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나카 상주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중국 간행물에 처음 게재된 문서로,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문서는 세계 정복을 위해 아시아, 특히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본의 전쟁 계획을 보여주는 증거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위조된 문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일본 측은 물론, 서방 학자들도 위서임을 지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가 일본의 실제 행동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진실성을 주장하는 견해도 존재하며, 위조 여부와 별개로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위조 문서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에게 로마와 서방 제국을 넘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위조된 문서로, 교황권 강화에 이용되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위조임이 밝혀졌다.
  • 위조 문서 - 시온 장로 의정서
    시온 장로 의정서는 유대인의 세계 지배 계획을 담았다는 내용의 위조된 문서로, 반유대주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음모론과 결합되어 유통된다.
다나카 상주문
개요
문서 이름다나카 상주문
원어 이름ja(다나카 조사분)
원어 제목ja(다나카 조사분)
로마자 표기Tanaka Jōsōbun
문서 종류전략 기획 문서
주제세계 정복 전략
목적표면적으로는 전략 개발, 현재는 반일 날조로 널리 간주됨
제작 정보
작성일1927년
발표일알 수 없음
비준일알 수 없음
효력 발생일알 수 없음
폐지일알 수 없음
작성자알 수 없음
서명자알 수 없음

2. 시대적 배경

1929년 일본의 영토: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반도, 일본 열도, 사할린, 류큐 열도, 타이완(포르모사).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국민당의 간행물인 "時事月報"(시사월보, Current Affairs Monthly)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이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 있다.[2]

  • 세계를 정복하려면 아시아를 정복해야 한다.
  • 아시아를 정복하려면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
  • 중국을 정복하려면 만주와 몽골 고원을 정복해야 한다.
  • 우리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과 남해(南洋) 국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이다.
  • 그렇다면 세계는 동아시아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문서의 영어 번역본은 1934년 2월 이전에 유포되었으며, 같은 해 2월 허버트 W. 암스트롱이 발행한 잡지 ''The Plain Truth''의 주요 기사의 기초가 되었다.[3] (193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처음 게재됨).

"다나카 상주문"은 미국의 전쟁 선전에서 일본의 ''나의 투쟁''에 해당하는 문서로 묘사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우리가 싸우는 이유''의 ''중국의 전투''와 ''전쟁 서곡'', 그리고 카프라가 연출한 ''적을 알라: 일본''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나카 상주문"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의 행동(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39년 할힌골 전투,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1941년 진주만 공격, 태평양 전쟁[4])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여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1940년, 레온 트로츠키는 소련 정보국이 도쿄의 고위 간첩으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지만, 자체 보안을 위해 미국 내 연락망을 통해 유출했다는 설명을 발표했다.[6]

일본은 1925년 일소기본조약에 따라 북사할린의 오하 유전 이권을 획득하고, 1926년 북사할린 석유를 설립하여 대일본제국 해군이 관장했다.

2. 1. 1920년대 일본의 국내외 정세

1927년(쇼와 2년) 3월 24일, 장제스국민혁명군은 난징에 입성하여 외국 영사관을 습격하는 난징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후에 코민테른의 미하일 보로딘 등에 의한 공작으로 판명되었지만[22], 같은 해 4월 3일에는 일본인 거류민이 습격당하는 한커우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의 협조 노선은 연약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1927년 4월 20일다나카 기이치 정우회 내각이 성립했다. 다나카는 대중 외교를 적극적인 방침으로 전환하여, 5월 말부터 6월에 걸쳐 거류민 보호를 위해 산둥 출병을 감행했다.

6월 27일부터 7월 7일에 걸쳐 외무성·군 관계자·중국 주재 공사·총영사 등을 소집하여 대중 정책에 대한 동방 회의가 도쿄에서 열렸다. 이는 다나카 내각 아래에서 외무 차관이 된 모리 가쿠가 실질적으로 조직했다. 모리는 만주·몽골 정책 강경론자였으며,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의 동삼성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는 방침이 반영된 것이었다. 7월 7일에 「대지 정책 요강」이 발표되었다. 요강에서는 자위를 이유로 무력 행사를 주저하지 않을 것(제5조), 일본은 동삼성, 만주·몽골에 "특수 지위"가 있다는 것(제7조), 동란이 만주·몽골에 파급될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제8조).

일본군에 의한 산둥 출병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군의 진출에 대해 베이징 정부직례파의 저우인런 등은 칭다오 탈환을 계획했다. 한편, 베이징 정부봉천파장쭝창은 이를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산둥 출병이 중국 주권을 박탈하는 침략적 야심을 품은 것으로 해석되었고, 특히 봉천에서 "동방 회의 결과 및 다나카 내각의 만주·몽골 적극 정책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일 운동이 벌어졌다[23]

그 후, 1928년에는 지난 사건, 장쭤린 폭살 사건이 발생했고, 1929년(쇼와 4년) 7월에 다나카 내각은 장쭤린 폭살 사건의 책임자 처리에 얽혀 총사직했다. 같은 해 9월에 다나카는 사망했다.

2. 2. 동방 회의 (1927년)

1927년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10] 다나카 기이치는 외무성, 육군성, 해군성, 재무성 관계자들과 함께 동방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일본은 장쭤린을 지원하여 만주를 완충 국가로 만들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과 싸우는 것을 돕는다는 대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11] 다나카 상주문은 이 회의의 비밀 보고서라고 알려져 있다.

모리 가쿠 외무 차관은 만주와 몽골에 대한 강경 정책을 가진 인물로,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7월 7일 발표된 대지 정책 요강은 일본이 동삼성과 만주, 몽골에 "특수 지위"를 가지며(제7조), 이 지역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제8조).

당시 일본군의 산둥 출병이 진행되면서, 중국 내에서는 이에 대한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23]

3. 문서의 출현과 유포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국민당의 간행물인 "시사월보"(時事月報, Current Affairs Monthly)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1929년(쇼와 4년) 9월, 일본 정부는 다나카 기이치가 상주했다고 하는 국책안을 입수했는데, 이를 중국 정부가 번역하여 제3회 태평양 문제 조사회 회의(교토 회의)에 제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외무성 아세아국장 아리타 하치로는 이 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오류를 발견했다.


