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털리 클리퍼드 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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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는 1876년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작가이자 파리에서 활동한 문학 살롱의 운영자이다. 12세에 여성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고, 비독점적 관계를 옹호하며 1900년대 초부터 60년 이상 파리에서 문학 살롱을 열어 당대 지성인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시집, 소설, 경구를 출판했으며, 여성 동성애를 다룬 문학 작품을 통해 성 소수자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친파시스트적 태도를 보였으나, 전쟁 후에는 연합국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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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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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876년 10월 31일 |
| 출생지 | 미국 오하이오주 이턴 |
| 사망일 | 1972년 2월 2일 |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 묻힌 곳 | 파시 묘지 |
| 알려진 것 | 문학 살롱 주최 희곡, 문학, 시 창작 |
2. 생애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는 1876년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부유한 철도 차량 제조업자인 아버지 앨버트 클리퍼드 바니와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계 혈통을 가진 어머니 앨리스 파이크 바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2][23] 바니의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24]
다섯 살 때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 예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어머니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등에게 그림을 배우며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녀의 그림은 현재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28] 바니는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웠고, 마리 수베스트르가 설립한 프랑스 기숙 학교인 레 뤼슈에 다니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30][31]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워싱턴 D.C.로 이사했으며, 여름에는 메인주 바 하버에서 지냈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반항적인 딸로, 20대 초반에는 말을 타고 질주하며 사이드 새들 대신 다리를 벌리고 타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32] 열두 살 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자각하고 이를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33][34]
바니는 에바 팔머와 메인주 바 하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처음 만나 친밀한 관계를 시작했다.[40] 1893년의 한 여행에서 둘은 성관계를 시작했고, 수년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바니는 팔머의 붉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를 칭찬하며, 그녀의 외모를 중세 시대의 성처녀에 비유했다.[42] 이들은 파리에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내며 4 rue Chalgrin에 있는 아파트를 공유했고, 이후 뇌이쉬르센에 각자의 거처를 마련했다. 바니는 폴린 탄 등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위해 팔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팔머는 결국 바니를 떠나 그리스로 갔고, 안젤로스 시켈리아노스와 결혼하면서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바니는 안젤로스를 탐탁지 않게 여겨 격렬한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훗날 이들은 우정을 회복했다.[43][44]
1899년, 바니는 파리의 무도회장에서 매춘부 리안 드 푸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바니는 드 푸지에게 자신을 사포가 보낸 "사랑의 종자"라고 소개하며 구애했다.[88] 드 푸지는 바니의 대담함에 매료되었고, 둘은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했다.[92] 바니는 결혼하거나 아버지의 사망 시 신탁에 묶인 가족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드 푸지와 교제하는 동안, 바니는 부유한 철도 가문 출신인 로버트 카삿과 약혼했으나, 카삿에게 자신의 성향을 밝히고 약혼을 파기했다.[18][19]
1899년 말, 바니는 드 푸지를 매춘부의 삶에서 "구출"하려는 문제로 다투다 헤어졌으나, 이후에도 두 사람은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유지했다.[91][103] 이들의 관계는 드 푸지의 열쇠 소설 ''Idylle Saphique'' (''사포적 목가'')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이 책은 파리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93] 바니는 이 관계에 대한 자신의 서간 소설 ''Lettres à une Connue'' (''내가 아는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으나 출판되지는 않았다.[95]
바니는 시,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출판했다. 특히 여성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을 통해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00년 출판된 그녀의 첫 시집 ''Quelques Portraits-Sonnets de Femmes''(《어떤 여성들의 초상 소네트》)는 사포 이후 여성의 사랑에 대해 공개적으로 쓴 최초의 여성 시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13]
레네 비비앙이 사망한 후 1910년에 출판된 ''Je Me Souviens''(''나는 기억한다'')는 그들의 관계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 산문시였다.[13] 같은 해, 바니는 단편극과 시를 모은 시집 ''Actes et Entr'actes''(《막과 간주곡》)를 출판했다. 극 중 하나인 ''Équivoque''(《모호함》)는 사포의 죽음에 관한 전설을 수정주의적 버전으로 다루었다.[13] 1920년에 출간된 《Pensées d'une Amazone》(《아마존의 사상》)에서는 페미니즘과 평화주의를 전개하며 전쟁을 비판했다.[80]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니는 문학 살롱을 운영했다.[14] 그녀의 살롱은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모임으로, 사람들은 사교를 하고 문학, 예술, 음악 등 관심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만났다.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의도적으로 국제적인 특징을 띠었다. 망명자 모더니스트들과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1927년, 바니는 여성 작가들을 기리기 위해 ''아카데미 데 팜므''(여성 아카데미)를 시작했다. 이것은 17세기에 루이 13세에 의해 설립되었고, 당시 여성 회원이 없었던 영향력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아카데미)에 대한 응답이었다.
