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타니 히로시
1. 개요
신타니 히로시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투수와 코치 경력을 거쳐 현재는 메이지 야스다 생명 수석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에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활동하며, 사이드암에 가까운 투구폼으로 다양한 구종을 구사했다. 은퇴 후에는 닛폰햄 투수 코치, 쇼비학원대학 여자 야구부 감독, 일본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및 감독,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레이디스 초대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엄격한 지도 철학으로 선수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야구를 통한 인격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선수명 | 신타니 히로시 |
|---|---|
| 원어명 | Hiroshi Shintani |
| 일본어 표기 | 新谷 博일본어 |
| 로마자 표기 | Hiroshi Shintani |
| 한자 표기 | 新谷 博 |
| 출생지 | 사가현 사가시 |
| 생년월일 | 1964년 7월 14일 |
| 신장 | 183 |
| 체중 | 77 |
| 수비 위치 | 투수 |
| 투구 | 우 |
| 타석 | 우 |
| 고등학교 | 사가현립 사가 상업 고등학교 |
|---|---|
| 대학교 | 고마자와 대학 |
| 실업 | 닛폰 생명 |
| 프로 | 세이부 라이온스 (1992 ~ 1999) 닛폰햄 파이터스 (2000 ~ 2001) |
| 프로 입단 년도 | 1991년 |
| 드래프트 순위 | 2순위 |
| 첫 출장 | 1992년 4월 7일 |
| 마지막 경기 | 2001년 10월 1일 |
| 닛폰햄 파이터스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2 ~ 2004) |
|---|---|
| 대학교 | 쇼비학원대학 |
| 사회인 야구 | 사가 스피릿츠 |
| 국가대표 | 여자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
| 실업 야구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레이디스 |
| 실업 야구 | 메이지 야스다 생명 |
| 현재 직책 | 尚美学園大学女子硬式野球部 감독 #50 埼玉西武ライオンズ・レディース GM #50 明治安田生命硬式野球部 헤드 코치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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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구 선수 -
도마시노 겐지
도마시노 겐지는 198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89년 신인왕을 수상하고 빠른 발과 수비력을 갖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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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코로 젠지로
다도코로 젠지로는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 시절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전 경기 완봉승으로 우승을 이끌었으며,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투수로 활동, 은퇴 후에는 코치, 야구 연맹 임원, 유소년 야구팀 대표를 역임했다. -
일본 프로 야구 투수 -
다도코로 젠지로
다도코로 젠지로는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 시절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전 경기 완봉승으로 우승을 이끌었으며,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투수로 활동, 은퇴 후에는 코치, 야구 연맹 임원, 유소년 야구팀 대표를 역임했다. -
일본 프로 야구 투수 -
후지타 모토시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MVP를 2연패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고마자와 대학 동문 -
마쓰카와 도모아키
마쓰카와 도모아키는 쇼난 벨마레 등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며,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고 2003년 YKK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고마자와 대학 동문 -
모리 시게카즈
모리 시게카즈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감독,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시절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으며,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으로 NPB 최고령 감독 데뷔 기록을 세웠고, 은퇴 후 야구 해설 및 평론가,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신타니 히로시는 사가 상업고등학교와 고마자와 대학을 거쳐 세이부 라이온스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활약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다.
사가 상업고등학교 시절 3학년 여름 현 대회에서 우승했고, 전국 대회 첫 경기에서 준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고마자와 대학에서는 오타 세이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도토 대학 리그 통산 62경기에 등판하여 29승 16패, 평균자책점 2.16, 295탈삼진을 기록했다.
1986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의 1위 지명을 받고 입단하여, 팀의 황금기를 함께하며 선발과 중간 계투를 오가며 활약했고, 1994년에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닛폰햄으로 이적한 후에는 중간 계투로 뛰었으며, 2001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1. 아마추어 시절
사가시의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난 신타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중학교에서는 포수를 맡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활약하며 주장을 맡았지만, 감독과의 불화로 야구부를 떠나 농구부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다시 야구를 하고자 사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가 상업고등학교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체력을 키웠고, 2학년 봄에는 투수로 전향하여 동기인 다나카 다카히사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2학년 가을 현 대회 결승에서 패배한 후, 훈련에 매진하여 다양한 구종을 익히며 투수로 성장했다. 3학년 여름 현 대회에서 우승했고, 전국 대회 첫 경기에서는 준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비록 팀은 3회전에서 패했지만, 일본 대표팀에 발탁되어 해외 원정에 참가했다.
