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씨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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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씨는 백제 시대 대성팔족 중 하나로, 백제 정부와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데 기여했다. 백씨는 마한 유민들이 백제라는 국명에서 음이 같은 '백'을 성으로 채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멸망 후에도 일부는 '백(白)'으로 성을 바꾸어 유지했다. 무왕 시기 신라와의 전투 이후 권력이 약화되었으나, 의자왕 시대까지 중앙 귀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백씨는 백가, 백매순, 백기 등 주요 인물을 배출했으며, 고려 시대에는 직산, 남포, 대흥, 임천 등을 본관으로 하여 백씨의 계보를 이어갔다. 현대에도 직산, 남포, 대흥, 임천 백씨 등이 존재하며, 문과 급제자와 근현대 인물들을 배출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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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 (백제)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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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성씨(한글) | 백 |
성씨(한자) | 苩 |
로마자 표기 | Baek |
기원 | |
뿌리 | 백제 귀족 가문 |
일본 | |
성씨(일본어) | 苩 |
2. 역사
백제는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였다. ('''사'''(沙氏), '''연'''(燕氏), '''협'''(劦氏), '''해'''(解氏), '''진'''(眞氏), '''국'''(國氏), '''목'''(木氏), 그리고 '''백'''(苩氏)) 이는 백제가 정부와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1][2]
무왕 시대 초, 신라와의 아막산성 전투 이후 대성팔족은 막대한 권력을 잃었다. 해씨(전투를 이끌었던), 협씨, 진씨, 목씨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고, 연씨, 국씨, 백씨만이 남았다. 사씨는 무력을 통해 영향력을 키웠고, 무왕 말년에는 왕비를 배출했다.
마지막 왕인 의자왕 시대에도 왕권과 결탁하여 중앙 귀족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부여씨(왕족, 扶餘氏)는 대성팔족이 붕괴되면서 영향력을 얻었다. 의자왕이 즉위한 후 왕권 또한 분열되었고,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의 직계 후손들이 정국을 장악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 백씨는 쇠퇴했고, 사씨와 국씨만이 중앙 귀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백제 말기에는 사씨와 국씨를 제외한 모든 대성팔족이 중앙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결국 지방 세력으로 전락했다.[3]
백가(苩加)의 반란으로 백씨(苩氏) 일족에게 타격이 있었겠지만, 백가 이후 3 ~ 4 세대 이후인 100년 이상이 지나서도 백기(苩奇)가 귀족 출신으로 달솔을 지내며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을 보면, 백씨(苩氏)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지위를 꾸준히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苩加)와 백기(苩奇)는 귀족 출신이고, 백가(白加)와 백매순(白昧淳)은 장인인 것으로 보아 백씨(苩氏)와 백씨(白氏)는 다른 성씨이거나 어떤 사정으로 분파된 씨족일 수 있다고 추정된다.[6]
같은 시기 또는 그 이전에 신라에도 백씨(白氏)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있었다. 백룡(白龍)은 629년(진평왕 51) 신라의 파진찬으로 있었으나, 백씨인지는 확실치 않다. 7세기에 살았던 원효대사의 형인 설을신(薛乙臣)의 처가 정산 백씨(定山白氏)로 백씨 부인(白氏夫人)이었다는 기록은 경주나 순창 본관의 「설씨보」(薛氏譜)에 있다.「경주설씨족보」(慶州薛氏族譜)에는 설을신의 상계인 신라 초기에도 여러 백씨 부인들의 기록이 있다.[6]
2. 1. 백제 백씨의 유래