  • 상주문이 내대신부가 아닌 궁내대신을 경유하고 있다는 기술
  • 구개국 조약에 대한 타개책 협의에 사망했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참가하고 있다는 내용
  • 다나카 기이치의 구미 방문 및 필리핀에서의 습격 사건에 대한 기술


그래서 회의에서 다나카 상주문이 위서임을 폭로하려 했다.[24] 그러나 닛카 클럽에 따르면, 타국 측의 권고가 있어 중국은 제출을 보류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에 따르면, 한문과 영문 번역이 제작되어 일부 참석자에게 비공식적으로 배포되었다고 한다.[25] 이것이 다나카 상주문의 존재가 확인된 처음이라고 한다.

3. 1. 중국에서의 최초 공개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국민당의 간행물인 時事月報|시사월보중국어(Current Affairs Monthly)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다.[2]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이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 있었다.[2]

메이지 천황의 유훈은 첫째 타이완 강탈, 둘째 대한제국 병합, 셋째 만주몽골 강탈이며, 현재는 제3기로, 실제로 정치적 진취, 경제적 침략, 인구적 이식이 상주문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고 『시사월보』의 서문은 경종을 울렸다.[26] 다나카 상주문은 그 후 동삼성을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3. 2. 국제 사회로의 확산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국민당의 간행물인 "시사월보"(時事月報)의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이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 있다.

> * 세계를 정복하려면 아시아를 정복해야 한다.

> * 아시아를 정복하려면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

> * 중국을 정복하려면 만주와 몽골 고원을 정복해야 한다.

> * 우리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과 남해(南洋) 국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이다.

> * 그렇다면 세계는 동아시아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문서의 영어 번역본은 1934년 2월 이전에 유포되었으며, 같은 해 2월 허버트 W. 암스트롱이 발행한 잡지 ''The Plain Truth''의 첫 번째 판의 주요 기사의 기초가 되었다.[3] 1931년에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도 게재되었다.

"다나카 상주문"은 미국의 전쟁 시 선전에서 일본의 ''나의 투쟁''에 해당하는 문서로 묘사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시리즈 ''우리가 싸우는 이유''의 에피소드 ''중국의 전투''와 ''전쟁 서곡''은 "다나카 상주문"을 일본의 대미 전쟁 계획 문서로 묘사했다. "다나카 상주문"은 카프라가 전쟁 중에 연출한 ''적을 알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묘사되었다.

이 영화들에서 제시된 일본의 정복 목표 달성을 위한 5단계는 다음과 같다.

단계내용
1만주 정복
2중국 정복
3소련 또는 시베리아 정복
4태평양에 기지 건설
5미국 정복



오늘날 학자들은 그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나카 상주문"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39년 할힌골 전투,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1941년 진주만 공격, 그리고 그 이후의 태평양 전쟁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4] 역사가 바라크 쿠슈너는 다나카 상주문에 여러 역사적 오류가 있어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내용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의 일반적인 목표와 일치했기 때문에 진짜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한다.[5]

1940년, 레온 트로츠키는 소련 정보국이 도쿄의 고위 간첩으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지만, 공개적으로 출판하여 자체 보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내의 자신들의 연락망을 통해 유출했다고 설명했다.[6]

에드윈 P. 호이트는 "다나카 상주문"이 "다나카 총리가 말했고 초국가주의자들이 몇 달 동안 말해 온 것"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썼다.[7] 아이리스 창은 일본 정부가 파벌화되어 있어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1] 역사가 메이리온 해리스는 다나카 상주문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더러운 술책' 중 하나였으며, 서방인들이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속을 정도로 훌륭하게 고안된 가짜 문서"라고 썼다.[2] 윌리엄 G. 비즐리는 "영문 및 중문으로 다양하게 출판된 이 문서의 특성은 그 진위성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8] 일본 방위대학교의 토마츠 하루오 박사는 "다나카 상주문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해 다롄 회의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말한다.[9]

다나카 상주문은 10종류의 중국어판으로 출판되어 중국에 유포되었으며, 1931년에는 상하이의 영어 잡지 『차이나 크리틱』에 영문판 "다나카 메모리얼"이 게재되었고, 동일 내용의 소책자가 구미 및 동남아시아에 배포되었다.[17] 소련코민테른 본부도 193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전문을 게재하여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발행하여 "일본에 의한 세계 정복 구상"의 이미지를 선전했다.[17] 프랑스 국회에서는 1931년 11월 26일 자크 도리오가 문장을 인용하며 연설을 했다.[30]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은 1932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제69회 이사회에서 "일본은 만주 침략을 꾀하고 세계 정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호소하며, 그 근거로 1930년에 중국 국민 정부 기관지에서 위서라고 보도한 다나카 상주문을 진실한 문서로 제시했다.[17]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다나카 상주문이 위서임을 입증해야 했다.

일본 측은 문서의 진위를 문제 삼는 데 그쳤다.[17] 반면, 중국 측은 이 문서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은 일본뿐이며, 문제는 이 내용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일본의 일부 정계에서는 이 내용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며, 일본이 세계 정복을 꾀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국제 여론에 호소했다.

