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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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하비라는 고대 인도에서 살았던 자이나교의 주요 인물이다. 자이나교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6세기에 활동했으며, 쿤드라그라마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그는 30세에 출가하여 12년 반 동안 고행하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30년 동안 가르침을 전파했다. 마하비라의 탄생과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자이나교에서는 기원전 527년을 마하비라의 열반 시기로 본다. 마하비라는 자이나교의 윤리적 원칙인 아힘사(무폭력), 사티아(진실), 아스테야(불도), 브라마차르야(정결), 아파리그라하(무소유)를 강조했으며, 아네칸타바다(다면적 진리론)를 설파했다. 그의 가르침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생명체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을 강조했다. 마하비라는 자이나교의 24번째이자 마지막 티르탕카라로 숭배받으며, 그의 가르침은 자이나교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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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비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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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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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비라 아티비라 바르다마나 산마티나타 |
숭배 대상 | 자이나교 |
상징 | 사자 |
복장 | 금색 |
출생 | 기원전 599년 |
출생지 | 밧지 연맹 나야족 쿤다그라마 (현재의 날란다구, 비하르주, 인도) |
사망 | 기원전 527년 |
사망 장소 | 마가다 파와푸리 (현재의 날란다구, 비하르주, 인도) |
해탈 장소 | 마가다 파와푸리 (현재의 날란다구, 비하르주, 인도) |
축제 | 마하비르 잔마 칼야나크 디왈리 |
만트라 | Śrī Mahāvīrāya Namaḥ (스리 마하비라야 나마) |
출생명 | 바르다마나 |
왕조 | 이크슈바쿠 왕조 |
나무 | 사라수 |
계보 | |
아버지 | 싯다르타 |
어머니 | 트리샬라 |
형제자매 | 난디바르다나 수다르사나 |
배우자 | 야소다 |
자녀 | 프리야다르샤나 |
종교적 역할 | |
유형 | 제24대 티르탕카라 |
전임자 | 파르슈바나타 |
후임자 | 마하파드마(다음 시간 주기의 첫 번째 티르탕카라) |
2. 역사적 배경
자이나교 학자들은 마하비라가 고대 인도에서 살았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 디감바라의 "우타라푸라나"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비데하 왕국의 쿤드라그라마에서 태어났으며,[1] 스베탐바라의 "칼파 수트라"는 현재 인도 비하르 주에 위치한 "쿤드라그라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2][3]
마하비라의 탄생과 사망 시기는 불확실하다. 한 견해에 따르면 기원전 540년에 태어나 기원전 443년에 사망했다. 프라크리트어로 된 바를리 비문은 기원전 443년(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84년)에 새겨졌으며, "주 비라의 84번째 해에 헌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비문은 기원전 2~1세기에 작성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부처와 마하비라는 동시대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자이나교 전통에서 "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시대는 기원전 527년(마하비라의 열반)에 시작되었다. 12세기 자이나교 학자 헤마찬드라는 마하비라를 기원전 6세기에 위치시켰다.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전통적인 기원전 527년 날짜가 정확하며, 부처는 마하비라보다 어렸고 "몇 년 후에 열반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2. 1. 마하비라 시대의 인도

자이나교 학자들은 마하비라가 고대 인도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보편적으로 동의한다. 디감바라의 "우타라푸라나"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비데하 왕국의 쿤드라그라마에서 태어났으며,[1] 스베탐바라의 "칼파 수트라"는 현재 인도 비하르 주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쿤드라그라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2][3] 그의 출생지는 파트나 (비하르의 수도)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바수 쿤드 마을로 추정되지만,[4][5] 그의 출생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마하비라는 28세(일부에 따르면) 또는 30세에 물질적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12년 반 동안 수도 생활을 하며 앉지도 않았고, 케발갸나를 얻은 후 30년 동안 다르마를 설파했다. 그가 어디에서 설교했는지는 자이나교의 두 주요 종파인 스베탐바라와 디감바라 전통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하비라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한 견해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540년에 태어나 기원전 443년에 사망했다. 프라크리트어로 된 바를리 비문은 기원전 443년(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84년)에 새겨졌으며, "주 비라의 84번째 해에 헌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절 "Viraya Bhagavate chaturasiti vase"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마하비라의 열반 후 84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비문은 기원전 2~1세기에 작성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부처와 마하비라는 동시대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많은 고대 불교 문헌에 의해 뒷받침된다.
자이나교 전통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부분은 "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시대가 기원전 527년(마하비라의 열반)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 자이나교 학자 헤마찬드라는 마하비라를 기원전 6세기에 위치시켰다.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전통적인 기원전 527년 날짜가 정확하며, 부처는 마하비라보다 어렸고 "몇 년 후에 열반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그의 열반 장소인 현재 비하르에 있는 파바푸리는 자이나교 신자들의 순례지이다.
3. 생애
자이나교 학자들은 마하비라가 고대 인도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보편적으로 동의한다. 디감바라의 "우타라푸라나"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비데하 왕국의 쿤드라그라마에서 태어났으며,[15] 스베탐바라의 "칼파 수트라"는 현재 인도 비하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쿤드라그라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16][17] 그의 출생지는 파트나 (비하르의 수도)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바수 쿤드 마을로 추정되지만,[18][19] 그의 출생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마하비라는 28세(일부에 따르면) 또는 30세에 물질적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12년 반 동안 수도 생활을 하며 앉지도 않았고, 케발갸나를 얻은 후 30년 동안 다르마를 설파했다. 그가 어디에서 설교했는지는 자이나교의 두 주요 종파인 스베탐바라와 디감바라 전통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하비라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한 견해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540년에 태어나 기원전 443년에 사망했다. 프라크리트어로 된 바를리 비문은 기원전 443년(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84년)에 새겨졌으며, "주 비라의 84번째 해에 헌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절 "Viraya Bhagavate chaturasiti vase"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마하비라의 열반 후 84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비문은 기원전 2~1세기에 작성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부처와 마하비라는 동시대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많은 고대 불교 문헌에 의해 뒷받침된다.
자이나교 전통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부분은 "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시대가 기원전 527년(마하비라의 열반)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 자이나교 학자 헤마찬드라차리아는 마하비라를 기원전 6세기에 위치시켰다.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전통적인 기원전 527년 날짜가 정확하며, 부처는 마하비라보다 어렸고 "몇 년 후에 열반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그의 열반 장소인 현재 비하르에 있는 파바푸리는 자이나교 신자들의 순례지이다.
마하비라는 티르탕카라로서, 익슈바쿠 왕조의 시다르타 왕과 리차비족 공화국의 트리샬라 여왕의 크샤트리아 왕족 가문에서 태어났다.[20] 익슈바쿠 왕조는 첫 번째 티르탕카라 리샤바나타에 의해 세워졌다.
마하비라의 전생은 《마하푸라나》와 《트리-샤스티-샬라카-푸루샤-차리트라》와 같은 자이나교 경전에 묘사되어 있다. 비록 영혼은 윤회의 순환 속에서 수없이 많은 환생을 겪지만, 카르마의 원인을 결정하고 라트나트라야를 추구할 때부터 티르탕카라의 탄생이 계산된다. 자이나교 경전은 마하비라가 티르탕카라로 화생하기 전 26번의 탄생을 묘사한다. 경전에 따르면, 그는 이전 생에서 마리치 (바라타 차크라바르틴의 아들)로 태어났다.
