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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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홍수는 1650년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휩쓴 일련의 전쟁과 침략을 일컫는 역사적 사건이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로 시작되어, 러시아 차르국의 침공, 스웨덴 제국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폴란드는 국왕의 망명, 스웨덴의 점령, 내부 분열을 겪었으나, 야스나 고라 수도원에서의 저항과 봉기를 통해 반격에 나섰다. 트란실바니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 외세의 개입과 동맹 속에서 올리바 조약(1660년)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종결하고, 안드루소보 조약(1667년)으로 러시아에 좌안 우크라이나를 할양하며 대홍수는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폴란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종교적 관용의 종식, 인구 감소, 영토 손실, 국제적 위상 약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대홍수는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과 외세 침략, 국가적 위기, 막대한 피해, 장기적인 영향 등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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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역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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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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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대홍수 |
폴란드어 명칭 | Potop |
스웨덴어 명칭 | Svenska syndafloden |
폴란드-러시아 대홍수 | Potop szwedzko-rosyjski |
분쟁 정보 | |
분쟁 | 대홍수 |
전쟁의 일부 | 북방 전쟁 제2차 북방 전쟁 및 1654년-1667년 러시아-폴란드 전쟁 |
전투 기간 | |
기간 (넓은 의미) | 1648년 1월 25일 – 1666년 |
기간 (스웨덴 대홍수) | 1655년 – 1660년 5월 3일 |
장소 | |
장소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결과 | |
결과 | 올리바 조약 |
영토 변화 | 스웨덴령 리보니아가 연방에서 스웨덴으로 공식 양도됨 코사크 수장국이 연방과 러시아로 분할 (안드루소보 휴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1656–1658) 우안 코사크 크림 칸국 오스트리아 (1657–1667) 브란덴부르크 (1657–1667) 덴마크-노르웨이 네덜란드 공화국 |
교전국 2 | 스웨덴 러시아 (1654–1656, 1658–1667) 브란덴부르크 (1656–1657) 좌안 코사크 트란실바니아 (1656–1667) 몰다비아 왈라키아 리투아니아 지지자 |
지휘관 | |
지휘관 1 |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 빈첸티 고시에프스키 파베우 얀 사피에하 메흐메드 4세 기라이 |
지휘관 2 | 칼 10세 구스타브 아돌프 요한 아르비드 비텐베르크 프리드리히 빌헬름 (1656–1658) 보흐단 흐멜니츠키 야누시 라지비우 B. 라지비우 라코치 죄르지 2세 알렉세이 1세 콘스탄틴 셰르반 게오르게 슈테판 |
병력 규모 | |
병력 1 | 69,000명 |
병력 2 | 191,000명 |
사상자 규모 | |
총 사망자 | 3,000,000–4,000,000명 |
2. 역사적 배경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의 봉건 영주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폴란드에서는 "Bohdan Chmielnicki")가 폴란드 마그나트(magnate)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자포리자 카자크 및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많은 파괴를 일으켰으며,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Battle of Berestechko) 후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165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구실로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연방에 공격해 들어와 연방령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
발트 지방을 시작으로 왕위 다툼 등(지그문트 3세 바사가 1599년 스웨덴의 세습왕위를 쫓겨난 이후, 바사 가문의 여러 왕들은 스웨덴 왕위의 탈환을 요구했고, 연방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음에도 적대정책을 계속했다), 기타 이유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스웨덴 제국은 이 상황을 호기로 보고, 다음해 1655년 연방을 침입해 연방의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
두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 공은 혼란한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켰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Polish-Lithuanian union)체제와 연방정부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했다. 그들은 케다이냐이(Kėdainiai)에서 합병에 관한 조약(케다이냐이 합병(Union of Kėdainiai))에 조인했으나, 이 조약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2개의 공국을 분할 독립시켜 라지비우 가문의 공들에게 양도하고, 대공국령의 남은 지역은 스웨덴의 속국(vassal)이 된다는 것이 약속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John II Casimir)는 의지해야 할 귀족계급(''슐라흐타''(szlachta)에게 너무나 인기가 없었고, 그것은 그가 오스트리아의 절대주의에 공감하고 귀족들의 "사르마티즘"(Sarmatism) 문화를 확실히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즉위하기 전 1643년 예수회(Jesuits)의 수도사가 되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가 1646년 폴란드 국왕선거에 나서기 위해 이 성직을 버리고 1648년 선출된 경력을 갖고 있던 군주였다. 그래서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카를 구스타프(얀 카지미에시의 종제였다)측이 폴란드 왕에 어울린다고 보고 있었다. 왕관령 부대법관(Deputy Chancellor of the Crown) 히에로님 라지에요프스키(Hieronim Radziejowski) 및 왕관령 재무장관(Grand Treasurer of the Crown)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Bogusław Leszczyński)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귀족들이 예수회 밖에 지지기반이 없었던 얀 카지미에슈를 버리고 카를 구스타프에게 폴란드 왕이 되라고 권유하였다.
스웨덴 군이 폴란드로 최초 침공을 개시하자, 포즈난(Poznań)의 보이보드(Voivod)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Krzysztof Opaliński)는 대 폴란드(Great Poland)를 카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었고, 기타 지역도 그를 따라 항복했다. 연방령의 서쪽 지역의 대부분이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가자 스웨덴인들은 1655년 아무 저항없이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얀 카지미에슈는 실레지아(Silesia)로 망명했다. 그런데 소수의 지역에서는 저항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야스나 고라(Jasna Góra) 수도원이었다. 1655년 11월부터 1666년 1월까지 계속된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이 신성한 요새의 수비대는 대수도원장(Grand Prior)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Augustyn Kordecki)의 지휘를 받으며 적군을 쫓아 버렸다. 야스나 고라의 승리는 스웨덴을 상대하는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Tyszowce Confederation)이 결성되었다.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해 각지에 산재된 외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봉기한 군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Jan Paweł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카를 구스타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하고, 반전해 공격을 시작했다. 얀 2세 카지미에슈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1656년 르부프(Lwów)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Lwów Oath).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인의 군세를 국외로 쫓아버렸다.