1932년 5월 6일, 뉴욕의 호리우치 총영사는 타임스지에 다나카 상주문 기사를 게재하는 데 대해, 다나카 상주문의 기술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다이쇼 5년의 일중 교섭 담당자 다나카 기이치의 관직, 필리핀 방문 상황 및 습격 사건에 대해 사실 확인을 외무 대신에게 요청했다. 같은 해, 가와카미 기요시는 저서 ''Japan Speaks''에서 이누카이 쓰요시가 지적하는 다나카 상주문의 오류를 게재하여 위서임을 밝히려고 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는 1934년 처녀작 『극동 전선』(''Far Eastern Front'')에서 다나카 상주문에 대해 "1927년 6월, 일본의 문무관을 모아 열린, 장래의 아시아 정책에 관한 회의 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스노는 일본 정부와 이누카이 쓰요시가 다나카 상주문을 위조라고 한 것을 소개하며 "이 각서가 나타내는 생각과 거의 같은 생각을 가졌던 우익에 의해 암살된 늙은 여우(이누카이 쓰요시[31])의 비극적인 죽음은, 설령 각서 자체가 가짜였다 하더라도, 그 배후에 있는 정신의 실체를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가짜 제작자가 이 각서를 날조했다면,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문서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928년이었지만, 그것은 최근 수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진출에 틀림없는 지침서가 되었다."고 말했다. 스노는 『아시아의 전쟁』(''Battle for Asia'') (1941년)에서도 다나카 상주문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4. 내용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간행물 "시사월보"(時事月報, Current Affairs Monthly)의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이는 국민당의 간행물이었다. 이 문서는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이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 있다.

이 문서의 영어 번역본은 1934년 2월 이전에 유포되었으며, 허버트 W. 암스트롱이 발행한 잡지 ''The Plain Truth''의 첫 번째 판의 주요 기사의 기초를 형성했다.[3] 비록 193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처음 게재되었지만 말이다.

"다나카 상주문"은 미국의 전쟁 시 선전에서 일본의 ''나의 투쟁''에 해당하는 문서로 묘사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우리가 싸우는 이유''의 ''중국의 전투''와 ''전쟁 서곡''은 "다나카 상주문"을 일본의 대미 전쟁 계획 문서로 묘사한다. "다나카 상주문"은 카프라가 연출한 ''적을 알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묘사되었다. 이 영화들에서 제시된 일본의 정복 목표 5단계는 다음과 같다.

# 만주 정복

# 중국 정복

# 소련 또는 시베리아 정복

# 태평양에 기지 건설

# 미국 정복

오늘날 학자들은 그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나카 상주문"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39년 할힌골 전투,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1941년 진주만 공격, 그리고 그 이후의 태평양 전쟁과 같은 일본의 행동이 이 계획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4] 바라크 쿠슈너는 다나카 상주문에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오류가 있어 가짜임을 보여주지만, 그 내용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의 일반적인 목표와 일치하여 진짜라는 믿음을 뒷받침했다고 말한다.[5]

1940년, 레온 트로츠키는 이 문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소련 정보국은 도쿄의 고위 간첩으로부터 문서를 입수했지만, 공개 출판으로 자체 보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 미국 내 연락망을 통해 유출했다.[6]

에드윈 P. 호이트는 "다나카 상주문"이 "다나카 총리가 말했고 초국가주의자들이 몇 달 동안 말해 온 것"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썼다.[7] 아이리스 창은 당시 일본 정부가 파벌화되어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1] 메이리온 해리스는 다나카 상주문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더러운 술책' 중 하나였으며, 서방인들이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속을 정도로 훌륭하게 고안된 가짜 문서"라고 썼다.[2] 윌리엄 G. 비즐리는 "영문 및 중문으로 다양하게 출판된 이 문서의 특성은 그 진위성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8] 일본 방위대학교 토마츠 하루오 박사는 "다나카 상주문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해 다롄 회의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말한다.[9]

다나카 상주문은 중국어로 4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문서이다(일본어 원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정복에는 만몽(만주, 몽골) 정복이 필수적이며, 세계 정복에는 중국 정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서로 여겨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38]

{| class="wikitable"

|-

! 항목

|-

| 만몽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자료에 따라 "총론"으로 표기)

|-

| 만몽은 지나(支那, 중국)가 아님

|-

| 내외 몽골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

| 조선 이민의 장려 및 보호 정책

|-

| 신대륙 개척과 만몽 철도

|-

|

세부 내용
洮南중국어에서 索倫에 이르는 철도, 長洮중국어 철도의 일부 철도, 길회 철도, 길회 전선 및 동해를 중심으로 한 국책, 길회선 공사의 천연 이익과 부대 이권, 휘춘, 해림 간 철도, 대 만몽 무역주의, 다롄을 중심으로 대형 기선 회사를 설립하여 동아 해운 교통을 파악할 것



|-

| 금본위제도 실행

|-

| 제3국의 만몽에 대한 투자를 환영할 것

|-

| 만철 회사 경영 방침 변경의 필요성

|-

| 척식성(拓殖省) 설립의 필요성

|-

| 경봉선 연선의 대릉하 유역

|-

| 지나 이민 침입의 방어

|-

| 병원, 학교의 독립 경영과 만몽 문화의 충실

|-

| 부속 문서

|}

마지막 병원과 학교에 대해서는 매우 짧은 문장으로 갑작스럽게 끝나고 있어, 불완전한 문서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5. 진위 논란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간행물 "시사월보(時事月報, Current Affairs Monthly)"의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이는 국민당의 간행물이었다. 이 문서는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다시 수록되었다.[2] 이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 있었다.

> * 세계를 정복하려면 아시아를 정복해야 한다.

> * 아시아를 정복하려면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

> * 중국을 정복하려면 만주와 몽골 고원을 정복해야 한다.

> * 우리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과 남해(南洋) 국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이다.

> * 그렇다면 세계는 동아시아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문서의 영어 번역본은 1934년 2월 이전에 유포되었으며, 같은 해 2월 허버트 W. 암스트롱이 발행한 잡지 ''The Plain Truth''의 첫 번째 판의 주요 기사의 기초가 되었다.[3] 1931년 비교적 덜 유통되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처음 게재되기도 했다.

"다나카 상주문"은 미국의 전쟁 시 선전에서 일본의 ''나의 투쟁''에 해당하는 문서로 묘사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시리즈 ''우리가 싸우는 이유''의 ''중국의 전투''와 ''전쟁 서곡'', 그리고 카프라가 연출한 ''적을 알라: 일본''에서 일본의 대미 전쟁 계획 문서로 묘사되었다.

