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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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정원은 원나라가 티베트와 불교 관련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기구이다. 1264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총제원으로 처음 설치되었으며, 당시 제사였던 파스파가 원사 직책을 겸임했다. 1288년에는 당나라의 사례를 따라 선정원으로 개칭되었고, 중서성 등과 함께 1품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선정원은 티베트의 행정, 불교 승려 관리, 사원 및 불교 재산 감독 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불교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선정원은 몽골 제국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후일 청나라의 이번원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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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원 | |
---|---|
기본 정보 | |
유형 | 기관 |
위치 | 대도 |
설립 | 원 |
해체 | 명 |
역사 | |
존속 기간 | 1264년경 - 1368년 |
역할 및 기능 | |
주요 역할 | 불교와 티베트 관련 사무 관장 |
명칭 | |
한국어 명칭 | 선정원 (宣政院) |
중국어 간체 | 宣政院 |
중국어 병음 | Xuānzhèng Yuàn (쉬안정 위안) |
대체 명칭 | 총제원 (總制院, Zǒngzhìyuàn) |
영어 명칭 | Bureau of Buddhist and Tibetan Affairs (불교 및 티베트 사무국) |
2. 연혁
원나라 시대 티베트와 불교 관련 사무를 총괄하던 중앙 기관이다. 1264년(지원 원년) 쿠빌라이 칸이 설치한 총제원(總制院)이 그 전신으로, 초대 원사는 황제의 스승이었던 파스파였다. 총제원은 티베트 지역의 행정과 몽골 제국 전역의 불교 사무를 관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이후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종교계를 장악하려는 목적을 가졌다.[7]
1288년(지원 25년), 당시 실권자였던 상가( སེང་གེ་་|셍게bo)의 건의로 총제원은 선정원(宣政院)으로 개칭되고, 그 지위도 중서성, 상서성 등과 같은 종1품으로 격상되었다.[14][10] 명목상으로는 과거 당나라가 티베트 사신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접견했던 고사를 따른 것이었으나[14], 실제로는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11]
선정원은 티베트의 행정관인 디폰첸(དཔོན་ཆེན་|디폰첸bo) 선발[15] 등 티베트 관련 업무 외에도, 몽골 제국 전역의 모든 승려(한족, 티베트족, 고려인 포함) 관리와 사찰 및 불교 재산 감독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16] 티베트 불교는 선정원의 비호 아래 크게 확산되었으며[17], 항저우에는 1291년 지부격인 행선정원(行宣政院)이 설치되기도 했다.[19]
1291년 상가가 실각한 이후, 선정원사는 테무데르, 엘 테무르, 바얀, 토크토, 하마 등 당대 권력자들이 차지하는 요직이 되었다.[12] 이는 선정원이 가진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과 모호한 성격 때문에 권력 투쟁의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13] 후일 청나라가 설치한 이번원은 원나라 선정원의 역할을 계승한 기관으로 평가받는다.[20]
2. 1. 총제원 설치 (1264년)
1239년, 고단이 파견한 몽골군은 처음으로 티베트 고원에 진출하여 명목상 티베트는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그 지배 체제는 아직 견고하지 않았다. 1259년 몽케 칸이 급사하자, 1260년 쿠빌라이가 카안 즉위를 선언했지만 동생 아리크부케 역시 독자적으로 제위를 칭하며 몽골 제국은 내전 상태에 빠졌다.쿠빌라이는 즉위 직후인 1260년 6월, 티베트 불교 승려 파스파를 "국사(國師)"로 임명했다. 이는 내전 상황에서 티베트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고 종교계를 통솔하려는 목적이었다.[7] 파스파는 쿠빌라이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산개 불사 개최, 대호국 인왕사 기공, 파스파 문자 제정 등 황제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정책들을 실행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사(帝師, 황제의 스승)" 칭호를 받았다.[8] 이러한 파스파의 활동은 탐파, 상가, 아르니코, 셰라브 팔, 아르군사리 등 다언어를 구사하는 측근 집단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집단이 총제원의 실질적인 전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9]
이러한 배경 속에서 1264년(지원 원년), 원(元)을 건국한 쿠빌라이 칸은 조서를 내려 공식적으로 총제원(總制院)을 설치했다. 총제원의 책임자인 원사(院使)는 정2품 관직이었으며, 제사(帝師) 파스파가 이 직책을 겸임하게 되었다. 원사와 함께 동지(同知), 부사(副使) 등의 관직이 설치되어 토번(티베트) 지구의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총제원의 관할 아래에는 선위사(宣慰司), 안무사(安抚司), 초토사(招讨司), 만호부(万户府), 원수부(元帅府) 등 다양한 지방 행정 및 군사 기관이 포함되었다.