연방은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군세에게 승리했으나 프로이센 공국에 관해서는 폴란드와의 봉신관계를 해제하고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1657년 베라우 조약(Treaty of Wehlau).
1658년 9월 16일 하디아치 조약(Treaty of Hadiach)에 의해 연방의 남동부에 있는 루테니아와 우크라이나 코사크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양국과 동격의 지위로 올려져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Polish-Lithuanian-Ruthenian Commonwealth, 폴란드어:Rzeczpospolita Trojga Narodów, "3개 민족 연합"(Commonwealth of Three Nations)로 변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헤트만 이반 비호프스키(Ivan Vyhovsky)와 코사크의 지도층(스타르시나;starshyna)에 의해 지지 받았던 이 조약은 동유럽의 국제관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이 발효되는 일은 없었다. 이 조약을 무시하고 러시아 차르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1654-1667)은 1667년 1월 13일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종결되었다.(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투르크 전쟁 (1676년-1681년)에서 투르크편에 참여해 오스만과 연결된 크림을 얻는 이익을 얻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 차르국은 좌안 우크라이나(Left-bank Ukraine;드네프르강 왼쪽지역)을 획득하고 우안 우크라이나(Right-bank Ukraine;드네프르 강 오른쪽지역)만이 연방령으로 남게 되었다. 조약은 러시아가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연방에게 반환하기로 하였으나, 1686년 체결된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Eternal Peace Treaty of 1686)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끝나게 만들었다. 그 대부분이 비가톨릭 교도였던 침략자들은 대부분이 가톨릭교도인 폴란드인들에게 적의를 갖고 있었다. 1658년 일어난 프로텐스탄트의 폴란드 형제단(Polish brethren) 추방은 증가한 종교적 비관용의 일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대홍수 시기 수천 명의 많은 유대인들이 반란자 자포리자 카자크(Zaporozhian Cossacks)들에게 포그롬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다.
2. 1. 흐멜니츠키 봉기 (1648년)
1648년 루테니아의 봉건 영주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 마그나트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자포리자 카자크 및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많은 파괴를 일으켰으며,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 후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1654년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구실로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연방에 공격해 들어와 연방령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2. 2.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자포리자 카자크와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상대로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베레스테츠코 전투 이후 일시적인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654년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보호를 명분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하여 연방 영토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발트 지방을 시작으로 왕위 다툼 등 여러 이유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스웨덴 제국은 이 상황을 호기로 보고, 1655년 연방을 침입해 연방의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
두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야누시 라지비우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 공은 혼란한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켰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체제와 연방정부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했다. 그들은 케다이냐이에서 합병에 관한 조약(케다이냐이 합병)에 조인했으나, 이 조약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2개의 공국을 분할 독립시켜 라지비우 가문의 공들에게 양도하고, 대공국령의 남은 지역은 스웨덴의 속국이 된다는 것이 약속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귀족계급(''슐라흐타'')에게 인기가 없었고,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얀 카지미에시의 종제)측이 폴란드 왕에 어울린다고 보고 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얀 카지미에슈를 버리고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폴란드 왕이 되라고 권유하였다.
스웨덴 군이 폴란드로 최초 침공을 개시하자, 포즈난의 보이보드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는 대 폴란드를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넘겨주었고, 기타 지역도 그를 따라 항복했다. 연방령의 서쪽 지역의 대부분이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가자 스웨덴인들은 1655년 아무 저항없이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얀 카지미에슈는 실레지아로 망명했다.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고, 1655년 11월부터 1666년 1월까지 계속된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수비대는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의 지휘를 받으며 적군을 쫓아 버렸다. 야스나 고라의 승리는 스웨덴을 상대하는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었다.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해 각지에 산재된 외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봉기한 군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하고, 반전해 공격을 시작했다. 얀 2세 카지미에슈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1656년 르부프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인의 군세를 국외로 쫓아버렸다.
연방은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군세에게 승리했으나 프로이센 공국에 관해서는 폴란드와의 봉신관계를 해제하고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베라우 조약).
1658년 9월 16일 하디아치 조약에 의해 연방의 남동부에 있는 루테니아와 우크라이나 코사크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양국과 동격의 지위로 올려져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발효되는 일은 없었다. 이 조약을 무시하고 러시아 차르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1654-1667)은 1667년 1월 13일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 차르국은 좌안 우크라이나(드네프르강 왼쪽지역)을 획득하고 우안 우크라이나(드네프르 강 오른쪽지역)만이 연방령으로 남게 되었다. 조약은 러시아가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연방에게 반환하기로 하였으나,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끝나게 만들었다. 1658년 일어난 프로텐스탄트의 폴란드 형제단 추방은 증가한 종교적 비관용의 일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대홍수 시기 수천 명의 많은 유대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다.
2. 3. 제2차 북방 전쟁 (1655년-1660년)
1648년 루테니아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민중 봉기가 러시아-폴란드 전쟁으로 이어지자, 발트 지방에서의 왕위 다툼 등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벌였던 스웨덴 제국은 이 상황을 틈타 1655년 연방을 침공했다.[13] 연방의 동쪽 절반을 러시아가 점령한 상황에서, 스웨덴은 연방의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야누시 라지비우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 공은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 케다이냐이 합병 조약에 조인했다.[13] 이 조약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2개의 공국을 분할 독립시켜 라지비우 가문에 양도하고, 남은 지역은 스웨덴의 속국이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귀족계급(''슐라흐타'')에게 인기가 없었고,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를 지지했다. 히에로님 라지에요프스키,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 등 많은 귀족들이 얀 2세를 버리고 칼 구스타프에게 폴란드 왕이 되라고 권유하였다.
포즈난의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가 대 폴란드를 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었고, 다른 지역도 항복하여 연방령 서쪽 지역 대부분이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갔다. 스웨덴인들은 1655년 바르샤바에 무혈 입성했고, 얀 2세는 실레지아로 망명했다. 그러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고,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승리하며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어 전국적인 봉기가 발생,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통합되어 반격을 시작했다. 얀 2세는 르부프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고(르부프 선서),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 군세를 국외로 몰아냈다.
연방은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군세에게 승리했으나,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베라우 조약).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끝나게 했다.[68] 1658년 프로테스탄트 폴란드 형제단 추방은 종교적 비관용의 일례였다.
