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디노 데 사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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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디노 데 사아군은 1499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고 사제로 서품된 후 1529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로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아즈텍의 풍습과 종교를 연구하고, 1558년 현지인들의 역사와 습관에 관한 책을 묶도록 명령받아, 현대 민족지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12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백과사전인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피렌체 코덱스)를 저술했다. 사아군은 멕시코시티 인근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며, 원주민 언어를 이용한 복음화를 강조했으며, 틀라텔로코 성십자가 대학 설립에 기여하고, 원주민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제공하여 민족지학 연구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았지만, 가톨릭 선교사로서 원주민들의 전통 신앙을 비판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1576년 역병 이후 기독교 복음화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베르나디노 데 사아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7세기 사아군 초상화
17세기 사아군 초상화
본명베르나르디노 데 리베이라
출생지사아군, 카스티야 왕관 (오늘날의 레온 주, 카스티야 이 레온, 스페인)
사망1590년 2월 5일
사망지틀라텔롤코, 누에바에스파냐 (오늘날의 멕시코 시티, 멕시코)
직업프란치스코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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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존칭 접두사존경하는
존칭 접미사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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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페인에서의 교육

프라이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프라이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프라이 베르나르디노는 1499년 스페인 사아군에서 베르나르디노 데 리베라(Bernardino de River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살라망카 대학교에 진학하여 당시 유럽 지성계의 주요 흐름이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했다. 이 시기 살라망카 대학교는 에라스뮈스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지성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아군은 이곳에서 작은 형제회 수도회, 즉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그는 1527년경 사제로 서품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성을 출생지 이름으로 바꾸어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되었다.

3. 누에바 에스파냐 선교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1529년, 사아군은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로 파견되어 이후 61년간 머물렀다. 이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1521년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고, 1524년부터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사아군은 1524년에 도착한 첫 12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적, 종교적 명성 덕분에 선교 활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대항해 시대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통치자들은 새로 발견된 땅의 원주민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이끄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선교 사업은 교황이 부여한 국왕 후원권에 따라 스페인포르투갈 군주들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선교가 정복 및 식민화라는 더 큰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의 복음화는 주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이 이끌었으며, 특히 프란치스코회는 선교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종교적 열망과 함께, 원주민의 발견과 복음화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길 것이라는 천년설적 믿음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일부 수사들은 당시 유럽 사회와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초기 기독교의 순수한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품었다.

선교사들은 교회수도원 건설에 많은 원주민 노동력을 동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주민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상징(꽃, 새, 기하학적 무늬 등)을 기독교 미술에 접목시키기도 했다. 이는 인도-기독교 예술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낳았다. 초기에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는 등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많은 원주민들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인 종교 의식과 신념을 병행하는 다중 종교 소속의 형태를 보였고, 이는 선교사들의 기대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사아군 개인적으로는 1536년 틀라텔롤코에 설립된 코레히오 데 산타 크루스(Colegio de Santa Cruz)에서 원주민 귀족 자제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함께 스페인어, 라틴어 등을 가르쳤다. 그는 선교 활동을 위해 원주민 언어, 특히 나와틀어를 능숙하게 익혔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스텍 제국의 문화와 종교를 깊이 연구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효과적인 선교뿐만 아니라, 사라져가는 원주민 문화를 기록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4. 틀라텔로코 성십자가 대학에서의 활동

