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비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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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빔비사라는 하리얀카 왕조를 세운 마가다의 왕으로, 기원전 543년에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는 앙가를 정복하고 코살라, 바이샬리 등과 혼인 동맹을 맺어 세력을 확장했으며, 라자그리하를 수도로 삼아 도시 건설과 영토 확장에 힘썼다. 빔비사라는 불교에 귀의하여 붓다에게 죽림정사를 기증하고 영취산으로 가는 길을 조성하는 등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아들 아자타샤트루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옥사했으며, 불교 및 자이나교 경전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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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비사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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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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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하리얀카 왕조 |
칭호 | 마가다의 왕 |
이름 | 빔비사라 |
로마자 표기 | Bimbisara |
생애 | |
출생 | 기원전 558년 또는 기원전 472년 |
출생지 | 마가다의 라자그리하 |
사망 | 기원전 491년 또는 기원전 405년 |
사망지 | 하리얀카 제국의 마가다, 라자그리하, 빔비사라 감옥 |
통치 | |
즉위 | 기원전 544년 ~ 기원전 492년 (52년) 또는 기원전 457년 ~ 기원전 405년 (52년) |
이전 | 밧티야 (족장으로서) |
계승 | 아자타샤트루 |
가족 | |
아버지 | 밧티야 |
배우자 | 코살라 데비 첼라나 다리니 크세마 / 케마 난다 파드마바티 / 파두마바티 암바팔리 |
자녀 | 아자타샤트루 |
종교 | |
종교 | 자이나교 또는 불교 |
기타 | |
섭정 | 하리얀카 |
섭정 유형 | 왕조 |
전투 | |
참전 | 앙가 정복 (기원전 538년) |
2. 생애
빔비사라는 고대 인도 마가다 왕국의 하리얀카 왕조를 창건한 왕이다. 그는 족장 밧티야의 아들로, 기원전 543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첫 수도는 기리브라자(라자그리하)였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왕국의 기틀을 다지고 훗날 파탈리푸트라가 될 마을을 요새화했다.
빔비사라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외교 정책을 통해 마가다의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동쪽의 앙가 왕국을 정복하여 갠지스 삼각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경제적, 전략적 이점을 얻었으며, 아들 아자타샤트루를 앙가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또한 코살라, 바이샬리의 리차비 부족, 펀자브의 마드라 부족 등 여러 세력과 혼인 동맹을 맺어 왕국의 안정과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특히 코살라와의 결혼으로 카시 지역 일부를 지참금으로 얻고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하기도 했다.[12] 그의 궁정에는 지바카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종교적으로 빔비사라는 붓다와 동시대 인물로, 불교와 자이나교 모두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문헌에 따르면 그는 붓다의 중요한 제자가 되어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붓다에게 죽림정사를 기증하는 등 불교 교단의 발전에 기여했다.[20][21] 자이나교 문헌에서는 그를 슈레니카라 부르며, 마하비라를 자주 찾아 가르침을 구한 신자로 묘사한다.[16][13]
빔비사라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불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들 아자타샤트루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감옥에 갇혀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11] 반면 자이나교 기록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한다.[11] 그의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푸라나는 28년 또는 38년, 싱할라어 연대기는 5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빔비사라는 족장 밧티야의 아들이었다. 다른 문헌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보디사 왕 또는 크샤트라우자스라고도 한다. 그는 기원전 543년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하리얀카 왕조를 열었으며, 훗날 파탈리푸트라가 되는 마을을 요새화하며 마가다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푸라나 문헌에는 빔비사라가 시슈나가 왕조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마하밤사』(『대사』)에서는 시슈나가가 빔비사라보다 후대의 왕이라고 하여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빔비사라가 시슈나가보다 앞선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빔비사라의 첫 수도는 기리브라자(오늘날의 라자그리하로 추정)였으며, 그는 수도 건설을 계속 추진하며 왕국의 힘을 키우는 데 힘썼다. 증대된 국력을 바탕으로 동쪽의 이웃 나라인 앙가를 정복했는데, 이는 아버지 밧티야가 앙가의 브라마닷타 왕에게 패배했던 것을 복수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앙가 정복은 성공적이었고, 빔비사라는 아들 쿠니카 왕자(아자타샤트루)를 앙가의 수도였던 참파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 정복을 통해 마가다는 갠지스 삼각주로 가는 길을 통제하고 동인도 해안의 중요 항구를 확보하게 되었다.[33] 또한 서북쪽 간다라의 왕 푸슈카라사린은 빔비사라에게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
빔비사라는 코살라국 왕족의 여성을 왕비로 맞이하며 결혼 동맹을 맺었고, 이때 지참금으로 코살라 지배하에 있던 카시국의 일부를 얻어 동인도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의 궁정에는 소나 콜리비사, 수마나(꽃 채집가), 콜리야(장관), 쿰바고사카(재무관), 지바카(의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빔비사라는 붓다가 출가했을 때 처음 만났다. 당시 붓다의 부족인 샤카족은 코살라국에 정복된 상태였고, 마가다와 코살라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빔비사라는 코살라의 내부 혼란을 유도할 목적으로 붓다에게 출가를 포기하고 정반왕의 뜻에 따라 카필라성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며, 전투 코끼리를 제공하여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2. 2. 군사 정복과 영토 확장
빔비사라는 족장 밧티야의 아들로, 기원전 543년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하리얀카 왕조를 세웠다. 그는 마가다 왕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초기 수도는 기리브라자(라자그리하로 확인됨)였다. 또한 훗날 파탈리푸트라라는 도시가 될 마을을 요새화하기도 했다.