바니는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다자간 연애를 옹호했다. 그녀는 여러 여성들과 복잡하고 얽힌 관계를 맺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돌리 와일드: 1927년에 만나 관계를 시작했다. 와일드는 오스카 와일드의 조카로, 재치 있는 언변으로 유명했지만, 약물 중독과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았다. 1941년에 사망했으며, 바니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했다.[97][10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바니는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유대인 부부의 탈출을 돕기도 했다.[101] 전쟁 후에는 연합국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104]
1960년대 후반까지 살롱을 운영하며 문학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말년에는 회고록을 출판하고 브룩스의 작품 활동을 지원했다. 1972년 2월 2일, 95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111]
2. 1. 어린 시절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는 1876년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앨버트 클리퍼드 바니와 앨리스 파이크 바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2] 아버지는 부유한 철도 차량 제조업자였고, 어머니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23] 바니의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24]바니가 다섯 살 때, 뉴욕의 한 호텔에서 오스카 와일드를 만났다. 와일드는 남자아이들을 피해 도망치는 그녀를 안아 들어 올리고 무릎에 앉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3] 다음 날, 와일드는 바니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 갔고, 앨리스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추구하도록 격려했다.[26] 앨리스 파이크 바니는 이후 제임스 맥닐 휘슬러 등에게 그림을 배웠으며,[27] 그녀의 그림 작품 중 다수는 현재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28]
바니는 가정교사에게 쥘 베른의 이야기를 들으며 프랑스어를 빠르게 배웠다.[30] 이후, 그녀는 여동생 로라 클리퍼드 바니와 함께 마리 수베스트르가 설립한 프랑스 기숙 학교인 레 뤼슈에 다녔다.[31] 성인이 된 바니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대부분의 출판 작품을 프랑스어로 썼다.
바니가 열 살 때, 가족은 오하이오에서 워싱턴 D.C.로 이사했으며, 여름에는 메인주 바 하버에서 지냈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반항적인 딸로, 워싱턴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다. 20대 초반, 바니는 말을 타고 질주하며 사이드 새들 대신 다리를 벌리고 타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32]
바니는 열두 살 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알았고,[33] 숨기지 않고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34]
바니의 초기 친밀한 관계는 에바 팔머와 맺어졌다. 두 사람은 메인주 바 하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만났고, 1893년의 한 여행에서 성관계를 시작했다. 바니는 팔머의 외모를 중세 시대의 성처녀에 비유했다.[42] 두 사람은 수년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파리에서 젊은 시절, 그들은 4 rue Chalgrin에 있는 아파트를 함께 사용했고, 결국 뇌이쉬르센에 각자의 거처를 마련했다.[40][41] 바니는 종종 폴린 탄을 포함한 다른 여성과의 로맨틱한 관계를 위해 팔머의 도움을 구했다.[42] 팔머는 결국 바니를 떠나 그리스로 갔고, 안젤로스 시켈리아노스와 결혼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그들의 관계는 유지되지 못했다. 바니는 안젤로스를 좋지 않게 보았고, 격렬한 편지를 주고받았다.[43] 나중에 그들의 삶에서, 그 우정은 서신과 뉴욕에서의 재회를 통해 회복되었다.[44]
2. 2. 초기 관계
바니는 에바 팔머와 메인주 바 하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처음 만나 친밀한 관계를 시작했다.[40] 1893년의 한 여행에서 둘은 성관계를 시작했고, 수년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41] 바니는 팔머의 붉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를 칭찬하며, 그녀의 외모를 중세 시대의 성처녀에 비유했다.[42] 이들은 파리에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내며 4 rue Chalgrin에 있는 아파트를 공유했고, 이후 뇌이쉬르센에 각자의 거처를 마련했다.[41] 바니는 폴린 탄 등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위해 팔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42] 팔머는 결국 바니를 떠나 그리스로 갔고, 안젤로스 시켈리아노스와 결혼하면서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바니는 안젤로스를 탐탁지 않게 여겨 격렬한 편지를 주고받았으나,[43] 훗날 이들은 우정을 회복했다.[44]
