문인 마나세 길리건에게 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부 회사 이사들은 이러한 조건으로 계약을 수락하기를 거부했고, 정부는 결정을 번복해야 했다.[18]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20만파운드를 모금하여 계속되었다. 1714년에는 2,680명의 노예가 운송되었고, 1716~17년에는 13,000명이 더 운송되었지만, 무역은 계속해서 수익성이 없었다. 각 노예에게 33 피에사 데 에이트의 수입 관세가 부과되었다(품질에 따라 일부 노예는 노예의 일부로만 간주될 수 있었다). 추가 무역선 중 하나는 1714년 카르타헤나로 모직물을 운송했는데, 그곳에는 모직물 시장이 없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2년 동안 팔리지 않았다.[19]

회사는 경쟁사와 비슷한 사망률 손실을 겪으며 34,000명이 조금 넘는 노예를 운송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노예 무역이 회사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당시의 기준에 따라 수행되었음을 보여준다.[4] 따라서 회사의 무역 활동은 회사에 대한 투자를 위한 재정적 동기를 제공했다.[4]

회사는 정부의 호의에 크게 의존했으며, 정부가 바뀌면서 회사의 이사회도 바뀌었다. 1714년에는 할리가 후원한 이사 중 한 명인 아서 무어(Arthur Moore)가 60톤의 사적인 물품을 회사 선박에 싣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이사직에서 해임되었지만, 그 결과 할리는 회사로부터 호의를 잃기 시작했다. 1714년 7월 27일, 할리는 의회의 토리 세력 내부에서 발생한 불화로 인해 대재무경(Lord High Treasurer) 자리에서 물러났다. 앤 여왕은 1714년 8월 1일에 사망했고, 1715년 이사 선거에서 웨일스 공(미래의 조지 2세 국왕)이 회사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새로운 국왕 조지 1세와 웨일스 공은 모두 회사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임스 크래그스 시니어를 비롯한 일부 유력한 휘그당 정치인, 핼리팩스 백작, 조셉 제킬 경도 마찬가지였다. 우체국장인 제임스 크래그스는 정부를 대신하여 정치적 및 재정적 정보를 얻기 위해 우편물을 가로채는 역할을 했다. 모든 토리당 정치인들은 이사회에서 해임되고 사업가들로 교체되었다. 휘그당 호라티오 타운센드(로버트 월폴의 매형)와 아가일 공작이 이사로 선출되었다.

정부의 변화는 회사 주식 가치의 부활로 이어졌는데, 이는 발행 가격 이하로 떨어졌었다. 이전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회사에 대한 이자 지급을 하지 못했고, 1백만 파운드 이상의 채무가 있었다. 새로운 행정부는 부채를 탕감할 것을 주장했지만, 회사가 누락된 지급액만큼의 가치로 주주들에게 신주를 발행하도록 허용했다. 약 1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이 금액은 이제 국가 전체에서 발행된 자본금의 절반을 차지했다. 1714년에는 회사의 주주가 2,000명에서 3,000명으로, 경쟁사보다 더 많았다.[20]

1718년의 다음 이사 선거가 치러질 때쯤에는 정세가 다시 바뀌어, 월폴의 파벌이 웨일스 공을 지지하고 제임스 스탠호프가 국왕을 지지하는 휘그당 내 분열이 일어났다. 아가일과 타운센드는 이사직에서 해임되었고, 생존해 있던 토리당원 리처드 호어 경과 조지 피트도 해임되었으며, 조지 1세 국왕이 총재가 되었다. 4명의 국회의원이 이사로 남았고, 정부 재무 관련 직책을 맡고 있는 6명도 남았다. 소드 블레이드 컴퍼니는 사우스 시의 은행으로 남아 있었고, 회사의 애매한 법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번창했다. 블런트와 소브리지는 사우스 시의 이사로 남아 있었고, 기번과 차일드가 합류했다. 캐스웰은 소드 블레이드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사우스 시의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1718년 11월, 부총재 베이트먼과 부총재 셰퍼드가 모두 사망했다. 총재라는 명예직을 제외하면, 이로 인해 회사는 갑자기 가장 선임되고 경험이 풍부한 두 이사 없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존 펠로즈 경이 부총재로, 찰스 조이가 부총재로 교체되었다.[21]