3. 스웨덴의 침공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저항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의 봉건 영주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폴란드에서는 "Bohdan Chmielnicki")가 폴란드 마그나트(magnate)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자포리자 카자크 및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은 많은 파괴를 일으키다가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Battle of Berestechko) 후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65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구실로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연방에 공격해 들어와 연방령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 발트 지방을 시작으로 왕위 다툼 등(지그문트 3세 바사가 1599년 스웨덴의 세습왕위를 쫓겨난 이후, 바사 가문의 여러 왕들은 스웨덴 왕위의 탈환을 요구했고, 연방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음에도 적대정책을 계속했다), 기타 이유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스웨덴 제국은 이 상황을 호기로 보고, 다음해 1655년 연방을 침입해 연방의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
두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 공은 혼란한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켰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Polish-Lithuanian union)체제와 연방정부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했다. 그들은 케다이냐이(Kėdainiai)에서 합병에 관한 조약에 조인했으나, 이 조약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2개의 공국을 분할 독립시켜 라지비우 가문의 공들에게 양도하고, 대공국령의 남은 지역은 스웨덴의 속국(vassal)이 된다는 것이 약속되었다(케다이냐이 합병(Union of Kėdainiai).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John II Casimir)는 의지해야 할 귀족계급(''슐라흐타''(szlachta)에게 너무나 인기가 없었고, 그것은 그가 오스트리아의 절대주의에 공감하고 귀족들의 "사르마티즘"(Sarmatism) 문화를 확실히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즉위하기 전 1643년 예수회(Jesuits)의 수도사가 되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가 1646년 폴란드 국왕선거에 나서기 위해 이 성직을 버리고 1648년 선출된 경력을 갖고 있던 군주였다. 그래서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카를 구스타프(얀 카지미에시의 종제였다)측이 폴란드 왕에 어울린다고 보고 있었다. 왕관령 부대법관(Deputy Chancellor of the Crown) 히에로님 라지에요프스키(Hieronim Radziejowski) 및 왕관령 재무장관(Grand Treasurer of the Crown)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Bogusław Leszczyński)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귀족들이 예수회 밖에 지지기반이 없었던 얀 카지미에슈를 버리고 카를 구스타프에게 폴란드 왕이 되라고 권유하였다.
스웨덴 군이 폴란드로 최초 침공을 개시하자, 포즈난(Poznań)의 보이보드(Voivod)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Krzysztof Opaliński)는 대 폴란드(Great Poland)를 카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었고, 기타 지역도 그를 따라 항복했다. 연방령의 서쪽 지역의 대부분이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가자 스웨덴인들은 1655년 아무 저항없이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얀 카지미에슈는 실레지아(Silesia)로 망명했다. 그런데 소수의 지역에서는 저항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야스나 고라(Jasna Góra) 수도원이었다. 1655년 11월부터 1666년 1월까지 계속된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이 신성한 요새의 수비대는 대수도원장(Grand Prior)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Augustyn Kordecki)의 지휘를 받으며 적군을 쫓아 버렸다. 야스나 고라의 승리는 스웨덴을 상대하는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Tyszowce Confederation)이 결성되었다.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해 각지에 산재된 외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봉기한 군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Jan Paweł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카를 구스타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하고, 반전해 공격을 시작했다. 얀 2세 카지미에슈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1656년 르부프(Lwów)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Lwów Oath).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인의 군세를 국외로 쫓아버렸다.
연방은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군세에게 승리했으나 프로이센 공국에 관해서는 폴란드와의 봉신관계를 해제하고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1657년 베라우 조약(Treaty of Wehlau).
3. 1. 스웨덴의 침공 초기 (1655년)
1655년, 스웨덴 제국은 러시아-폴란드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했다. 스웨덴 군대는 스웨덴 포메라니아와 포메라니아 공국에서 출격하여, 군사적 분쟁이 거의 없었던 대폴란드로 진입했다.[14] 노테치 강 유역 우이시체에 모인 대폴란드 귀족군은 전투보다 술을 마시는 데 더 관심이 많았고,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와 안제이 카롤 그루진스키는 항복 여부를 두고 다투었다.[14]우이시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는 칼 구스타프에게 대폴란드를 넘겼다.[14] 1655년 7월 31일 아르비드 비텐베르크가 포즈난을 점령했고, 8월 20일 코닌 근처에서 비텐베르크와 칼 구스타프의 군대가 합류하여 바르샤바로 향했다. 9월 2일 소보타 전투에서 패배한 폴란드군은 9월 4일 우워치를 빼앗겼고, 9월 8일 스웨덴군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최초로 점령하는 외국 군대가 되었다.[15]

칼 10세 구스타프는 벵트 가브리엘손 옥센스티에르나에게 바르샤바 수비를 맡기고 남쪽으로 얀 2세 카지미에시를 추격했다. 9월 16일 자르누프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한 스웨덴군은 9월 25일 크라쿠프를 점령하고, 10월 3일 보이니치 전투에서 다시 승리했다. 공방전 끝에 10월 13일 크라쿠프가 함락되면서, 칼 10세 구스타프는 폴란드의 주요 지역들을 장악하고 프로이센으로 북진했다.[16]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야누시 라지비우와 보구스와프 라지비우가 케다이냐이 연합(1655년 10월 20일)에 서명하여 폴란드와의 연합을 끊었다. 이는 1654년 러시아 침공에 대한 폴란드의 지원 부족을 비난한 결과였다.[14] 빌뉴스(1655년 8월 9일) 함락 후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스웨덴의 보호를 선택했다.[14]
11월 3일 빌뉴스 휴전협정으로 폴란드와 러시아가 반스웨덴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러시아군이 리보니아에서 스웨덴을 공격(러시아-스웨덴 전쟁 (1656년-1658년))하는 동안, 폴란드는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얻었다.[14] 1655년 11월과 12월에 구스타프 오토 슈텐보크 휘하의 스웨덴 군대는 프로이센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지만, 그단스크, 푸크, 말보르크는 함락시키지 못했다.