빔비사라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통해 마가다의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동쪽의 인접국인 앙가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이끌었는데, 이는 아버지 밧티야가 앙가의 브라마닷타 왕에게 패배했던 것을 복수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나 앙가는 마가다에 합병되었고, 빔비사라는 자신의 아들 쿠니카(아자타샤트루)를 참파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앙가 정복을 통해 마가다는 갠지스 삼각주로 가는 길을 통제하게 되었으며, 동인도 해안의 중요 항구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어 경제적, 전략적으로 큰 이점을 얻었다.[11][33]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8만 개의 마을을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빔비사라는 외교 및 혼인 정책을 통해서도 영토를 확장했다. 코살라국 왕족의 여성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지참금으로 코살라국의 지배하에 있던 카시국의 일부를 획득했다. 이러한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바탕으로 빔비사라는 동인도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서북쪽의 간다라 왕국의 왕 푸슈카라사린(푸쿠사티)이 빔비사라에게 사절단을 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 마가다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2. 3. 혼인 동맹
빔비사라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 동맹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코살라의 왕 마하코살라의 딸이자 프라세나지트의 누이인 코살라데비였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카시 지역을 가져왔는데,[34][12] 이 결혼은 마가다와 코살라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빔비사라가 다른 경쟁 국가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외교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그의 두 번째 부인은 바이샬리의 리차비 부족 공주인 첼라나였다. 그녀는 자이나교[35][13]를 믿었던 체타카 왕의 딸이었다.[36][14] 세 번째 부인으로는 펀자브 지역 마드라 부족 족장의 딸인 크셰마(케마)를 맞이했다.[37][15] 고대 불교 문헌인 《마하바가》에는 빔비사라가 500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혼인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안정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2. 4. 종교적 후원
빔비사라는 자이나교 문헌에서 라지기르의 슈레니카[16][13]로 언급된다. 그는 자이나교 승려 야마다르의 고요함에 감명을 받아 자이나교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16][13] 빔비사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마하비라의 사마바사라나를 자주 방문했으며, 자이나교 라마야나[17]와 현명한 현자(프라사나 왕)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18] 그는 전생에 ''발라바드라''였다고도 한다.[19]
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아들 아자타샤트루에 의해 감금된 후 격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지옥에서 환생했으며, 그를 지옥으로 이끈 업이 다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22] 하지만 그는 다음 시대의 상승 운동(''우트사르피니'')이 시작될 때 나타날 미래 티르탕카라 중 첫 번째인 ''마하파드마''(때로는 ''파드마나바'')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0]

불경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처음 만났으며, 이후 중요한 제자가 되어 여러 불교 경전에 등장한다. 그는 불교 가르침에서 깨달음의 한 단계인 수다원(소타판나)을 성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0]
빔비사라는 붓다에게 죽림정사(Venuvana)를 기증했으며,[21] 붓다가 오랫동안 머물며 설법했던 영취산(Gridhrakuta, 기사굴산)으로 가는 길에 석단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길은 오늘날 '빈비사라 도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는 궁궐의 여인들이 저녁에 부처의 수도원을 방문하도록 허락했다. 여인들은 언제든지 부처를 공경할 수 있도록 머리카락과 손톱으로 된 사리탑을 원했고, 빔비사라는 부처와 상의하여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21] 만년에는 몸이 쇠약해져 직접 불법을 듣기 어려워지자, 부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구해 궁전 안의 탑사에 모시고 예배했다고 한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후에 붓다의 광명에 비추어져 아나함과(불환과)를 얻었다고 한다.