1718년, 사국 동맹 전쟁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회사는 남미에 있던 자산을 압수당했고, 회사는 그 손실을 30만파운드로 추산했다. 회사가 선박을 구매하고 다음 사업을 계획했던 무역으로부터의 수익 전망은 사라졌다.[22]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이 이제 회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투에서 사람을 죽인 후 망명한 스코틀랜드 경제학자이자 금융가인 존 로는 프랑스에 정착하기 전에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그곳에서 그는 은행을 설립했는데, 1718년 12월에 프랑스 국립 은행인 방크 로얄(Banque Royale)이 되었고, 로 자신은 주로 왕의 칙령에 따라 운영되는 프랑스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로의 놀라운 성공은 유럽 전역의 금융계에 알려졌고, 이제 블런트와 그의 동료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더욱 확장하려는 노력을 하도록 영감을 주었다.[23]

1719년 2월, 크래그스는 하원에 1710년 복권 이후 발행된 연금을 사우스 시 주식으로 전환하여 국가 부채를 개선하는 새로운 계획을 설명했다. 의회법에 따라, 회사는 양도된 연금 100GBP당 1,150 파운드의 신규 주식을 발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정부는 생성된 주식에 대해 연 5%를 지불할 것이며, 이는 연간 청구서를 절반으로 줄일 것이다. 전환은 자발적이었으며, 모두 전환될 경우 250만 파운드의 신규 주식에 달했다. 회사는 정부에 5%로 최대 75만파운드까지 추가 신규 대출을 제공해야 했다.[24]

3월에는 제임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영국 왕위를 되찾기 위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소규모 병력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지만, 6월 10일 글렌 쉴 전투에서 패배했다. 사우스 시 회사는 1719년 7월에 대중에게 제안을 발표했다. 소드 블레이드 회사는 왕위 요구자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반적인 행복감은 사우스 시 주식 가격을 봄에 100GBP에서 114GBP로 상승시켰다. 연금 수령자들은 여전히 같은 금액의 주식으로 지급되었으며, 회사는 발행 전에 가치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유지했다. 약 3분의 2의 유효 연금이 교환되었다.

이처럼 남해 회사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해 영국이 획득한 아시엔토 무역권, 즉 아프리카-스페인령 서인도 간의 노예 무역 권리 행사에 참여하여 이윤을 창출하려 했다. 그러나 이 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남해 회사가 시험적으로 도입한 "복권 채권"이 성공을 거둔 것 등으로 인해, 남해 회사는 무역 회사에서 금융 회사로 사업 전환을 하게 되었다.

노예 무역이 성립되지 않은 이유는 스페인에 의해 인정된 무역량이 극히 적었던 것과, 1718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사국 동맹 전쟁)이 시작되어 무역이 성립되지 않게 된 것 등의 이유 때문이다.

3. 3. 북극해 포경 사업 진출

1693년 설립된 그린란드 회사가 북극해 포경을 시작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해역의 혼란으로 인해 수 년 만에 좌절되었고, 재개가 요구되었다.[55] 1722년 헨리 엘킹은 사우스 시 회사(남해 회사) 이사들에게 "그린란드 무역"을 재개하여 북극에서 고래를 잡기 위해 배를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55]

1724년 사우스 시 회사는 포경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템스 강에 12척의 고래잡이 배를 건조하여 1725년에 그린란드 해역으로 보냈다.[56] 이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배가 건조되었지만, 이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에는 경험 많은 포경업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회사는 배의 주요 직책에 네덜란드와 덴마크 포경업자를 고용해야 했다. 예를 들어 모든 지휘관과 작살잡이는 푀어 섬(North Frisia)에서 고용되었다.[56] 다른 비용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회사가 어떤 해에는 최대 25척의 배를 데이비스 해협그린란드 해역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획량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었다. 1732년까지 회사는 8년간의 북극 포경으로 177782GBP의 순손실을 기록했다.[57]

사우스 시 회사 이사들은 영국 정부에 추가 지원을 요청했고, 의회는 1732년에 9년 더 관세 면제를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733년에는 영국 북극 포경업자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18세기 내내 포경 보조금을 지속하고 수정하는 일련의 법안 중 첫 번째였다.[58] 연장된 관세 면제와 실제 보조금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우스 시 회사의 법원 및 이사들은 북극 포경으로 수익을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손실을 기록한 1732년 시즌 이후에는 더 이상 고래잡이 배를 파견하지 않았다.

