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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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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영만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했다. 1937년에는 민족자주의식을 선양하려다 원고를 압수당했으며,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친일 문인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망명하여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광복군가인 「압록강행진곡」을 작사하고, 미군과의 협력을 추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2019년에는 병역명문가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한편,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은 박정희가 광복군 비밀 요원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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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만
기본 정보
박영만 아나운서 사진
박영만 아나운서
출생1965년 10월 26일
직업아나운서
소속KBS
배우자비공개
자녀2남
학력
학력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사

2. 생애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학창 시절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고 문학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광복군에 투신하였다.[1] 광복군 활동 중 군가 「압록강 행진곡」을 작사하였으며, 미군 전략정보처(OSS)와의 협력 및 한미합작훈련 추진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다.[1][2]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았으며, 1981년 사망하였다.[1]

2. 1.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다. 1929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7년에는 『조선전래동화집』과 「선구자」 등을 저술하고 작곡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려 했으나, 이로 인해 원고를 압수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

1940년부터 1942년 사이에는 친일 문인으로 평가받는 이광수, 최재서 등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다른 문인들에게 배포하다가 발각되었다. 이후 중국 산시성 극난파(克難坡)로 망명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다.[1]

1943년 2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광복군 군가인 「압록강 행진곡」을 작사하여 광복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미군 전략정보처(OSS) 내에 한국인 공작반을 설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같은 해 11월, 김구의 부름을 받고 충칭으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OSS 내 한국인 공작반에 특파되어 일본군 내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광복군의 중요성을 알려 미군이 광복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한미합작훈련을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1]

1944년 5월에는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선전과원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 6월에는 지대장 이범석을 도와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성공적으로 실시하는 데 힘썼다. 이후 광복군총사령부 선전과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1]

2. 2. 서훈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1981년 사망한 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1]

또한, 2019년 5월 23일 열린 제16회 병역명문가 시상식에서 박영만 선생의 가문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의 가문은 1대인 박영만 선생의 한국광복군 활동을 포함하여 총 7명이 195개월간 군 복무를 이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병역명문가로 선정되었다.[2]

3. 소설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광복군설 논란

1967년 작가 박영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 『광복군』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박정희가 해방 이전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처럼 묘사하며, 이후 박정희의 비밀 광복군설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박정희의 실제 행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중론이다. 박정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다른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임시로 광복군에 편입된, 이른바 '해방 후 광복군'으로 분류된다.[3] 이 편입 과정과 성격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과 논란이 존재한다.[4][5][10]

소설 『광복군』의 내용은 출간 당시부터 광복군 출신 장준하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강한 비판과 반발에 직면했다.[7] 또한 박정희 본인도 소설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하여 책을 수거하도록 지시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은 이후 일부 기록물이나 대중 매체에 영향을 미치며 논란을 이어갔다.[11][12][13]

3. 1. 소설 『광복군』의 내용과 논란

박영만은 1967년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요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 『광복군』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상권에서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을, 하권에서는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박정희가 비밀 독립군이었다는 주장은 이 소설에서 비롯되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해방 직후 중국 베이징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많은 조선 청년들이 모여들었으며, 그 수는 약 4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에는 만주군 대위 출신 신현준과 중위 출신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파견하여 이들에게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고,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으로 분류된다.[3]

박정희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이들을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에 따르면, 해방 이후 편입된 병력은 베이징 1,300여 명, 난징 800여 명, 상하이 1,300여 명 등에 달했다.[4]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평잠편지대(北平暫編支隊)로 추정되며, 일부 증언에서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이었는데, 그는 해방 이전에는 광복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질적인 광복군 부대라기보다는 해방이라는 급변 상황 속에서 광복군이 세력 확대를 위해 명칭을 부여한 것에 가까우며, 사실상 포로수용부대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 부대를 관리했던 중국 측 기관의 명칭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5]

박영만의 소설 『광복군』은 박정희가 해방 이전부터 비밀 광복군 요원이었다고 묘사하며, 해방 후 광복군 편입 사실을 사실과 다른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소설은 박정희와 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밀명을 받고 1945년 7월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거짓으로 밝혀졌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증언한 이용(李龍, 해방 전 이름 이집용 李集龍) 등은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6]

광복군 출신 장준하는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출간된 소설 『광복군』에 대해, 친일 경력이 있는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미화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당시 야당 후보였던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 유세에서 "현재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었다고 쓰인 책이 있는데 전부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었기에 정확히 아는데, 그는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의 이러한 발언들을 중요 상황으로 보고하며 기록으로 남겼다.[7]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이 청와대로부터 대가를 기대하고 소설을 썼으나, 내용을 본 박정희 대통령이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분노했고, 결국 박영만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했으며 출판기념회조차 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8]

소설 출간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이종찬 전 국회의원은 1967~68년경 중앙정보부에 『광복군』 책을 전량 수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책 내용을 보고 "이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해방 후 김학규 장군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을 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훈련시킨 적은 있지만, 이는 해방 이후의 일이다.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책 수거를 지시했다고 한다.[9]