1899년, 바니는 파리의 무도회장에서 매춘부 리안 드 푸지를 만났다. 이후 바니는 드 푸지의 저택에 종자 복장을 하고 나타나 자신을 사포가 보낸 "사랑의 종자"라고 소개했다.[88]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이었던 드 푸지는 바니의 대담함에 매료되었다.[92]
바니는 결혼하거나 아버지의 사망 시 신탁에 묶인 가족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18] 드 푸지와 교제하는 동안, 바니는 부유한 철도 가문 출신인 로버트 카삿과 약혼했다. 바니는 카삿에게 자신의 동성애 성향과 드 푸지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밝혔다.[18] 바니의 신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바니와 카삿의 결혼, 드 푸지의 입양까지 고려되었으나, 카삿이 약혼을 파기하면서 무산되었다.[19]
1899년 말, 바니는 드 푸지를 매춘부의 삶에서 "구출"하려는 문제로 다투다 헤어졌다.[91] 그러나 이후에도 두 사람은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유지했다.[103]
이들의 관계는 드 푸지의 열쇠 소설 ''Idylle Saphique'' (''사포적 목가'')의 모티브가 되었다. 1901년 출간된 이 책은 파리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첫해에만 70번 이상 재판되었다.[93] 바니는 곧 이 소설 속 등장인물의 모델로 알려졌다.[95]
바니는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햄릿''을 관람하며 드 푸지의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Idylle Saphique''의 한 챕터를 직접 썼다.[97] 여기서 바니("Flossie")는 햄릿의 고뇌를 여성의 고뇌에 비유하며, "여성이 행동에 대한 열정을 느낄 때, 무자비한 운명이 그녀를 사슬에 묶어 놓는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운명은 남성의 법만이 인정되는 시대에 우리를 여자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4] 바니는 이 관계에 대한 자신의 서간 소설 ''Lettres à une Connue'' (''내가 아는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으나 출판되지는 않았다.[95]
2. 3. 문학 활동
바니는 시,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출판했다. 특히 여성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을 통해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900년, 바니는 자신의 첫 저서이자 시집인 ''Quelques Portraits-Sonnets de Femmes''(《어떤 여성들의 초상 소네트》)를 출판했다. 이 시들은 전통적인 프랑스 운율과 격식을 갖춘 고풍스러운 스타일로 쓰였는데, 이는 바니가 자유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바니가 사포 이후 여성의 사랑에 대해 공개적으로 쓴 최초의 여성 시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13] 하지만 한 사회 가십지에서 "워싱턴에서 사포가 노래한다"는 헤드라인을 내걸자, 그녀의 아버지는 출판사의 남은 재고와 인쇄판을 사서 파괴했다.[13]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니는 필명 트리페로 ''Cinq Petits Dialogues Grecs''(《다섯 개의 짧은 그리스 대화》, 1901)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바니는 이교주의가 기독교보다 낫다고 주장했다.[76] 1902년 바니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녀는 더 이상 책의 저자임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고, 다시는 필명을 사용하지 않았다.[13]
레네 비비앙이 사망한 후 1910년에 출판된 ''Je Me Souviens''(''나는 기억한다'')는 그들의 관계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 산문시였다.[13] 같은 해, 바니는 단편극과 시를 모은 시집 ''Actes et Entr'actes''(《막과 간주곡》)를 출판했다. 극 중 하나인 ''Équivoque''(《모호함》)는 사포의 죽음에 관한 전설을 수정주의적 버전으로 다루었다.[13] 바니는 자신의 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나에게 단 하나의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 자체를 시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13]
1910년 출간된 《Éparpillements》(《흩어진 것들》)은 바니의 첫 번째 '팡세'(pensées, 글자 그대로 '사색') 선집이었다. 이 문학 형식은 17세기 이후 프랑스의 살롱 문화와 관련이 있었다.[76] 바니의 '팡세'는 짧고 재치 있는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77]
바니는 1920년에 가장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작품 《Pensées d'une Amazone》(《아마존의 사상》)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페미니즘과 평화주의를 전개하며 전쟁을 비판했다.[80] 경구 형식 때문에 바니의 견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전쟁을 "남성에 의해 규정되는 비자발적인 집단 자살"로 묘사하고, 남성을 "여성이 생명의 어머니가 되듯이, 죽음의 아버지가 된다"고 표현했다.[80][81] 《Pensées d'une Amazone》의 다른 부분인 "오해, 혹은 사포의 소송"에서는 동성애에 관한 역사적 문서를 그녀 자신의 주석과 함께 수집했다.[83]
''The One Who is Legion, or A.D.'s After-Life''(1930)는 바니의 유일한 소설이자, 영어로 쓰인 유일한 책이었다.
