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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정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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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 정월은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서 시작된 일본 재류 네덜란드인의 풍습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인들이 동지를 "네덜란드 동짓날"로 삼아 서양 요리를 대접하고 연회를 연 것에서 유래했다. 에도 시대에는 난학자들이 네덜란드 신년회를 개최하여 난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서양 문물 수용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간세이력과 서양 그레고리력의 차이로 인해 날짜가 유동적이었으며, 동지에서 11일째 되는 날을 네덜란드 정월로 치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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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정월
개요
유형기념일
기념일1월 1일
관련 문화일본
상세 정보
유래에도 시대네덜란드와의 교류에서 비롯됨
나가사키현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서 매년 정월에 네덜란드인이 축하하던 풍습
특징에도 막부의 쇼군이나 다이묘들이 네덜란드 상관을 방문하여 서양 문물을 접하고 교류함
네덜란드 상관에서는 신년 축하 행사와 함께 네덜란드 요리와 술을 제공하고, 악기 연주와 춤을 공연함
역사적 의의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함
쇄국 정책 하에서도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 문화를 받아들임
현대적 의미일본에서 서양 문화를 기념하고 이해하는 날로 인식됨
나가사키 등 일부 지역에서는 네덜란드 정월의 전통을 계승하는 행사를 개최함
기타
관련 용어오란다쇼가쓰(オランダ正月)
참고 자료市川岳山「芝蘭堂新元会図」 - 玉川大学教育博物館 館蔵資料(デジタルアーカイブ)
オランダ正月(オランダショウガツ)とは? 意味や使い方 - コトバンク

2. 역사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서 행해진, 일본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의 풍습이 오란다 정월의 기원이다. 네덜란드(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서는 기독교력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념했지만, 에도 막부의 기독교 금령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동지에 맞춰 "네덜란드 동지"로 개최했다. 또한 일본의 정월 축하를 따라 양력 정월 초하루에 데지마 근무 막부 관리, 데지마 오토나, 네덜란드어 통역 등 일본인들을 초대하여 서양 요리를 대접하고 네덜란드식 축연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분세이 연간(1818년 - 1829년) 『나가사키 명승도회』에는 헌상표가 기록되어 있으며, 쇠고기, 돼지고기, 오리 등 육류 요리나 , 생선 버터 조림, 카스테라(케이크류), 커피 등이 제공되었지만, 초대된 일본 관리들은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가져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관 측은 네덜란드 요리와 별도로 일본 요리를 준비했다.[3]

에도 시대 중기 활약한 통사 요시오 고규의 자택은 2층에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가구를 배치하여 "네덜란드 좌식"이라 불렸으며, 정원도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동식물로 가득 차 나가사키의 명소가 되었다. 그의 집에서는 태양력 설날에 맞춰 네덜란드 정월이 열렸다. 오오츠키 겐타쿠는 요시오 가문에서 열린 네덜란드 정월에 참가하여 감명을 받았다.

간세이 6년 (1794년) 헤이스베르트 헴미(Gijsbert Hemmij)의 에도 출부에서 네덜란드인과 처음 대담한 오오츠키 겐타쿠는 1795년 1월 1일 교바시구 미즈타니정에 있던 자택 학원 시란도에 많은 난학자와 네덜란드 풍물 애호가를 초대하여 신원회(설날 축연)를 열었다. 러시아로 표류한 다이코쿠야 코다유 등도 초대되었다. 이것이 에도에서의 네덜란드 정월의 효시다.

네덜란드 정월 배경에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한 서적 수입 일부 해금 이후 난학 연구가 점차 성행하여 란벽이라 칭해진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가 증가했음이 있다. 난학자들이 친목을 다지고 자신의 학문 융성을 바라며 최신 정보 교환을 행하는 모임으로서 이후에도 매년 열리게 되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간세이력 등 태음태양력과 서양 그레고리력과의 차이는 매년 달랐기 때문에, 편의상 다음 해 이후에는 동지부터 세어 제11일째에 네덜란드 정월 하연을 개최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겐타쿠의 아들 오오츠키 반리가 사망한 덴포 8년 (1837년)까지 총 44회 열렸다.

1795년 1월 네덜란드(네덜란드 연방 공화국)는 프랑스 혁명군에 점령되어 멸망했으며, 프랑스 위성국 바타비아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즉, 난벽의 일본인은 네덜란드 멸망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네덜란드의 정월을 축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2. 1. 나가사키의 오란다 정월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서 시작된 초기 형태의 오란다 정월은 원래 일본에 거주하던 네덜란드인들의 풍습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기독교력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했지만, 에도 막부기독교 금지령(1602년)으로 인해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은 성탄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6] 그래서 이들은 절기상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동지를 "네덜란드 동짓날"로 삼아 즐겼다.

