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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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주 여씨는 중국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여어매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여어매는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에 정착하여 성산(星山)을 중심으로 세거하며 성산 여씨의 기원이 되었고, 이후 함양 여씨로 분관되었다.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을 지낸 여양유를 중시조로 하며, 성주, 김천, 대구 등지에 분포한다. 성주 여씨는 조선 시대에 3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으며, 남전향약을 계승한 수촌향약이 전해진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조사에서 성주 여씨는 13,467명, 성산 여씨는 9,494명으로 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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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 여씨 - 여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여준은 오산학교에서 활동하다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서숙 설립에 기여하고, 신흥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서로군정서 부독판, 한국독립당 재결성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 성주 여씨 - 여오현
여오현은 뛰어난 수비 능력으로 이름을 알린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로, V-리그에서 7번의 우승을 차지하고 대한민국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리베로로 활약하며 국제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 성주 여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성씨 | 성주 여씨 星州呂氏 |
| 이칭 | 성산 여씨 |
| 나라 | 한국 |
| 관향 | 경상북도 성주군 |
| 시조 | 여어매(呂禦梅) |
| 중시조 | 여양유(呂良裕) |
| 인구 | 13,467명 |
| 년도 | 2015 |
2. 성산 여씨의 기원
성산 여씨(星山 呂氏)는 함양 여씨와 함께 동국여씨(東國呂氏)에 속한다. 시조인 여어매는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출신으로, 헌강왕 3년(877년)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귀화하여 전서(典書)를 역임했다.[1]
2. 1. 시조 여어매(呂禦梅)
성주 여씨(星山 呂氏)의 시조는 여어매이다. 여어매는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출신으로,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877년)에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귀화했다.[1] 이때가 헌강왕 3년이었다. 여어매는 신라에서 전서(典書)를 역임했다.[1]고려 대장군(高麗大將軍) 임청(林淸)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함양 여씨(咸陽 呂氏)가 되었고, 고려삼중대광(高麗三重大匡) 여양유(呂良裕)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성주 여씨(星山 呂氏)가 되었다.[1]
2. 2. 성산 여씨와 함양 여씨
'''동국여씨에는 성산파와 함양파가 있다'''.시조인 전서부군(典書府君)의 아들과 손자들 이름을 모두 알 수 없게 되어 안타까운 가운데, 고려 대장군 여임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함양 여씨가 되었고, 고려 삼중대광 여양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성산 여씨가 되었다.
3. 성산 여씨 분파
성산 여씨의 분파는 후예들의 세거지(世居地)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 크게 대구 가창파(大邱嘉昌派)와 성주파(星州派)로 나뉜다.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대신 가창파,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대신 성주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가창파는 중랑장공 후예들의 세거지가 가창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창면 행정리(杏亭里)에 주로 세거하였기에 행정파라고도 한다. 중랑장공의 손자 순(純)의 세 아들, 처사공 문청(文淸)은 행정백파(杏亭伯派)[1], 진사공 문명(文明)은 행정중파(杏亭仲派)[2], 사정공 문승(文承)은 행정계파(杏亭季派)[3]로 분파된다.
성주파는 다시 성주 본파와 성주 가천파로 나뉜다. 성주 본파는 고성현령 여자방(子方)을 파조로, 성주 가천파는 의성현령 여자용(子庸)을 파조로 한다. 고성공파 대신 성주 본파, 의성공파 대신 성주 가천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성주 본파는 다시 맏집인 성주 본파, 둘째 집인 성주 구정파, 셋째 집인 관북파로 나뉜다. 성주 본파의 파조는 영(詠), 성주 구정파의 파조는 간(諫), 관북파의 파조는 웅(雄)이다. 영은 선략장군 인보(仁甫)의 맏아들, 간은 둘째 아들, 웅은 셋째 아들이다.
성주 본파는 또다시 맏집인 성주 영천파와 둘째 집인 성주 수촌파로 나뉜다. 영천파의 파조는 진사 야용(冶傭) 희단(希端)이고, 수촌파의 파조는 지평 원정(圓亭) 희림(希臨)이다. 원정은 야용의 아우이다. 진사공파 대신 성주 영천파, 원정공파 대신 성주 수촌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성주 진사공파는 진사공 희단의 손자 처사공 주남(胄男) 후예가 성주진사공 백파(星州進士公 伯派)[4], 처사공 윤남(胤男) 후예가 성주진사공 중파(星州進士公 仲派)[5], 처사공 계남(季男) 후예가 성주진사공 계파(星州進士公 季派)[6]로 분파된다.
