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라이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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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트라이외즈는 1851년 벨기에 육군 대위 파프샹이 개발한 최초의 일제 사격식 총기이다. 몽티니 미트라이외즈는 1850년대 루이 크리스토프와 조제프 몽티니에 의해 개선되었으며, 프랑스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1865년 프랑스 육군에 채택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이 무기를 사용했으나, 전술적 한계와 운용 교리의 문제로 인해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미트라이외즈는 이후 기관총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언어에서 기관총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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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라이외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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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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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Mitrailleuse de Reffye 또는 "Canon a Balles" (1866) |
유형 | 집사포 |
기원 | 프랑스 |
사용 기간 | 1866–1908 |
사용 국가 | 프랑스 멕시코 다호메이 왕국 도미니카 공화국 |
참전 전쟁 | 보불전쟁 야키 전쟁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1916–1924) |
설계자 | J. B. Verchere de Reffye |
설계 시기 | 1865년 |
제조사 | 뫼동 및 낭트 정부 시설 |
생산 기간 | 1866–71년 |
생산 수량 | 약 400문 |
제원 | |
무게 | 340 kg 운송차 포함: 855 kg |
길이 | 1.75 m |
탄약 | 길쭉한 샷건 셸 형태, 센터 파이어, 50그램 패치 탄환 |
구경 | 13 mm (.512 구경) |
발사 속도 | 125 발/분 |
유효 사거리 | 1,800 m |
최대 사거리 | 3,400 m |
2. 역사
미트라이외즈는 1851년 벨기에 육군 대위 파프샹이 처음 개발한 수동 발사식 다총신 무기이다.[2][3] 이는 개틀링 건보다 10년 앞선 발명이었다. 파프샹의 초기 설계는 50개의 총열을 가졌으며, 이후 1850년대 루이 크리스토프와 조제프 몽티니에 의해 개선되어 1863년 37개 총열을 가진 몽티니 미트라이외즈로 발전했다. 이 무기는 주로 벨기에 요새 방어용으로 사용되었다.
1859년부터 몽티니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자신의 설계를 제안했고, 이는 프랑스 자체적인 미트라이외즈 개발로 이어졌다. 장-밥티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가 주도하여 개발한 25개 총열의 레피 미트라이외즈(Canon à Balles프랑스어)는 1865년 프랑스 육군에 의해 비밀리에 채택되었다.[10] 이 무기는 강철 블록에 25발의 13mm 센터파이어 탄약을 장전하고 손잡이를 돌려 연속 발사하는 방식으로, 분당 100발의 발사 속도와 약 약 1828.80m(약 1.8km)의 유효 사거리를 가졌다. 이는 당시 프로이센군의 주력 소총인 드라이제 바늘총의 성능을 크게 능가하는 것이었다.
1870년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프랑스군 포병에 의해 처음으로 대규모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비밀 병기로 개발되어 충분한 훈련과 준비가 부족했고, 보병 지원 화기가 아닌 포병 무기로서 장거리에서 운용되는 등 전술적 운용의 문제점으로 인해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쟁 발발 시 운용 가능한 수량도 200문 미만에 불과했다.
전쟁 이후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점차 퇴역했으며, 이후 등장하는 개틀링 건이나 맥심 기관총과 같은 자동화된 기관총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트라이외즈(Mitrailleuse)'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기관총을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 남게 되었다.
2. 1. 개발 배경
19세기 중반,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유럽 각국에서는 군사 기술 개발 경쟁이 치열해졌고, 특히 보병 화력 증강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초의 미트라이외즈가 등장했다.최초의 미트라이외즈는 1851년 벨기에 육군 대위 파프샹이 개발한 수동 발사식 50개 총열 일제 사격식 총기였다.[2][3] 그는 이 발명품의 시제품과 도면을 제작했다.[4] 이 초기 형태는 1850년대에 루이 크리스토프와 벨기에 엔지니어 조제프 몽티니에 의해 개선되었으며, 1863년에는 37개의 총열을 가진 몽티니 미트라이외즈가 완성되었다. 이 무기는 11×70mmR 센터파이어 탄약을 사용했으며, 바퀴 달린 포가에 탑재되었다. 몽티니는 1859년부터 자신의 설계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제안하며 유럽 전역에 판매하고자 했다. 미트라이외즈는 나중에 프랑스군이 사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850년대 벨기에에서 요새의 해자를 방어하기 위한 고정 무기로 처음 사용되었다.
1863년 프랑스 육군은 몽티니 미트라이외즈에 관심을 보였으나, 벨기에제 무기를 도입하는 대신 프랑스 자체 기술로 독자적인 미트라이외즈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1864년 5월, 에드몽 르뵈프 장군은 나폴레옹 3세에게 "포탄포에 관한 노트(''Note sur le Canon à balles'')"라는 제목의 예비 보고서를 제출했다. 본격적인 개발 및 생산은 1865년 9월부터 장-밥티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 중령(1821–1880)의 지휘 아래 극비리에 시작되었다. 조립과 일부 제조는 뫼동의 작업장에서 이루어졌지만, 많은 부품은 민간 산업 부문에서 조달되었다.
그러나 개발 자금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프랑스 육군은 이미 신형 샤스포 소총(Mle 1866) 도입에 5년 치 예산의 상당 부분을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가 개인적인 비밀 자금으로 개발 및 제조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10] 1868년, 베르사유 근처 사토리의 군사 사격장에서 신무기에 대한 철저한 테스트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스파이 활동을 우려하여 시험 발사 시 총을 텐트 안에 숨기기도 했다. 이 프랑스형 미트라이외즈는 '레피 미트라이외즈' 또는 "Canon à Balles"(탄환포)로 불렸으며, 1865년 프랑스 육군에 의해 공식 채택이 결정되었다. 이 무기는 비밀 병기로 취급되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직전인 1870년 7월까지 총 215대가 생산되었으며, 이 중 190대가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상태였다.