3. 1. 탄생과 유년 시절
마하비라는 16대국 시대 마가다국 (현재 비하르 주)의 바이샬리[24]의 한 구석인 쿤다프라에서 크샤트리아 (무사 계급)에 속하는 호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귀한 씨족의 족장 싯다르타(Siddārtha), 어머니는 바이샬리 왕의 여동생 트리샬라(Triśalā)였다. 양친 모두 자이나교의 전신에 해당하는 니간타파[25]에 귀의했다. 나타족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로는 즈냐트리족) 출신이기 때문에 나타푸타 ("나타족의 아들")라고도 불렸다.자이나교 학자들은 마하비라가 고대 인도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보편적으로 동의한다. 디감바라의 "우타라푸라나"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비데하 왕국의 쿤드라그라마에서 태어났으며, 스베탐바라의 "칼파 수트라"는 현재 인도 비하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쿤드라그라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의 출생지는 파트나 (비하르의 수도)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바수 쿤드 마을로 추정되지만, 그의 출생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티르탕카라 마하비라는 익슈바쿠 왕조(Ikshvaku)의 시다르타 왕과 리차비족(Licchavi) 공화국의 트리샬라 여왕의 크샤트리아 왕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익슈바쿠 왕조는 첫 번째 티르탕카라 리샤바나타에 의해 세워졌다.
자이나교도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599년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일은 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달력 시대의 차이트라 달의 떠오르는 달의 열세 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는 그레고리력의 3월 또는 4월에 해당하며, 자이나교도들은 이를 마하비르 잠마 칼리야낙으로 기념한다.
크샤트리야쿤드(마하비라의 탄생지)는 전통적으로 인도-갠지스 평원의 고대 도시인 바이샬리 근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의 비하르에 위치해 있지만, 고대 비하르에서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 위치는 불분명하다. 자이나교 텍스트의 "세계사"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나기 전 많은 환생(총 27번의 출생)을 거쳤다. 여기에는 지옥의 거주자, 사자, 그리고 마지막 출생 전 천상의 영역에 있는 신(''데바'')이 포함된다. 슈베탐바라 텍스트는 그의 배아가 시다르타의 아내 트리샬라의 자궁으로 인드라 군대의 신성한 사령관인 하리-나이게메신에 의해 옮겨지기 전에 브라만 여성에게서 처음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배아 이식 전설은 디감바라 전통의 신봉자들은 믿지 않는다.
자이나교 텍스트는 마하비라가 태어난 후, 신 인드라가 56명의 ''디그쿠마리에스''와 함께 천국에서 내려와 그에게 기름을 붓고 메루 산에서 그의 ''아비셰카''(성별)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많은 자이나교 사원에서 묘사되며, 현대 자이나교 사원 의식의 일부를 차지한다. ''칼파 수트라''의 마하비라 탄생 설화는 슈베탐바라 자이나교도들이 연례 ''파리우샤나'' 축제 기간에 낭송하지만, 동일한 축제는 디감바라들이 낭송 없이 지킨다.
마하비라는 왕자로 자랐다. Ācārāṅga Sūtra의 두 번째 장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파르슈바나타의 평신도 신자였다. 자이나교 전통은 마하비라가 결혼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디감바라 전통은 그의 부모가 그에게 야소다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결혼을 거부했다고 믿는다. 스베탐바라 전통은 그가 어린 나이에 야소다와 결혼하여 프리야다르샤나라는 딸을 두었고, 아노자라고도 불린다고 믿는다.
자이나교 경전은 마하비라를 키가 큰 인물로 묘사한다; 그의 키는 ''Aupapatika Sutra''에서 4 큐빗 (6 피트)으로 묘사되었다. 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그는 24명의 ''티르탕카라'' 중 가장 키가 작았으며, 초기 ''아리한트''는 더 키가 컸던 것으로 여겨지며, 1,000년 동안 살았던 22번째 ''티르탕카라''인 네미나타 또는 아리스타네미는 65큐빗(약 29.87m)의 키를 가졌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출생은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틀 안에 있다[26]. 마지막 구세주가 될 그는 지상에 내려와 파르샤 (파르슈바)에 의한 니간타파의 가르침과 그 창설에 의한 공동체의 도덕적 완전성을 부흥시키려고 결의한다. 그는 어떤 바라문의 아내 데바난다 (Devānandā)의 자궁 속에 화신하지만, 신들은 장래의 구세주에 걸맞은 인물로서 천상의 성스러운 젖으로 그를 적시고, 구세주는 크샤트리아의 집안에서 태어나야 한다며 태아를 마가다국의 공주인 어머니의 체내로 이송한다. 위대한 인물의 도래를 예고하는 14개 또는 16개로 불리는 일련의 꿈으로, 두 어머니는 구세주・전륜성왕의 탄생을 알린다. 그리고 붓다나 조로아스터에서와 마찬가지로, 탄생한 그날 밤 하늘에 거대한 빛이 빛났다. 그것은 차이트라 백월 13일의 일로, 그레고리력으로는 4월 12일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바르다마나 ("번영하는 자")라는 이름을 받는다. 그의 생일은 마하비르 자얀티 (Mahavir Jayanti)라고 불리며, 전 세계 자이나교도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휴일로 기념된다. 이 휴일은 기도, 장식, 퍼레이드 및 제전으로 유명하다.
3. 2. 출가와 고행
마하비라는 30세에 왕족의 삶을 버리고 집과 가족을 떠나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고행자의 삶을 살았다.[1] 그는 극심한 단식과 신체적 고행을 감행했고, 아쇼카 나무 아래에서 명상했으며, 옷을 버렸다.[2] ''아차랑가 수트라(Ācārāṅga Sūtra)''에는 그의 고난과 자기 고행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담겨 있다.[3]''칼파 수트라(Kalpa Sūtra)''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그의 생애 처음 42번의 우기를 아스티카그라마(Astikagrama), 참파푸리(Champapuri), 프리스티참파(Prstichampa), 바이샬리(Vaishali), 바니자그라마(Vanijagrama), 날란다 구(Nalanda), 미틸라(Mithila), 바드리카(Bhadrika), 알라비카(Alabhika), 파니타부미(Panitabhumi), 슈라바스티(Shravasti), 파와푸리(Pawapuri)에서 보냈다.[4] 그는 고행 생활 41년째의 우기 동안 라자가리하(Rajagriha)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491년으로 추정된다.[5]
30세에 부모의 죽음을 겪은 바르다마나는 형의 허락을 받아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출가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니간타파의 사문(śramaṇa)[29] 수행자가 되어 수행 생활에 들어갔다. 인생을 고통(duḥkha)으로 보고, 올바른 신앙(정신)·올바른 지식(정지)·올바른 행위(정업)[30]를 통해 영혼의 구제를 꾀하며, 13개월의 명상을 거쳐 모든 의복과 신발을 버리고 나체가 되었다. 이것은 니간타파의 전통에서 이탈하는 최초의 혁신이었다. 나체 상태로 "공기를 걸치고" 세속적인 소유물을 모두 포기하고, 12년간 격렬한 고행과 명상에 몸을 바쳤다. 고행을 지속하는 동안, 그는 감각에 대한 전형적인 통제 방식을 보여주었으며, 인간,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모든 면에서 이들을 상처 입히지 않도록 노력했다. 리주쿠라 강(리주파리카 강) 강변 줄림비카(자브라카) 마을에서 수행을 마치고, 이틀 반 동안의 명상 후 여름 밤, 줄림비카의 사라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닫고 "전능의 힘"을 획득하여 "'''지나'''"(Jina, "승리자")가 되었다. 자이나교는 이 "지나의 가르침"에서 유래한다. 그는 제자들과 신봉자들에 의해 "위대한 용사" '''마하비라'''라고 칭송받게 되었다.
