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말당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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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말당초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기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과 대운하 건설 등으로 민심을 잃고 멸망의 길을 걸었다. 수 양제의 실정으로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하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할거하며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당나라는 이연과 이세민 부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군벌 간의 쟁패를 거쳐 중국을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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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말당초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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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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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613년 – 628년 |
장소 | 중국 |
결과 | 당나라의 중국 통일 |
교전 세력1 | 당나라 |
교전 세력2 | 수나라 (618년까지) |
교전 세력3 | 진(秦) 양(涼) 정양(定楊) 정(鄭) 하(夏) 한동(漢東) 양(梁) 고구려 동돌궐 |
사상자 | 최소 1백만 명 사망 |
명칭 | |
중국어 간체 | 唐朝开国战争 |
병음 | Tángcháo kāiguó zhànzhēng |
한국어 | 당조 개국 전쟁 |
주요 전투 |
2. 배경: 수나라의 쇠퇴와 민란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후 20년간 평화(개황의 치)를 누렸다. 내부적으로 안정된 수나라는 동돌궐과 고구려와 충돌했다. 돌궐의 야미 카간(계민가한)은 수나라에 복속했지만, 고구려는 598년 수 문제의 원정을 격퇴시키고(제1차 여수전쟁) 계속 복속을 거부했다.[10]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과 대운하 건설 등의 정책들은 결과적으로 수나라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2. 1. 수 양제의 실정
수나라 수 양제는 610년 고구려 영양왕이 입조를 거부하자 재원정을 결심했다.[10] 하지만 고구려 원정은 병참 준비 단계부터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인력을 동원했기에 그에 필요한 군수품의 양도 막대했고, 함대 건조 역시 큰 부담이었다. 오늘날의 베이징 근교인 탁군(涿郡)에 병참본부를 두었는데, 전국의 인력과 물자를 탁군으로 징발하여 농업 경작 주기가 어지럽혀지고, 그 물자를 탁군까지 운반하는 인부들 가운데 사망자가 빈발했다. 그 결과 611년부터 화북 지역에서 징병에 거부하는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때 민란 지도자는 왕박(王薄), 유패도(劉霸道) 등이었다. 양제는 이 민란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방 민병대로는 민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10]양제는 612년 요하를 건너 그해 봄 고구려 영토에 진입했다(제2차 여수전쟁).[10] 양제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요동의 중심거점인 요동성을 공략하는 한편,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별동대를 맡겨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앞에서 수군대총관 내호아의 해군과 합류, 평양성을 직접 타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양제는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우중문 별동대는 살수 전투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에게 참패를 당했다. 612년 가을, 양제는 원정을 중단하고 후퇴했다. 이 원정에서 수나라군 30만 명이 사망했다.[10]
양제는 613년 재차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다(제3차 여수전쟁).[10] 각지의 민란은 더 많아지고 더욱 심각해졌다. 이번에도 양제는 몸소 요동성을 공성하고, 우문술과 양의신에게 별동대를 맡겨 평양을 타격하게 했다. 그런데 후방에서 병참을 담당하던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성을 공격했다(양현감의 난). 이 소식을 들은 양제는 군을 물리고 우문술과 굴돌통을 앞세워 보내 양현감의 난을 진압했다. 양제는 양현감의 난에 연루되거나 그런 의혹이 있는 자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했지만 그래도 반란의 기미는 잦아들지 않았다.[10]
