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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초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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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빈첸초 벨리니는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요한 작곡가로, 벨칸토 오페라 시대를 대표한다. 1801년 시칠리아 카타니아에서 태어나, 1820년대에 나폴리 왕립음악원에서 수학하며 작곡 능력을 키웠다. 1825년 《아델손과 살비니》를 시작으로, 《해적》, 《몽유병 여인》, 《노르마》, 《청교도》 등 1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특히 아름다운 선율로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펠리체 로마니와 협력하여 대부분의 오페라 대본을 제작했으나, 《텐다의 베아트리체》 작업 중 불화를 겪기도 했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널리 연주되며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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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초 벨리니
기본 정보
빈첸초 벨리니
본명빈첸초 살바토레 카르멜로 프란체스코 벨리니
출생1801년 11월 3일
출생지[[파일:Bandiera del Regno di Sicilia 4.svg|border|25x20px|시칠리아 왕국의 기]] 시칠리아 왕국 카타니아
사망1835년 9월 23일 (33세)
사망지파리
국적이탈리아
직업작곡가
장르오페라
사사나폴리 음악원
영향벨 칸토

2. 일대기

1830년경의 벨리니
(작가 미상)


빈첸초 벨리니는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가에타노 도니체티와 함께 당대 거장으로 꼽힌다. 시칠리아카타니아에서 음악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고,[2] 나폴리 왕립음악원에서 칭가렐리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 나폴리 유학 시절 작곡한 초기 작품들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1826년 산 카를로 극장에서 《비앙카와 페르난도》(초연 시 《비앙카와 제르난도》)를 발표하며 전문 작곡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117]

1827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와 처음 협력한 《해적》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로마니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몽유병 여인》(1831),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노르마》(1831) 등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833년 이후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1835년 마지막 오페라인 《청교도》를 파리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퓌토에서 급성 장 질환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100][101]

벨리니 특유의 서정적이고 우아하며 애수 어린 선율은 당대는 물론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레데리크 쇼팽은 임종 시 그의 아리아를 듣기를 원했고, 리하르트 바그너, 테오필 고티에 등도 벨리니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로 칭송하기도 했다. 그의 아름다운 선율은 오페라 아리아뿐만 아니라 오보에 협주곡 등 다른 작품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1801-1819)

벨리니의 생가, Palazzo Gravina-Cruyllas, 카타니아, 1800년경


빈첸초 살바토레 카르멜로 프란체스코 벨리니는 1801년 11월 3일, 당시 시칠리아 왕국에 속했던 카타니아에서 7명의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그는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 빈첸초 토비아 벨리니는 나폴리 음악원에서 공부한 뒤 1767년부터 카타니아에서 오르가니스트 겸 교사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로사리오 벨리니 역시 교회 음악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다.[2]

벨리니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인 신동으로 알려졌다. 카타니아의 Museo Civico Belliniano에 소장된 작자 미상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생후 18개월에 발렌티노 피오라반티의 아리아를 불렀고, 2세에 음악 이론을, 3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5세에는 능숙하게 연주했다고 한다.[8][9] 또한 이 기록은 벨리니가 6세에 첫 다섯 곡을 작곡했고, 7세에는 라틴어, 현대 언어, 수사학, 철학을 배웠다고 주장한다.[2] 그러나 벨리니의 전기 작가 허버트 와인스톡은 이러한 일화 중 일부는 신빙성 있는 다른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아 신화에 가깝다고 보았으며, 벨리니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7] 또 다른 전기 작가 스텔리오스 갈라토풀로스[10]는 이 요약본에 제시된 정보를 논하며 초기 작곡에 대한 몇 가지 증거는 받아들이지만, 어린 벨리니의 신동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표명한다. 그는 벨리니가 결코 "능숙한" 피아노 연주자가 되지 못했고, 나중에 입학 연령을 훨씬 넘겨 나폴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 실력을 평가받는 시험을 치렀을 때 초급반에 배치되었다고 언급한다.

1816년 이후 벨리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정식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곧 작곡에 몰두했다. 이 시기 작품으로는 메타스타시오의 텍스트에 기반한 곡을 포함하는 아홉 개의 ''Versetti da cantarsi il Venerdi Santo'' 등이 있다. 1818년까지 그는 몇 개의 관현악곡과 D장조 및 G장조 미사곡 두 곡을 완성했다.

벨리니의 재능은 카타니아 지역의 새로운 intendente(행정관)가 된 산 마르티노 에 몬탈보 공작 스테파노 노타바르톨로 부부의 눈에 띄었다. 벨리니의 가족은 나폴리 유학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으나, 노타바르톨로 부부는 벨리니가 시 위원회에 학비 지원을 청원하도록 격려했다. 이 청원은 1819년 5월 만장일치로 승인되어, 벨리니는 나폴리의 레알 콜레지오 디 무지카 디 산 세바스티아노에서 4년간 공부할 수 있는 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는 1819년 7월 카타니아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으며, 이때 콜레지오의 ''intendente''이자 왕립 극장 관리자였던 조반니 카라파 등 유력 인사들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 18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립 음악원에 입학한 벨리니는 칭가렐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2. 2. 나폴리 유학 시절 (1819-1827)

1819년 카타니아 귀족의 후원으로 나폴리 왕립 산 세바스티아노 음악원(Real Collegio di Musica di San Sebastiano)에 입학했다. 당시 음악원은 제수 누오보 교회 근처에 위치했으며, 학생들은 오전 5시 15분 새벽 미사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교육 과정은 나폴리 악파의 거장들과 하이든, 모차르트의 작품에 중점을 두었으며, 페르골레지, 파이지엘로 등 고전 작곡가들을 주로 다루었다.