백제 백씨(苩氏)는 대체로 마한의 유민들이 백제(百濟)라는 나라 이름에서 음이 같은 '백(苩)'을 성(姓)으로 취한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백제 멸망 후 왕족인 부여씨(扶餘氏)가 여씨(余氏) 또는 서씨(徐氏)로 변성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백씨(苩氏) 일족들 또는 백제 유민들도 발음이 같은 한자인 '백(白)'으로 변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씨의 경우, 백제 당시에 백씨들이 '백(苩)'이나 '백(白)'을 혼용했거나 백씨(苩氏)와 백씨(白氏)가 서로 다른 성씨로 계급이나 계통이 달랐을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즉, 동성왕 때 위사좌평 백가(苩加, ? ~ 501년)나 무왕 때 달솔 백기(苩奇)는 '苩'으로 표기된 반면, 위덕왕 때 왜에 파견된 노반박사 백매순(白昧淳)과 화가 백가(白加)는 '白'으로 달리 표기된 것에서 이러한 차이를 찾을 수 있다. 혹은 기록 상 표기의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6]2. 2. 신라 시대의 백씨
629년 (진평왕 51년) 신라의 파진찬이었던 은 백씨인지 확실하지 않다. 7세기에 살았던 원효대사의 형인 설을신의 부인이 정산 백씨로 '''백씨 부인'''이었다는 기록은 경주와 순창의 "설씨보"에 있다. "경주 설씨 족보"에는 설을신의 윗세대인 신라 초기에도, 여러 백씨 부인들의 기록이 있다[5]."설씨보"는 백씨 (신라)의 존재를 제시한다.2. 3. 백제 대성팔족으로서의 백씨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는 '''백'''(苩氏)씨였다.[1][2] 백씨는 백제의 정부와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무왕 초기, 신라와의 아막산성 전투 이후 대성팔족은 큰 권력을 잃었다. 해씨(전투를 이끌었던), 협씨, 진씨, 목씨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고, 연씨, 국씨, 백씨만이 남았다. 사씨는 무력을 통해 영향력을 키웠고, 무왕 말년에는 왕비를 배출했다.
의자왕 즉위 후 왕권은 분열되었고,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 부여씨의 직계 후손들이 정국을 장악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 백씨는 쇠퇴했고, 사씨와 국씨만이 중앙 귀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백제 말기에는 사씨와 국씨를 제외한 모든 대성팔족이 중앙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지방 세력으로 전락했다.[3]
3. 현재 백씨와의 관계
고려 이후 현재까지 상당, 신풍 본관은 소멸되었지만, 직산, 임천, 남포, 대흥 본관은 이어져 오고 있다.[1] 백제 서기와 함께 나라와 가문의 역사가 소실되어 문헌적 고증은 어렵다.[1] 조선시대에는 백인국, 백현룡, 백중립 등이 의병으로 활동했고, 조선 말 백낙관은 순국했다.[1]
3. 1. 고려 시대 백씨의 주요 본관
고려 백씨의 오래된 본관은 상당(청주), 직산(천안), 남포(보령), 대흥(예산), 신풍(공주), 임천(부여) 등이다. 상당은 백제 상당현으로 상당성이 있었고, 직산은 마한의 본읍이요, 백제의 위례성이다. 남포에는 주류성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오서산성 등 13개의 산성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대흥은 임존성이고, 신풍은 백제 중하대의 수도 웅진성이며, 임천은 가림성이고 곧 사비성과 이웃하고 있다. 모두 백제에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던 대촌이며 고읍성들이고 저마다 백제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유적지들이다.수원 등 백씨의 다른 본관이 려말선초에 들어서야 나타나는 데 비해, 고려 백씨들이 고려 초 또는 중기에 이미 대표적인 백제 고읍들마다 본관을 삼고 있었다는 것은 660년에 멸망한 백제의 유민 백씨들이 망국 백제에서 고려 창업으로 이어지는 300년 동안 '백씨(苩氏)'를 '백씨(白氏)'로 바꾸고 대를 이어 그 곳에 정주한 결과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상당과 신풍 본관은 소멸되었지만, 직산 본관은 조선 중기, 임천은 조선 후기를 거쳐 남포, 대흥 본관과 함께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3. 2. 백제 유민으로서의 백씨
고려 백씨의 오래된 본관은 상당(청주), 직산(천안), 남포(보령), 대흥(예산), 신풍(공주), 임천(부여) 등이다. 상당은 백제 상당현으로 상당성이 있었고, 직산은 마한의 본읍이요, 백제의 위례성이다. 남포에는 주류성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오서산성 등 13개의 산성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대흥은 임존성이고, 신풍은 백제 중하대의 수도 웅진성이며, 임천은 가림성이고 곧 사비성과 이웃하고 있다. 모두 백제에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던 대촌이며 고읍성들이고 저마다 백제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유적지들이다.위사좌평으로 가림성에서 동성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백가는 대성팔족이며, 신흥 강자로서 웅진의 토착 호족이었다. 백제 말기인 무왕 때의 백기(苩奇)는 달솔(達率), 장군으로 다시 백씨(苩氏)가 나타난다.