그래도 양제는 614년 다시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다(제4차 여수전쟁).[10] 내호아가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의 진격로가 열리는 등 그나마 성과를 거둔 원정이었으나, 고구려 측에서 이전 전쟁 때 고구려에 항복해온 양현감의 동료 곡사정을 송환하면서 형식적으로 항복했다. 이에 양제는 군사를 물리고 고구려에 조공 입조를 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양제는 다시 침공을 계획했으나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10]
615년 가을 양제가 황후 소씨와 함께 북방을 순행하고 있던 와중 야미 카간의 아들 시비 카간(시필가한)이 안문군을 기습했다.[8] 시비 카간의 아내 의안공주가 몰래 연통을 띄어 이 소식을 알게 된 순행단은 오늘날의 산서성 대현의 안문성으로 피신했다.[8][9] 우세기가 양제에게 병사들에게 고구려 원정 포기를 약속하여 사기를 올리라고 진언했다. 양제가 그에 따르자 공성이 벌어지던 안문군으로 지원군들이 몰려왔다. 한편 소위가 자기 누이인 황후 소씨에게 의안공주에게 도움을 청하라 일렀고 황후가 그에 따라 의안공주가 남편 시비 카간에게 북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보내게 했다. 이 소식과 더불어 중국군이 증원된 형세를 본 시비 카간은 공성을 그만두고 후퇴했다. 양제는 이후 소위와 우문술의 말을 듣고 병사들에게 했던 약속을 저버려 병사들이 크게 억울해했다.[10]
2. 2. 전국적인 민란 발생
611년, 중국 북부에서 징집을 거부한 사람들이 왕박과 유패도 등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 양제는 처음에는 이러한 반란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지방 정부의 군대는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4]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강행했고, 농민 반란은 더욱 빈번하고 심각해졌다. 613년, 수나라 동쪽 수도 낙양 근처의 보급을 담당하던 북중국 장군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했다. 수 양제는 양현감의 추종자이거나 추종자로 의심되는 자들에 대해 가혹한 보복을 가했지만, 그러한 조치는 추가 반란을 막지 못했다.
616년 가을, 수 양제는 장안(長安)으로 돌아가지도, 낙양(洛陽)에 머물지도 않고 강도(江都, 현재의 양저우, 장쑤성)로 갔다. 낙양을 떠나면서 낙양 근처의 반란군은 양현감(楊玄感)의 전략가였던 이밀의 지도 아래 통합되었고, 그는 위공(魏公)으로 선포되었으며 북중국 전역의 대부분의 반란 지도자들에게 사실상 차기 황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밀은 낙양을 점령하지 못했고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한편, 우치이천은 황하 북쪽의 반란군을 격멸하려 시도했지만, 다소의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와 재상 우시지는 우치이천의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승진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소환했고, 이로 인해 황하 북쪽의 반란 활동은 두건덕의 지도 하에 다시 활발해지고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617년, 여러 반란 지도자들이 상당한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주요 반란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지도자 | 출신 | 점령 지역 | 칭호 |
---|---|---|---|
두복위 | 농민 | 현재의 남부 안후이성 | |
고개도 | 농민 | 현재의 극북부 허베이성 | |
양사도 | 농민 | 현재의 중앙 내몽골 자치구 | 양(梁) 황제 |
이궤 | 전 수나라 관리 | 현재의 중앙 및 서부 간쑤성 | 양왕(梁王) |
이연 | 전 수나라 관리 (수 양제의 사촌) | 현재의 중앙 산시성 | 양유를 황제로 옹립 |
임사홍 | 농민 | 현재의 장시성 및 광둥성 | 초(楚) 황제 |
유무주 | 농민 | 현재의 북부 산시성 | 정양가한(定楊可汗) |
라의 | 전 수나라 장군 | 현재의 베이징 | |
소선 | 전 수나라 관리, 서량 선제의 손자 | 현재의 후베이성, 후난성, 광시성 | 양(梁) 황제 |
설거 | 농민 | 현재의 동부 간쑤성 및 서부 산시성 | 서진패왕(西秦霸王) |
주찬 | 전 수나라 관리 | 현재의 남부 허난성 및 동남부 산시성 | 갈루루왕(伽羅樓王) → 초(楚) 황제 |
616년 가을, 화북 지역에서 민란이 자주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장안성이나 낙양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소성 양주시에 해당하는 강도로 갔다. 양제가 낙양을 떠나자, 양현감의 옛 동료였던 이밀이 낙양 근교에서 거병하여 위(魏)공을 자칭했다. 이밀은 한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여겨졌으나, 낙양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경쟁에서 밀려나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이연, 유무주, 양사도, 두건덕, 고개도 등 일부 반란 지도자들은 형식적으로 아사나 두오지시에게 복종하고 동돌궐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아사나 두오지시는 중국을 분열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3. 군벌들의 할거와 쟁패
양의신은 황하 이북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양제와 우세기는 양의신이 군대의 인망을 얻는 것을 두려워해 승진을 핑계로 양의신을 소환했다. 양의신이 소환된 뒤 황하 이북의 반란은 다시 악화되었으며, 여러 세력들이 이합집산 끝에 두건덕의 거대 세력으로 단일화된다.