3. 3. 가르침과 전파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43세에 12년 동안의 혹독한 고행 끝에 지림비카그라마 근처 리주발리카 강둑에 있는 살 나무 아래에서 케발라 즈나나(전지, 무한한 지식)를 얻었다.[1]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자이나교의 ''우타르 푸라나''와 ''하리밤사 푸라나''에 묘사되어 있다.[2] ''아차랑가 수트라''는 마하비라를 모든 것을 보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수트라크리탕가는 이를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확장하며, 그의 다른 자질을 묘사한다.[3] 자이나교도들은 마하비라가 가장 상서로운 몸(''파라마우다리카 샤리라'')을 가졌으며, 전지를 얻었을 때 18가지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믿는다.[4]
스베탐바라에 따르면, 그는 전지를 얻은 후 30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며 자신의 철학을 가르쳤다.[5] 그러나 디감바라는 그가 그의 사마바사라나에 머물면서 추종자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믿는다.[6]
자이나교 경전에는 마하비라의 첫 번째 제자로서 11명의 바라문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들을 11명의 ''가나다라''라고 부른다.[7] 인다라부티 고타마가 이들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여겨지며,[8] 다른 제자들로는 아그니부티, 바유부티, 아캄피타, 아르야 뱌크타, 수다르만, 만디타푸트라, 마우르야푸트라, 아칼라브라타, 메트라야, 프라바사가 있었다. ''가나다라''들은 마하비라의 사후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구두로 전했다고 여겨진다. 그의 가르침은 ''가니-피다가'', 즉 자이나교 ''아가마''로 알려지게 되었다.[9]
《칼파 수트라》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14,000명의 ''사두''(남성 수행자), 36,000명의 ''sadhvis''(여성 수행자), 159,000명의 ''스라바카''(남성 재가 신자), 그리고 318,000명의 ''스라비카'' (여성 재가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10] 자이나교 전통은 하리양카 왕조의 스레니카와 쿠니카(일반적으로 빔비사라와 아자타샤트루로 알려짐) 그리고 비데하의 체타카를 그의 왕족 추종자라고 언급한다.[11] 마하비라는 그의 탁발승들에게 ''마하브라타''(5가지 서약)를 시작하게 했다.[12] 그는 55개의 ''pravachana''(암송)와 일련의 강의(''Uttaraadhyayana-sutra'')를 했다.[13] 찬다나는 여성 수도회 지도자로 여겨진다.[14]
마하비라는 이후 30년 동안 나체로 갠지스강 중류의 마가다, 앙가, 비데하의 여러 나라를 유행하며, 그 가르침("정신의 자유"라는 영원한 진실)을 설파하고 널리 알렸으며, 특히 바이샬리 지방에서 많은 신자를 얻었다. 그 가르침은 브라만에 의한 제사를 인정하지 않고, 베다의 권위와 카스트 제도를 부정했으며,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세계관을 갖추었고, 산자야 벨라티푸타의 회의론은 실천의 지침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실천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마하비라는 바이샬리의 호족 출신으로, 바이샬리 왕과 친모를 통한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포교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또한 마가다국 왕비도 바이샬리 왕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종종 마가다의 왕도 라자그리하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은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으며, 40만 명의 신봉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하비라는 기후상 가장 혹독한 계절에도 맨발로 옷을 입지 않고 설교를 했다. 몬순 기간에는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마을 주변에 머물렀다.
3. 4. 입멸 (열반)
마하비라는 72세에 마가다국 파탈리푸트라(현재 파트나 시) 근교의 파바 마을(현재 파와푸리)에서 단식을 계속한 채 생을 마감했다.[4] 자이나교에서는 그를 제24조(24번째 지나)로 취급한다.[4]자이나교에서 마하비라의 죽음은 열반(니르바나)에 도달한 것으로, 영혼이 천공의 최정상에 도달하여 영구히 머무는 것으로 여겨진다.[4] 자이나교에서는 이를 목샤(Moksh, 해탈)라고 칭하며 축일로 기념한다.[4]
마하비라의 입멸 연도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붓다의 열반보다는 몇 년 앞선 사건으로 여겨진다.[4]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가 서거했을 때 속인 대규모 공동체 외에 1만 4000명의 승려(사두, sādhu)와 3만 6000명의 비구니(사두비, sādhvī)가 있었다고 한다.[4]
4. 주요 가르침
식민지 시대 인도학자들은 자이나교와 불교가 도상학, 명상 등에서 표면적인 유사성이 있어 불교의 분파로 여기기도 했다.[11]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면서 마하비라와 붓다의 가르침은 매우 다른 것으로 밝혀져 자이나교는 별개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마하비라는 "영혼에 대한 매우 정교한 믿음"을 가르쳤고, 그의 수행적 가르침은 불교나 힌두교보다 더 높은 수준이며, 아힘사(무폭력)에 대한 강조는 다른 인도 종교보다 더 크다.[11]
마하비라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는 영혼(또는 자아)이 없다는 아나타(무아) 개념에 기반한 불교와는 다른 점이다.[11] 마하비라는 영혼은 드라비야(실체)이며 영원하지만 동시에 일시적이라고 가르쳤다.
마하비라에게 우주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드라비야', '지바', 그리고 '아지바'(무생물)로 구성된다. '지바'는 업(자신의 행위의 결과) 때문에 윤회(환생)에 묶여 있다. 자이나교에서 업은 행위와 의도를 포함하며, 그것은 영혼(''레샤'')을 물들여 영혼이 죽은 후 어떻게,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마하비라에 따르면, 창조신은 없으며 존재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나 자이나교에는 신과 악마가 존재하며, 그들의 '지바'는 생과 사의 동일한 순환의 일부이다. 수행의 목표는 '지바'를 업의 축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환생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인 싯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하비라에게 깨달음은 자기 인식, 자기 수양, 그리고 물질주의로부터의 절제의 결과이다.
마하비라는 베드비즈나안(Bhedvijnān)의 개념을 가르쳤다. 이는 영혼(지바, jiva)과 비영혼(아지바, ajiva)을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비즈나안은 영원하고 독립적인 순수한 영혼과, 몸, 생각, 감정 등 일시적인 외부 존재를 구별하는 실천이다.
