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활동한 안티오키아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친구이자 타르수스의 디오도레의 제자였다. 383년 안티오키아의 사제로 서품되었고, 392년 몹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되어 36년간 재임했다. 테오도로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엄격히 구분하는 기독론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네스토리우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삼장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록 사후에 이단으로 규탄되었지만, 동방 교회와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테오도로스는 안티오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공직에 있었고 집안은 부유했다. 그의 형제 폴리크로니우스는 아파메이아의 대교구가 되었다. 테오도로스는 처음에는 동향인이며, 신분은 동등하고 나이도 두세 살 위인 크리소스토무스의 초기 동료이자 친구로 나타난다. 그들의 공통 친구 이소리아 셀레우키아의 주교가 된 막시무스와 함께 안티오크의 그리스어 웅변가 리바니우스의 강의를 함께 들었다. 소조멘은 그가 철학 교육을 받았다고 확신한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의 친구가 부지런히 공부했다고 칭찬했지만, 안티오크의 호화로운 생활도 그의 생각에 동일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도로스는 성경 해석에 있어 문자적-역사적 해석을 중시했으며, 알레고리적 해석은 경계했다.[4] 그는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하고, 각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4]
2. 생애
크리소스토무스 자신이 수도원 생활을 하는 카이사레아의 바실로 개종했을 때, 그는 막시무스와 테오도르도 개종시켰다. 세 친구는 리바니우스를 떠나 바실이 이미 참여하고 있던 카르테리우스와 디오도루스의 수도원 학교에서 은둔을 찾았다. 테오도르가 수도사 서약을 하기 전에 이전에 세례를 받았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크리소스토무스의 저작에서 그는 고행적인 자기 수양에서 기쁨을 찾았다는 것이 분명하며, 그는 헤르미온느라는 소녀에게 매료되어 결혼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이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갔다. 그의 "타락"은 작은 사회에 당황함을 퍼뜨렸고, 그 불안은 크리소스토무스의 초기 문학 작품 중 두 편의 편지를 이끌어 냈다. 이 작품들은 테오도르가 서약을 굳게 지키도록 했지만, 실망은 그의 후년의 삶에 흔적을 남겼다.
크리소스토무스와 디오도레의 관계는 374년에 그가 더 완전한 수도원 은둔으로 들어갔을 때 끊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테오도르의 관계는 378년 디오도레가 타르수스 주교직으로 승진할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의심할 여지 없이 테오도르의 성경과 교회 교리에 대한 이해의 기초가 놓였고, 그는 디오도레가 이전 세대의 안티오크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성경 해석 원리와 스승이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에 대한 반감으로 이끌었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독특한 견해로 평생 동안 스며들었다. 이 10년의 후반기는 테오도르가 작가로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는 디오도레의 방법을 과장하여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게 된 시편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했다. 안티오크의 정통파는 전통적인 메시아적 해석의 상실에 분개했던 것으로 보이며, 예루살렘의 헤시히우스에 따르면 테오도르는 자신의 처녀작을 불태울 것을 약속해야 했다.
마르세유의 겐나디우스는 테오도르를 안티오크 교회의 사제로 묘사하고 있으며, 안티오크의 요한의 편지에서 우리는 그가 서품을 받은 지 45년이 지나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383년, 33세에 안티오크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서품 주교는 디오도레의 옛 친구이자 동료였던 안티오크의 플라비아누스 1세였을 것이며, 테오도르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테오도르의 "성육신"에 관한 위대한 논문은 겐나디우스에 따르면 이 시기에 속하며, 구약에 대한 그의 주석 중 하나 이상도 이 시기에 속할 수 있다. 설교자로서 그는 이제 논쟁 분야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헤시히우스는 테오도르가 사제였을 때 안티오크를 떠나 392년까지 타르수에 머물렀으며, 올림피우스가 사망한 후 아마도 디오도레의 영향으로 몹수에스티아의 주교직에 임명되었다고 말한다. 테오도레토스는 그가 남은 36년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고 말한다.
