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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토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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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토리성은 해발 583m의 다카토리산에 축조된 일본의 산성이다. 1332년 오치 구니즈미가 축성한 이래,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1580년 폐성되었다가, 쓰쓰이 준케이가 성채를 구축하며 부활했다. 이후 혼다 도시히사가 성을 재건하고, 우에무라 가문이 메이지 유신까지 다카토리 번의 거성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성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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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토리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다카토리 성의 덴슈 기초
다카토리 성의 덴슈 기초
다른 이름후요 성 (芙蓉城)
다카토리 산성 (高取山城)
다카토리 성 (鷹取城)
종류야마지로 양식의 일본의 성
위치나라현다카토리
역사
건설1332년
건설자오치 씨
혼다 씨
사용 시기남북조 시대
에도 시대
철거1873년
현재 상태유적
소유 및 관리
공개 여부공개
통제 정보
전투 및 사건
문화재 지정
문화재일본의 사적(국가 지정)
성곽 구조
구조연곽식 산성
천수 구조연결식 3중 3층 지하 1층 (현존하지 않음)
축성 및 개축
축성자오치 구니즈미
개축자쓰쓰이 준케이
혼다 도시히사
성주
성주오치 씨
쓰쓰이 씨
혼다 씨
고이데 씨
우에무라 씨
유구
유구돌담
해자
우물 등 다수

2. 역사

다카토리 성은 1332년 남조 측의 오치 구니즈미가 축성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오치 씨의 본성인 가이부키 산성의 지성이었으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 오치 씨의 본성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32년에는 잇코잇키 세력의 공격을 받았으나 쓰쓰이 군의 도움으로 격퇴하였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0년 폐성되었으나, 노부나가 사후 쓰쓰이 준케이1584년 성채를 다시 구축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지배 하에 들어가고, 그의 가신 혼다 도시히사가 1589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근세 성곽의 모습을 갖추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선 혼다 도시마사가 공을 인정받아 다카토리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혼다 가문이 후사 없이 단절된 후, 1640년 우에무라 이에마사가 새로운 성주가 되어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14대에 걸쳐 우에무라 씨 가문이 다카토리 성을 다스렸다. 막말에는 덴추구미의 변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6]

메이지 시대에 들어 1873년 폐성령으로 폐성되었고, 성의 건물들은 대부분 해체되거나 매각되었다. 일부 건물은 인근 사찰이나 개인에게 이축되어 현존한다. 성터는 인적이 드문 산 정상에 위치한 덕분에 인위적인 파괴를 면해 유구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1953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

2. 1. 무로마치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332년 남조에 속했던 오치 구니즈미가 성을 축성한 것이 그 기원이다. 당시 성은 오치 가문의 본성인 가이부키 산성을 보좌하는 지성에 불과했으나, 점차 오치 가문의 지배가 길어지면서 다카토리 성은 오치 가문의 본성이 되었다. 1532년 음력 6월 이모리 성 전투에서 승리한 혼간지 세력이 야마토로 침공해 왔다. 이에 혼간지와 대립관계에 있던 고후쿠지의 승병들이 오치 가문에 가세해 다카토리 성으로 구원을 왔다. 쇼뇨가 이끄는 혼간지 세력이 다카토리 성을 포위해 격전을 펼쳤지만, 다카토리 성의 우군으로 온 쓰쓰이 군에 허를 찔려 퇴각했다.

그 후, 야마토를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0년 야마토 내의 성은 고리야마 성 한 곳으로 정해져 다카토리 성은 폐성되었다. 1583년 음력 8월 다카토리 성주였던 오치 요리히데가 살해 또는 자결하여 오치 가문은 멸문되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은 후, 1584년 야마토를 영지로 한 쓰쓰이 준케이가 지성망 구축의 일환으로 다카토리 성터에 성채를 구축한다.

