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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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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장(潘璋)은 동오(東吳)의 무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했지만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합비 전투에서 장료를 막아 공을 세웠고, 관우 토벌에 참여하여 관우를 사로잡는 데 기여했다. 이릉 대전에서도 풍습을 죽이는 등 활약하며 평북장군에 임명되었다. 반장은 탐욕스럽고 불법적인 행위도 저질렀지만, 손권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죄를 묻지 않았다. 234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반평은 회계군으로 유배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를 사로잡은 공로로 청룡언월도를 얻고, 이릉 대전에서 관흥에게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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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반장
한자 표기潘璋
로마자 표기Pan Zhang
문규 (文珪)
출생지연주 동군 발간현
사망234년
사인병사
소속
주군손권
작위율양후 (溧陽侯)
관직고릉태수 (固陵太守)
진위장군 (振威將軍)
양양태수 (襄陽太守)
평북장군 (平北將軍)
우장군 (右將軍)
가족아들: 반평 (潘平)
생애
초기 생애반장은 연주 동군 발간현 사람이다. 성품이 경솔하고 급했으며, 술을 좋아했다. 가난하여 자주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았으나, 힘이 세고 용맹했기 때문에 주에서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손권 섬기다반장은 손권이 정벌에 나설 때마다 항상 종군하여 여러 차례 적을 격파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손권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별부사마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주요 전투 참여 및 공적합비 전투 참전
관우 생포 작전 참여
이릉 전투 참전
석정 전투 참전
관우 생포 작전219년, 여몽의 지시에 따라 마충과 함께 관우를 사로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관우를 사로잡은 후, 관우청룡언월도를 차지했다.
사망 및 사후234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반평이 뒤를 이었다.

2. 생애

반장은 난폭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술을 좋아했으며, 젊은 시절 가난했지만 언제나 술을 즐겨 마셨다. 손권을 섬겼으며, 감녕 사후 그의 군대를 합쳤다. 219년 관우 토벌에서 여몽, 주연과 협력하여 관우를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웠다. (실제로는 부하인 마충이 관우를 생포했다.)[7]

222년 이릉 대전에서는 풍습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13] 같은 해, 위나라조진, 하후상, 장합 등이 남군을 공격해 오자, 제갈근과 함께 구원군으로 참전했다. 반장은 장강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불을 붙여 흘려보내는 계책을 세웠으나, 실행 전에 위나라 군대가 철수했다.[18]

손권이 황제가 되자 반장은 우장군(右將軍)으로 승진했다. 시장 운영에 뛰어나 감독직을 맡으면서 도난, 상해 사건이 없어졌다. 또한 전쟁이 일단락되면 군대가 관리하는 시장을 열었고, 다른 부대에서 물품 부족이 있다면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보충했다.

반장이 이끄는 군대는 강력한 움직임을 보여주었으나, 그는 강한 물욕으로 금전에 집착하고,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좋아하며, 부유한 사람을 살해해 재산을 몰수하는 등 불법행위를 자주 저질렀다. 그럼에도 손권은 반장의 공적을 아껴 죄를 묻지 않았다.

234년에 사망했다.[21]

2. 1. 초기 생애와 경력

반장(潘璋)은 산둥성 관현 동쪽에 위치한 동군 발간현 출신으로, 196년에 손책의 지휘 아래 양현현의 현장이었던 14세의 손권을 따르게 되었다.[3] 반장은 술과 도박을 좋아하여 자주 돈을 빌렸는데, 채권자들에게 부자가 되면 갚겠다고 말했다. 손권은 그를 범상치 않게 여겨 총애했고, 징집 활동에 보내 100명 이상의 병사를 데려오자 무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몇몇 도적들을 물리친 후, 오군(현재의 장쑤성 쑤저우 주변)의 대시자간(경찰청장과 유사)으로 임명되어 높은 수준의 치안을 유지하여 명성을 얻었고, 그 지역의 도적 활동이 사라졌다.[7] 이후 서안현(현재의 장시성 우닝현)의 현장으로 재배치되었다.[4]