2. 4. 살롱 운영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니는 문학 살롱을 운영했는데, 처음에는 뇌이에서, 이후에는 파리 20번지 뤼 자코브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주로 열렸다.[14] 그녀의 살롱은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모임으로, 사람들은 사교를 하고 문학, 예술, 음악 등 관심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만났다. 그녀는 당대 가장 유명한 남성 작가들을 초대했지만,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했다.바니의 살롱은 여성에 대한 초점 외에도 의도적으로 국제적인 특징을 띠는 것으로 구별되었다. 그녀는 망명자 모더니스트들과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살롱 전기 작가인 조안 쉔카는 바니의 살롱을 "레즈비언의 만남 ''과'' 학자들과의 약속이 일종의 쾌활하고, 상호 작용하며, 인지 부조화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장소"라고 묘사했다. 살롱에서 환영받는 성적 지향의 범위 또한 파리에서는 흔하지 않았으며, 바니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솔직하게 대했기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참석자들도 편안하게 느꼈다.
1900년대에 바니는 뇌이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살롱의 초기 모임을 열었다. 엔터테인먼트에는 시 낭송과 연극이 포함되었고, 때로는 콜레트가 공연하기도 했다. 마타 하리는 한 번 춤을 췄는데, 고다이바 부인처럼 하얀 말에 터키석 클로아조네로 묶어 정원으로 들어왔다. 연극 ''에퀴보크''는 바니가 1909년에 뇌이를 떠나게 된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녀의 집주인은 그녀가 사포에 관한 야외 공연을 여는 것에 반대했는데, 그는 그 공연이 "자연을 너무 가까이 따랐다"고 느꼈다. 그녀는 임대 계약을 취소하고 파리의 라틴 지구에 있는 뤼 자코브의 파빌리온을 임대했으며, 그녀의 살롱은 1960년대 후반까지 그곳에서 열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살롱은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앙리 바르뷔스는 자신의 반전 소설 ''불 속에서''를 낭독했고, 바니는 여성 평화 회의를 열었다.
1920년대 초, 에즈라 파운드는 바니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종종 방문했다. 파운드는 바니에게 아방가르드 작곡가 조지 앤테일을 소개했고, 바니는 자신의 음악 취향이 전통적인 쪽으로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앤테일의 ''5개의 악기를 위한 교향곡''과 ''첫 번째 현악 사중주'' 초연을 주최했다. 파운드가 그의 오랜 연인인 바이올리니스트 올가 루지를 만난 곳도 바니의 살롱이었다.
1927년, 바니는 여성 작가들을 기리기 위해 ''아카데미 데 팜므''(여성 아카데미)를 시작했다. 이것은 17세기에 루이 13세에 의해 설립되었고, 당시 여성 회원이 없었던 영향력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아카데미)에 대한 응답이었다. 프랑스 아카데미와 달리 바니의 아카데미는 공식적인 조직이 아니라, 정기적인 금요일 살롱의 일부로 열리는 일련의 낭독회였다. 수상자로는 콜레트, 거트루드 스타인, 안나 위컴, 라실드, 루시 들라루-마르드루스, 미나 로이, 주나 반스 그리고 사후에는 르네 비비엔이 있었다.
1920년대 살롱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로는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아나톨 프랑스, 막스 자코브, 루이 아라공, 장 콕토, 영어권 작가 포드 매독스 포드, W. 서머셋 모음, F. 스콧 피츠제럴드, 싱클레어 루이스, 셔우드 앤더슨, 손턴 와일더, T. S. 엘리엇 그리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등이 있었다.
파리에 머물렀던 유명한 모더니스트 작가들 중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살롱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임스 조이스는 한두 번 왔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금요일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위해 연구하면서 레즈비언 문화에 대해 바니와 이야기하기 위해 한 번 왔지만, 너무 긴장하여 그 주제를 꺼내지 못했다.
2. 5. 주요 관계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는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다자간 연애를 옹호했다. 1901년 초, 저서 《다섯 개의 작은 그리스 대화》에서 그녀는 복수의 관계를 옹호하고 질투에 반대했다.[86] 《흩어진 조각들》에서는 "그 매력이 단순한 습관이 되지 않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썼다.[87] 그녀는 질투심이 강했지만, 적어도 일부 연인들에게도 비독점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88]장 샬롱의 초기 전기 《유혹가의 초상》이 영어로 출판되면서, 바니는 저작이나 살롱 활동보다 많은 관계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88] 그녀는 한때 관계, 준관계, 모험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뉜 목록을 작성했다. 코레트는 준관계였고, 화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에어 드 라뉘는 모험으로 분류되었다. 가장 중요한 관계(리에종)에는 커스턴스, 비비앙, 엘리자베스 드 그라몽, 브룩스, 돌리 와일드가 있었다.[88] 코레트와 루시 들라뢰-마르드뤼스와의 관계처럼, 그녀의 많은 연애는 평생의 우정으로 발전했다.[88]
- 엘리자베스 드 그라몽: 클레르몽-토네르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드 그라몽은 회고록으로 유명한 작가였다.[89] 프랑스의 앙리 4세의 후손인 그녀는 귀족 가문에서 성장했다. 재닛 플래너에 따르면,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농장 농부들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닦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90] 그녀는 잃어버린 부와 특권의 세계를 거의 후회하지 않고 회고하며, 사회주의를 지지하여 "붉은 공작부인"으로 알려졌다.
