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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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무의 겨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겪은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독일은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식량의 1/3을 수입에 의존했는데, 연합국의 해상 봉쇄와 슐리펜 계획 실패로 인한 장기전 돌입으로 식량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916-1917년 겨울에는 곡물 생산량 감소, 군대 징발, 비료 부족 등으로 인해 '순무의 겨울'이라 불리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으며, 이는 사회적 불안과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식량 부족은 독일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은 연합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전쟁에 참전한 군대에 식량이 우선적으로 보급되면서 민간인들은 기근을 겪어야 했다. 1916~1917년 겨울은 "순무의 겨울"로 불리며, 전쟁 중 독일에서 가장 혹독했던 시기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은 연합국의 봉쇄로 인해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었다. 특히 1916년~1917년 겨울은 "순무의 겨울"로 불릴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1]
2. 배경
나쁜 가을 날씨로 감자 수확량이 감소했고, 농산물 운송에도 차질이 생겼다. 독일의 대규모 병력 충원은 농업을 포함한 경제 전반의 노동력 부족을 야기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 감자 작황 부진으로 독일 국민들은 가축 사료로 사용되던 순무 (루타바가)를 대체 식량으로 섭취해야 했다.
1917년 겨울, 순무는 사실상 유일한 식량이 되었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특히 민간인과 부상병들의 피해가 컸다. 여성 사망률은 1916년에 전쟁 전보다 11.5%, 1917년에는 30% 증가했는데,[2] 이는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만연했던 영양실조와 질병 때문이었다. 순무의 겨울은 독일 내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전쟁의 압박 속에서 독일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지를 보여주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슐리펜 계획의 실패
1914년 여름, 독일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양면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한 후, 러시아에 집중하는 슐리펜 계획을 수립했다.[3] 그러나 독일의 기대와는 달리, 조제프 조프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9월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섰다.[4] 마른 전투 패배 이후, 독일은 양면 전쟁의 부담을 체감했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이 성공하여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5]
마른 전투 이후 몇 달 동안, 독일군은 바다로의 경주에서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양측은 북해에 먼저 도달하기 위해 서로의 측면을 돌파하려 했다. 10월부터 11월 말까지, 플랑드르의 이프르에서 거의 한 달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제1차 이프르 전투 이후, 독일군은 이미 241,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1914년 말,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는 참호전으로 바뀌었다.
독일은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식량의 1/3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16] 감자와 같이 자급 가능한 작물도 있었지만, 주식인 밀은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체의 29.5%, 사료용 보리는 46%를 수입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주요 수입국이었던 러시아와의 교역이 중단되었고, 이후 루마니아,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식량 수입이 더욱 어려워졌다.[16]
독일 정부와 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단기전을 예상했다.[17] 그러나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저항, 러시아군의 빠른 참전으로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고, 마른 전투 이후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와 인력 소모가 커졌다.[18]
2. 2. 연합국의 해상 봉쇄
1914년 8월 1일,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는데, 당시 식량의 1/3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16] 감자와 같이 자급 가능한 작물도 있었지만, 주식의 핵심이었던 밀은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체의 29.5%, 사료용 보리는 46%를 수입에 의존했다. 그 외에도 야채, 유제품, 계란, 가축용 사료 등 수입이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밀 수입 2위, 보리 수입 1위였던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후 루마니아 (밀 3위, 보리 5위)와 미국 (밀 1위, 보리 2위)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들 국가로부터의 수입이 중단되었다.[16]