사아군은 1536년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유럽식 고등교육기관인 틀라텔로코 성십자가 대학(Colegio Imperial de Santa Cruz de Tlatelolco) 설립에 기여하였다. 현재의 멕시코 시티에 위치한 이 대학은 이후 사아군의 연구 활동 기반이 되었으며, 그는 학교 졸업생들을 조수로 삼아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 이 대학은 당시 멕시코 지역에서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의 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학 설립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원주민 학생들을 복음화하고, 그들 중에서 가톨릭 성직자로 봉사할 남성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대학은 나우아틀어를 비롯한 토착 언어 연구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했다. 사아군은 대학 설립 초기 몇 년간 이곳에서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대학 측은 원주민 지도자들을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치도록 했는데, 이는 원주민 사회에 대한 통제력 약화를 우려하던 일부 식민지 관료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원주민들의 인간성과 능력을 인정하는 입장이었으나, 이로 인해 식민지 관리들이나 경쟁 관계에 있던 도미니코 수도회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특히 일부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프란치스코회가 원주민들의 우상 숭배를 조장한다고 비난하기도 하여,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원주민과의 교류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사아군은 대학에서 활동하며 토착민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남긴 여러 수사 중 한 명이었다. 대학의 주요 학문적 성과로는 신세계 최초의 식물도감과 당시 멕시코 시티 지역의 지도를 들 수 있다. Libellus de Medicinalibus Indorum Herbis라틴어(인디언 약초에 대한 소책자한국어)는 대학의 아즈텍 출신 교사였던 후안 바디아누스 데 라 크루스가 라틴어로 작성한 식물도감으로, 토착 식물에 대한 설명과 의학적 용도를 담고 있다. 이 문서는 식물들을 아즈텍의 분류 체계에 따라 그림으로 나타내고 명명했으며, 각 식물의 자생지와 약초로서의 활용법을 설명한다. 이 책은 대학에서 토착 의학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Mapa de Santa Cruz스페인어(산타 크루스 지도한국어)는 도시 지역, 도로 및 운하망, 당시 사람들의 낚시 및 농업 활동 모습과 더불어 주변 지역의 지리적 맥락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이 식물도감과 지도는 모두 그 구조와 양식에서 스페인 문화와 아즈텍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보여주며, 두 문화가 어떻게 융합되었는지를 잘 나타내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5. 선교사로서의 업적

살모디아 크리스티아나 표지, 1583
살모디아 크리스티아나 표지, 1583

사아군은 대학에서의 교육 활동 외에도 멕시코시티 외곽의 트랄마날코(Tlalmanalco, 1530-1532), 소치밀코(Xochimilco, 1535), 테페폴코(Tepepolco, 1559-1561), 우에소친코 등 여러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며 선교 활동에 힘썼다. 그는 무엇보다도 선교사로서, 그의 주된 임무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가톨릭 사제, 교사, 선교사로서 시골 마을의 원주민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종교 의식을 집전하고 종교 교육을 제공했다.

사아군은 당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여러 뛰어난 언어학자 중 한 명이었다. 프란치스코회는 원주민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아군은 스페인에서 누에바 에스파냐로 오는 배 위에서, 함께 귀환하던 원주민 귀족들로부터 나우아틀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나우아틀어에 가장 능숙한 스페인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이러한 선교사로서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그는 동료 성직자들이 나우아틀어로 설교하고, 성경을 나우아틀어로 번역하며, 원주민들에게 종교적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자료들을 만들었다. 그의 나우아틀어 저작 중에는 시편 번역과 교리 문답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그는 테페폴코에서 『Primeros Memoriales』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던 시기에 『기독교 찬송가집 (Psalmodia Christiana)』을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1583년 페드로 오차르테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이는 사아군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저서이다. 이 책은 출판 이전부터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유통되었는데, 그 목적은 나우아족의 전통적인 노래와 시를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사아군은 뛰어난 나우아틀어 능력을 바탕으로 아즈텍의 세계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그는 원주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나우아틀어로 현장 연구를 수행했다. 1547년에는 'huehuetlatolli'(나우아틀어: "늙은이들의 말")라고 불리는, 연장자들이 도덕 교육, 젊은이 훈육, 문화적 의미 전달 등을 위해 행하던 아즈텍의 전통적인 연설을 수집하고 기록했다. 또한 1553년부터 1555년 사이에는 원주민 지도자들을 인터뷰하여 아즈텍 제국에 대한 스페인 정복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기록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훗날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플로렌스 코덱스』의 제12권으로 정리되어 1585년에 수정되었다. 이는 정복 과정을 피정복민의 시각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현대 민족지학의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비록 사아군 자신은 멕시코의 전통 신들을 악마로 간주하고 원주민들의 전통 신앙을 근절시키려 노력했지만, 동시에 그는 원주민들의 윤리관에서 유럽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신앙 전파에 힘쓰는 한편,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귀중한 문화적 자산을 남겼다.

