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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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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서평(본명: 엘리자베스 쉐핑)은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간호사가 된 후 1912년 한국에 파견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광주, 제주도 등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렸다. 간호 및 교육 활동을 펼쳤으며, 여성의 자립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1923년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 간호 협회를 설립하고, 한국 여성들을 위한 닐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힘썼다.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 한국인과 같은 삶을 살았으며, 34명의 과부와 13명의 딸을 입양하여 함께 생활했다. 2017년 그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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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서서평(徐舒平)
원어 이름Elisabeth Johanna Shepping
출생일1880년 9월 26일
출생지독일 제국 헤센주 비스바덴
사망일1934년 6월 26일
사망지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군
부모안나 셰핑(모)
성별여성
직업종교인, 간호사, 사회사업가
종교개신교
사망 원인영양실조, 골수염, 간염
국적미국

2. 생애

서서평(본명: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de)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조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아홉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만났다.[2] 미국에서 가톨릭 미션 스쿨과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으며[3], 이후 동료 간호사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2]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에서 공부하며 선교사의 길을 결심했고[3][4], 조선의 열악한 의료 상황을 듣고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소속 간호선교사로 파송되었다.

32세에 조선 땅을 밟은 서서평은 1934년 54세의 나이로 소천하기까지 22년간 일제 강점기 하의 조선, 특히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도, 추자도 등에서 의료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복을 입는 등 조선인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주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 미혼모, 고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아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 자신의 임금 대부분을 구호 활동에 사용했으며, 14명의 고아를 입양하고 38명의 과부를 돌보았다. 또한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양잠업과 고사리 채취 등을 지원했다.

임종 시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할 것을 유언했으며, 그녀의 장례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서평은 간호, 신학, 교육 지식을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 사회의 가장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2. 1. 어린 시절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로마 가톨릭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de)이다.[2] 어머니는 안나 셰핑(Anna Schepping)이며, 아버지는 그녀가 한 살 때 사망했다.[2] 세 살 무렵 어머니가 홀로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면서, 조부모(안드레아스 셰핑, 엘리자베스 화버)에게 맡겨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2]

아홉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어머니를 찾아 홀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2] 이후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열아홉 살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며, 스물한 살에 정식 간호사가 되었다.[3]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하던 중, 혹은 뉴욕 유대인 병원에서 야간 근무 수간호사로 일하면서[3]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신교로 개종을 결심했다.[2]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의절당했다.[2] 낮에는 뉴욕 신학 학교(New York Theology School)로 알려진 성경 교사 훈련 학교에서 종교 관련 과정을 수강하며[3] 윌버트 웹스터 화이트(Wilbert Webster White)를 만나 성경 해석 방법을 배웠다.[4] 또한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 후에는 브루클린 이시병원에서 근무했다. 1904년에는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에서 1년간 봉사하기도 했다. 이 시기 학생 자원 봉사 운동, 사회 복음 운동, 에큐메니즘 등 다양한 기독교 운동을 접하며 자기 희생적인 삶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4]

1911년 성서교사훈련학교를 졸업한 후, 동료 선교사에게서 조선(대한제국)에서는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로 의료 도움이 절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받게 된다.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 버림받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훗날 자신은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2. 2. 선교사 생활

신학대학 재학 중, 조선의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4] 서서평이 32세 되던 해 남장로교 선교팀에 합류하여 조선으로 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6]

이에 따라 1912년 2월 20일, 서서평은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었다. 당시 조선은 1910년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점된 지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아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소외되었고,[5] 걸인, 한센병 환자, 병자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2] 서서평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여객선 S.S.Korea호를 타고 20여 일의 항해 끝에 조선 땅을 밟은 그녀는 광주선교부 제중원(원장 우월순)의 간호사로 부임하여 병원 업무와 주일학교 운영을 도우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 남자 검정 고무신을 착용했으며, 된장국을 즐겨 먹는 등 조선의 문화에 깊이 동화되려 노력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성경부인 박해라와 그녀의 두 아들 문안식, 문천식을 가족처럼 여기며 지냈다.