벨리니는 조반니 푸르노에게 화성과 반주를[11], 자코모 트리토에게 대위법을 배웠으나, 트리토에 대해서는 "구식이고 독선적"이라고 생각했다.[11]

작곡가 니콜로 안토니오 칭가렐리


음악원 예술 감독이자 오페라 작곡가였던 니콜로 안토니오 칭가렐리는[2] 벨리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아들처럼 대하며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만약 당신의 작품이 '노래'를 부른다면, 당신의 음악은 틀림없이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이 멜로디를 내도록 훈련하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것을 표현한다면, 당신의 성공은 보장될 것입니다. 당신은 작곡가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어느 마을에서 좋은 오르간 연주자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12]

만년의 프란체스코 플로리모의 초상화


음악원에서 벨리니는 평생 친구가 된 프란체스코 플로리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카르보나리에 함께 가입하기도 했으며,[107] 벨리니가 나폴리를 떠난 후에도 꾸준히 서신을 교환했다. 벨리니는 플로리모를 "마지막 숨결까지 친구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107] "나의 존재에 필수적인" 존재라고 표현했으며,[107]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드문지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107] 플로리모는 벨리니 사후 그의 문학적 유언 집행인이 되었으나,[5] 후대에 그가 벨리니의 서신 일부를 변경하거나 조작하여 작곡가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109][107]

또한 당시 졸업생이었던 사베리오 메르카단테나 프란체스코 스타빌레, 리치 형제(루이지, 페데리코) 등 훗날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동료들과 교류했다.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오페라 《라 칭가라》가 산 카를로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자, 벨리니는 스승 카를로 콘티의 주선으로 그를 만나기도 했다. 플로리모는 당시 벨리니가 도니체티의 모습에 감탄했다고 기록했다.[13]

벨리니는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1820년 1월 이론 시험에 합격하여 연간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14] 고향 카타니아를 위해 독창자,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A단조의 《Messa di Gloria》를 작곡하여 보냈다. 이 곡은 이듬해 10월 현지에서 연주되었다. 나폴리 유학 시절 작곡한 다른 작품으로는 2편의 미사곡(E단조, G단조, 1823년경), 2편의 《살베 레지나》(A장조, F단조, 1820년경 추정), 그리고 E♭장조의 오보에 협주곡(1823년경) 등이 있다.[15] 1824년 1월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프리모 마에스트리노'' 자격을 얻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산 카를로 극장 출입 허가도 받았다.[14] 극장에서 로시니의 《세미라미데》를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아 동료들에게 "《세미라미데》 이후에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벨리니는 음악 교사로 만난 젊은 여성 마달레나 푸마롤리스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의 부모에게 관계를 반대당했다. 벨리니는 부모의 결혼 허락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것이 그의 첫 오페라 작곡의 동기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아델손과 살비니'': 악보의 자필 서명


1824년 말, ''프리모 마에스트리노''로서 음악원 내 소극장에서 상연할 오페라를 작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4] 이에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의 대본으로 《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를 작곡하여 1825년 초에 초연했다.[16] 동료 학생들이 모두 출연한 이 오페라는 큰 인기를 얻어 1년간 매주 일요일마다 공연되었다. 이 성공 이후 벨리니는 잠시 카타니아의 가족을 방문한 것으로 보이며(방문 시기는 1824년 또는 1825년으로 기록이 엇갈린다), 1825년 여름/가을까지 나폴리로 돌아와 산 카를로 극장의 의뢰를 받아 첫 프로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26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의뢰로 《비앙카와 페르난도》(Bianca e Fernando)를 작곡했다.[117] 이는 벨리니가 직업 작곡가로서 내딛는 첫걸음이 되었다.

2. 3. 초기 오페라 작곡과 성공 (1825-1829)

나폴리 왕립음악원(Real Collegio di Musica) 재학 중이던 1825년, 벨리니는 첫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세미 세리아''(반 가극)로, 음악원 부속 소극장에서 1월 중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초연되었다.[14][16] 출연진은 모두 동료 학생들이었으며,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어 1년 동안 매주 일요일마다 공연될 정도였다. 이 작품의 완성도 높은 형식 덕분에 로시니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 성공을 눈여겨본 나폴리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 도메니코 바르바야는 즉시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한 신작을 의뢰했다.[19] 벨리니는 젊은 작가 도메니코 질라르도니가 쓴 대본으로 두 번째 오페라 《비앙카와 페르난도》(Bianca e Fernando)를 작곡했다.[117] 그러나 '페르난도'가 왕위 계승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왕실 무대에서는 사용할 수 없어 제목을 《비앙카와 제르난도》(Bianca e Gernando)로 변경해야 했다. 몇 차례 지연 끝에 오페라는 1826년 5월 30일, 페르디난도 왕자의 생일에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양시칠리아의 프란체스코 1세. 벨리니의 ''비앙카와 제르난도'' 초연을 관람하고 호평했다.