마하비라는 이러한 이해가 니슈차이 삼약 다르샨(nischay Samyak darshan, 경험적 자아 실현)의 달성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고통은 물질적인 대상과 영혼을 잘못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베드비즈나안의 가르침은 개인이 진정으로 자아(영혼)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인식하도록 안내한다. 순수한 영혼과 삶의 일시적인 요소들을 구별함으로써, 무집착(바이라기야, vairagya)을 배우고 해탈(목샤, moksha)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베드비즈나안은 자아 실현 과정에서 디딤돌 역할을 한다. 수련자는 먼저 비영혼과의 잘못된 동일시를 목격자(''bhed-nasti'')로서 인식하고, 나중에는 영혼 자체의 존재와 진정한 본질(''asti'')을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인식 상태에서 영혼을 직접 경험하게 하고, 업적 애착을 파괴한다.[13]
자이나교에서, 이 지식은 올바른 믿음(삼약 다르샨, samyak darshan)을 발전시키고 ''삼약 갸안''(전지)을 얻기 위한 토대로 여겨진다.
마하비라는 '아네칸타바다'(다면적 현실) 교리를 가르쳤다. 초기 자이나교 문헌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지만, 마하비라가 추종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 교리를 설명했다.[39] 진리와 현실은 복잡하고 여러 측면을 가지며, 경험은 가능하지만 언어만으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나야스"("진리의 부분적인 표현")이며, 언어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표현 수단일 뿐이다. 마하비라는 진리에서 언어가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했다. 맛의 "진리"는 경험할 수 있지만,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경험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시앗''("어떤 면에서는") 유효하지만, "아마, 단 하나의 관점, 불완전함"으로 남는다. 영적인 진리 또한 복잡하고 다면적이어서 언어로는 그 다원성을 표현할 수 없지만, 노력과 적절한 업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마하비라의 ''아네칸타바다'' 교리는 Samaññaphala Sutta 같은 불교 경전에도 요약되어 있는데, 이는 마하비라와 붓다 가르침의 주요 차이점이다. 붓다는 "있다" 또는 "없다"의 극단을 거부하고 중도를 가르쳤지만, 마하비라는 "아마도"라는 화해와 함께 "있다"와 "없다"를 모두 받아들였다.
자이나교 아가마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형이상학적, 철학적 질문에 "한정적 긍정"(''시앗'')으로 답했다. 이 교리는 고대 인도 철학의 아지비카 학파에서도 발견된다.
일부 자이나교 신자들은 ''아네칸타바다'' 교리가 "보편적인 종교적 관용... 다원성... [그리고]... 다른 [윤리적, 종교적] 입장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조장한다"고 해석하지만, 이는 자이나교 역사적 텍스트와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마하비라의 "다면성, 다중 관점" 가르침은 현실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교리이지, 동물 희생(또는 식용)이나 불신자(또는 다른 생물)에 대한 폭력 같은 종교적 입장을 "아마도 옳다"고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이나교 수도승과 수녀의 다섯 가지 서약은 엄격하며, "아마도"라는 여지는 없다.
마하비라는 논증 시 사물은 상대적으로만 인식되며,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일방적이고 단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말고, 반드시 "어떤 점에서는"(스야트)이라는 제한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붓다의 중도설에 대해, 사물을 다면적으로 보아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부정설'''의 입장을 취했다. 어떤 사상에 대한 판단은 판단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며, 그 판단 수는 7가지로 생각된다. 이는 자이나교의 '''상대론'''(아네칸타-바다, anekānta-vāda)적 측면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이 7가지 판단을 바탕으로 세계 성립 원리("칠제"[43])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세계의 경과를 설명한다.
마하비라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환생과 존재의 영역이다. 아차랑가 수트라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동물, 식물, 곤충, 물, 불, 바람을 포함한 무수한 형태로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승려가 이들 중 어떤 것도 만지거나 방해해서는 안 되며 (식물을 포함), 수영하거나, 불을 켜거나 (끄거나), 공중에서 팔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행동은 물질의 그러한 상태에 살고 있는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하비라는 존재의 본질은 순환적이며, 영혼은 죽음 후에 고통의 천상, 지옥, 또는 지상의 영역인 ''트릴록'' 중 하나로 환생한다고 설교했다. 인간은 자신의 업(행동)에 따라 인간, 동물, 원소, 미생물 또는 기타 형태로 지상이나 천상 (또는 지옥) 영역에서 환생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사람 (신, 악마 및 지상의 존재 포함)은 죽고 이전 생에서의 행동에 따라 환생한다. 케발라 지냐나(전지)에 도달한 ''지나''는 환생하지 않으며, "완성된 자의 영역"인 ''시달로카''에 들어간다.
마하비라의 형이상학은 세계 혹은 우주를 "생명"(영혼, 지바)과 "비생명"(비영혼, 아지바)으로 분류하여 다원적 실재론을 전개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교의에 따르면 우주는 영혼, 운동의 조건, 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의 5가지 실재체로 구성된다. 영혼은 자이나교에서는 6종으로 분류되며, 지(흙)·수(물)·화(불)·풍(공기)·식물·동물을 "육생류"라고 총칭하며, 일반적으로 생물로 간주되는 범위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생명"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큰 특징으로 한다. 우주를 세계와 비세계로 구분하는 분류도 있으며, 그 경우, 비세계에는 허공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마하비라의 입장은 무신론에 속하며,[40] 우주 창조신이나 절대적인 원리를 부정하는 점에서도 불교와 공통점이 있다. 또한,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하강성을 가지는 반면, 영혼은 상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영혼(육생류)은 생겨나거나 멸하는 일이 없이 영겁에 걸쳐 윤회의 생존을 반복하며, 본래 정해진 형태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윤회는 더러운 업이 영혼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인해 일어난다. 업이란 신체, 언어, 의지를 통해 행한 행위이며, 그것에 의해 미세한 물질이 영혼으로 흘러들어 윤회의 생존이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흘러들어간 전생으로부터의 묵은 업을 고행으로 없애고, 새로운 업이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윤회는 끝나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
업, 특히 악업에는 물리적인 무게가 있어, 악업을 많이 포함한 영혼은 속박을 받아 영혼이 본래 가진 상승성이 방해받아 지옥, 축생, 인간, 신들의 4가지 세계의 경계를 헤맨다. 악업이 심한 경우에는 따라서 죽은 뒤 지옥으로 떨어진다. 해탈한 영혼에는 속박이 없고, 상승성은 방해받지 않는다. 선행과 서약을 지키는 생활을 함으로써 이 상승성을 해방하면, 영혼은 세계의 정상에 도달하여 평안의 경지인 극락 세계에 이를 수 있다.