6. 현장 연구

1558년, 누에바에스파냐프란치스코회 관구장 프란시스코 데 토랄(Francisco de Toral)은 사아군에게 선교 활동에 유용한 원주민 문화 연구를 나우아틀어로 기록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사아군은 약 25년간 원주민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현장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연구는 크게 초기(1558–1561)와 후기(1561–1575)로 나뉜다. 초기에는 테페아풀코(Tepeapulco)에서 원주민 원로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Primeros Memoriales(첫번째 수기)로 정리했다. 이는 이후 그의 방대한 저작인 누에바에스파냐의 사물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Nueva España)의 기초가 되었다. 후기에는 틀라텔롤코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기존 자료를 편집, 확장했다. 이 시기에는 연구 범위를 넓히고 내용을 체계화하는 데 집중했다.

6.1. 연구 방법론

멕시코에서의 초기 집단 개종에 대한 열의가 수그러들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선교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더 깊이 이해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아군의 연구 활동은 1558년, 누에바에스파냐의 새로운 관구장 프란시스코 데 토랄(Francisco de Toral) 수사가 그에게 선교 활동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주제에 대해 나우아틀어로 저술할 것을 명하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토랄 관구장은 사아군이 원주민 언어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른 선교사들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이 지시에 따라 사아군은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약 25년간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중 마지막 15년 가량은 편집, 번역, 필사 작업에 할애했다. 그의 현장 연구 활동은 크게 초기(1558–1561)와 후기(1561–1575)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피렌체 문서에 수록된 아즈텍 전사.
피렌체 문서에 수록된 아즈텍 전사.

초기 연구 단계(1558–1561)에서 사아군은 멕시코 시티 북동쪽에 위치한 테페아풀코(Tepeapulco, 현 이달고 주 인근)에서 활동하며 Primeros Memoriales로 알려진 기록을 남겼다.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인 누에바에스파냐의 사물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Nueva España)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는 틀라텔롤코의 산타 크루스 데 틀라텔롤코 대학(Colegio de Santa Cruz de Tlatelolco) 출신 원주민 졸업생들의 도움을 받아 약 12명의 마을 원로들을 대상으로 2년 동안 나우아틀어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아군은 원로들에게 종교 의식과 달력, 가족·경제·정치 관습, 그리고 박물학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정보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개별 인터뷰와 집단 인터뷰를 병행하여 답변 내용을 교차 검증했다. 연구를 보조한 조수들은 나우아틀어, 라틴어, 스페인어 3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연구와 기록 작업은 물론 번역, 통역, 삽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사아군은 이들의 기여를 중요하게 여겨 저작에 그들의 이름을 명시하고 공로를 인정했다. Primeros Memoriales에 포함된 삽화들은 토착 문화 양식과 유럽 예술 기법이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 초기 연구 시기부터 사아군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검증하기 위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 방법론을 개발하고 평가해 나갔다.

후기 연구 단계(1561–1575)에 사아군은 틀라텔롤코로 돌아와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더 많은 원로들과 문화적 권위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문을 구했으며, 이전 연구 결과를 편집하고 내용을 확장하는 동시에 인터뷰 기법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중세 백과사전의 구성 방식과 방법론을 참고하여 방대한 연구 자료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했다. (다만, 당시의 백과사전은 세상을 비교적 포괄적으로 담아내려 했기에, 현대적 의미의 백과사전보다는 '세계 서적(world book)'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사아군은 토착 신세계 문화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고 검증하는 독자적인 방법과 전략을 개발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여성을 포함하여 토착 문화와 전통에 정통한 다양한 정보 제공자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지식을 수집했으며, 여러 출처에서 얻은 답변들을 비교 분석하여 정보의 신뢰성을 높였다.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정보 제공자들이 진술한 종교적 신념, 사회 관습, 자연 지식 등을 그대로 기록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다른 부분들은 특정 주제에 대해 여러 정보 제공자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져 얻은 답변들을 정리한 형식을 보여준다. 때로는 사아군 자신의 관찰이나 해설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정보원을 활용하고 그 내용을 교차 검증하는 그의 연구 방식은 후대에 민족지학(ethnography)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공식화된 연구 방법론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으며, 현대 인류학 연구 방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7.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 (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Nueva España)』

피렌체 문서에 수록된 아즈텍 전사.
피렌체 문서에 수록된 아즈텍 전사.