1585년 쓰쓰이씨는 이가국 우에노성으로 전봉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복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고리야마 성에 입성해 야마토 및 이즈미, 기이를 영지로 삼았다. 다카토리 성은 당초에는 히데나가의 가신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입성했지만, 같은 중신의 반열에 있는 혼다 도시히사로 교체되었다. 1589년 도시히사는 그의 가신 모로키 모로나가에 명하여 새로이 성을 설계해 다시 지었다. 혼마루에는 다몬 망루와 연결된 3층의 대천수와 소천수가, 니노마루에는 다이묘 저택을 조성하고, 성내에는 3층 망루 17기를 두었다. 또, 주변에 무가저택도 정비해, 산기슭에 성하 마을을 조영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죽자, 그의 양자 도요토미 히데야스를 보좌했다. 1595년 히데야스가 1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후, 도시히사의 아들 혼다 도시마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다카토리 1만 5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아이즈우에스기 가문 토벌령을 내렸고, 이에 호응해 아이즈로 출병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이즈에 눈이 쏠린 틈을 타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였고, 마쓰쿠라 시게노부를 대장으로 세워 다카토리 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도시마사의 사촌동생 혼다 마사히로와 영민이 힘을 함쳐 마쓰쿠라 군을 격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시마사는 동군에 속한 전공으로 영지를 인정받았으며 이에 더해 1만 석이 가증되었다. 이로써 다카토리 번이 입번되어 번주의 자리에 올랐다.

2. 2. 에도 시대

1637년 2대 번주 혼다 마사타케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혼다 가문은 단절되었고, 다카토리 번은 에도 막부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다카토리 성은 신조 번주 구와야마 가즈하루가 잠시 관리하였고, 그 후 단바국 소노베 번주 고이데 요시치카가 이어서 관리했다.

1640년 하타모토 신분이었던 우에무라 이에마사가 2만 5천 석의 다이묘로 승격되어 다카토리 성에 부임하였다. 이로써 다카토리 번이 다시 성립되었고, 다카토리 성은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우에무라 씨 가문이 14대에 걸쳐 거주하는 성이 되었다. 막말 시기에는 산 정상에 있던 번주의 거처를 산기슭으로 옮겼는데, 이 거처는 덴추구미의 변 당시 존왕파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6]

2. 3. 메이지 시대 이후

1869년(메이지 2년) 음력 6월 판적봉환에 따라 성은 병부성의 관할로 넘어갔고, 1873년(메이지 6년) 폐성령에 의해 폐성되었다. 성의 건조물 대부분은 입찰을 통해 근처 사찰 등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 건물 불하는 7엔 35전 6리(혹은 100엔이라는 설도 있음)에 낙찰되었으나, 일부만 해체되었다는 기록과, 1887년(메이지 20년) 흑문 불하, 1891년(메이지 24년)경 천수를 포함한 건물 전체가 해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7]

1887년(메이지 20년) 무렵까지는 천수를 비롯한 주요 건조물이 성 안에 남아 있었지만,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에 위치하여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자연적으로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6][7]

매각된 건물 중 일부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남아있다.

  • 이의 문(二の門)은 다카토리초 내에 있는 고지마데라(子嶋寺)의 산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 신어전(新御殿, 번주 저택)의 정문은 마을 내 이시카와(石川) 병원의 정문으로 이축되었다.
  • 마쓰노 문(松ノ門)은 1892년(메이지 25년) 도사(土佐) 초등학교(현 다카토리 초등학교)의 교문으로 옮겨졌으나, 1944년(쇼와 19년) 학교 화재로 일부 손상되었다. 이후 우스이 가문(현 곤고리키 주조)이 해체하여 보존하다가[7] 2004년(헤이세이 16년) 어린이 공원의 정문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확인된 다카토리성의 현존 구조물은 이것들뿐이다.[6]


대부분의 건물은 사라졌지만, 성터의 유구는 인적이 드문 산 정상에 있었던 덕분에 인위적인 파괴를 피하고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6]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가 자라 뿌리가 석벽을 파고들거나, 유지 관리가 충분하지 않아 돌담 일부가 무너지거나 붕괴될 위험이 있는 곳도 있다.

다카토리 성터는 귀중한 성곽 유적으로 인정받아 1953년(쇼와 28년) 3월 31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헤이세이 18년) 4월 6일에는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성터는 긴테쓰 요시노선 쓰보사카야마역에서 도보로 약 6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6]

구 이의 문(고지마데라 산문)


구 이의 문(고지마데라 산문 안쪽)


어린이 공원에 복원된 마쓰노 문


총문터의 석비

3. 성곽 구조

다카토리성은 다카토리 산 정상에 축조된 산성으로, 구루와가 일렬로 연결된 연곽식 구조를 가진다. 산성이면서도 넓은 면적을 확보하고 있으며, 성내 면적은 약 10000m2, 주위는 약 3km에 달한다. 외성까지 포함하면 총 면적 약 60000m2, 주위 약 30km로, 일본 국내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꼽히며 빗추 마쓰야마성, 이와무라성과 함께 일본 3대 산성 중 하나로 불린다.[5]

겐나 원년(1615년) 도쿠가와 막부의 일국일성령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산성으로 인정받아 파괴를 면했으며, 현재까지 석축과 석루(石塁)가 잘 남아 있다.

