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프리카 전구 (제1차 세계 대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프리카 전구(제1차 세계 대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일련의 군사 작전들을 통칭한다.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방어에 취약했고, 주변은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은 식민지 총독의 지시 하에 초기에는 적대 행위를 자제했으나, 이후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연합국과 교전을 벌였다. 주요 전선으로는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등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지 주민들의 봉기와 강제 동원, 질병 등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전쟁 결과 독일은 식민지를 상실하고, 아프리카는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대부분 독립을 쟁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아프리카 전구 (제1차 세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분쟁제1차 세계 대전
날짜1914년 8월 3일 – 1918년 11월 25일
장소아프리카
결과연합군 승리
교전 세력
연합국연합국
''
'' 나이지리아 식민지
''
''
''
'' 보츠와나란드 보호령
''
'' 앵글로-이집트 수단
''
''
''
''
''
'' 우간다 보호령
'' 이집트 술탄국
''
''
'' 프랑스령 모로코
'' 프랑스령 알제리
''
''
''
''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 포르투갈령 앙골라
''
'' 이탈리아령 리비아
'' (1917-)
동맹국동맹국
''
''
''
''
''
''
지원국
'' (1915-1916)
공동 교전국
'' 다르푸르 술탄국
''
''
'' 세누시
지휘관
연합국 지휘관'' 조지 5세
'' 루이스 보타
'' 레이놀드 윈게이트
'' 얀 스뮈츠
'' 레몽 푸앵크레
'' 아리스티드 브리앙
'' 조르주 클레망소
'' 프랑수아 클로첼
'' 알베르 1세
'' 샤를 드 브로퀘빌
'' 샤를 톰뷔에
'' 아르망 휘게
'' 베르나디오 마차도
'' 아폰소 코스타
'' 알베스 로차다스
'' 호세 페레이라 질
'' 에마누엘레 3세
'' 비토리오 오를란도
'' 안토니오 사란드라
'' 지아초모 마르티노
'' 대니얼 에드워드 하워드
동맹국 지휘관'' 하인리히 스키니
'' 카를 에버마이어
'' 테오도르 사이츠
'' 파울 폰 레토보르벡
'' 자파르 알악사리
'' 자우디투
'' 알리 디나르
'' 마니 마리츠
'' 모하메트 하산
'' 아흐메트 세누시
기타
관련 항목남서아프리카 전역
서아프리카 전역 (제1차 세계 대전)
동아프리카 전역 (제1차 세계 대전)
북아프리카 전구 (제1차 세계 대전)
아프리카 민간인 사망자750,000명 (기근 및 질병)
영토 변화연합국에 의한 독일 식민지 합병
트리폴리타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잔존 권리 소멸
앵글로-이집트 수단에 의한 다르푸르 술탄국 합병
가루아의 독일군 참호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영국 제국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독일 식민지를 정복할 전력과 물자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독일 식민지 대부분은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어 체제가 미흡했고(독일령 동아프리카 제외),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등 연합국 식민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독일 식민지들은 각자 고립되어 싸울 수밖에 없었고, 연이어 연합군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파울 폰 레토-폴베크가 이끈 독일령 동아프리카군만은 전쟁 기간 내내 저항을 계속했으며, 독일의 휴전 협정 서명 이후에야 항복했다.[1]

2. 1. 전략적 상황

1880년대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획득했지만, 이 식민지들은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 등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에 둘러싸여 방어에 취약했다.[1] 아프리카 내 식민지 군대는 규모가 작고 장비가 부족했으며, 다른 식민지 군대를 공격하기보다는 내부 치안 유지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19세기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주로 아프리카인 노예화가 목적이었고, 이후 영토 정복으로 바뀌었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아프리카 식민지는 중립을 유지하기로 합의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유럽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를 두고 서로 싸울 계획이 없었다. 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전쟁 발발 소식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2] 동아프리카 스탠다드 지는 8월 22일 전쟁 대신 협력을 주장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유럽 백인들은 소수였기에 전쟁은 그들의 이익에 반했으며, 대부분의 식민지 정복은 최근의 일이라 불안정했고, 지역 권력 구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운영되었다. 유럽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아프리카 경제 조직도 최근에야 설립되기 시작했다.[2]