몹수에스티아는 피라무스(Ceyhan) 강에 있는 자유 도시로, 타르수스와 이소스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두 도시에서 약 40마일, 바다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다. 그것은 킬리키아 세쿤다에 속했으며, 그 대교구는 아나자르부스였다. 4세기에 이 도시는 어느 정도 중요성을 지녔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피라무스 강에 건설한 다리로 유명했다.
테오도르의 긴 주교직은 뚜렷한 사건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았다. 394년 그는 안티오크 총대주교 관할 구역의 보스트라 주교직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테오도르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앞에서 설교할 기회를 가졌으며, 테오도시우스는 그의 마지막 서방 여행을 시작하려 했다. 설교는 깊은 인상을 남겼고, 암브로시우스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받은 테오도시우스는 그처럼 훌륭한 스승을 만난 적이 없다고 선언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할아버지의 테오도르에 대한 존경심을 물려받았고, 그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테오도르의 주교 생활에 대한 또 다른 엿보기는 쿠쿠수스에서 그에게 보낸 크리소스토무스의 편지에 의해 제공된다. 망명한 총대주교는 "테오도르의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매우 진실하고 따뜻하며, 매우 진지하고 순수하며, 어린 시절부터 유지되었고, 지금에야 나타났다."라고 썼다.
그의 문학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그의 교구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이바스의 유명한 마리스에 대한 편지는 그가 아리우스주의의 멸망과 몹수에스티아의 다른 이단에 맞서 싸웠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의 주교직은 결코 교구 주교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곳에서 "진리의 전령이자 교회의 의사"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먼 교회들도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이바스는 마리스에게 설명했다. 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동방의 모든 교회에서 성경을 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한은 그에게 철회를 요청하며, 테오도르의 예를 들었다. 테오도르는 안티오크에서 설교할 때 큰 불쾌감을 준 말을 했지만, 평화를 위해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며칠 후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수정했다. 레온티우스는 불쾌함의 원인이 성모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라는 칭호를 부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폭풍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설교자에게 돌을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테오도르의 말년은 두 가지 논쟁으로 복잡해졌다. 418년 펠라기우스주의 지도자들이 서방에서 폐위되어 추방되었을 때, 그들은 안티오크 학파의 주요 생존 대표의 동정을 동방에서 구했다. 율리아누스의 방문은 테오도르가 "원죄의 옹호자들에 반대하여"라는 책을 쓴 기회였을 것이다. 마리우스 메르카토르는 테오도르가 율리아누스가 몹수에스티아를 떠나자마자 그에게 등을 돌리고 지방 시노드에서 그를 저주했다고 비난한다.
율리아누스보다 더 큰 이단자가 그의 마지막 해에 몹수에스티아를 방문했다. 에바그리우스 스콜라스티쿠스는 ''네스토리우스가 안티오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AD 428)에 테오도르와 상의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재앙적인 결과를 낳은 이단의 씨앗을 그로부터 받았다''고 진술했다. 428년 말경 테오도르는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평생 논쟁에 참여했고, 한 번 이상 정통파의 대중적 견해와 충돌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평화 속에서 위대한 명성의 절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의 사후까지 터지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테오도로스는 안티오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관리였고, 집안은 유복했다.[6] 그의 형제 폴리크로니우스는 나중에 아파메이아 주교가 되었다. 테오도로스는 젊은 시절 금구 이오안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처음 기록에 나타난다. 이들은 공통의 친구이자 후에 이사우리아의 셀레우키아 주교가 된 막시무스와 함께, 리바니우스에게서 수사학을 배웠다.[7]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의 설득으로, 테오도로스는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디오도로스와 카르테리오스가 운영하던 일종의 수도원 학교(asketerion)에 들어갔다.[8] 그러나 법학을 지망[9]하거나 헤르미오네라는 소녀와의 결혼을 생각[10]하는 등 세속적인 삶에 대한 미련으로 수도 생활을 중도에 포기했다.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자신의 수도적 이상에 비추어 테오도로스를 비난했지만, 테오도로스가 수도 생활을 지향했을 때의 순수한 의지를 칭찬하며,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간청하였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만년에도 테오도로스와의 우정을 유지하였다.[11]
테오도로스는 다시 디오도로스와 카르테리오스에게 돌아가 디오도로스가 타르수스 주교로 선출되어 안티오키아를 떠날 때까지 교육을 받았다. 테오도로스의 양성론적 기독론이나 소위 자구적·역사적 성서 해석에는 디오도로스의 영향이 강하게 인정된다.