2. 2. 벨기에와 프랑스의 개발 과정
미트라이외즈의 기원은 1851년 벨기에 육군 대위 파프샹(T.H.J. Fafschamps)이 개발한 수동 발사식 50개 총열 일제 사격식 총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3]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시제품과 도면을 제작했으며,[4] 이 초기 모델은 요새 해자를 방어하기 위한 고정 무기로 벨기에에서 사용되기도 했다.1850년대에 루이 크리스토프와 벨기에 엔지니어 조제프 몽티니는 파프샹의 설계를 개선하여, 1863년 37개 총열을 가진 몽티니 미트라이외즈를 완성했다. 이 개량형은 11×70mmR 센터파이어 탄약을 사용했으며, 바퀴 달린 포가에 탑재되었다. 크리스토프와 몽티니는 브뤼셀 근처 Fontaine-l'Évêque에서 이 무기를 생산하며 유럽 전역에 판매를 시도했고, 1859년부터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도 구매를 제안했다.
1863년 프랑스 육군은 몽티니 미트라이외즈에 관심을 보였고, 포병 위원회는 벨기에제 무기 도입을 검토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자체적인 기술력으로 프랑스 고유의 미트라이외즈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1864년 5월, 에드몽 르뵈프 장군은 나폴레옹 3세에게 Note sur le Canon à balles프랑스어('포탄포에 관한 노트')라는 예비 보고서를 제출하며 본격적인 개발의 시작을 알렸다.
프랑스판 미트라이외즈 개발은 1865년 9월, 장-밥티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 중령(1821–1880)의 지휘 아래 최고 수준의 보안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무기는 공식적으로 "Canon à Balles modèle 1866"으로 명명되었으며, 흔히 레피 미트라이외즈로 불린다. 조립과 일부 제조는 뫼동의 군 시설에서 이루어졌지만, 많은 부품은 민간 산업체로부터 조달되었다. 당시 프랑스 육군은 신형 샤스포 소총 도입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트라이외즈 개발 및 생산 자금은 나폴레옹 3세가 개인적인 비밀 자금으로 충당해야 했다.[10]
1868년 베르사유 근처 사토리(Satory)의 군 사격장에서 레피 미트라이외즈의 성능 테스트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스파이 활동을 우려하여 총을 텐트 안에 숨긴 채 원거리 표적을 향해 사격하는 방식으로 시험이 이루어졌다. 테스트 결과,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기계적으로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했으며, 실전에서의 활약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강철 블록에 25발의 13mm 센터파이어 탄약을 장전하여 손잡이를 돌리면 연속 발사가 가능했다. 발사 속도는 분당 100발에 달했고, 유효 사거리는 약 1828.80m(1.8km)로 당시 프로이센군의 주력 소총인 드라이제 바늘총의 사거리를 훨씬 능가했다.
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총 215대의 레피 미트라이외즈와 500만 발의 탄약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 발발 시점에는 190대만이 운용 가능한 상태였다. 이처럼 제한된 수량과 더불어 운용상의 문제점은 이후 전쟁에서 미트라이외즈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2. 3.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의 사용과 한계
프랑스 육군은 레피 미트라이외즈를 비밀 무기로 개발하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 발발 시점에 약 215문과 500만 발의 탄약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 준비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배치 가능한 수량은 190문에 불과했다.[10] 이 무기는 최고 기밀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포병 장교들이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 실제 포병 부대는 전쟁 발발 시점에 편성되었지만, 총기는 뫼동이나 파리 주변 요새에 보관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조작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조준 및 거리 측정 방법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1870년 1월에 인쇄된 상세 설명서는 전쟁 직전에야 배포되었다. 이러한 준비 부족은 샬롱 군 사령관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원수가 전쟁 발발 두 달 후인 세당 전투에서 처음 미트라이외즈를 목격했을 정도였다.프랑스군은 미트라이외즈를 보병 지원 화기가 아닌 포병 무기로 운용했는데, 이는 개발자인 장-밥티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의 의도이기도 했다. 공식 명칭인 "le Canon à Balles" (총알을 쏘는 대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트라이외즈는 장거리에서 적 포병의 산탄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무기로 간주되었다.[11] 각 포대는 6문의 미트라이외즈로 구성되었고, 6명의 승무원이 운용했다. 한 명은 발사, 다른 한 명은 좌우 조작, 나머지 네 명은 조준, 장전, 하역을 담당했다.[12]
> 미트라이외즈의 사격과 소총의 사격을 비교하는 것은 미트라이외즈의 역할을 오해하는 것이다. 이 무기는 소총이 더 이상 유효 사거리에 있지 않은 거리에서 효과적으로 사격을 시작해야 한다. 1000m~2500m의 먼 거리에서 산탄의 부족을 보충해야 한다.