1982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2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고마자와 대학에서 오타 세이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1학년 때부터 도토 대학 리그전에 등판, 2학년 가을에는 팀 우승에 기여하며 최고 수훈 선수, 최우수 투수,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리그 통산 62경기에 등판하여 29승 16패, 평균자책점 2.16, 295탈삼진을 기록했으며,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일본생명에 입사할 예정이었으나, 1986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의 1위 지명을 받았다. 네모토 리쿠오 관리부장의 설득과 가족들의 지지로 프로 입단을 결심, 계약금 65, 연봉 6(추정)에 계약을 맺고 세이부에 입단했다.
2.1.1. 고교 시절
사가시의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위로 누나 2명이 있는 막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중학교에서는 포수를 맡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에이스이자 4번 타자를 맡아 팀의 주장을 맡았지만, 감독과 심하게 다투어 야구부를 퇴단했다. 키가 컸던 탓에 농구부로 옮겼지만, 고등학교에서는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야구 강호인 사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가 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가 복근 운동 1,400회 등 매일 6~7시간의 연습을 했으며, 귀가 후 2층 방까지 올라갈 체력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입학 당시에는 유연한 몸과 뛰어난 센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른 체격이었는데, 이러한 연습을 통해 체력이 강화되어 부상 걱정도 줄었다. 2학년 봄, 동기인 다나카 다카히사 등이 투수를 맡고 신타니는 후보 3루수가 되었지만, 투수진이 모두 컨디션 난조를 보이자 대타를 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투수로 전향했다. 한편, 다나카는 포수로 전향하여 신타니와 배터리를 이루게 되었다. 2학년 가을 현 대회에서는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었지만, 결승전에서 패하여 다음 해 봄의 선발 대회 출전은 좌절되었다.
이 패배를 계기로 연습에 더욱 집중하여, 단기간에 커브, 슬라이더, 포크볼을 익혔고, 어떤 구종으로도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구위가 향상되었다. 1982년 3학년 여름 현 대회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했고, 팀 타율과 방어율은 같은 해 선수권 대회 출전 학교 중 최고 성적이었다. 본 대회 첫 경기인 8월 8일 키조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단 한 명의 주자도 허용하지 않고 9회 2아웃까지 잡았으나 27번째 대타 요나가 유키히토에게 사구를 허용하여 퍼펙트 게임은 놓쳤지만, 다음 타자를 잡아내며 노히트노런이자 준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신타니는 퍼펙트 게임이 대회 최초 기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안타를 피하기 위해 몸쪽 승부를 했던 요나가와의 볼배합을 후회했다고 한다.
2회전에서는 도농대2고를 상대로 6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고, 쓰쿠미고와의 3회전에서도 연장 14회 동안 8안타 3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팀은 패배했다. 대회 후, 아라키 다이스케, 하타케야마 준 등과 함께 일본 대표팀에 발탁되어 해외 원정에 참가했다. 여러 프로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있었으나, 야나가와 사건의 영향으로 프로 선수 출신 지도자 임용에 제약이 컸던 당시 상황과 감독의 강력한 권유로 인해 대학 진학을 희망했다. 1982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한편, 다나카 다카히사도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지만, 1군 출전 기회 없이 198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여 프로 무대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다.
2.1.2. 대학·사회인 시절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한 신타니는 경식 야구부에 입부하여, 오타 세이지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1학년 때부터 도토 대학 리그전에 등판했고, 1983년 2학년 가을에는 5승 1패, 평균자책점 1.27의 성적으로 팀의 우승에 공헌하며 최고 수훈 선수와 최우수 투수,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리그 통산 62경기에 등판하여 29승 16패, 평균자책점 2.16, 295탈삼진을 기록했다.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고, 최고 수훈 선수에 2회, 최우수 투수에 3회, 베스트 나인에 3회 선정되었다.