2. 2. 성직 활동
테오도르는 383년에 안티오키아 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 의해 안티오키아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392년에는 스승인 디오도루스와 마찬가지로 킬리키아의 도시 몹수에스티아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몹수에스티아의 주교로 임명되어 36년간 활동했다.
주교를 역임하는 동안 테오도로스는 설교와 사목, 성서 석의에 힘썼다. 그의 성서 석의는 전체 150개의 시편 중 4개에서만 그리스도에 대한 예형을 보고, 아가 등 일부 저작이 예언의 영에 의해 쓰여진 것을 부정하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디오도레 등과 함께 안티오키아 학파로 분류된다.
394년에는 보스라 주교좌를 둘러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에 참석했다.
몹수에스티아에서의 임기 동안 대체로 큰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오리엔스 관구의 주교들 중에서 명성을 얻은 채 428년에 사망했다. 다만 417년경 북아프리카에서 도망쳐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했던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에게 비호를 제공했다.
또한, 가르침을 준 사람들 중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던 것으로 인해 사후 큰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펠라기우스주의 논쟁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에 연루되기도 했다.
2. 3. 사망
테오도르는 428년에 몹수에스티아에서 사망했다. 그는 평생 논쟁에 참여했고, 한 번 이상 정통파의 대중적 견해와 충돌했지만, 파쿤두스(ii.1)가 지적하듯이, 교회의 평화 속에서 위대한 명성의 절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383년에 안티오키아 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 의해 안티오키아의 사제로, 392년에 스승인 디오도루스와 마찬가지로 킬리키아의 도시 몹수에스티아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아마 그 전후, 니케아파에서 이단으로 여겨졌던 유사본질파(소위 "마케도니우스파")를 상대로 몹수에스티아에 가까운 킬리키아의 도시 아나자르부스에서 토론을 벌였다. 394년에는 보스라 주교좌를 둘러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에 참석했다. 주교를 역임하는 동안 테오도로스는 설교와 사목, 성서 석의에 힘썼다. 그의 성서 석의는 전체 150개의 시편 중 4개에서만 그리스도에 대한 예형을 보고, 아가 등 일부 저작이 예언의 영에 의해 쓰여진 것을 부정하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타르소스의 디오도루스 등과 함께 안티오키아 학파로 분류된다.
몹수에스티아에서의 임기 동안 대체로 큰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오리엔스 관구의 주교들 중에서 명성을 얻은 채 428년에 사망했다. 다만 417년경 북아프리카에서 도망쳐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했던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에게 비호를 제공했다.