한편, 박정희가 '해방 후 광복군'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김홍신 웹사이트 '박정희 광복군 편입은 허위날조'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 항일투사 이재현(당시 북평 판사처 주임, 광복군 소령)이 만주군 해체 후 베이징에서 배회하던 박정희를 체포하여 한국으로 송환한 책임자였다고 한다. 당시 북평 판사처의 주요 임무는 중국 내 동포와 한국 국적 일본군 출신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편의상 신현준을 대대장으로, 이주일과 박정희를 중대장으로 임명하여 통솔하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가 정식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었다는 주장과 배치된다.[10]

소설 『광복군』의 내용은 이후 여러 자료에 영향을 미쳐 사실처럼 유포되었다.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에는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고 기술되어 있다.[11]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은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1945년 2월 신태양악극단 공연 당시 공작원 이용기가 박정희와 신현준에게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전달하여 비밀 요원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서술했다.[11]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박정희가 소속되었다고 주장된 '철석부대'는 그가 근무한 적 없는 부대이며, 실제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 송석하 등은 생전에 박정희가 부대에 온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또한 신태양악극단 단장이었던 작곡가 손목인과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 영화배우 황해 등도 이용기라는 인물이나 철석부대 위문 공연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박정희와 만주군 제8단에서 함께 근무했던 방원철 역시 부대에 연예인이 위문 온 사실이 없으며 박정희가 부임 후 주둔지를 떠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12]

소설 『광복군』에서 비롯된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은 이후에도 영향을 미쳐,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나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등에서 박정희가 독립군으로 활동한 것처럼 묘사되어 독립운동가 관련 단체 등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13]

3. 2.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1967년 박영만은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요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 <광복군>을 펴냈다. 상권은 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장군을, 하권은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 소설은 이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밀독립군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해방 직후 중국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약 400여 명의 조선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이 중에는 만주군 대위 출신 신현준과 중위 출신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파견하여 이들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임시 편입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2중대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으로 분류된다.[3] 박정희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장교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에 따르면, 해방 이후 편입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1,300여 명, 난징 800여 명, 상하이 1,300여 명에 달했다.[4]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평잠편지대 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로 추정된다. 이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신현준은 해방 이전에는 광복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질적인 광복군 부대라기보다는 해방이라는 급변 상황 속에서 광복군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명칭을 부여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을 관리했던 중국 측 기관의 명칭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5]

박영만의 소설 <광복군>은 박정희와 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고 1945년 7월 베이징에서 철석부대로 복귀하는 등 비밀 광복군 활동을 했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증언한 이용(李龍, 해방 전 이름 이집용(李集龍))은 이러한 내용이 거짓이라고 증언했다.[6]

광복군 출신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춰 출간된 소설 <광복군>에 대해,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미화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 유세에서 "지금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의 이러한 발언을 중요 상황 보고로 기록했다.[7]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8]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이종찬 전 국회의원 역시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중앙정보부에 <광복군> 책을 모두 수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증언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책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의 일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 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책 수거를 지시했다고 전했다.[9]

한편, 박정희가 '해방 후 광복군'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길거리를 배회하다 체포되어 송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김홍신의 홈페이지 '박정희 광복군 편입은 허위날조'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 항일투사 이재현(광복군 소령, 북평 판사처 주임)이 일제 패망 후 만주군 8단 해체 뒤 베이징 길거리를 배회하던 박정희를 체포하여 국내로 송환한 책임자였다고 한다. 당시 북평 판사처는 재중 동포와 한국 국적 일본군들의 본국 송환을 담당했으며, 일본군 출신들을 통솔하기 위해 신현준을 대대장으로, 이주일과 박정희를 중대장으로 임명하여 송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가 광복군 3지대에 정식 편입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다.[10]

소설 <광복군>에 근거한 허위 정보는 이후에도 계속 유통되었다.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와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졸업생' 등에도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쪽)

> “신태양악극단이 1945년 2월 9일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육사 졸업생’ 26쪽)[11]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 박정희가 소속되었다고 언급된 철석부대(만주군 6관구 보병 8단) 출신인 박창암, 송석하 등은 생전에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또한 '신태양 악극단' 단장이었던 작곡가 손목인과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 영화배우 황해 등도 공작원으로 지목된 이용기라는 인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박정희와 8단에 함께 근무했던 방원철 역시 "8단 시절 연예인이 부대로 위문 온 적이 없었다"며 "박정희는 8단 부임 이후 반벽산(단 본부 소재지)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증언하여 소설과 기록의 허구성을 뒷받침했다.[12]

소설 <광복군>의 영향은 이후에도 이어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등에서 박정희가 독립군으로 활동한 것처럼 묘사되어 독립운동가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13]

3. 3. 소설 『광복군』의 영향

1967년 박영만은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요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 『광복군』을 펴냈다. 이 소설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는데, 상권은 광복군 제3지대장 백파 김학규 장군을, 하권은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 소설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밀독립군설의 시초가 되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해방 직후 중국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약 400여 명의 조선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이 중에는 만주군 대위 출신 신현준과 중위 출신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파견하여 이들에게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고,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 휘하로 임시 편입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제3지대 1대대 2중대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에 해당한다.[3]