팔리어 경전에 등장하는 사문[36] (육사외도) (사문과경에서[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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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36] | 론(사상)[37] |
푸라나 카사파 | 무도덕론, 도덕 부정론: 선행도 악행도 없으며, 선악 어느 쪽의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
마스카리 고살라 (아지비카교) | 운명결정론 (숙명론): 자기 의지에 의한 행위는 없고, 모든 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정해진 기간 동안 윤회하는 운명이다. |
아지타 케사캄발라 (순세파) | 유물론, 감각론, 쾌락주의: 사람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죽으면 흩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선악 어느 행위의 보상도 없다고 하고, 현세의 쾌락만을 설한다. |
파쿠다 카차야나 (상주론자) | 요소 집합설: 사람은 지·수·화·풍의 사원소와 고·락 및 생명(영혼)의 일곱 가지 요소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불변부동하여 상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마하비라 (자이나교) | 상대주의, 고행주의, 요소 실재설: 영혼은 영원불멸의 실체이며, 탁발·고행 생활로 업의 더러움을 씻어내어 열반을 목표로 한다. |
산자야 벨라티푸타 | 불가지론, 회의론: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판단의 유보. |
브라만교에서는 사람들은 4개의 계급으로 나뉘며, 최상위의 브라만(사제 계급)만이 신과 교류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브라만교는 사제 계급에 의한 신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 종교였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붓다와 마하비라 등의 자유 사상가들이었다. 마하비라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함과 동시에, 다수의 동물을 죽여 신에게 생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격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브라만이 추상적으로만 제시했던 업(카르마)의 과정을 생생한 형태로 재정의했다.[38]
4. 1. 다섯 가지 서약 (마하브라타)
자이나교의 윤리
자이나교 경전은 수행자와 재가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서약(브라타)을 제시한다.[8] 마하비라가 설파한 이 다섯 가지 서약은 다음과 같다.
# '''아힘사''' (불살생): 모든 생명체는 신성하고 존엄하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행동, 언어, 생각에 모두 적용되는 자이나교의 가장 중요한 서약이다.[9]
# '''사티아''' (진실성):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진실해야 한다.[9]
# '''아스테야''' (불도):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
# '''브라마차르야''' (정결): 승려에게는 성관계 및 감각적 쾌락을 자제하는 것이고, 재가자에게는 배우자에게 정절을 지키는 것이다.[9]
# '''아파리그라하''' (무소유): 재가자에게는 재산이나 세속적 소유에 대한 무집착을, 탁발승에게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영적인 평화와 더 나은 환생, 궁극적으로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또한,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진다.
마하비라는 인도의 전통에서 ''아힘사''를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10] 그는 ''아힘사''가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며, 어떤 형태로든 생명체를 해치는 것은 나쁜 업을 만들어 사람의 환생과 미래의 행복, 고통에 영향을 미친다고 가르쳤다.
마하비라는 브라만교에서 중시되던, 다수의 동물을 죽여 신에게 바치는 생제물 제사를 비판하고,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였다. 그는 추상적이던 업의 과정을 생생한 형태로 재정의했다.[38]
마하비라는 파르슈바의 "사계"를 다음과 같은 "오계"로 개정하였다.
# '''불살생'''([아힘사)
# '''진실어''' (불망어, 사티야)
# '''불도''' (불여득, 아스띠야)
# '''불음'''(브라흐마차리야)
# '''무소유''' (불소득, 아파리그라하)
불교의 오계와 많은 부분이 겹치지만, 붓다가 중도를 설한 것과 달리 마하비라는 고행주의를 따랐다.
'''불음'''은 출가자에게는 성행위를 일절 하지 않는 것을, 재가에서는 남편 이외의 남성이나 아내 이외의 여성과 성적으로 교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소유'''는 출가자, 특히 공의파에서는 옷을 전혀 입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만, 재가 신자의 경우에는 스스로 설정한 한도 이상으로 얻은 재화를 교단에 기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하비라는 "생명이 생명에 의해 상처 입는" 고뇌를 사색하고, 고통의 원인인 카르마(업)를 제거하여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자이나교에서는 특히 "불살생"과 "무소유"의 실천을 중시한다.
'''불살생'''(아힘사)은 모든 생명체가 고통을 싫어하며, 그것을 죽이면 증오가 살해자에게 되돌아와 속박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이나교에서 "생명"의 범위는 매우 넓으며, 용기 가득한 물은 개미와 같이 모두 생명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자이나교의 불살생은 불교보다 더 철저하며,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는다. 자이나 수행자는 물 거름망, 입을 가리는 천, 방울 달린 지팡이, 부드러운 빗자루 등을 필수품으로 사용한다. 물 거름망은 물 속 미생물을 제거하고, 천은 공기 중 미생물을 흡입하지 않도록 하며, 지팡이나 빗자루는 길을 걸을 때 벌레를 밟지 않도록 한다. 자이나교 신자용 가게나 시장에서는 고기나 생선류, 뿌리채소류나 꿀 등도 취급하지 않는다. 일몰 후 외출은 금지된다.
'''무소유'''는 "무욕무일물(無欲無一物)"의 청정한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하비라는 소유는 욕구이며, 욕구는 행위를 유발하고, 행위는 살생으로 이어져 최대의 죄이자 속박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 등 인간관계, 욕구 등 정신적인 것, 수행에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나체형이 자이나교에서 수행의 이상으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출가자의 수행은 불교보다 엄격하며, 바르다마나가 고행을 계속한 것을 본받아 시련을 견디는 것이 중시된다. 고행은 영험을 낳고 영혼의 업을 털어내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다. 단식이 중시되며, 최종 해탈에는 단식으로 육신을 포기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4. 2. 아네칸타바다 (अनेकान्तवाद, Anekāntavāda, 다면적 진리론)
마하비라는 '아네칸타바다'(다면적 현실) 교리를 가르쳤다. 초기 자이나교 문헌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지만, 마하비라가 추종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 교리를 설명했다.[39] 진리와 현실은 복잡하고 여러 측면을 가지며, 경험은 가능하지만 언어만으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나야스"("진리의 부분적인 표현")이며, 언어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표현 수단일 뿐이다. 마하비라는 진리에서 언어가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했다. 맛의 "진리"는 경험할 수 있지만,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경험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시앗''("어떤 면에서는") 유효하지만, "아마, 단 하나의 관점, 불완전함"으로 남는다. 영적인 진리 또한 복잡하고 다면적이어서 언어로는 그 다원성을 표현할 수 없지만, 노력과 적절한 업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마하비라의 ''아네칸타바다'' 교리는 Samaññaphala Sutta 같은 불교 경전에도 요약되어 있는데, 이는 마하비라와 붓다 가르침의 주요 차이점이다. 붓다는 "있다" 또는 "없다"의 극단을 거부하고 중도를 가르쳤지만, 마하비라는 "아마도"라는 화해와 함께 "있다"와 "없다"를 모두 받아들였다.
자이나교 아가마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형이상학적, 철학적 질문에 "한정적 긍정"(''시앗'')으로 답했다. 이 교리는 고대 인도 철학의 아지비카 학파에서도 발견된다.
일부 자이나교 신자들은 ''아네칸타바다'' 교리가 "보편적인 종교적 관용... 다원성... [그리고]... 다른 [윤리적, 종교적] 입장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조장한다"고 해석하지만, 이는 자이나교 역사적 텍스트와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마하비라의 "다면성, 다중 관점" 가르침은 현실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교리이지, 동물 희생(또는 식용)이나 불신자(또는 다른 생물)에 대한 폭력 같은 종교적 입장을 "아마도 옳다"고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이나교 수도승과 수녀의 다섯 가지 서약은 엄격하며, "아마도"라는 여지는 없다.