사아군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 ({{lang|es|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Nueva España}})』이며, 흔히 『피렌체 문서 (Florentine Codex)』라고도 불린다. 이 책은 총 12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백과사전으로, 아즈텍 사회의 종교, 문화, 역사, 자연 등 다양한 측면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나우아틀어와 스페인어 두 언어로 작성되었으며 수많은 삽화가 포함되어 있어, 16세기 멕시코 원주민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멕시코에서의 초기 집단 개종 열기가 식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선교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원주민 사회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58년, 누에바에스파냐의 새로운 관구장인 프라이 프란시스코 데 토랄은 사아군에게 선교 활동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주제들에 대해 나우아틀어로 글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토랄 관구장은 사아군이 그동안 쌓아온 원주민 언어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른 선교사들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이 지시 덕분에 사아군은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고, 약 25년 동안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중 마지막 15년가량은 자료를 편집하고 번역하며 필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현장 연구는 크게 초기(1558–1561)와 후기(1561–1575)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연구 단계(1558–1561)에서 사아군은 Primeros Memoriales로 알려진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훗날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는 멕시코 시티 북동쪽에 위치한 테페아풀코(Tepeapulco)에서 틀라텔롤코의 산타 크루스 대학 출신 원주민 졸업생들의 도움을 받아 약 2년간 십여 명의 마을 원로들을 나우아틀어로 인터뷰했다. 사아군은 이들에게 종교 의례, 달력, 가족 및 경제, 정치 관습, 그리고 자연사에 대해 질문했다. 그의 원주민 조수들은 나우아틀어, 라틴어, 스페인어 3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연구와 기록, 번역과 해석 과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삽화 작업도 담당했다. 사아군은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공로를 인정해주었다. Primeros Memoriales에 포함된 삽화들은 토착 문화 양식과 유럽 예술 양식이 혼합된 특징을 보여준다. 이 시기 사아군은 정보 수집과 검증을 위한 자신만의 연구 방법을 개발하고 평가해 나갔다.

후기 연구 단계(1561–1575)에 사아군은 틀라텔롤코로 돌아와 더 많은 원주민 원로들과 문화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문했다. 그는 이전 연구 결과를 편집하고 연구 범위를 넓혔으며, 인터뷰 기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세 백과사전의 구성 방식을 참고하여 자신의 방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렇게 완성된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는 여러 판본으로 전해지며, 그 내용과 구성, 특히 아즈텍 정복사에 대한 서술은 후대에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7.1. 내용 구성

피렌체 그림 문서 9권
피렌체 그림 문서 9권

1783년, 연대기 작가 후안 바우티스타 무뇨스가 톨로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누에바 에스파냐 전사(Historia universal de las cosas de la Nueva España)라는 제목의 스페인어 필사본을 재발견했다. 이 톨로사 필사본은 이후 마드리드의 왕립 역사 아카데미 소유가 되었다. 1829년부터 1830년 사이에 멕시코의 역사학자 Carlos María de Bustamante스페인어가 이를 출판했다. 또한 영국의 수집가 킹즈보로 공작이 출판한 『멕시코의 고대 유물』(전 9권, 1831-1849)에도 수록되었다。그러나 이 두 판본은 원본에 그다지 충실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와틀어와 스페인어로 쓰인 초기의 원고도 마드리드의 왕립 역사 아카데미와 마드리드 왕궁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원고는 『마드리드 그림 문서』라고 불리며, 1570년대에 스페인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1569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나와틀어만으로 된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피렌체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은 『피렌체 그림 문서』라고 불린다. 이 문서는 페이지를 좌우로 나누어 왼쪽에는 스페인어, 오른쪽에는 나와틀어를 기록한 형태이다. 총 1,846장에 달하는 삽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 채색되어 있다。이 책은 로드리고 데 세케라에 의해 1580년에 스페인으로 전해졌으며, 1588년경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소장품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 중요한 문서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979년에 처음으로 복제본이 출판되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누에바 에스파냐 전사 외에도 사아군의 다른 저서들이 유럽 각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7.2. 아즈텍 제국 정복사