1912년(32세)부터 1934년(54세)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서서평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의 활동은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제주도추자도 등 외딴 섬 지역까지 찾아가 간호 선교 활동을 펼쳤다.

서서평은 특히 미혼모, 고아, 한센병 환자, 노숙인 등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고 가난하며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으로 그녀는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렸다. 자신의 임금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으며, 14명의 고아를 입양하여 길렀고, 오갈 곳 없는 과부 38명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며 돌보았다.

또한,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데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들에게 양잠 기술을 가르쳤고, 뽕나무 재배 면적을 늘리고 관련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미국 본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여성들이 고사리 채취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임종 시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의 장례식은 자신이 설립한 이일학교 학생들이 직접 운구에 나섰고, 수많은 여성이 흰 소복을 입고 그 뒤를 따르는 장엄한 행렬로 치러졌다. 이는 광주 역사상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기록되었다. 서서평은 간호학, 신학, 교육학 지식을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 사회의 가장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한 선교사였다.

3. 주요 활동

서서평은 1912년부터 1934년까지 광주, 군산, 부산, 서울 등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며, 특히 여성, 과부, 고아, 나병 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6]

그녀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간호 및 의료 활동이다. 서서평은 간호 업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제중원, 구암 예수 병원, 세브란스 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며 간호사 교육과 감독에도 힘썼다.[3] 한국의 보건 증진을 위해 다수의 간호 교과서를 저술하고 번역했으며,[3] 1923년에는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간호부회'를 설립하고 10년간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제 간호 협의회 가입을 이끌었다.

둘째, 교육 활동이다. 서서평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인 닐 성경학교(이후 한일장신대학교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발전)를 설립하여 수많은 여성을 교육했다.[7][3] 또한 여성의 자립을 돕기 위해 이일 여학교를 세워 생계 기술을 가르쳤다.[2] 그녀는 학교에서 직접 읽기, 쓰기, 찬송가, 성경뿐 아니라 위생과 간호 지식까지 가르쳤으며,[4] 여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교육하고 전도사로 훈련시키는 데에도 힘썼다.[4]

셋째, 문화적 동화와 헌신적인 삶이다.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서서평은 스스로 한국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한국 전통 옷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했고, 일제 강점기의 한국어 사용 금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로만 소통했다. 자신의 이름도 서서평(Seo Seo-Pyoung)으로 바꾸었으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외국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8] 그녀는 매우 검소한 삶을 살며 34명의 과부와 함께 생활하고 13명의 고아를 입양했으며,[3] 22년간의 한국 봉사 끝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2]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다.[2]

3. 1. 간호 및 의료 활동

1912년 한국에 도착한 서서평은 광주 제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군산의 구암 예수 병원,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며 간호 업무에 헌신했다.[3] 그녀는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것을 넘어 간호사 교육과 감독에도 힘썼다. 한국의 보건의료 수준 향상을 위해 『간호 교과서』, 『간호 실습 연구』, 『간호 지침』, 『간단한 위생법』 등 다수의 간호 관련 서적을 저술하고 번역하여 보급했다.[3]

서서평은 1923년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간호부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초대 회장을 맡아 10년간 조직을 이끌었다.[3] 그녀의 노력으로 조선간호부회는 국제 간호 협의회(ICN)에 성공적으로 가입하여 한국 간호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녀의 활동은 병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34년까지 22년간 광주를 중심으로 제주, 추자도, 군산, 부산, 서울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을 돌봤다.[6] 특히 여성, 과부, 고아, 한센병 환자 등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아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6] 자신의 임금 대부분을 이들을 위해 사용했으며, 14명의 고아를 입양하고 38명의 과부와 함께 생활하는 등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3. 2. 교육 활동

