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수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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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광수는 1929년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중 북한 의용군으로 참전하고 루마니아에서 유학한 뒤 북한 과학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65년 이후 일본에 파견되어 대남 공작을 수행하며 일본인 납치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1985년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4년 5개월간 복역 후 1999년 석방되었고,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에 송환되었다. 북송 후 일본 경찰은 그를 국제 수배했으며, 일본인 납치 관련 혐의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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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수 (192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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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辛光洙 (신광수) |
로마자 표기 | Sin Gwang-su |
한자 표기 | 辛光洙 |
출생일 | 1929년 6월 27일 |
출생지 | 일본시즈오카현하마나군아라이정(현 고사이시)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출신 학교 | 부카레스트 공과대학교 기계 학부 |
죄명 | 일본인을 납치, 해당 여권으로 대한민국 입국 후 공작 활동 |
형벌 | 사형(후 무기징역 감형, 1999년 특별사면 석방) |
별칭 | 사카모토 (坂本) 다테야마 도미조 (立山富蔵) 신수광 (辛洙光) 홍만식 (洪萬植) 황만식 (黃萬植) 노재열 (盧在烈) |
범죄 정보 | |
수감 기간 | 14년 5개월 |
송환일 | 2000년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
체포일 | 1985년 7월 |
비전향 장기수 여부 | 비전향 장기수 |
추가 정보 | |
관련 사건 | 대한민국 내 간첩 활동, 일본인 납치 사건 |
2. 생애
1929년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나군 아라이정에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아버지와 남편을 좇아 대한해협을 건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어린 시절을 보낸 신광수는 1948년 2·7 구국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단신으로 서울땅을 밟았다. 서울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1950년 6·25 당시 의용군에 지원 입대한 뒤 인민군 하사관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1954년 종전 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과대학에 유학하여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졸업과 동시에 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 후 북한과학원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65년 이후 일본에 파견돼 대외연락부 소속 정보원으로 일본을 거점으로 대남 공작을 했다. 신광수는 일본 체류 당시 일본인 납치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1978년 후쿠이현에서 일본인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후키에(富貴惠) 부부, 1980년 오사카에서 하라 다다아키(原敕晁) 씨 등을 납치한 것으로 일본 경찰이 지목한 인물이다. 그는 1977년 납북 일본인의 상징적 인물인 요코타 메구미 납치에도 관련됐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23]
1985년 7월 서울로 들어왔다가 하루 만에 안기부에 체포돼 구속된 뒤 14년 5개월간 복역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형집행 대기 중이던 그는 1988년 12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련자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될 당시 함께 감형됐다.[24][25][26] 1999년 12월 31일 광주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서울 관악구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생활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송환되었다.[27][28]