나중에는 일본 설에 맞춰 데지마에 파견 근무 중인 막부 관리,[7] 통사(통역관)[7] 등을 초대하여 서양 요리를 대접하고 서양식 연회를 열었다. 이것이 네덜란드 설, 즉 오란다 정월의 기원이다. 이 행사를 처음에 나가사키 사람들은 아란타 설날(阿蘭陀正月)이라고 불렀다. 이후 통사를 비롯한 주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분세이 연간(1818년-1829년)의 《나가사키명승도회》에는 소·돼지·오리 등의 고기 요리나 , 생선버터조림, 카스테라,[8] 커피 등을 대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일본 관리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가져갔다고 한다. 이로부터 상관 측이 네덜란드 요리와 별개로 일본 요리도 준비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9]

2. 2. 에도 지란당의 오란다 정월

에도 시대 중기, 난학자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沢)를 중심으로 에도에서 오란다 정월이 발전했다. 난학자 요시오 고규(吉雄耕牛)는 자신의 집에서 난학자들을 초대하여 태양력에 맞춘 네덜란드 설을 보냈는데, 오쓰키 겐타쿠는 요시오 고규의 네덜란드 설에 감명을 받았다.[7]

1794년(간세이 6년), 오쓰키 겐타쿠는 에도를 방문한 네덜란드 대표 헤이스베르트 헴미(Gijsbert Hemmij)를 접견하고, 그 해 11월 11일이 서력으로 1795년 1월 1일인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난학 학원 지란당(芝蘭堂)에서 동료 난학자들과 네덜란드 문물 애호가들을 초대하여 신년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에도 오란다 정월의 시작이다.[7] 이 모임에는 러시아 표류로 알려진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黒屋光太夫)도 초대되었다.

쓰번의 이치카와 다케야마(市川岳山)가 그린 《지란당신원회도(芝蘭堂新元会圖)》에는 에도에서의 첫 네덜란드 설 모습이 담겨 있으며, 서양식 벽화, 포크, 나이프, 와인잔 등이 묘사되어 있다. 스기타 겐파쿠, 우타가와 겐즈이, 이나무라 산파쿠 등도 참석했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양서 수입 완화 정책과 난학 연구의 활성화, 난벽(蘭癖)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들의 증가가 오란다 정월 유행의 배경이 되었다. 네덜란드 설은 난학자들의 친목 도모, 난학 육성, 최신 정보 교환의 장으로 작용했으며 이후에도 매년 열리게 된다.

당시 일본의 간세이력(태양태음력)과 서양의 그레고리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 매년 날짜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에 나중에는 편의상 일본 역법으로 동지에 해당하는 날에서 11일째 되는 날을 "네덜란드 설"로 치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10] 오쓰키 겐타쿠의 아들인 오쓰키 반리가 죽는 1837년(덴포 8년)까지 약 44번 네덜란드 설 행사가 열렸다.

한편, 일본에서 네덜란드 설 행사가 열리던 1795년 1월은 네덜란드가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되어 멸망하고,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건국된 달이다. 즉, 난벽(蘭癖)의 일본인은 네덜란드 멸망과 동시에 사라진 네덜란드의 설을 축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오란다 정월의 풍경

오란다 정월은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서 유래한 풍습이다. 네덜란드인들이 크리스마스를 대신하여 동지에 "네덜란드 동지"를 개최하고, 일본의 정월 축하를 따라 양력 정월 초하루에 일본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연 것이 그 시작으로, 나가사키 사람들은 이를 오란다 정월이라 불렀다.[3]

에도 시대 중기, 통역관 요시오 고규의 집에서는 태양력 설날에 맞춰 네덜란드 정월을 열었다. 오오츠키 겐타쿠는 1795년 1월 1일 자신의 학원 시란도에서 신년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에도 오란다 정월의 시초이다.

오란다 정월은 난학 연구가 성행하고 란벽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들이 증가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난학자들이 친목을 다지고 학문적 교류를 하는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매년 동지로부터 11일째 되는 날에 개최되었으며, 오오츠키 반리가 사망한 1837년까지 총 44회 열렸다.

1795년 1월, 일본에서 오란다 정월이 열릴 당시, 네덜란드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는 프랑스 혁명군에 점령되어 멸망한 상태였다. 즉, 일본의 란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네덜란드의 정월을 축하하기 시작한 셈이다.