또한, 가르침을 준 사람들 중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던 것으로 인해 사후 큰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3. 신학 사상
테오도로스의 소예언서 주석은 보존되어 마이(Mai)와 베그너른(Wegnern)에 의해 출판되었다(로마, 1825–1832). 이 주석은 이전 해석학적 권위에 대한 독립성과 그리스도론적 언급을 인정하려는 테오도로의 꺼림칙함으로 주목할 만하다.[4] 19세기에 발견된 갈라디아서와 그 뒤의 아홉 서신에 대한 주석의 완전한 라틴어 번역본은 헨리 바클레이 스위트에 의해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케임브리지, 1880, 1882).[4]
테오도로스의 창세기 주석은 코스마스 인디코플레우스테스, 요한 필로포누스, 포티우스 (Cod. 3, 8)에 의해 인용되었다.[4] 그의 시편 주석의 인쇄된 단편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미그네(Migne)에서 25단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해석을 선호한 그는 메시아로 여겨지는 시편 중 세세 개 또는 네 개를 제외한 모든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을 부인했다.[4]
구약과 신약 성서의 그의 주석 조각 외에도,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저술의 단편이나 언급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하고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쓰인 것은 15권짜리 "성육신"에 관한 논문이었다. 겐나디우스(''de Vir. Ill.'' 12)에 따르면, 이 논문은 아폴리나리우스파와 에우노미우스파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으며, 저자가 아직 안티오키아의 사제였을 때 쓰여졌다.[4] 잃어버린 성육신에 관한 작품은 1905년 네스토리우스 수도원에서 시리아어 번역본으로 이라크 북부 산악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나, 1915년 아시리아인 학살 동안 터키 군대에 의해 소실되었다.[5]
잘 살아남지 못한 작품으로는 ''de Apollinario et eius Haeresi''와 아폴리나리우스파에 반대하는 다른 논쟁, 그리고 키지쿠스의 에우노미우스에 반대하는 별도의 논쟁이 있다.[4] 포티우스는 테오도로가 조로아스터교를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네스토리우스"적 견해를 드러내고 죄인들의 궁극적인 회복이라는 개념을 옹호한 "페르시아 마법"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썼다고 언급한다.[4]
에베제수는 그의 목록에 "성령에 관한 두 권"과 "죄가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에 반대하는 두 권"을 포함한다.[4] 레온티우스는 테오도로가 전례의 일부를 썼음을 암시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의 봉헌"은 "해석가 마르 테오도로스"에게 귀속되는 동시리아 전례인데, 동시리아 전례 교회에서 강림절부터 종려주일까지 1년의 3분의 1 동안 여전히 사용된다.[4]
3. 1. 성경 해석
테오도로스는 성경 해석에 있어 문자적-역사적 해석을 중시했으며, 알레고리적 해석은 경계했다.[4] 그는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하고, 각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4]
테오도로스의 소예언서 주석은 보존되어 마이(Mai)와 베그너른(Wegnern)에 의해 출판되었다(로마, 1825–1832). 이 주석은 이전 해석학적 권위에 대한 독립성과 그리스도론적 언급을 인정하려는 테오도로의 꺼림칙함으로 주목할 만하다.[4] 19세기에 발견된 갈라디아서와 그 뒤의 아홉 서신에 대한 주석의 완전한 라틴어 번역본은 헨리 바클레이 스위트에 의해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케임브리지, 1880, 1882).[4]
테오도로스의 창세기 주석은 코스마스 인디코플레우스테스, 요한 필로포누스, 포티우스 (Cod. 3, 8)에 의해 인용되었다.[4] 그의 시편 주석의 인쇄된 단편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미그네(Migne)에서 25단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해석을 선호한 그는 메시아로 여겨지는 시편 중 세세 개 또는 네 개를 제외한 모든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을 부인했다.[4]
구약과 신약 성서의 그의 주석 조각 외에도,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저술의 단편이나 언급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하고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쓰인 것은 15권짜리 "성육신"에 관한 논문이었다. 겐나디우스(''de Vir. Ill.'' 12)에 따르면, 이 논문은 아폴리나리우스파와 에우노미우스파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으며, 저자가 아직 안티오키아의 사제였을 때 쓰여졌다.[4] 잃어버린 성육신에 관한 작품은 1905년 네스토리우스 수도원에서 시리아어 번역본으로 이라크 북부 산악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나, 1915년 아시리아인 학살 동안 터키 군대에 의해 소실되었다.[5]
잘 살아남지 못한 작품으로는 ''de Apollinario et eius Haeresi''와 아폴리나리우스파에 반대하는 다른 논쟁, 그리고 키지쿠스의 에우노미우스에 반대하는 별도의 논쟁이 있다.[4] 포티우스는 테오도로가 조로아스터교를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네스토리우스"적 견해를 드러내고 죄인들의 궁극적인 회복이라는 개념을 옹호한 "페르시아 마법"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썼다고 언급한다.[4]