사아군은 아즈텍 제국의 정복에 대한 기록을 두 가지 형태로 남겼다. 첫 번째는 1576년에 완성된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 제12권이며, 두 번째는 1585년에 수정된 개정판이다.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 제12권은 책의 다른 부분들이 종교, 관습, 사회 구조 등 일반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과 달리, 유일하게 역사적 사건, 즉 아즈텍 정복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1576년 판본은 틀라텔롤코 사람들을 포함한 원주민의 시각에서만 정복 과정을 기록했다는 특징이 있다. 사아군은 이 책의 서문("독자에게")에서 정복 역사가 수도사들이 전쟁과 무기에 관련된 언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언어 학습 자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패배한 아즈텍인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가 스페인 왕실에게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여, 역사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미리 조절하려 한 의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1585년에 사아군은 기존의 기록을 크게 수정했다. 이 개정판에서는 스페인 사람들과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를 칭찬하는 내용이 추가되었고, 더 이상 원주민의 관점만을 고수하지 않았다. 이 1585년 원고는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20세기 말, 보스턴 공립 도서관에서 존 B. 글래스에 의해 스페인어로 된 사본이 발견되어 『누에바 에스파냐 일반사』 제12권과의 비교 연구와 함께 영인본 및 영어 번역본으로 출판되었다.

사아군이 1585년에 정복 서술을 수정한 것은 당시 원주민의 기록과 문화에 대한 연구 작업이 스페인 당국으로부터 의심받고 공격받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즉, 패배한 멕시코인들의 입장에서만 서술된 초기 기록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스페인의 입장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높다.

8. 의미와 영향

사아군의 대표 저작인 문물일반사는 아즈텍 문명과 멕시코 중부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방대하고 상세한 기록물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외부 관찰 기록을 넘어, 문화 내부 구성원들과의 직접적인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담아내려 한 점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접근 방식으로, 민족지학 연구의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스페인 식민 당국에게 달갑지 않게 여겨졌다. 원주민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의 저술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사아군은 종교 재판소의 감시를 의식하며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비판과 논란 섹션 참조)

결국 그의 필생의 역작인 문물일반사는 완성 후에도 약 2세기 동안 스페인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 있었다. 그러다 1793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로렌차나 도서관에서 한 문헌학자가 필사본, 즉 피렌체 필사본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사학, 인류학, 미술사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사아군의 방대한 저술을 연구하며 그 안에 담긴 깊이와 복잡성을 탐구해왔다. 오늘날 사아군은 단순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를 넘어, '아메리카 민족지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중요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 방법론은 현대 인류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저술은 멕시코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인정받는다. 특히 멕시코 독립 이후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원주민 문화의 가치를 기록하고 보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더욱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8.1. 비판과 논란

사아군이 연구를 수행하던 시기, 멕시코스페인 정복자들은 수적으로 아즈텍인보다 훨씬 적었기에 항상 원주민 봉기의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식민 당국자들은 사아군의 저술이 원주민의 목소리와 관점에 힘을 실어줄 수 있어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사아군은 1570년 멕시코에 설치된 종교 재판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그의 연구는 본래 나우아틀어로만 기록되었으나, 자신을 향한 의심과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일부 내용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동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검토를 거치고, 스페인 국왕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초기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주의는 스페인의 잔혹하고 착취적인 식민 통치 속에서 점차 빛을 잃어갔고, 유라시아에서 유입된 질병에 면역력이 없던 수백만 명의 원주민들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참상이 벌어졌다. 사아군의 마지막 글 일부에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그의 심정이 담겨 있다. 게다가 스페인 왕실은 수도회를 세속 성직자들로 대체하며 식민지 내 수사들의 영향력을 축소시켰고, 새로 부임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원주민에 대한 초기 수사들의 믿음과 열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결국 사아군의 친원주민적인 연구 방식은 점차 소외되었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나우아틀어 성경 사용마저 금지되었다. 1575년에는 인디아스 평의회가 원주민 언어로 된 모든 성경을 금지하고 사아군에게 아즈텍 문화에 대한 모든 기록과 연구 결과를 제출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이는 원주민 전통에 대한 존중이 기독교 선교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아군은 그의 주요 저작인 문물일반사의 사본 두 개를 더 만들었다.

한편, 사아군 자신도 아즈텍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멕시코 원주민들의 기독교 개종 실태에 대해 점점 더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많은 개종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으며, 동료 선교사들이 아즈텍의 전통 종교와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선교사들이 원주민의 언어와 세계관을 깊이 이해해야만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그의 대표 저서 피렌체 문서에도 드러난다. 제11권 '지상의 것들'에서는 원주민들이 행하는 우상 숭배 행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스페인어로 덧붙였다. 그는 "샘, 물, 산에 대해 논의한 후, 이는 물과 산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요 우상 숭배에 대해 논의하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되었다"고 적었다.