1929년(쇼와 4년) 9월, 다나카 기이치가 상주했다고 하는 국책안을 일본 정부가 입수했으며, 이를 중국 정부가 번역하여 제3회 태평양 문제 조사회 회의(교토 회의)에 제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외무성 아세아국장 아리타 하치로는 이 문서에서 상주가 내대신부가 아닌 궁내대신을 경유하고 있다는 기술, 구개국 조약에 대한 타개책 협의에 사망했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참가하고 있다는 내용, 다나카 기이치의 구미 방문 및 필리핀에서의 습격 사건에 대한 기술 등의 오류를 발견했다. 그래서 회의에서 다나카 상주문이 위서임을 폭로하려 했으나[24], 타국 측의 권고로 중국은 제출을 보류했다. 1929년 12월, 난징에서 잡지 『시사월보』에 한문 번역이, 1931년 9월, 상하이에서 잡지 『China Critic』에 영문 번역이 게재되었다.[46]

1930년(쇼와 5년) 1월 18일, 이시이 주타로 지린성총영사는 幣原 외무대신과 난징 공사에게 '시사월보'에 게재된 "다나카 기이치의 상주문"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반일 기사"가 지린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전보로 보고했다.[27]

2월 9일,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는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장 왕정팅과 회견하여 "다나카 상주문"이 사실무근이므로 단속할 것을 요청했다. 왕정팅은 4월 11일에 "할 수 있는 한 단속을 해야 하며, 책자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쉽사리 철저히 할 수 없는 점이 있다"면서, 오히려 "귀 공문의 설명을 적절히 발표하여 일반의 오해를 푸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답했다.[28] 4월 12일에는 기관지 '중앙일보'에서 "다나카 상주문"의 오류를 보도했고[17][29], 초기에는 중국 정부도 위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7]

1931년(쇼와 6년) 9월 만주 사변이 발발했다. 중국은 이듬해 1932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제69회 이사회에서 "일본은 만주 침략을 꾀하고 세계 정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호소하며, 그 근거로 1930년에 중국 국민 정부 기관지에서 위서라고 보도한 다나카 상주문을 진실한 문서로 제시했다.[17]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다나카 상주문이 위서임을 입증해야 했다.

일본 측은 문서의 진위만을 문제 삼았으나,[17] 중국 측은 이 문서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은 일본뿐이며, 문제는 이 내용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일본의 일부 정계에서 이 내용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며, 일본이 세계 정복을 꾀하고 있다고 국제 여론에 호소했다.

1932년 국제 연맹 [평의회]에서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로 베이징 주재 육군 무관과 중국인의 합작이라고 주장했다.[32] 이에 대해 같은 평의회에서 구웨이쥔은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로, 가령 날조된 것이라도 한 일본인에 의해 날조되었음에 틀림없으며, 이 문제의 최선의 증거는 바로 오늘의 만주에서의 모든 사태라고 답변했다.[33]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다나카 상주문"의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지만,[2][5][15]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일본의 행동이 이 문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여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은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39년 할힌골 전투,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1941년 진주만 공격, 그리고 그 이후의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더욱 굳어졌다.[4]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이 일본의 항복 이후 전범 혐의를 입증할 증거 문서를 찾았을 때, 다나카 상주문에 해당하는 초안이나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원본"은 제시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나카 상주문 입수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5. 1. 위서론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간행물 "시사월보(時事月報, Current Affairs Monthly)"의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이는 국민당의 간행물이었다. 이 문서는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이 문서의 영어 번역본은 1934년 2월 이전에 유포되었으며, 같은 해 2월 허버트 W. 암스트롱이 발행한 잡지 ''The Plain Truth''의 첫 번째 판의 주요 기사의 기초가 되었다.[3] 1931년 비교적 덜 유통되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처음 게재되기도 했다.

"다나카 상주문"은 미국의 전쟁 시 선전에서 일본의 ''나의 투쟁''에 해당하는 문서로 광범위하게 묘사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시리즈 ''우리가 싸우는 이유''의 ''중국의 전투''와 ''전쟁 서곡''은 "다나카 상주문"을 일본의 대미 전쟁 계획 문서로 묘사한다. "다나카 상주문"은 카프라가 전쟁 중에 연출한 ''적을 알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묘사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나카 상주문"은 일본의 행동이 이러한 계획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진위성은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39년 할힌골 전투,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1941년 진주만 공격, 그리고 그 이후의 태평양 전쟁으로 확인된 것처럼 보였다.[4] 역사가 바라크 쿠슈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다나카 상주문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오류가 있어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지만, 그 내용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의 일반적인 목표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 상주문이 진짜라는 믿음과 일치했다.[5]

1940년, 레온 트로츠키는 이 문서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발표했다. 소련 정보국은 도쿄의 고위 간첩으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지만, 공개적으로 출판하여 자체 보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내의 연락망을 통해 유출했다.[6]

저널리스트이자 대중 역사가인 에드윈 P. 호이트는 "다나카 상주문"이 "다나카 총리가 말했고 초국가주의자들이 몇 달 동안 말해 온 것"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썼다.[7] 아이리스 창은 그 당시 일본 정부가 너무 파벌화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1] 역사가 메이리온 해리스는 다나카 상주문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더러운 술책' 중 하나였으며, 서방인들이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속을 정도로 훌륭하게 고안된 가짜 문서"라고 썼다.[2] 마찬가지로, 역사가 윌리엄 G. 비즐리는 "영문 및 중문으로 다양하게 출판된 이 문서의 특성은 그 진위성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8] 일본 방위대학교 국제관계학 외교·전사(戰史)학 교수인 토마츠 하루오 박사는 "다나카 상주문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해 다롄 회의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말한다.[9]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이 일본의 항복 이후 전범 혐의를 입증할 증거 문서를 찾았을 때, 다나카 상주문에 해당하는 초안이나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원본"은 제시된 적이 없다.

