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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국 경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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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는 1960년대 냉전 시기에 인도네시아 주도로 개최된 국제 스포츠 대회이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대만과 이스라엘의 참가를 거부하여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제재를 받은 인도네시아가, IOC를 제국주의의 도구로 비판하며, 서방 세계에 대항하는 신흥 세력의 연대를 목표로 창설했다. 1963년 자카르타에서 제1회 대회가 열렸으며, 1966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제2회, 즉 제1회 아시아 신흥국 경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신흥국 경기 연맹 해체로 대회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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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국 경기 대회
대회 정보
명칭신흥국 경기 대회
영어 명칭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약칭GANEFO
스페인어 명칭Juegos de las Nuevas Fuerzas Emergentes
프랑스어 명칭Jeux des Nouvelles Forces Emergentes
인도네시아어 명칭Pesta Olahraga Negara-Negara Berkembang
설립 연도1962년 ~ 1967년
유형스포츠 행사 조직
본부자카르타, 인도네시아
참가국51개국
창립자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용 언어영어 및 개최국 공식 언어
목적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인도네시아 선수단 자격 정지에 대한 보이콧
GANEFO 인장
GANEFO 인장
GANEFO 깃발
GANEFO 깃발
수카르노 대통령
관련 항목반둥 회의, GANEFO, 대립

2. 배경

제1회 GANEFO


1962년 아시안 게임의 정치적 논란으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제재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를 창설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대만이스라엘의 참가를 거부했는데, 이는 스포츠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IOC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다.[2]

수카르노는 IOC가 중국이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회원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고 반박하며, IOC를 "제국주의식민주의의 도구"라고 비판했다.[1] 그는 스포츠와 정치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주장하며, '신흥 세력 경기, 즉 GANEFO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3] GANEFO는 반서방 정서, 탈식민주의 운동, 그리고 1955년 반둥 회의의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4]

이후 수카르노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신흥 세력 회의'(CONEFO)를 결성했다.[5]

2. 1. IOC와의 갈등

인도네시아는 1962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1962년 아시안 게임에서 대만이스라엘의 참가를 거부하여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제재를 받았다.[2] 이는 스포츠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IOC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IOC는 인도네시아의 IOC 회원 자격을 무기한 정지시켰다.[2]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IOC가 중국이나 북베트남을 회원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IOC를 "제국주의식민주의의 도구"라고 비판했다.[1] 그는 스포츠와 정치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주장하며,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 창설을 제안했다.[3]

1962년 8월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1962년 아시안 게임에 인도네시아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이스라엘중화민국이 초청되지 않은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아랍 국가에 대한 종교적 친밀감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친밀감을 표시했다.

이러한 방침은 정치를 스포츠와 분리하려 노력해 온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의 이념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결국 IOC, 국제 육상 경기 연맹 (IAAF), 국제 역도 연맹 (IWF)은 제4회 아시안 게임을 정식 경기 대회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1963년 4월, IOC는 인도네시아의 IOC 가맹국 자격 정지 (올림픽 출전 정지)를 결의했고, 이에 대항하여 아랍 국가 12개국이 1964년 도쿄 올림픽 보이콧을 시사하는 등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IOC와 IAAF, 국제 수영 연맹 (FINA)과 같은 국제 경기 연맹 (IF)은 GANEFO에 출전하는 선수는 자격이 정지되어 올림픽에 참가할 자격을 잃게 된다고 선언했다.

2. 2. 신흥국들의 연대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스포츠와 정치를 결합하여 낡은 기성 질서에 맞서는 신흥 세력의 연대를 추구했다.[3] 가네포(GANEFO)는 반서방 정서, 탈식민주의 운동, 그리고 1955년 반둥 회의의 정신을 바탕으로 신흥국들의 결속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했다.[4]

1963년 4월, 캄보디아, 중국, 기니, 인도네시아, 이라크, 말리, 파키스탄, 베트남, 소련 10개국이 가네포 창설 계획을 발표했으며,[1] 같은 해 11월에는 36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했다.[1]

3. 제1회 가네포 (1963년, 자카르타)

1962년 아시안 게임에서 이스라엘중화민국이 초청되지 않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의 주도로 1963년 11월 10일부터 22일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제1회 신흥국 경기 대회(가네포)가 개최되었다. 수카르노는 아랍 국가들에 대한 종교적 친밀감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친밀감을 바탕으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에 대항하는 대회를 만들고자 했다.[11]