1655년 11월 18일, 스웨덴군은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포위했지만, 대수도원장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가 이끄는 수비대의 저항에 부딪혔다. 야스나 고라 공방전에서의 승리는 폴란드 저항을 고무시켰고, 각지에서 게릴라 부대가 봉기했다. 1655년 12월 7일 크로스노에서 가브리엘 보이닐로비치 대령의 부대가 스웨덴군을 격파했고,[17] 12월 13일 폴란드군은 노비 송치를 탈환했다. 1655년 말, 남부 소폴란드 상황이 악화되자 스웨덴군은 12월 27일 야스나 고라 포위를 풀었다. 12월 16일 소칼에서 폴란드 왕관 헤트만들은 스웨덴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고, 12월 29일 티쇼프체 연합이 결성되었다.
3. 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저항과 반격 (1656년-1657년)
1655년 야스나 고라 수도원에서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Augustyn Kordecki) 대수도원장(Grand Prior)의 지휘 아래 수비대가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승리하여, 스웨덴에 대항하는 폴란드인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같은 해 12월, 얀 2세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Tyszowce Confederation)이 결성되었다.전국적인 봉기가 발생하여 각지에 산재된 외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봉기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Jan Paweł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되어,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하고 반격했다. 1656년 르부프(Lwów) 대성당에서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Lwów Oath)).
크로스노에 있는 동안 폴란드 국왕은 야스나 고라 공방전의 종식과 야누시 라치빌(Janusz Radziwiłł)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18] 1656년 1월 12일, 요한 2세 카지미에시는 크로스노를 떠나 사흘 후 루보미르스키 가문(Lubomirski family) 소유의 라뉠츠 성(Łańcut Castle)[18]에 도착했다. 2월 10일, 국왕은 리비우(Lwów)에 도착했는데, 리비우는 단치히와 함께 폴란드의 적들에 의해 점령되지 않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두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1656년 3월 11일, 스웨덴군은 산 강을 건너 야로스와프(Jarosław)에 도착했고, 3월 22일, 스웨덴군은 산 강과 비스툴라 강을 따라 북쪽으로 바르샤바로 후퇴했다.[18] 그들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Aleksander Koniecpolski)의 부대가 뒤따랐고, 후퇴하는 동안 침략자들을 지원하던 폴란드군이 편을 바꿔 요한 2세 카지미에시의 군대에 합류했다.
한편 폴란드 국왕은 리비우 맹세(Lwów Oath)(4월 1일)를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성모 마리아의 보호에 맡기고 그녀를 '폴란드 왕관의 여왕'으로 선포했다.
바르샤바 공방전(4월 24일 – 7월 1일)에서 바르샤바는 주요 스웨덴군이 단치히 포위에 바빴기 때문에 아르비드 비텐베르크(Arvid Wittenberg)가 2,000명의 병사와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비텐베르크는 1656년 7월 1일에 항복했다.

1656년 말까지 스웨덴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부분 지역에서 쫓겨났다.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 군세를 국외로 몰아냈다.
3. 3. 외세의 개입과 전쟁의 확산 (1657년-1660년)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의 봉건 영주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폴란드에서는 "Bohdan Chmielnicki")가 폴란드 마그나트(magnate)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자포리자 카자크 및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은 많은 파괴를 일으키다가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Battle of Berestechko) 후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65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구실로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연방에 공격해 들어와 연방령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 발트 지방을 시작으로 왕위 다툼 등(지그문트 3세 바사가 1599년 스웨덴의 세습왕위를 쫓겨난 이후, 바사 가문의 여러 왕들은 스웨덴 왕위의 탈환을 요구했고, 연방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음에도 적대정책을 계속했다), 기타 이유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스웨덴 제국은 이 상황을 호기로 보고, 다음해 1655년 연방을 침입해 연방의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두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 공은 혼란한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켰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Polish-Lithuanian union)체제와 연방정부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했다. 그들은 케다이냐이(Kėdainiai)에서 합병에 관한 조약에 조인했으나, 이 조약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2개의 공국을 분할 독립시켜 라지비우 가문의 공들에게 양도하고, 대공국령의 남은 지역은 스웨덴의 속국(vassal)이 된다는 것이 약속되었다(케다이냐이 합병(Union of Kėdainiai).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John II Casimir)는 의지해야 할 귀족계급(''슐라흐타''(szlachta)에게 너무나 인기가 없었고, 그것은 그가 오스트리아의 절대주의에 공감하고 귀족들의 "사르마티즘"(Sarmatism) 문화를 확실히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즉위하기 전 1643년 예수회(Jesuits)의 수도사가 되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가 1646년 폴란드 국왕선거에 나서기 위해 이 성직을 버리고 1648년 선출된 경력을 갖고 있던 군주였다. 그래서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카를 구스타프(얀 카지미에시의 종제였다)측이 폴란드 왕에 어울린다고 보고 있었다. 왕관령 부대법관(Deputy Chancellor of the Crown) 히에로님 라지에요프스키(Hieronim Radziejowski) 및 왕관령 재무장관(Grand Treasurer of the Crown)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Bogusław Leszczyński)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귀족들이 예수회 밖에 지지기반이 없었던 얀 카지미에슈를 버리고 카를 구스타프에게 폴란드 왕이 되라고 권유하였다.
스웨덴 군이 폴란드로 최초 침공을 개시하자, 포즈난(Poznań)의 보이보드(Voivod)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Krzysztof Opaliński)는 대 폴란드(Great Poland)를 카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었고, 기타 지역도 그를 따라 항복했다. 연방령의 서쪽 지역의 대부분이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가자 스웨덴인들은 1655년 아무 저항없이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얀 카지미에슈는 실레지아(Silesia)로 망명했다. 그런데 소수의 지역에서는 저항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야스나 고라(Jasna Góra) 수도원이었다. 1655년 11월부터 1666년 1월까지 계속된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이 신성한 요새의 수비대는 대수도원장(Grand Prior)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Augustyn Kordecki)의 지휘를 받으며 적군을 쫓아 버렸다. 야스나 고라의 승리는 스웨덴을 상대하는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Tyszowce Confederation)이 결성되었다.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해 각지에 산재된 외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봉기한 군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Jan Paweł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카를 구스타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하고, 반전해 공격을 시작했다. 얀 2세 카지미에슈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1656년 르부프(Lwów)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Lwów Oath).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인의 군세를 국외로 쫓아버렸다.