수촌파는 수촌백파, 수촌중파, 수촌숙파, 수촌계파로 나뉜다. 원정선생이 수촌리(樹村里)에 터를 잡고 옮겨 살았기에 원정 후예는 모두 수촌파가 된다. 원정선생의 외아들 사직(司直) 침(沉)의 네 아들 후예가 수촌사파(樹村四派)이다. 원정공손 처사공파 대신 성주수촌백파[7], 원정공손 참의공파 대신 성주수촌중파[8], 원정공손 생원공파 대신 성주수촌숙파[9], 원정공손 좌윤공파 대신 성주수촌계파[10]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자방의 아들 선략공 인보의 차자 사직공 간의 후예는 구정파[11], 삼자 웅의 후예는 관북파[12]이다.
성주 가천파조인 자용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집이 가천 본파, 둘째 집이 성주 선남파가 된다. 가천 본파에서 둘째 집이 김산 기럴 기동으로 옮겨 김산기동파가 생겼다. 자용의 증손 우문(遇文)의 후예는 김산파[13]이다. 감호선생이 기럴 출신이다. 감호의 후예는 휴암공파, 통덕랑공파, 도암공파로 분파되었다. 휴암공파 대신 김산백파[14], 통덕랑공파 대신 김산중파[15], 도암공파 대신 김산계파[16]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자용의 증손 희문(希文)의 후예는 계항파[17], 희보(希甫)의 후예는 청도파[18]이다.
성주 선남파의 선남은 오도마루, 즉 오도종촌(吾道宗村)이다. 현감(휘 한필)공파 대신 선남오도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선남오도파는 자용의 차자 희(熹)의 아들 한필(漢弼)의 후예가 부동파[19], 한필의 현손 익남(益男)의 후예가 경산파[20]로 분파된다.
3. 1. 성산파 (星州派)
성산파(星州派)는 성산 여씨 중시조 여양유의 차남으로 고려 시대 판도판서를 지낸 여위현(呂渭賢)의 후손이다. 성산파는 크게 성주 본파와 성주 가천파로 나뉜다.[1]- 성주 본파는 여극회(呂克誨)의 맏아들로 고성현령을 지낸 여자방(呂子方)을 파조로 한다. 성주 본파는 다시 성주 본파, 성주 구정파, 관북파 등으로 분파된다.
- 성주 가천파는 여극회의 둘째 아들로 의성현령을 지낸 여자용(呂子庸)을 파조로 한다. 여자용의 후손들은 김산파를 형성하여 김천시 구성면, 성주군 수륜면, 대구광역시, 청도군 등에 분거하고 있다. 성주 가천파는 다시 가천 본파와 성주 선남파로 나뉜다. 가천 본파에서 김산 기동으로 옮겨 간 후손들은 김산 기동파를 이루었다.
| 파 | 파조 | 비고 |
|---|---|---|
| 성주 본파 | 여자방 | 고성현령 역임, 여극회의 맏아들 |
| 성주 가천파 | 여자용 | 의성현령 역임, 여극회의 둘째 아들, 김산파 형성 |
3. 1. 1. 성주 본파 (星州本派)
禦梅|어매중국어는 중국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냈으며, 희종 건부 4년(877년, 신라 헌강왕 3년)에 황소의 난을 피해 래주에서 신라로 건너와 전서를 지냈다. 성산에서 대성을 이룬 여씨의 시조이며, 그 후예가 성산 여씨와 함양 여씨로 분관되었다.[1]전서공 이래로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을 지냈을 것이나, 연대가 현원하여 휘자와 관직, 몇 대를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고려 말엽 성산 고을에서 거인진사로 발신하여 고려 삼중대광을 지낸 여양유(良裕)를 성산여씨의 중시조로 하고, 고려 대장군을 지낸 여임청(林淸)을 함양여씨의 중시조로 한다. 성산여씨는 성주, 김천, 대구 등지에, 함양여씨는 서울, 청주, 영동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1]
성산은 성주의 옛 지명으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성산가야는 육가야 중 하나이며, 본피현, 성산군, 경산부, 성산현, 성주목 등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성주군으로 불리고 있다. 성산여씨 중시조인 삼중대광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1]
장자는 고려 중랑장을 지낸 여위충(渭忠)이고, 차자는 고려 판도판서를 지낸 여위현(渭賢)이다. 중랑장공 후예는 대구 가창파로, 가창면 행정, 영천 일대에 세거하고 있으며, 판서공 후예는 성주파이다. 판서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한성윤 장령, 경상도 안렴을 지낸 여극인(克禋)이고, 차자는 공조판서를 지낸 여극회(克誨)이다.[1]
공조판서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고성현령을 지낸 여자방(子方)이고, 차자는 의성현령을 지낸 여자용(子庸)이다. 고성현령공의 후예는 성주파로 성주군 내에 주로 살고 있으며, 의성현령의 후예는 김산파로, 김천시 구성면과, 성주군 수륜면, 대구, 청도 등지에 분거하고 있다.[1]
3. 1. 2. 성주 가천파 (星州伽川派)
여자용의 장남 후손 김산 기동파(金山耆洞派)는 여자용의 증손 여우문(呂遇文)의 후손이다. 김산파조(金山派祖)는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지낸 여자용(子庸)이다.여자용의 아들 여집(緝)은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냈고, 여자용의 손자(孫子)이자 여집(緝)의 아들인 여윤성(允成)은 충무대호군(忠武大護軍)을 지냈으며, 김산기동파조(金山耆洞派祖)이다.