박정희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장교들이 광복군에 편입된 것은,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한국독립당의 방침 때문이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에 따르면, 해방 이후 광복군에 편입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에서 1,300여 명, 난징에서 800여 명, 상하이에서 1,300여 명에 달했다.[4]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평잠편지대(北平暫編支隊)로 추정되며, 일부 증언에서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은 북평(베이징)과 천진(톈진)을 의미한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이었는데, 그는 해방 이전에는 광복군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질적인 광복군 부대라기보다는 해방이라는 급변 상황 속에서 광복군이 세력을 늘리기 위해 명칭을 부여한 것에 가까우며,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을 관리했던 중국 측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5]

소설 『광복군』은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와 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고 1945년 7월 베이징에서 철석부대로 복귀했다는 등의 내용은 거짓이라는 증언이 있다. 특히 간도특설대에 대해 증언한 이용(李龍, 해방 전 이름 이집용 李集龍)은 이러한 주장이 거짓임을 분명히 했다.[6]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출간된 소설 『광복군』에 대해 강하게 분노했다. 그는 친일파였던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미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장준하는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 유세에서 소설 내용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지금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의 이러한 발언을 중요 상황 보고로 상세히 기록했다.[7]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이 청와대로부터 금전적 대가를 기대하고 소설을 썼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소설 내용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을 받지 못했으며 준비했던 출판기념회도 열지 못했다고 한다.[8]

소설 출간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이종찬 전 국회의원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1967~68년경 중앙정보부에 소설 『광복군』을 모두 수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책 내용은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책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의 일로, 내가 장준하김준엽처럼 일제 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하며 책 수거를 지시했다고 한다.[9]

한편, 박정희가 '해방 후 광복군'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북경 거리를 배회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김홍신의 홈페이지 '박정희 광복군 편입은 허위날조'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 항일투사 이재현(이형진의 부친)이 당시 북평 판사처 주임(광복군 소령/지역 사령관)으로 근무하며 이러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 패망 후 박정희가 속했던 만주군 제8단이 해체되자, 그는 베이징으로 나와 거리를 배회하다가 이재현에게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평 판사처의 주요 임무는 중국 내 동포와 한국 국적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출신 인원이 많아 임시 편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신현준(대위)을 대대장으로, 이주일과 박정희(중위)를 중대장으로 임명하여 통솔 후 송환했을 뿐, 박정희가 정식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내용은 이종찬 전 정보원장이 2004년 8월 26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되었다.[10]

소설 『광복군』에 근거한 허위 정보는 이후 여러 자료로 퍼져나갔다.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와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졸업생』에도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쪽)
  •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은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신태양악극단 공작원 이용기가 1945년 2월 만주군 부대에서 박정희와 신현준을 만나 광복군 임명장을 전달하여 비밀요원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육사 졸업생’ 26쪽)[1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박정희가 근무했다는 철석부대(만주군 제6관구 보병 제8단)는 1939년 명월구에서 조선인 독립대대로 출발한 부대이지만, 박정희는 이 부대에 소속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과 송석하 등은 생전에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또한, '신태양 악극단' 단장이었던 작곡가 손목인과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 영화배우 황해 등도 이용기라는 이름이나 철석부대 위문 공연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와 제8단에서 함께 근무했던 방원철(육군 대령 예편) 역시 "8단 시절 연예인이 부대로 위문 온 적이 없었으며, 박정희는 부임 이후 부대 본부 소재지를 떠난 적이 없다"고 증언하여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기록들의 허구성을 뒷받침했다.[12]

소설 『광복군』의 영향은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등에서도 박정희를 독립군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독립운동가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13]

참조

[1] 저널 박영만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대백과
[2] 저널 3대를 이은 나라사랑, 제16회 병역명문가 시상식 https://news.naver.c[...] 정책브리핑 2019-05-23
[3] 저널 "[정정당담]잘못된 독립유공 포상 사례 셋" http://www.idomin.co[...] 경남도민일보 2018-10-22
[4] 저널 “‘ 짝퉁 광복군 ’ 수두룩하다” https://news.naver.c[...] 한겨레21 2005-06-24
[5] 저널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https://news.naver.c[...] 한겨레21 2002-10-23
[6] 저널 '"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說은 사실무근"'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6-08-08
[7] 저널 '"박정희 비밀광복군?…허무맹랑한 소설 이야기"'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15-10-23
[8] 저널 "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6-08-10
[9] 저널 "[원희복의 인물탐구]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 이종찬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다 아우르겠다”"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8-03-18
[10] 저널 박정희 광복군편입은 허위날조 http://hongshin.net/[...] 김홍신 홈페이지 2004-08-29
[11] 저널 "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6-08-10
[12] 저널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4-08-24
[13] 저널 “‘ 짝퉁 광복군 ’ 수두룩하다” https://news.naver.c[...] 한겨레21 200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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