연방은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군세에게 승리했으나 프로이센 공국에 관해서는 폴란드와의 봉신관계를 해제하고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1657년 베라우 조약(Treaty of Wehlau).
1653년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 지배자 2세 게오르그 2세 라코치(George II Rákóczi)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고,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트란실바니아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19] 게오르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조건으로 폴란드 왕위를 제안받기도 했다.[20] 그러나 스웨덴의 놀라운 승리는 라코치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19] 1656년 5월 18일, 칼 10세 구스타프는 말보르크에서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교환으로 헝가리 왕자에게 루테니아를 제안했다.[19] 한편, 라코치는 이미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1656년 9월 7일 트란실바니아와 자포리자 사크(Zaporizhian Sich)는 전쟁 시 서로를 돕기로 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9] 1656년 12월 8일, 라드노트 조약(Treaty of Radnot)이 체결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칼 10세 구스타프, 보구스와프 라지빌,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 보흐단 흐멜니츠키, 그리고 2세 게오르그 2세 라코치 사이에 분할되었다.[19]
1657년 1월 말, 2만 5천 명의 트란실바니아 군대는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s)을 넘어 메디카(Medyka)로 향했고, 그곳에서 1만 명의 코사크 동맹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19] 새로운 침략자에 맞서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 헤트만의 군대는 남쪽으로 서둘렀다.[19] 동시에(1월 2일), 호이니체 전투(Battle of Chojnice)에서 스웨덴군이 폴란드군을 패배시켰다.[19] 2월 26일,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요한 2세 카지미에르는 칼리시(Kalisz)에서 만나 스웨덴과 트란실바니아 군대의 합류를 막기로 결정했다.[19]

코사크와 합류한 후, 라코치는 리비우를 공격하지 않고 바이츠(Paul Wirtz (Swedish Pomerania)) 지휘하의 스웨덴 수비대의 상황이 절망적인 크라쿠프로 향했다.[19] 3월 21일, 라코치는 타르누프(Tarnów)를 점령했고, 3월 28일 크라쿠프에 도착했다.[19] 고대 폴란드 수도로 가는 길에 트란실바니아-코사크 군대는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하며 수천 명을 살해했다.[19] 군대가 소폴란드(Lesser Poland)를 약탈하는 데 너무 바빴기 때문에 라드노트 조약에 따라 트란실바니아가 통치할 크라쿠프에 도착한 병사는 5,000명에 불과했다.[19] 크라쿠프 스웨덴 수비대를 돕기 위해 2,500명의 병사를 남겨둔 후, 라코치의 군대는 비스툴라 강(Vistula)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19] 1657년 4월 12일, 트란실바니아-코사크 군대는 치멜루프(Ćmielów)에서 칼 10세 구스타프 지휘하의 스웨덴군과 만났다.[19] 합류한 군대는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 지휘하의 폴란드 왕관 군대와 파벨 사피에하 지휘하의 리투아니아 군대를 추격하여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려 했다.[19] 4월 29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군대는 우시체(Łosice)에서 합류했고, 1657년 5월 초 폴란드는 헤트만(hetman) 예르지 세바스찬 루보미르스키 지휘하에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보복 공격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19] 5월 13일, 라코치와 칼 10세 구스타프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Brześć Litewski) 요새를 점령했고, 5월 17일 3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스웨덴, 코사크, 트란실바니아 군대가 바르샤바를 점령했다.[19] 그러나 그 직후 덴마크-스웨덴 전쟁(Dano-Swedish War)이 시작되었고 칼 10세 구스타프는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를 떠났다.[19] 남은 스웨덴 군대는 구스타프 오토 슈텐보크(Gustaf Otto Stenbock)가 지휘했다.[19] 스웨덴군의 철수는 라코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19] 그는 자신의 병사들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19]
바르샤바 전투 (1656년)에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의 활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언급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그들의 봉신이었던 2세 게오르그 라코치가 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고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그 당시 그들은 달마티아를 통해 베네치아를 공격하려고 했다).[21] 그러나 라코치가 그들을 무시하자 그들은 크림 타타르에게 폴란드군을 돕고 라코치를 처벌하라고 명령했다.[21] 그들은 이미 몰다비아와 발라키아에서 라코치의 봉신 총독들을 교체했다.[21]
1657년 6월 20일, 슈텐보크는 칼 10세 구스타프로부터 라코치를 버리고 군대를 이끌고 슈체친(Stettin)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9] 트란실바니아 지배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카르파티아 산맥을 향해 남쪽으로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19] 7월 11일,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부대는 리비우 근처 마기에루프에서 라코치를 물리쳤고, 7월 20일 트란실바니아-코사크 군대는 포돌리아(Podolia)의 차르니 오스트로프 전투(Battle of Czarny Ostrów)에서 궤멸되었다.[19] 사흘 후, 라코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그 조약에서 그는 스웨덴과의 동맹을 깨고, 크라쿠프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그의 군대가 가한 피해에 대한 배상을 약속했다.[19] 7월 26일, 트란실바니아 군대의 잔여 병력은 스칼라트(Skałat) 근처에서 타타르족에게 포위되었다.[19] 라코치 자신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군대는 일시적으로 요한 케메니(John Kemény (prince))가 지휘했지만, 그 역시 타타르족에게 사로잡혔다.[19] 폴란드에서 6개월간의 전투 후, 2만 5천 명의 라코치 군대는 소멸되었고, 생존자들은 모두 타타르족에게 포로로 잡혔다.[19]