617년에는 이미 많은 반란 세력들이 일어나 제국 곳곳을 장악하고 군벌로 행세했다.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양제는 친위대인 효과군(驍果軍)의 경호를 받으며 강도에 머물렀다. 양제는 왕세충을 낙양으로 보내 이밀의 공격을 막게 했다. 화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양제는 강소성 남경에 해당하는 단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효과군 병사들은 대부분 화북 출신이라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탈영하기 시작했고, 탈영하다 잡힌 병사들은 양제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효과군은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을 지도자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618년 봄, 양제는 효과군에게 살해당했다.[6] 우문화급은 양제의 조카 진(秦)왕 양호(楊浩)를 황제로 옹립하고 섭정이 되었다. 우문화급은 강도를 떠나 효과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자, 장안의 이연은 공제에게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되어 당 황조를 열었다. 낙양에서는 관료 7명이 양제의 다른 손자인 월(越)왕 양동(楊侗)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 때만 해도 많은 군현에서는 양동을 정통 황제로 여겼다. 낙양의 수나라 잔당과 낙양을 공격하던 이밀 모두 우문화급의 북상을 위협으로 여겨, 우문화급을 막기 위해 이밀이 양동을 황제로 인정하고 일시적으로 동맹했다. 그러나 이밀이 우문화급을 격퇴하자 왕세충이 동맹을 깨고 양동의 섭정이 되었다. 그해 말 왕세충은 이밀을 기습하여 군세를 무너뜨렸고(언사 전투), 이밀은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후 이밀은 당나라에서 벗어나 재기를 꾀하다 잡혀 죽었다.
618년 초, 설거가 죽고 그 아들 설인고가 세력을 이어받았다. 이연의 아들 진(秦)왕 이세민이 설인고를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설씨의 서진이 당나라에 흡수되었다. 한편 우문화급은 양호를 독살하고 황제를 자칭했다가 두건덕에게 패해 죽고, 두건덕은 황하 이북을 거의 통일했다. 하지만 북경 일대의 나예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나예는 당나라에 항복했다. 주찬은 자신의 영지에서 가혹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왕세충이 이끄는 수나라 잔당과 당나라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왕세충에게 항복했다.[7]
619년, 왕세충이 양동에게 선양받아 정(鄭)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수는 그 잔당 세력까지 모두 멸망했다.
3. 1. 주요 군벌 세력
617년, 수나라 각지에서 여러 반란 세력들이 군벌로 할거하였다. 주요 군벌은 다음과 같다.[6]
국명 | 존속년도 | 수도 | 초대 군주 | 마지막 군주 | 멸망 원인 |
---|---|---|---|---|---|
허 | 618년 ~ 619년, 1년 | 위 | 우문화급 | 우문화급 | 두건덕에게 패하여 처형 |
정 | 619년 ~ 621년, 2년 | 뤄양 | 왕세충 | 왕세충 | 이연에게 패배, 촉으로 유배되는 도중에 두고수덕에게 살해 |
하 | 618년 ~ 621년, 3년 | 러서우→밍저우 | 두건덕 | 두건덕 |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장안에서 처형 |
정양 | 617년 ~ 622년, 5년 | 마이 | 류우저우 | 류우저우 |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돌궐에 의해 살해 |
량 | 617년 ~ 628년, 11년 | 수팡 | 량사도 | 량사도 | 돌궐에 신종한 후 함께 패배, 종제 량뤄런이 살해 |
진 | 617년 ~ 618년, 1년 | 진청 | 설거 | 설인고 |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장안에서 처형 |
량 | 618년 ~ 619년, 1년 | 구장 | 이궤 | 이궤 | 안싱구이・안슈런에 의한 정변 |