에베제수는 그의 목록에 "성령에 관한 두 권"과 "죄가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에 반대하는 두 권"을 포함한다.[4] 레온티우스는 테오도로가 전례의 일부를 썼음을 암시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의 봉헌"은 "해석가 마르 테오도로스"에게 귀속되는 동시리아 전례인데, 동시리아 전례 교회에서 강림절부터 종려주일까지 1년의 3분의 1 동안 여전히 사용된다.[4]
3. 2. 기독론
테오도로스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후대에 삼장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5권으로 구성된 "성육신" 논문을 통해 자신의 기독론을 상세히 밝혔는데, 겐나디우스(''de Vir. Ill.'' 12)에 따르면 이 논문은 아폴리나리우스파와 에우노미우스파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테오도로스가 안티오키아의 사제였을 때 쓰여졌다.[4] 겐나디우스는 그리스도 안의 각 본성의 진실성과 완전성을 논리적, 성경적으로 증명한 후, 거룩한 인간성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14권에서는 삼위일체와 창조, 신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논한다고 요약했다.[4] 이 논문의 대형 단편들은 테오도로스의 유물 중 그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중요한 빛을 비춘다.[4]
4. 논쟁과 유산
테오도로스는 살아있을 때는 존경을 받았으나, 5, 6세기 이후 이단으로 규탄되었다.[2] 테오도로스의 가르침은 동방 교회에서는 여전히 존경받지만,[16] 서방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간주한다.
테오도로의 인기는 그가 죽은 후에 증가했다. 몹수에스티아의 그의 후임자인 멜레티우스는, 만약 그가 그의 전임자에 반대되는 말을 했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라고 항의했다. "우리는 테오도로가 믿었던 대로 믿는다; 테오도로의 신앙 만세!"는 동방 교회에서 자주 들리는 외침이었다. "우리는 테오도로를 정죄하느니 차라리 불에 타 죽겠다"는 테오도로의 정죄를 갈망하는 파에 대한 시리아 주교들의 대답이었다. 테오도로를 "보편 교회의 의사"로 여겼던 테오도레토스, 433년에 테오도로를 칭찬하는 유명한 편지를 마리스에게 쓴 에데사의 이바스, 428년에 안티오키아 교구를 계승한 안티오키아의 요한 1세는 테오도로스 지지파였다.
테오도로가 죽은 직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431년 무렵 마리우스 메르카토르는 그를 펠라기우스 이단의 진정한 저자라고 비난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로의 교리를 번역한 것에 대한 서문에서 그는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선구자라며 더욱 격렬하게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에페소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름으로 정죄했지만 테오도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 파는 테오도로의 말에 의존하여 그들의 견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언어로 유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정통파의 불신을 깊게 했고, 심지어 동방에서도 테오도로의 가르침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는 435년경 그의 ''교회사''에서 그를 공격했고; 에데사의 주교인 라불라는, 에페소스에서 안티오키아의 요한 편을 들었는데, 이제 테오도로를 공개적으로 저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프로클루스는 시리아 주교들에게 테오도로의 저작에서 인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특정 명제를 정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때 테오도로의 작품 중 일부를 호의적으로 언급했던 키릴로스는 이제 라불라의 영향으로 결정적인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시노드에 편지를 썼다 : 디오도레, 테오도로, 그리고 같은 학파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 전속력으로 돛을 올렸다"; 황제에게, 디오도레와 테오도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신성모독의 부모였으며; 프로클루스에게, 만약 테오도로가 여전히 살아 있었고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승인했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저주를 받아야 했을 것이지만, 그는 죽었기 때문에, 동방에서 더욱 극단적인 조치가 일으킬 끔찍한 혼란을 고려하여 그의 책의 오류를 정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디오도레와 테오도로의 저작에서 수집된 일련의 명제를 수집하고 답했는데, 이 작품에 대해 테오도레토스는 곧 답했다.
그 후 발효는 잠시 가라앉았지만 서방에서 거부된 테오도로의 제자들은 동부 시리아에서 페르시아로 길을 개척했다. 435년에 라불라를 계승한 이바스는 에데사 학파를 복원했고, 489년 제논 황제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테오도로의 신학의 양성소로 유지되었고, 니시비스로 피난했다.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들 사이에서 테오도로의 저작은 교리와 해석의 기준으로 여겨졌고, 페르시아 교회는 그들을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나테마를 선포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비난에 응답했다.