서서평은 간호 활동 외에도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대한민국에 학교를 설립하는 데 힘썼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인 닐 성경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한때 매년 3만에서 4만 명에 달하는 여성을 교육하기도 했다.[7] 닐 성경학교는 이후 한일장신대학교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3] 서서평은 학교 설립 초기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직접 5~6개 과목을 가르쳤다. 그녀가 가르친 과목에는 읽기, 쓰기, 찬송가, 성경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한 의학과 간호 관련 내용도 포함되었다.[4] 교육을 장려하면서 서서평은 여성들이 효과적인 성경 여성이 되도록 기독교를 교육하는 데 주요 헌신을 다했다.[4]

또한 서서평은 여성들이 스스로 자립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일 여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서는 누에를 키우고 여성들에게 바느질 기술을 가르쳐 학교 운영의 자립 기반을 마련했다.[2]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했으며,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확장하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주 지역에서는 여성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고사리 채취 사업을 지원했다.

서서평은 낮에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밤에는 전도 집회를 열고 여성들을 전도사로 훈련시키는 데 힘썼다.[4] 당시 한국 여성들은 주로 가족 구성원이나 마을 공동체에 따라 호칭되었는데, 서서평은 이들에게 기독교식 이름을 지어주었다.[4] 이를 통해 여성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고, 성경 말씀을 전파하는 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3. 3. 문화적 동화와 사회 운동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달리, 서서평은 적극적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스스로를 한국인과 동일시했다.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고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었으며, 된장국을 즐겨 먹는 등 한국인의 생활 방식을 따랐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을 때도 한국어로만 소통했다. 자신의 이름도 서서평(Seo Seo-Pyoung)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외국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8]

서서평은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온돌방이 있는 흙집에서 34명의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살았고, 13명의 딸을 입양했으며, 콩국보리밥으로 식사를 해결했다.[3] 이는 당시 일부 선교사들이 호화로운 저택에서 조선인들과 분리된 생활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와 동등한 입장에서 생활하고자 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회 운동가로서 서서평은 특히 여성과 소외된 이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광주광역시 양림동에서는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가르쳤고, 시설 확충을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여성들이 고사리를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미혼모, 고아, 한센병 환자,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데 앞장서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렸다. 자신의 임금 대부분을 이들을 위해 사용했으며, 입양한 고아가 14명, 집에서 함께 지낸 과부가 38명에 달했다.

1934년, 22년간의 한국 봉사 끝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으며,[2]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의학 연구를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했다.[2] 그녀의 장례는 광주광역시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학생들이 운구하고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고 전해진다.

4. 평가 및 유산

서서평은 선교사이자 교육가, 사회 운동가로서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 특히 여성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헌신적인 활동은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과 소외된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도 미국 남장로교 선정 위대한 선교사,[3] 여성 계몽의 선구자 등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삶과 업적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는 등[10] 현대에도 계속해서 기억되고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서서평은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3] 그녀는 광주에서 금주, 금연, 성매매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 개혁에도 힘썼다.[9]

특히 서서평은 당시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한국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여성 교육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글을 읽고 쓰지 못했으며 사회·경제적 활동 참여가 저조했다. 서서평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이일학교(닐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에게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일학교는 지역 여성 교육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곳을 졸업한 많은 여성들은 이후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서서평은 여성 계몽의 헌신적인 선구자로 여겨진다. 김모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서서평을 "한국 여성 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하며 그녀의 업적을 기렸다.[3]

2017년에는 그녀의 봉사하는 삶을 조명한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10]

4. 2. 사회적 영향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서서평은 특히 여성 교육과 사회적 약자 구제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912년부터 1934년까지 22년간 광주를 중심으로 제주도 등지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며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을 돌보았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렸으며[3], 자신의 임금 대부분을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또한 14명의 고아를 입양하고 38명의 과부를 가족처럼 돌보는 등 개인적인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서서평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도 관심을 기울여 광주 양림동에서는 양잠업을 지도하고, 제주도에서는 여성들의 고사리 채취를 돕는 등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사회적으로는 광주에서 흡연, 음주, 매춘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 계몽에도 힘썼다.[9]