대학 졸업 후 일본생명에 입사할 예정이었지만, 1986년 드래프트 회의 직전에 세이부 라이온스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다. 세이부는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단독 1위 지명할 예정이었지만, 요미우리도 와타나베를 1위 지명할 움직임을 보이자, 당일 아침에 급히 신타니를 지명하기로 결정했다. 신타니는 고교 시절부터 프로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세이부의 지명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생명 경리부에서 근무할 예정이었던 신타니는, 드래프트 1주일 전에 세이부의 네모토 리쿠오 관리부장으로부터 "만약 1위로 지명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네모토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고, 가족 회의에서 프로 입단 찬성이 많았던 점과, 어머니로부터 "일본생명에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입단을 결심했다. 계약금 65, 연봉 6(추정)에 계약을 맺고 세이부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모리 시게카즈가 달았던 14번으로 결정되었다.
2.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신타니 히로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활약한 프로 야구 선수이다. 세이부 시절에는 팀의 황금기를 함께하며 선발과 중간 계투를 오가며 활약했고, 1994년에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하기도 했다. 닛폰햄으로 이적한 후에는 중간 계투로 뛰었으며, 2001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2.1.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92~1999)
입단 당시 세이부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어서 '혹시라도 등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닌가'라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인 야구를 경험하고 신체가 단련돼 있어서 스프링 캠프에서는 1군 투수진에 뒤지지 않는 공을 던진 것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었고, 와타나베 히사노부와 가토리 요시타카의 배려로 팀 동료와 융화하면서 적응해나갔다. 개막 2경기째인 1992년 4월 7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전에서 프로 데뷔 첫 등판을 이뤄냈고 와타나베 도미오의 부진 등의 이유로 8월 2일에는 처음으로 선발을 맡아 프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9월 중순까지 총 8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2차례의 완투를 포함한 2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맞붙은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5차전에 첫 등판해서 5회 중간부터 1과 2/3이닝을 던져 5피안타를 허용하고 1실점을 내줬지만 6차전에서는 4회 중간부터 1과 1/3이닝을 던져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듬해 1993년에는 연봉이 24(추정치)으로 증가됐고, 선발 로테이션의 5번째 투수로서 19경기에 선발 등판했고 8월 7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는 프로 첫 완봉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중간 계투로 등판해 특히 2차전에서는 이날 선발로 나온 궈타이위안 다음으로 3회초부터 7이닝을 던지는 등 5피안타 1실점으로 막아냈다. 시즌 종료 후에는 연봉 20이 인상된 44(추정치)이 됐다. 8승 1패의 시즌 성적을 남겼지만 투구 내용에는 납득이 되질 않을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고, 이듬해에 걸쳐 몸을 열지 않고 비트는 듯한 투구 폼으로 변경했다.
1994년에는 무라타 가쓰요시와 오노 가즈요시의 트레이드로 입단한 것을 계기로 시즌 전반기에는 중간 계투나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 4월 14일 다이에전에서 1점 리드한 2사 만루 상황에서 상대 타자 마쓰나가 히로미를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가 이어졌는데 이토 쓰토무의 사인에 고개를 젓고 지구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다. 이 장면은 프로 야구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회심의 투구로, 이 일을 계기로 이토에게서 사인에 고개를 젓는 걸 받아들여 스스로에게 있어 큰 분기점이 됐다고 한다. 5월에는 구원으로서 7경기에 등판해 20과 1/3이닝을 던져 4승 1패 1세이브, 평균 자책점 1.33의 성적으로 월간 MVP를 처음으로 수상했다. 또한 올스타전에도 처음으로 출전해 1차전에서는 7회 1사 만루 상황에 등판하여 1과 1/3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후반기에서도 롱 릴리프와 선발을 포함한 스기야마 겐토와 함께 다양한 상황에서 기용돼 필사적으로 던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해에는 개인 최다인 41경기(선발로서는 8경기)에 등판하여 자신의 첫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 그리고 시즌 최종전인 10월 1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1과 1/3이닝을 던져 3실점을 내주면서도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워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5회 중간부터 등판해 3과 2/3이닝을 4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시즌 종료 후에 있은 퍼시픽 리그 MVP 투표에서 그해 일본 프로 야구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인 210안타를 달성한 이치로에게 큰 표차로 뒤졌지만 이치로의 몰표를 저지하고 차점자가 됐다. 재계약 협상에서는 세이부의 투수로서 역대 최고치가 되는 40이 상승한 연봉 84(추정치)이 됐다.