8월 30일, 스웨덴 수비대는 크라쿠프를 떠났고, 1657년 8월과 9월 내내 폴란드에 있던 모든 스웨덴군은 프로이센 왕국(Royal Prussia)으로 북쪽으로 이동했다.[19] 그 해 가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남은 스웨덴 병사는 약 8,000명에 불과했다.[19] 스웨덴은 여전히 말보르크, 엘블롱크, 슈툼(Sztum), 브로드니차(Brodnica), 그루지옹츠(Grudziądz), 토룬(Toruń)과 같은 몇몇 프로이센 도시들을 점령하고 있었다.[19] 9월 11일,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1만 1천 명의 오스트리아 군대가 크라쿠프 근처에 집결하여 우치(Płock)로 향했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19] 11월 26일 포즈난에 모인 폴란드 군 사령관들과 요한 2세 카지미에르는 1658년 봄까지 프로이센 왕국의 스웨덴군 공격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19] 1657년 11월 6일, 폴란드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브롬베르크 조약(Treaty of Bromberg)을 체결했다.[22] 이전에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공격했던 프로이센 공국(Ducal Prussia)은 편을 바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보장하는 대신 주권을 보장받았다(1466년 이후 폴란드의 봉토(fief)였다).[22] 이 조약은 역사가 요제프 우워다르스키에 의해 폴란드 역사상 최악의 실수 중 하나로 간주된다.[22]

1658년 봄, 폴란드군은 라이몬도 몬테쿠쿨리 지휘하의 오스트리아 동맹군과 함께, 여러 주요 도시들이 여전히 스웨덴군의 손에 있던 왕립 프로이센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19] 7월 1일, 토루니 공성전이 시작되었다.[19] 요새화된 도시는 바르토트 하르트비히 폰 뷔로우 지휘하의 2400명의 병사들이 방어했다.[19] 폴란드군에는 크시슈토프 그로지츠키, 얀 사피에하,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의 사단이 포함되었다.[19] 게다가 그들은 브롬베르크 조약 이후 편을 바꾼 보구스와프 라지빌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군의 지원을 받았다.[19] 총 2만 5천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토루니를 포위했다.[19] 장기간의 포격전 이후, 주 공격은 11월 16일에서 17일 밤에 이루어졌고, 12월 30일 토루니는 항복했다.[19] 한편,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사단은 덴마크인들을 돕기 위해 덴마크-노르웨이로 향했으며, 이는 제2차 북방 전쟁의 일환이었다.[19] 1658년 10월, 4500명의 폴란드군이 함부르크에 도착했고, 12월에는 폴란드군의 도움으로 콜딩 요새가 함락되었다(콜딩 전투 참조).[19]
1658년 7월 1일, 세임은 스웨덴 침입자와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은 폴란드 형제단의 추방을 명령했다.[19]
1659년, 로렌스 폰 데어 린데 지휘하에 폴란드에 남아 있던 스웨덴군은 말보르크, 그와바 흐단스카, 그루지옹츠, 엘블롱크, 브로드니차 등 주요 왕립 프로이센 요새로 철수했다.[19] 1659년 8월, 폴란드군은 그와바와 그루지옹츠를 점령했고, 그 직후 브로드니차의 기아에 시달리던 스웨덴 수비대는 항복했다.[19] 말보르크 공성전은 계속되었고, 폴란드-브란덴부르크군은 엘블롱크를 봉쇄했다.[19] 12월, 엘블롱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19] 한편, 1658년 말 이반 안드레예비치 코프반스키 (타라루이)와 유리 알렉세예비치 돌고루코프 지휘하의 러시아군이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부대를 공격하면서 폴란드-러시아 휴전은 끝났습니다(폴란드-러시아 전쟁 (1654~1667) 참조).[19] 러시아는 연방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나중에 코노톱 전투와 폴론카 전투에서 패했습니다.[19]
1660년 5월 3일, 폴란드-스웨덴 전쟁을 종식시킨 올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19]
4. 대홍수의 종결과 결과
166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제국 사이에 체결된 올리바 조약으로 대홍수는 끝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까지 러시아의 손에 있던 리보니아의 남동부 지역인 라트갈레 일부만을 유지하였다.[27]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국왕은 자신과 후계자들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생애 말년까지는 스웨덴 국왕 칭호를 유지했다.[27] 스웨덴은 발트해 무역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약속했다.[27]
대홍수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55년 스웨덴 제국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실레지아로 망명했으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어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졌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연방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1657년 스웨덴 군을 몰아냈다.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일으킨 민중 봉기와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1667년 1월 13일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차르국은 좌안 우크라이나(Left-bank Ukraine)을 획득하고, 우안 우크라이나(Right-bank Ukraine)만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으로 남게 되었다. 조약은 러시아가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연방에게 반환하기로 하였으나,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스웨덴의 침략은 연방의 가장 부유한 지역(폴란드 대공국, 폴란드 소공국, 마조프셰, 포메라니아, 쿠야비아, 포들라시에)에 집중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200년 동안 큰 전쟁을 겪지 않았던 곳이다. 스웨덴군은 폴란드의 귀중한 예술 작품, 서적, 귀중품 등을 약탈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반환되지 않았다. 바르샤바 왕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약탈된 물품들은 비스와 강을 통해 스웨덴으로 운송되었다. 올리바 조약에 따라 스웨덴은 약탈품을 반환해야 했지만, 여전히 많은 물품이 스톡홀름 등지에 남아있다. 폴란드 왕들은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약탈품 반환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웨덴군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가 기록, 왕립 도서관, 여러 지역의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를 약탈했다. 약탈된 책들은 웁살라 대학교 도서관, 스톡홀름 왕립 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바르샤바의 궁전들과 성, 교회들도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대홍수로 인해 연방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폴란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스웨덴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폴란드 주요 지역의 인구가 25% 감소했다. 특히 마조프셰는 도시의 70%, 폴란드 대공국은 도시의 60%가 감소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연방 전체 인구는 1648년에서 1660년 사이 30%에서 50%까지 감소했다는 추정도 존재한다. 바르샤바와 같은 도시는 인구가 전쟁 전의 10% 수준으로 급감했고, 크라쿠프, 빌뉴스 등도 큰 피해를 입었다. 국민총생산(GNP) 또한 전쟁 전의 55% 수준으로 감소했다.
대홍수는 폴란드 내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저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가톨릭 교도가 많았던 침략자들은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폴란드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1658년 프로테스탄트 폴란드 형제단 추방은 종교적 불관용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대홍수 시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자포리자 카자크에 의해 학살당했다.
