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염전
1. 개요
소래염전은 일제강점기부터 1996년 폐염될 때까지 운영되었던 염전으로, 현재는 소래습지생태공원과 시흥갯골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1907년 일본은 주안에 천일염 시험 염전을 건설했으며, 이후 소래 일대에 대규모 염전을 조성했다. 해방 후 소금 자급자족에 기여했으나, 중국산 천일염 수입 등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소래염전 부지는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고, 일부는 골프장으로 개발되었다. 소금창고와 가시렁차 등 소래염전의 유산은 보존 및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 촬영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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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의 지리 -
시화호
시화호는 대부도와 오이도를 잇는 방조제로 조성된 인공 호수이며, 담수호에서 해수호로 변경되어 조력 발전소 건설 등을 통해 수질 개선을 도모하고 생태계 보고이자 친수공원으로 변화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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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도
오이도는 시화지구 개발로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섬 명칭을 유지하며, 신석기 시대 유적과 해양단지를 중심으로 한 음식점, 빨간등대, 박물관 등 관광 명소가 있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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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기천
승기천은 인천광역시를 흐르는 하천으로, 승학산 북쪽 승기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과거 수봉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렀으나 현재는 연수구와 남동공단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유입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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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이고개
원통이고개는 국도 제46호선이 지나는 고개로, 김안로의 탄식 또는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탄식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개통으로 교통 편의가 증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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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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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바 칸국은 16세기 초에 건국되어 1920년까지 존속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 칸국으로, 초기 혼란과 수도 이전,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 시기를 거쳐 소비에트 혁명으로 붕괴되었으며, 농업 기반 경제와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2. 역사적 배경
인천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자염(煮鹽)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개항 이후 소금 소비가 늘고 일본과 청나라에서 소금이 수입되면서, 대한제국은 1899년 인천부 주안에 제염시험장을 설치하여 전통 제염법을 개량하려 했으나 1901년 이후 생산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일본은 자국 내 소금 생산 비용을 줄이고 군수산업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조선에서의 천일염 생산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본의 소금은 끓여서 만드는 자염(전오염)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낮은 천일염과 경쟁할 수 없었다. 통감부는 시험 염전지로 목포항 앞 달리도 등을 검토했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결국 인천 주안이 선정되었다. 1907년 주안에 대만식 천일염전이 준공되었고, 정미칠적이 이곳을 시찰하기도 했다.
2.1. 전통 제염 방식 (자염)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제염 방식은 자염법(煮鹽法)이었다. 썰물 때 갯벌을 갈고 말려 소금기를 농축한 개흙에 바닷물을 통과시켜 만든 함수(鹹水)를 끓여 소금을 생산하였다. 당시 경기도에서는 남양에서 가장 크게 소금을 생산하였고, 안산, 수원, 통진, 부평, 인천 등도 염전으로 이름났다.
1907년 인천 일대의 자염 생산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지명 | 소금가마 수 | 염전 면적 (정보) | 생산량 (근) |
|---|---|---|---|
| 부평군 모월곶면 | 44 | 21정 719보 | 2,011,260 |
| 부평군 석곶면 | 23 | 6정 9115보 | 664,226 |
| 인천군 주안면 | 10 | 2정 5228보 | 347,700 |
| 인천군 서면 | 4 | 2정 3317보 | 232,560 |
| 인천군 부내면 | 5 | 3정 2028보 | 318,240 |
| 인천군 남촌면 | 24 | 19정 717보 | 1,970,620 |
| 인천군 조동면 | 9 | 6정 9320보 | 660,960 |
| 인천군 신현면 | 2 | 5정 825보 | 61,200 |
| 계 | | 74정 1269보 | 6,266,766 |
당시 인천 지역의 소금 생산량은 한반도 전체 생산량의 2.3%에 불과했다. 생산된 소금은 주로 생산지에서 소비하거나 서울 및 경기 지역으로 유통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2. 개항 이후의 변화
개항 이후 조선의 국외 무역이 증가하면서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소금에 절이는 김치나 해산물의 수요가 늘면서 소금 소비가 늘어났다. 더불어 일본과 청나라에서 수입되는 소금이 크게 증가하면서, 주로 자가 소비를 위한 소규모의 염전 운영은 줄어들고 제염업자가 대량으로 염전을 생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한제국 농상공부는 1899년에 인천부 주안 일대에 20정보 규모로 제염시험장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에 이곳에서 기수(技手) 변국선(卞國璇)이 소금을 처음으로 생산하였다. 시험장은 철판으로 만든 소금가마와 서구의 기계를 도입하여 전통적인 제염법을 획기적으로 개량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이곳에는 풍우계(風雨計), 섭씨 온도계, 지중(地中) 온도계, 풍력전기반(風力電氣盤) 등 과학적인 기계를 설비하고, 연료로 석탄을 사용함으로써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1901년 8월 30일 이후 이곳의 소금 생산 기록은 관측되지 않으며, 시험장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의 주안염전이 이곳에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2.3. 일제의 천일염 도입 시도
일본은 자국 내 소금 생산 비용을 줄이고 군수산업에 필요한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조선에서의 천일염 생산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본의 소금은 끓여서 만드는 자염(전오염)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낮은 천일염과 경쟁할 수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는 것이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통감부를 통해 시험 염전을 만들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목포항 앞의 달리도와 화원반도 사이가 후보지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염업이 가장 활발했던 목포 지역에 천일염전이 설치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대한제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시험지로 부산의 명지도가 검토되다가, 최종적으로 한성부와 가까운 인천 주안이 결정되었다.