6세기는 테오도로에 대한 증오의 또 다른 마지막 발발을 목격했다. 제5차 세계 공의회(553)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영향력 아래, 테오도시우스 2세나 키릴로스가 발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아나테마를 선포했다. 테오도로와 그의 두 지지자에 대한 이러한 정죄는 세 장 논쟁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대표단은 에페소스와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성스러움을 침해하는 포고령에 반대했다; 그들은 테오도로의 교리나 해석 방법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폰티아누스 주교는 황제에게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저작의 사람들을 정죄하라고 요구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에 대한 소란은 조사를 이끌었고; 그의 작품, 또는 그 일부가 번역되어 서방에 유포되었다.
테오도로는 지옥의 고통이 유한하고 죄인을 개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고(기독교 보편주의의 한 형태), 동방 교회의 후기 주교들, 즉 성 이삭 (7세기)과 벌의 책의 저자인 바스라의 솔로몬 (13세기)은 이 문제에 대한 권위자로 인용했다.[2] 19세기에 에드워드 비처는 테오도로의 지옥의 유한성에 대한 믿음을 논의하고, 그것이 성경의 우의적 해석에 근거하지도 오리게네스에서 유래하지도 않았음을 강조했다.[3]
예기치 않게 테오도로스가 사망한 42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로 서임된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는 인간으로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신으로서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으니, 마리아에게 부여된 테오토코스(신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부적절하다고 설파했다. 이에 대해 "테오토코스" 칭호를 존중했던 이집트 사람들은 맹렬히 반발했고, 이집트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탄핵했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제3차 전 세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의 게르마니케이야 출신으로, 안티오키아 학파적인 신학을 설파했고, 오리엔스 관구에 적지 않은 지지자를 얻었다. 이에 대해 네스토리우스를 규탄한 키릴로스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을 내세웠다.
에페소스 공의회와 그 후의 합동 신조 채택(433년)까지는 네스토리우스 본인의 신학과 키릴로스에 의한 탄핵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일관했지만, 430년대 중반이 되자 에데사 주교 라불라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프로클로스 등이 키릴로스와 연계하여,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테오도로스와, 더 나아가 그의 스승인 타르소스의 디오도로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키로스의 테오도레토스 등 안티오키아 학파(혹은 오리엔스의 주교단)의 논객들은 반대로 디오도로스와 테오도로스를 옹호하는 논조를 펼쳤다.
키릴로스의 뒤를 이은 는 테오도로스를 옹호하는 테오도레토스와 상술한 라불라 사망 후 에데사 주교좌를 이은 히바스(이바스)를, 에페소스에서 열린 회의(소위 "에페소스 강도 공의회")에서 탄핵했다(449년). 그 디오스코루스가 추방된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들 두 사람은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테오도로스의 정통성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451년).
한편, 에데사 근처보다 더 동쪽의 사산 제국 영내에는 이미 시리아어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는데, 지리적·인적 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오리엔스 관구의 주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게다가 문제의 히바(이바스) 등이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저작을 시리아어로 번역한 것, 에데사의 신학교와 그 학생들이 늦어도 5세기 말에 사산 제국 영내 니시비스로 옮겨간 것, 반드시 로마 제국의 공의회 결의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 등에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에 대한 숭경이 강해졌다.
486년에는, 카톨리코스 아카키오스가 개최한 셀레우키아 교회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가르침에 기초한 신학이 채택되었다. 그 흐름을 잇는 동시리아 교회(아시리아 동방 교회, "네스토리오스파")에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테오도로스가 "석의자"(ܡܦܫܩܢܐ, mpaššqānā)로서 숭경받고 있다.
