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카를로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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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 카를로 극장은 1737년 나폴리에 건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이다.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 7세의 명으로 건설되었으며, 나폴리 악파의 중심지로서 레오, 포르포라, 치마로사 등 유명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1816년 화재로 재건되었고, 로시니, 도니체티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의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쇠퇴기를 겪었지만, 20세기 초 푸치니 등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을 통해 회복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리모델링을 거쳐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었으며, 현재까지도 국제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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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카를로 극장 | |
---|---|
지도 정보 | |
일반 정보 | |
![]() | |
명칭 | 산 카를로 극장 |
위치 정보 | |
국가 | 이탈리아 |
도시 | 나폴리 |
좌표 | 좌표: 40°46′22″N 73°59′3″W |
상세 정보 | |
종류 | 가극장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관련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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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나폴리 왕국의 초대 부르봉 왕조 국왕인 카를로 7세(훗날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는 나폴리에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짓기를 원했다. 이는 1621년에 지어져 낡고 규모가 작았던 테아트로 산 바르톨로메오를 대체하기 위함이었다.[5] 이에 따라 산카를로 극장은 1737년 11월 4일, 국왕의 이름 날에 맞춰 개관했다.[13][1] 개관 기념 공연 작품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바탕으로 도메니코 사로가 작곡한 오페라 《아킬레 인 시로(Achille in Sciroit)》였다.[13][1] 당시 극장은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금 장식, 그리고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청색 실내 장식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로 꼽혔다.[7]
18세기 동안 산카를로 극장은 나폴리 악파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레오, 치마로사, 파이시엘로 등 수많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또한,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 카파렐리와 같은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이 극장에서 명성을 쌓았으며, 글루크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같은 외국 작곡가들도 초청되어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1816년 2월 13일, 극장은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9] 당시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명령 아래 건축가 안토니오 니콜리니의 지휘로 단 10개월 만에 재건되었다. 재건된 극장의 모습은 스탕달로부터 "유럽 어디에도 이 극장에 비할 데가 없고... 눈을 현혹시키고, 영혼을 황홀하게 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19세기는 산카를로 극장의 황금기로, 조아키노 로시니, 가에타노 도니제티, 빈첸초 벨리니, 주세페 베르디와 같은 오페라 거장들이 활동하며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로시니는 10편, 도니체티는 16편의 오페라를 이 극장을 위해 작곡했으며, 베르디 역시 초기 작품들을 이곳에서 공연했다. 1844년에는 내부 장식이 오늘날과 같은 붉은색과 금색으로 변경되었고,[1] 1872년에는 베르디의 제안에 따라 오케스트라 피트가 설치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이탈리아 통일(1861년) 이후 나폴리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이 변화하면서 극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푸치니를 비롯한 베리스모 작곡가들의 활동과 자체 오케스트라 창단 등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복구되었고,[12] 이후에도 꾸준히 중요한 오페라 공연과 초연 무대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노후된 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한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10년 1월에 재개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10]
2. 1. 18세기: 극장 건립과 나폴리 악파