> — 오귀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11]
그러나 포병 무기로서 미트라이외즈를 운용한 것은 전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드라이제 니들 건 사격을 피하기 위해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전선에서 약 1400m 이상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미트라이외즈의 최대 사거리는 3400m에 달했지만, 실제 교전 거리는 보통 2000m를 넘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는 일반적인 가늠자만으로는 정확한 조준이 매우 어려웠고, 총알이 목표에 명중하는지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이는 현대 기관총이 최대 사거리보다 훨씬 짧은 유효 사거리 내에서 운용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광학 장비의 도움 없이 사거리 한계에 가깝게 운용되는 경우가 잦아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미트라이외즈는 전쟁 중 주요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제한된 수량과 잘못된 운용 방식으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본질적으로 정확성은 있었으나, 25발의 일제 사격이 너무 좁게 집중되어 측면 분산 효과가 부족했고, 원거리 표적에 대한 신속한 조준이 어려웠다. 또한 복잡한 발사 메커니즘은 미숙한 승무원에 의해 쉽게 손상되었으며, 장시간 사격 시 흑색 화약 연소 잔류물로 인한 오염으로 작동 불량이 보고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전투에서는 미트라이외즈가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라벨로트 전투에서 바르베 대위가 지휘하는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신속하게 사정거리를 파악하여 밀집한 프로이센 보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이는 해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높은 사상자 수에 기여했다. 마르스라투르 전투에서도 효과적인 운용 사례가 기록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트라이외즈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전쟁 후 분석 결과 샤스포 소총이 미트라이외즈보다 훨씬 많은 프로이센군 사상자를 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물론 이는 투입된 샤스포 소총의 수가 약 10만 정에 달했던 반면, 미트라이외즈는 200문 미만이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프로이센군과 외국 관찰자들은 미트라이외즈의 성능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선전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미트라이외즈의 효과를 경시하면서도 위협으로 간주하여 우선적인 공격 목표로 삼았다. 프로이센 병사들은 미트라이외즈의 독특한 발사음을 Höllenmaschine|횔렌마쉬네de("지옥 기계")라고 부르며 경계했다.[13][33] 전장에서의 실패는 속사 무기 자체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 이어졌다.[14][34] 전쟁을 관찰한 미국 육군의 윌리엄 헤이즌 장군은 "프랑스 미트라이외즈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그것을 매우 경멸하며, 그것은 영구적인 군사 무기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5][35] 결국 수동식 일제 사격 방식의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기술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이후 등장하는 완전 자동 기관총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세당 전투에서의 패배와 나폴레옹 3세의 퇴위 이후, 레옹 갬베타가 이끄는 공화 정부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파리 포위 중에도 일부 미트라이외즈의 수리와 제작이 이루어졌으며, 낭트에서는 드 레피의 지휘 하에 파괴되거나 노획된 물량을 대체하기 위해 122문의 미트라이외즈가 추가로 생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육군은 1871년에 야전에서의 미트라이외즈 운용을 중단했다.
2. 4. 전쟁 이후의 퇴역과 기관총 발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점차 퇴역 수순을 밟았다. 전쟁 직후인 1871년 5월, 프로이센과의 휴전 이후 아돌프 티에르가 이끄는 정부군은 파리 코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체포된 코뮌 지지자들을 불로뉴 숲 등지에서 처형하는 데 레피 미트라이외즈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기록상 레피 미트라이외즈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사례 중 하나이다.전쟁에서 살아남은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총 268정이었으며, 프로이센군에 노획되었던 122정은 1875년 런던의 무기 거래상을 통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5년까지 프랑스에 남아있던 미트라이외즈들은 주로 동부 국경 요새의 해자를 방어하기 위한 고정 진지용 무기로 전환되었다. 이후 기술 발전에 따라 점차 도태되어, 마지막 남은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1908년 동부 요새에서 완전히 철거되어 폐기되었다.
미트라이외즈의 저조한 성능이 기관총 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일부 역사가(J. Willbanks 등)는 미트라이외즈의 실패가 특히 유럽 대륙 국가들의 기관총 채택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1897년 오치키스 기관총을 채택하기 전까지 자동 기관총 도입에 소극적이었으며, 이후 오치키스 M1914 기관총과 생테티엔 Mle 1907 등을 채용했다. 프랑스군이 맥심 기관총과 같은 초기 자동 기관총을 여러 차례 시험했음에도 불구하고[20][37] 실제 채택이 늦어진 것은 미트라이외즈의 실패 경험에서 비롯된 신중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전쟁 직후 프랑스는 미트라이외즈와 같은 보병 지원 화기보다는 야전 포병 전력 강화에 더 집중했다. 1870-71년 전쟁에서 드러난 프랑스 포병의 문제점은 드 방주 시스템(1877)과 같은 신형 야포 개발과,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카농 드 75 모델 1897 야포의 신속한 도입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분당 15발의 속사 능력을 갖춘 75mm 야포 한 문은 최대 6km 거리까지 분당 4,350개의 산탄 파편을 투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최대 2km 거리에서 분당 75발을 발사하는 레피 미트라이외즈와 비교할 때 30년 만에 화력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장거리 포격 능력 강화와 별개로, 근거리 및 중거리에서 보병을 직접 지원할 효과적인 무기의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871년부터 189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양한 수동식 연발 기관총(개틀링 건 등)이 개발되어 여러 유럽 국가 군대에 채택되었다. 특히 개틀링 건은 대량으로 구매되어 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등지에서의 식민지 전쟁에 널리 사용되었다. 프랑스군 또한 전쟁 중이던 1871년 초 르 망 전투 등에서 25정의 개틀링 건을 운용했으며, 해군과 요새 방어용으로 미국 망명자 벤자민 B. 오치키스가 프랑스에서 설립한 회사에서 제작한 수동식 37mm 리볼버 캐논("카논-리볼버")을 1879년부터 도입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이르러 맥심 기관총, 콜트-브라우닝 M1895, 오치키스 기관총(1897년형)과 같은 완전 자동식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개틀링 건을 비롯한 수동식 기관총들은 점차 퇴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동 기관총들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전장의 핵심 무기로 자리 잡게 된다.