1995년에는 구도 기미야스의 이적 등으로 선발 로테이션의 중심이 되면서 여름에 발병한 급성위장염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선발에서 제외됐지만 그 해에 자신의 최다인 23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팀내 최다이자 개인 최다 기록인 11승을 올려 평균 자책점은 리그 6위에 해당되는 2.93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에는 연봉 90(추정치)으로 재계약을 맺었고, 전년도에 하뉴다 다다카쓰의 결혼 피로연이 열린 것을 계기로 교제를 시작한 항공사 여승무원과 결혼했다. 이듬해 1996년에는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아 3년 연속이자 자신의 최다 타이 기록인 두 자릿수 승리가 되는 11승을 올렸다. 같은 해 재계약 협상에서는 연봉이 110(추정치)이 되면서 기요하라 가즈히로,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나란히 팀 역사상 최단 기간인 프로 6년 째에 연봉 1억 엔대에 도달한 선수가 됐다.
1997년에는 전년도 팀내 최다승을 거둔 니시구치 후미야에 뒤를 잇는 팀의 2, 3선발로 예상했지만 시즌 첫 등판이 된 4월 9일 오릭스전에서 7피안타 6실점(1자책점)의 투구 내용으로 3회에 강판됐고, 이어지는 4월 17일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첫회에 6개의 안타를 허용하여 5실점을 내주는 등 1아웃밖에 잡지 못하고 투구수 28개로 패전 투수가 됐다. 이러한 심각한 부진으로 인해 처음으로 1군 등록이 말소돼 2군에서의 조정을 하고 있었다. 6월에는 1군에 복귀했지만 또다시 부진에 시달려 2군으로 강등됐고 전년도 오프부터 길러왔던 수염을 밀어버리고 달리기를 비롯한 투구 폼의 확인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8월 18일에는 1군에 다시 복귀하여 다음날인 지바 롯데전에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해에는 겨우 2승으로 끝났다. 야쿠르트와 맞붙은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 선발 등판해 4이닝을 던져 6피안타 3실점을 기록하고 5회초에 대타로 교체돼 패전 투수가 됐다. 3회 2사 2, 3루 상황에서 안이하게 승부를 걸어 상대 타자인 후루타 아쓰야에게 2점 적시 2루타를 맞은 것이 패전의 큰 원인이라고 평가했다. 오프의 재계약 협상에서는 30이 대폭 삭감된 연봉 80(추정치)이 됐다.
니시자키 유키히로나 하시모토 다케히로와 나란히 투수진의 최고참으로서 맞이한 1998년에는 스프링 캠프에서 빠른 컨디션을 조정하기는 했지만 시즌 당초에는 중간 계투로 기용돼 평균 자책점도 10점을 넘겼었다. 하지만 그해 시즌 첫 선발로 등판한 5월 27일 지바 롯데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면서 그대로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고, 6월 20일 오릭스전에서는 1년 9개월 만에 완봉승을 거두었다. 규정 투구 이닝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16경기에 선발로 나오면서 평균 자책점은 3.67의 성적을 남겼다. 그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5차전에 7회 중간부터 5점이나 뒤진 상황에서 등판했지만 8회에 3점, 더욱이 9회에는 7점을 내줬다. 이 한 경기에서 10실점 및 10자책점은 모두 일본 시리즈 신기록이 됐다. 당시 투수 코치였던 스기모토 다다시는 "선발도 조기에 강판했었고 다른 투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했고 신타니 자신은 "야수에게 폐를 끼쳐 버렸다"라고 토로했지만, 모리 마사아키는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가시오 오사무를 향해 일본 시리즈에 어울리는 지휘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자아내며 비판했다. 수비 주루 코치였던 이하라 하루키는 이에 대해 "절반 정도인 것처럼 계속 던지는 신타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불쌍했다. 경기 후 신타니는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다른 투수가 있는데 왜 교체하지 않았을까.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신타니가 걱정돼 무심코 전화를 걸었을 정도였다. '힘들었구나. 감독이 어떤 의도로 마운드에서 내려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쉬움을 가슴에 묻어두고 다음에 다시 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오프의 재계약 협상에서는 10이 삭감된 연봉 70(추정치)이 됐다.