서서평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여성 교육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 여성 대부분이 문맹이었고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상황에서, 그녀는 닐 학교(이일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학교는 여성 교육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곳을 졸업한 많은 여성들은 이후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서서평은 여성 교육과 문맹 퇴치를 장려한 여성 계몽의 헌신적인 선구자로 평가받는다.[3]

그녀의 헌신적인 삶은 사후에도 높이 평가받아, 남부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3] 김모임보건복지부 장관은 서서평을 "한국 여성 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칭송했다.[3] 2017년에는 그녀의 봉사 활동과 삶을 다룬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어 그녀의 업적을 기렸다.[10]

4. 3. 현대적 유산

서서평은 미국 남부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3] 그녀는 광주에서 흡연, 음주, 매춘에 반대하는 사회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9]

특히 서서평은 자신이 설립한 이일학교 등을 통해 여성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글을 읽고 쓰지 못했으며 경제 활동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여성 교육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상황에서, 서서평은 한국 여성들에게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여 이러한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이일학교는 여성 교육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 학교 졸업생 중 다수는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처럼 서서평은 여성 교육과 문맹 퇴치에 힘쓴 헌신적인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김모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서서평을 "한국 여성 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했다.[3]

2017년에는 서서평의 봉사하는 삶을 조명한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제작되어 개봉되었다.[10]

5. 관련 작품

서서평의 생애와 활동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그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들이 출판되었다. 자세한 목록은 아래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5. 1. 영화


  •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2017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홍주연 감독이 연출했으며, 2017년 4월 26일에 개봉했다. 상영 시간은 78분이며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하정우, 윤안나, 안은새, 정혜윤 등이 출연했다.

5. 2. 책


  • 《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천천히 평온하게)》 백춘성 저
  • 《조선을 섬긴 행복 (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양창삼 저 (대학교수)
  • 《그대 행복한가요? (행복을 잃고 살아가는 바보들에게 주는 서서평의 편지)》 양국주 저
  • 《천국에서 만납시다 (선교사 서서평 일대기)》 백춘성 저 | 대한간호협회
  • 《목포 기독교 이야기 (목포 기독교 120년사 초기)》 김양호 저
  •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엘리제 쉐핑 이야기)》 양국주 저
  •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눈물이고저》 임형태 저
  • 《행복한 만남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우고자 하는 꿈과 비전)》 김호진 저
  • 《자작나무 (김상배 세번째 시집)》 김상배 저
  • 《생명봉사적 통전선교》 임희모 저
  •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폴 스티븐스 저
  • 《본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한일장신대학교 정년퇴임기념논문집 발간위원회 저
  • 《시온의 빛고을 광주》 백춘성 저
  • 《빛과 소금(2017년 4월호)》 두란노 편집부 저
  • 《광주 1백년 1 (개화기 이후 광주의 삶과 풍속)》 박선홍 저
  • 《호남사람 이야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150)》 남성숙 저

참조

[1] 간행물 Ancestry Library Edition 2022-12
[2] 뉴스 Nurse Seo Seo-pyeong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15-01-27
[3] 웹사이트 Founder, Elizabeth Shepping https://www.hanil.ac[...]
[4] 논문 Woman's Work for Woman: The Controversial Role of Female Missionaries in Korea, 1885–1945 2020-06-22
[5] 웹사이트 How Japan Took Control of Korea https://www.history.[...] 2022-10-24
[6] 학술대회 Elisabeth J. Shepping's Conversion and its Impact on the Transformation of Korean Women https://missionstudi[...] 2016-08
[7] 뉴스 Elizabeth Johanna Shepping (AKA Johanna Elisabeth Schepping) Missionary to Korea Part 2 of 2 https://www.newspape[...] The Record 1969-12-18
[8] 간행물 "Professional Missionary Suh Su Pyung (Elisabeth J. Shepping): Mission Strategy and Spirituality," Theological Forum! A (2013): 192. 2022-12
[9] 간행물 Ancestry Library Edition 2022-12
[10] 영화 Suh-Suh Pyoung, Slowly and Peacef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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