1910년 바니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기혼 상태였으며 두 딸을 두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91] 둘은 결국 헤어졌고, 1918년에 그녀와 바니는 "이 결혼만큼 강한 결혼은 없고, 다정한 결혼은 없으며, 오래 지속될 관계는 없다"라는 혼인 계약을 작성했다.[92] 드 그라몽은 바니의 비일처제 관계를 받아들였고(처음에는 마지못해), 다른 연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며,[93] 바니를 시골 휴가에 초대할 때 항상 브룩스를 포함시켰다.[93] 관계는 1954년 드 그라몽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 로메인 브룩스: 바니와 가장 오랫동안 관계를 맺은 인물은 1914년경에 만난 미국 화가 로메인 브룩스였다.[18] 브룩스는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렸으며, 회색, 검은색, 흰색의 우울한 색조로 유명했다.[94] 1920년대 동안 그녀는 드 그라몽과 바니 자신을 포함하여 바니의 사교계 구성원 여러 명의 초상화를 그렸다.
브룩스는 바니의 가벼운 관계를 비교적 잘 참아내며 놀리기도 했고, 수년 동안 자신도 몇 번의 관계를 가졌지만, 새로운 사랑이 진지해지면 질투를 느꼈다. 보통 그녀는 도시를 떠났지만, 한 번은 바니에게 자신과 돌리 와일드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바니가 굴복하자 물러섰다.[94] 브룩스는 바니에게 헌신했지만,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파리를 싫어했고, 바니의 친구들을 경멸했으며, 바니가 좋아하는 사교 활동을 혐오했고,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자신을 느꼈다.[95] 브룩스의 고독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식당으로 연결된 두 개의 별도 날개로 구성된 ''Villa Trait d'Union''(하이픈으로 연결된 별장)을 지었다. 브룩스는 또한 바니를 떠나 이탈리아나 유럽 다른 곳을 여행하며 일년의 대부분을 보냈다.[95] 그들의 관계는 50년 이상 지속되었다.
- 돌리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의 조카이자 와일드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녀는 재치있는 언변으로 유명했지만, 삼촌과는 달리 자신의 재능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고, 그녀의 유일한 유산은 편지뿐이다. 번역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27년에 만난 바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다. [97]
비비엔처럼 와일드는 자기 파괴적이었고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았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고, 평생 동안 알코올과 헤로인에 중독되었다. 바니는 약물 사용과 알코올 중독에 반대하여 여러 번 약물 해독 비용을 지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와일드는 요양원에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었던 수면제 파라알데히드에 중독되기도 했다.[98]
1939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거부하고 대체 치료법을 찾았다.[98] 다음 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바니와 헤어졌고, 바니가 브룩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는 동안 그녀는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99] 1941년에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는데, 가장 흔한 추측은 파라알데히드 과다 복용이었다.[100] 1932년에 작성된 그녀의 유언장에는 바니가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 에바 팔머 시켈리아노스: 바니의 첫 번째 친밀한 관계는 에바 팔머 시켈리아노스와 시작되었다. 1893년, 두 사람은 메인주의 바 하버 (en)에서 피서 휴가 중에 만났다. 바니는 팔머를 중세 시대 처녀에 비유했는데, 이는 그녀의 발목까지 오는 붉은 머리카락, 바다 녹색 눈, 흰 피부에 대한 찬사였다. 두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파리 16구에서, 두 사람은 샬그랑 거리 (fr) 4번지에 있는 아파트를 공유했다. 이후 두 사람은 뇌이쉬르센[40]에 각자 독립적으로 거주했다[41]. 바니는 폴린 턴과 같은 다른 여성들을 낭만적으로 쫓는 데 종종 팔머의 도움을 받았다[42]. 팔머는 결국 바니를 떠나 그리스로 가서 시인이자 극작가인 안겔로스 시켈리아노스와 결혼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지 않았고, 바니는 안겔로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격렬한 편지가 오갔다[43].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서로의 인생에서 했던 역할에 대해 성숙한 관점을 갖게 되었다[44].