제염기술자 이시카와 다케요시(石川武吉일본어, 1895~?)의 《조선염업사료》에 따르면, 타이완 총독부 전매국 소속 기수 야마다 나오지로(山田直次郞일본어)와 미키 케요시로(三木毛吉郞일본어)가 1906년에 조선 전역의 간석지를 실지 조사하여 인천 주안을 시험지로 확정하였다. 1907년 9월에는 대만식 천일염전(1정보)이 주안에 준공되었다. 9월 23일에는 정미칠적 중 송병준,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가 경인선 열차를 타고 주안천일제염시험장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천일염은 경상남도 동래부 석남면(石南面) 용호리에 설치된 일본식 전오염 시험장에서 생산한 소금보다 품질과 생산 비용 면에서 더 우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두 곳의 염업시험장은 1909년 2월 폐지되었다.
3. 소래염전의 건설과 운영
조선총독부는 주안 염업시험장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반도 전역에 천일염전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소래염전은 이 계획의 제4기에 해당하는 염전으로, 1934년 5월 26일에 착공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순차적으로 완공되었다. 건설 비용은 당시 돈으로 584500KRW이었다.
소래염전 건설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산둥 성 출신 염전 기술자들로, 이전 평안남도 광량만염전 건설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소래염전 건설에 투입되었다.
3.1. 조선총독부의 염전 건설 계획
총독부는 염업시험장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한반도 전역에 네 차례에 걸쳐 천일염전을 건설하였다. 이 중 인천 지역에는 1~2기에 주안만을 매립하여 주안염전을, 3기에는 승기천 하구를 매립하여 남동염전을 건설하였다. 간토 대지진(1923년)으로 염전 건설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1933년에 제4기 사업이 재개되었다.
제4기 염전은 제방 건설 비용 절감 및 자연재해 방지를 위해 염전을 저수지 수면보다 높게 짓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이 때문에 천일염은 바닷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생산하였다.
3.2. 소래염전의 입지 조건
소래염전은 염전을 짓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소래염전 일대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던 곳이었다. 넓은 조간대가 평탄하게 펼쳐져 있었고, 갯벌의 토질은 점토와 모래가 절반씩 섞여 있어 염전 바닥을 다지고 물을 증발시키기에 좋았다. 조석 간만의 차가 10.86m로 매우 커 수분을 증발시킬 시간이 충분했으며, 유입되는 하천도 소하천뿐이라 바닷물의 염도도 낮지 않았다.
또한, 소래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은 수인선 철도를 통해 인천항으로 운송하기 쉬웠다. 인천항을 통해 국내 수도권은 물론, 일본과 만주로 소금을 수출할 수 있었다.
3.3. 염전 운영 방식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는 주안, 남동, 군자, 소래염전을 관리하였다. 주안출장소는 산하 파출소를 통해 각 염전을 관리했는데, 남동파출소, 군자파출소, 소래파출소가 각각 해당 염전을 담당했고, 주안염전은 출장소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출장소는 서무계, 사업계, 토목계로 구성되었다. 서무계는 회계, 소금 보관 및 수송, 종업원 복지 등을 담당했고, 사업계는 염부(鹽夫) 고용, 소금 생산 감독, 염전 내부 수리 등을 담당했으며, 토목계는 염전 측량 및 설계, 제방·수문·소금창고·관사 등의 수리를 담당했다. 1943년 소래염전이 조선제염공업주식회사에 대여되면서 소래파출소는 해체되었다.