상주문의 출처는 여전히 의문이다. 상주문의 초판이 중국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일부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중국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과 같은 중국 측 출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 문서는 소련이 위조한 것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을 유발하여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12] 이 두 가지 이론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통제를 받는 코민테른의 일원이었고, 1930년대부터 소련의 정책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선 선전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상주문의 최초 영어 번역본은 미국 공산당에 의해 제작되어 1931년 12월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게재되었다. 이후 책 형태로 재출판되었다.[13]

1939년, 피터 플레밍은 장제스 국민당 지도자가 참석한 비밀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전략 회의에 대한 가상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본에 유출함으로써 "다나카 상주문"에 대한 "업데이트"를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영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다나카 상주문이 위조된 것임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14]

다나카 상주문은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교과서에서 실제 문서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서양 역사학자들은 이 문서가 위조되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2][5][2][15]

田中上奏문이 어떻게 입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차이즈이칸 설'''


1954년 8월 28일자 홍콩 신문 『자유인』[40]에 게재된 차이즈이칸[41]의 수기 「나는 이렇게 다나카 밀주문을 입수했다」에 따르면, 1928년 6월에 봉천의 왕자정의 의뢰로 정우회 대의원 도코나미 다케지로를 통해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에게 부탁하여 그의 도움으로 궁내성 서고에 잠입하여 상주문의 전문을 베꼈고, 그것을 왕자정이 한역했다는 것이다.[42]

  • '''왕자정 설'''


현대사학자 진위언이 찾아낸 왕자정의 회고록 『일본 양기밀문건 중역본의 내력』(1960년 집필)[43]에 따르면, 대만인 친구(진위언은 차이즈이칸으로 추정)가 모 정당의 간사장 집에서 베껴 쓴 기밀 문서라고 하며 왕자정에게 분할하여 보내온 문서였다. 그 후, 장쉐량의 허가를 얻어 인쇄하고, 그 중 4권을 난징으로 보냈는데 공표되어, 선전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44]

  • '''소련·러시아 공식 설'''


러시아 대외 정보청(SVR)의 공식 설에 따르면, 1927년 9월 서울에 부임한 이반 치차예프 총영사(실제로는 OGPU 외국과 지국장)가 코드네임 "아포"를 통해 입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7]

레프 트로츠키가 1940년에 발표한 회상에 따르면, 1925년에 GPU의 일본인 협력자를 통해 일본의 기밀 문서를 입수하여 소련 공산당정치국 회의에서 보고했으며, 미국의 협력자를 통해 최종적으로 그것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외교에 관여했던 인물들의 다나카 상주문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 시게미츠 마모루: 중국 대리 공사 당시 중국 정부에 다나카 상주문의 단속을 요청했다.


> (요약) 일본 군부의 극단주의자 의견이 변경된 것. 일본의 행동은 마치 다나카 상주문을 교과서로 삼아 진행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 이시이 쥬타로: 지린 총영사 당시, 다나카 상주문이 『시사월보』 12월호에 게재된 것을 幣原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


> (요약) 훗날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한 일본인이 써서 수만 엔에 중국 측에 팔아넘긴 것. 만주 사변~태평양 전쟁에서 이 창작물이 거의 그 줄거리대로 실현되었다.

5. 2. 진본/실존설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중국 간행물 "시사월보"(時事月報, Current Affairs Monthly)의 난징 판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이는 국민당의 간행물이었다. 이 문서는 1931년 9월 24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영문 간행물 "China Critic"에 재수록되었다.[2]

이 문서의 영어 번역본은 1934년 2월 이전에 유포되었으며, 허버트 W. 암스트롱이 발행한 잡지 ''The Plain Truth''의 첫 번째 판의 주요 기사의 기초를 형성했다.[3] (1931년 비교적 덜 유통되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처음 게재됨).

"다나카 상주문"은 미국의 전쟁 시 선전에서 일본의 ''나의 투쟁''에 해당하는 문서로 광범위하게 묘사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시리즈 ''우리가 싸우는 이유''의 ''중국의 전투''와 ''전쟁 서곡''은 "다나카 상주문"을 일본의 대미 전쟁 계획 문서로 묘사한다. 카프라가 전쟁 중에 연출한 ''적을 알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묘사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나카 상주문"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39년 할힌골 전투,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1941년 진주만 공격, 그리고 그 이후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행동이 이 계획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4] 역사가 바라크 쿠슈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다나카 상주문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오류가 있어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지만, 그 내용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의 일반적인 목표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 상주문이 진짜라는 믿음과 일치했다.[5]

1940년, 레온 트로츠키는 이 문서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발표했다. 소련 정보국은 도쿄의 고위 간첩으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지만, 공개적으로 출판하여 자체 보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내의 자신들의 연락망을 통해 유출했다.[6]

에드윈 P. 호이트는 "다나카 상주문"이 "다나카 총리가 말했고 초국가주의자들이 몇 달 동안 말해 온 것"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썼다.[7] 아이리스 창은 일본 정부가 너무 파벌화되어 있어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1] 메이리온 해리스는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더러운 술책' 중 하나였으며, 서방인들이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속을 정도로 훌륭하게 고안된 가짜 문서"라고 썼다.[2] 윌리엄 G. 비즐리는 "영문 및 중문으로 다양하게 출판된 이 문서의 특성은 그 진위성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8] 일본 방위대학교의 토마츠 하루오 박사는 "다나카 상주문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해 다롄 회의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말한다.[9]

1927년 여름(6월 27일 - 7월 7일[10]), 다나카는 일본 외무성, 육군성, 해군성, 재무성 관계자들과 "극동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세계 지배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장쭤린을 지원하여 만주를 완충 국가로 삼아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조건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원해야 한다는 대략적인 합의로 끝났다.[11] 다나카 상주문은 이 회의의 비밀 보고서라고 주장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이 일본의 항복 이후 전범 혐의를 입증할 증거 문서를 찾았을 때, 다나카 상주문에 해당하는 초안이나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원본"은 제시된 적이 없다.