마하비라는 논증 시 사물은 상대적으로만 인식되며,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일방적이고 단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말고, 반드시 "어떤 점에서는"(스야트)이라는 제한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붓다의 중도설에 대해, 사물을 다면적으로 보아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부정설'''의 입장을 취했다. 어떤 사상에 대한 판단은 판단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며, 그 판단 수는 7가지로 생각된다. 이는 자이나교의 '''상대론'''(아네칸타-바다, anekānta-vāda)적 측면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이 7가지 판단을 바탕으로 세계 성립 원리("칠제" [43])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세계의 경과를 설명한다.
4. 3. 영혼 (지바)과 윤회
마하비라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영혼(또는 자아)이 없다는 아나타(무아) 개념에 기반한 불교와는 다른 점이다.[11] 마하비라는 영혼은 드라비야(실체)이며 영원하지만 동시에 일시적이라고 가르쳤다.마하비라에게 우주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드라비야', '지바', 그리고 '아지바'(무생물)로 구성된다. '지바'는 업(자신의 행위의 결과) 때문에 윤회(환생)에 묶여 있다. 자이나교에서 업은 행위와 의도를 포함하며, 그것은 영혼(''레샤'')을 물들여 영혼이 죽은 후 어떻게,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마하비라에 따르면, 창조신은 없으며 존재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나 자이나교에는 신과 악마가 존재하며, 그들의 '지바'는 생과 사의 동일한 순환의 일부이다. 수행의 목표는 '지바'를 업의 축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환생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인 싯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하비라에게 깨달음은 자기 인식, 자기 수양, 그리고 물질주의로부터의 절제의 결과이다.
마하비라는 또한 베드비즈나안(Bhedvijnān), 즉 영혼(지바, jiva)과 비영혼(아지바, ajiva)을 구별하는 과학에 대한 개념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인 베드비즈나안은 영원하고, 무형이며, 독립적인 순수한 영혼과, 몸, 생각, 감정, 그리고 업장의 영향과 같은 일시적인 외부 존재의 측면 사이의 구별을 깨닫는 실천이다.
마하비라에 따르면, 이러한 이해는 니슈차이 삼약 다르샨(nischay Samyak darshan, 경험적 자아 실현)의 달성에 매우 중요하다. 그는 인간의 고통이 몸과 마음을 포함한 물질적인 대상과 영혼을 잘못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베드비즈나안의 가르침은 개인이 진정으로 자아(영혼)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분리를 인식하도록 안내한다. 순수한 영혼과 삶의 일시적인 요소들을 구별함으로써, 사람은 무집착(바이라기야, vairagya)을 배양하고 해탈(목샤, moksha)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아차리아 쿤드쿤다, 아차리아 하리바드라, 야쇼비자야 그리고 슈리마드 라지찬드라의 저술에서 상세히 설명되었다.[12]
베드비즈나안은 자아 실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영적 각성의 과정에서 디딤돌 역할을 하며, 여기에서 수련자는 먼저 비영혼과의 잘못된 동일시를 목격자(''bhed-nasti'')로서 인식하게 되고, 나중에는 영혼 자체의 존재와 진정한 본질(''asti'')을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인식 상태에서 영혼을 직접 경험하게 하고, 업적 애착을 파괴한다.[13]
자이나교에서, 이 지식은 올바른 믿음(삼약 다르샨, samyak darshan)을 발전시키고 ''삼약 갸안''(전지)을 얻기 위한 토대로 여겨진다.
마하비라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환생과 존재의 영역이다. 아차랑가 수트라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동물, 식물, 곤충, 물, 불, 바람을 포함한 무수한 형태로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승려가 이들 중 어떤 것도 만지거나 방해해서는 안 되며 (식물을 포함), 수영하거나, 불을 켜거나 (끄거나), 공중에서 팔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행동은 물질의 그러한 상태에 살고 있는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하비라는 존재의 본질은 순환적이며, 영혼은 죽음 후에 고통의 천상, 지옥, 또는 지상의 영역인 ''트릴록'' 중 하나로 환생한다고 설교했다. 인간은 자신의 업(행동)에 따라 인간, 동물, 원소, 미생물 또는 기타 형태로 지상이나 천상 (또는 지옥) 영역에서 환생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사람 (신, 악마 및 지상의 존재 포함)은 죽고 이전 생에서의 행동에 따라 환생한다. 케발라 지냐나(전지)에 도달한 ''지나''는 환생하지 않으며, "완성된 자의 영역"인 ''시달로카''에 들어간다.
마하비라의 형이상학은 세계 혹은 우주를 "생명"(영혼, 지바)과 "비생명"(비영혼, 아지바)으로 분류하여 다원적 실재론을 전개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교의에 따르면 우주는 영혼, 운동의 조건, 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의 5가지 실재체로 구성된다. 영혼은 자이나교에서는 6종으로 분류되며, 지(흙)·수(물)·화(불)·풍(공기)·식물·동물을 "육생류"라고 총칭하며, 일반적으로 생물로 간주되는 범위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생명"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큰 특징으로 한다. 우주를 세계와 비세계로 구분하는 분류도 있으며, 그 경우, 비세계에는 허공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마하비라의 입장은 무신론에 속하며,[40] 우주 창조신이나 절대적인 원리를 부정하는 점에서도 불교와 공통점이 있다. 또한,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하강성을 가지는 반면, 영혼은 상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영혼(육생류)은 생겨나거나 멸하는 일이 없이 영겁에 걸쳐 윤회의 생존을 반복하며, 본래 정해진 형태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윤회는 더러운 업이 영혼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인해 일어난다. 업이란 신체, 언어, 의지를 통해 행한 행위이며, 그것에 의해 미세한 물질이 영혼으로 흘러들어 윤회의 생존이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흘러들어간 전생으로부터의 묵은 업을 고행으로 없애고, 새로운 업이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윤회는 끝나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
업, 특히 악업에는 물리적인 무게가 있어, 악업을 많이 포함한 영혼은 속박을 받아 영혼이 본래 가진 상승성이 방해받아 지옥, 축생, 인간, 신들의 4가지 세계의 경계를 헤맨다. 악업이 심한 경우에는 따라서 죽은 뒤 지옥으로 떨어진다. 해탈한 영혼에는 속박이 없고, 상승성은 방해받지 않는다. 선행과 서약을 지키는 생활을 함으로써 이 상승성을 해방하면, 영혼은 세계의 정상에 도달하여 평안의 경지인 극락 세계에 이를 수 있다.
5. 자이나교의 분파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와 그의 고행적인 삶의 방식 때문에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었다. 그는 출가(다섯 번째 서약, '아파리그라하')를 실천하며 옷을 입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 수행자(''사드비'')가 남성 수행자(''사두'')처럼 고행을 통해 영적 해탈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디감바라 종파는 여성이 성별 때문에 완전한 고행을 실천할 수 없으며 영적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리하여 남자로 환생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여성은 수도승의 정절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진다.