여윤성(允成)의 둘째 아들 여희망(希望)의 아들 여종호(從濩)가 성주에서 김산기동(金山耆洞)에 입향(入鄕)했다. 여종호(從濩)의 아들은 여응구(應龜)이고, 여응구(應龜)의 아들이자 여종호(從濩)의 손자인 여대로(大老)는 자가 성우(聖遇)이고, 호가 감호(鑑湖)이다. 감호공(鑑湖公) 여대로(大老)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가 여희좌(姬佐)로 김산백파(金山伯派)이고, 둘째가 임진왜란 때 부친 감호공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순사(殉死)한 여희우(姬佑)로 김산중파(金山仲派)이며, 셋째가 진사(進士)와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했으나 관직(官職)을 멀리하여 부인수직(夫人壽職)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된 여희필(姬弼)로 김산계파(金山季派)이다.
여집(緝)의 넷째 아들 통사랑(通仕郞) 여구성(九成)의 후예는 계항파(鷄項派)이다. 여구성(九成)의 장자(長子) 여희문(希文)의 후예는 성주군 수륜면에, 차자(次子) 여희보(希甫)의 후예는 청도에 취락(聚落)을 이루고 살고 있다. 여자용(子庸)의 둘째 아들인 통사랑(通仕郞)을 지낸 여희(熹)의 후예는 대구, 부동, 경산시내에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살고 있다.[1]
3. 1. 3. 관북파 (關北派)
呂雄|여웅중국어은 여자방의 셋째 아들로, 그 후손들은 함경도 길주 등지에 분거하였다.[1]3. 2. 가창파 (嘉昌派)
가창파(嘉昌派)는 중시조 여양유의 장남 여위충(呂渭忠)의 후손이다.[1] 여위충은 고려 시대에 중랑장을 역임했다.[1] 후손들이 대구 가창면 행정리, 영천 일대에 세거하였다.[1] 가창파는 중랑장공 후예들의 세거지가 가창이기에 가창파라 칭한다. 그러나 가창면 행정리(杏亭里)에 주로 세거 하였기에 세거분류상 행정파(杏亭派)가 된다.[1] 중랑장공의 손자인 순(純)이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는 처사공 문청(文淸)으로 행정백파(杏亭伯派)[1], 차자는 진사공 문명(文明)으로 행정중파(杏亭仲派)[2], 삼자는 시정공 문승(文承)으로 행정계파(杏亭季派)[3]로 분파된다.4. 주요 인물
| 이름 | 과거 급제 이력 |
|---|---|
| 여대로 | 조선 선조 때 문과 급제, 학자 |
| 여응구 | 조선 선조 때 문과 급제 |
| 여영징 | 조선 효종 때 문과 급제 |
| 여수징 | 조선 현종 때 문과 급제 |
| 여명거 | 숙종 28년(1702) 식년시 병과 |
| 여홍간 | 영조 44년(1768) 식년시 병과 |
| 여명진 | 숙종 43년(1717) 식년시 병과 |
| 여효증 | 인조 13년(1635) 증광시 병과 |
| 여성거 | 숙종 9년(1683) 증광시 병과 |
| 여홍호 | 영조 20년(1744) 식년시 을과 |
5. 여씨 향약
북송 섬서성 남전현에 살던 여씨 사형제(여대중, 여대방, 여대약, 여대림)가 만든 향약을 남전향약이라 불렀다. 남송의 주희는 이를 보고 여씨향약이라 이름지었다. 조선 중종 13년(1518)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여씨향약의 언해본을 냈는데, 그 책 이름을 주자증손여씨향약이라 했다.[1]
남전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가지 강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촌향약은 남전향약의 네 가지 강목에 가정언어(家庭言語)를 줄인 말인 정어상수(庭語相守)를 추가하여 다섯 가지 강목으로 이루어져 있다.[1]
5. 1. 남전향약(藍田鄕約)
북송 시대 섬서성 남전현에 살던 여씨 사형제(여대중, 여대방, 여대약, 여대림)가 만든 향약이다. 이들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가지 강목을 정하고 이를 남전향약이라 불렀다.[1]남송 때 주희(주회암)는 남전향약을 보고 기뻐하며 여씨향약(鄕約)이라 이름지었다. 조선 중종 13년(1518)에는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여씨향약의 언해본을 냈는데, 그 책 이름을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라 했다.[1]
5. 2. 수촌향약(樹村鄕約)
수촌향약(樹村鄕約)은 남전향약(여씨향약)의 네 가지 강목(綱目)에 '''정어상수(庭語相守)'''를 추가한 것으로, 다섯 가지 강목으로 이루어져 있다.[1]'''정어상수(庭語相守)'''
정어(庭語)란 가정언어(家庭言語)를 줄인 말이다.[1] 가정을 지키려면 가정언어를 지켜야 하며, 가정언어를 지키려면 가정언어와 남남언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1] 가정언어와 남남언어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남들에게 가정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1]
남남 사이에서 늙은이를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거나, 남남 사이인 사람을 보고 아저씨, 아주머니, 아줌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1] 또한 남남 사이에서 상대를 형님, 언니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1]
남들에게 가정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인데, 말을 함부로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량배가 된다.[1] 학교에서는 가정언어와 남남언어를 가르치지 않으니, 집안에서 힘써 가르쳐 주어야 한다.[1] 가정언어는 어릴 때부터 익혀야 하며, 자신을 지키려면 가정언어를 지켜야 한다.[1]
6. 성산 여씨 관련 지명
성주는 본래 6가야국(六伽倻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을 신라가 멸망시키고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치고 치소(治所)를 지금의 성주읍에 두었다.[1]
고려 시대에는 940년(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가 981년(경종 6) 광평군(廣平郡)으로 낮췄으나, 995년(성종 14) 대주(垈州)라 칭하여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단련사(團練使)를 폐하고 1018년(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로 높여 1군 14현을 관할하였다. 1308년(충렬왕 21)에는 성주목(星州牧)으로 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에는 경산부(京山府)로 낮췄다.[1]