상주문의 출처는 여전히 의문이다. 초판이 중국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일부 일본 역사학자들은 중국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과 같은 중국 측 출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 문서는 소련이 위조한 것으로, 중일 간의 전쟁을 유발하여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의도였다.[12] 이 두 가지 이론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일원이었고, 1930년대부터 소련의 정책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선 선전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상주문의 최초 영어 번역본은 미국 공산당에 의해 제작되어 1931년 12월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잡지에 게재되었고, 이후 책 형태로 재출판되었다.[13]

1939년, 피터 플레밍은 장제스가 참석한 비밀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전략 회의에 대한 가상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본에 유출함으로써 "다나카 상주문"에 대한 "업데이트"를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다나카 상주문이 위조된 것임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14]

다나카 상주문은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교과서에서 실제 문서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서양 역사학자들은 위조되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2][5][2][15]

田中上奏문 입수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일화구락부의 『중국인이 본 일본의 만주·몽골 정책』에는 "여일장(余日章)이 50000JPY을 들여 일본에서 원본 문서를 입수하여 영어로 번역, 제3회 태평양문제연구회 회의에 제출하려 했으나, 타국 측의 권고로 보류했다. 그러나 영문 번역본은 여러 외국에 배포되었다."라고 적혀 있다.[39]
  • 고지마 죠의 『일중전쟁 1』에 따르면, 1954년 8월 28일자 홍콩 신문 『자유인』[40]에 게재된 차이즈이칸[41]의 수기에는 1928년 6월 봉천의 왕자정의 의뢰로 정우회 도코나미 다케지로를 통해 마키노 노부아키에게 부탁하여 궁내성 서고에 잠입, 상주문의 전문을 베껴 왕자정이 한역했다고 한다.[42] 궁내성 잠입 경위는 자세히 쓰여 있지만, 오류나 의심스러운 기술이 보여 신뢰를 잃게 한다. 왕자정은 장쉐량 밑에서 일했으며, 일본 유학 경험이 있고, 후에 국민정부 외교부 상무차장(1930-1931)이 되었다.
  • 진위언이 찾아낸 왕자정의 회상록 『일본 양기밀문건 중역본의 내력』(1960년 집필)[43]에 따르면, 대만인 친구(진위언은 차이즈이칸으로 추정)가 모 정당 간사장 집에서 베껴 쓴 기밀 문서를 왕자정에게 분할하여 보내왔다. 내용이 제일급이고 일본의 만몽 정책과도 일치하여 번역했지만, 오자·탈자가 많아 일관성 있는 문장으로 고치는 데 애를 먹었다. 장쉐량의 허가를 얻어 인쇄하여 난징으로 보냈는데 공표되어 선전 재료로 사용되었다.[44] 진위언에 따르면, 회고록에는 일본 낭인과 대만계 일본인 공작원이었던 차이즈이칸 등이 입수한 자료를 1929년 왕자정이 가공하여 상주문을 위조하고 정부 부내에 배포한 경위에 대한 기술이 있다.[45] 『다나카 기이치 전기』를 편집한 다카쿠라 데쓰이치에 따르면, 군 특무 기관에서 일했던 나카무라 유키오가 왕다전(필명: 왕봉생)을 작가로 지목했지만, 다른 인물에 따르면 왕다전은 작가로 생각되지 않으며, 동명의 인물이 장쉐량 밑에 있어서 혼동된 것이라고 한다.[46]


'''소련·러시아 공식 설'''

러시아 대외 정보청(SVR)의 공식 설에 따르면, 1927년 9월 서울에 부임한 이반 치차예프 총영사(실제로는 OGPU 외국과 지국장)가 코드네임 "아포"(러시아인 여성을 아내로 둔 가난한 사무라이 계급 출신)를 통해 입수했다.[47]

에사드 베이(Essad Bey)의 "Histoire du Guépéou"에 따르면, 게페우에는 밀약서 등의 거래소가 설치되어, 외국의 공사관에서 종종 부정확한 비밀 조약을 매수하여 외국 스파이에게 매각했다.

'''트로츠키'''

레프 트로츠키는 1940년에 1925년 GPU의 일본인 협력자를 통해 일본의 기밀 문서를 입수, 소련 공산당정치국 회의에서 보고했으며, 미국의 협력자를 통해 출판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트로츠키는 일본 정부의 행동 자체가 다나카 상주문의 진실성을 증명한다고 한다.

어느 설도 원문 입수 경위를 설명하지만, 원문 작성자 해명에는 별로 연결되지 않는다.

진(秦)의 왕가정 설에서는, 원문이 "모 정당" 관계자 집에서 유출되었다고 하지만, 어떠한 성질의 문서였는지는 쓰여 있지 않다.

원문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은, 시게미쓰 아오이, 이시이 이타로, 마쓰오카 요스케 등의 견해인데, 마쓰오카 요스케는 국제 연맹에서 "나는 그 기록이 베이징에 있는 어떤 공사관 부속 육군 무관에 의해, 어떤 중국인의 묵인하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보고를 접하고 있다... 어떤 일본인이, 도쿄 회의에서의 일본 참가자 측의 행동 계획을 포함한다고 칭하는 비밀 보고의 보고를 기안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이 진실이라는 데 의심을 품고 있지 않다. 그 기록은 중국인에게 50000USD에 팔렸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마쓰오카는 1931년 7월 『움직이는 만주와 몽골』에서 "상주문의 원본은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모 국적이 위조한 것으로 확실한 증거마저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고 언급하며, "일본인 중 어떤 자가 돈벌이를 위해 위조하여 중국인에게 상당한 고가로 팔아넘겼고, 이것을 매입한 중국인은 진본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사람이 허위를 깨달았더라도 스스로 고백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해, 연맹에서의 주장은 자신의 선행 주장을 팽창시킨 내용이 되고 있다.[48]

공사관 부속 육군 무관은 아니었지만, 동방 회의 보고서를 썼다고 보이는 인물은 참모 본부 작전과의 스즈키 데이이치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쇼와사 발굴 3』[49]과 오에 시노부의 『장쭤린 폭살』에 인용된 모리 가쿠의 전기 『모리 가쿠』에는 스즈키 데이이치의 증언 담화가 수록되어 있다.