초연은 프란체스코 1세 국왕의 승인을 받는 등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왕족이 참석한 공연에서는 박수를 치지 않는 관례를 깨뜨릴 정도였다.[20] 당시 공연을 관람한 도니체티는 시몬 마이어에게 "아름답고, 아름답고, 특히 그의 첫 오페라라서 아름답습니다"라고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다.[21] 벨리니의 음악은 높이 평가받았으나, 질라르도니의 대본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가 있었다.[20] 이 작품에서 명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와 소프라노 앙리에트 메릭-랄랑드와의 만남은 이후 벨리니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앙카와 제르난도》의 성공에 힘입어 바르바야는 1827년 가을, 밀라노의 명문 라 스칼라 극장을 위한 신작을 벨리니에게 의뢰했다.[22] 벨리니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와 처음으로 협력하여 세 번째 오페라 《해적》(Il pirata)을 작곡했다. 로마니와의 협업은 1827년 5월에 시작되어 8월까지 작곡이 진행되었다. 벨리니는 루비니와 메릭-랄랑드, 그리고 당대 최고의 베이스 바리톤 안토니오 탐부리니라는 강력한 출연진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리허설 중 벨리니는 루비니가 아름답게 노래하지만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느껴, "자신이 표현하려는 인물에 온 영혼을 던져라", "제스처로 노래를 수반하며 목소리로 연기하라"고 조언했다. 벨리니의 조언은 효과가 있었고, 《밀라노 특권 가제타》는 초연 후 "루비니를 가수이자 배우로서의 이중적 면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고 평했다.[27]

《해적》은 1827년 10월 27일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어 "즉각적이고, 그 이후로 더욱 증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시즌이 끝나는 12월 2일까지 15번의 만원 관중 앞에서 공연되었다".[26] 이 작품은 벨리니에게 큰 성공을 안겨준 첫 오페라이자 루비니에게는 "테너를 위한 결정적인 공연"이 되었다.[23] 이 성공으로 벨리니는 로시니의 후계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며, 귀족 살롱에도 초대받는 등 명성을 얻었다. 또한 과 나폴리 등에서도 성공적으로 공연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28년 1월, 벨리니는 제노바로부터 카를로 펠리체 극장의 4월 공연을 위한 신작 의뢰를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비앙카와 제르난도》의 개정판 상연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사보이아 가문에 '페르난도'라는 이름의 왕족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제목인 《비앙카와 페르난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로마니가 대본을 상당 부분 수정했으며,[28] 벨리니는 비앙카 역의 아델라이데 토시와 페르난도 역의 조반니 다비드의 목소리에 맞춰 음악을 재편곡했다. 1828년 4월 7일 제노바 초연은 나폴리 초연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어 총 21회 공연되었다.[29] 하지만 비평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밀라노의 에코》는 "2막은 지루하다"고 평한 반면, 《제노바 가제타》는 "음악의 스타일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된다"고 썼다.[30]

제노바 공연 후 밀라노로 돌아온 벨리니는 1829년 카니발 시즌을 위해 라 스칼라 극장과 새로운 오페라 계약을 체결했다. 수수료는 1,000 두카티로, 그의 첫 오페라 계약금 150 두카티에 비해 크게 오른 금액이었다.[31] 벨리니는 다시 로마니와 손잡고 샤를-빅토르 프레보의 소설 ''L'étrangère''를 바탕으로 《이국의 여인》(La straniera)을 작곡했다. 작곡 과정은 로마니의 병과 테너 가수 선정 문제 등으로 순탄치 않았으나, 결국 앙리에트 메릭-랄랑드, 루이지 라블라슈, 그리고 젊은 테너 도메니코 레이나가 출연하게 되었다.[32] 특히 마지막 아리아 작곡 당시, 벨리니는 로마니에게 여러 차례 수정을 요구하며 "기도, 저주, 경고, 델리리움(delirium)을 동시에 표현하는 생각"을 원한다고 말했고, 네 번째 시도 끝에 만족스러운 가사를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4]

《이국의 여인》은 1829년 2월 14일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어 《해적》을 능가하는 즉각적이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25] ''가제타 프리빌레지아타 디 밀라노''는 "큰 성공… 시인이 작곡가에게 봉사했고, 작곡가는 가수를 더 잘 섬길 수 없었다. 모두가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경쟁했고, 크게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로 성공했다"고 선언했다.[33] 벨리니는 그의 아름다운 멜로디로 "현대 오르페우스"라는 찬사를 받았다.[33] 하지만 그의 새로운 스타일과 대담한 화성 진행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난해하고, 단절되었으며,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5]

같은 해, 벨리니는 파르마의 새로운 테아트로 두칼레(현 테아트로 레지오) 개관 기념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31] 벨리니와 로마니는 볼테르의 비극 ''자이르''(Zaïre)를 바탕으로 《차이라》(Zaira)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벨리니 경력 최초의 심각한 실패로 기록되었다.[36] 실패 요인으로는 벨리니가 이 작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103] 전통적으로 로시니 음악을 선호했던 파르마 관객들의 성향,[36] 작곡 기간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짧았다는 점,[37][38] 그리고 로마니가 대본 각색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자신의 작품을 비판하는 서문을 인쇄된 대본에 포함시킨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37]

1829년 당시 파르마의 누오보 두칼레 극장(현 테아트로 레지오)


누오보 두칼레 극장 개관 기념 《차이라》 공연 포스터


1829년 5월 16일 초연된 《차이라》는 전반적으로 음악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작곡가는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비록 일부 곡과 삼중창, 그리고 가수들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지만, 오페라 자체는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이 작품은 8번의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 오랫동안 잊혔다. 벨리니는 이후 《차이라》의 음악 일부를 다음 작품인 《카풀렛가와 몬테규가》에 재사용했다.

2. 4. 전성기 (1830-1835)

1829년 말, 벨리니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으로부터 새로운 오페라 계약 제안을 받았다. 이는 또 다른 작곡가 조반니 파치니가 베네치아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벨리니에게 기회가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1830년 1월, 파치니의 불참이 확실해지자 벨리니는 계약을 수락하고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 《줄리에타 카펠리오》를 바탕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로마니는 이전에 니콜라 바카이의 오페라를 위해 썼던 대본을 상당 부분 재활용했다. 벨리니는 빠듯한 일정과 악화된 건강 상태 속에서 작곡에 매달렸으며, 이전 작품인 《자이라》의 음악 일부를 가져와 사용하기도 했다.[42] 주디타 그리시가 로미오 역(원래 남성 역할이지만 여성 소프라노가 맡음)을, 로잘비나 카라도리-앨런이 줄리에타 역을 맡았다.