4. 남해 회사 거품 사건 (1720년)

1720년의 '''남해 회사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은 남해 회사가 금융 회사로 변신을 꾀하면서 발생했다. 주식 교환 과정에서의 트릭을 통해 단기간에 주가가 폭발적으로 상승했지만, 임계점에 도달하자 급락했다. 이 사건으로 "남해 졸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지만, 동시에 많은 파산자와 자살자를 낳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남해거품 사건을 다룬 카드


1719년 계획은 정부에게는 성공적이었고, 이를 다시 시도하려고 하였다. 정부 대표로 에슬라비와 크래그스, 블런트, 출납원 나이트와 그의 조수, 캐스웰이 협상을 진행했다. 부총재와 부총재인 얀센도 협의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회사에는 협상이 비밀로 유지되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존 로의 은행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은행의 주가는 급등하고 있었다. 돈이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다른 자금 조달 계획이 투자 자본을 흡수할 위험이 있었다.[25]

이에 따라 영국의 통합되지 않은 국채(30,981,712 파운드) 대부분을 회사 주식과 교환하는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었다. 연금은 5%의 예상 이자율로, 원래 기간 동안 연간 소득을 창출하는데 필요한 총액으로 정해졌으며, 아직 만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했다. 정부는 고정 기간의 상환 가능한 모든 부채에 대해 이전과 같은 금액을 회사에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 7년 후에는 5%의 이자율이 새로운 연금 부채와 이전에 예상했던 부채 모두에 대해 4%로 하락할 것이었다. 첫 해 이후, 회사는 정부에 300만파운드를 4분기 분할로 지급해야 했다. 새로운 주식은 부채와 동일한 액면가로 발행될 것이지만, 주가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고, 나머지 주식 판매, 즉 주식의 총 시장 가치와 부채 금액의 차액은 정부 수수료와 회사 이익을 충당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전환 전에 주가가 더 많이 상승할수록 회사는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었다. 이 계획 이전에는 지불액이 정부에 연간 150만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26]

1719년의 총 정부 부채는 5000만파운드였다.

구분금액 (파운드)
세 개의 대기업 보유1830만파운드
잉글랜드 은행 보유340만파운드
영국 동인도 회사 보유320만파운드
남해 회사 보유1170만파운드
사적으로 보유한 상환 가능한 부채1650만파운드
비상환 연금, 장기 고정 연금(72~87년), 만기까지 22년 남은 단기 연금1500만파운드



이 전환의 목적은 이전과 유사했다. 부채 보유자와 연금 수령자는 총액으로 더 적은 수익을 받을 수 있지만, 유동성이 낮은 투자는 쉽게 거래될 수 있는 주식으로 전환되었다. 국채로 보증된 주식은 안전한 투자로 여겨졌고, 금속 동전보다 훨씬 쉽고 안전하게 돈을 보유하고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유일한 대안 안전 자산인 토지는 판매와 소유권 이전이 법적으로 훨씬 더 어려웠다.

정부는 현금 지불과 부채에 대한 전반적인 이자 감소를 받았다. 중요하게도, 부채를 언제 상환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는데, 7년 이전에는 상환할 수 없었지만, 그 이후에는 정부의 재량에 따라 상환할 수 있었다. 이는 정부가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할 시점에 부채가 상환 가능해져 더 높은 이자율을 지불해야 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정부에 대한 지불은 계획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부채를 매입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는데, 이는 정부를 돕는 동시에 뱅크 오브 잉글랜드의 대규모 보유분을 포함하여 시장에서 잠재적으로 경쟁하는 증권을 제거함으로써 회사를 돕기도 했다.[26]

회사 주식은 123 파운드에 거래되고 있었으므로, 금리가 하락하는 시점에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경제에 500만파운드의 새로운 자금이 투입된 것이었다. 이 시점의 국내총생산(GDP)은 6440만파운드로 추정되었다.[27]

4. 1. 주가 조작과 투기 광풍

1718년 남해회사가 발행한 복권의 성공을 계기로, 회사는 금융 기관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1719년 거액의 채권 인수 대가로 액면가에 해당하는 남해 회사 주식 발행 권한을 은행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획득했는데, 이것이 바로 남해 계획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은행과의 경쟁 과정에서 쌓인 750만 파운드의 상납금은 남해 회사에 큰 부담이 되었고, 고위험의 도박과 같은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남해 회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윤을 창출하려 했다.

# 주식국채의 교환은 시가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남해 회사의 주가가 액면가 100 파운드 당 시장 가격 200 파운드일 경우, 200 파운드의 부채 1개와 남해 회사 주식 100 파운드 분을 등가교환한다.

# 발행 허용 수량은 교환 금액(200 파운드)에 따르므로, 액면가 200 파운드 분의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즉, 교환 후에도 100 파운드 분, 시가 200 파운드 분의 주식이 남게 된다.

# 남은 주식을 매물로 내놓으면, 200 파운드의 매출은 고스란히 남해 회사의 이익이 된다.

# 위와 같은 방법으로 남해 회사의 이익이 증가하면, 당연히 주가는 상승한다.

# 다시 1번 과정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단계를 반복하면 주가는 무한히 상승하고, 남해 회사는 이익을 얻으며, 주식 보유자는 순식간에 부자가 된다는 것이 남해 계획의 핵심이었다.