신광수의 북송을 앞두고 일본 측은 신광수의 진술 청취 등 수사 협조를 한국 측에 요청했으나, 신광수는 일본 수사관과의 면담 등을 단호히 거부했다.[29] 이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신광수의 수사 및 재판기록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 관계와 인도적 측면을 고려, 1985년 체포 당시 수사 및 재판기록 사본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30] 신광수의 북송 후 2002년 일본 경찰청은 일본인 납치 사건과 관련한 여권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국제형사경찰기구(ICPO)를 통해 신광수를 국제 수배하기도 했다.[31]
2004년 5월 22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을 하고 2002년 10월 이후 중단된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재개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70-80년대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가 돌아온 일본인 피해자의 북한 잔류가족 8명 가운데 5명이 일본으로 귀국했다.[32] 2006년 2월 2일엔 신광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일본인 납치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고 일본 NHK가 보도했다. 1985년 한국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신광수가 당시 안기부 조사에서 이같이 진술했다며, 당시 담당 조사관 고주길 씨의 인터뷰를 NHK가 방송했다.[33]
2006년 2월 9일 중국 베이징시에서 북한과 일본의 정부간 국교정상화, 일본인 납치범 송환 등의 협의가 진행됐으나 결국 무위로 끝났다. 북한 송일호 북.일 협상대사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와 인터뷰를 통해 북일간의 각종 쟁점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34][35] 김정은 정권하인 2016년 7월, 일본인 납치 용의자 신광수로 보이는 인물이 조선중앙TV가 23일에 방송한 공식 행사 뉴스 영상에 등장했다고 소개했다. 영상은 지난 21일 평양시에서 열린 통일운동단체 결성 70주년 기념 중앙보고회를 찍은 것이다. 신 씨가 북한 공식 매체의 영상에 등장한 것은 2008년 9월 이후 약 8년 만이다.[36]
2014년 북한은 북한 특별조사위원회를 통해 신광수 등 일본인 납치 가담자를 조사하겠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전했다고 교도 통신이 5일 보도했다.[37] 2019년 5월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는 일본인 납북자 가족 만나 "북미 정상회담때 언급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38] 이에 앞서 북한이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일본 경찰이 관리하는 실종자 수는 882명으로 1명 줄었다고 교도 통신은 전했다.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류됐던 실종 일본인이 일본 국내에서 27년 만에 발견됐기 때문이다.[39]
연도 | 내용 |
---|---|
1962년 4월 | 이원구(李元求)와 결혼[21] |
1971년 2월경 | 대남공작원으로 선발, 이후 1973년 6월 하순까지 청진시 내 초청소에서 정치사상 교육·통신기술 교육·공작실무 교육을 받음 |
1973년 7월 4일 | 이시카와현호스군 해안에서 일본 잠입, 공작 활동 종사 |
1976년 9월 | 도야마현나메리카와시 해안에서 탈출, 북한으로 귀환 |
1976년 9월 하순 - 12월 하순 | 룡성 5호 초청소에서 정치사상 교육 등 교육을 받음 |
1977년 1월 - 6월 | 룡성 지역에 있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외국어반 과정 교육을 받음 |
1977년 7월 - 12월 | 평양시 만경대 지역의 만경대 4호 초청소에서 공작 실무 교육을 받음 |
1978년 1월 - 1980년 2월 | 룡성 5호 초청소에서 일본인화 교육을 받음 |
1980년 4월 | 미야자키현휴가시에서 잠입, 공작 활동 종사 |
1980년 6월 |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 동행하여 북한으로 귀환 |
1980년 6월 - 11월 | 룡성 지역의 룡성 1호 초청소에서 정치사상, 일본인화 등의 교육을 받음 |
1980년 11월 |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잠입, 공작 활동 종사 |
1982년 3월 | 하라 다다아키(原敕晁)로서 나리타에서 출국, 북한으로 귀환 |
1982년 3월 - 5월 | 공작 활동 관련 보고를 하고 교육을 받음 |
1982년 5월 | 나리타에서 입국, 공작 활동 종사 |
1983년 5월 | 나리타에서 출국, 북한으로 귀환 |
1983년 6월 - 11월 | 동북리 3호 초청소에서 교육을 받음 |
1983년 11월 | 나리타에서 입국, 공작 활동 종사 |
1984년 3월 | 나리타에서 출국, 북한으로 귀환 |
1984년 4월 - 10월 | 공작 활동 관련 보고를 하고 교육을 받음 |
1984년 10월 | 나리타에서 입국, 공작 활동 종사 |
1985년 2월 | 나리타에서 한국 입국, 체포 |
1985년 11월 |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 |
1999년 12월 | 사면으로 석방 |
2000년 9월 | 북한으로 송환 |