3. 기술적 특징
미트라이외즈는 여러 개의 강선이 파인 총신을 하나로 묶어 기존의 화포용 포가에 거치하거나 삼각대(일부 모델)에 탑재한 형태의 무기이다. 탄약은 하나의 블록에 담겨 총신 뒤쪽 약실로 장전되었으며, 수동 레버나 나사를 조작해 모든 총신을 동시에 장전하고, 다른 레버나 크랭크를 빠르게 조작하여 각 총신을 연속적으로 발사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커피 분쇄기'(moulin à café|물랭 아 카페프랑스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는 남북 전쟁 당시 미국에서 사용된 수동식 커피 밀 건과 유사한 별명이다.
탄약 블록은 발사 후 수동으로 제거하고 다음 블록을 삽입해야 했다. 개틀링포나 이후의 자동 화기와 달리 장전과 발사가 모두 수동이었지만, 당시 보병용 소총에 비해 발사 속도가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24]
미트라이외즈는 개발 시기와 목적에 따라 여러 파생형이 존재했으며, 주로 총신의 수와 구경으로 구분된다. 주요 파생형은 다음과 같다.
형식 명칭 | 총신 수 | 총신 배치 | 구경 | 개발 연도1 | 비고 |
---|---|---|---|---|---|
Fafschamps | 50 | 집속 | 1851년 | 뇌관 발화, 종이 탄피. 시제품 및 설계도. | |
Christophe-Montigny | 37 | 집속 | 11mm | 1863년 | 벨기에 육군 주로 사용. |
Reffye | 25 | 5열(5 x 5) | 13mm | 1865년 | 프랑스 육군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사용. |
Bollée | 30 | 이중 원형 (외륜 18, 내륜 12) | 13mm | 1870년 | 프랑스 육군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사용[25]. |
Chevalier et Grenier | 16 | 수평 2열 (2 x 8) | 11mm | 1870년 | |
Gabert | 04 | 불명 | 11mm | 1870년 | 삼각대 탑재. |
비고: [1] 개발된 연도 |
대부분의 미트라이외즈는 포가에 탑재되어 운용되었으며, 이 때문에 총 본체와 포가를 합친 무게가 최대 900kg에 달해 전장에서 다루기에는 다소 무겁고 번거로웠다. Reffye 미트라이외즈의 약 3분의 1에는 1871년 후반부터 사수를 보호하기 위한 강철 방패가 장착되기도 했는데,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3. 1. 설계 및 작동 방식
미트라이외즈는 여러 개의 강선 총열을 하나로 묶어 일반적인 포병 포가나 삼각대(일부 모델)에 장착한 형태였다. 탄약은 하나의 블록에 고정되어, 총열 뒤쪽의 열린 약실 부분에 배치되었다. 모든 총열은 수동 레버나 큰 수평 나사를 이용해 동시에 장전되었다. 장전 후에는 다른 레버를 빠르게 조작하거나 크랭크(일부 모델)를 돌려 각 총열을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런 작동 방식 때문에 '물랭 아 카페'(moulin à café|물랭 아 카페프랑스어, 커피 분쇄기)라는 프랑스어 별명이 붙었다. 이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수동 크랭크로 기계적 장전을 하던 커피 밀 건과 유사한 별명이다.
탄약이 담긴 판(블록)은 발사 후 수동으로 제거하고 새로운 탄약판을 삽입해야 했다. 개틀링 건이나 이후 등장한 자동화기와 달리, 장전과 발사 과정 전체가 수동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표준 보병용 소총과 비교하면 발사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점이 미트라이외즈의 주요 혁신이었다.[5][24]
미트라이외즈는 총열 수와 구경에 따라 여러 파생형이 개발되었다. 주요 파생형은 다음과 같다.
변형 이름 | 총열 수 | 총열 배열 | 구경 | 개발 연도[1] | 비고 |
---|---|---|---|---|---|
Fafschamps | 50 | 묶음 | 1851 | 바늘식 점화, 종이 카트리지. 시제품 및 도면. | |
Christophe-Montigny | 37 | 묶음 | 11mm | 1863 | 벨기에에서 개발, 주로 벨기에군 사용. |
Reffye | 25 | 5열 (5 × 5) | 13mm | 1865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군 주력 사용. |
Bollée | 30 | 이중 원형 고리 (바깥 18, 안 12) | 13mm | 1870 | 프랑스 로아르 군에서 사용.[6][25] |
Chevalier & Grenier | 16 | 수평 2열 (2 × 8) | 11mm | 1870 | |
Gabert | 4 | 각 4개의 총열에 2개의 약실. 4개 사용 중 4개 재장전 가능.[2] | 11mm | 1870 | 삼각대 장착형. |
비고: [1] 개발 연도 [2] 웹사이트(www.mitrailleuse.fr/Historique/Aballes/Aballes.htm) 번역 참고 |
대부분의 미트라이외즈는 포병용 포가에 실려 운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무겁고(총과 포가 무게 합쳐 최대 900kg) 전장에서 다루기 어려웠다. Reffye 미트라이외즈 중 약 3분의 1에는 사수를 보호하기 위한 강철 방패가 부착되었는데,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반인 1871년경 전장 상황을 반영하여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3. 2. 탄약 및 발사 속도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당시 탄약 설계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가피야(Gaupillat)가 설계한 13mm 중앙점화식 탄약을 사용했다.[7] 이 탄약은 현대의 길쭉한 산탄총 쉘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였는데, 테두리가 있는 황동제 탄두 캡과 짙은 파란색의 경화 골판지 몸체로 이루어졌다.[8] 무게 50g, 구경 13mm의 패치 부착 탄두는 12g의 압축 흑색 화약으로 추진되었으며, 포구 속도는 480m/s에 달했다. 이는 샤스포 소총이나 드라이제 소총의 탄약보다 3.5배나 강력한 것으로, 당시 존재했던 가장 강력한 소총 구경 탄약이었다.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구경 11mm 샤스포 소총용의 종이 탄약통과는 호환되지 않았다.미트라이외즈는 수동으로 장전했기 때문에 발사 속도는 조작자의 숙련도에 크게 좌우되었다. 숙련된 조작자가 운용하는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일반적인 운용 시 분당 4회의 일제 사격(총 100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비상시에는 분당 5회(총 125발)까지 발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각 일제 사격(25발)의 발사 속도는 포수가 총미부 우측에 장착된 작은 수동 크랭크를 조작함으로써 조절되었다. 즉, 25개의 총열이 동시에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연속해서 발사되는 방식이었다.