당시 영국 중산층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시장에 자금이 넘쳐나고 있었다. 남해 회사의 주가는 빠르게 성장했다. 본업인 무역 활동은 부진했지만, 남해 회사는 부채 인수 회사로 성장하며 몇 달 만에 주가가 10배나 상승했다. 귀족, 부르주아, 서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주식에 대한 지식도 없이 투기 열풍에 휩쓸려 전례 없는 투기 광풍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편승하여, 당시 허가제였던 주식회사 설립도 무허가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암거래 회사의 주가도 급등했다. 대부분은 진지하게 사업을 시작하려는 기업가들이었고, 그 사업 내용도 런던에 석탄을 공급하거나 비누 제조 기술을 개량하는 등, 산업혁명 초기 영국 산업 발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회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실한 사업을 위한 투자 모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주당 가격은 1720년 1월 100 파운드에서 5월에는 700 파운드, 6월 24일에는 최고치인 1,050 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상승세에 힘입어 은행과 영국 동인도 회사 등의 주가도 덩달아 상승했다. 정부의 허가 없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무단으로 설립된 회사들이 난립하자 정부도 규제에 나섰다. 6월 24일 〈거품 회사 규제법〉이 제정되고, 8월 24일 고지 영장이 발급되면서 시장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고 모든 주가가 폭락하는 위기로 번졌다.

다니엘 디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12]

윌리엄 호가스, ''남해 회사 계획의 상징적 판화''(1721). 왼쪽 하단에는 도박을 하는 개신교도, 가톨릭교도, 유대인 인물이 있고, 중앙에는 회전목마와 같은 거대한 기계가 있어 사람들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맨 위에는 염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누가 탈까"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질서한 느낌으로 그림 주변에 흩어져 있고, 가운데 있는 놀이기구로 향하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의 진행은 다른 어떤 것보다 주식 발행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남해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는 군중의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왼쪽의 명예는 훼손되었고, 중앙의 정직은 바퀴에 묶여 있으며, 오른쪽 하단에는 거래가 죽어 있습니다.


회사 주가 차트

4. 2. 버블 붕괴와 경제 위기

1720년 남해 회사의 주가는 1월에 1주당 100파운드에서 시작하여 5월에는 700파운드, 6월 24일에는 최고치인 1,05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주가 상승에 힘입어 영국 동인도 회사 등 다른 회사들의 주가도 함께 상승했다. 정부의 허가 없이 설립된 회사들이 난립하자, 정부는 6월 24일 '거품 회사 규제법'을 시행하고 8월 24일 고지 영장을 발급하여 시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주가가 폭락하는 위기로 이어졌다.[61]

주가 폭락은 전례 없이 빨랐다. 불과 몇 달 만에 주가는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여 자살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남해 회사 주식으로 7,000파운드를 벌었지만, 이후 폭락으로 20,000파운드의 손해를 보았다.[61] 반면,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남해 주식 매매로 얻은 이익을 바탕으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자신의 음악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투자자들은 남해 주식회사의 이사들과 주식을 뇌물로 받은 정치인들에게 분노했다. 당시 스탄호프 정권은 붕괴되었고, 스탄호프 본인은 급사했다. 이로 인해 경제 위기뿐만 아니라 정치도 파국을 맞았다.

윌리엄 호가스의 남해 회사 계획의 상징적 판화(1721)는 이 사건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도박을 하는 개신교도, 가톨릭교도, 유대인이 있고, 중앙에는 사람들이 탑승하는 거대한 회전목마가 있다. 맨 위에는 염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누가 탈까"라고 쓰여 있다. 사람들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고, 중앙의 놀이기구로 향하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의 행렬은 주식 발행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남해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는 군중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왼쪽의 명예는 훼손되었고, 중앙의 정직은 바퀴에 묶여 있으며, 오른쪽 하단에는 거래가 죽어 있다.