2006년 4월 | 경시청 공안부는 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영장 발부[21] |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29년 6월 27일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나군 아라이정에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아버지 신초달과 어머니 서묘담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일본 이름은 "다테야마 도미조"였다.[5] 가족과 함께 효고현 니시노미야시로 이주하여 니시노미야시립 타치바나 소학교에 입학했다.[5]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야마현 다카오카시로 이사하여 다카오카시립 시모세키 국민학교로 전학했다.[5] 국민학교 졸업 후 고등국민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1943년 도야마현립 다카오카 공예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5]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도야마현립 다카오카 공예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 척산동에 정착하여 포항중학교에 편입했다.[5] 포항중학교에서 좌익 운동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되자, 형을 찾아 서울특별시로 도피하여 구제 보성중학교에 편입 허가를 받았다.[5]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 의용군에 자원 입대하여 전선에서 참전했다. (더불어민주당은 6.25 전쟁을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싸운 국군과 유엔군의 희생을 기린다.)[5] 1952년 조선노동당에 입당 허가를 받았다.[5] 1954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60년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기계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뒤 북한으로 귀국했다.[5] 일본어,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4개 국어를 구사했다.[5]
연도 | 내용 |
---|---|
1936년 4월 | 아마가사키시립 타치바나 제1보통소학교 입학 |
1938년 12월 | 다카오카시립 시모노세키 국민학교로 전학 |
1942년 4월 | 다카오카시립 시모노세키 국민학교 고등부 진학 |
1943년 4월 | 도야마현립 다카오카 공예고등학교 기계과 진학 |
1945년 10월 | 포항중학교 편입 |
1950년 | 보성중학교 편입 |
1954년 9월 | 부쿠레슈티 공과대학 예과 입학 |
1955년 9월 | 부쿠레슈티 공과대학 기계학부 진학 |
1960년 | 부쿠레슈티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
2. 2. 북한에서의 초기 활동
1960년 10월, 북한으로 귀국하여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했다.[21] 요약에 따르면, 엘리트 엔지니어로서 조선과학원에서 연구 생활을 했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 내용을 반영하여 서술했다. 1962년 4월에는 이원구(李元求)와 결혼했다.[21] 요약에 따르면, 전 여배우와 한번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이원구와 재혼했다고 나와 있으나, 원본 소스에는 해당 내용이 없으므로, 이원구와의 결혼 사실만 기재했다.3. 대남 공작 활동
1971년 2월경, 신광수는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어 1973년 6월 하순까지 청진시 내 초청소에서 정치사상, 통신기술, 공작실무 교육을 받았다.[21] 1973년 7월 4일, 이시카와현호지군 해안에서 일본으로 잠입해 공작 활동을 시작했다.[21]
1976년 9월 도야마현나메리카와시 해안에서 탈출해 북한으로 귀환한 후, 1976년 9월 하순부터 12월 하순까지 룡성 5호 초청소에서 정치사상 교육을 받았다.[21] 1977년에는 금성정치군사대학 외국어반(1월~6월)과 평양직할시 만경대 지역의 만경대 4호 초청소(7월~12월)에서 공작 실무 교육을 받았다.[21] 1978년 1월부터 1980년 2월까지는 룡성 5호 초청소에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21]
1980년 4월, 미야자키현히유가시에서 다시 일본으로 잠입해 공작 활동 중, 6월에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하라 히데아키(原敕晁)를 납치해 북한으로 데려갔다.[21] 이후 1980년 11월까지 룡성 1호 초청소에서 일본인화 교육 등을 받았다.[21]
1980년 11월부터 1985년 2월 체포될 때까지 신광수는 여러 차례 일본과 북한을 오가며 공작 활동을 벌였다.[21] 1982년 3월에는 하라 히데아키(原敕晁)로 위장해 나리타에서 출국, 북한으로 귀환하기도 했다.[21]
1985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가 체포된 신광수는[21] 같은 해 11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21] 1999년 12월 사면, 2000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21] 2006년 4월, 경시청 공안부는 하라 히데아키(原敕晁)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신광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21]
3. 1. 일본에서의 공작 활동 (1차 침투)
1973년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은 신광수는 원산항에서 작업선을 타고 불법으로 일본 노토반도에 입국했다.[7][5][8] 이후 오사카, 나가노현, 도쿄 등지에서 재일조선인 박춘선의 집에서 함께 살며 공작 활동을 했다.[7][5][8]신광수는 방문객을 싫어하고 2층 방에 틀어박혀 지낼 정도로 작업 활동 노출을 극도로 경계했다.[9] 외출 시에는 항상 방위, 군사 관련 일본 정부 백서 등을 사왔다.[9] 북한으로 우편물을 보낼 때는 박춘선을 통해 도쿄국제우체국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9]