13mm 중앙점화식 탄약은 교체 가능한 강철 약실 블록 안으로 장전되었다. 이는 탄약이 탄약판의 기반에 고정되는 방식의 몽티니 미트라이외즈와는 다른 점이다. 미트라이외즈를 발사할 때는 3개의 약실 블록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는데, 하나는 발사하고, 다른 하나는 추출기 위에서 빈 탄피를 제거하며, 나머지 하나는 미리 포장된 25발들이 탄약 상자에서 탄약을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레피 미트라이외즈는 675kg에 달하는 무게 덕분에 발사 중 반동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각 일제 사격 후 표적을 다시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반동 부재는 레피가 기존 야포에 비해 미트라이외즈가 갖는 상당한 이점이라고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표적까지의 거리에 따라 고도를 조정하는 것은 일반 야포처럼 승강 나사를 사용했다. 미트라이외즈의 총열 묶음은 발사 중 좌우로 움직일 수 있어, 필요에 따라 사거리를 조정하고 측면으로 제압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우로 움직이는 범위(사각)는 좁아서, 먼 거리에서만 효과적이었고 근거리에서는 충분한 각도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러한 좁은 사격 범위 때문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로이센 병사들이 종종 여러 발의 총알에 한꺼번에 맞는 경우가 있었다.[9] 1870년 8월 6일 알자스 지방의 포르바흐 전투에서는 프로이센 장군인 브루노 폰 프랑수아가 600m 거리에서 발사된 4발의 미트라이외즈 탄환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프랑스 포병은 단거리 점 방어를 위해 하나의 탄약통에서 세 발의 총알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특수 탄약을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다.

3. 3. 변형 모델
미트라이외즈는 기본적인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여러 변형 모델이 개발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여러 개의 강선 총신을 하나로 묶어 통상적인 포병용 포가나 삼각대(일부 모델)에 장착하는 형태를 가졌다. 탄약은 하나의 블록에 고정되어 총신 후미의 약실 부분에 장전되었다. 모든 총신은 수동 레버나 큰 수평 나사를 이용해 동시에 장전되었으며, 두 번째 레버를 빠르게 조작하거나 크랭크를 돌려(일부 모델) 각 총신을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동 방식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커피 분쇄기'라는 의미의 moulin à café프랑스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수동 크랭크로 작동하는 커피 밀 건과 유사한 작명이다.탄약 블록은 발사 후 수동으로 제거하고 새로운 블록을 삽입해야 했다. 개틀링 건이나 이후 등장한 자동화기와 달리 장전과 발사 전 과정이 수동으로 이루어졌지만, 당시 표준 보병용 소총에 비하면 발사 속도를 크게 향상시킨 것이 미트라이외즈의 혁신적인 부분이었다.[5][24]
주요 변형 모델들은 총신의 수와 구경에서 차이를 보이며, 그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형식 명칭 | 총신 수 | 총신 배치 | 구경 | 개발 연도1 | 비고 |
---|---|---|---|---|---|
Fafschamps | 50 | 집속 | 미상 | 1851 | 바늘식 점화, 종이 탄피 사용. 시제품 및 설계도 단계. |
Christophe-Montigny | 37 | 집속 | 11mm | 1863 | 개인적으로 개발, 주로 벨기에군에서 사용. |
Reffye | 25 | 5열 (5 × 5) | 13mm | 1865 |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랑스 육군에서 널리 사용. |
Bollée | 30 | 이중 원형 (외륜 18, 내륜 12) | 13mm | 1870 |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프랑스 로아르 군에서 사용.[6][25] |
Chevalier et Grenier | 16 | 수평 2열 (2 × 8) | 11mm | 1870 | |
Gabert | 4 | 불명2 | 11mm | 1870 | 다른 모델과 달리 삼각대 장착. |
비고: 1. 개발된 연도. 2. 일부 자료[5]에 따르면 각 4개의 총신을 가진 챔버 2개로 구성되어, 4개의 챔버가 사용되는 동안 나머지 4개를 재장전하는 방식이었다고 하나, 정확한 배열은 불명확하다. |
대부분의 미트라이외즈 모델은 포병용 포가에 탑재되어 운용되었다. 이 때문에 총과 포가를 합친 무게가 최대 900kg에 달해 전장에서 다루기 무겁고 번거로웠다. Reffye 미트라이외즈의 약 3분의 1 정도는 1871년 후반부터 사수를 보호하기 위한 강철 방패를 장착했는데, 이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4. 운용 교리 및 전술적 한계
프랑스군은 미트라이외즈를 보병 지원 화기가 아닌 포병 무기로 운용했는데, 이는 이후 기관총이 맡게 될 역할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실제로 미트라이외즈의 공식 명칭은 le Canon à Balles|르 카농 아 발fra로, 문자 그대로 "총알을 발사하는 대포"를 의미했다.[11][31] 개발자인 오귀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는 이 무기가 1000m에서 2500m의 장거리에서 포도탄의 역할을 대체해야 한다고 보았다.