1963년 4월, IOC는 인도네시아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켰고, 이에 인도네시아는 IOC를 탈퇴하고 사회주의 국가, 아랍 국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호소하여 올림픽에 대항하는 종합 경기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초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10개국이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이후 51개국 2,700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12] 일본 선수들은 일본체육협회와는 무관한 단체 소속으로 참가했다.[11]

중화인민공화국은 유력 선수들을 출전시켜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 소련사회주의 국가 간의 단결을 보여주기 위해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IOC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올림픽 수준의 선수들은 보내지 않았다. 육상 경기, 역도, 양궁에서는 세계 기록이 수립되기도 했다.

IOC와 국제 경기 연맹(IF)은 가네포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올림픽에 참가할 자격을 잃게 된다고 경고했다.

3. 1. 참가국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아메리카의 51개국에서 약 2,700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12] 대한민국과 남베트남은 본 대회에 참석하지 않아 국명 표기에 대한 항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명은 코리아(KOREA)로, 북베트남의 국명은 베트남(VIETNAM)으로 표기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주요 참가국이었다. 일본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 개최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공식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았으나, 올림픽 참가가 어려운 2, 3진급 선수들의 개인적인 참가를 묵인했다.[7]

참가국은 다음과 같다.

국가


3. 2. 주요 사건 및 논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가네포 대회 출전 선수에 대해 올림픽 출전을 금지한다고 경고했다.[6] 북한의 여자 육상선수 신금단은 육상 200m, 400m, 800m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3관왕이 되었다. 특히 400m와 800m에서 각각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나, 국제육상경기연맹의 제재로 인해 비공인 기록이 되었다.[6]

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에서 신금단은 가네포 참가 이력으로 올림픽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올림픽 선수단 전원을 철수했다. 신금단은 올림픽 개막 직전, 도쿄에서 한국 전쟁 당시 헤어진 아버지 신문준과 극적으로 상봉했으나,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6]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축구 결승전에서 아랍 연합 공화국과 연장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 추첨으로 준우승을 차지했고,[6] 마라톤에서는 전만흥이 1위를 차지했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명을 'KOREA'로 표기하여 대한민국 측의 항의를 받았다.[6]

인도네시아는 가네포 참가를 이유로 196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6]

3. 3. 메달 집계

1963년 가네포 메달 집계
순위나라
합계
1중화인민공화국685845171
2소련2721957
3인도네시아17243071
4아랍 연합 공화국16141242
5북한14152352
6아르헨티나5049
7일본 제국4101428



제1회 가네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금메달 68개로 1위를 차지했고, 소련이 2위, 아랍 연합 공화국이 3위, 인도네시아가 4위, 북한이 5위를 차지했다.[8]

4. 제2회 가네포 (제1회 아시아 가네포, 1966년, 프놈펜)

제2회 가네포는 원래 1967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취소되었다.[4] 대신 1966년 11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제1회 아시아 가네포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반공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9·30 사건)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는 멀어졌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회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아시아 신흥국 경기 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친중파였던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4. 1. 아시아 대회로의 축소

제2회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는 아시아 이외 지역에서 외면받아 사실상 아시아 국가들만 참가하는 대회가 되었다. 이에 따라 대회 명칭이 '제1회 아시아 신흥국 경기 대회(아시아 가네포)'로 변경되었다.[14] 1966년 11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최되었으며,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대회를 열었다.[4]

참가국은 전 대회 51개국에서 크게 줄어든 17개국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캄보디아, 일본,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로 출전한 재일 조선인 출신 복서 김귀하가 일본 대사관에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4]

메달 집계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금메달 108개, 은메달 57개, 동메달 34개로 총 199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1위를 차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금메달 30개, 은메달 42개, 동메달 32개로 총 104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2위를 기록했다.

1966년 제2회 가네포/ 제1회 아시아 가네포 메달 집계
순위나라합계
1중화인민공화국1085734199
2북한304232104
3캄보디아10421062
4일본1012830


4. 2. 참가국



제2회 아시아 신흥국 경기 대회에는 17개국에서 약 2,000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참가국은 다음과 같다.