스즈키에 따르면, 가와모토 다이사쿠나 이시하라 간지 등과 상담하여 적극적인 만주·몽골 정책의 안을 쓰고 있었다.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별개의 토지 구획으로 하고, 일본의 정치적 세력을 넣어 동양 평화의 기초로 한다"는 것이었다. 모리는 내각 설득을 혼자 할 수 없게 되었다. 봉천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와 상담한 결과, "미국 일은 사이토가 잘 알고 있다. 노골적으로 내놓으면 원로, 중신 모두 승낙하지 않을 것 같으니, 오블라트로 감싸야 한다. 사이토와 상담하자"라고 하여, 요시다는 귀국 중이던 뉴욕 총영사 사이토 히로시를 소개, 사이토가 다시 안을 만들었다.[50] 요시다·모리가 외무성 공작, 요시다는 원로·중신 설득, 모리는 내각·정계, 사이토는 외무성과 미국을 담당하게 되었다.[50]

『다나카 기이치 전기』(1981년)에 따르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을 몰아내려던 야당 입헌 민정당 관계자가 입수, 중국 측에서 발표하게 하려고 중국에 가져갔지만, 민간에서 중국어 번역·발표되었고, 일본인이 알게 된 상주문은 그것이 또 번역된 것이므로, 일본인이 보면 이상한 점이 많다고 한다.

당시 외교에 관여했던 인물들의 다나카 상주문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 시게미츠 마모루: 중국 대리 공사 당시 중국 정부에 다나카 상주문의 단속을 요청했다.

> 일본 군부 극단주의자 중에는 유사한 계획을 품고 있었던 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의견서가 몇몇 사람의 손에 넘어가, 이러한 문서로 바뀌어 선전에 이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나카 각서는 좌우 양극단 분자들의 합작으로 보아 무방하다. 그 후 발생한 동아시아 사태와 일본의 행동은 다나카 각서를 교과서로 삼아 진행된 것과 같아, 외국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어려워졌다.[51]

  • 이시이 쥬타로: 지린 총영사 당시, 다나카 상주문이 『시사월보』 12월호에 게재된 것을 幣原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

> 회의는 내가 관여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경과의 대략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동방 회의는 다나카 상주문과 같은 대륙 침략 계획을 협의한 것이 아니라, 이 상주문은 분명히 누군가의 창작이었다. 훗날 소문에 따르면, 한 일본인이 써서 수만 엔에 중국 측에 팔아넘긴 것이라는 설이었다.

만주 사변,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이 창작이 거의 그 줄거리대로 실현된 것은 경탄을 금치 못하며, 창작자의 착상의 비범함과 비전의 광대함이 새삼 돌이켜졌다.[52]

6. 도쿄 재판에서의 다나카 상주문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은 국제 연맹에서 다나카 상주문을 근거로 일본이 만주 침략과 세계 정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7] 일본은 이 문서가 위서임을 입증해야 했다.[17] 반면 중국은 문서의 진위보다 내용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제 여론에 호소했다.

1932년 미국의 가와카미 기요시는 저서 ''Japan Speaks''에서 이누카이 쓰요시가 지적하는 다나카 상주문의 오류를 들어 위서임을 주장했다.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1934년 저서 『극동 전선』(''Far Eastern Front'')에서 다나카 상주문이 1927년 회의 후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그는 일본 정부와 이누카이 쓰요시가 위조라고 주장했지만, 이누카이 쓰요시가 우익에게 암살당한 것은 문서 배후의 정신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31]

다나카 상주문은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의 침략 의도를 설명하는 전시 선전에 활용되었고, 포츠담 선언에 반영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서 국제 검찰국(IPS)은 다나카 상주문을 찾았으나, 하토야마 이치로와 전 미국 국무부 극동 국장 J. 발렌타인이 위조 문서임을 주장하여 탐색을 포기했다.[34]

1946년 도쿄 재판에서 친더춘은 다나카 상주문의 진실성은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의 행동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35] 하야시 이치로 변호인의 질문에 친더춘은 문서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답했다.[36] 일본 측 증인 모리시마 모리토는 다나카 상주문이 가짜임을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37] 결국 다나카 상주문은 도쿄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7. 현재의 평가

"다나카 상주문"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의 대외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는 문서로 널리 알려졌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그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4] 그러나 당시에는 만주 사변, 중일 전쟁, 할힌골 전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진주만 공격 등 일본의 실제 행동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여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4]

역사가 바라크 쿠슈너는 다나카 상주문에 여러 역사적 오류가 있어 가짜임을 명확히 보여주지만, 그 내용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의 일반적인 목표와 일치했기 때문에 진짜라는 믿음이 퍼졌다고 말한다.[5]

1940년, 레온 트로츠키는 소련 정보국이 도쿄의 고위 간첩으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지만, 자체 보안을 위해 미국 내 연락망을 통해 유출했다고 설명했다.[6]

저널리스트 에드윈 P. 호이트는 "다나카 상주문"이 "다나카 총리가 말했고 초국가주의자들이 몇 달 동안 말해 온 것"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평가했다.[7] 아이리스 창은 당시 일본 정부가 파벌화되어 있어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

역사가 메이리온 해리스는 다나카 상주문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더러운 술책' 중 하나"라고 평가했고,[2] 윌리엄 G. 비즐리는 그 진위성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8] 일본 방위대학교 교수 토마츠 하루오는 "다나카 상주문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해 다롄 회의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주장한다.[9]

국제 연맹 이사회에서 중국은 다나카 상주문을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의 증거로 제시하며 국제 여론에 호소했다.[17] 일본은 문서의 진위를 문제 삼았지만,[17] 중국은 사태가 문서 내용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와카미 기요시는 저서 ''Japan Speaks''에서 이누카이 쓰요시가 지적한 다나카 상주문의 오류를 제시하며 위서임을 주장했다.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는 다나카 상주문이 일본 우익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전후 일본에서는 위서설이 유력해졌지만, 누가, 왜 원문을 작성했고, 실제 일본 조정에서 어느 정도 공유되었는지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하타 이쿠히코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위서설이 정착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진본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주류였다.[56]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 측에서도 공식 견해를 재검토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59]

테시마 류이치는 다나카 상주문이 중국 측의 위작이지만, 일본 측 기밀 문서도 포함된 교묘한 공작이었다고 주장한다.[17]