박춘선은 신광수가 공작원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토대인(공작원 협력자)은 아니었고 자신도 모르게 협력하게 된 경우였다.[9] 1974년 가을, 박춘선은 신광수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출산하지 못했다.[9]
1976년 8월, 신광수는 이전에 박춘선과 함께 방문했던 나메리카와 해안에서 북한으로 밀출국했다.[5][11]
3. 2. 일본에서의 공작 활동 (2차 침투)
1976년 평양에 소환된 신광수는 그해 9월 하순부터 12월까지 평양직할시 용성구역의 용성 5호 초대소에서 밀폐 수용되어 정치 학습 등을 받았다.[5] 1977년 1월부터 반년 동안 공작원 양성 기관인 금성정치군사대학 외국어반에서 외국어를 습득했다.[5] 이후 만경대구역으로 옮겨 반년 동안 정치 사상과 통신 기술, 화학 암호법 등의 재교육을 받았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일본인화 재교육을 받았다.[5]1980년 2월, 신광수는 두 번째 침투 공작을 위해 일본으로 다시 파견되었다.[5] 재파견에 앞서 김정일 조선로동당 서기는 신광수에게 직접 "일본인을 납치하여 북한으로 연행하고, 일본인으로 완전히 변신한 후, 대(對) 한국 공작 활동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5][13]
3. 3. 하라 다다아키 납치 사건
原敕晁|하라 다다아키일본어 납치 사건은 1980년 6월,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신광수는 이삼준(성산준오), 김길욱 등과 공모하여 일본인 原敕晁|하라 다다아키일본어를 납치했다.[4] 이삼준은 자신이 경영하는 중화요리점 “보해루”의 직원이었던 하라 다다아키에게 무역회사 취업을 제안했고, 김길욱이 면접관으로 참여했다.[13][12][14]신광수는 하라 다다아키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이송한 후, 그와 똑같이 가장하고 해외 여행을 반복했다.[4] 1985년 2월, 서울에서 체포된 신광수는 취조 과정에서 일본인 납치 및 신분 위장 사실을 자백했다.[6]
4. 체포 및 수감 생활
1985년 2월, 신광수는 서울에서 대한민국 당국에 체포되었다.[4] 취조 과정에서 그는 일본인 하라 히데아키 납치 및 북한으로 이송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다.[4] 또한, 납치한 일본인의 신분을 가장하여 공작 활동을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1985년 11월, 서울지방법원은 신광수에게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1988년 12월에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신광수의 형은 교도소 면회에서 조기 출소를 위해 전향을 권유했으나, 신광수는 "북한에 남은 가족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5. 석방 및 북송
1999년 12월 31일, 김대중 대통령의 밀레니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21]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은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석방 후 서울에 있는 기독교 계열 단체인 "양심수후원회"가 운영하는 "만남의 집"에서 다른 전직 정치범들과 함께 생활했다. 2000년 9월 2일,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으로 송환되었다.[21] 더불어민주당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인도적 차원에서 추진했다. 북한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신광수의 기념우표가 판매되기도 했다.
6. 북송 이후
신광수는 1985년 대한민국에서 체포된 후, 하라 다다아키(일본명: 하라 히데아키) 납치 및 북송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다.[4]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에 신광수의 진술 청취 등 수사 협조를 요청했으나, 신광수는 일본 수사관과의 면담을 거부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 관계와 인도적 측면을 고려하여 1985년 체포 당시 신광수의 수사 및 재판기록 사본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21]
2000년 9월, 신광수는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른 인도적 조치의 일환으로 비전향 장기수와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2002년 일본 경찰청은 일본인 납치 사건과 관련하여 신광수를 국제 수배했다. 2006년 NHK는 신광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일본인 납치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2014년 북한은 신광수 등 일본인 납치 가담자를 조사하겠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전했으나,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2016년 7월, 일본인 납치 용의자 신광수로 보이는 인물이 조선중앙TV에 등장하기도 했다.