나폴리 왕국의 초대 부르봉 왕조 국왕인 카를로 7세(훗날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는 1621년에 지어진 낡고 작은 테아트로 산 바르톨로메오를 대체할 새롭고 더 큰 극장을 나폴리에 짓기를 원하여 산카를로 극장의 건립을 의뢰했다. 테아트로 산 바르톨로메오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가 1682년 나폴리로 이주한 이후 중요한 오페라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5]산카를로 극장은 1737년 11월 4일, 국왕의 이름 날에 맞춰 개관했다. 개관 공연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바탕으로 도메니코 사로가 작곡한 오페라 《아킬레 인 시로(Achille in Sciroit)》였다.[13][1] 이 오페라에서 주인공 아킬레우스 역은 여성 알토 가수 비토리아 테시(별명 "모레타")가 맡았고, 소프라노 안나 페루치(별명 "파루키에리나")와 테너 안젤로 아모레볼리도 함께 출연했다. 사로는 오케스트라 지휘뿐만 아니라, 막간에 공연된 두 편의 발레도 지휘했는데, 이 발레는 가에타노 그로사테스타가 안무하고 피에트로 리기니가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1] 극장은 뛰어난 건축 양식, 화려한 금 장식, 그리고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호화로운 청색 천 장식으로 유명해졌다.[13] 초기 시즌에는 춤을 선호했던 왕실의 취향이 반영되었으며, 당대 유명 카스트라토들이 무대에 올라 공연했다.[1]


18세기 동안 산카를로 극장은 나폴리 악파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나폴리 악파는 오페라 부파뿐만 아니라 오페라 세리아 분야에서도 유럽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 활동한 주요 작곡가로는 페오, 포르포라, 레오, 트라에타, 피치니, 빈치, 안포시, 두란테, 요멜리, 치마로사, 파이시엘로, 칭가렐리, 가차니가 등이 있다. 나폴리는 유럽 음악의 수도로 여겨졌으며, 하세(나중에 나폴리에 정착), 하이든,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글루크와 같은 외국 작곡가들조차 산카를로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을 경력의 정점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글루크는 1752년 흥행사 투파렐리의 초청으로 나폴리를 방문하여 자신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를 직접 지휘했으며,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1761년부터 1762년 사이에 《우티카의 카토네》와 《알레산드로 넬린디에(Alessandro nell'Indieit)》 두 편의 오페라를 이곳에서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당대 가장 유명한 성악가들도 산카를로 극장에서 공연하며 명성을 굳혔다. "라 코케타(La Cochettait)"라는 애칭으로 불린 루크레치아 안기아리를 비롯하여, 유명 카스트라토인 조반니 만주올리, 카파렐리(본명 가에타노 마조라노), 파리넬리(본명 카를로 브로스키), 기치엘로(본명 조아키노 콘티), 그리고 마지막 세대 카스트라토 중 한 명인 잔 바티스타 벨루티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카파렐리, 파리넬리, 기치엘로는 나폴리 지역 음악원 출신이었다.
2. 2. 19세기: 화재와 재건, 로시니와 도니체티

1816년 2월 13일, 발레 공연 리허설 중 발생한 화재로 극장 건물이 소실되었다.[9] 당시 국왕이었던 페르디난도 1세(나폴리 왕으로는 페르디난도 4세, 극장 창설자 카를로 3세의 아들)는 즉시 재건을 명했다.
극장 지배인 도메니코 바르바이아는 건축가 안토니오 니콜리니의 도움을 받아 단 10개월 만에 극장을 재건했다. 전통적인 말굽 형태의 객석(1,444석)과 너비 33.5m, 높이 30m의 프로시니엄 아치, 깊이 34.5m의 무대를 갖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니콜리니는 '시간과 시(詩)'를 묘사한 부조로 내부를 장식했으며, 중앙 천장에는 안토니오, 주세페, 지오반니 카마라노 형제가 그린 프레스코화 "아폴로가 미네르바에게 세계 최고의 시인을 소개하다"가 그려졌다.

1817년 1월 12일, 재건된 극장은 요한 시몬 마이어의 오페라 ''파르테노페의 꿈'' (Il sogno di Partenopeit) 공연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개관 이튿날 공연을 관람한 스탕달은 "유럽 어느 곳도 이 극장에 비견될 수 없으며, 그 장엄함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할 만한 곳조차 없다. 이곳은 눈을 현혹시키고 영혼을 황홀경에 빠뜨린다..."라고 극찬했다.
1844년에는 니콜리니와 그의 아들 파우스토, 프란체스코 마리아 데이 주디체의 지휘 아래 다시 한번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때 극장 내부는 오늘날과 같이 전통적인 붉은색과 금색으로 바뀌었다.[1]
로시니 시대 (1815-1822)1815년부터 1822년까지 조아키노 로시니는 산 카를로 극장을 포함한 나폴리 왕립 오페라 극장의 전속 작곡가 겸 예술 감독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엘리자베타, 레지나 디잉글테라'' (1815), ''라 가제타'', ''오텔로, 오시아 일 모로 디 베네치아'' (1816), ''아르미다'' (1817), ''모세 인 에지토'', ''리차르도 에 조라이데'' (1818), ''에르미오네'', ''비앙카 에 팔리에로'', ''에두아르도 에 크리스티나'', ''라 돈나 델 라고'' (1819), ''마오메토 II'' (1820), 그리고 ''젤미라'' (1822) 등 1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당시 산 카를로 무대에는 마누엘 가르시아와 그의 딸 마리아 말리브란, 클로린다 코라디, 주디타 파스타, 이사벨라 콜브란,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 도메니코 돈첼리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또한, '가슴에서 나오는 C음(흉성 C)'을 개발한 길베르 루이 뒤프레와 그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 테너 아돌프 누리도 이 무대에 섰다.
1822년 ''젤미라'' 공연 이후, 로시니는 당시 극장 지배인 바르바이아의 연인이었던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과 함께 나폴리를 떠났고, 두 사람은 곧 결혼했다.