3.4. 해방 이후의 변화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이 일어나자, 38선 이남 지역에 남은 염전은 주안, 남동, 군자, 소래염전이 거의 전부였으며 이 염전들은 연간 도합 100000ton가량의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금 부족 현상이 심해지자 정부는 매년 100000ton에서 150000ton의 소금을 수입하다가, 염 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민간의 염전 운영을 허용하여 황해와 남해안의 간석지에 많은 민영 염전이 건설되었다. 그 결과 1955년에 처음으로 소금 자급자족에 성공하였고, 매년 700000ton의 소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안에서 한 해에 소비할 수 있는 소금이 300000ton에 불과하여 1957년부터 소금이 도리어 과잉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전매청의 소금 매수에도 재정상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1961년 10월 7일에 대한염업조합을 주체로 한국염업주식회사(韓國鹽業株式會社)가 발족하였고, 1962년 1월 1일부터 염관리임시조치법이 시행되어 전매청의 소금 전매제를 폐지하였다. 1963년 10월 23일, 염관리법과 대한염업주식회사법이 공포되어, 기존에 전매청에서 맡았던 국유 염전 운영을 새로 설립되는 국영 기업체인 대한염업주식회사(大韓鹽業株式會社)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1971년 7월 4일에 민영화된 뒤 1992년 2월 29일에 주식회사 성담(成潭)으로 개칭되었다.
염업 민영화 이후에도 소래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양은 상당하였다. 1965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소금이 경기만에 있는 세 곳의 염전, 즉 남동, 군자, 소래염전에서 생산되었고, 1970년대에는 소래염전이 대한민국 국내 소금 수요의 30%를 담당할 정도였다. 1981년에는 전국에서 생산된 소금이 약 811000ton이었는데, 이 중 경기만의 세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이 61769ton이었고, 소래염전의 생산량은 20570ton이었다. 그러나 염부들의 인건비는 변하지 않은 가운데 소금값은 내려가고, 저렴한 중국산 천일염마저 수입되면서, 1996년 7월 31일을 끝으로 소래염전은 폐염(廢鹽)되었다.
4. 소래염전의 제염 과정
소래염전의 제염은 저수지, 증발지, 결정지를 거치는 일반적인 천일염 생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소래염전은 제4기 염전으로, 저수지보다 증발지가 높아 양수기를 사용해 바닷물을 끌어올렸다.
매년 10월 소금 생산이 마무리될 즈음, 전매국은 염부위안회(鹽夫慰安會)와 염전제(鹽田祭)를 열어 염부들을 위로하였다. 주안염전의 염전제가 끝난 뒤 소래염전에서도 염전제가 열렸는데, 이 행사는 '소금제'라는 이름으로 1997년까지 매년 개최되었다. 시흥시는 2019년 5월 12일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2019 시흥염전 소금제'를 열어 이를 복원하였다.
4.1. 증발 과정
바닷물은 저수지에서 제1, 2증발지를 거치며 염도가 점차 높아진다. 제2증발지에는 함수류(해주)라는 웅덩이를 두어 비상시에 염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함수류의 함수는 수차나 양수기를 이용해 제2증발지로 옮겼다.
4.2. 결정 과정
염도 15-16도의 함수는 결정지에서 증발 과정을 거쳐 염도가 25도가 되면 소금이 결정되기 시작했다. 이때 소금 결정을 고무래로 걷어냈다. 결정지 바닥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토판이었으나, 이후 소래염전 전체 면적의 약 20%에 깨진 옹기 조각(깸파리)을 깔았다. 1983년부터는 타일을 깔아 깸파리판과 타일판이 함께 사용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5정보(약 15,000평)당 하나씩 있는 소금창고에 보관되었다. 처음에는 목도채로 소금을 옮겼으나, 나중에는 인력거를 사용하였다. 그 후 소금은 가시렁차로 소래역의 창고까지 운송되었다.