량 | 618년 ~ 621년, 3년 | 장링 | 소선 | 소선 | 이연에게 항복, 분노를 사 처형 |
오 | 619년 ~ 621년, 2년 | 장두 | 이자통 | 이자통 | 두복위에 의한 공격 |
초 | 617년 ~ 622년, 5년 | 첸저우 | 임사홍 | 임사홍 | 병으로 사망 |
송 | 623년 ~ 624년, 1년 | 단양 | 辅公祏|보공석중국어 | 보공석 | 이효공에게 패하여 처형 |
초 | 615년 ~ 619년, 4년 | 관군 | 주찬 | 주찬 | 이연에게 항복[7] |
이들 중 이연, 유무주, 양사도, 두건덕, 고개도 등은 동돌궐에 형식적으로 신속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칭호 | 존속년도 | 근거지 | 군주 | 멸망 원인 |
---|---|---|---|---|
위공 | 617년 ~ 618년, 1년 | 금용성 | 이밀 | 왕세충에게 패배, 이연에게 항복 |
영락왕 | 617년 ~ 618년, 1년 | 유린 | 곽자화 | 당나라에 영토 헌납 |
오왕 | 617년 ~ 619년, 2년 | 러양 | 두복위 | 당나라에 영토 헌납 |
연왕 | 618년 ~ 624년, 6년 | 어양 | 고개도 | 장금수에 의한 정변, 자살 |
양왕 | 618년 ~ 621년, 3년 | 피링 | 심법흥 | 이자통에게 패배, 문인수안에게 항복하여 변심, 패배 후 강에 투신 자살 |
노왕 | 621년 ~ 623년, 2년 | 런청 | 서원랑 | 성을 포기하고 도망, 야인에게 살해 |
한동왕 | 622년 ~ 623년, 1년 | 밍저우 | 유흑척 | 제갈덕위에 체포되어 이건성에게 처형 |
3. 2. 군벌 간의 쟁패
616년 가을, 화북 지역에서 민란이 자주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장안성이나 낙양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소성 양주시에 해당하는 강도로 갔다. 양제가 낙양을 떠나자, 양현감의 옛 동료였던 이밀이 낙양 근교에서 거병하여 위(魏)공을 자칭했다. 이밀은 한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여겨졌으나, 낙양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경쟁에서 밀려나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617년에는 이미 많은 반란 세력들이 일어나 제국 곳곳을 장악하고 군벌로 행세했는데, 주요 군벌은 다음과 같다.
군벌 | 출신 | 점유 지역 | 칭호 |
---|---|---|---|
두복위 | 농민 | 오늘날의 안휘성 북부 | |
고개도 | 농민 | 오늘날의 화북성 북쪽 끝 | |
양사도 | 농민 | 오늘날의 내몽골 | 양(梁) 황제 |
이궤 | 수나라 관료 | 오늘날의 감숙성 중서부 | 양(涼)왕 |
이연 | 수나라 관료 (수 양제의 사촌) | 오늘날의 섬서성 중부 | 진왕 양유를 황제로 옹립 주장 |
임사홍 | 농민 | 오늘날의 강서성, 광동성 일대 | 초(楚) 황제 |
유무주 | 농민 | 오늘날의 산서성 일대 | 정양(定楊) 카간 |
나예 | 수나라 군인 | 오늘날의 북경 일대 | |
소선 | 수나라 관료 (후량 선제의 손자) | 오늘날의 호북성, 호남성, 광서성 일대 | 양(梁) 황제 |
설거 | 농민 | 오늘날의 감숙성 동부와 섬서성 서부 | 서진(西秦) 패왕 |
주찬 | 수나라 관료 | 호남성 남부와 섬서성 북부 일대 방랑 | 가루다왕(迦楼羅王)을 참칭했다가 이후 초 황제를 참칭 |
이연, 유무주, 양사도, 두건덕, 고개도 등은 시비 카간에게 형식적으로 신하를 자처하며 동돌궐의 지원을 받았다. 이 당시 시비 카간은 한족들의 분열이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617년 겨울, 이연은 장안성을 점령하고 양유를 황제로 즉위시켰으며, 양제는 태상황으로 물러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이연의 점령 지역에서만 통용되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여전히 양제가 수나라 황제로 인식되었다. 이연은 공제의 섭정이자 당(唐)왕이 되었다.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양제는 친위대인 효과군(驍果軍)의 경호를 받으며 강도에 머물렀다. 양제는 왕세충을 낙양으로 보내 이밀의 공격을 막게 했다. 