3. 1. 음식

분세이 연간(1818년-1829년) 《나가사키명승도회》에는 소, 돼지, 오리 등 육류 요리와 , 생선버터조림, 카스테라[8], 커피 등을 대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초대받은 일본 관리들은 서양 음식에 익숙하지 않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가져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상관 측에서는 네덜란드 요리와 별도로 일본 요리도 함께 준비했다.[9]

3. 2. 복식과 장식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서 행해지던 네덜란드인들의 풍습에서 유래한 오란다 정월에는 네덜란드식 복식과 실내 장식이 돋보였다. 요시오 고규는 자택 2층에 네덜란드 가구를 배치하고 '아란타좌부(阿蘭陀坐敷)'라 불렀으며, 정원에는 네덜란드 동식물을 길렀다.[6] 이러한 모습은 나가사키의 명소가 될 정도였다.

1795년 1월 1일, 오쓰키 겐타쿠는 자신의 난학학원 지란당(芝蘭堂)에서 신년회를 개최했는데, 이 모습을 그린 《지란당신원회도(芝蘭堂新元会圖)》에는 서양식 벽화로 장식된 벽과 포크, 나이프, 와인잔 등이 놓인 테이블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네덜란드 풍의 실내 장식과 식사 문화를 엿볼 수 있다.

4. 오란다 정월의 의의와 영향

오란다 정월은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교류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일본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학문 발전과 근대화를 이루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에도 시대 중기에 활약한 통사 요시오 고규의 자택은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가구와 동식물로 꾸며져 나가사키의 명소가 되었고, 이곳에서 열린 오란다 정월은 난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오오츠키 겐타쿠는 1795년 자신의 학원 시란도에서 오란다 정월을 개최하여 스기타 겐파쿠 등 저명한 난학자들과 교류하였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서적 수입 완화 정책 이후 난학 연구가 활발해졌고, 난벽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들이 증가하면서 오란다 정월은 난학자들의 친목 도모와 정보 교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매년 동지로부터 11일째 되는 날에 오란다 정월을 개최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1837년까지 총 44회 열렸다.

1795년네덜란드 공화국이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점령되어 멸망한 해이다. 일본의 난학자들은 네덜란드가 멸망한 시점에 존재하지 않는 네덜란드의 정월을 축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4. 1. 난학 발전 기여

오란다 정월은 쇄국 정책 속에서도 서양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교류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난학자들의 친목 도모와 정보 교환의 장으로서 난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에도 시대 중기, 통사[7] 요시오 고규는 나가사키의 자택에서 네덜란드식 생활을 하며 난학자들의 교류를 지원했다. 오쓰키 겐타쿠는 요시오 고규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원 지란당(芝蘭堂)에서 1795년 1월 1일, 네덜란드 설을 기념하는 모임을 처음 개최했다. 이 모임에는 스기타 겐파쿠, 우타가와 겐즈이, 이나무라 산파쿠 등 저명한 난학자들이 참석했다.

쓰번의 이치카와 다케야마가 그린 《지란당신원회도(芝蘭堂新元会圖)》에는 당시 모임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양식 벽화, 포크, 나이프, 와인잔 등이 등장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양서 수입 완화 정책과 난벽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들의 증가는 난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했다. 네덜란드 정월은 난학자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최신 정보를 교환하는 장으로 작용하며 매년 개최되었다.

당시 일본의 간세이력(태양태음력)과 서양의 그레고리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동지로부터 11일째 되는 날을 "네덜란드 설"로 정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오쓰키 겐타쿠의 아들 오쓰키 반리가 사망한 1837년까지 약 44번의 네덜란드 설 행사가 열렸다.

흥미롭게도, 일본에서 네덜란드 설 행사가 열리던 1795년 1월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되어 멸망한 달이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20년간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난학자들은 네덜란드 설을 기념하며 서양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4. 2. 서양 문물 수용

에도 시대 중기, 통역관[7] 요시오 고규는 자신의 집에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가구를 배치하고, 정원에는 네덜란드의 동식물을 길러 나가사키의 명소로 만들었다. 그는 난학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태양력에 맞춰 네덜란드 정월 행사를 열었다. 에도의 난학자 오쓰키 겐타쿠도 요시오 고규의 집에서 열린 네덜란드 정월에 참가하여 큰 감명을 받았다.