천수대 아래의 깎아지른 절벽과 산기 쌓기


성의 중심부인 혼마루는 동서 75m × 남북 60m 크기로, 높이 약 8m의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혼마루는 천수, 소천수, 3기의 망루가 다몬 망루(多聞櫓)로 연결된 연립식 천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혼마루 내부에는 어전(御殿) 터와 "남이도(男井戸)"라는 우물 터가 남아있다.

혼마루 터


남이도


혼마루로의 호구


다카토리성 천수대의 아지트


천수대


천수대는 혼마루 북서쪽에 위치하며, 치석 쌓기 방식으로 쌓았고 모서리 부분은 꺾어 쌓기로 마감했다. 천수대 내부에는 약 3m 너비의 굴(穴蔵) 형식 통로가 설치된 특징이 있다.

메이지 20년경의 어성문(오테몬)에서 북 어루를 올려다보는 앵글. 이 사진의 가장 안쪽에 북 어루가 찍혀 있으며, 중상 구조에 천수와 같은 흰 회반죽 총칠, 사각형 격자 창 2개, 상부의 입모야 파풍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에는 일부 "15간 다몬"도 찍혀있다.


혼마루와 니노마루 사이에는 방어를 위해 "북 어루(北櫓)"와 "신 어루(新櫓)"라는 2기의 야구라(망루)가 세워져 있었고, 이 사이를 토담과 "15간 다몬"이 'L'자 형태로 연결하여 우마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니노마루에서 혼마루로 가는 길목에는 나라 분지를 조망할 수 있는 국견 어루(国見櫓) 터가 있다.

니노마루 터


니노마루 동쪽 아래의 석벽


국견 어루터에서 나라 분지를 바라보다


니노마루는 동서 약 65m × 남북 약 60m 크기로, 다몬, 망루, 온천, 니노마루 어전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니노마루 북쪽에는 성의 정문 격인 어성문(御城門)이 외마스(外枡) 형태의 호구 구조로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쪽에는 죽루(竹櫓)가 있었다.

우에무라 가(家)의 나가야


시모야시키(下屋敷) 터


성터 아래쪽에는 다이묘 가문인 우에무라 가(家)의 나가야(長屋)와 한저였던 시모야시키(下屋敷) 터가 남아있다. 시모야시키는 동서 약 80m × 남북 약 90m 크기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으로 나뉘어 사용되었으며 정원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니노마루 방향에서 본 다이코고야구라다이(太鼓御櫓台)와 신고야구라다이(新御櫓台)


혼마루 방향에서 본 다이코고야구라다이와 신고야구라다이


덴슈다이(天守台)에서 본 다이코고야구라다이와 신고야구라다이


혼마루 아래에 있는 문의 초석 터

3. 1. 주요 시설

성은 다카토리 정에서 4km 정도 남동쪽에 있는 높이 583m, 비고 350m의 다카토리 산 정상에 축성되었다. 성하 마을에서 본 성의 모습은 “동남쪽 다카토리에 눈이 온 것인가, 눈이 아니라 그건, 도사의 성”이라는 말로 묘사된다. 도사는 다카토리의 옛 지명이다.

성의 구루와는 일렬로 연결된 연곽식 산성이며, 산성임에도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성내 면적은 약 10000m2, 주위는 약 3km이며, 외성을 합치면 총 60000m2, 주위는 약 30km에 달한다. 이는 일본의 산성 중 가장 넓은 규모로, 이 때문에 빗추 마쓰야마 성, 이와무라 성과 함께 일본 3대 산성으로 꼽힌다.