200년, 황조의 세력이 약탈과 강도 행위를 벌이자 반장이 토벌 작전을 펼쳐 사라지게 했다.[5] 형주 (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 지역)에서 도적들이 만연했고, 그 지역의 지배자 유표는 그들을 처리할 수 없었지만, 반장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에 도적들은 예장군의 경계를 넘어 약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건창현(현재의 장시성 펑신현 서쪽)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반장은 현장으로 재배치되었고, 무맹교위(武猛校尉)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 한 달 안에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흩어진 800명의 병사를 다시 모았다. 그는 건업, 즉 손권 영토의 수도로 소환되었다.[6][7]

반장은 15세의 손권이 양선현 현장이었을 때부터 그를 따랐다. 방탕한 성격으로 술을 좋아했고, 젊은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거리낌 없이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출세해서 갚겠다고 큰소리쳤다. 손권은 그의 성격을 좋아했고, 모병 임무를 담당하게 하여 모인 병사들의 부장으로 발탁했다. 후에 산월 정벌에서 공적을 세워 별부사마가 되었다.

오나라 중앙 시장의 감시역을 맡았을 때는, 시장에서 절도와 살인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명성을 높여 예장군 서안 현장이 되었다. 당시 형주유표 휘하의 자들이 몇 차례 약탈을 자행했지만, 반장이 부임한 후에는 침공이 멈추고 조용해졌다. 또한, 이웃 건창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임지를 건창으로 옮겨 무맹교위를 더했다. 한 달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흩어진 백성을 모아 병사 8백 명 정도를 늘려 건업으로 귀환했다.

2. 2. 주요 전투에서의 활약

219년 관우 토벌에서 여몽, 주연과 협력하여 관우를 사로잡았는데, 실제로 관우를 사로잡은 사람은 부하인 마충이다.[7]

222년 이릉 대전에 참가해 풍습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13] 같은 해, 위나라조진, 하후상, 장합 등이 남군을 공격해 오자, 제갈근과 함께 구원군으로 보내졌다. 반장은 장강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불을 붙여 흘려보내며, 물에 띄운 다리를 불태우려 했으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위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223년, 조비장합, 서황, 조진, 하후상 등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남군(강릉현)을 공격했다. 하후상은 3만 명의 군대를 보내 양쯔강을 건너 백리주(百里洲중국어)에 이르기 위해 부교를 건설했다. 제갈근과 양찬()은 군대를 이끌고 섬을 방어하려 했지만 위나라 군대의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반장은 "위나라 군대의 사기가 초반에 매우 높고 물때가 낮으니 아직 싸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50리 정도 상류로 이동하여 부하들에게 수천 개의 갈대 묶음을 모아 큰 뗏목에 묶어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불타는 뗏목은 강 하류로 흘러가 적의 부교를 파괴했고, 하후상은 고립될 위험을 느껴 퇴로가 막히기 전에 섬에서 군대를 철수했다.[18]

227년, 손권을 따라 석양현(현재 한천, 후베이성)에서 위나라 군과 전투에 참여했다. 문빙은 손권의 5만 명 군대에 포위되었으나, 소수의 군대로 약 20일 동안 자신의 진지를 굳게 방어했다. 손권이 퇴각하기로 결정하자 반장은 전투 후 손권 군대의 철수 동안 후위를 맡았다. 그러나 문빙은 갑자기 오나라 군대가 퇴각할 때 반격을 시작했고, 그날 밤 경계를 늦춘 반장은 적의 공격에 버틸 수 없었다. 주연은 증원군을 이끌고 적의 진격을 막아 손권의 군대가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저지한 후 철수했다.[19]

233년, 손권은 반장과 여대에게 군대를 이끌고 육구(陸口; 현재 적벽 부근의 여수호)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그는 그들에게 가까운 부기(蒲圻; 현재 적벽, 후베이성)로 주둔지를 옮기라고 지시했다.[20]

2. 2. 1. 합비 전투

215년, 손권유비에게 형주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응하지 않았다. 여몽 등과 함께 형남 삼군을 점령했으며, 여몽은 삼군을 손하에게 맡기고 그날 안에 익양으로 향했다.