1794년, 네덜란드 대표 헤이스베르트 헴미(Gijsbert Hemmij)가 막부를 방문했을 때, 오쓰키 겐타쿠는 그해 윤 11월 11일이 서력 1795년 1월 1일에 해당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교바시구 미즈타니정에 있던 자신의 난학 학원 시란도에 많은 난학자와 네덜란드 문물 애호가들을 초대하여 신년 축하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러시아로 표류했던 다이코쿠야 고다유도 초대되었다.

이것이 에도에서 열린 최초의 네덜란드 정월 행사였다. 이 역사적인 첫 행사는 쓰번의 이치카와 가쿠잔이 그린 《시란도 신원회도》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참석자들의 글씨가 남아 있어 당시의 즐거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림에는 서양식 벽화로 장식된 벽과 포크, 나이프, 와인잔 등이 놓인 테이블이 그려져 있다. 스기타 겐파쿠, 우다가와 겐스이, 이나무라 산하쿠 등도 이 행사에 참석했다.

네덜란드 정월이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서양 서적 수입을 일부 완화하면서 난학 연구가 활발해지고, 난벽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들이 늘어난 점이 있었다. 네덜란드 정월은 난학자들이 친목을 다지고, 학문적 성장을 도모하며, 최신 정보를 교환하는 중요한 모임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매년 개최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용되던 간세이력(태양태음력)과 서양의 그레고리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 매년 날짜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편의상 동지로부터 11일째 되는 날을 "네덜란드 정월"로 정하여 행사를 치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0] 오쓰키 겐타쿠의 아들 오쓰키 반리가 사망한 1837년(덴포 8)까지 약 44회의 네덜란드 정월 행사가 열렸다.

흥미롭게도 일본에서 네덜란드 정월 행사가 열리던 1795년 1월은 네덜란드가 프랑스 혁명군에 점령되어 멸망한 달이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즉, 난학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네덜란드가 멸망함과 동시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네덜란드의 정월을 축하하기 시작한 셈이다.

4. 3. 근대화와의 관계

에도 시대 중기 통사[7]였던 요시오 고규는 나가사키의 자택에서 네덜란드식 생활을 하며, 많은 난학자들을 초대하여 태양력에 맞춘 네덜란드 설을 보냈다. 오쓰키 겐타쿠는 요시오 고규의 네덜란드 설에 감명을 받고, 1794년 에도에서 난학자들과 네덜란드 문물 애호가들을 초대하여 네덜란드 설을 축하했다. 이 모임에는 다이코쿠야 고다유도 초대되었다. 에도에서의 첫 네덜란드 설은 이치카와 다케야마의 《지란당신원회도》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네덜란드 설 유행의 배경에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양서 수입 완화와 그에 따른 난학 연구의 활성화, 그리고 난벽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 애호가들의 증가가 있었다. 네덜란드 설은 난학자들의 친목 도모, 난학 육성, 최신 정보 교환의 장으로 작용했으며 매년 열리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간세이력(태양태음력)과 서양의 그레고리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편의상 동지로부터 11일째 되는 날을 "네덜란드 설"로 치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0] 오쓰키 겐타쿠의 아들 오쓰키 반리가 죽는 1837년까지 약 44번의 네덜란드 설 행사가 열렸다.

흥미롭게도 일본에서 네덜란드 설 행사가 열리던 1795년 1월은 네덜란드 공화국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되어 멸망한 달이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되었고, 1815년 네덜란드 연합왕국이 세워질 때까지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일본의 난학자들은 네덜란드가 멸망한 시점에 네덜란드의 설을 축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5. 오란다 정월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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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市川岳山「芝蘭堂新元会図」 {{!}} 玉川大学教育博物館 館蔵資料(デジタルアーカイブ) https://www.tamagawa[...] 2024-11-26
[2] 웹사이트 オランダ正月(オランダショウガツ)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11-26
[3] 서적 出島 異文化交流の舞台
[4] 문서 태양력에 따른 것
[5] 문서 홍모(紅毛)란 네덜란드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을 가리키는 명칭 중 하나이다. 유럽인 몸의 털이 붉게 보인데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오세영 의 역사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장원)을 보면 네덜란드인 홍모라고 지칭한다.
[6] 문서 마치야쿠닌(町役人)에 해당하며 데지마오토나(出島乙名)라고 한다.
[7] 문서 通詞(つうじ): 역관
[8] 문서 포르투갈식 카스테라가 아닌 케이크의 일종이다.
[9] 서적 出島 異文化交流の舞台
[10] 문서 동지는 태양력으로도 매년 날짜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태음력 계산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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