화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양제는 강소성 남경에 해당하는 단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효과군 병사들은 대부분 화북 출신이라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탈영하기 시작했고, 탈영하다 잡힌 병사들은 양제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효과군은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을 지도자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618년 봄, 양제는 효과군에게 살해당했다. 우문화급은 양제의 조카 진(秦)왕 양호(楊浩)를 황제로 옹립하고 섭정이 되었다. 우문화급은 강도를 떠나 효과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자, 장안의 이연은 공제에게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되어 당 황조를 열었다. 낙양에서는 관료 7명이 양제의 다른 손자인 월(越)왕 양동(楊侗)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 때만 해도 많은 군현에서는 양동을 정통 황제로 여겼다. 낙양의 수나라 잔당과 낙양을 공격하던 이밀 모두 우문화급의 북상을 위협으로 여겨, 우문화급을 막기 위해 이밀이 양동을 황제로 인정하고 일시적으로 동맹했다. 그러나 이밀이 우문화급을 격퇴하자 왕세충이 동맹을 깨고 양동의 섭정이 되었다. 그해 말 왕세충은 이밀을 기습하여 군세를 무너뜨렸고(언사 전투), 이밀은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후 이밀은 당나라에서 벗어나 재기를 꾀하다 잡혀 죽었다.
618년 초, 설거가 죽고 그 아들 설인고가 세력을 이어받았다. 이연의 아들 진(秦)왕 이세민이 설인고를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설씨의 서진이 당나라에 흡수되었다. 한편 우문화급은 양호를 독살하고 황제를 자칭했다가 두건덕에게 패해 죽고, 두건덕은 황하 이북을 거의 통일했다. 하지만 북경 일대의 나예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나예는 당나라에 항복했다. 주찬은 자신의 영지에서 가혹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왕세충이 이끄는 수나라 잔당과 당나라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왕세충에게 항복했다.
619년, 왕세충이 양동에게 선양받아 정(鄭)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수는 그 잔당 세력까지 모두 멸망했다.
4. 당나라의 통일
당 황조 개창은 수 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진 직후였다. 장안성의 이연은 공제에게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되었다.[1] 낙양에서는 관료 7명이 양제의 다른 손자 월(越)왕 양동(楊侗)을 황제로 옹립했다.[1] 당시 많은 군현에서 양동을 정통 황제로 인식했다.[1]
낙양성 안의 수 황조 잔당과 낙양성을 공격하던 이밀 모두 우문화급의 북상을 위협적으로 여겼다.[1] 이밀이 양동을 황제로 인정하고 일시적으로 동맹하여 우문화급을 막으려 했다.[1] 하지만 이밀이 우문화급을 격퇴하자 왕세충이 동맹을 깨고 양동의 섭정이 되었다.[1] 그해 말 왕세충은 이밀을 기습해 그 군세를 와해시켰고(언사 전투), 이밀은 당 황조에 항복했다.[1] 이후 이밀은 당에서 이탈하여 재독립을 꾀하다 잡혀 죽었다.[1]
619년, 왕세충이 양동에게 선양받아 정(鄭) 황제를 참칭함으로써 수는 그 잔당 세력까지 모두 멸망했다.[1]
참조
[1]
서적
Negotiating masculinities in late imperial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웹사이트
大業十一年 八月癸酉
http://db1x.sinica.e[...]
Academia Sinica
2010-05-22
[3]
논문
Zizhi Tongjian
[4]
간행물
https://books.google[...]
[5]
문서
突厥による圧迫に屈して臣従し、突厥とともに討たれた国もある。
[6]
서적
新唐書
[7]
문서
その後、使者段確を殺害し、李世民の洛陽平定に伴い処刑
[8]
웹사이트
大業十一年 八月癸酉
http://db1x.sinica.e[...]
Academia Sinica
2010-05-22
[9]
논문
Zizhi Tongjian
[10]
간행물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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