당시 원나라 치하의 티베트 지역은 토번등처(吐蕃等處), 토번등로(吐蕃等路), 오사장납리속고로손등삼로(烏思藏納里速古魯孫等三路)라는 세 개의 선위사사도원수부(宣慰使司都元帥府)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들 모두 총제원의 관할을 받았다. 이는 티베트에 대한 몽골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2. 2. 선정원으로 개칭 (1288년)
1288년(지원 25년), 당시 상서성 우승상 겸 총제원사였던 상가( སེང་གེ་་bo, 셍게)는 총제원의 책임이 무겁다는 점을 들어 쿠빌라이 칸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과거 당나라에서 티베트 사신을 선정전(宣政殿)에서 맞이했던 전례를 따라 총제원을 선정원으로 개칭할 것을 제안했다.[14][10] 『원사』 백관지에 따르면, 상가는 이러한 개칭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불교 행정 관리보다는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11]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총제원은 선정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관청의 지위도 기존 종2품에서 종1품으로 격상되었다.[10] 이로써 선정원은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 어사대와 같은 최고 등급의 중앙 기관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한 선정원의 수장은 황제의 스승인 제사(帝師)가 겸임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14]
2. 3. 선정원의 권한과 역할
1264년 쿠빌라이 칸이 설치한 총제원(總制院)을 전신으로 하며, 1288년 상서성우승상(尚书省右丞相) སེང་གེ་་|셍게bo의 건의로 선정원(宣政院)으로 개칭되었다.[14] 이는 과거 당나라에서 토번(티베트) 사신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접견했던 고사를 따른 것이며, 이와 함께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 어사대와 같은 반열인 1품 기관으로 격상되었다.선정원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티베트의 행정관인 디폰첸(དཔོན་ཆེན་|디폰첸bo, '위대한 행정관'이라는 뜻)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디폰첸은 보통 라마승이 임명하고 베이징의 몽골 황제가 최종적으로 추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5]
그러나 선정원의 권한은 티베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몽골 제국 전역의 모든 승려(한족, 티베트족, 고려인 포함)를 관리했으며, 제국 내 모든 사원, 수도원 및 기타 불교 관련 재산을 감독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16] 원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전국 각 성(省)의 불교 관련 사무와 토번 지역의 일반 행정 사무는 기본적으로 선정원이 주관하였다. 또한 중대한 군사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추밀원과 협력하여 처리하도록 규정되었다.