우에무라 시대에는 각각 3중 천수와 소천수를 비롯하여 22기의 망루, 5기의 다몬 망루, 33동의 문, 2900m의 토담, 3600m의 석축, 9개의 교량, 5개의 호리키리로 구성된 산성이었다. 『다카토리 정사』에 따르면, 근세적인 개축은 1581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혼다 토시히사가 조선 출병에서 귀국한 문록 2년(1593년), 그리고 우에무라 씨가 입봉한 1640년경에는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우에무라 씨가 통치하는 약 200년 이상 동안 큰 소실이나 재해 없이 부분적인 수축만 이루어졌을 뿐, 기본적인 형태는 유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야마토 다카토리성 연구』에 따르면, 당시 성의 석축을 다시 쌓으려면 에도 막부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다카토리성에 관해서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로부터 특별히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우에무라 씨가 미카와국 거성 시절의 마쓰다이라씨의 고참 후다이였고, 산 위에 있어 해마다 파손이 많을 것을 고려하여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서의 개수는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혼마루 부분의 크기는 동서 75m × 남북 60m이며, 높이 약 8m의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서쪽에는 3중 3층의 "소천수"가 있으며, 크기는 동서 12m × 남북 13m이다. 동쪽에는 2중 3층의 "초연어루"가 있고, 호구 부근, "구족어루" 맞은편에는 평어루인 "연어루"가 있다. 이처럼 혼마루는 1기의 천수와 1기의 소천수, 3기의 망루가 다문루로 연결된 연립식 천수의 성곽 배치였다.

이 5기의 망루로 둘러싸인 혼마루 부분에는 "혼마루 대광간"이라는 장소에 초석이 여러 곳 있어 1동의 어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어전 터 주변에는 동서 약 5m × 남북 약 3m의 "남이도"라는 우물이 있다. 다카토리성의 우물은 다수 발견되지만, 대부분 빗물이나 용수를 모은 것이고 지하 수맥까지 도달한 우물은 거의 없다.

혼마루에서 바라본 조망


천수대의 돌담은 치석 쌓기 방식이며, 모서리 부분은 꺾어 쌓기로 반전이 없는 공법이다. 천수는 혼마루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천수대에는 통로가 약 3m의 굴을 설치하고 있다. 이러한 굴 형식을 가진 천수대는 견산성, 후쿠치야마성, 기후성 등에서도 볼 수 있으며, 천수대로서는 발전기의 축성 양식으로 여겨진다. 천수의 크기는 동서 약 16m, 남북 약 14m 규모로 "어천수"라고 불렸다. 외관은 『와슈 다카토리성 산노 에즈』에 따르면, 1층은 지붕창, 2층 중앙에 돌출창 형식, 3층에는 처마 당파풍이 있으며, 외벽은 흰 회반죽 총 칠마름질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외관 3층, 지하 1층의 천수로 추정된다. 또한, 천수대의 동쪽에는 부요대(附櫓台)가 속해 있으며, 2층의 "구족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혼마루와 니노마루 사이에는 2기의 야구라가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남쪽의 2중 2층 "북 어루"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마찬가지로 2중 2층 "신 어루"이다. 그 사이를 토담으로 연결하고, 북 어루에서 "15간 다몬"이 이어져 "L자" 형태를 이루었다. 이 건물군은 천수를 방어하고 우마다시(馬出, 성문 앞 방어 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석벽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쇼와 49년(1974년)에 수리되었기 때문이다. 신 어루는 북 어루 뒤쪽에 있어 옛 사진에는 모습이 없지만, 석벽 구조 등으로 보아 비슷한 규모의 야구라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 어루대에는 초석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노마루에서 혼마루로 가는 도중에는 국견 어루(国見櫓)가 있었다. 야구라는 사라졌지만 석벽 위에서는 이름 그대로 나라 분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오사카시, 롯코산, 히에이산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니노마루의 크기는 동서 약 65m × 남북 약 60m이다. 주요 건축물로는 니노마루를 지키는 북쪽 중앙의 "13간 다몬"과 "서강각 망루", 북서쪽의 "화지견 망루", 남서쪽의 "객인 망루", 남쪽 중앙의 "온천", 그리고 중앙의 "니노마루 어전"이 있었다. 온천은 2층 건물로, 합각지붕에 감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지붕(柿葺)이었으며, 석벽을 따라 지어져 요시노산 방향을 바라보는 풍류적인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니노마루 어전"에는 현관, 어서원, 대광간, 탕전, 정원, 복도, 변소 등의 평면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대광간은 혼마루 대광간과 같은 규모였고, 그 상단에는 "군 의논처"라는 장소가 있었으며, 남쪽에는 어서원이 2실 있어 중요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니노마루 어전의 현관은 다카토리 국민학교로 이전되었지만, 1944년에 소실되었다.