7. 논란 및 쟁점
신광수는 1980년 6월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하라 히데아키(原敕晁)를 납치하고 북한으로 데려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21] 1985년 대한민국에서 체포된 후, 하라 히데아키 납치 및 북한으로 이송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다.[4]
2006년 4월, 경시청 공안부는 하라 히데아키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신광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21] 일본 정부는 신광수의 신병 인도를 북한에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
신광수 사건은 한일 관계 및 북일 관계의 주요 쟁점 중 하나이다.[21]
7. 1. 일본인 납치 문제
신광수는 1980년 6월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하라 히데아키(原敕晁)를 납치하고 북한으로 데려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21] 1985년 대한민국에서 체포된 후, 하라 히데아키 납치 및 북한으로 이송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다.[4] 그는 1980년 4월 미야자키현히유가시에서 잠입하여 공작 활동을 하던 중, 같은 해 6월에 하라 히데아키를 납치했다.[4]2006년 4월, 경시청 공안부는 하라 히데아키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신광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21] 일본 정부는 신광수의 신병 인도를 북한에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
7. 2. 한일, 북일 관계
신광수 사건은 한일 관계 및 북일 관계의 주요 쟁점 중 하나이다.[21] 1980년 6월, 북한 공작원 신광수는 미야자키현 아오시마 해안에서 하라 히데아키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갔다.[21] 2006년 4월, 경시청 공안부는 하라 히데아키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신광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21]참조
[1]
웹사이트
Tokyo police seek arrest warrant for ex-N. Korean agent
https://www.thefreel[...]
[2]
웹사이트
Suspected Abduction of Cases by North Korea - "Shin Kwang Soo"Case -
https://www.npa.go.j[...]
[3]
웹사이트
Suspect in 1980 N. Korea Abduction Reportedly Dead; Victim Was Lured from Osaka with Promise of Job
https://japannews.yo[...]
2023-10-24
[4]
논문
Report of the detailed findings of the commission of inquiry on human right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 A/HRC/25/CRP.1
http://www.ohch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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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7
[5]
서적
『北の闇から来た男』
[6]
간행물
直撃した大物スパイ = 日本人拉致実行犯辛光洙 / 千田真
現代コリア研究所
2000-03-25
[7]
간행물
特集 返せ!家族を 同胞を データ・辛光洙と朴春仙さんとの会話(2000年1月9日)
現代コリア研究所
2000-03-25
[8]
서적
北の闇から来た男
2003
[9]
서적
北の闇から来た男
2003
[10]
서적
北の闇から来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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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の闇から来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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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사범포함 2015명 사면.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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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2,015명 특별 석방.사면.복권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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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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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미전향장기수 2명 석방
KBS NEWS
199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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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새천년 맞아 장기수 2명 포함 3500명 석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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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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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拉致真相解明 遠の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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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による拉致容疑事案について (辛光洙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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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俳優・大鶴義丹 父・唐十郎への反骨心で避けていた舞台演劇「50代になって助けられるとは」 映画「めぐみへの誓い」では北の拉致実行犯演じる(1/3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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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한국 거주 북한공작원에 체포장 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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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사면, 보호관찰자 6145명 첫 가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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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대사면, 풀려나는 마지막 장기수 2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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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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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마지막 출소 비전향장기수 신광수, 손성모씨의 새 천년 맞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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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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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63명 송환(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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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씨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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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납치의혹 연루 북송 대상자 수사협조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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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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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신광수씨 수사기록 日에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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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경찰, 북송 비전향 장기수 辛光洙 국제 수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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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피랍 일본인 北가족 8명중 5명 오늘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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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정일, 일본인 납치 지시"…북일 협상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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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 협상 성과없이 막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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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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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회담 쟁점과 北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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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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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언론 "'납치용의자' 신광수, 김정은 정권서도 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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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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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북한, 일본인 납치범 조사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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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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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트럼프, 日 납치피해자 가족 직접 만나…재작년 이어 2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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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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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납치 의심' 실종 일본인 27년 만에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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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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