특히 과달루페의 성모 숭배가 고대 아즈텍 여신 토난친(우리 어머니) 숭배와 혼동되는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프란치스코회는 이러한 혼합주의적 신앙 형태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 경계했는데, 사아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곳 [테페약]에 [인디언]들은 신들의 어머니, 즉 우리 어머니를 의미하는 토난친이라고 부르는 신전을 바쳤다. 그들은 이 여신을 기리기 위해 많은 제물을 바쳤다...그리고 이제 과달루페의 성모 교회가 그곳에 세워졌는데, 그들은 또한 그녀를 토난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 성모, 하나님의 어머니를 토난친이라고 부르는 설교자들의 동기에 의한 것이다. 이 토난친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처음 사용된 것부터 이 단어가 고대 토난친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수정되어야 할 일인데, 하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올바른 [원주민] 이름은 토난친이 아니라 Dios īnantzinnah(나우아틀어: 하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탄의 발명품인 듯하여 이 토난친이라는 이름의 혼란 아래 우상 숭배를 가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아주 먼 곳에서, 전과 마찬가지로 먼 곳에서 방문하는데, 이것 또한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 우리 성모의 교회가 많이 있는데도 그들은 거기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날처럼 이 토난친에게 먼 땅에서 온다.

그는 또한 산타 아나 교회가 Tocinah(나우아틀어: "우리 할머니") 숭배의 중심지가 된 것에 대해서도 유사한 비판을 제기했다. 성 안나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즉 예수의 할머니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순례자들이 실제로는 고대의 토치 여신을 숭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과거와 마찬가지로 토치 축제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성 안나를 핑계로 오지만, [할머니]라는 단어가 모호하고 옛 방식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들이 현대보다는 고대에 더 많이 온다고 믿을 수 있다. 따라서 이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 안나가 거기서 기적을 행한 적이 없는데도 먼 곳에서 오기 때문에 우상 숭배가 가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성 안나보다는 고대 토치일 가능성이 더 크다.

결국 사아군은 1576년의 파괴적인 전염병 이후, 신대륙에서의 기독교 복음화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표출했다.
: [멕시코]는 가톨릭 신앙과 관련하여, 가톨릭 신앙의 뿌리가 매우 얕고 많은 노력에도 열매가 거의 맺히지 않으며, 작은 원인으로도 심고 가꾼 것이 시들해지는 척박한 땅이며, 경작하기 매우 어렵다. 내 생각에는 가톨릭 신앙이 이 지역에서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 같다...그리고 지금, 이 역병의 시대에,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시험해 본 결과, 고해성사 전에 제대로 응답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50년 이상 설교를 받았지만, 만약 그들이 지금 혼자 남겨지고, 스페인 민족이 중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50년도 안 되어 그들을 위해 행해진 설교의 흔적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9.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서의 사아군

사아군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서, 그의 삶과 연구는 프란치스코회의 영성과 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의 선교 활동은 단순히 종교적 개종을 넘어, 원주민 문화를 이해하고 기록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프란치스코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13세기 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프란치스코회는 성육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강조했다. 이는 성 프란치스코가 직접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얻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수의 인간적인 삶을 기억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실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영성은 바뇨레조의 성 보나벤투라와 특히 요한 두스 스코투스와 같은 후대 신학자들에 의해 철학적으로 발전했다. 스코투스는 성육신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인간 자체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철학적 인류학을 제시했는데, 이는 당시 스페인에서 교육되었기에 사아군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철학은 선교사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에 영향을 주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로 파견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원주민들을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다. 이는 종종 원주민을 착취하려던 일부 식민지 정복자들의 태도와 충돌했으며,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원주민 학대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또한, 원주민의 완전한 인간성과 능력을 확신했던 프란치스코회의 입장은 식민지 관리들이나 도미니코 수도회로부터 의심을 사기도 했다. 특히 일부 도미니코 수도사들은 프란치스코회가 원주민의 전통 신앙을 용인하여 오히려 우상 숭배를 부추긴다고 비판하기도 하여, 프란치스코회는 원주민과의 관계에서 신중함을 기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아군이 설립에 기여한 틀라텔로코 성십자가 대학은 원주민 엘리트 교육과 나우아틀어 연구의 중심지였으나, 원주민 문화 교육에 대한 식민 당국의 우려를 낳기도 했다.