니노마루 어전 하단의 북쪽에는 통로 폭 약 8m의 외마스(外枡) 형태의 호구가 있으며, "어성문(御城門)"이라는 문이 있었다. 이는 다카토리성의 오테몬에 해당하며, 안쪽에는 평루인 "죽루(竹櫓)"가 놓여 있었다. "죽루"는 쳐들어온 적의 발을 미끄러지게 하는 대나무를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상단에 있는 태고어루(太鼓御櫓)의 --은 이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다.

다카토리성 터에서 1200m 내려가면 우에무라 가문의 나가야(長屋, 길게 지은 하인들의 숙소)가 있다. 또한 그 남쪽 구릉에는 "시모야시키(下屋敷)" 또는 "고텐아토(御殿跡)"라고 불리던 한저가 있었다. 크기는 동서 약 80m × 남북 약 90m로, 북쪽 절반은 공적인 장소, 남쪽 절반은 사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다. 벤텐 연못과 시아시후테이(四阿紫府亭)라는 정자도 설치되었다. 문 동쪽에는 수로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3. 2. 특징

성은 다카토리정 시가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다카토리 산 정상(해발 583m, 비고 350m)에 축조된 산성이다. 산 정상에는 흰 회반죽을 칠한 천수각과 29개의 망루가 늘어서 있어, 성하 마을에서는 그 모습을 보고 "''다쓰미 다카토리 눈인가 하면, 눈이 아닌 도사의 성''"이라고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도사'는 다카토리의 옛 이름이다.

성의 구루와는 일렬로 이어진 연곽식(連郭式) 산성 형태를 띠고 있으며,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성 내부 면적은 약 10000m2, 성곽 둘레는 약 3km에 달하며, 외성까지 포함하면 총 면적은 약 60000m2, 전체 둘레는 약 30km에 이른다. 이는 일본의 산성 중 가장 큰 규모로, 빗추 마쓰야마성(오카야마현), 이와무라성(기후현)과 함께 일본 3대 산성 중 하나로 꼽힌다.[5] 겐나 원년(1615년) 도쿠가와 막부의 일국일성령에도 불구하고, 다카토리성은 중요한 산성으로 여겨져 파괴를 면했으며, 현재까지도 석축과 석루(石塁)가 잘 남아 있다. 그러나 천수각, 어전(御殿), 망루, 문, 토담 등 건물의 복원 계획은 없다.

우에무라씨 시대에는 3층 천수와 소천수(小天守)를 비롯하여 망루 22기, 다몬 망루(多聞櫓) 5기, 문 33동, 토담 2900m, 석축 3600m, 교량 9개, 호리키리(堀切, 능선을 끊어 만든 방어 시설) 5개로 구성된 복합적인 산성이었다. 『다카토리 정사(高取町史)』에 따르면, 근세적인 개축은 1581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혼다 도시히사(本多利久)가 임진왜란에서 귀국한 분로쿠 2년(1593년), 그리고 우에무라씨가 성주로 들어온 1640년경에 기본적인 구조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에무라씨가 약 200년 이상 통치하는 동안 큰 소실이나 재해 없이 부분적인 수리가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우에무라씨가 미카와국 시절부터 마쓰다이라씨를 섬겨온 후다이 다이묘 가문임을 고려하고, 산 위에 위치하여 해마다 파손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여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며 특별히 개수를 허가했다고 전해진다. 이 덕분에 현상 유지를 위한 보수가 용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수대는 혼마루(本丸) 북서쪽에 위치하며, 돌담은 치석 쌓기 방식으로 쌓았고 모서리 부분은 꺾어 쌓기로 처리했다. 천수대에는 통로 역할을 하는 약 3m 너비의 굴(穴蔵)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굴 형식의 천수대는 견산성, 후쿠치야마성, 기후성 등에서도 볼 수 있으며, 천수대 발전 과정의 한 양식으로 여겨진다. 천수는 "어천수(御天守)"라고 불렸으며, 동서 약 16m, 남북 약 14m 규모였다. 『와슈 다카토리성 산노 에즈(和州高取城山之絵図)』에 따르면 외관은 3층, 지하 1층 구조로 추정되며, 1층에는 지붕창, 2층 중앙에는 돌출창(出窓) 형식, 3층에는 처마 당파풍(軒唐破風)이 있었고, 외벽은 흰 회반죽으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천수대 동쪽에는 부요대(附櫓台)가 있어 2층짜리 "구족 망루(具足櫓)"가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곽담화회에서는 다카토리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한다.