영국에서는 8월 5일 제국방위위원회 부위원장이 임명되었고, 영국의 제해권 확보와 해상 통신 유지를 우선순위로 하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독일의 석탄 저장소와 무선 연결 지점에 대한 공격은 독일 해상 탐지 시설 제거를 위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칭다오를 비롯한 극동 지역뿐만 아니라 빈트후크, 두알라, 다르에스살람 등 아프리카 지역, 영국령 골드코스트 바로 옆 토고의 무선 연결 지점은 연합군의 공격에 취약한 것으로 판단되었다.[3]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식민지를 정복할 전력과 물자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독일 식민지 대부분은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어 체제가 미흡했고(독일령 동아프리카 제외), 연합국 식민지(영국,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에 둘러싸여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독일 식민지는 각자 고립되어 싸울 수밖에 없었고, 연합군에 차례로 점령되었다. 그러나 파울 폰 레토-폴베크가 이끈 독일령 동아프리카군은 전쟁 기간 내내 저항을 계속했으며, 독일의 휴전 협정 서명 이후에야 항복했다.

3.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 제국은 1880년대에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보했지만, 이 식민지들은 방어에 취약했다.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 등 다른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1] 아프리카 내 식민지 군대는 규모가 작고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다른 식민지 군을 공격하기보다는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되었다.[1] 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주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후에는 영토 정복이 주요 목표였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아프리카 식민지는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유럽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를 두고 싸울 계획이 없었다.[1] 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도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았다.[1] 1914년 8월 22일 동아프리카 스탠다드 지는 전쟁 대신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유럽 백인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전쟁은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식민지 정복은 최근의 일이라 불안정했고, 지역 권력 구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유럽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아프리카 경제 조직들도 최근에 설립되었다.[1]

1914년 8월 5일 영국에서는 제국 방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임명되었고, 역내 병력이 예속되었다. 주요 목표는 영국의 제해권이 확보된 상황에서 지원할 수 있다면 고려하겠다는 것과 해안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독일의 석탄 저장소와 무선 연결지점에 대한 공격은 독일 해상 탐지 시설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으며, 칭다오를 비롯한 극동 지역뿐만 아니라 윈드호크, 두알라, 다르에르살람과 같은 아프리카 지역, 영국령 골드코스트 바로 옆에 있는 토고란트에 위치한 무선 연결지점은 연합군의 공격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2]

3. 1. 자이안 전쟁 (1914년-1921년)

독일 제국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에 의해 축출된 통치자들과 결탁하여 프랑스 식민지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지역의 스페인 당국은 비공식적으로 선전물과 자금의 유통을 용인했지만, 스페인을 통해 소총 5,000정과 탄약 50만 발을 밀반입하려는 독일의 음모는 저지했다.[1] 테스킬라트-이 마수사(Teşkilât-ı Mahsusa)는 북아프리카에 여러 명의 요원을 두었지만 모로코에는 두 명뿐이었다.[1] 자이안 전쟁은 1914년부터 1921년까지 프랑스와 베르베르족의 자이안 연맹 사이에서 프랑스 모로코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프랑스군은 중앙 아틀라스 산맥을 통해 프랑스 알제리 방향으로 동쪽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무하 우 함무 자이아니가 이끄는 자이안들은 타자케니프라의 도시를 곧바로 잃었지만 프랑스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고, 프랑스군은 정규군과 비정규군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된 그룹 모빌(Groupe mobile), 합동군사작전 편대를 설립하여 대응했다. 1914년 프랑스는 모로코에 8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914년부터 1915년까지 3분의 2가 프랑스에서 복무하기 위해 철수했고, 엘 헤리 전투(1914년 11월 13일)에서 600명이 넘는 프랑스 병사가 사망했다. 총독인 위베르 리오테는 그의 군대를 재편성하고 수동적 방어가 아닌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자이안 연맹에 대한 중앙 연합국의 정보 및 재정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력 부족 상태에서 프랑스에 손실을 입힌 습격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다.[2]

3. 2. 세누시 전역 (1915년-1917년)

1906년 이전까지 세누시는 사하라 사막의 비교적 평화로운 종교 집단으로 광신주의에 반대했다.[1] 이탈리아-튀르크 전쟁(1911년 9월 29일 ~ 1912년 10월 18일) 동안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해안을 점령했고, 세누시는 내륙에서 저항하며 이집트의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13년 이탈리아는 에탕기 전투에서 패했지만, 1914년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다시 우세를 점했고, 1월까지 세누시는 키레나이카 남동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세누시는 하루에 1,000발의 탄약을 생산하는 공장의 탄약을 사용하는 현대식 소총으로 무장한 약 1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요새화된 도시에 주둔한 이탈리아군과 사막을 배회하는 세누시 사이에는 간헐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1]