정치, 군사적으로도 연방은 큰 타격을 입었다.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을 통해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영구적으로 할양해야 했다. 대홍수는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러시아의 부상과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1. 올리바 조약 (1660년)
166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제국 사이에 체결된 올리바 조약으로 대홍수는 끝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까지 러시아의 손에 있던 리보니아의 남동부 지역인 라트갈레 일부만을 유지하였다.[27]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국왕은 자신과 후계자들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생애 말년까지는 스웨덴 국왕 칭호를 유지했다.[27] 스웨덴은 발트해 무역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약속했다.[27]대홍수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55년 스웨덴 제국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실레지아로 망명했으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어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졌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연방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1657년 스웨덴 군을 몰아냈다.
4. 2. 안드루소보 조약 (1667년)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일으킨 민중 봉기와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1667년 1월 13일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차르국은 좌안 우크라이나(Left-bank Ukraine)을 획득하고, 우안 우크라이나(Right-bank Ukraine)만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으로 남게 되었다. 조약은 러시아가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연방에게 반환하기로 하였으나,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4. 3. 대홍수의 영향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스웨덴의 침략은 연방의 가장 부유한 지역(폴란드 대공국, 폴란드 소공국, 마조프셰, 포메라니아, 쿠야비아, 포들라시에)에 집중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200년 동안 큰 전쟁을 겪지 않았던 곳이다.[48] 스웨덴군은 폴란드의 귀중한 예술 작품, 서적, 귀중품 등을 약탈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반환되지 않았다.[10] 바르샤바 왕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약탈된 물품들은 비스와 강을 통해 스웨덴으로 운송되었다.[46] 올리바 조약에 따라 스웨덴은 약탈품을 반환해야 했지만, 여전히 많은 물품이 스톡홀름 등지에 남아있다.[47] 폴란드 왕들은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약탈품 반환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47]스웨덴군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가 기록, 왕립 도서관, 여러 지역의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를 약탈했다.[48] 약탈된 책들은 웁살라 대학교 도서관, 스톡홀름 왕립 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48] 바르샤바의 궁전들과 성, 교회들도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48]
대홍수로 인해 연방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폴란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스웨덴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폴란드 주요 지역의 인구가 25% 감소했다.[49] 특히 마조프셰는 도시의 70%, 폴란드 대공국은 도시의 60%가 감소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49] 연방 전체 인구는 1648년에서 1660년 사이 30%에서 50%까지 감소했다는 추정도 존재한다.[50] 바르샤바와 같은 도시는 인구가 전쟁 전의 10% 수준으로 급감했고, 크라쿠프, 빌뉴스 등도 큰 피해를 입었다.[53] 국민총생산(GNP) 또한 전쟁 전의 55% 수준으로 감소했다.[53]
대홍수는 폴란드 내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저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68] 비가톨릭 교도가 많았던 침략자들은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폴란드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68] 1658년 프로테스탄트 폴란드 형제단 추방은 종교적 불관용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68] 또한 대홍수 시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자포리자 카자크에 의해 학살당했다.[68]
정치, 군사적으로도 연방은 큰 타격을 입었다.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을 통해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영구적으로 할양해야 했다. 대홍수는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러시아의 부상과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54]
5. 대홍수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의 봉건 영주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폴란드에서는 "Bohdan Chmielnicki")가 폴란드 마그나트(magnate)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자포리자 카자크 및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Battle of Berestechko) 후 일단 휴전했으나, 1654년 러시아가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연방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 발트 지방을 둘러싼 갈등과 왕위 다툼 등으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스웨덴 제국은 1655년 연방을 침입해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 공은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 케다이냐이 합병(Union of Kėdainiai) 조약을 통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분할 독립을 약속받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John II Casimir)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카를 구스타프를 지지했다. 포즈난(Poznań)의 보이보드(Voivod)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Krzysztof Opaliński)는 대 폴란드(Great Poland)를 카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었고, 스웨덴 군은 1655년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실레지아(Silesia)로 망명했으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다. 1655년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승리하고, 티쇼프체 연맹(Tyszowce Confederation)이 결성되면서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Jan Paweł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된 군대는 반격을 시작했고, 얀 2세 카지미에시는 1656년 르부프(Lwów)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Lwów Oath).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 군을 국외로 몰아냈다.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지만,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군에는 승리했다.
1658년 하디아치 조약(Treaty of Hadiach)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Polish-Lithuanian-Ruthenian Commonwealth)이 성립될 뻔했으나, 러시아 차르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1654-1667)은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러시아는 좌안 우크라이나(Left-bank Ukraine)를 획득했다. 1686년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Eternal Peace Treaty of 1686)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이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끝나게 만들었다. 1658년 폴란드 형제단(Polish brethren) 추방은 종교적 비관용의 일례였다. 또한, 대홍수 시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다.[68] 대홍수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 중 하나는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 약화였다. 스웨덴과 러시아에 의해 폴란드 전역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폴란드 분할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다양한 역사적 평가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폴란드와 스웨덴 양측의 시각 차이가 두드러진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민중 봉기는 많은 파괴를 야기했다. 1654년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보호를 명분으로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했다. 발트 지방을 둘러싼 갈등과 왕위 다툼 등으로 연방과 오랜 기간 대립했던 스웨덴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1655년 연방을 침입했다.