4. 1. 삼장 논쟁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비칼케돈파를 포섭하려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년)를 열어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의 저작을 금지했다.[2] 이는 삼장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와 그의 모든 저작, 키로스의 테오도레토스의 『키릴로스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12 이단 선언에 대한 반박』, 에데사의 히에바 (이바스)의 『마리 서한』에 대한 이단 선언을 내렸는데, 테오도로스는 본인을 포함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와 같은 비칼케돈파 논자들은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키로스의 테오도레토스 등 안티오키아 학파의 교리를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칼케돈 공의회도 '네스토리우스파'에 물들어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의 주교들, 특히 헤르미아나의 파쿤두스는 생전에 숭배되었고 공의회에서 재판받지도 않은 인물을 규탄하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2] 폰티아누스 주교는 황제에게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저작의 사람들을 정죄하라고 요구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러한 반발로 인해 그리스어 권 (정교회권)에서는 공의회의 권위가 강하여 테오도로스의 저작이 대부분 파기되었지만, 라틴어 권 (가톨릭권)에서는 삼장 논쟁 시 파쿤두스 등이 그리스어, 시리아어에서 번역하여 편찬한 자료가 적지 않게 전존해 있다. 테오도로스의 저작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에 관한 정보도 숭배의 본고장인 시리아어권 (동시리아 교회권)을 제외하면 라틴어 사료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4. 2. 현대적 평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성경 해석과 기독론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소예언서 주석은 이전 해석학적 권위에 대한 독립성과 그리스도론적 언급을 인정하려는 그의 꺼림칙함으로 주목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해석을 선호한 그는 메시아로 여겨지는 시편 중 세세 개 또는 네 개를 제외한 모든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을 부인했다. 테오도로의 양성론은 현대 신학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한국 기독교 신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테오도로의 저술 목록은 1318년 니스비스의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압디쇼에 의해 제공되었으며, 시리아어 번역본은 41권에 달했다. 그의 "성육신"에 관한 15권짜리 논문은 아폴리나리우스파와 에우노미우스파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의 각 본성의 진실성과 완전성을 논리적이고 성경적으로 증명하였다. 포티우스는 테오도로가 조로아스터교를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네스토리우스"적 견해를 드러내고 죄인들의 궁극적인 회복이라는 개념을 옹호한 "페르시아 마법"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썼다고 언급한다.[4]
참조
[1]
웹사이트
ഗ്രീക്ക് സഭാപിതാക്കന്മാരുടെ ഓർമ്മ {{!}} The Commemoration of the Greek Doctors
https://www.syromala[...]
[2]
서적
The Book of the Bee, CHAPTER LX.
https://www.sacred-t[...]
Evinity Publishing INC
2020-03-10
[3]
서적
History of Opinions on the Scriptural Doctrine of Retribution. Chapter XXV. Pages 219-224.
https://books.google[...]
Edward Beecher
[4]
서적
Photius, Bibliotheca
http://www.tertullia[...]
The Tertullian Project
2020-03-10
[5]
서적
Patrology
Newman Press
[6]
문서
ヨアンネス・クリュソストモス『堕落したテオドロスへ』(''Ad Theodorum lapsum'')2. 1.
[7]
문서
ソクラテス『教会史』6. 3, ソゾメノス『教会史』8. 1.
[8]
문서
ソクラテス『教会史』6. 3.
[9]
문서
Zaharopoulos 1989, p. 10.
[10]
문서
ヨアンネス・クリュソストモス『堕落したテオドロスへ』1. 14.
[11]
문서
ヨアンネス・クリュソストモス『書簡212』.
[12]
문서
''PO ''9, 637ff.
[13]
문서
古代末期、後期帝政ローマ帝国時代の行政区分で、キリスト教の大主教区。イサウリア、キリキア、キュプロス、エウフラテンシス、メソポタミア、オスロエネ、コイレ・シリア、フォエニケ(フェニキア)、パレスティナ、アラビアの属州・地域を含んでいた。
[14]
간행물
アッシリア東方教会
明石書店
[15]
문서
この「東方」とは元々「オリエンス」を訳したものである。
[16]
문서
N. Van Rompey, “Theodore of Mepsuestia”, 4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