영국은 11월 5일에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오스만 제국은 세누시에게 서쪽에서 이집트를 공격할 것을 격려했다. 오스만 제국은 세누시가 수에즈 운하 방어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전에 시나이 반도에서 영국군에 대한 공격에 실패했고, 반대 방향에서의 공격으로 영국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했다.[2]



11월 6일, 독일 잠수함 U-35호가 Sollum 만에서 증기선을 어뢰로 격침시켰다. U-35호는 수면 위로 부상하여 해안 경비정 ''압바스''호를 격침시키고, 함포 사격으로 ''누르 엘 바흐르''호에 큰 피해를 입혔다. 11월 14일, 센누시 부족이 솔룸의 이집트군 진지에 공격을 가했고, 11월 17일 밤에는 센누시 부족 일부가 솔룸에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다른 일부는 해안 전신선을 끊었다. 다음날 밤, 솔룸에서 약 77.25km 떨어진 시디 바라니의 수도원이 300명의 무하피지아|muhafiziaar에 의해 점령되었고, 11월 19일 밤에는 해안 경비대원이 살해당했다. 11월 20일에는 솔룸에서 동쪽으로 약 48.28km 떨어진 이집트군 초소가 공격을 받았다. 영국군은 솔룸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머르사 마트루로 철수했고, 서부 국경군(A. 월러스 소장)이 창설되었다.[3] 12월 11일, 영국군 부대가 마트루-솔룸 도로를 따라 공격을 받았고, 와디 센바 전투에서 센누시 부족을 몰아냈다.[4] 12월 13일 와디 하셰이피아트에서 영국군은 다시 공격을 받아 저지당했지만, 오후에 포병이 개입하여 센누시 부족을 후퇴시켰다.[5]

영국군은 12월 25일까지 마트루에 남아 있다가 야간에 진격하여 센누시 부족을 기습했다. 와디 마지드 전투에서 센누시 부족은 패배했지만 서쪽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5] 항공 정찰 결과 마트루 인근 할라진에 더 많은 센누시 부족의 진영이 발견되었고, 1월 23일 할라진 전투에서 공격을 받았다. 센누시 부족은 교묘하게 후퇴한 후 영국군의 측면을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영국군은 중앙부대가 전진하여 센누시 부족의 주력을 격파하면서 측면에서 밀렸고, 센누시 부족은 다시 후퇴할 수 있었다.[6] 1916년 2월, 서부 국경군이 증원되었고, 영국군 부대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파견되어 솔룸을 재탈환했다. 항공 정찰에서 아가지아에 센누시 부족 진영이 발견되었고, 2월 26일 아가지아 전투에서 공격을 받았다. 센누시 부족은 패배했고, 후퇴하는 도중 도싯 예오먼리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예오먼리는 기관총과 소총 사격이 쏟아지는 야지에서 돌격했다. 영국군은 말의 절반과 184명 중 58명을 잃었지만, 센누시 부족이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센누시 부대의 해안 방면 사령관인 자파르 파샤가 사로잡혔고, 1916년 3월 14일 영국군이 솔룸을 재점령함으로써 해안 작전이 종결되었다.[7]

3. 3. 볼타-바니 전쟁 (1915년-1917년)



볼타-바니 전쟁은 1915년부터 1917년까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현재의 부르키나파소말리)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식민지 반란이었다. 이 전쟁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토착 아프리카 군대와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졌다. 1916년 절정기에 토착군은 1만 5천~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여러 전선에서 싸웠다. 약 1년간 여러 차례 패배를 겪은 후, 프랑스군은 반란군을 물리치고 지도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지만, 저항은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3. 4. 다르푸르 원정 (1916년)

1916년 3월 1일, 수단 정부와 다르푸르 술탄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1] 영국-이집트 다르푸르 원정은 다르푸르 지도자 술탄 알리 디나르가 영국-이집트 수단과 이집트 술탄국을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실시되었다. 이 침략은 서쪽에서 이집트로 진격하는 센누시 세력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2] 이집트 육군의 시르다르(사령관)는 다르푸르 국경 동쪽 200km 지점에 있는 철도 기점 라하드에 약 2,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3월 16일, 국경에서 90km 떨어진 나후드에 설치된 전진 기지를 출발하여 트럭에 탑승한 병력이 국경을 넘었으며, 4대의 항공기가 지원했다. 5월까지 병력은 다르푸르의 수도 엘파셰르에 가까이 접근했다. 5월 22일 베링기아 전투에서 푸르 족 군대가 패배하였고, 영국-이집트군은 다음 날 수도를 점령했다. 디나르와 약 2,000명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남쪽으로 이동했고, 공중 폭격을 받았다.[3]