마리아 말리브란이 1832년 볼로냐에서 로미오 역을 맡은 모습


1830년 3월 11일, 새로운 제목 《카풀렛가와 몬테규가》(I Capuleti e i Montecchi)로 초연된 오페라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43] 짧은 기간 동안 8회 공연되었으며, 지역 신문은 밀라노에서의 《이국의 여인》(La straniera)만큼이나 베네치아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보도했다.[44] 이 성공으로 벨리니는 국제적인 명성을 확인하며 "내 스타일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극장에서 들리고 있으며... 열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평가했다.[45]

베네치아를 떠나기 전, 벨리니는 다음 시즌을 위한 라 페니체 극장의 오페라 계약을 제안받았고, 밀라노로 돌아와서는 제노바 극장의 제안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해 말, 그는 라 스칼라 극장 공연을 위해 《카풀렛가와 몬테규가》의 줄리에타 파트를 메조소프라노 아말리아 슐츠 올도지에 맞게 수정했다.

1830년 봄, 라 스칼라 극장의 운영권 변동 과정에서 벨리니는 카르카노 극장에서 공연할 두 편의 오페라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라 스칼라를 위한 《노르마》와 라 페니체를 위한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가 될 예정이었다. 이후 벨리니는 베네치아에서의 과로와 악천후로 인해 위장병을 앓았고, 프란체스코 폴리니 부부의 간호를 받으며 회복했다.[47]

장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벨리니의 초상화


여름 동안 코모 호수 근처에서 요양하며 다음 오페라 구상에 들어갔다. 주연은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 주디타 파스타로 내정되어 있었다. 1830년 7월, 벨리니, 로마니, 파스타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를 각색하기로 결정했으나, 정치적 주제로 인한 검열 문제와 파스타가 남성 주인공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진척되지 못했다. 로마니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 대본 작업으로 바빴고, 벨리니는 《에르나니》 작업에 착수하지 못했다.

결국 1831년 1월, 벨리니는 《에르나니》 작곡을 포기하고 로마니가 새로 쓴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의 대본을 받았다.[48] 이 대본은 외젠 스크리브와 장피에르 오메의 발레 판토마임 《몽유병자, 또는 새로운 영주의 도착》을 기반으로 한 전원적인 이야기였다. 벨리니는 《에르나니》를 위해 구상했던 음악 일부를 이 작품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연을 위한 알레산드로 산퀴리코의 2막 2장 몽유병 장면 무대 디자인


1831년 3월 6일 카르카노 극장에서 초연된 《몽유병 여인》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미나 역의 주디타 파스타와 엘비노 역의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는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러시아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는 "2막에서 가수들 스스로가 울었고 관객들도 함께 울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감동적인 무대였다.[49] 아미나 역은 매우 높은 음역과 화려한 기교를 요구하는 어려운 역할로 유명하며, 파스타는 소프라노 스포가토로서 이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후 《몽유병 여인》은 런던(1831)과 뉴욕(1835)에서도 공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벨리니 생전에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 역시 아미나 역으로 명성을 떨쳤다.

《몽유병 여인》의 성공 이후, 벨리니와 로마니는 1831년 12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주디타 파스타의 데뷔를 위해 계약된 오페라 《노르마》 작업에 착수했다. 주제는 알렉상드르 수메의 희곡 《노르마, 혹은 유아 살해》를 바탕으로 했다. 아달지자 역에는 파스타의 여동생 줄리아 그리시가, 폴리오네 역에는 유명 테너 도메니코 돈젤리가 캐스팅되었다. 벨리니는 파스타의 광범위한 성악 및 연기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으며, 9월부터 본격적인 작곡에 들어갔다.[50]

''노르마'' 초연 캐스트: 돈젤리, 그리시, 파스타


작곡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이탈리아로 확산될 우려가 커졌고,[51] 산 카를로 극장의 작곡 제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 가수 캐스팅과 낮은 보수 문제로 거절했다.[51][52] 또한 카사 리코르디 출판사가 《몽유병 여인》 악보를 무단으로 편곡하여 판매하는 저작권 침해 문제도 발생했다.[53] 12월 리허설 중에는 파스타가 1막의 유명한 아리아 ''카스타 디바''(Casta Diva)를 부르기 어려워했지만, 벨리니의 설득 끝에 결국 완벽하게 소화해냈다.[53][54]

1831년 12월 26일 초연된 《노르마》는 예상과 달리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벨리니는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아스코! 피아스코! 엄숙한 피아스코!"라고 쓰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55] 그는 가수들의 피로, 일부 곡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경쟁 작곡가 조반니 파치니의 정부였던 사모일로프 백작 부인과 언론의 비협조적인 태도 등을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56] 그러나 공연이 거듭되면서 《노르마》는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첫 시즌에 총 39회 공연되며 결국 벨리니의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32년, 벨리니는 나폴리와 고향 시칠리아를 방문하며 오페라 작곡을 잠시 쉬었다. 나폴리에서는 옛 스승 니콜로 안토니오 징가렐리를 만나고 《카풀렛가와 몬테규가》 공연을 관람하며 환대를 받았다.[57]

메시나의 테아트로 델라 무니지오네 (1908년 이전)


메시나와 카타니아에서도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카타니아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테아트로 마시모 벨리니가 훗날(1890년) 개관하게 된다.[59] 팔레르모 여행 후 나폴리로 돌아온 벨리니는 라 페니체 극장과 다음 오페라 계약을 확정했다.[60][61]

테아트로 델라 페르골라 로비 (1850년대 재단장 후)


피렌체를 거쳐 밀라노로 돌아온 벨리니는 베네치아에서 공연할 새 오페라의 주제를 모색하는 한편, 베르가모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노르마》를 지휘하며 주디타 파스타의 연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64] 9월, 그는 로마니와 만나 다음 해 2월 라 페니체에서 파스타 주연으로 공연할 오페라의 주제를 논의하고 계약을 공식화했다.