포병 무기로 분류되었기에 미트라이외즈는 포병 부대에 배속되어 운용되었으며[12][32], 각 포대는 6문의 미트라이외즈와 6명의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포병으로서 미트라이외즈를 전장에 투입한 운용 교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개념이었다. 당시 프로이센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드라이제 니들 건의 사격을 피하기 위해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종종 1400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 배치되었다. 이는 미트라이외즈의 유효 사거리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의 조준기로는 정확한 조준과 탄착 확인이 매우 어려웠다. 현대의 기관총이 유효 사거리 내에서 운용되는 것과 달리, 미트라이외즈는 종종 최대 사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광학 장비 없이 운용되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운용상의 문제점과 기술적 한계, 승무원의 미숙함 등이 겹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미트라이외즈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능을 보였다.
4. 1. 프랑스군의 운용 교리
프랑스 육군은 미트라이외즈를 보병 지원 화기가 아닌 포병 무기로 사용했는데, 이는 이후 기관총이 맡게 된 역할과는 달랐다. 실제로 프랑스 육군에서 레피 미트라이외즈의 공식 명칭은 le Canon à Balles|르 카농 아 발fra였으며, 이는 문자 그대로 "총알을 발사하는 대포"로 번역될 수 있다.개발자인 오귀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는 미트라이외즈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 "미트라이외즈의 사격을 소총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미트라이외즈의 임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기는 소총이 더 이상 유효 사거리에 있지 않은 거리에서 효과적으로 사격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1000m에서 2500m의 먼 거리에서 포도탄의 부족을 보충해야 한다."[11]
미트라이외즈는 포병에 의해 개발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포병이 운용했으며, 일반적인 4파운드 야포를 갖춘 포병 부대에 배속되었다.[12] 각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6문의 포로 구성되었고, 각 포에는 6명의 포병이 배치되었다. 한 명은 발사를 담당하고, 다른 한 명은 넓은 범위에 사격하기 위해 포를 수평으로 움직였다. 나머지 네 명은 조준, 장전 및 재장전을 맡았다. 레피는 미트라이외즈가 기존 포와는 다른 특별한 무기이며, 그에 맞는 운용법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 "미트라이외즈의 사용은 일반 대포의 사용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이 무기의 사용과 임무는 포병 전술을 크게 수정한다... 이 무기의 사용법을 이해하는 장교는 극히 적지만, 이 무기는 사용 방식에 따라 위험할 뿐이다... 미트라이외즈 지지자는 전쟁 동안 이를 운용한 젊은이들에게서 발견되지만, 상급 장교 중에는 훨씬 더 적다."[11]
그러나 미트라이외즈를 포병 무기로 전장에 투입하는 개념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드라이제 니들 건 소총 사격을 피하기 위해,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프로이센 전선에서 약 1400m 이상 떨어진 곳에 체계적으로 배치되었다. 미트라이외즈의 최대 사거리는 3400m에 달했지만, 교전 거리는 프랑스 야전 포병의 사거리보다는 짧은 2000m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도 당시의 단순한 조준기로는 정확한 사격과 목표 선정이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멀리서 미트라이외즈 총알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관측하는 것은 적의 대열이 총알에 맞아 흩어지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최대 사거리보다 훨씬 짧은 유효 사거리 내에서 주로 운용되는 현대의 기관총과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M60 기관총은 최대 사거리가 3725m이지만 일반적으로 유효 사거리인 1100m 이내에서 사용된다. 반면 미트라이외즈는 종종 최대 사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광학 조준 장비의 도움 없이 운용되었다. 이러한 미트라이외즈 운용상의 결함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4. 2. 전술적 한계
프랑스군은 미트라이외즈를 보병 지원 화기가 아닌 포병 무기로 운용했는데, 이는 이후 기관총이 맡게 될 역할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실제로 미트라이외즈의 공식 명칭은 ''le Canon à Balles''로, 문자 그대로 "총알을 발사하는 대포"를 의미했다. 개발자인 오귀스트 베르셰르 드 레피는 미트라이외즈를 포병 무기로 간주하며, "미트라이외즈의 사격과 소총의 사격을 비교하는 것은 미트라이외즈의 역할을 오해하는 것"이며, "소총이 더 이상 유효 사거리에 있지 않은 거리에서 효과적으로 사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31] 그는 이 무기가 1000m에서 2500m 거리에서 포도탄(산탄)의 부족함을 보충해야 한다고 보았다.포병 무기로 분류되었기에 미트라이외즈는 포병 부대에 배속되어 운용되었다.[12][32] 각 포대는 6문의 미트라이외즈와 6명의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포병으로서 미트라이외즈를 전장에 투입한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개념이었다. 당시 프로이센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드라이제 니들 건의 사격을 피하기 위해,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프로이센 전선에서 약 1400m 이상 떨어진 곳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트라이외즈의 최대 사거리는 3400m에 달했지만, 실제 교전 거리는 프랑스 야전 포병의 사거리보다 짧은 2000m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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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먼 거리에서의 운용은 심각한 정확도 문제를 야기했다. 1400m가 넘는 거리에서 일반적인 가늠자만으로는 정확한 조준이 매우 어려웠으며, 광학 조준 장비도 없었다. 또한, 멀리서 미트라이외즈 탄환의 탄착 지점을 관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현대의 기관총이 최대 사거리보다 훨씬 짧은 유효 사거리 내에서 운용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M60 기관총은 최대 사거리 3725m에 비해 유효 사거리는 1100m 이내에서 주로 사용된다. 미트라이외즈는 종종 최대 사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운용되었고, 이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기 자체의 기술적 문제와 운용상의 미숙함도 한계로 작용했다. 25발을 동시에 발사하는 방식은 탄착군이 지나치게 좁게 형성되어 효과적인 제압 사격에 필요한 측면 분산이 부족했다. 복잡한 발사 메커니즘은 흑색 화약 연소 잔류물로 인해 오염되기 쉬웠고, 이는 장시간 사격 시 작동 불량을 일으켰다. 또한, 경험이 부족한 승무원들은 이 복잡한 메커니즘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종종 고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1870년 전쟁 발발 당시, 미트라이외즈 포대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편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포병들은 대부분 미트라이외즈 조작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고, 조준과 거리 측정의 특성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많은 지휘관들은 이 무기의 존재나 효과적인 운용법조차 몰랐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원수는 세당 전투에서 처음 미트라이외즈를 보았다고 할 정도였다.