이듬해 1999년 4월에는 2경기에 선발 등판했지만 두 경기 모두 2회도 못던지고 6실점을 내주며 강판돼 4월 14일에 1군 등록이 말소됐다. 같은 해 2군에서 선발 등판하여 7승을 올렸지만 10월 6일에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고 마찬가지로 세이부에서 퇴단한 전 2군 투수 코치 모리 시게카즈와 함께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했다.
2.2.2.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2000~2001)
2000년, 닛폰햄으로 이적한 첫 해에는 4월 7일 다이에전에서 3회 5실점으로 강판되었지만, 4월 14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2년 만에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후 5월까지 3연승을 거두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투구 내용에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팀 최고령 선수로서 투수진 결의 대회를 여는 등 팀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1년에는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선발 등판 없이 중간 계투로만 등판했다. 10월 1일 세이부전에서는 8회말 네 번째 투수로 등판, 가키우치 데쓰야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했으나 1⅔이닝을 1실점으로 막았다. 이적 후 첫 세이부 돔 등판이자 현역 마지막 등판이 된 이 경기에서 양 팀 팬들로부터 큰 응원을 받았다고 한다. 시즌 종료 후 닛폰햄으로부터 1군 투수 코치 취임 제안을 받고 가족 및 오타 마코토와 상의한 후, 10월 12일 구단에 은퇴 의사를 전달하여 수락받았다.
3. 지도자 경력
신타니 히로시는 사회인 야구 후반부터 프로 선수 생활 초반까지 사이드암에 가까운 스리쿼터 투구폼으로 최고 140km 후반대의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비롯한 다양한 변화구를 던졌다. 타자가 노리는 공을 쉽게 던지지 않는 투구 스타일이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역 말년에는 구속은 떨어졌지만, 낮은 제구력으로 변화구를 던지는 기교파 투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등 여러 역할을 맡았지만, 어떤 역할이든 눈앞의 타자 한 명을 막는 데 집중했고, 타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투쟁심이 야구 선수 생활의 동기였다고 한다. 감독이 정해주는 역할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투수들이 선발이나 마무리를 고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한다.
3.1. 닛폰햄 파이터스 투수 코치 (2002~2004)
(신타니 히로시는 닛폰햄 파이터스 투수 코치 (2002~2004) 시절의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당 섹션 내용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
3.2. 쇼비 학원 대학 여자 야구부 감독 (2006~2022)
일본의 여자 야구계에서 가장 엄격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한편, 경험에 밑바탕을 둔 지도에는 많은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신타니 자신은 여자 선수는 야구에 대한 열의가 높기 때문에 지도하기가 쉽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아마추어 야구는 기술면에서의 훈련 비중이 너무 크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고 타 분야에서도 통용되는 인재가 자라도록 야구를 통한 인격 형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쇼비 학원 대학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는 선수에 대해 개개인의 플레이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이해를 높이는 일에 전념했다. 다른 팀을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강한 팀을 만들고, 동시에 지도자를 역임하면서 선수를 육성하는 일로 일본 여자 야구를 발전시키는 일을 목표로 했다. 연습 후에는 선수와 함께 식사나 볼링 등에 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선수와 신뢰 관계를 만드는데 있어서 소중한 것은 자신이 공부하는 것, 그리고 그 앞에는 승리에 의한 기쁨을 주는 것이 중요하고, 또 선수의 자주성이 프로와는 달라 아마추어인 제자에게 있어서 야구는 대학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부터 연습은 연습, 놀이는 놀이로 조절이 되는 선수로 육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여자 프로 야구에 대해 ‘실력이 아마추어보다 뒤쳐저 있어서는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는 등 그 실력을 의문시하고 있었지만, 2012년 4월 21일 일본 대표 후보팀과 여자 프로 야구 선발팀과의 평가전에서 신타니가 이끄는 일본 대표 후보팀이 여자 프로 야구 선발팀에게 완패했다. ‘일본에서 가장 좋은 팀을 만드는 것이 역할이며, 프로 선수의 대표 합류는 당연시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이며 성격, 의지를 포함하여 판단한다’라고 주장하는 등 사상 최초로 프로에서 일본 대표팀으로의 발탁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결과적으로 프로에서는 5명이 선출됐다.