합비 전투에서는 조조군의 장료가 급습하여 진무가 전사하고, 송겸서성의 군대도 패배하여 병사들이 도망가려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손권군의 선견 부대는 의기소침해졌고, 반장은 후방에서 말을 몰아 전선으로 가서 도망치는 병사 2명 정도를 베었다. 도망치던 병사들은 되돌아와 싸웠지만, 선견 부대의 붕괴를 막았다.[1] 반장은 진무, 서성, 송겸 등의 군세를 이끌고 장료를 막았다. 반장에 의해 사기를 되찾은 오군은, 이를 본 손권은 반장의 현장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여 편장군으로 임명하고, 백교의 임무를 맡아 반주에 주둔시켰다.[1]

2. 2. 2. 형주 공방전

219년, 반장은 손권의 장수 여몽이 형주를 관우로부터 빼앗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다. 유비 휘하의 장수였던 관우는 아들 관평, 부하 조루(趙累)와 함께 반장의 부사마(司馬) 마충이 매복한 곳에서 생포되었다.[7] 반장과 주연은 관우의 퇴로를 막고 임저현(臨沮縣, 현재의 후베이성 위안안현)에 있는 가석(夾石)에 주둔했다. 손권은 반장의 공헌을 인정하여 이도와 자귀를 분할하여 고릉군(固陵郡)을 설치하고 반장을 군의 태수(太守)로 임명했으며,[9]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력양후(溧陽侯)로 봉했다.[7] 감녕이 사망한 후, 그의 부대는 반장의 지휘 아래로 넘어갔다.[7][10]

2. 2. 3. 이릉 전투

222년 이릉 대전에 참가해 풍습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13] 반장 본인도 많은 촉나라 군인들을 죽였다.[7] 이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인해 반장은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승진했고 양양군의 태수가 되었다.[14]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에서 관우의 망령에 놀라는 사이에 관흥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같은 해, 위나라조진, 하후상, 장합 등이 남군을 공격해 오자, 구원군으로 보낸 손성이 장합에게 격퇴당하자, 제갈근과 함께 구원군으로 보내졌다. 반장은 장강의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이것을 불을 붙여 흘려보내며, 물에 띄워놓은 다리를 불태우려 했으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위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2. 2. 4. 위나라와의 전투

222년 이릉 대전에서 풍습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18] 같은 해, 위나라조진, 하후상, 장합 등이 남군을 공격해 오자, 제갈근과 함께 구원군으로 보내졌다. 반장은 장강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커다란 뗏목을 만들고 불을 붙여 흘려보내, 물에 띄운 다리를 불태우려 했으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위나라 군대는 철수했다.[18]

222년 10월 말, 조비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洞口)를 공격하도록, 조인에게는 여수(濡須)를 공격하도록,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남군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15] 이에 손권은 여범에게 다섯 군대를 지휘하여 조휴에 맞서도록 했고, 제갈근, 반장, 양찬을 남군 포위를 풀기 위해 파견했다. 남군은 주연이 방어했으며, 주환은 조인으로부터 여수의 요새를 방어했다.[16] 당시 성안에는 병든 병사들이 많았고,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은 위나라 군대에 쉽게 학살당했다.[17]

223년, 조비는 장합, 서황, 조진, 하후상 등을 보내 남군(南郡중국어)을 공격하여 강릉현을 점령하려 했다. 하후상은 3만 명의 군대를 보내 양쯔강을 건너 백리주(百里洲중국어)에 이르기 위해 부교를 건설했다. 백리주는 강에 있는 섬으로, 100 리 이상 뻗어 있었다. 제갈근과 은 군대를 이끌고 섬을 방어하려 했지만 위나라 군대의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반장은 "위나라 군대의 사기가 초반에 매우 높고 물때가 낮으니 아직 싸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50리 정도 상류로 이동하여 부하들에게 수천 개의 갈대 묶음을 모아 큰 뗏목에 묶어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불타는 뗏목은 강 하류로 흘러가 적의 부교를 파괴했고, 하후상은 고립될 위험을 느껴 퇴로가 막히기 전에 섬에서 군대를 철수했다.[18]