1719년 계획은 정부 입장에서 성공적이었고, 그들은 이를 반복하려 했다. 에슬라비와 크래그스는 정부를 대표하여 블런트, 출납원 나이트와 그의 조수, 그리고 캐스웰 간에 협상을 진행했다. 부총재와 부총재인 얀센도 협의에 참여했지만, 대부분의 회사에는 협상이 비밀로 유지되었다. 프랑스로부터 로의 은행에 투자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은행의 주가는 급격히 상승했다. 돈이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다른 자금 조달 계획이 가용 자본을 흡수할 위험이 있었다.[25]

영국의 미통합된 대부분의 국채(30981712GBP)를 회사 주식과 교환하는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었다. 연금은 5%의 예상 이자율로 원래 기간 동안 연간 소득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총액으로 평가되었으며, 아직 만기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했다. 정부는 고정 기간의 상환 가능한 모든 부채에 대해 이전과 동일한 금액을 회사에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 7년 후에는 5%의 이자율이 새로운 연금 부채와 이전에 예상했던 부채 모두에 대해 4%로 하락할 것이었다. 첫 해 이후, 회사는 정부에 300만파운드를 4분기 분할로 지급해야 했다. 새로운 주식은 부채와 동일한 액면가로 발행될 것이지만, 주가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고, 나머지 주식 판매, 즉 주식의 총 시장 가치와 부채 금액의 차액은 정부 수수료와 회사 이익을 충당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전환 전에 주가가 더 많이 상승할수록 회사는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었다. 이 계획 전에 지불액은 정부에 연간 150만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26]

1719년의 총 정부 부채는 5000만파운드였다.

구분금액 (파운드)
세 개의 대기업 보유1830만파운드
뱅크 오브 잉글랜드 보유340만파운드
영국 동인도 회사 보유320만파운드
남해 회사 보유1170만파운드
사적으로 보유한 상환 가능한 부채1650만파운드
비상환 연금, 장기 고정 연금(72~87년), 만기까지 22년 남은 단기 연금1500만파운드



이 전환의 목적은 이전과 유사했다. 부채 보유자와 연금 수령자는 총액으로 더 적은 수익을 받을 수 있지만, 유동성이 낮은 투자는 쉽게 거래될 수 있는 주식으로 전환되었다. 국채로 보증된 주식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되었고, 금속 동전보다 훨씬 쉽고 안전하게 돈을 보유하고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유일한 대안 안전 자산인 토지는 판매와 소유권 이전이 법적으로 훨씬 더 어려웠다.

정부는 현금 지불과 부채에 대한 전반적인 이자 감소를 받았다. 중요하게도, 부채를 언제 상환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는데, 7년 이전에는 상환할 수 없었지만, 그 이후에는 정부의 재량에 따라 상환할 수 있었다. 이는 정부가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할 시점에 부채가 상환 가능해져 더 높은 이자율을 지불해야 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정부에 대한 지불은 계획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부채를 매입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는데, 이는 정부를 돕는 동시에 뱅크 오브 잉글랜드의 대규모 보유분을 포함하여 시장에서 잠재적으로 경쟁하는 증권을 제거함으로써 회사를 돕기도 했다.[26]

회사 주식은 이제 123 파운드에 거래되고 있었으므로, 금리가 하락하는 시점에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경제에 500만파운드의 새로운 자금이 투입된 것이었다. 이 시점의 국내총생산(GDP)은 6440만파운드로 추정되었다.[27]

남해 회사는 1720년에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려는 유일한 회사가 아니었다. 외국 또는 기타 사업이나 기상천외한 계획에 대한 과장된 (때로는 사기성) 주장을 하는 다수의 다른 합자 회사들이 만들어졌다. 다른 회사들은 보험 회사 설립과 같이 잠재적으로 건전하지만 새로운 계획을 나타냈다. 이들은 "버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부 회사는 법적 근거가 없었지만, 다른 회사들(예: 남해 회사의 은행 역할을 한 할로우 소드 블레이드 회사)은 설립 당시 지정된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기존의 특허 회사를 사용했다. 요크 빌딩 회사(York Buildings Company)는 런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케이스 빌링슬리(Case Billingsley)가 구매하여 스코틀랜드에서 몰수된 자코바이트 부동산을 구매하는 데 사용했고, 이는 보험 회사의 자산이 되었다.[33]

1720년 2월 22일, 존 헝거포드(John Hungerford)는 하원에서 버블 회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조사를 위해 그가 의장을 맡는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원을 설득했다. 그는 총 4000만파운드의 자본을 모으려는 여러 회사를 확인했다. 위원회는 해당 회사들을 조사하여, 회사들이 헌장에 명시된 범위를 벗어나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수립했다. 할로우 소드 블레이드 회사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남해 회사에게 잠재적인 난처함이 초래될 수 있었지만, 남해 회사의 지지자들이 위원회에 대거 참여하여 할로우 소드 조사를 제안하는 안건을 75 대 25로 부결시킴으로써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하원 위원회는 '공개' 또는 '비밀' 위원회였다. 비밀 위원회는 절차에 따라 투표할 수 있는 고정된 구성원을 가진 위원회였다. 반면에, 모든 하원 의원은 '공개' 위원회에 참여하여 절차에 따라 투표할 수 있었다.) 위원회 위원이었던 스탠호프(Stanhope)는 이 즈음에 할로우 소드의 이사인 소브리지(Sawbridge)로부터 '재판매 가능한' 남해 회사 주식 5만파운드를 받았다. 헝거포드는 이전에 뇌물을 받은 혐의로 하원에서 제명된 적이 있었다.[33]