기니는 아시아 국가가 아닌 유일한 참가국이었으나, 1965년 8월 평양 예선에서 탈락하여 1966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4. 3. 주요 사건 및 논란


  • 1966년 아시안 게임 직전에 제1회 아시아 가네포가 열리면서, 아시안 게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 재일동포 출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권투 선수 겸 코치 김귀하(당시 27세)가 일본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망명 요청을 거부했고, 김귀하 코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14] 대한민국 정부는 김귀하 코치의 망명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캄보디아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캄보디아,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대한민국캄보디아와 단교했다.

4. 4. 메달 집계

1966년 제2회 가네포/ 제1회 아시아 가네포 메달 집계
순위나라합계
1중화인민공화국1085734199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04232104
3캄보디아10421062
4일본1012830



제2회 GANEFO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금메달 108개로 1위를 차지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위, 개최국인 캄보디아가 3위를 차지했다.[14]

5. 가네포의 폐지

1967년 9월, 제2회 아시아 가네포(제3회 가네포)가 1970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베이징이 대회 유치 계획을 철회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신흥국 경기 연맹은 해체되었다.

5. 1. 폐지 요인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와의 갈등, 참가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자격 문제, 개최국들의 정치적 상황 변화, 신흥국 경기 연맹 내부 분열 및 재정적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는 폐지되었다.

1963년 4월, IOC는 인도네시아의 IOC 가맹국 자격을 정지시키고, GANEFO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4]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9·30 사건이 발생하여 수하르토가 집권하면서 인도네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67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1970년 제2회 아시아 신흥국 경기 대회 개최가 예정되었으나, 베이징이 유치 계획을 철회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결국 열리지 못하고 GANEFO 조직은 해체되었다.

6. 가네포의 유산과 의의



인도네시아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대만과 이스라엘의 참가를 거부한 정치적 논란으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제재를 받았다. 이에 인도네시아는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를 창설했다.[2] IOC는 스포츠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원칙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IOC 회원 자격을 무기한 정지시켰다.[2]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IOC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북베트남을 회원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고 비판하며, IOC를 "제국주의식민주의의 도구"라고 칭했다.[1][3] 그는 스포츠와 정치를 결합하여 낡은 기성 질서에 맞서는 가네포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3] 가네포는 반서방 정서, 탈식민주의 운동, 1955년 반둥 회의의 영향을 받았다.[4]

1963년 4월, 10개국이 가네포 창설 계획을 발표했고, 11월에는 36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했다.[1] IOC는 가네포 참가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금지했다. 수카르노는 이후 중국의 지원을 받아 '신흥 세력 회의'(CONEFO)를 결성했다.[5] 가네포는 주로 새롭게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의 스포츠 선수들을 위한 대회였으며, 헌장에 정치와 스포츠의 밀접한 관계를 명시했다.

참조

[1] 서적 The New Emerging Forces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Research School of Pacific Studies
[2] 서적 The Olympic Movement's Response to the Challenge of Emerging Nationalism in Sport: An Historical Reconsideration of GANEFO http://doc.rero.ch/r[...] University of Manitoba
[3] 서적 A Political History of the Olympics Verso Books
[4] 간행물 The politicization of sport: GANEFO–A case study http://www.tandfonli[...] 2005-09
[5] 웹사이트 Fakta Sejarah: CONEFO http://megamercusuar[...]
[6] Youtube GANEFO opening ceremony footage https://www.youtube.[...]
[7] 간행물 Elite Competitive Sport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1958–1966: The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GANEFO) https://muse.jhu.edu[...] 2013-11-13
[8] 뉴스 Pembagian medal 1963-11-23
[9] 웹사이트 新兴力量运动会的缘起与中国和印尼的关系 http://www.hprc.org.[...] 国史网 2014-06-06
[10] 문서 The New Emerging Forces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Research School of Pacific Studies
[11] 웹사이트 GANEFO opening ceremony footage https://www.youtube.[...] 2018-02-18
[12] 문서 中国オリンピック委員会公式サイト http://en.olympic.cn[...]
[13] 문서 Ganefo I: Sports and Politics in Djakarta
[14] 서적 なんでもわかるスポーツ百科 67年版 評論・随筆篇 洋々社 1967-06-20
[15] 문서 衆議院文教委員会議事録 昭和42年11月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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