4.3. 염부들의 노동 환경
일제 강점기에는 소금 생산과 관련된 직책으로 염전감독, 염부장(鹽夫長), 반장, 염부(상용직, 임시직) 등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 소속의 염전감독은 소래염전을 포함한 인천 등지의 염전 네 곳에서 100~200정보마다 한 명씩 배치되었고, 염부장은 20정보마다 한 명씩 배치되어 염부들을 지휘하며 염전감독을 보조했다.鹽夫長중국어은 염부들을 지휘하는 등 염전감독을 도왔다. 1942년 통계에 따르면, 소래염전의 상용직 염부 68,266명에게는 0.995JPY, 임시직 염부 23,951명에게는 0.9엔이 지급되었다. 반장에게는 쌀과 광목도 배급되었고, 운동화와 담배를 주기도 하였다.
| 종류 | 염전 구분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상순 | 7월 하순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1월 | 2월 |
|---|---|---|---|---|---|---|---|---|---|---|---|---|---|---|
| 상용직 | 유하식(流下式) | 6 | 6 | 6 | 6 | 6 | 6 | 6 | 6 | 6 | 6 | 6 | 6 | 6 |
| 급상식(汲上式) | 7 | 7 | 7 | 7 | 7 | 7 | 7 | 7 | 7 | 7 | 7 | 7 | 7 | |
| 임시직 | 유하식(流下式) | 3 | 3 | 3 | 3 | 3 | 2 | 2 | 1 | 0 | 0 | 0 | 0 | 0 |
| 급상식(汲上式) | ||||||||||||||
| 계 || 유하식(流下式) || 9 || 9 || 9 || 9 || 9 || 8 || 8 || 7 || 6 || 6 || 6 || 6 || 6 | ||||||||||||||
| | 10 || 10 || 10 || 10 || 10 || 9 || 9 || 8 || 7 || 7 || 7 || 7 || 7 |
해방 이후에도 현장 직책은 비슷한 체계로 유지되었다. 염부들은 소래염전을 논현동 쪽의 백구(百區), 월곶동 쪽의 이백구(二百區), 장곡동 쪽의 삼백구(三百區), 방산동 쪽의 사백구(四百區), 포동 쪽의 오백구(五百區) 등 다섯 구역으로 나누었고, 각 구역은 감독이 맡았다. 감독 아래에는 20정보를 맡는 염부장이 있었고, 염부장 아래에는 반장이 있었다. 염전에서 10여 년쯤 일하면 반장이 될 수 있었다. 반장은 10정보를 맡았고, 반장 아래에는 부반장 2명이 있었는데, 실질적으로 반장과 두 부반장이 5정보씩 나누어 담당하였다. 부반장 아래에는 증발수(扒土중국어)를 두어 함수를 대고 염도를 조절하였다. 염부는 증발수 외에도 별다른 보직이 없는 보조수와, 인력이 부족할 때 쓰는 임시직인 작업수가 있었다. 염부는 대개 남성이었지만, 1980년대 들어 남성 인력이 부족해지자 여성 인력도 썼다. 민영화 이후 염부들의 급여는 줄어들었는데, 1990년대의 월급을 보면 감독이 1, 염부장이 800, 반장이 700, 부반장, 증발수, 보조수가 600, 작업수가 그 미만을 지급받았다. 이는 당시로서도 적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염부들은 일과 후에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잇기도 하였고, 소금을 만들 수 없는 겨울에는 절약하며 지냈다.
5. 소래염전 폐쇄 이후
폐염 이후 소래염전 부지는 소래습지생태공원, 시흥갯골생태공원 등으로 활용되거나, 일부는 성담 소유로 솔트베이 골프클럽이 개장되는 등 개발되기도 하고, 나머지는 빈 땅으로 남아 있다.
5.1. 생태공원 조성
폐염 이후 방치되던 소래염전 부지 중 일부는 공원화되고, 일부는 개발되었으며, 나머지는 빈 땅으로 남아 있다. 1999년 6월 1일, 인천광역시에서는 남동구 논현동 일대의 소래염전 부지를 활용한 소래습지생태공원을 개장하였고, 2008년 7월 18일에는 공원 안에 생태전시관을 열었다. 이 공원은 몇 차례 확장을 거쳐 2009년 7월 17일에 1561000m2 규모로 완전 개장되었다. 시흥시에서는 장곡동 일대에 2000년대 초반부터 시흥갯골생태공원을 조성하여 운영하였으며, 2006년부터 매년 갯골축제를 열었다. 2008년 5월에는 시흥갯골생태공원의 로고와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2009년 5월에 공원 확장 공사가 시작되어 2014년에 완료되었다. 시흥갯골생태공원을 관통하는 내만형 갯벌은 2012년 2월 17일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5.2. 개발 시도 및 논란
소래염전 부지는 여전히 [http://www.sungdam.kr/ 성담]에서 보유하고 있다. 성담은 2004년에 소래습지생태공원 북쪽 부지에 골프장 건설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었고, 2006년부터 시흥갯골생태공원 남쪽 부지에 골프장 조성 계획을 세웠다. 지역 환경단체는 환경 파괴를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2014년 2월 10일 솔트베이 골프클럽이 개장되었다.