조사받은 버블 회사 중에는 각각 온슬로우(Onslow) 경과 체트윈드(Chetwynd) 경이 지원하는 해운 보험 회사가 있었다. 이들은 심하게 비판을 받았으며, 이 회사들의 헌장을 얻으려는 법무 장관과 차관의 의심스러운 거래로 인해 두 사람 모두 교체되었다. 그러나 해당 계획은 월폴과 크래그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버블 법(1720년 6월 위원회 조사 결과로 최종적으로 제정됨)의 대부분은 로열 익스체인지 보증 회사(Royal Exchange Assurance Corporation) 또는 런던 보증 회사(London Assurance Corporation)의 헌장을 만드는 데 할애되었다. 해당 회사들은 이 특권을 위해 30만파운드를 지불해야 했다. 이 법은 합자 회사가 의회 법이나 왕실 칙허장을 통해서만 설립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승인되지 않은 합자 사업에 대한 금지는 1825년까지 폐지되지 않았다.[34]

이 법의 통과는 남해 회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가가 6월 초에 890파운드로 급등했다. 이 최고점은 사람들에게 판매를 시작하도록 유도했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회사의 이사들은 에이전트들에게 매수를 지시하여, 가격을 약 750파운드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주식 가격은 1년 동안 주당 약 100파운드에서 거의 1,000파운드로 상승했다. 그 성공은 전국적인 열풍—집단 행동[6]—을 일으켰는데, 농민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남해 회사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식 투자에 열정적인 관심을 보였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1720년에 "매우 유리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회사이지만,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회사"로 공개된 회사에 관한 것이다.[35]

가격은 마침내 1720년 8월 초에 1,000파운드에 도달했고, 매도세가 너무 커서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연말까지 주당 100파운드로 다시 떨어졌다.[36] 이는 신용으로 구매한 사람들 사이에서 파산을 촉발했고, 공매도를 포함한 판매를 증가시켰다.

또한 1720년 8월에 남해 회사 주식의 신규 발행에 대한 첫 번째 및 두 번째 할부금 지불이 만료되었다. 그 해 초, 존 블런트는 주가를 지지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는데, 회사가 사람들에게 주식을 구매할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주주들은 주식을 팔아서 주식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암스테르담과 파리에서도 "거품"이 끝나가면서 국제적으로 유동성 확보 경쟁이 나타났다. 이러한 붕괴는 프랑스의 존 로의 미시시피 회사의 몰락과 일치했다. 그 결과, 남해 회사 주식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9월 말까지 주가는 150파운드까지 하락했다. 이제 회사의 실패는 은행금세공인에게까지 확산되었는데, 이는 주식으로 제공된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수천 명의 개인, 심지어는 영국의 엘리트 계층의 많은 구성원들까지 파산했다. 투자자들은 분노했고, 의회는 12월에 소집되어 조사가 시작되었다. 1721년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회사 이사들 사이의 광범위한 사기와 내각의 부패가 드러났다. 연루된 사람들 중에는 존 에이슬라비 (재무부 장관), 제임스 크래그스 시니어 (우체국장), 제임스 크래그스 주니어 (남부 장관), 그리고 심지어 스탠호프 경과 선덜랜드 경 (내각 수반)도 있었다. 크래그스 시니어와 크래그스 주니어는 모두 불명예스럽게 사망했고, 나머지는 부패 혐의로 탄핵되었다. 하원은 에이슬라비에게 "가장 악명 높고 위험하며 악명 높은 부패"의 유죄를 선고하고 그를 투옥했다.

새로 임명된 재무부 총리, 로버트 월폴은 금융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성공적으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많은 돈을 잃은 유력 인사들에 의해 형성된 여론은 복수를 요구했다. 월폴은 이 과정을 감독하여 회사 이사 33명 전원을 해임하고 평균적으로 재산의 82%를 몰수했다. 이 돈은 피해자들에게 돌아갔고, 남해 회사의 주식은 잉글랜드 은행과 동인도 회사로 분할되었다. 월폴은 조지 왕과 그의 정부들을 보호했고, 세 표 차이로 여러 핵심 정부 관료를 탄핵에서 구제했다. 이 과정에서 월폴은 금융 시스템의 구원자로서 칭송을 받으면서 영국 정치에서 지배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휘그 정부, 더 나아가 하노버 왕조를 완전한 불명예로부터 구출했다고 평가한다.