독일 정부와 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러시아와 프랑스 양쪽을 적으로 삼더라도, 러시아군이 동원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프랑스군을 압도하면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17]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군의 저항, 영국군의 지원, 그리고 러시아군의 빠른 전투 태세 돌입으로 인해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고, 마른 전투 이후에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전쟁과 그에 따른 경제 관계 단절이 몇 개월 만에 끝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고, 막대한 물자와 인원을 전력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18]
영국과 독일이 서로 해상 봉쇄를 실시한 것도 식량 부족을 심화시켰다. 1915년 영국은 독일 선박이 중립국 국적을 위장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독일로 향하는 모든 선박을 나포하기로 결정하고 사실상의 해상 봉쇄를 시작했다. 이에 독일은 영국 제도에 접근하는 적국 선박을 경고 없이 격침하겠다고 선언하며 해상 봉쇄를 시도했고, 영국도 독일의 모든 항구로 향하는 항로 봉쇄를 명확히 했다. 이로 인해 독일 국외에 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 등 연합국 측에 넘어가게 되었고, 영국에 의한 독일 해상 봉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공방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발생한 루시타니아호 사건이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의 한 원인이 되는 등 독일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동서로 적에게 포위된 독일은 해상 교통로까지 차단당하게 되었다.[22]
2. 3. 독일의 식량 수입 의존도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은 당시 식량의 1/3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16] 감자처럼 자급 가능한 작물도 있었지만, 주식의 핵심이었던 밀은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체의 29.5%, 사료용 보리는 46%를 수입에 의존했다. 그 외에도 야채, 유제품, 계란, 가축용 사료 등도 일정 비율 수입에 의존했다. 그러나 대전에서 밀 수입 2위, 보리 수입 1위인 러시아와 개전했고, 이후 루마니아 (밀 3위, 보리 5위)나 미국 (밀 1위, 보리 2위)도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이들 국가로부터의 수입이 끊겼다.[16]
3. 전개 과정
1916-1917년 겨울, 지속적인 악천후로 곡물 생산량이 감소했고,[9] 감자 수확량 감소와 농업 노동력 부족이 겹쳤다.[1] 1914년에 시작된 연합국의 봉쇄는 중앙 열강의 식량 공급을 33% 감소시켰으며,[10] 군용 말 징발, 농업 노동력 징집, 질소의 폭발물 생산 전환으로 인한 비료 부족도 식량 부족의 원인이었다.[11]
개전 직후 인플레이션으로 가격이 폭등했고, 베를린에서는 감자 가루를 섞은 빵이나 물에 희석한 우유 등이 판매되기 시작했다.[19] 정부는 빵의 10%를 감자 가루로 만든 전시 빵(Kriegsbrot, K빵)을 표준으로 정했지만,[20] 감자 부족으로 빵의 품질은 계속 나빠졌다. 곡물, 겨, 감자, 귀리의 최고 가격을 공포했지만, 실제 가격은 각 자치 단체에 맡겨져 투기가 발생했다.[20] 농가들은 가격 통제가 없는 돼지 사료로 곡물과 감자를 사용했고, 이는 "돼지 학살"의 원인이 되었다.
1915년 봄, 독일에서는 많은 사료를 필요로 하는 돼지의 수를 줄이면 사료로 사용될 감자를 인간이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에 따라 Schweinemord|돼지 학살de이라 불리는 대규모 돼지 학살이 발생했다.[26] 그러나 확보된 감자는 많지 않았고, 육류 가공 문제로 대량의 돼지고기가 부패했다.
1915년 1월부터 빵을 시작으로 다양한 음식에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1916년 5월 22일, 전시 식량청이 설치되어 식량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려 했지만, 융커를 중심으로 한 농민과 노동자 양측의 반발을 샀다. 군대는 전시 식량청을 무시하고 징발을 반복하여 통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21] 결국 독일 국민들은 가축 사료로 쓰이던 순무(루타바가)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다.[1]
정부는 감자로 만든 빵(K-빵)을 보급하고, 감자 기근 발생 시 순무로 대체하려 했다.[23] 사람들은 배급에 의존하면서도 K-빵 등 대체 식량을 개발하고, 텃밭(클라인가르텐)을 가꾸거나, 부유층은 밀수(암시장)를 통해 식량을 구했다.[23] 1916년 감자 흉작으로 배급이 중단되자, 순무가 주식이 되었고, 까마귀나 참새 고기가 팔리기도 했다.[24] 스페인 독감까지 유행하면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24]
3. 1. 식량 부족의 심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은 연합국의 봉쇄로 인해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916~1917년 겨울은 "순무의 겨울"로 불릴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나쁜 날씨로 감자 수확량이 줄었고, 농업 노동력 부족도 문제였다.[1] 결국 독일 국민들은 가축 사료로 쓰이던 순무(루타바가)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다.
1917년 겨울,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2] 특히 여성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는데, 1916년에는 전쟁 전보다 11.5%, 1917년에는 30%나 증가했다.[2] 이는 독일 국민들이 겪었던 영양실조와 질병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순무의 겨울"은 독일 국민들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전쟁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1916-1917년 겨울, 지속적인 악천후로 곡물 생산량이 감소했다.[9] 1914년에 시작된 연합국의 봉쇄는 중앙 열강의 식량 공급을 33% 감소시켰다.[10] 군용 말 징발, 농업 노동력 징집, 질소의 폭발물 생산 전환으로 인한 비료 부족도 식량 부족의 원인이었다.[11]
독일 정부는 1916년 5월 22일 국가 식량청(Reichsernährungsamt)을 설립하고 식량 배급을 시작했다.[12] 1917년 여름, 하루 1560Cal의 식량이 배급되었고, 겨울에는 하루 1,000칼로리로 줄었다.[9] 그러나 건강한 성인 남성에게 필요한 3000Cal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는 곡물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감자로 구운 빵을 만들었지만, 1916년 감자 기근이 발생하면서 순무로 대체해야 했다.