선정원은 티베트 불교의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스파가 황제의 스승인 제사(帝師)로서 선정원사를 겸임한 이후, 티베트 불교는 수도 베이징을 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17], 관할 아래 둔 사원의 수가 360여 곳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18] 당시 티베트 불교는 중국 전통 불교보다 더 우대받는 경향이 있었다.[17] 이러한 영향력을 보여주듯, 옛 남송의 수도이자 원나라 시대 최대 도시였던 항저우에는 1291년 지부 격인 행선정원(行宣政院)이 설치되기도 하였다.[19]
3. 조직
1264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은 총제원(總制院)을 설치하고, 정2품 관직인 원사(院使)에 당시 황제의 스승(帝師)이었던 티베트 불교 승려 파스파를 임명하였다. 총제원은 원사와 함께 동지(同知), 부사(副使) 등의 관원을 두어 티베트 지역의 행정 기관인 선위사(宣慰司), 안무사(安抚司), 초토사(招讨司), 만호부(万户府), 원수부(元帅府) 등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원나라 치하의 티베트 지역은 아래의 세 선위사사도원수부(宣慰使司都元帥府)로 나뉘어 모두 총제원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명칭 |
---|
토번 등처 선위사사 도원수부 |
토번 등로 선위사사 도원수부 |
오사장납리속고로손 등 삼로 선위사사도원수부 |
1288년, 상서성우승상(尚书省右丞相) 겸 총제원사(总制院使)였던 སེང་གེ་་|셍게bo는 총제원의 책임이 막중함을 들어 쿠빌라이 칸에게 건의하여 기관의 명칭을 선정원(宣政院)으로 바꾸었다. 이는 과거 당나라가 선정전(宣政殿)에서 토번 사신을 접대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14] 선정원은 황제의 스승이 겸직하는 기관으로서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 어사대와 동등한 1품 기관으로 격상되었다.
선정원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티베트의 행정 책임자인 폰첸(དཔོན་ཆེན་|폰첸bo, '위대한 행정관'이라는 뜻)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폰첸은 보통 라마승이 임명하고 베이징의 몽골 황제가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방식으로 임명되었다.[15] 선정원은 티베트 문제 외에도 몽골 제국 전역의 모든 불교 승려(한족, 티베트족, 고려인 등)를 관리했으며, 명목상으로는 제국 내 모든 사원, 수도원 등 불교 관련 재산을 감독하는 역할도 맡았다.[16] 원나라의 규정에 따라 전국 각 성(省)의 불교 관련 업무와 티베트 지역의 일반 행정 사무는 선정원이 주관하였고, 중대한 군사적 상황이 발생하면 추밀원과 함께 처리하도록 하였다.
선정원은 중국 내 불교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스파가 황제의 스승으로서 선정원사를 겸임한 이후, 티베트 불교는 수도 베이징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17], 사학자 에블린 라프스키에 따르면 선정원이 관할하는 사원의 수는 360여 곳에 달했다.[18] 당시 티베트 불교는 중국 불교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공식적인 우위를 점했다.[17] 1291년에는 과거 남송의 수도였고 원나라 시기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항주에 지부 격인 행선정원(行宣政院)이 설치되기도 하였다.[19]
훗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이번원(理藩院)은 과거 원나라의 선정원 제도를 참고하여 중국 국경 너머의 민족 및 지역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20]
4. 목적과 의의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1260년 제위 계승 전쟁 중에 즉위하면서 티베트 지역을 안정시키고 종교계를 장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티베트 불교 승려 파스파를 국사로 임명했는데[7], 파스파는 쿠빌라이의 기대에 부응하여 파스파 문자 제정 등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며 '제사(帝師)' 칭호를 받았다.[8] 이러한 배경 속에서 1264년 티베트 지역의 행정과 제국 내 불교 사무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총제원(總制院)이 처음 설치되었고, 파스파가 초대 원사(院使)를 겸임했다. 파스파를 보좌하며 실무를 담당했던 탐파, 상가, 아르니코 등의 측근 집단은 선정원의 전신으로 여겨진다.[9]
총제원의 주요 목적은 원나라의 통치력을 티베트 지역에 효과적으로 투사하고, 불교 세력을 관리하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티베트 지역의 행정관인 디폰첸(dpon-chen, '위대한 행정관') 선발 과정에 관여했으며[15], 티베트뿐만 아니라 한족, 고려인 등 제국 내 모든 불교 승려와 사원, 재산을 명목상 감독했다.[16] 특히 파스파가 제국의 스승이자 총제원사로서 활동하면서 티베트 불교 사카야 학파는 수도 대도를 중심으로 원나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17], 다른 중국 불교 종파보다 우대받는 경향을 보였다.[17] 관할 사원의 수가 360여 곳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18] 또한, 총제원은 전국 각지의 불교 관련 사무와 티베트 지역의 일반 행정 사무를 주관했으며, 중대한 군사적 상황 발생 시에는 추밀원과 함께 사안을 처리하도록 규정되었다. 옛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에는 1291년 지부격인 행선정원(行宣政院)이 설치되기도 했다.[19]
1288년, 당시 재정 관료로서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어 권력의 중심에 있던 상가(셍게, སེང་གེ་་bo)는 총제원의 책임이 막중함을 이유로 쿠빌라이에게 건의하여 기관의 명칭을 선정원(宣政院)으로 변경하고 그 지위를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 어사대와 같은 최고 등급인 종1품으로 격상시켰다.[14] 상가는 이러한 개칭과 승격의 명분으로 과거 당나라에서 토번 사신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접견했던 고사를 들었으나[10], 실제로는 불교 행정 관리라는 기존 목적 외에 티베트에 대한 원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11]