사아군의 연구 방식은 프란치스코회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 그는 원주민들을 단순한 연구 대상으로 보지 않고, 협력자로서 존중하며 안토니오 발레리아노와 같은 원주민 조수들의 공헌을 명확히 기록했다. 이는 프란치스코회의 공동체적 가치를 반영한다. 또한 그는 5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실천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유럽에서 원주민의 인간성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사아군은 직접 원주민들과 만나고 인터뷰하며 그들의 언어, 문화, 세계관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비록 그가 원주민의 인신 제사나 전통 신앙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비판했지만, 그들의 문화를 깊이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인간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프란치스코회적 인류학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대항해 시대에 누에바 에스파냐로 건너온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새로운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많은 이들은 이 '새로운 발견'이 천년설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앞당길 중요한 사건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유럽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품기도 했다. 이들은 원주민 노동력을 동원해 교회를 짓고, 원주민 예술가들에게 성화나 조각 제작을 맡겼는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적 주제와 원주민 고유의 상징(꽃, 새, 기하학 문양 등)이 결합된 독특한 인도 기독교 예술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인 신앙과 의례를 병행하는 다중 종교 소속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평가와 대응 방식에 이견이 존재했다.

10. "영적 정복"에 대한 환멸

아즈텍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사아군은 멕시코에서의 대규모 기독교 개종이 과연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점차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많은 원주민의 개종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료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전통적인 아즈텍 종교 신념과 우주론의 근본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사아군은 선교사들이 원주민의 언어(나와틀어)와 세계관을 완전히 익혀야만 아즈텍인들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원주민, 그들의 신념, 종교적 관습에 대한 비공식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사아군은 그의 주요 저작인 플로렌틴 코덱스 곳곳에 스페인어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서론이나 독자에게 보내는 글, 삽입 문구 등을 남겼다. 예를 들어, 제11권 '지상의 것들'에서는 산과 바위에 대한 나와틀어 설명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대신, 당시 원주민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를 삽입했다. 그는 "샘, 물, 산에 대해 논의한 후, 이는 물과 산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요 우상 숭배에 대해 논의하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되었다"고 적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아군은 특히 과달루페의 성모 신앙이 토착 신앙과 혼합된 형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성모 마리아 숭배가 고대 여신 숭배와 혼동될 가능성 때문에 과달루페 성모 공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사아군은 테페약 언덕의 과달루페 성모 교회가 과거 아즈텍의 여신 토난친(우리 어머니라는 뜻)을 섬기던 신전 자리에 세워졌으며, 원주민들이 성모 마리아를 여전히 토난친이라 부르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것이 설교자들이 성모 마리아를 토난친이라 부르도록 유도했기 때문일 수 있으나, 그 기원이 불분명하고 고대의 토난친 숭배와 연결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올바른 나와틀어 이름은 '디오스 이난친'(Dios Inantzin,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토난친이라는 이름 아래 우상 숭배를 가리려는 "사탄의 발명품"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먼 곳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전처럼 이곳을 찾는 것도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사아군은 또한 산타 아나 교회가 토치(Toci, 나와틀어로 "우리 할머니") 여신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 안나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이므로 문자 그대로 예수의 할머니가 맞지만, 원주민들이 성 안나를 핑계 삼아 실제로는 고대의 토치 여신을 숭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 안나가 그곳에서 기적을 행한 적이 없음에도 많은 이들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것을 근거로, 고대의 토치 숭배가 성 안나 숭배로 위장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종교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아군은 신대륙 스페인에서 기독교 복음화의 미래 자체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드러냈다. 특히 1576년에 발생한 파괴적인 역병으로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고 생존자들의 믿음마저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의 절망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멕시코가 가톨릭 신앙의 뿌리가 매우 얕은 척박한 땅이며, 작은 계기에도 신앙이 쉽게 시들고 경작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역병 시기에 고해성사를 통해 신앙을 시험해 본 결과, 제대로 응답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50년 이상 설교를 해왔지만, 만약 스페인인들의 영향력이 사라진다면 50년 안에 설교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