# 높은 표고의 산성이지만 근세 시설을 갖춤: 센고쿠 시대 이전의 산성은 단순한 요새 형태가 많았으나, 근세에는 평지나 낮은 언덕으로 성의 중심이 옮겨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카토리성처럼 높은 산 위에 있으면서도 석축, 천수, 망루, 문, 전사(殿舎, 거주 건물)까지 갖춘 근세 성곽 시설을 완비한 예는 드물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특별 허가 덕분에 에도 시대 내내 건물을 유지하고 보수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 독특한 성곽 배치와 호구(虎口) 구성: 다카토리성은 산성이면서도 넓은 부지를 활용한 연곽식 배치를 하고 있다. 높은 지대에 있음에도 천수, 망루, 문 등을 건설할 공간적 여유가 있어 평산성과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특히 부등변 사다리꼴 형태의 혼마루 모서리에 3층 천수, 소천수, 2층 망루를 배치하고 주변을 다몬 망루로 둘러싼 점은 와카야마성과 유사하다. 이는 하시바 히데나가가 야마토, 기이, 이즈미 3국의 태수가 되었을 때, 와카야마성에는 구와야마 시게하루를, 다카토리성에는 자신의 가신인 혼다 도시히사를 배치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천수와 소천수가 함께 존재함: 산성에 천수가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소천수까지 갖춘 예는 거의 없다. 스모토성의 경우 천수 옆에 소천수대가 있었으나 실제 소천수가 세워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산성은 기본적으로 조망이 뛰어나 근세 산성 중에는 천수조차 없는 경우도 많은데, 다카토리성은 3층 천수 외에 한 단계 작은 3층 소천수까지 있었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불분명하나 혼다 도시히사 시대부터 우에무라씨가 입성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추정된다.

# 많은 망루 수와 독특한 명칭: 다카토리성은 망루 수가 매우 많다. 천수와 소천수를 포함하여 3층 망루가 6동, 2층 망루가 7동이나 있었으며, 모두 흰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히메지성과 비슷한 외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등자 망루(鐙櫓), 구족 망루(具足櫓), 십방 야구라(矢倉), 불의 엿보기 망루(火之見櫓), 손님 망루(客櫓), 소성 망루(小姓櫓) 등 독특한 이름의 망루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 외에도 니노몬(二ノ門) 밖의 오테스지(大手筋, 성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와 오카구치몬(岡口門)이 갈라지는 지점에는 아스카 마을에서 운반해 온 원숭이 모양의 석상인 원석(猿石)이 있다.

4. 현대의 다카토리성

1873년 다카토리성은 폐성되었고, 문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인근 사찰 등에 경매로 팔렸다.[6] 1887년경까지 천수각 등 주요 건물이 성 안에 남아 있었으나,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정상에 위치하여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연적으로 붕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니노몬 문은 다카토리 마을 고지마데라의 산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이묘 저택의 정문은 마을의 이시카와 클리닉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다. 마쓰노몬 문은 1892년에 다카토리 초등학교로 옮겨졌고, 2004년에는 어린이 공원의 정문으로 복원되었다. 이것이 다카토리 성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조물이다.[6] 그러나 산에 있는 석벽 유적은 인위적인 훼손을 거의 받지 않아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6]

성터는 긴테쓰 요시노 선 쓰보사카야마 역에서 도보로 60분 거리에 있다.[6]

4. 1. 문화재



메이지 2년(1869년) 6월, 판적봉환에 따라 병부성 관할이 되었고, 메이지 6년(1873년)에 폐성되었다. 입찰을 통해 건물의 대부분은 인근 사찰 등에 팔려나갔다. 메이지 20년(1887년)경까지 천수를 비롯한 주요 건물은 성 안에 남아 있었지만,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에 있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자연적으로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설에 따르면, 메이지 6년(1873년) 건물 불하가 이루어져 7엔 35전 6리(100엔이라는 설도 있음)에 낙찰되었으나 일부만 해체되었고, 메이지 20년(1887년) 흑문이 불하되고, 메이지 24년(1891년)경 천수 이하 건물 전체가 해체되었다고도 한다.[7]

성 건물 중 일부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남아있다.