5.3. 소금창고 보존 문제
소래염전에는 소금을 보관하던 소금창고가 인천광역시와 시흥시 양쪽에 여러 동 남아 있었다. 인천광역시 쪽에는 소래습지생태공원 안에 소금창고를 보수하여 만든 자연학습장이 있고, 2020년 현재 1930년대에 건립된 소금창고 두 동과 원래 있던 소금창고의 자재를 사용하여 축소 제작한 두 동, 그리고 완전히 새로 지은 것이 공존한다.
시흥시 쪽에는 2006년 5월 당시 심하게 훼손된 26동, 일부 훼손된 12동, 양호한 2동 등 총 40동의 소금창고가 갯골 양옆으로 열을 지어 남아 있었다. 이 창고들은 모두 1934년에서 1937년 사이에 지어졌다. 문화재청은 소래염전이 사라진 남동염전과 군자염전을 대신하여 해방 이전의 염전을 대표할 수 있으며, 시흥갯골생태공원과 염전 운영 당시의 경관을 잘 보여주는 소금창고 일대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고, 그 밖의 시설과 내만갯골은 추후 등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등재 심의를 사흘 앞둔 2007년 6월 4일, 주식회사 성담은 소금창고 40동 중 38동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성담 측은 소금창고가 방치되어 우범지대로 전락하고 붕괴할 우려가 있어 철거했다고 주장했지만, 시민단체는 소래염전 부지에 골프장(현 솔트베이 골프클럽) 건설을 계획 중이던 성담이 사업 추진을 쉽게 하기 위해 철거를 강행했다고 보았다.
5.4. 가시렁차
수인선 소래역에는 염업선(鹽業線)이라는 전용선로가 있었다. 이전 명칭은 전매선(專賣線)이었으나, 1964년 8월 20일에 염업선으로 개칭하였다. 이 선로에서는 ‘가시렁차’라고 불린 가솔린 기관차가 소금을 싣는 화차를 한 번에 스무 량 정도 끌었다. 가시렁차는 ‘가소링차(가솔린차)’가 와전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시렁차 한 량이 소래염전 폐염 이후 시흥시 포동 67-5에 있던 차고지에 보관되다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주식회사 성담이 염전 부지에 개발한 솔트베이 골프클럽에 전시되었고, 2019년 9월 19일부터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전시되고 있다. 가시렁차는 소래역과 소래염전 사이의 갯골을 소염교(蘇鹽橋)라는 다리로 건넜는데, 소염교는 폐염 이후 무너져 2006년에 콘크리트 다리로 새로 지어졌다.
6. 대중 문화 속 소래염전
소래염전은 예전부터 사진 촬영 명소로 알려졌다. 염전이 가동되고 있었을 때에는 염부들이 일하는 풍경과 해안가에 일렬로 선 소금창고가 사진 촬영의 대상이었으며, 염전이 운영을 멈춘 지금도 소래염전은 결혼 사진을 찍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소금창고를 배경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아내는 염생습지와 내만갯골도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된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의 경우 갈대숲을 배경으로 여러 대의 풍차가 선 모습이 이국적 풍경으로 사람들을 모은다.
소래염전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도 있다. 1982년 이래 인천광역시에서 생활한 시인 이가림(1943~)은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이라는 시에서 흔적만 남고 관광객의 가벼운 관광지로 변모한 소래염전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소래염전의 역사까지도 노래하였다. 인천 태생인 시조시인 이광녕(1946~)은 소래염전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소래염전〉을 지었고, 그 시비(詩碑)가 2017년 7월에 소래습지생태공원에 건립되었다. 한편, 영화 《엄마없는 하늘아래》(1977년)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년)이 폐염 이전의 소래염전에서 촬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