도니체티 시대 (1822-1838)로시니의 뒤를 이어 바르바이아는 잠시 조반니 파치니와 계약했지만, 곧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또 다른 떠오르는 별인 가에타노 도니제티를 영입했다. 도니체티는 1822년부터 1838년까지 산 카를로 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16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대표작으로는 소프라노 타키나르디-페르시아니와 테너 뒤프레를 위해 쓴 ''마리아 스투아르다'' (1834),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1835), ''로베르토 데베뢰'' (1837), ''폴리우토'' (1838) 등이 있다. 하지만 ''폴리우토''는 검열 문제로 나폴리에서 상연되지 못하고, 1840년 파리에서 프랑스어 버전 ''순교자'' (Les Martyrs프랑스어)로 초연되었다. 나폴리에서의 초연은 도니체티 사후인 1848년 11월에야 이루어졌다.

시칠리아 출신의 빈첸초 벨리니 역시 그의 첫 오페라 ''비앙카 에 페르난도''를 산 카를로에서 초연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주세페 베르디 또한 산 카를로 극장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1841년 ''오베르토 콩테 디 산 보니파치오''가 공연되었고, 극장을 위해 ''알지라'' (1845)와 ''루이자 밀러'' (1849)를 작곡했다. 세 번째 작품으로 ''구스타보 III''를 구상했으나, 스웨덴 국왕 암살이라는 소재가 당시 나폴리 왕국의 검열에 의해 원제와 내용 그대로 상연되지 못했다. 결국 배경을 미국 보스턴으로 바꾸고 제목을 ''가면 무도회''로 변경하여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원작 버전은 2004년에야 복원되어 공연되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하피스트이자 작곡가인 니콜라-샤를 보크사가 1844년부터 1845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그의 연인이자 영국의 프리마 돈나였던 안나 비숍은 이 극장에서 24편의 오페라에 327회 출연하는 기록을 남겼다.[11]
1816년 화재 이후 재건된 극장의 기본적인 구조는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주요 변경 사항으로는 베르디의 제안에 따른 오케스트라 피트 설치(1872년), 전기 조명 도입 및 중앙 샹들리에 철거(1890년), 입구 로비 및 분장실 건물 신축 등이 있었다.
2. 3. 19세기 말 ~ 20세기: 쇠퇴와 부흥
1861년 이탈리아 통일로 인해 나폴리는 이탈리아 음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라는 명성은 라 스칼라 극장으로 넘어갔다. 권력과 부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극장의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1874년에는 공연 수입 감소로 인해 극장이 1년 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자코모 푸치니를 비롯해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인 피에트로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조르다노, 실레아 등이 꾸준히 산카를로 극장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공연하며 극장의 회복을 도왔다.
19세기 말에는 주세페 마르투치를 중심으로 극장 자체 오케스트라가 창단되었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피에트로 마스카니,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저명한 지휘자들이 초빙되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극장의 레퍼토리가 더욱 확장되었다.
한편, 나폴리 출신의 유명 테너 엔리코 카루소는 1901년 ''사랑의 묘약'' 공연 중 일부 관객에게 야유를 받은 후, 다시는 나폴리에서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화가 있다.[12]
2. 4. 20세기 이후: 현대화와 국제적 명성
1872년 베르디가 제안한 오케스트라 피트 설치, 1890년의 전기 설치, 이후 중앙 샹들리에 제거, 새로운 로비와 분장실을 위한 별관 건설 외에는 1943년 폭격 피해 복구 전까지 극장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20세기에 들어서 산 카를로 극장은 혁신적인 지배인 아우구스토 라구나를 맞이했다. 그는 1920년부터 10시즌 동안 모든 시즌 개막작으로 바그너의 작품을 선정하는,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이례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또한 리카르도 잔도나이 작곡, 가브리엘레 다눈치오 각본의 오페라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Francesca da Riminiita) 등 신작 오페라 초연에도 적극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오페라 하우스는 폭탄으로 피해를 입었다. 1943년 10월 나폴리가 해방된 후, 왕립 포병대의 피터 프랜시스가 피해를 입은 로비를 복구했으며, 3주 후 뮤지컬 레뷰 공연으로 건물을 다시 열었다.[12] 공연이 가능해지자 더 많은 음악가와 가수들이 참여했고, 1943년 12월 26일 푸치니의 ''라 보엠'' 낮 공연으로 첫 오페라 공연이 열렸다. 프랜시스는 이후 2년간 머물며 30개의 오페라를 제작했다. 1946년 7월 9일에는 미국 바리톤 로렌스 티벳이 지중해 작전 극장의 고위 군 인사와 연합군 병사들을 포함한 관객 앞에서 리골레토의 타이틀 역할을 불렀다.