개전 직후에는 인플레이션으로 가격이 폭등했다. 개전 2개월 후, 베를린에서 감자 가루를 섞은 빵이나 물에 희석한 우유 등이 판매되기 시작했다.[19] 1914년 10월 28일, 정부는 빵의 10%를 감자 가루로 만든 전시 빵(Kriegsbrot, K빵)을 표준으로 정했지만, 감자 부족으로 빵의 품질은 계속 나빠졌다.[20] 같은 날, 정부는 곡물, 겨, 감자, 귀리의 최고 가격을 공포했지만, 실제 가격은 각 자치 단체에 맡겨져 투기가 발생했다. 농가들은 가격 통제가 없는 돼지 사료로 곡물과 감자를 사용했고, 이는 "돼지 학살"의 원인이 되었다. 1915년 1월부터 빵을 시작으로 다양한 음식에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1916년 5월 22일, 전시 식량청이 설치되어 식량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려 했지만, 융커를 중심으로 한 농민과 노동자 양측의 반발을 샀다. 군대는 전시 식량청을 무시하고 징발을 반복하여 통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21]
3. 2. 전시 식량청의 설립과 한계
1916년 5월 22일, 독일 정부는 식량 배급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국가 식량청(Reichsernährungsamt)을 설립했다. 이 기관은 "군과 국가의 식량 공급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12] 1917년 여름, 배급 식량은 하루 1560Cal에 불과했고, 겨울에는 하루 1,000칼로리로 감소했다.[9] 반면, 제국 보건청(1918년 "국가 보건청"으로 개칭)은 건강한 성인 남성에게 하루 3000Cal를 권장했는데, 이는 당시 배급량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제국 보건청은 빈곤층의 영양을 보장하기 위해 최고 가격을 설정하기도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당시 정부의 통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으며, 농부와 군인들이 일반 대중보다 더 잘 먹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정부는 곡물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감자를 넣어 빵을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 1916년 감자 기근이 발생하자, 주식이었던 감자 대신 순무를 사용해 부족분을 메우려 했다. 그 결과, 독일 군인들은 "단순한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매력적이지 않은 채소 중 하나인 보잘것없는 순무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11] 이 시기, 암시장은 부족한 식료품을 구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역사학자 아브너 오퍼는 "식량의 5분의 1에서 3분의 1은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10]
3. 3. 1916-1917년, 순무의 겨울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은 연합국의 독일 봉쇄로 인해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916년~1917년 겨울은 "순무의 겨울"로 불리며, 전쟁 중 독일에서 가장 혹독했던 시기 중 하나였다.[1]
나쁜 날씨로 감자 수확량이 줄어들었고, 농업 노동력 부족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 감자 작황 부진으로 독일 국민들은 가축 사료로 쓰이던 순무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1] 1917년 겨울 동안 순무는 사실상 유일한 식량이었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특히 여성 사망률이 급증했다.[2] 1916년에는 전쟁 전보다 11.5%, 1917년에는 30% 증가했다.[2]
1914년에 시작된 연합국의 봉쇄는 중앙 열강의 식량 공급을 33% 감소시켰다.[10] 군대를 위한 말 징발, 농업 노동력 징집, 질소의 폭발물 생산 전환으로 인한 비료 부족도 식량 부족의 원인이었다.[11]
독일 정부는 1916년 5월 22일 국가 식량청을 설립하고 식량 배급제를 실시했다.[12] 1917년 여름, 하루 식량 배급량은 1,560칼로리였고, 겨울에는 1,000칼로리까지 줄었다.[9] 제국 보건청은 건강한 성인 남성에게 3,000칼로리를 권장했는데, 이는 겨울철 배급량의 세 배였다.[9]
정부는 감자로 만든 빵(K-빵)을 보급하고, 감자 기근 발생시 순무로 대체하려 했다.[23] 당시 독일 군인들은 "단순한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매력적이지 않은 채소 중 하나인 보잘것없는 순무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23]
사람들은 배급에 의존하면서도 K-빵 등 대체 식량을 개발하고, 텃밭(클라인가르텐)을 가꾸거나, 부유층은 밀수(암시장)를 통해 식량을 구하기도 했다.[23] 하지만 1916년 감자 흉작으로 배급이 중단되자, 순무가 주식이 되었고, 까마귀나 참새 고기가 팔리기도 했다.[24] 스페인 독감까지 유행하면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24] 제국 보건청은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군인 제외) 76만 2천 명이 굶어 죽었다고 발표했다.[25]
3. 4. 돼지 학살
1915년 봄, 독일에서는 많은 사료를 필요로 하는 돼지의 수를 줄이면 사료로 사용될 감자를 인간이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6] 이러한 주장에 따라 Schweinemord|돼지 학살de이라 불리는 대규모 돼지 학살이 발생했다. 1914년 12월부터 4개월 동안 독일 내 돼지 수는 2,530만 마리에서 1,660만 마리로 감소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확보할 수 있었던 감자는 많지 않았고, 육류 가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대량의 돼지고기가 부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 사회적 영향
순무의 겨울은 독일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1916년에는 먹을 수 없는 식량에 항의하며 해군 반란이 일어났다. 수병들은 장교들이 호화롭게 먹고 마시는 동안 자신들은 3주 연속으로 2온스 부족한 식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13] 보수적인 독일 정부는 이 반란 배후에 사회주의자의 음모가 있다고 믿었다. 1926년, 독일 관리들은 사회주의 국회의원 빌헬름 디트만을 봉기에 대한 재판에 회부했으나, 디트만은 수병들이 각자의 집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 음식이 먹을 수 없었고 "어떤 정치적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냈다.[13] 이 편지들은 사회주의 정당이 볼셰비키 혁명을 독일로 확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는 데 기여했다.[13]