4. 3. 정치적 파장과 월폴의 등장

로버트 월폴은 재정 전문가로서 명성을 얻으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했다. 1721년 남해 거품 사건 처리 방침을 확정하여 경제를 회복 궤도에 올렸다. 정치적 책임자에 대해서는 느슨한 조사를 통해 사건을 애매하게 마무리했으며, 뇌물을 받은 장관과 남해 회사 이사들을 감싸는 발언을 반복했다. 이는 토리당으로의 정권 교체 우려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러한 업무 처리는 조지 1세의 신뢰를 얻어 1742년까지 제1 경제 수장으로서 정권을 잡고 영국의 의원 내각제 기초를 쌓는 계기가 되었다.[25]

재무부 총리로 임명된 월폴은 금융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시켰으나, 큰 손실을 본 유력 인사들은 복수를 요구했다. 월폴은 회사 이사 33명 전원을 해임하고 평균 재산의 82%를 몰수하여 피해자들에게 돌려주었으며, 남해 회사 주식을 잉글랜드 은행영국 동인도 회사로 분할했다. 또한 조지 왕과 정부를 보호하고, 세 표 차이로 핵심 정부 관료들을 탄핵에서 구제했다. 이 과정에서 월폴은 금융 시스템의 구원자로 칭송받으며 영국 정치의 지배적인 인물로 부상했고, 역사학자들은 그가 휘그 정부와 하노버 왕조를 불명예에서 구출했다고 평가한다.[26]

4. 4. 회계 감사 제도의 등장

존 브란트와 남해회사 이사의 책임 추궁을 위한 위원회가 의회에 설치되어 조사가 진행되었다. 찰리 스넬은 남해회사의 회계 기록을 자세히 알고 있는 간부 중 한 명이었던 야곱 E. 브리지가 경영하는 브리지 상회의 장부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브리지 상회의 장부에 대한 소견〉이라는 보고서로 정리하여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회계 감사 보고서가 되었다.[1] 동인도 회사의 성립에서 시작하여 주식회사 제도의 발달은 "남해 버블"이라는 위기로 표면화되었고, 일반 대중에게 자금 조달을 하는 사업 형태는 정당한 제3자에 의한 회계 기록의 평가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공인회계사 제도와 회계감사 제도를 탄생시킨다.[1]

5. 사건 이후 남해 회사

남해 회사는 7년 전쟁(1756–1763) 발발로 무역이 중단되기 전까지 무역을 지속했다. 그러나 회사의 주요 기능은 스페인 식민지와의 무역보다는 정부 부채 관리였다.[1] 남해 회사는 1853년 해산될 때까지 국가 부채의 일부를 계속 관리했으며, 그 시점에 부채는 다시 통합되었다.[1] 부채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상환되지 않았고, 그 시점에 정부가 원금을 상환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으로 다시 통합되었다.[1]

남해 회사는 이후 북극해포경에도 진출했다.[2] 이 포경은 1693년 설립된 그린란드 회사가 시작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해역의 혼란으로 인해 수 년 만에 좌절되었고, 재개가 요구되었다.[2] 남해 회사는 1732년까지 북극해 포경을 계속했지만 충분한 이익을 내지 못해, 최종적으로 철수를 결정했다.[2]

남해 회사는 스페인 식민지와의 노예 거래를 7년 전쟁(1756년 - 1763년) 종료까지 계속했지만,[3] 결국 남해 회사의 주요 업무는 항상 노예 무역보다 공채 판매 등의 금융 업무였다.[3] 남해 회사는 1850년대에 폐업할 때까지 공채 판매 등을 계속했다.[3]

6. 평가 및 영향

아이작 뉴턴 경은 남해 주식 상승세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사람들의 광기를 계산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알려진다.[40] 그는 또한 "나는 별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된다.[41] 뉴턴 본인은 1722년에 약 22000GBP 상당의 남해 주식을 소유했지만, 그가 손실을 봤는지, 얼마나 손실을 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42] 하지만 그가 최대 20000GBP를 손실봤다고 밝히는 많은 자료가 있다.

데이비드 리스의 역사 미스터리 소설 《종이 음모》는 1720년 런던을 배경으로, 남해 회사가 전성기를 누리며 잉글랜드 은행과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거품" 붕괴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찰스 램의 에세이 《남해 하우스》(1820)는 《엘리아의 수필》에 수록되어 있는데, 램은 한때 남해 하우스에서 근무했으며, 그곳의 동료로부터 필명(엘리아)을 따왔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는 주식 시장 투기, 악당, 사기꾼, 허구의 투기꾼들이 자주 등장한다.