다행히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덕분에, 산 카를로 극장은 종전 후 가장 먼저 영국으로 순회 공연(1946년)을 떠나는 등 오페라 극장으로서의 기능을 빠르게 회복했다. 혁신적인 전통은 전후에도 이어져,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가 카를 뵘의 지휘로 이탈리아에서 초연(1949년)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일본 순회 공연도 이루어졌다.
21세기 초, 오페라 하우스는 낡은 무대 기계, 부족한 관객 시설, 냉방 장치 부재 등으로 노후화 문제를 겪었다. 이에 캄파니아 지방 정부는 6700만유로를 투자하여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는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6개월씩 이루어졌으며, 장식 복원과 새로운 리허설 홀 건설이 포함되었다. ''그라모폰'' 잡지에 따르면, 오페라 하우스는 2010년 1월 27일, 모차르트의 탄생 254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오페라 ''라 클레멘차 디 티토'' 공연으로 재개장했다. 건축가 엘리사베타 파브리가 지휘한 이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1816년 화재 이후 안토니오 니콜리니가 재건축했을 당시의 모습으로 극장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300명의 작업자가 밤낮으로 투입되었다.[10]
3. 건축과 디자인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는 군사 건축가이자 왕국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조반니 안토니오 메드라노가 설계했고, 안젤로 카라살레는 정교한 가구 디자인을 주로 담당했다. 이곳의 말굽 모양 강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 비용은 75,000 두카트가 들었다. 홀은 길이 28.6m, 폭 22.5m 크기였으며, 6개의 층에 걸쳐 앞쪽 무대 박스를 포함한 184개의 박스가 배치되었다. 1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왕실 박스도 있었으며, 총 좌석 수는 1,379석이었다. 입석까지 포함하면 극장은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산 카를로는 건축, 금 장식,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공식 색상인 파란색과 금색을 사용한 화려한 실내 장식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오페라 하우스였다.[7] 보베르는 커튼이 없는 184개의 박스가 있는 이 극장의 디자인이 "어느 누구도 왕의 감시를 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은 왕궁에서 개인 통로를 통해 극장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당시 양시칠리아 왕국 부르봉 왕가의 권력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7]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루이 슈포어는 1817년 2월 15일, 이 극장의 크기와 음향 특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발레와 팬터마임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보병과 기병의 군사적 움직임, 전투, 바다의 폭풍우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고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오페라 자체에 대해서는 극장이 너무 크다. 가수들, 이사벨라 콜브란 여사(로시니의 미래 아내)와 노자리, 베네데티 씨 등은 매우 강력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가장 높고 쩌렁쩌렁한 음조만이 들릴 수 있었다. 어떤 종류의 부드러운 표현도 들리지 않았다.[6]
1816년 2월 13일, 발레 공연 리허설 중 발생한 화재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다.[9] 카를로 7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4세 국왕의 지시로, 도메니코 바르바이아는 건축가 안토니오 니콜리니의 도움을 받아 단 10개월 만에 오페라 하우스를 재건했다. 재건된 극장은 전통적인 말굽 모양의 객석을 유지했으며 1,444석을 갖추었다. 프로시니엄 무대는 폭 33.5m, 높이 30m, 깊이 34.5m로 만들어졌다. 니콜리니는 "시간과 시"를 묘사한 부조로 내부를 장식했으며, 중앙 천장에는 주세페 카마라노와 그의 형제들(안토니오, 조반니)이 그린 프레스코화 "아폴로가 미네르바에게 세계 최고의 시인을 소개함"이 그려졌다.
1817년 1월 12일, 재건된 극장은 요한 시몬 마이어의 오페라 ''파르테노페의 꿈'' 공연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개관 이틀째 밤에 참석했던 스탕달은 극장에 대해 "이 극장에 비할 데가 있는 곳은 유럽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해주는 곳도 없다... 그것은 눈을 현혹시키고, 영혼을 황홀하게 한다..."라고 극찬했다.
1844년에는 니콜리니와 그의 아들 파우스토, 그리고 프란체스코 마리아 데이 주디체의 지휘 아래 다시 한번 재단장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 극장 내부는 현재와 같이 전통적인 붉은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바뀌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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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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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etto di ristrutturazione del Teatro San Carlo e rifacimento impianti di sicurezza antincendio e rilevazione f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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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Naples opera house reopens after spectacular renovation
http://www.gramophon[...]
The Gramophone
201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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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Nicolas Bochsa: Harpiste, compositeur, escroc
http://bochsa.site.v[...]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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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bler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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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ille in Sciro
http://corago.unibo.[...]
Cor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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