주디타 파스타는 베아트리체 역을 맡았다


새 오페라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의 주제 선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을 고려했으나, 벨리니는 파스타가 관심을 보였던 카를로 테달디-포레스의 동명 연극을 바탕으로 한 《텐다의 베아트리체》를 최종 주제로 결정하고 로마니를 설득했다.[65] 그러나 로마니는 여러 작곡가에게 동시에 대본을 약속하는 등 과도한 작업량으로 인해 《베아트리체》 대본 작업을 계속 미뤘다. 벨리니는 로마니의 지연에 분노하여 베네치아 주지사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등 법적 조치까지 취했고, 결국 로마니는 1833년 1월 1일에야 베네치아에 도착하여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니는 동시에 도니체티의 《파리시나》 대본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


촉박한 일정 속에서 벨리니는 오페라의 일부를 삭제하면서까지 리허설을 강행해야 했다. 1833년 3월 16일 초연된 《텐다의 베아트리체》는 관객들로부터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특히 로마니가 대본 서문에 자신의 작업 지연에 대한 변명과 함께 "독자들의 완전한 관용"을 구하는 글을 실은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8] 그러나 이후 공연에서는 많은 관객이 몰리며 벨리니는 자신의 오페라가 "그 자매들(이전 작품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고 평가했다.[69]

초연 이후, 《베아트리체》 제작 지연과 작품성에 대한 논쟁이 언론을 통해 격렬하게 벌어졌다. 벨리니 측과 로마니 측은 서로를 비난하는 편지를 신문에 게재하며 공방을 벌였고, 이는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70][71][72] 이 사건으로 벨리니와 로마니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으나, 1834년 벨리니는 공동의 친구를 통해 로마니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보였지만,[73][74][75][76] 벨리니가 1년 뒤 사망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835년, 벨리니는 파리의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 《청교도》(I puritani)를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그의 짧지만 빛나는 경력의 정점을 장식했다.

2. 5. 파리 시절과 죽음 (1833-1835)

1833년 《텐다의 베아트리체》를 상연한 후, 벨리니는 파리로 이주했다.[80] 1833년 8월 중순 파리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약 3주 정도만 머물 생각이었으나, 파리 오페라와의 계약은 성사되지 않은 대신 테아트르-이탈리엔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수락했다.[79][80] 극장은 줄리아 그리시, 카롤리네 웅거, 루비니 등이 출연하는 《해적》(10월)과 《카플렛가와 몬테규가》(11월)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벨리니는 파리에 정착하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81]

벨리니는 파리의 사교계 살롱 문화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특히 밀라노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탈리아 망명자 벨조이오소 공주의 살롱은 빈첸초 조베르티, 니콜로 토마세오, 카밀로 카부르와 같은 이탈리아 혁명가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벨리니는 이곳에서 카를로 페폴리 백작과 같은 인물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51] 그는 또한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의 문호들과 미켈레 카라파, 루이지 케루비니와 같은 음악가들과도 만났다.

1834년 1월, 벨리니는 테아트르-이탈리엔과 그해 말에 공연될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계약했다.[82] 같은 시기 가에타노 도니체티 역시 파리에서 활동할 것이라는 소식에 벨리니는 상당한 경쟁심과 불안감을 느꼈으며, 한때 이를 조아키노 로시니가 꾸민 일이라고 의심하기도 했다.[83] 그러나 벨리니는 로시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조언을 구하고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으며, 결국 로시니의 강력한 지지와 우정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84] 로시니는 벨리니를 "아들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였다.[85]

새 오페라의 대본을 위해 벨리니는 이탈리아 망명자이자 시인이었던 카를로 페폴리 백작과 협력했다.[73] 그들은 자크-프랑수아 앙셀로와 조제프 자비에 생틴의 희곡 《Têtes Rondes et Cavalieres》를 바탕으로, 영국 청교도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 《청교도》(I puritani)를 만들기로 결정했다.[87][88] 벨리니는 작곡에 더 집중하기 위해 친구 새뮤얼 레비스의 초대로 파리 근교 퓌토로 이사했다.[89] 그는 페폴리에게 오페라의 극적인 힘을 강조하며 "Il dramma per musica deve far piangere, inorridire, morire cantandoita" (오페라는 눈물을 자아내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며, 노래를 통해 죽게 만들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90] 작곡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벨리니는 이 시기에 그가 "위장 열"이라고 부른 재발성 질환으로 고생하기도 했다.[86]

1835년 1월 20일의 의상 리허설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월 24일 테아트르-이탈리엔에서 초연된 《청교도》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벨리니는 친구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인들은 모두 미쳐버렸습니다... 너무 소란스럽고 함성이 터져서 스스로도 그렇게 흥분한 것에 놀랐습니다... 요컨대, 사랑하는 플로리모, 그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고, 토요일 이후 파리는 그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청중에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습니다...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라고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전했다.[92] 《청교도》는 '파리의 유행'이 되었고, 그 시즌 동안 17회나 공연되었다.