  • 니콜라스 니클비》(1839) - 랄프 니클비의 거대한 합자 회사, 연합 수도 개선 핫 머핀 및 크럼펫 베이킹 및 정시 배달 회사.
  • 《마틴 처즐위트》(1844) - 앵글로-벵갈 무관심 대출 및 생명 보험 회사는 남해 거품을 느슨하게 모델로 삼았으며, 본질적으로는 전형적인 폰지 사기이다.
  •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 - 변호사 미스터 위크필드의 서기인 아첨꾼 우리아 힙의 허위 회계.
  • 작은 도릿》(1857) - 미스터 머들의 금융 회사.


로버트 고다드의 소설 《해양 변화》(2000)는 "거품"의 여파와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자코바이트 복원을 막으려는 시도를 다룬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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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Cloth Seal, Company, 1711–1853, South Seas & Fisheries http://www.bagseals.[...]
[3] 간행물 Journals of the House of Commons 1708–1711
[4] 논문 The South Sea Company's slaving activities https://www.southamp[...] 2009
[5] 서적 Eighteenth Century England 1962
[6] 서적 The South Sea Bubble: an economic history of its origins and consequences https://www.worldcat[...] 2013
[7] 웹사이트 Threadneedle Street http://www.british-h[...] Old and New London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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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An Essay on the South-Sea Trade https://books.google[...] J. Baker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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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웹사이트 An undertaking of great advantage, but nobody to know what it is: Bubbles and gullibility http://www.dtc.umn.e[...] 2020-10-22
[36] 간행물 Der geplatzte Traum vom schnellen Geld
[37] 문서 Marshall, pp. 127–130.
[38] 문서 "Riding a wave: the Company's role in the South Sea Bubble"
[39] 문서 "Walpole, Robert, first earl of Orford (1676–1745)"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40] 문서 Spence, Anecdotes, 1820, p. 368.
[41] 서적 An Utterly Impartial History of Britain – Or 2000 Years of Upper Class Idiots In Charge Doubleday
[42] 서적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43] 뉴스 "Isaac Newton Was a Genius, but Even He Lost Millions in the Stock Market" https://www.business[...] Business Insider 2017-11-10
[44] 문서 Nelson (1945) states that the substantial illicit trade pursued by the South Sea Company officials under the Asiento "must be considered as a major cause of the War of Jenkins' Ear because it threatened to destroy the entire commercial framework of the Spanish Empire ... Unable to accept the destruction of its commercial system, Spain attempted to negotiate but requested that the company, as an evidence of good faith, should open its accounts for inspection by the Spanish representatives. Naturally, the directors refused, for compliance would have meant the complete exposure of the illegal traffic. Neither Spain nor the South Sea Company would yield. War was the inevitable result".
[45] 문서 Brown (1926, p. 663) says that The failure to comply with the accounting provisions of the Asiento treaty (in the context of Spanish knowledge of secret accounts kept by the South Sea Company which would prove clandestine trading) was a constant source of the friction which culminated in armed conflict.
[46] 문서 For Hildner (1938), the war of 1739 might have been averted if the issues addressed by the commission established in 1732 to settle disputes over the Asiento had been resolved.
[47] 웹사이트 History Cooperative –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http://www.historyco[...]
[48] 웹사이트 The South Sea Company's slaving activities http://www.ehs.org.u[...]
[49] 문서 The South Sea Bubble
[50] 문서 Walker, G. J. (1979), p. 101
[51] 문서 Archivo General de Indias, Seville, Spain IG2785
[52] 문서 McLachlan, (1940), pp. 130–131
[53] 문서 Archivo General de Indias, Seville, Spain C266L3
[54] 논문 The Role of the South Sea Company in the Diplomacy Leading to the War of Jenkins' Ear, 1729–1739 1938-08
[55] 서적 A view of the Greenland Trade and whale-fishery Caedmon
[56] 서적 Menschen von Föhr. Lebenswege aus drei Jahrhunderten Boyens & Co.
[57] 서적 The Origin of Commerce Kelley
[58] 논문 Statutory requirements regarding surgeons on British whale-ships
[59] 웹사이트 National Maritime Museum, Greenwich, catalogue entry for sculpture of arms, object ID: HRA0043 http://collections.r[...]
[60] 문서 See, for 1711–21, J Carswell, South Sea Bubble (1960) 274–279; and for 1721–1840, see British Library, Add. MSS, 25544-9.
[61] 문서 William Seward, Anecdotes of distinguished Men,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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