조선 시대는 태종 때 성주목으로 다시 높였고, 1895년(고종 32) 5월 성주군으로 고치고 군수를 두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곡ㆍ덕곡ㆍ노곡ㆍ다산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이 현풍군으로, 증산면이 금릉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군ㆍ면 통폐합 때 신곡면(新谷面)을 김천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28개 면을 12개 면으로 폐합하였다.[1]
1934년 2월 지사면과 청파면을 통합하여 수륜면으로, 용두면과 성암면을 통합하여 용암면으로 고쳤다. 1979년 성주면이 성주읍으로 승격되었다.[1]
2004년 현재 성주읍ㆍ선남면ㆍ용암면ㆍ수륜면ㆍ가천면ㆍ금수면ㆍ대가면ㆍ벽진면ㆍ초전면ㆍ월항면 등 1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1]
7. 인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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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杏亭伯派(대구행정백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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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杏亭仲派(대구행정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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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杏亭季派(대구행정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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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進士公伯派(성주진사공백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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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進士公仲派(성주진사공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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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進士公季派(성주진사공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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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樹村伯派(성주수촌백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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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樹村仲派(성주수촌중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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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樹村叔派(성주수촌숙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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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樹村季派(성주수촌계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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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亭派(구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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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北派(관북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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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派(김산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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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伯派(김산백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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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仲派(김산중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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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季派(김산계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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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項派(계항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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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道派(청도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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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洞派(부동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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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山派(경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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