마하비라는 남녀 평등을 가르쳤다. 슈웨탐바라 종파는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남녀 모두가 ''목샤''(''카이발랴'', 영적 해탈)를 얻을 수 있도록 고행적인 삶을 추구하라고 권장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5. 1. 디감바라 ( दिगंबर, Digambara, 공의파)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와 그의 고행적인 삶의 방식에서 기인하는 역사적 논쟁이 있었다. 그는 출가(다섯 번째 서약, '아파리그라하')의 표시로 옷을 입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 수행자(''사드비'')가 남성 수행자(''사두'')처럼 고행을 통해 영적 해탈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디감바라 종파(하늘을 옷 삼아 입는, 나체 수행자)는 여성이 성별 때문에 완전한 고행을 실천할 수 없으며 영적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리하여 남자로 환생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여성은 수도승의 정절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진다.
5. 2. 슈웨탐바라 (श्वेतांबर, Śvetāmbara, 백의파)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와 그의 고행적인 삶의 방식 때문에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었다. 그는 출가(다섯 번째 서약, '아파리그라하')를 실천하며 옷을 입지 않았다. 여성 수행자(''사드비'')가 남성 수행자(''사두'')처럼 고행을 통해 영적 해탈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디감바라 종파는 여성이 완전한 고행을 실천할 수 없고 영적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다. 여성은 윤리적인 삶을 통해 남자로 환생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여성은 수도승의 정절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마하비라는 남녀 평등을 가르쳤다. 슈웨탐바라 종파는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남녀 모두가 ''목샤''(''카이발랴'', 영적 해탈)를 얻을 수 있도록 고행적인 삶을 추구하라고 권장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6. 마하비라와 불교의 관계
식민지 시대 인도학자들은 자이나교와 불교 사이에 도상학, 명상, 수행 등에서 표면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면서 마하비라와 붓다의 가르침은 매우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고, 두 종교는 서로 다른 별개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마하비라는 영혼에 대한 믿음, 수행, 아힘사(무폭력)를 강조한 면에서 불교와 차이를 보였다.[38]
6. 1. 유사점
식민지 시대 인도학자들은 자이나교(그리고 마하비라의 추종자들)를 불교의 분파로 여겼는데, 이는 도상학, 명상 및 수행 수련에서 표면적인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1] 학문이 발전하면서 마하비라와 붓다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이 매우 다르게 나타나 종교는 별개로 인정되었다.[2] 모리츠 빈터니츠는 마하비라가 (불교와 달리 영혼에 대한 매우 정교한 믿음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의 수행적 가르침은 불교나 힌두교보다 더 높은 수준이며, 아힘사(무폭력)에 대한 그의 강조는 다른 인도 종교보다 더 크다.[3]6. 2. 차이점
식민지 시대 인도학자들은 도상학, 명상 및 수행 수련에서 표면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이유로 자이나교(그리고 마하비라의 추종자들)를 불교의 분파로 여겼다.[38]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면서 마하비라와 붓다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고, 결국 자이나교와 불교는 별개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38] 모리츠 빈터니츠는 마하비라가 (불교와 달리 영혼에 대한 매우 정교한 믿음을 부정하는) "영혼에 대한 매우 정교한 믿음"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또한 마하비라의 수행적 가르침은 불교나 힌두교보다 더 높은 수준이며, 아힘사(무폭력)에 대한 강조는 다른 인도 종교보다 더 크다.[38]브라만교에서는 사람들을 4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사제 계급)만이 신과 교류할 수 있다고 여겼다. 브라만교는 사제 계급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 종교였다. 붓다와 마하비라 등의 자유 사상가들은 이러한 브라만교에 반기를 들었다. 마하비라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다수의 동물을 죽여 신에게 생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격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브라만이 추상적으로만 제시했던 업(카르마)의 과정을 생생한 형태로 재정의했다.[38]
7. 현대 사회에 주는 의미
식민지 시대 인도학자들은 자이나교와 마하비라의 추종자들을 불교의 분파로 여기기도 했으나, 학문이 발전하면서 마하비라와 붓다의 가르침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별개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20] 마하비라는 "영혼에 대한 매우 정교한 믿음"을 가르쳤고, 그의 수행적 가르침은 불교나 힌두교보다 더 높은 수준이며, 아힘사(무폭력)에 대한 강조는 다른 인도 종교보다 더 크다.[20]
마하비라의 가르침은 큰 영향력을 가졌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마하비라는 인도에서 종교는 현실이며 단순한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구원은 단순히 외적인 의례를 지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정말 사실이다. 종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10]
1974년에는 마하비라의 ''열반'' 25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승려들이 Śvētāmbara, Digambara, 스타나카바시 등 여러 종파를 초월하여 한자리에 모여 공동 깃발(자이나 ''dhvaja'')과 상징물(''pratīka'')에 동의하고 공동체의 단결을 이루기로 결의했다. 또한, 마하비라의 ''samavasaraṇa''(성스러운 집회)를 상징하는 수레바퀴인 네 개의 ''dharma cakras''가 인도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희생 등 종교적 목적으로 동물을 도살하는 것에 대한 법적 제재를 얻어내기도 했다. 이는 자이나교도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21]
8. 유산
마하비라는 자이나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가르침과 생애는 자이나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하비라의 유산은 크게 도상학과 사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도상학마하비라는 일반적으로 사자 상징이 아래에 있는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명상 자세로 묘사된다.[21] 각 티르탕카라는 숭배자들이 유사한 우상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 뚜렷한 문장을 가지고 있는데,[24] 마하비라의 사자 문장은 보통 그의 다리 아래에 새겨져 있으며, 셰탐바라 전통의 슈리바차와 함께 묘사되는 것도 특징이다.[22]
이러한 요가 자세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에서 매우 흔하며, 각 전통은 신도들이 명상하는 조각상을 그들의 신학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상서로운 가슴 표시를 가지고 있다. 마하비라의 초기 도상은 북인도 마투라시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유래했으며,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5] 그의 가슴에 있는 스리바차 표식과 그의 드야나-무드라 자세는 쿠샨 제국 시대의 예술 작품에 나타난다. 마하비라의 묘사에 대한 디감바라와 셰탐바라 전통 간의 차이는 기원후 5세기 후반에 나타난다.[25] 마하비라상은 그의 사후 600년 이상 지나 조각되기 시작했다.
사원리샤바나타, 파르스바나타, 네미나타, 샨티나타와 함께 마하비라는 자이나교도들 사이에서 가장 숭배를 받는 5명의 ''티르탕카라'' 중 한 명이다.[40] 인도의 다양한 자이나교 사원 단지에는 그를 기리는 사원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이나교의 중요한 순례지이다. 존 E. 코트에 따르면, 라자스탄주 오시안, 조드푸르에 있는 마하비라 사원은 서인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이나교 사원이며, 8세기 말에 건설되었다.
마하비라의 주요 사원들은 다음과 같다.