《청교도》의 성공 이후 벨리니는 두 가지 영예를 안았다.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나폴리의 페르디난트 2세 국왕으로부터 프란체스코 1세 훈장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청교도》를 "프랑스 여왕" 마리 아멜리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친구 플로리모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것에 슬퍼하며 여러 차례 파리 방문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835년 여름, 벨리니의 전반적인 기분은 어두웠다고 전해진다. 파리 오페라와의 계약 논의는 새로운 감독이 임명될 때까지 지연되었고, 그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많은 편지를 썼다.[96] 이 무렵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는 벨리니에게 "당신은 천재지만, 조숙한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말을 했고, 다소 미신적이었던 벨리니는 이 말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97]

9월 초, 벨리니는 퓌토에서 심각한 장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9월 2일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3일 동안 설사로 약간 고생했지만, 지금은 더 나아졌고,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고 썼으나,[99]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벨조이오소 공주가 보낸 의사 루이지 몬탈레그리가 그를 돌보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끔찍한 경련"을 일으키는 등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100] 결국 1835년 9월 23일 오후 5시경, 벨리니는 퓌토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00] 국왕의 명령으로 시행된 사후 부검 결과, 사인은 간 농양으로 악화된 급성 대장 염증으로 밝혀졌다.[101]

조아키노 로시니가 장례 절차 전반을 주관했다. 10월 2일 파리 앵발리드 예배당에서 성대한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파리 음악계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기념비 건립 기금 모금을 진행했다.[102] 벨리니의 유해는 처음에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으나,[102] 1876년 고향 카타니아로 옮겨져 카타니아 대성당에 재매장되었다.[103][116]

벨리니의 오랜 대본 파트너였던 펠리체 로마니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아마 우리의 작곡가들 외에는 벨리니만큼 음악과 시, 극적 진실, 감정의 언어, 표현의 증거의 긴밀한 결합의 필요성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벨리니를 찾기 위해 15년 동안 땀을 흘렸다! 단 하루 만에 그가 나를 떠났다![104]

3. 주요 작품

빈첸초 벨리니는 벨칸토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오페라를 중심으로 하지만, 가곡, 교향곡, 종교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특히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와의 협업을 통해 《몽유병 여인》, 《노르마》 등 다수의 걸작을 남겼다. 벨리니의 음악은 당대는 물론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연주되고 있다. 그의 주요 오페라와 기타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오페라

벨리니는 음악원 재학 중이던 1825년 첫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를 작곡하여 학교 부속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어 1년간 매주 일요일 공연될 정도였다.[16] 이 성공은 당시 여러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이었던 도메니코 바르바야의 눈에 띄는 계기가 되었고, 벨리니는 즉시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한 신작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 결과 탄생한 두 번째 작품 《비앙카와 제르난도》는 1826년 5월 30일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원래 제목은 《비앙카 에 페르난도》였으나, 당시 왕위 계승자의 이름이 페르난도였기 때문에 왕실 극장에서 사용할 수 없어 《비앙카 에 제르난도》로 변경되었다.[20] 이 공연에는 명 테너 가수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가 참여했으며, 그의 노래는 이후 벨리니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연은 양시칠리아의 프란체스코 1세 국왕이 관례를 깨고 박수를 칠 정도로 성공적이었고,[20] 도니체티 역시 "아름답고, 아름답고, 특히 그의 첫 오페라라서 아름답습니다."라고 극찬했다.[21]

이 성공에 힘입어 바르바야는 벨리니에게 명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을 위한 신작을 의뢰했고, 벨리니는 세 번째 작품인 《해적》으로 이에 응답했다. 이 작품은 1827년 10월 27일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어 즉각적이고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26] 벨리니는 로시니의 후계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오페라에는 루비니 외에도 소프라노 앙리에트 메릭-랄랑드, 바리톤 안토니오 탐부리니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출연했다. 벨리니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와 협력하게 되었는데, 이후 로마니를 "나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라 부르며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해적》의 성공으로 벨리니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28년 벨리니는 제노바 카를로 펠리체 극장의 의뢰를 받아 《비앙카 에 제르난도》를 개정하여 원래 제목인 《비앙카와 페르난도》로 4월 7일에 다시 공연했다. 로마니가 대본 수정을 맡았으며, 소프라노 아델라이데 토시와 테너 조반니 다비드의 목소리에 맞춰 음악을 재편곡했다. 이 공연은 나폴리 초연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어 총 21회 공연되었다.[30]

1829년 2월 14일, 벨리니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이국의 여인》을 초연하여 《해적》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25] 로마니가 대본을 썼고, 메릭-랄랑드와 테너 도메니코 레이나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의 새로운 스타일과 빈번한 화성 변화는 일부 비평가들에게는 낯설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35] 같은 해 5월 16일에는 파르마의 테아트로 레지오 (파르마) 개관 기념작으로 《자이라》를 초연했으나, 이는 벨리니 경력 최초의 실패작으로 기록되었다.[36] 볼테르의 비극 《자이르》를 바탕으로 로마니가 대본을 썼지만, 짧은 작곡 기간, 파르마 관객들의 로시니 선호 경향, 로마니의 대본 작업 어려움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1830년 3월 11일, 벨리니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카풀렛가와 몬테규가》를 초연하여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두었다.[43] 이 작품은 로마니가 니콜라 바카이의 1825년 오페라 《줄리에타 에 로메오》를 위해 썼던 대본을 재사용한 것으로, 벨리니는 《자이라》에서 사용했던 음악 일부를 이 작품에 활용했다. 로미오 역은 메조소프라노 주디타 그리시가 맡았다. 이 성공으로 벨리니는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45]

1831년 3월 6일,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에서 《몽유병 여인》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외젠 스크리브의 발레 판토마임을 바탕으로 로마니가 대본을 썼으며,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가 몽유병 환자 아미나 역을, 테너 루비니가 엘비노 역을 맡았다. 전원적인 배경과 아름다운 멜로디로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으며, 특히 아미나 역은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는 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기록했다.[49]

같은 해 12월 26일, 벨리니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노르마》를 초연했다. 알렉상드르 수메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로마니가 대본을 썼으며, 주디타 파스타가 타이틀 롤인 노르마 역을, 그녀의 동생 줄리아 그리시가 아달지자 역을, 테너 도메니코 돈젤리가 폴리오네 역을 맡았다. 초연 당시 반응은 미지근했으나,[55] 이후 공연을 거듭하며 벨리니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특히 1막의 아리아 〈카스타 디바〉(Casta Diva)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리아 중 하나로 꼽힌다.