2. 5. 말년과 죽음
만년에는 몸이 쇠약해져 불교 의식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워지자, 부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구해 궁전 내의 탑사에 안치하고 예배했다고 전해진다.빔비사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데바닷타의 영향을 받은 아들 아자타샤트루에 의해 기원전 493년경 왕위를 찬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11][38] 아자타샤트루는 결국 빔비사라를 굶어 죽게 했으며, 이후 아자타샤트루가 왕위를 계승했다. 라지기르에는 당시 빔비사라 왕이 투옥되었던 감옥 터가 남아있다.

반면, 자이나교 경전에서는 빔비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8][11]
아들 아자타샤트루가 아버지 빔비사라에게 원한을 품고 유폐시킨 이 사건은 '왕사성의 비극'으로 불리며, 이를 배경으로 『관무량수경』이 만들어졌다. 아자타샤트루가 원한을 품게 된 이유에 대해 『대승 열반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빔비사라가 사냥 중 만난 한 선인이 사슴을 쫓아냈다고 생각해 그를 죽이려 했고, 그 선인은 죽기 전에 "다시 태어나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겠다"라고 저주했다는 것이다. 또한 선도의 『관경소』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식이 없던 빔비사라가 "3년 후에 죽어 왕자로 태어날 선인이 있다"는 점술가의 말을 듣고, 3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선인을 죽여 아들로 태어나게 했으며, 이때 선인이 저주를 걸었다는 기록이다. 하지만 선인 살해에 대한 언급은 열반경 외 다른 경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 관경소의 내용은 열반경과 다른 여러 경전의 내용이 혼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후에 붓다에 의해 광명으로 비추어져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한다.
3. 종교적 묘사
빔비사라는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왕으로, 불교와 자이나교 양쪽의 종교 문헌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인물이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깊이 귀의하여 불교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붓다와 승단을 위해 죽림정사를 기증했으며, 붓다가 자주 설법했던 영취산(기사굴산)으로 가는 길을 닦는 등 불교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길은 '빔비사라 도로'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또한 만년에는 몸이 쇠약해져 직접 부처를 찾아뵙기 어려워지자, 부처의 사리(머리카락과 손톱)를 구해 궁궐 내 탑사에 안치하고 예배했다고 한다. 불교 경전에서는 그가 사후에 깨달음의 한 경지인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전한다.
빔비사라의 비극적인 최후는 아들 아자타샤트루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는 것으로, 이 사건은 불교 경전인 『관무량수경』의 배경 설화가 되기도 했다.
자이나교 문헌에서도 빔비사라(슈레니카)는 마하비라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자이나교를 신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 종교에서의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자이나교
빔비사라는 자이나교 문헌에서 라지기르의 슈레니카로 불리며,[16][13] 자이나교 승려 야마다르의 고요함에 감명을 받아 자이나교 신자가 되었다.[13][39]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마하비라의 사마바사라나를 자주 방문했으며, 자이나교 라마야나[17][40]와 빛나는 현자(프라사나 왕)에 대해 물었다.[18] 그는 전생에 ''발라바드라''였다고 한다.[19]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아들이 그를 투옥한 후 격분하여 자살했다. 그 결과 그는 지옥에서 환생했으며, 그곳에서 태어나게 한 업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16][13][39] 또한 그는 다음 시대의 상승 운동(''우트사르피니'')이 시작될 때 나타날 미래 티르탄카라 연쇄의 첫 번째인 ''마하파드마''(때로는 ''파드마나바'')로 환생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6][13][39]
3. 2. 불교
불교 경전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빔비사라는 출가한 붓다에게 정반왕의 명에 따라 카필라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이는 당시 붓다의 부족인 샤카족을 정복한 코살라국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는데, 마가다국과 경쟁 관계였던 코살라국의 내부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붓다에게 출가를 만류하고 지원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후에 붓다가 깨달음을 얻자, 빔비사라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중요한 제자가 되었다. 그는 불교 가르침에서 깨달음의 경지인 수다원을 성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0] 빔비사라는 붓다에게 죽림정사를 기증했으며, 붓다가 오랫동안 머물며 설법했던 영취산(기사굴산)으로 가는 길에 석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 길은 오늘날 '빔비사라 도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빔비사라는 궁궐의 여인들이 저녁에 부처의 승원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여인들은 언제든 부처를 공경할 수 있도록 머리카락과 손톱으로 만든 탑을 원했고, 빔비사라가 부처에게 이를 청하자 부처는 요청에 응했다.[21] 만년에는 몸이 쇠약해져 직접 부처를 찾아뵙기 어려워지자, 부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구해 궁궐 내 탑사에 안치하고 예배했다고 전해진다.