2. 6.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
바니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행적은 논란이 되었다. 1937년, 우나, 레이디 트라우브리지는 바니가 "파시즘의 폭정에 대해 서투른 헛소리를 많이 했다"고 불평했다.[101] 바니 자신은 유대인 혈통이었고,[101] 로메인 브룩스와 함께 전쟁을 피렌체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탈리아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그녀는 여동생 로라가 공증된 승인 문서를 마련한 후 그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추축국이 연합국을 침략자로 묘사하는 추축국 선전을 믿었다. 따라서 친파시즘은 그녀에게 평화주의의 논리적 결과인 것처럼 보였다. 전쟁 중에 쓴 미발표 회고록은 친파시스트적이며 반유대주의적이며, 히틀러의 연설을 인용하며, 명백히 찬성하는 듯하다.[101]그녀의 회고록에 담긴 반유대주의 구절은 그녀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하기 위한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102] 또는 그녀가 에즈라 파운드의 반유대주의 라디오 방송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103]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 부부가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가는 배편을 제공하는 것을 도왔다.[101] 전쟁이 끝날 무렵 그녀의 공감은 다시 바뀌었고, 그녀는 연합국을 해방자로 보았다.[104]
''빌라 트레 드 유니옹''은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쟁 후, 브룩스는 파리에서 바니와 함께 사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그들은 서로 자주 방문했다.[105] 그들의 관계는 1950년대 중반까지 주로 일부일처제를 유지했으며, 바니는 은퇴한 루마니아 대사의 아내인 자닌 라호바리와 마지막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라호바리는 브룩스의 우정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바니는 브룩스에게 그들의 관계가 여전히 우선이라는 것을 안심시켰고, 삼각 관계는 안정적으로 보였다.[106]
살롱은 1949년에 재개되었고, 문학적 명성이 만들어지는 장소인 동시에 역사의 한 부분인 젊은 작가들을 계속 끌어들였다. 트루먼 커포티는 거의 10년 동안 간헐적으로 손님으로 방문했고, 그는 장식을 "전적으로 세기 말적"이라고 묘사했으며, 바니가 그를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의 모델에게 소개했다고 기억했다.[108]
앨리스 B. 토클라스는 1946년 파트너 거트루드 스타인이 사망한 후 정기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60년대의 금요일은 메리 매카시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를 기렸으며, 유르스나르는 1980년, 바니가 사망한 지 8년 만에 프랑스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다.[109]
바니는 격언을 쓰는 것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자신이 알고 지내던 다른 작가들에 대한 두 권의 회고록, ''Souvenirs Indiscrets''(1960)와 ''Traits et Portraits''(1963)를 출판했다. 그녀는 또한 브룩스의 회고록 출판을 추진하고 그녀의 그림을 갤러리에 전시하기 위해 노력했다.[110]
1960년대 후반에 브룩스는 점점 더 은둔적이고 편집증적이 되었고, 우울증에 빠져 바니가 보낸 의사들을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마지막 몇 년 동안 라호바리의 존재에 대해 몹시 화가 났고, 그들이 함께 보낼 것이라고 기대했던 마지막 몇 년 동안 결국 바니와의 연락을 끊었다. 바니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브룩스는 1970년 12월에 사망했고, 바니는 1972년 2월 2일, 95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111] 그녀는 파시 묘지 (프랑스 파리, 일드프랑스)에 묻혔다.[111]
3. 작품
바니는 레네 비비앙과의 관계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 활동을 했다. 비비앙은 바니를 뮤즈로 여겼고, 바니는 비비앙의 시에서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발견하고 상징주의 이미지와 궁정 사랑의 관례를 채택하여 여성 간의 사랑을 묘사했다. 특히 사포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사포의 삶에 대한 희곡을 쓰기도 했다.[6] 1904년에는 그들의 관계를 다룬 산문시 ''Je Me Souviens''(나는 기억한다)를 썼다.[6]
1910년에 출간된 ''Éparpillements''(흩뿌림)는 17세기 프랑스 살롱 문화와 연관된 '팡세'(pensées) 형식의 모음집으로, 짧은 경구나 명언들로 구성되어 있다. 바니는 이 책을 통해 레미 드 구르몽의 주목을 받았고, 그와의 교류는 그녀의 문학적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르몽은 그녀에게 '아마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이는 그녀의 묘비에도 새겨질 정도로 평생 동안 그녀를 따라다녔다.[15]