역사학자 에구치 케이이치는 상주문이 위조임을 전제로, 진정한 제작자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49]

작가 나카가와 우스케는 다나카 상주문의 작성자가 일본 정부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이 위서라고 주장해도 실제 행동이 상주문 내용과 유사했기 때문에 진본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다.[61]

8. 다나카 상주문이 등장하는 작품


  • 더 배틀 오브 차이나(1944년) - 미국이 제작한 프로파간다영화. 프랭크 카프라 감독. 소련 영화 『상하이 다큐멘터리』의 영상도 일부 사용되었다.
  • 너의 적, 일본을 알라(1945년) - 미국 육군성 위탁으로 제작된 프로파간다 영화. 프랭크 카프라 감독.
  • 도쿄 스파이 대작전(1945년) - 미국이 제작한 픽션 영화. 프랭크 로이드 감독.
  • 일본의 비극 - 일본의 일본 영화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카메이 후미오 감독. 서두에서 "다나카 상주문"의 이름으로 언급되며, "괴문서"이며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라며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대륙 침략의 실태와 일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The Rape of Nanking
[2] 서적 Soldiers of the Sun
[3] 간행물 The Plain Truth http://www.coghomesc[...] Cog Home School 1934-02-02
[4] 서적 Facing Japan: Chinese politics and Japanese imperialism, 1931–1937 Harvard University Press
[5] 서적 Men to Devils, Devils to Men: Japanese War Crimes and Chinese Justice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Tanaka http://www.marxists.[...] Marxists
[7] 서적 Japan's War The Great Pacific Conflict Cooper Square Press
[8] 서적 Japanese Imperialism 1894–1945
[9] 문서 A Gathering Darkness SR Books
[10] 웹사이트 Japan Begins the March to Disaster http://bevinalexande[...] 2011-06-26
[11] 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12] 문서
[13] 서적 Shared Secrets
[14] 서적 The Deceivers
[15] 문서 The Tanaka Memorial (1927)
[16] 서적 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 Pantheon
[17] 뉴스 産経新聞「第3部 プロパガンダ戦争(3)「田中上奏文」の悪夢再び」 https://web.archive.[...] 2013-04-03
[18] 문서 児島襄『日中戦争1』pp.117-120、北岡伸一「日本の近代5」中央公論社、p71-72。秦郁彦『昭和史の謎を追う (上)』文春文庫、p.24-29.服部龍二「日中歴史認識 田中上奏文をめぐる相剋 1927-2010」東京大学出版会、[[日中歴史共同研究]]2010.
[19] 문서 服部龍二「『田中上奏文』と日中関係」(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編『民国後期中国国民党政権の研究』中央大学出版部、2005年所収)
[20] 문서 服部龍二「「田中上奏文」と日中関係」、劉傑・三谷博・楊大慶編『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日中対話の試み』東京大学出版会、2006年 Daniel A. Farber, Suzanna Sherry "Beyond All Reason: The Radical Assault on Truth in American Law" Oxford University Press Inc, USA 1997 ISBN 978-0195107173 p63
[21] 학술 ロシアにおける「田中上奏文」 : 満州事変をめぐるロシア史学の現状([共通論題2]満州事変前後の日ソ関係,<特集>2005年度大会) https://doi.org/10.1[...] ロシア史研究会
[22] 문서 児島襄『日中戦争1』文春文庫p.83
[23] 문서 『蔣介石秘録』p.453、『森恪』p.601
[24] 문서 児島襄pp.110-111
[25]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1999-12-10
[26] 문서 日華倶楽部pp.2-3,6
[27] 문서 外務省外交史料館『帝国ノ対支外交政策関係一件 第二巻』
[28] 문서 4月11日外務省公電、三八九号
[29] 문서 服部龍二『日中歴史認識』
[30] 문서 ドイツ語版『インプレコル』1931年12月15日付に掲載された〈ヨペ〉署名の論説。筆者は[[国崎定洞]]と推測されている。『社会衛生学から革命へ』[[川上武]]ほか編、勁草書房、1977年による。
[31] 문서 『エドガー・スノー著作集1』筑摩書房、p.36
[32] 문서 ウイロビー『支那事変と日本』[[東亜研究所]]、昭和16年、p.124
[33] 문서 ウイロビー『支那事変と日本』[[東亜研究所]]、昭和16年、p.123
[34] 문서 『現代歴史学と南京事件』p.90
[35] 뉴스 [[東京新聞]]『アジア失楽園 東京裁判報告 第2篇』
[36] 서적 陰謀史観
[37] 서적 陰謀史観
[38] 문서
[39] 간행물 支那人の観た日本の満蒙政策 日華倶楽部
[40] 뉴스 連合報 1953-09-02
[41] 문서
[42] 서적 日中戦争1
[43] 서적 陰謀史観
[44]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上)
[45] 서적 陰謀史観
[46] 서적 評伝・田中義一 平和戦略綜合研究所 1981-02-20
[47] 웹사이트 Внешняя разведка на рубеже 30-х годов http://svr.gov.ru/hi[...]
[48] 웹사이트 田中上奏文をめぐる二三の問題 https://www.jstage.j[...] J-STAGE 2024-09-28
[49] 서적 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東京大学出版会 2006-07-31
[50] 서적 森恪
[51] 서적 昭和の動乱 上 中公文庫
[52] 서적 外交官の一生 -対中外交の回想 太平洋出版 1972
[53] 서적 日中歴史認識 「田中上奏文」をめぐる相克 1927-2010 東京大学出版会 2010-02-22
[54] 서적 田中義一伝記(復刻版、原本は1958年刊) 原書房 1981-02-10
[55] 서적 森恪 森恪伝記編纂会 1941-07-12
[56]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1993-03-30
[57]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58] 서적 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59] 뉴스 北海道新聞 2008-01-09
[60] 서적 日中韓 歴史大論争 文春新書
[61] 웹사이트 日本が侵略戦争をした証拠!?「田中上奏文」 https://www.kk-bests[...] 株式会社 ベストセラーズ 2023-02-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