thumb 중 공격받는 레피 미트라이외즈의 위치]]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미트라이외즈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물론 그라벨로트 전투에서 바르베 대위의 포대가 밀집한 프로이센 보병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성공적인 사례도 있었지만[11], 대부분의 경우 미트라이외즈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전쟁 후, 샤스포 소총이 미트라이외즈보다 훨씬 더 많은 프로이센군 사상자를 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투입된 수량(샤스포 약 10만 정, 미트라이외즈 200정 미만)의 차이를 감안해야 하지만, 미트라이외즈의 전술적 실패는 분명했다.
프로이센과 외국 관찰자들은 미트라이외즈의 성능에 감명받지 못했다. 프로이센 측은 선전 목적상 미트라이외즈의 효과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 무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여 우선적인 공격 목표로 삼았다. 프로이센 군인들은 미트라이외즈의 독특한 발사음을 빗대어 Höllenmaschine|횔렌마쉬네deu("지옥 기계")라고 불렀다.[13][33]
미트라이외즈의 실패는 속사 무기 자체의 효용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34] 당시 전쟁을 관찰한 미국 육군의 윌리엄 밥콕 헤이즌 장군은 "프랑스 미트라이외즈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그것을 매우 경멸하며, 그것은 영구적인 군사 무기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5][35] 결과적으로 레피 미트라이외즈와 같은 수동식 일제 사격총은 기술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곧 하이럼 맥심 등이 개발한 완전 자동 기관총으로 대체되었다.
5. 미트라외즈의 영향과 유산
(내용 없음)
5. 1. 군사 기술 발전에 미친 영향
미트라이외즈의 저조한 성능이 군사 기술 발전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J. Willbanks는 그의 저서 ''기관총: 삽화로 보는 역사''에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미트라이외즈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서, 특히 유럽 대륙의 군대들이 기관총 무기를 채택하는 데 오랜 시간 주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1897년 오치키스 기관총을 채택하기 전까지 자동 기관총을 도입하지 않았으며, 이후 오치키스 M1914 기관총과 생테티엔 Mle 1907 기관총을 차례로 도입했다. 프랑스 군대가 기관총 채택에 상대적으로 늦었던 이유 중 하나로 미트라이외즈의 실패로 인한 경계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듯, 맥심 기관총은 처음 등장한 이후 프랑스군에 의해 여러 차례 시험되었다.[20][37]한편,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직후 프랑스는 야전 포병의 개선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1870년~1871년 전역에서 프랑스 포병이 겪었던 실패는 드 방주가 개발한 야전 포병 시스템(1877년)과, 이후 유명해진 카농 드 75 모델 1897 야포를 신속하게 도입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분당 15발의 평균 발사 속도를 가진 75mm 야포 한 문은 최대 6km 거리까지 분당 4,350개의 치명적인 산탄 파편을 투사할 수 있었다. 이는 최대 2km 거리에서 분당 75발을 발사하는 레피 미트라이외즈와 비교했을 때, 30년 만에 무기 시스템의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거리 포병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단거리 및 중거리 보병 지원 무기에 대한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871년부터 189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양한 신형 수동식 기관총이 개발되어 많은 유럽 군대에 채택되었다. 특히 개틀링 건은 미국에서 대량으로 구매되어 서유럽 열강들에 의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에 사용되었다. 프랑스군 역시 1871년 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25대의 개틀링 건을 실전에 투입했으며, 특히 프랑스 서부 르 망에서의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또한 프랑스 해군과 동부 요새 방어를 위해, 미국 망명자 벤자민 B. 오치키스의 회사에서 1879년 이후 프랑스에서 제작한 다수의 수동식 37mm 다연장포(오치키스 "리볼버 캐논")를 구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이르러 맥심 기관총, 콜트-브라우닝 M1895, 1897년 오치키스 기관총과 같은 완전 자동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유럽 군대들은 기존의 개틀링 건 및 기타 수동 기관총을 점차 퇴역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동 기관총들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장의 핵심 무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국 미트라이외즈는 비록 전술적으로 실패했지만, 그 경험은 기관총 채택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고 프랑스의 포병 기술 발전을 가속화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더 발전된 자동화기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2. 현대 언어에서의 흔적