1833년 3월 16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텐다의 베아트리체》가 초연되었다. 카를로 테달디-포레스의 희곡을 바탕으로 로마니가 대본을 썼고, 주디타 파스타가 베아트리체 역을 맡았다. 그러나 로마니의 대본 작업 지연으로 인해 작곡 시간이 부족했고, 이로 인해 벨리니와 로마니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초연 반응은 미지근했으며,[68] 이후 벨리니와 로마니는 언론을 통해 서로를 비난하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70] 이 사건으로 오랜 협력 관계였던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된다.

1835년 1월 24일, 벨리니는 파리의 테아트르 이탈리엔에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청교도》를 초연했다. 대본은 카를로 페폴리 백작이 썼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벨리니는 같은 해 9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제목장르대본초연
날짜장소
아델손과 살비니세미 세리아 오페라3막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1825년 2월 12일 (?)나폴리, 산 세바스티아노 음악원 극장
비앙카와 제르난도멜로드라마2막도메니코 질라르도니1826년 5월 30일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해적멜로드라마2막펠리체 로마니1827년 10월 27일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비앙카와 페르난도
(비앙카 에 제르난도의 개정판)
멜로드라마2막펠리체 로마니1828년 4월 7일제노바, 카를로 펠리체 극장
이국의 여인멜로드라마2막펠리체 로마니1829년 2월 14일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자이라서정적 비극2막펠리체 로마니1829년 5월 16일파르마, 테아트로 두칼레
카풀렛가와 몬테규가서정적 비극2막펠리체 로마니1830년 3월 11일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몽유병 여인세미 세리아 오페라2막펠리체 로마니1831년 3월 6일밀라노, 카르카노 극장
노르마서정적 비극2막펠리체 로마니1831년 12월 26일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텐다의 베아트리체서정적 비극2막펠리체 로마니1833년 3월 16일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청교도세리오 멜로드라마3막카를로 페폴리1835년 1월 24일파리, 테아트르 이탈리엔



1999년, 이탈리아의 음악 출판사 카사 리코르디는 카타니아의 테아트로 마시모 벨리니와 협력하여 벨리니의 완전 작품 비평판 출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115]

3. 2. 기타 작품

벨리니는 오페라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 교향곡: 총 8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여기에는 1820년경 작곡된 ''Capriccio, ossia Sinfonia per studio|카프리치오 또는 연습용 교향곡ita''가 포함된다. 벨리니의 교향곡은 베토벤의 독일 전통보다는 이탈리아 서곡 전통을 따라 일반적으로 10분 미만의 짧은 길이로 작곡되었다.
  • 협주곡: 1823년에 작곡된 짧은 2악장의 내림 마장조 오보에 협주곡이 남아 있으며, 이 곡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녹음하기도 했다.[15]
  • 실내악:
  • 가곡: 벨리니 사후 100주년인 1935년, 리카르디 출판사는 다음 15곡을 ''실내악 작곡''(Composizioni da Camera|콤포시치오니 다 카메라ita)이라는 제목의 컬렉션으로 출판했다.
  • '''초기 6곡'''
  • "La farfalletta|라 파르팔레타ita" – 칸초네타
  • "Quando incise su quel marmo|콴도 인치세 수 퀠 마르모ita" – 장면 및 아리아
  • "Sogno d'infanzia|소뇨 딘판치아ita" – 로망스
  • "L'abbandono|라반도노ita" – 로망스
  • "L'allegro marinaro|랄레그로 마리나로ita" – 발라드
  • "Torna, vezzosa Fillide|토르나, 베초사 필리데ita" – 로망스
  • '''3개의 아리에타'''
  • "Il fervido Desiderio|일 페르비도 데시데리오ita"
  • "Dolente immagine di Fille mia|돌렌테 임마지네 디 필레 미아ita"
  • "아, 은빛 달이여" (Vaga luna, che inargenti|바가 루나, 케 이나르젠티ita)
  • '''6개의 아리에타'''
  • "Malinconia, Ninfa gentile|말린코니아, 닌파 젠틸레ita"
  • "Vanne, o rosa fortunata|반네, 오 로사 포르투나타ita"
  • "Bella Nice, che d'amore|벨라 니체, 케 다모레ita"
  • "Almen se non poss'io|알멘 세 논 포시오ita"
  • "Per pietà, bell'idol mio|페르 피에타, 벨리돌 미오ita"
  • "Ma rendi pur contento|마 렌디 푸르 콘텐토ita"
  • 피아노: 7개의 피아노 작품을 작곡했으며, 그중 3개는 네 손을 위한 곡이다.
  • 오르간: 사장조 오르간 소나타를 작곡했다.
  • 종교 음악: 총 40개의 종교 작품을 남겼으며,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카타니아" 1번) 라장조 미사곡 (1818)
  • ("카타니아" 2번) 사장조 미사곡 (1818)
  • 독창자,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가단조 ''Messa di Gloria|메사 디 글로리아ita'' (1821)
  • 마단조 미사곡 (나폴리, c. 1823)
  • 사단조 미사곡 (나폴리, c. 1823)
  •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가장조 ''살베 레지나'' (c. 1820)
  •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바단조 ''살베 레지나'' (c. 1820)