수원 등 백씨의 다른 본관이 려말선초에 들어서야 나타나는 데 비해, 고려 백씨들이 고려 초 또는 중기에 이미 대표적인 백제 고읍들마다 본관을 삼고 있었다는 것은 660년에 멸망한 백제의 유민 백씨들이 망국 백제에서 고려 창업으로 이어지는 300년동안 '백씨(苩氏)'를 '백씨(白氏)'로 바꾸고 대를 이어 그 곳에 정주한 결과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상당과 신풍 본관은 소멸되었지만, 직산 본관은 조선 중기, 임천은 조선 후기를 거쳐 남포, 대흥 본관과 함께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망국의 유민들이라 백제 서기와 함께 나라와 가문의 역사가 함께 소실되어 문헌적으로 고증할 길이 없다.[1]
3. 3. 현대의 백씨
고려 초부터 상당, 직산, 남포, 대흥, 신풍, 임천 등의 본관이 있었으나, 이 중 상당 백씨와 신풍 백씨는 소멸되었다. 직산, 임천, 남포, 대흥 백씨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 조선시대에는 백인국, 백현룡, 백중립 등이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백낙관이 순국하는 등 나라를 위한 충절을 이었다.[1]4. 주요 인물
백씨 가문의 기록은 부족하고 파편화되어 족보를 만들기가 어렵지만, 연대기 순으로 주요 인물을 살펴볼 수 있다.[4]
- 동성왕 대
- * '''백가'''(苩加, ?–501): 486년 왕실 호위대 신료(衛士佐平)로 임명되었으나, 501년 가림성 성주 부임 명령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암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무령왕이 그를 처형했다.
- 위덕왕 대
- * '''백매순'''(白昧淳, ?–?): 장덕(將德, 7품)을 지낸 건축가로, 588년 위덕왕을 위해 탑을 짓는 것을 도왔다.
- * '''백가'''(白加, ?–?): 백제의 뛰어난 장인으로, 588년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 건립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 596년에 완공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후대 일본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무왕 대
- * '''백기'''(苩奇, ?–?): 달솔(達率, 2품)로 임명되었다. 602년 무왕의 명으로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다른 네 개의 요새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16년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
4. 1. 백가 (마한)
백가(苩加, ? ~ 501년)는 백제 동성왕 때 위사좌평을 지낸 인물이다. 486년 왕실 호위대 신료(衛士佐平)로 임명되었으나, 501년 가림성(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 성주로 부임하라는 명령에 앙심을 품고 왕이 사냥하는 동안 암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4] 무령왕이 일본에서 돌아오자 백가를 물리치고 죽여 시신을 강에 던졌다.[4]4. 2. 백매순
588년(백제 위덕왕 35) 백제의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사원 건축 기술을 가지고 왜에 파견되었다.[4]4. 3. 백가 (화가)
588년(백제 위덕왕 35) 왜에 파견된 백제의 화가이다.[4] 백가는 백제의 뛰어난 장인 중 한 명으로,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 건립에 참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사찰은 596년에 완공되었다.[4] 백가의 작품은 이후 일본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4]4. 4. 백기 (백제)
달솔(達率)을 지낸 백제 무왕 때의 장군이다.[4] 602년 무왕의 명으로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다른 네 개의 요새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16년에는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참조
[1]
문서
Nihon Shoki
[2]
문서
Samguk Sagi
[3]
서적
Changes of Central Nobles and Kingship in the Late Baekje Kingdom
2015
[4]
문서
Samguk Sagi
[5]
서적
慶州薛氏族譜
鶏林薛氏登官録
[6]
문서
「경주설씨족보」(慶州薛氏族譜) 권지1, 계림설씨등관록(鷄林薛氏登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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