빔비사라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아들 아자타샤트루에게 원한을 사 왕사성의 감옥에 갇혀 왕위를 빼앗기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관무량수경』의 배경이 되었다. 아자타샤트루가 빔비사라에게 원한을 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화가 전해진다. 대승 열반경에는 빔비사라가 사냥 중 만난 선인이 사슴을 놓아주었다고 오해하여 죽이려 하자, 그 선인이 죽기 전에 복수를 다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선도의 『관경소』에는 자식이 없던 빔비사라가 점술가의 예언을 기다리지 못하고 선인을 죽여 아들을 얻으려 했고, 이때 선인이 저주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열반경의 내용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사후에 붓다의 광명에 비추어져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한다.
4. 평가 및 유산
푸라나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28년 또는 38년 동안 마가다를 통치했으며, 싱할라어 연대기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을 5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를 허구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2022년 인도 영화 ''빔비사라''에 등장한다.
빔비사라는 15세에 아버지인 보디사 왕(다른 문헌에서는 크샤트라우자스로 기록됨)의 뒤를 이어 마가다의 왕이 되었다. 푸라나 문헌에는 그가 시슈나가 왕조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하밤사』(『대사』)에서는 시슈나가가 빈비사라보다 후대의 왕이라고 하여 그의 왕조 귀속은 명확하지 않다. 빈비사라가 시슈나가 이전의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아직 정설로 확립되지는 않았다. 그가 불교에 귀의한 나이는 16세라는 설도 있다.
빔비사라 왕은 국내 개혁에 힘쓰며 수도 라자그리하(왕사성) 건설을 이어갔고,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동쪽의 앙가국을 정복하여 "8만 개의 마을을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코살라국 왕족 여성을 왕비로 맞이하며 지참금으로 코살라 지배하에 있던 카시국 일부를 획득하는 등 동인도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붓다가 출가했을 때 처음에는 그의 뜻을 만류하려 했다. 당시 붓다가 속한 샤카족은 강대국인 코살라국에 정복된 상태였고,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은 경쟁 관계에 있었기에, 빈비사라는 코살라 내부 혼란을 유도할 목적으로 붓다에게 출가를 단념하고 정반왕의 명을 따라 카필라성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하며 지원을 제안했으나, 붓다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붓다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후에는 깊이 불교에 귀의하여 죽림정사를 기증했다. 또한 붓다가 오랫동안 머물며 설법했던 영취산(기사굴산)으로 가는 길의 석단 역시 그가 붓다의 설법을 듣기 위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이 길은 '빈비사라 도'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빔비사라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으며, 이름이 알려진 아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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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타샤트루 |
아바야 |
실라바트 |
비말라 꼰단냐 |
베하라 |
불교 경전에 따르면 아자타샤트루는 빔비사라와 왕비 맛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자이나교 전승에서는 아자타샤트루의 어머니가 바이샬리 왕 체타카의 딸인 체라나라고 한다. 불교 경전에서 아자타샤트루를 종종 'Vedehiputta|베데히푸타pi'('비데하 여인의 아들'이라는 의미)라고 부르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바이샬리(비데하 지역에 위치)와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자이나교 전승이 더 타당할 수 있다. 그의 아내 중 한 명인 차마(Ksemaa, 케마) 역시 붓다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만년에 빔비사라는 몸이 쇠약해져 직접 불법(법)을 듣기 어려워지자, 부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얻어 궁전 내에 탑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했다고 한다.
빔비사라는 아들 아자타샤트루에게 원한을 사, 붓다가 열반에 들기 7년 전에 아자타샤트루에 의해 유폐되어 권력을 빼앗기고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 '왕사성의 비극'은 『관무량수경』의 배경이 되었다. 아자타샤트루가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게 된 이유에 대해, 『대승열반경』에서는 빔비사라가 사냥 중 사슴을 놓치자 이를 쫓아냈다고 생각한 선인을 죽이려 했고, 그 선인이 죽기 전 "다시 태어나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겠다"라고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선도의 『관무량수경소』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자식이 없던 늙은 빔비사라가 "3년 후에 뒷산의 선인이 죽어 왕자로 태어날 것"이라는 점술가의 말을 듣고 3년을 기다리지 못해 선인을 죽였고, 선인이 죽기 전에 저주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선인 살해에 관한 이야기는 열반경 외의 다른 경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 여러 경전의 내용이 혼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빔비사라는 붓다의 광명에 비추어져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한다.
5. 대중문화
2022년 인도 영화 ''빔비사라''에서는 빔비사라를 허구적으로 묘사한 인물이 등장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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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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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Pengui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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