- 파와푸리의 잘 만디르
- 트릴로키나타 사원
- 메구티 자인 사원
- 쿰바리아 마하비라 사원
- 산키가타
8. 1. 축제
마하비라와 관련된 주요 연례 자이나교 축제로는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과 디왈리가 있다.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은 마하비라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이며, 디왈리는 마하비라의 열반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디왈리는 힌두교의 디왈리 축제와 같은 시기에 기념되며, 자이나교 신자들의 새해를 알린다.[17]8. 1. 1.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은 자이나교의 개조(開祖) 마하비라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자이나교도는 마하비라가 기원전 599년에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의 탄생일은 비라 니르바나 삼바트 달력의 차이트라 달의 밝은 절반의 13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는 그레고리력의 3월 또는 4월에 해당하며, 자이나교도들은 이를 마하비르 잠마 칼리야낙으로 기념한다.[11]마하비라는 익슈바쿠 왕조의 시다르타 왕과 리차비족 공화국의 트리샬라 여왕 사이에서 크샤트리아 왕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8] 익슈바쿠 왕조는 첫 번째 티르탕카라인 리샤바나타에 의해 세워졌다.[6]
자이나교 경전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태어난 후 신 인드라가 천상에서 내려와 56명의 ''디그쿠마리에스''와 함께 그에게 기름을 붓고 메루 산에서 그의 ''아비셰카''(성별)를 행했다고 한다.[13] 이러한 사건은 현대 자이나교 사원 의식의 일부를 차지한다.[14]
슈베탐바라 전통에서는 그의 배아가 인드라 군대의 신성한 사령관인 하리-나이게메신에 의해 브라만 여성에게서 시다르타의 아내 트리샬라의 자궁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12] 그러나 디감바라 전통에서는 이 배아 이식 전설을 믿지 않는다.[12]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 동안 마하비라의 생애에서 일어난 다섯 가지 상서로운 사건이 재현된다.[16]
8. 1. 2. 디왈리
마하비라와 관련된 두 가지 주요 연례 자이나교 축제는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과 디왈리이다. 마하비르 잔마 칼리야낙 동안 자이나교 신자들은 마하비라가 현재의 시간 주기인 ''아바사르피니''의 24번째이자 마지막 ''티르탕카라''로 태어난 것을 기념한다.[4] 이 기간 동안 마하비라의 생애에서 일어난 다섯 가지 상서로운 사건이 재현된다.[5] 디왈리는 마하비라의 열반 기념일이며, 힌두교 축제와 같은 시기에 기념된다. 디왈리는 자이나교 신자들의 새해를 알린다.[6]8. 2. 도상학
마하비라는 일반적으로 사자 상징이 아래에 있는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명상 자세로 묘사된다.[21] 각 티르탕카라는 숭배자들이 유사한 우상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 뚜렷한 문장을 가지고 있다.[24] 마하비라의 사자 문장은 보통 그의 다리 아래에 새겨져 있으며, 모든 티르탕카라와 마찬가지로 셰탐바라 전통의 슈리바차와 함께 묘사된다.[22]이 요가 자세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에서 매우 흔하다. 각 전통은 신도들이 명상하는 조각상을 그들의 신학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상서로운 가슴 표시를 가지고 있다. 고대 및 중세 자이나교 미술 작품에서 여러 개의 스리바스타가 발견되며, 불교 또는 힌두교 미술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22] 디감바라 전통에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셰탐바라 전통에서는 눈을 크게 뜬다.
마하비라의 초기 도상은 북인도 마투라시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유래했으며,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5] 그의 가슴에 있는 스리바차 표식과 그의 드야나-무드라 자세는 쿠샨 제국 시대의 예술 작품에 나타난다. 마하비라의 묘사에 대한 디감바라와 셰탐바라 전통 간의 차이는 기원후 5세기 후반에 나타난다.[25] 존 코르트(John Cort)에 따르면, 비문이 있는 자이나교 도상의 가장 초창기 고고학적 증거는 연대 측정 가능한 텍스트보다 250년 이상 앞선다.[26]
마하비라의 많은 이미지는 12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27] 고대 조각은 타밀나두주 테니 구의 순다라자푸람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첸나이의 자이나교 학자인 K. 아지타도스(K. Ajithadoss)는 이를 9세기로 추정했다.[23]
지반타스와미는 마하비라를 왕자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 지나는 카요트사가 자세로 서 있으며, 왕관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28]




마하비라상은 그의 죽음(열반) 후 600년 이상 지나 조각되기 시작했다. 마하비라 또는 모든 티르탕카라(조상)의 상은 자이나교 신자들에게 헌신의 필수품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실제 초상을 찾는 대신, 우선 표준화된 기준 내에서 정신적, 미학적 모범을 추구했다.
조상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돌, 금속 또는 색상으로 변환된 마음의 이미지였다. 초대 아디나타(리샤바)와 23대 조상 파르슈바나타의 이미지는 각기 다른 표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구분은 약간의 지역적 편차와 원거리에서의 소수의 미세한 특징을 제외하면, 다른 티르탕카라상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마하비라상의 경우, 가슴의 사자 문장과 머리의 약간 다른 특징 외에는 다른 티르탕카라의 그것과 대부분 동일하다. 최소 수천 개에 달하는 고대 단독상 중, 다른 티르탕카라의 문장을 포함하는 제단은 거의 완전한 것이 없으며, 따라서 각 티르탕카라 고유의 동일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마하비라의 상은 주로 직립(kayotsarga-mudra) 또는 결가부좌(padmasana) 자세이다. 공의파(digambara) 신자들이 요구하는 상은 의복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장식이 없는 나체상이며, 백의파(svetambara)에서 요구하는 상은 의류, 보석 및 심지어 왕관까지 착용한다. 군주가 앉는 듯한 옥좌에 설치된 것도 보인다.
시각 예술에서의 마하비라상은 그의 인생 에피소드를 거의 반영하지 않는다. 다만, 조각가와 화가 모두 많은 메이드가 시중드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어머니 트리샬라를 묘사하고, 어머니가 출생 시 16가지 길조를 꿈꿨다는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마하비라의 트리 라트나("정신", "정견", "정업"의 3가지 보물)의 상징적 기호 표현도 다양한 조각 패널에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첫 번째 설법(samavasarana)의 그림은 많은 세밀화와 벽화의 소재가 되었다.
8. 3. 사원
리샤바나타, 파르스바나타, 네미나타, 샨티나타와 함께 '''마하비라'''는 자이나교도들 사이에서 가장 숭배를 받는 5명의 ''티르탕카라'' 중 한 명이다.[40] 인도의 다양한 자이나교 사원 단지에는 그를 기리는 사원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이나교의 중요한 순례지이다. 예를 들어, 파와푸리는 비하르주 남부의 언덕 지역으로, 리샤바를 포함한 24명의 ''티르탕카라'' 중 23명이 설교를 한 곳으로 여겨진다. 존 E. 코트에 따르면, 라자스탄주 오시안, 조드푸르에 있는 마하비라 사원은 서인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이나교 사원이며, 8세기 말에 건설되었다.마하비라의 주요 사원들은 다음과 같다.
- 파와푸리의 잘 만디르
- 트릴로키나타 사원
- 메구티 자인 사원
- 쿰바리아 마하비라 사원
- 산키가타
- 무찰 마하비르 사원
- 반다바푸르 자인 티르스
- 디마푸르 자인 사원
- 쿤달푸르 자인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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