227년, 반장은 손권을 따라 석양현(현재 한천, 후베이성)에서 위나라 군과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 중 문빙은 손권의 5만 명 군대에 포위되었으나, 소수의 군대로 약 20일 동안 자신의 진지를 굳게 방어했다. 손권이 퇴각하기로 결정하자 반장은 전투 후 손권 군대의 철수 동안 후위를 맡았다. 그러나 문빙은 갑자기 오나라 군대가 퇴각할 때 반격을 시작했고, 그날 밤 경계를 늦춘 반장은 적의 공격에 버틸 수 없었다. 주연은 증원군을 이끌고 적의 진격을 막아 손권의 군대가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저지한 후 철수했다.[19]

2. 3. 죽음

반장은 234년에 사망했다. 반장의 군대는 여대가 지휘하게 되었다. 반장의 아들 반평은 행실이 좋지 않아 회계군으로 유배되었으나, 반장의 아내는 건업에 남아 토지와 50호의 과세 가구를 받았다.[21]

3. 성격 및 평가

반장(潘璋)은 난폭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술을 좋아했으며, 시장 운영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감녕 사후 그의 군대를 합쳤고, 관우 토벌과 이릉 대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손권은 그의 공로를 높이 사 우장군(右將軍)으로 임명했다.[2]

반장은 시장 감독직을 맡아 도난과 상해 사건을 없앴으며, 전쟁 후에는 군대가 관리하는 시장을 열어 물품 부족을 해결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수천 명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1만 명의 군세처럼 강력하게 움직였다. 육기는 반장의 용맹함과 강인함을 높이 평가했다.[23]

그러나 반장은 강한 물욕으로 금전에 집착했고,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좋아했으며, 부유한 병사나 역인을 살해하여 재산을 몰수하는 등 불법 행위를 자주 저질렀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부하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지만, 손권은 반장의 공적을 아껴 죄를 묻지 않았다.[24] 원나라의 유학자 호경은 반장의 무법 행위가 손권에게 강력한 봉사를 제공했기 때문에 용인되었다고 평가했다.[25]

진수는 반장을 '강동 12호신(江東十二虎臣)' 중 한 명으로 칭하며 그의 용맹함을 인정했다.[2] 손권은 반장에게 "'''고릉'''"이라고 이름 붙인 칼을 하사하기도 했다.[27]

4. 가계

관계이름
아들반평



반평은 품행이 좋지 않아 회계군으로 쫓겨났다.[1]

5. 《삼국지연의》에서의 반장

삼국지연의》에서 반장219년 관우 포획에 큰 공을 세워 나관중에게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222년 이릉 대전에서 반장이 관흥, 장포 등에게 죽었다고 묘사했다.

실제 역사에서 장포는 이릉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고(장포는 아버지 장비보다 일찍 죽었다고 한다), 관흥에게 죽은 오나라 장수는 없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이, 반장, 가공의 인물인 담웅 등이 관흥과 장포에게 죽은 것으로 묘사했다.

반장은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 시대 전후의 역사적 사건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반장은 219년 오나라의 형주 침공 당시 관우관평을 매복하여 생포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관우의 무기인 청룡언월도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그는 약 221년에 이릉 전투의 초기 교전 중 관흥에게 살해되었다.[1]

소설에서 손권이 오의 국주가 된 후 모여든 무장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나오며, 손권의 장군으로서 몇 차례 등장한다. 강하 공략전, 적벽 대전, 남군 공략전, 유수구 전투, 완성 공략전, 관우 토벌전, 이릉 방어전에 참가했다.[2]

강하 공략전에서는 소비를 생포한다.[2]