  • 이의 문: 마을에 있는 고지마데라의 산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 신어전(번주 하저택) 정문: 마을 내 이시카와 병원의 정문으로 옮겨졌다.
  • 마쓰노 문: 1892년 (메이지 25년)에 도사 초등학교(현 마을립 다카토리 초등학교)의 교문으로 이축되었다. 1944년 (쇼와 19년) 초등학교 화재로 일부 손상되었으나, 우스이 가(이세야·현재의 곤고리키 주조)가 해체하여 보존하다가[7] 2004년 (헤이세이 16년) 어린이 공원의 정문으로 복원했다.


이 외에 하저택 정문을 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이 있었으나 해체되어 석비만 남아 있다. 확인된 다카토리성의 현존 구조물은 이 세 가지가 전부이다.

대부분의 건물은 사라졌지만, 성터 유구는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에 위치한 덕분에 인위적인 파괴를 피하고 거의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가 자라 뿌리가 돌담을 파고들거나, 유지 관리가 충분하지 않아 돌담 일부가 무너지거나 붕괴 위험이 있는 곳도 있다.

다카토리성 터는 귀중한 성곽 자료로 인정받아 쇼와 28년(1953년) 3월 31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헤이세이 18년(2006년)에는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4. 2. 기타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으로 병부성 관할이 되었고, 메이지 6년(1873년)에 폐성되었다. 이후 성의 건물 대부분은 입찰을 통해 인근 사찰 등에 매각되었다. 메이지 20년(1887년)경까지 천수를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성 안에 남아 있었으나,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에 위치하여 관리되지 않아 자연적으로 붕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메이지 6년(1873년)에 건물 불하가 이루어져 7엔 35전 6리(혹은 100엔)에 낙찰되었으나 일부만 해체되었고, 메이지 20년(1887년) 흑문 불하, 메이지 24년(1891년)경 천수 이하 건물 전체가 해체되었다는 설도 있다.[7]

이전된 건물 중 이의 문(니노몬)은 다카토리 마을의 고지마데라 산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어전(번주 하저택) 정문은 마을 내 이시카와 병원의 정문으로, 마쓰노 문은 1892년 다카토리 초등학교(구 도사 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축되었다. 마쓰노 문은 1944년 초등학교 화재로 일부 손상된 후, 우스이 가(곤고리키 주조)에서 해체 보존하다가 2004년 어린이 공원의 정문으로 복원되었다.[7] 이것들이 현재 확인된 다카토리성의 현존 구조물이다.

대부분의 건물은 사라졌지만, 성터는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에 위치한 덕분에 인위적인 훼손 없이 석벽 등의 유구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6] 그러나 수목이 성장하고 뿌리가 뻗어나가거나, 유지 관리가 충분하지 않아 돌담의 형태가 무너지거나 붕괴 위험이 있는 곳도 있다.

성터는 귀중한 성곽 자료로서 쇼와 28년(1953년) 3월 31일에 국사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헤이세이 18년(2006년)에는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되었다. 성터는 긴테쓰 요시노 선 쓰보사카야마 역에서 도보로 60분 거리에 있다.[6]

2012년, 지역 자치회와 시민 단체가 35,679개의 알루미늄 캔을 사용하여 다카토리성 천수를 모델로 한 높이 4.1m의 작품을 만들어[8], "캔 사용 개수가 가장 많은 조형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9]

참조

[1] 웹사이트 Takatori Castle http://www.jcastle.i[...] JCastle, Guide to Japanese Castles 2016-06-25
[2] 웹사이트 Takatori Castle Profile http://www.jcastle.i[...]
[3] 웹사이트 高取城跡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4-10-25
[4] 웹사이트 Japan Castle Foundation https://web.archive.[...]
[5] 웹사이트 Site of Takatori Castle: the Best Mountain Castle of Japan http://www.city.kash[...] Asuka Area Administrative Area 2016-06-25
[6]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7] 서적 城 〔5〕近畿 毎日新聞社 1996
[8] 뉴스 アルミ缶「城」、ギネス認定…製作は還暦以上 http://www.yomiuri.c[...] 読売新聞 2012-10-11
[9] 문서 従来の記録は[[ローマ]]のビール会社が作ったラグビーボールの作品で使用した2万76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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