프랑스어에서는 1897년 오토마티크 핫치키스 기관총을 채용한 이후에도 여전히 기관총을 ''미트라이외즈''(mitrailleuse)라고 부른다. FN사의 5.56×45mm NATO탄 사용 기관총인 미니미(Minimi)는 "작은 기관총"을 의미하는 "미니-미트라이외즈"(Mini-Mitrailleuse)라는 단어에서 이름을 따왔다. 기관단총은 ''미트라이외즈''의 축소형인 ''미트라이예트''(mitraillettes) 또는 ''피스톨레 미트라이외르''(pistolets mitrailleurs, 기관총 권총)라고 불리기도 한다.네덜란드어의 경우, 네덜란드에서는 ''미트라이외르''(mitrailleur)라는 단어가 ''머신게베르''(machinegeweer, 기관총)의 동의어로 널리 사용된다. 이 단어는 원래 프랑스어 단어인 ''미트라이외즈''의 성(gender)을 변경하여 파생되었다. 하지만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에서는 프랑스어의 격식 없는 표현으로 여겨져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노르웨이어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는데, 철자는 ''미트라요세''(mitraljøse)로 약간 다르지만 발음은 비슷하다. 오늘날 노르웨이에서는 이 용어가 삼각대에 장착된 기관총, 특히 MG3(제원상 ''mitr-3''으로 표기)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이는 다목적 기관총이 도입되기 전 삼각대 장착 기관총을 가리키던 독일어 용어 ''슈베레스 마시넨게베르''(Schweres Maschinengewehr)와 유사한 용법이다.
터키어에서는 ''미트랄료즈''(mitralyöz)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미트라이외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며 한때 기관총의 동의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구식 용어로 취급된다. 지금은 ''마키넬리 튀페크''(makineli tüfek, 기관총)가 일반적인 용어이다.
포르투갈어에서는 관련 단어인 ''메트랄라도라''(metralhadora)가 사용된다. 프랑스어 ''미트라이외즈''에서 유래했지만 발음은 다르며, 모든 종류의 자동 화기를 지칭한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어에서는 ''아메트랄라로라''(ametralladora)가 기관총을 의미하며, ''메트랄레타''(metralleta)는 기관단총을 의미하는데 이는 프랑스어 ''미트라이예트''와 관련이 있다.
이 단어는 다른 유럽 언어에도 흔적을 남겼다. 루마니아어에서는 기관총의 일반적인 용어로 ''미트랄리에러''(mitralieră)가 사용된다. 슬로베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에서는 ''미트랄레즈''(mitraljez)라고 하며, 알바니아어에서는 ''미트랄로즈''(mitraloz)라고 한다. 그리스어에서는 ''미드랄리오볼로''(μυδραλιοβόλο)가 기관총을 지칭하는 다소 오래된 용어로 남아있다.
현대 이탈리아어에서 기관총을 의미하는 ''미트랄리아트리체''(Mitragliatrice) 역시 ''미트라이외즈''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5. 3. 한국사와의 연관성
미트라이외즈가 한국사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은 서구 열강이 발전된 군사 기술을 앞세워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하던 제국주의 시대였으며, 미트라이외즈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신무기 중 하나였다.당시 조선은 서구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미트라이외즈와 같은 연사 무기의 등장은 조선이 가진 군사력의 한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이는 일부 지식인과 관료들, 특히 개화파를 중심으로 서구의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국가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근대화 논의를 촉발하는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 즉, 미트라이외즈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19세기 후반 조선이 마주했던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개혁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맥락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6. 현존하는 미트라외즈
오리지널 미트라외즈는 여러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 내 앵발리드 육군 박물관(fr)에는 2문의 미트라외즈가 있다. 이들은 비로부터 보호되기는 했지만 야외에 놓여 1세기 이상 외기에 노출되어 심하게 손상되었다. 최근 박물관 소장 미트라외즈 2문 중 1문에 현대에 제작된 사각 방패가 부착되었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투입된 레피 미트라외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 벨기에 브뤼셀의 왕립 군사 박물관(fr)에서도 미트라외즈를 볼 수 있다.
- 스위스 모르주의 보 군사 박물관(fr)에는 새것과 같은 상태로 완벽하게 보존된 레피 미트라외즈가 있다.
- 독일 하이테르스하임(프라이부르크 근처)의 드라이에크란트 박물관(de)에는 잘 보존된 레피 미트라외즈가 소장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 독일 베를린 스판다우 시타델의 퍼레이드 홀에는 1867년에 제작된 미트라외즈가 보스케 장군의 이름을 따서 무기고 안에 전시되어 있다.
- 독일 드레스덴의 독일 연방군 군사사 박물관에는 매우 훌륭하게 보존된 미트라외즈가 전시되어 있다. (위 이미지 참조)
- 폴란드 바르샤바의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는 루이 파이유 장군의 이름을 딴 미트라외즈가 있다.
-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 섬의 코로나도 스타 파크에는 조셉 헨리 펜들턴 소장이 기증한 약 1850년 제작 벨기에 미트라외즈가 전시되어 있다. (위 이미지 참조)
참조
[1]
웹사이트
Marines in the Dominican Republic 1916–1924
https://www.marines.[...]
[2]
서적
The Gatling Gun
https://books.google[...]
[3]
서적
Machine Guns: Their History and Tactical Employment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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