3.3. 여자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코치 및 감독
신타니 히로시는 사회인 야구 선수 시절 후반부터 프로 선수 초반까지 사이드암과 스리쿼터의 중간 형태의 투구폼으로 최고 구속 140km/h 후반의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비롯한 다양한 변화구를 던졌다. 투구 시 타자가 공의 구종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역 말년에는 구위가 떨어졌지만, 낮은 제구의 변화구를 적절히 섞어 던지는 기교파 투수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대학 졸업 후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등 다양한 보직을 맡았다. 하지만 어떤 보직이든 눈앞의 타자 한 명을 막는 데 집중했고, 타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투쟁심이 야구를 하는 동기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감독이 정해주는 역할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투수들이 선발이나 마무리를 고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3.4.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레이디스 감독 및 GM (2020~)
신타니 히로시는 사회인 야구 후반부터 프로 선수 생활 초반까지 사이드암에 가까운 스리쿼터 투구폼으로 최고 구속 140km/h 후반의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비롯한 다양한 변화구를 던졌다. 또한, 타자가 노리는 공을 쉽게 던지지 않는 투구 스타일이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역 말년에는 구속은 떨어졌지만, 낮은 제구력으로 변화구를 던지는 기교파 투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등 여러 역할을 맡았지만, 어떤 역할이든 눈앞의 타자 한 명을 막는 데 집중했고, 타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투쟁심이 야구 선수 생활의 동기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감독이 정해주는 역할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투수들이 선발이나 마무리를 고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 학력 |
|---|
| 사가 현립 사가 상업고등학교 |
| 고마자와 대학 |
| 주요 수상 |
|---|
| 최우수 평균자책점 1회 (1994년) |
3.5. 메이지 야스다 생명 경식 야구부 수석 코치 (2023~)
신타니 히로시는 사회인 야구 후반부터 프로 선수 생활 초반까지 사이드암과 스리쿼터를 혼합한 투구폼으로 최고 140km 후반대의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비롯한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했다. 표적을 좁히지 않는 투구가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역 말년에는 구속은 떨어졌지만, 낮은 제구의 변화구를 구분하여 던지는 기교파 투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등 여러 역할을 맡았지만, 어떤 역할이든 눈앞의 타자 한 명을 막는 데 집중했고, 타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투쟁심이 야구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감독이 정하는 역할에는 흥미가 없었고, 다른 투수가 선발이나 마무리를 고집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新谷 博일본어는 1992년 4월 7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에서 열린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1차전에 9회초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으로 첫 등판을 기록했다. 같은 해 4월 9일, 같은 구장에서 열린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3차전에서 9회초 3번째 투수로 등판, 1이닝 무실점으로 첫 세이브를 올렸다. 4월 18일에는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2차전 6회말에 아이코 츠요시를 상대로 첫 탈삼진을 기록했다. 8월 2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에서 열린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18차전에서는 6⅓이닝 3실점(2자책점)으로 첫 선발승을 거두었다. 8월 8일,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18차전에서는 9이닝 3실점으로 첫 완투승을 기록했고, 1993년 8월 7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16차전에서는 첫 완봉승을 거두었다. 1994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5. 지도 철학
젊은 시절부터 고베 제강을 응원하던 럭비 팬이며, 마츠오 유지의 사촌 여동생에 해당하는 아내와는 첫 데이트에서 일본 선수권을 관전했다。 개막 투수에 대한 고집 등이 없고, 투구 스타일도 성격도 마이 페이스라고 평가받았다。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을 애독하며, 특히 "호라 1대"에 받은 영향이 크다고 한다.
6. 에피소드
신타니 히로시는 1994년에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1회 획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