4. 펠리체 로마니와의 관계

벨리니는 그의 오페라 대부분에서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와 협력했다.[70] 로마니는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대본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벨리니는 그를 "나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신뢰를 보냈다.[64] 두 사람의 협업은 1827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해적》(Il pirata)에서 시작되었다.[26][23] 이 작품의 큰 성공은 벨리니를 로시니의 유력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후 벨리니는 《라 스트라니에라》(La straniera),[25] 《자이라》(Zaira),[103]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I Capuleti e i Montecchi),[43]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48]노르마》(Norma)[50] 등 총 7편의 오페라에서 로마니의 대본을 사용하며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라 스트라니에라》 작업 당시, 벨리니가 마지막 아리아의 가사에 영감을 받지 못하자 로마니가 네 번이나 가사를 수정해주었다는 일화는 두 사람의 긴밀했던 협업 관계를 잘 보여준다.[24]

그러나 1833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에서 초연된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의 작업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65] 로마니는 여러 오페라 작업을 동시에 맡아 대본 집필이 약속된 기한보다 상당히 지연되었고, 이에 벨리니는 로마니를 베네치아로 데려오기 위해 베네치아 주지사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등 법적 조치까지 취하며 갈등이 깊어졌다.[70]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격식체인 'voi'를 사용할 정도로 사이가 멀어졌다.[67] 《베아트리체 디 텐다》 초연 후, 작품 지연의 책임을 두고 두 사람은 언론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이는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70][71][72]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의 성공적인 협력 관계는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1834년, 벨리니는 공동의 친구를 통해 로마니와의 화해를 시도했다.[73] 벨리니는 로마니에게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다시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74] 로마니 역시 처음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75] 벨리니는 로마니에게 "오직 나만을 위해 써주세요, 당신의 벨리니"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76] 그러나 로마니의 최종적인 답변은 명확하지 않았고, 벨리니가 이듬해 사망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75][76]

5. 벨리니와 여성

벨리니는 프란체스코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여성 편력이 있었다.[107] 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여성으로는 마달레나 푸마롤리와 주디타 투리나가 있다.

초기 나폴리 음악원 시절, 벨리니는 마달레나 푸마롤리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비앙카 에 게르나도''의 성공 이후 벨리니는 푸마롤리 가문이 마음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며 친구를 통해 다시 청혼했지만, 마달레나의 아버지는 "내 딸은 가난한 피아노 연주자(''수오나토레 디 쳄발로'')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편지와 함께 청혼을 거절했다.[110] 하지만 ''일 피라타''의 큰 성공 이후인 1828년 3월 이전, 벨리니가 제노바에서 ''비앙카 에 페르난도''를 준비하기 위해 밀라노를 떠나려 할 때, 푸마롤리 가문이 이전의 거절을 철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벨리니는 경력에 집중하고 있었고 마달레나와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로 인해 감정이 변한 상태였다. 그는 플로리모를 통해 재정적으로 그녀를 부양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 제안을 거절했고, 이후 마달레나가 직접 보낸 세 통의 편지에도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주디타 투리나


벨리니가 1828년 이후 가진 유일하게 중요한 관계는 주디타 투리나와의 5년간의 관계였다. 그는 1828년 4월 제노바에서 ''비안카 에 페르난도''를 제작할 때 만난 젊은 기혼 여성 주디타 투리나와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했다. 벨리니는 친구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의 부담 없이 자신의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관계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1833년 5월 벨리니가 런던에 있을 때, 주디타의 남편이 벨리니가 보낸 불륜 관계를 암시하는 편지를 발견하면서 관계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남편은 법적 별거를 요구하며 그녀를 집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벨리니에게 그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에 대한 감정이 식었기 때문에 관계를 지속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111] 다음 해 파리에서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밀라노에서 주디타가 파리로 올 것이라는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고 말하며,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도시를 떠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나는 더 이상 나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관계를 갱신하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112] 투리나가 남편을 떠나겠다고 발표했을 때, 벨리니는 "그렇게 많은 약속이 있는데, 그런 관계는 나에게 치명적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낭만적인 애착이 자신의 음악 경력을 방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녀를 떠났다.[107]

궁극적으로 벨리니는 장기적인 정서적 책임을 거부했고, 결혼하지 않았다.

6. 평가 및 영향

벨리니는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가에타노 도니체티와 함께 당대 벨칸토 오페라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힌다. 벨리니의 음악은 특유의 기품 있고 우수에 찬 아름다운 선율로 특징지어지며, 이러한 그의 창조적인 선율은 19세기 많은 작곡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프레데리크 쇼팽은 벨리니의 선율에 큰 영향을 받아, 임종 시 그의 아리아를 듣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랑스 작가 고티에 등도 벨리니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로 칭송하며 높이 평가했다. 벨리니의 아름다운 선율은 오페라 아리아뿐만 아니라 그의 오보에 협주곡 등 다른 작품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7. 한국에서의 벨리니

(내용 없음)

참조

[1] 간행물 Vincenzo Bellini, Italian Composer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2018-01-15
[2] 서적 Lippmann, McGuire (1998)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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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Weinstock (1971) loc="1801–1819" pp.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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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Quoted by Lippmann, McGuire (1998) p=389, which also references the anonymous pré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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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Weinstock (1971) p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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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편지 182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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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서적 Giuditta Turina to Florimo 1834-08-04
[112] 서적 Bellini to Florimo 183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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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서적 Galatopoulo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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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서적 美しきイタリア 22の物語 光文社
[117] 문서 후에 이 작품의 제목은 "비앙카와 헤르난도(Bianca e Gernando)"로 다시 붙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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