1920년에 출간된 ''Pensées d'une Amazone''(아마존의 생각들)은 페미니즘과 평화주의를 다룬 작품으로, 전쟁을 "남성에 의해 지정된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자살"이라고 비판했다.[80] 이 책의 한 섹션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자신의 해설을 담았으며, 술, 우정, 노년,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83]
바니는 영어로만 쓰인 유일한 소설 ''The One Who is Legion, or A.D.'s After-Life''(1930)를 통해 자살 후 성별 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었다.[15]
바니는 레네 비비앙 상을 ''문인 협회''의 권한 하에 재정 지원을 통해 복원하고[9] 1950년에 심사위원장직을 맡았다.[10]
3. 1. 프랑스어 작품
- ''Quelques Portraits-Sonnets de Femmes'' (여성들의 초상 소네트 몇 편, 1900)
- ''Cinq Petits Dialogues Grecs'' (짧은 그리스 대화 5편, 1901)
- ''Actes et entr'actes'' (막과 막간극, 1910)
- ''Je me souviens'' (나는 기억한다, 1910)
- ''Eparpillements'' (흩어진 것들, 1910)
- ''Pensées d'une Amazone'' (아마존의 생각들, 1920)
- ''Aventures de l'Esprit'' (정신의 모험, 1929)
- ''Nouvelles Pensées de l'Amazone'' (아마존의 새로운 생각들, 1939)
- ''Souvenirs Indiscrets'' (Indiscreet Memories, 1960)
- ''Traits et Portraits'' (Traits and Portraits, 1963)
- ''Amants féminins ou la troisième'' (여성 연인, 또는 세 번째 여성, 2013)
《Éparpillements》(흩어진 것들, 1910)는 바니의 첫 번째 '팡세'(pensées, 글자 그대로 '사색') 모음집이다. 이 문학 형식은 17세기부터 프랑스 살롱 문화와 관련이 있었으며, 사블레 부인의 살롱에서 완성되었다.[76] 바니의 '팡세'는 사블레의 《격언집》처럼 짧고, 종종 한 줄짜리 경구(bon mot, 재치 있는 말)였다. 예를 들면 "나쁜 입보다 더 악한 귀가 많다", "결혼한다는 것은 혼자 있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와 같은 것들이었다.[77]
바니의 문학적 경력은 《Éparpillements》의 사본을 레미 드 구르몽에게 보낸 후 탄력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시인, 문학 평론가, 철학자였으며, 30대 때 루푸스 불게리스라는 질병에 걸려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78] 그는 감명을 받아 소수의 오랜 친구들만 초대하던 일요일 모임에 바니를 초대했다. 바니는 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그를 저녁 외출, 뤼 야코브에서의 저녁 식사, 가면 무도회, 심지어 센 강에서의 짧은 크루즈로 이끌었다. 그는 그들의 대화 중 일부를 일련의 편지로 만들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게재하면서 그녀를 'l'Amazone'라고 불렀다. 이 프랑스어 단어는 '여류 기수' 또는 '아마존'을 의미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책으로 묶였다. 그는 1915년에 사망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붙인 별명은 평생 동안 그녀와 함께 했다. 심지어 그녀의 묘비에도 그녀를 "레미 드 구르몽의 아마존"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의 《아마존에게 보내는 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영감을 준 여성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게 만들었다.[79]
바니는 1920년에 가장 노골적인 정치적 작품인 《Pensées d'une Amazone》(아마존의 생각들)을 발표했다. 첫 번째 섹션인 "성적 역경, 전쟁, 그리고 페미니즘"에서 그녀는 페미니즘과 평화주의 주제를 발전시켜 전쟁을 "남성에 의해 지정된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자살"이라고 묘사했다.[80] 그녀는 전쟁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이 용기와 선택 없이 생명을 낳는 것처럼 죽음을 낳는다"고 말했다.[81] 경구 형식으로 인해 바니의 견해의 세부 사항을 파악하기 어렵다. 아이디어는 제시되었다가 버려지고, 일부 '팡세'는 다른 아이디어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82]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가 전쟁으로 이어지는 공격성은 모든 남성 관계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칼라 제이는 그녀의 철학이 그렇게 광범위하지 않으며 "전쟁을 '사랑'하는 자들은 적절한 스포츠, 즉 삶의 기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라는 경구로 가장 잘 요약된다고 주장한다.
《Pensées d'une Amazone》의 또 다른 섹션인 "오해, 또는 사포의 소송"은 동성애에 대한 역사적 글과 그녀의 해설을 모았다.[83] 그녀는 또한 술, 우정, 노년, 문학 등의 주제를 다루며 "소설은 인생보다 길다"[84]와 "낭만주의는 어린 시절의 질병이다. 그것을 어릴 때 겪은 사람들이 가장 튼튼하다"라고 썼다.[85] 세 번째 권인 《Nouvelles Pensées de l'Amazone》(아마존의 새로운 생각들)가 1939년에 출판되었다.