아돌프 히틀러는 순무의 겨울로 인해 여성과 아이들이 굶주림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호소하여 지지를 얻었다. 정권 획득 후, 자급률 향상과 광역 경제권 확립을 통한 자급자족을 추구하며 다른 열강에 대항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른바 "나치 농정"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식량 완전 자급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85%의 자급률을 달성했다. 또한, 광역 경제권 확립과 함께 폴란드 등 점령지에 독일인 농민을 이주시키는 동부 개발 계획을 일부 현실화했다. 이러한 정책과 점령지로부터의 수탈 덕분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적어도 대전 말기인 1944년까지 독일 본토의 식량 부족 문제는 피할 수 있었다.[30]
4. 1. 민중의 불만과 사회 불안
기아에 시달린 아이들은 식량을 찾아 헛간에 침입하고 과수원을 약탈하곤 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무시는 독일의 청소년 범죄율을 사실상 두 배로 증가시켰다. 역사학자 G.J. 마이어는 저명한 베를린 의사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1916년에 8만 명의 아이들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식량 부족은 종종 노동 불안으로 직접 이어졌으며, 이 시기에는 노동자 파업도 흔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파업은 1917년 여름 뒤셀도르프에서 발생했으며, 노동자들은 불균등한 식량 배급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식량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은 차츰 정부와 전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1915년 이후 각지에서 폭동과 파업이 빈발했고, 이윽고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한 독일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독일의 패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1918년 11월 11일)되는 원인이 되었다.[28]
4. 2. 배후 중상설의 등장
1915년 이후 각지에서 폭동과 파업이 빈발했고, 이는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한 독일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독일의 패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1918년 11월 11일)되는 원인이 되었다.[28] 반면, 대전 후 보수주의자들은 혁명과 대전에서의 패배가 식량 부족을 틈탄 사회주의자와 유대인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단검 전설"을 만들어 냈다.[29] 이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대두로 이어졌다.[29]5. 독일 외 국가에의 영향
1916년 영국에서도 '순무의 겨울'의 영향으로 밀 등의 흉작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식량 문제가 심각해졌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아래 식량 관리국이 설치되었고, 주요 식량의 최고 가격제와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도 식량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으며,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서는 식량 문제에 대한 불만이 혁명으로 이어졌다. 한편,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식량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1918년 7월 쌀 소동과 독일의 식량 문제 정보가 함께 들어오면서 독일의 식량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은밀히 진행되었다. 외무성은 일본에서도 대규모 전쟁으로 해상 봉쇄가 이루어질 경우 독일과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후 총력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연구가 이어졌다.
5. 1. 연합국 측의 식량 문제
1916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아래 식량 관리국이 설치되었고, 1917년에는 주요 식량의 최고 가격제가, 1918년 7월에는 전면적인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국가들도 대전 중에 최고 가격제나 배급제를 도입하여 식량 문제에 대처해야 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식량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혁명으로 이어졌다.5. 2. 일본의 식량 문제 연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서는 식량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1918년 7월 쌀 소동과 독일의 식량 문제 정보가 함께 들어오면서 독일의 식량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은밀히 진행되었다.[1] 같은 해 8월, 외무성은 일본에서도 대규모 전쟁으로 해상 봉쇄가 이루어져 일본 본토로의 쌀 수입이 중단될 경우, 독일과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보고서(『독일에 있어서 식량 문제 조사』)를 작성했다.[1] 1920년대 이후 총력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만주 사변 이후 군사 행동과 나치 독일과의 관계 강화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 농업 및 식량 문제 전문가들이 관련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다.[1]6. 한국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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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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