야누시 라지비우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 공은 연방 내분쟁을 일으키고, 칼 10세 구스타브와 케다이냐이 합병 조약을 체결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할하려 했다.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일부 귀족들은 칼 10세 구스타브를 폴란드 왕으로 지지했다.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는 대 폴란드를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넘겨주었고, 스웨덴 군은 1655년 바르샤바에 무혈 입성했다.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승리하며 폴란드 저항 세력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어 얀 2세 카지미에시를 지지했고, 전국적인 봉기가 발생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봉기군은 반격하여 1657년 스웨덴 군을 몰아냈다.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베라우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하디아치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이 성립될 뻔했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넘겨주었으나, 1686년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으로 영구히 상실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비가톨릭 교도였던 침략자들은 가톨릭 교도인 폴란드인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폴란드 형제단 추방과 같은 종교적 비관용 사례가 증가했다. 또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포그롬으로 학살되었다.[68]
|266px|섬네일|오른쪽|바르샤바 전투 (1656년)에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
5.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와 몰락
1648년 루테니아(Ruthenia)의 봉건 영주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폴란드에서는 "Bohdan Chmielnicki")가 폴란드 마그나트(magnate)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자포리자 카자크 및 우크라이나 농민을 이끌고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Battle of Berestechko) 후 일단 휴전했으나, 1654년 러시아가 1654년-1667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연방의 동쪽 절반을 점령했다. 발트 지방을 둘러싼 갈등과 왕위 다툼 등으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스웨덴 제국은 1655년 연방을 침입해 남은 절반을 점령했다.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 공은 연방에 내부분쟁을 일으켜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교섭을 개시, 케다이냐이 합병(Union of Kėdainiai) 조약을 통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분할 독립을 약속받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John II Casimir)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일부 귀족은 스웨덴 왕 카를 구스타프를 지지했다. 포즈난(Poznań)의 보이보드(Voivod)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Krzysztof Opaliński)는 대 폴란드(Great Poland)를 카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었고, 스웨덴 군은 1655년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실레지아(Silesia)로 망명했으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다. 1655년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승리하고, 티쇼프체 연맹(Tyszowce Confederation)이 결성되면서 봉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Jan Paweł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된 군대는 반격을 시작했고, 얀 2세 카지미에시는 1656년 르부프(Lwów)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다(르부프 선서(Lwów Oath). 연방군은 1657년 스웨덴 군을 국외로 몰아냈다.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지만,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군에는 승리했다.
1658년 하디아치 조약(Treaty of Hadiach)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Polish-Lithuanian-Ruthenian Commonwealth)이 성립될 뻔했으나, 러시아 차르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1654-1667)은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러시아는 좌안 우크라이나(Left-bank Ukraine)를 획득했다. 1686년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Eternal Peace Treaty of 1686)에 의해 러시아의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는 영구적이 되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끝나게 만들었다. 1658년 폴란드 형제단(Polish brethren) 추방은 종교적 비관용의 일례였다. 또한, 대홍수 시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다.[68] 대홍수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 중 하나는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 약화였다. 스웨덴과 러시아에 의해 폴란드 전역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폴란드 분할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54] 결과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54]
5. 2. 역사적 평가와 논쟁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다양한 역사적 평가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폴란드와 스웨덴 양측의 시각 차이가 두드러진다.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민중 봉기는 많은 파괴를 야기했다. 1654년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보호를 명분으로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했다. 발트 지방을 둘러싼 갈등과 왕위 다툼 등으로 연방과 오랜 기간 대립했던 스웨덴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1655년 연방을 침입했다.
야누시 라지비우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 공은 연방 내분쟁을 일으키고, 칼 10세 구스타브와 케다이냐이 합병 조약을 체결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할하려 했다.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일부 귀족들은 칼 10세 구스타브를 폴란드 왕으로 지지했다.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는 대 폴란드를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넘겨주었고, 스웨덴 군은 1655년 바르샤바에 무혈 입성했다.
야스나 고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승리하며 폴란드 저항 세력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어 얀 2세 카지미에시를 지지했고, 전국적인 봉기가 발생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봉기군은 반격하여 1657년 스웨덴 군을 몰아냈다.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베라우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하디아치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이 성립될 뻔했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넘겨주었으나, 1686년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으로 영구히 상실했다.
대홍수는 폴란드에서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종식시켰다.[68] 비가톨릭 교도였던 침략자들은 가톨릭 교도인 폴란드인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폴란드 형제단 추방과 같은 종교적 비관용 사례가 증가했다.[68] 또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포그롬으로 학살되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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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사와의 비교 (또는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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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는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두 사건 모두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홍수의 경우,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보호를 구실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하고, 스웨덴 제국이 발트 지방을 시작으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상황을 틈타 침략해왔다. 병자호란은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대홍수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야스나 고라 공성전과 같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병자호란 역시 조선이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등 국가적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맞이했다.
또한, 두 사건은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 대홍수 기간 동안 많은 폴란드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고,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끝나고 폴란드 형제단이 추방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68] 병자호란 또한 조선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안겼으며,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등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두 사건은 각국의 역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을 통해 러시아에게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를 영구적으로 허용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북벌론 대두와 청나라와의 관계 재정립 등 외교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6. 1. 병자호란과의 유사성
대홍수는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두 사건 모두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홍수의 경우,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보호를 구실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하고, 스웨덴 제국이 발트 지방을 시작으로 연방과 오랜 기간 다툼을 계속했던 상황을 틈타 침략해왔다. 병자호란은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두 사건 모두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대홍수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야스나 고라 공성전과 같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병자호란 역시 조선이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등 국가적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맞이했다.
또한, 두 사건은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 대홍수 기간 동안 많은 폴란드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고,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끝나고 폴란드 형제단이 추방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68] 병자호란 또한 조선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안겼으며,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등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두 사건은 각국의 역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을 통해 러시아에게 좌안 우크라이나 영유를 영구적으로 허용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북벌론 대두와 청나라와의 관계 재정립 등 외교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6. 2. 조선의 대응과 교훈
조선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겪은 대홍수 시기의 혼란과 외세 침략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이를 통해 국가 안보와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비록 조선이 직접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교류하거나 대응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대홍수라는 역사적 사건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된다.대홍수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러시아와 스웨덴 제국 등 강대국의 침략으로 인해 국토가 유린되고,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이는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조선에게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야스나 고라 공성전에서 폴란드 레지스탕스가 보여준 저항 정신은 외세 침략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하디아치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으로의 변화를 시도했으나, 안드루소보 조약과 1686년 항구적 평화조약으로 인해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영구적으로 상실한 사례는 외교적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선은 이를 통해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고, 실리적인 외교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국가 생존에 필수적임을 인식했을 것이다.
내부 분열과 종교적 비관용 역시 대홍수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를 가속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야누시 라지비우 공과 보구스와프 라지비우 공의 내분, 폴란드 형제단 추방, 포그롬으로 인한 유대인 학살 등은 내부 결속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조선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사회 통합과 종교적 관용을 유지하고, 내부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홍수는 조선에게 국방 강화, 외교적 노력, 내부 결속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조선이 직접적으로 대홍수에 대응한 것은 아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사례는 조선의 국정 운영에 있어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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