삼강구 전투에서는 주유의 지시로 삼강구에 진을 치게 되어 능통과 함께 제3대로 출진했다. 적벽 대전에서는 주유의 계략으로 제6진으로 3천 명을 이끌고 동습을 맞이한다. 오림 전투에서는 동습과 함께 패주하는 조조군에 각각 불을 지르고 고함을 지르며 사방에 진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2]

남군 공략전에서는 주유가 죽은 척하며 속임수를 썼다. 이에 속은 적들이 우금을 선봉으로, 조인을 중군, 조홍, 조순을 후군으로, 진교만을 성에 남겨두고 야습을 가해 왔지만, 주유의 본진은 텅 비어 있었다. 동쪽에서는 한당·장흠, 서쪽에서 주태·반장, 남쪽에서 서성·정봉, 북쪽에서 진무·여몽이, 동·서·북의 오군과 함께 조조군을 격퇴했다.[2]

유비손부인과의 혼례를 위해 오를 방문하고, 후에 손부인을 데리고 형주로 도주했을 때, 진무와 함께 추격 임무를 손권으로부터 맡지만, 장소에게 두 사람만으로는 손부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져, 손부인에게 꾸짖음을 받고 물러났다.[2]

유수구 전투에서는 조조가 40만 이상의 군세를 이끌고 오를 공격했다. 손권에게 도발당한 조조는 분노하여 부하 전원에게 손권을 생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때 손권의 뒤에서 좌우 익의 손권군이 나타났다. 오른쪽에서 한당·주태, 남쪽에서 진무·반장, 네 사람은 궁병 3000명을 이끌고 적 전군을 격퇴했다. 적군은 궤멸되었고, 조조는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허저에게 구출되었다.[2]

완성 공략전에서 여몽·감녕은 선봉이 되었고, 장흠·반장은 후군을 맡았다.[2]

관우 토벌에서는 정사대로 활약하며, 청룡언월도를 상으로 받는다. 이릉 전투에서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황충에게 쫓겨 도망다니다가, 이때는 마충에게 구원받아 오히려 황충을 죽게 만든다. 그러나 다음에는 관우의 아들 관흥에게 쫓겨, 역시 도망다니는 끝에, 잠자리를 청해 방문한 민가에서 관흥과 마주쳐, 관우의 망령에 질린 곳을 관흥에게 죽임을 당한다.[2]

참조

[1] Sanguozhi Sanguozhi vol. 55 234-02-16/235-02-04
[2] 서적 不宮鬥也能強大 https://books.google[...] 商業周刊 2022-01-12
[3] Sanguozhi Sanguozhi vol. 47
[4] Sanguozhi Sanguozhi vol. 55
[5]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https://books.google[...] Brill 2022-01-06
[6] Sanguozhi Sanguozhi vol. 55
[7] 웹사이트 Sanguozhi Officer Biography http://kongming.net/[...] Kongming.net 2022-01-06
[8] 서적 三國志 Volume 4, Part 2 https://books.google[...] 漢語大詞典出版社 2022-01-16
[9] 서적 汉末三国大变局 https://books.google[...] 辽宁人民出版社 2022-01-13
[10] Sanguozhi Sanguozhi vol. 55
[11] 웹사이트 Ding Feng (Chengyuan) 丁奉 (承淵) http://kongming.net/[...] Kongming.net 2022-01-08
[12] harvnb 2007
[13] Sanguozhi Sanguozhi vol. 32
[14] Sanguozhi Sanguozhi vol. 55
[15] Sanguozhi Sanguozhi vol. 47
[16] Sanguozhi Sanguozhi vol. 47
[17] chinese history 傳世藏書: 三国志, 晋书 https://books.google[...] 海南国际新闻出版中心 2022-01-12
[18] Sanguozhi Sanguozhi vol. 55
[19] Sanguozhi Sanguozhi vol. 56
[20] Sanguozhi Sanguozhi vol. 60
[21] Sanguozhi Sanguozhi vol. 55
[22] 인용 章如愚
[23] 인용
[24] Sanguozhi Sanguozhi vol. 55
[25] 인용 郝经
[26] 인용 呉書
[27] 문서 古今刀剣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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