3. 2. 영어 작품
Poems & Poemes: Autres Alliances영어 (시와 시: 또 다른 동맹, 1920)는 시의 이중 언어 모음집이다.[15] The One Who Is Legion영어 (군단 중 하나, 1930)는 바니가 영어로만 쓴 유일한 책이자 유일한 소설이었다.[15] 로메인 브룩스가 삽화를 그렸으며, A.D.로 알려진 자살한 사람이 성별이 없고 반음양적인 존재로 다시 살아나 자신의 삶의 책을 읽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허구의 책은 The Love-Lives of A.D.영어라는 제목으로, 바니의 다른 저작물과 마찬가지로 찬송가, 시, 경구 모음집이다.[15]4. 유산
나탈리 클리퍼드 바니는 여성 동성애를 다룬 문학 작품을 통해 성 소수자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작품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기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113] 1992년에는 그녀의 회고록, 에세이, 경구 일부가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지만, 희곡과 시 대부분은 여전히 번역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112]
바니는 파리에서 살롱을 운영하며 20세기 초 문학과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살롱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코레트, 르네 비비앙, 레미 드 구르몽, 트루먼 카포티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112][113] 특히, 래드클리프 홀의 소설 《고독의 우물》에서는 살롱 여주인 발레리 시모어라는 인물로 묘사되어, 주인공의 자기 혐오와 대조되는 자기 수용의 상징으로 나타난다.[114][115] 뤼시 드라뤼 마르드뤼스는 소설 《천사들과 변태들》에서 바니를 로레트 웰스라는 인물로 묘사하며, 그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리면서도 존경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117][118]
바니는 여성의 자유와 권리 신장에 기여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냈으며,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79년에는 주디 시카고의 페미니스트 예술 작품 《디너 파티》에 그녀의 이름이 헌정되었다.[112]
2009년 10월 26일,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쿠퍼 공원에는 바니를 기념하는 역사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이 표지판은 오하이오주에서 성적 지향을 언급한 최초의 역사 표지판이다.[124]
5. 평가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는 자유로운 연애관과 여성 동성애를 옹호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문학 작품을 통해 여성의 욕망과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20세기 초 파리 문학 살롱을 주도하며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6]
바니는 레네 비비앙과의 관계를 통해 상징주의 시의 이미지와 궁정 사랑의 관례를 채택하여 여성 간의 사랑을 묘사하고, 역사와 신화에서 영웅적인 여성의 사례를 찾았다. 특히 사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아 그녀의 시를 연구하고, 그녀의 삶에 대한 연극을 쓰기도 했다.[6]
바니의 살롱은 여성 작가와 작품을 조명하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국제적인 특징을 띠었다. 망명 모더니스트들과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들을 한자리에 모았으며,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6]
주디 시카고는 1979년 페미니스트 예술 작품인 ''디너 파티''에서 바니에게 자리를 마련하여 헌정했다. 1980년대부터 바니는 "후기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관심사를 거의 불가사의하게 예견"한 점으로 인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6]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시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점은 비판받기도 한다. 한국의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자유와 권리 신장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파시즘 옹호와 같은 일부 행적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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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Schenkar, 156, and Rodriguez, 298, give slightly different accounts of this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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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a Corisande) エリザベート・ド・グラモンは1875年4月23日にナンシーに生まれ、1954年12月6日にパリで死んだ。彼女はアントワーヌ・アルフレッド・アジェノール・ド・グラモン(1851年-1925年)と妻、旧姓イザベル・ド・ボーヴォ・クラオン(1852年-1925年)の娘であった。彼女は(エーメ・フランソワ)フィリベルト・ド・クラーモント=トネール、ド・クラーモント=トネール第8代公爵、と1896年6月3日に結婚した。二人には1920年の離婚の前に2人の娘が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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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서적
Stimpson
[116]
서적
Hall
[117]
서적
Livia (1995)
[118]
서적
Delarue-Mardrus
[119]
간행물
Letter to an Amazon
1994-10-31
[120]
서적
Barnes
[121]
서적
Barnes
[122]
서적
Weiss
[123]
서적
Barnes
[124]
웹사이트
Lesbian literary figure honored with Ohio historial marker noting sexual orientation
http://www.disp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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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istoric Marker Vandalized In Cooper Park – News Story – WHIO Dayton
http://www.whiotv.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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