상가가 1291년 실각한 이후에도 선정원사는 원나라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직책으로 간주되었다. 테무데르, 엘 테무르, 바얀, 토크토, 하마 등 원나라 후기 권력을 장악했던 인물들이 연이어 선정원사를 역임했다.[12] 이는 선정원이 단순히 티베트와 불교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을 넘어, 중앙 정치의 권력 투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역사학자 후지시마는 선정원이 몽골족의 종교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역할과 성격의 모호함 때문에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고 결국 원나라 말기 정치 혼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3] 훗날 청나라가 몽골, 티베트 등 번부(藩部) 지역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이번원은 원나라의 선정원 제도를 참고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받는다.[20]
5. 평가
선정원은 원나라의 티베트 통치와 불교 정책을 상징하는 기관이었으나, 그 역할과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쿠빌라이가 즉위 초 파스파를 국사로 임명하고 이후 총제원을 설립한 배경에는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과 같은 혼란 속에서 티베트 지역을 안정시키고 종교계를 장악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7] 실제로 파스파는 파스파 문자 제정 등 쿠빌라이의 황권을 가시적으로 강화하는 여러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8] 초기에는 몽골 제국의 안정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파스파를 도운 탐파, 상가, 아르니코 등의 측근 그룹은 선정원의 전신으로 여겨진다.[9]
그러나 지원 25년(1288년) 당시 권력자였던 상가의 건의로 총제원이 선정원으로 개명되고 그 지위가 종1품으로 격상되면서, 기관의 성격은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10] 『원사』 백관지에 따르면, 상가는 당나라 시기 토번 사신을 선정전에서 맞이했던 고사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불교 행정보다는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식민지적 성격을 강화할 목적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11]
상가 이후, 선정원사(선정원의 장) 자리는 테무데르, 엘 테무르, 바얀, 토크토, 하마 등 당대의 권력자들이 차지하는 핵심 요직으로 자리 잡았다.[12] 이들은 종종 "권신" 혹은 "간신"으로 평가받는 인물들로, 선정원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 및 확장의 도구로 활용했으며, 이는 원나라 후기 정치 혼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후지시마 다케시는 선정원이 몽골족의 종교적 신앙을 위한 기구이면서도 준행정적 성격을 띠며 정치 기구에 통합된 모호함 때문에 다양하게 이용되었고, 이것이 오히려 정계 혼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13] 즉, 선정원은 초기에는 종교적, 문화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점차 정치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티베트 지배 강화와 중앙 정계의 권력 투쟁에 깊이 연관된 기관으로 변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관련 기관
훗날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청(淸)이 세운 이번원(理藩院)은 과거 원 왕조가 중국 국경 너머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서 제정한 청 왕조 버전의 선정원이었다.[20] 선정원의 기능을 계승하거나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 후대의 기관들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2]
서적
Esoteric Buddhism and the Tantras in East Asia
[3]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Last Emperors: A Social History of Qing Imperial Institutions
[5]
간행물
ars orientalis
[6]
서적
State and Ethnicity in China's Southwest
[7]
문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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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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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元史·百官志三
[15]
서적
China's Tibet Policy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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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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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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