카메룬 작전에서 돌아온 차드의 프랑스군은 다르푸르군의 서쪽 퇴로를 막았다. 디나르는 엘파셰르 남쪽 약 80.47km의 마라 산맥으로 후퇴하여 협상을 제안했지만, 영국은 그가 시간을 벌고 있다고 판단하고 8월 1일 협상을 중단했다. 내분으로 디나르와 함께하는 병력은 약 1,000명으로 줄었다. 8월 우기 이후 엘파셰르에서 서쪽과 남서쪽으로 영국-이집트군의 전초기지가 확장되었다. 10월 13일 디비스에서 작은 충돌이 발생했고, 디나르는 다시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국군은 그를 불신했다. 디나르는 남서쪽으로 규바로 도망쳤고, 소규모 병력이 추격했다. 11월 6일 새벽, 영국-이집트군은 규바 전투에서 공격했고, 디나르의 남은 추종자들은 흩어졌다. 술탄의 시신은 야영지에서 약 1.61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4] 원정 이후 다르푸르는 수단에 편입되었다.[5]

3. 5. 카오센 반란 (1916년-1917년)

아가 모하메드 와우 테기다 카오센(1880–1919)은 이카자잔 투아레그 연합의 아메노칼(족장)으로, 1909년부터 프랑스 식민군을 공격해왔다. 1914년 10월 페잔의 오아시스 도시 쿠프라에 있는 산우시야 지도부는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했다.[1] 아가데즈 술탄은 투아레그 연합들이 여전히 충성하고 있다고 프랑스인들을 설득했고, 카오센의 군대는 1916년 12월 17일 주둔지를 포위했다.[1] 카오센과 그의 형제 모크타르 코도고, 그리고 약 1,000명의 투아레그 약탈자들은 소총과 리비아의 이탈리아 왕립 육군으로부터 노획한 야포로 무장하여 여러 프랑스 구원대를 물리쳤다.[1] 투아레그족은 잉갈, 아소데, 아우데라스를 포함한 아에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1] 니제르 북부 지역은 석 달 넘게 반군의 통제하에 있었다.[1] 1917년 3월 3일, 진데르에서 온 대규모 프랑스 군대가 아가데즈 주둔지를 구원하고 도시들을 탈환하기 시작했다.[1] 특히 마라부트들을 중심으로 도시 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이루어졌지만, 많은 이들은 투아레그족도 반군도 아니었다.[1] 프랑스군은 아가데즈와 잉갈에서 공개적으로 130명을 즉결 처형했다.[1] 카오센은 북쪽으로 도망쳤고, 1919년 무르주크에서 지역 민병대에 의해 사살되었다.[1] 그의 형제는 1920년 다마가람 술탄국에서 투부족풀라 사이에서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후 프랑스군에 의해 사살되었다.[1]

3. 6. 소말릴란드 전역 (1914년-1918년)

영국 소말릴란드에서 디리예 구레는 더르위시 국가(Dervish state)의 술탄으로서 에티오피아와 유럽의 침략에 맞서 계속해서 전투를 벌였다.[1] 1914년 3월, 40명의 더르위시들이 영국 소말릴란드의 수도인 베르베라를 공격하기 위해 약 약 241.40km를 기마로 이동했고, 이는 상당한 공황을 야기했다. 11월에는 소말릴란드 낙타 부대 병력 600명과 인도군 650명이 심베르 베리스에 있는 세 개의 요새를 점령했지만, 1915년 2월에 다시 이 요새들을 점령하기 위해 돌아와야 했다. 영국은 부족한 자원을 고려하여 억제 정책을 채택하고, 사이드와 그의 6,000명의 지지자들을 소말릴란드 동부에 가두어 탈영을 유도하고 사이드가 자신의 부하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도록 조장했으며, 이는 성공적이었다.[2]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영국 동아프리카의 영국 식민 당국은 에티오피아와 소말릴란드의 무슬림들의 공격에 대한 우려를 갖게 되었지만, 1916년까지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1916년 동아프리카에 주둔한 인도군의 일부 무슬림 부대에서도 탈영과 자해 행위를 포함한 문제가 발생했다. 2월, 소말릴란드 출신의 약 500명의 아울리한 전사들이 세렌리의 영국 요새를 점령하고 주둔군 65명과 영국 장교를 살해했다. 영국은 북동쪽의 주요 요새인 와지르에서 철수했고, 아울리한이 패배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3] 오스만 제국의 지하드 선포로 인한 복잡성은 전반적인 무슬림 운동의 성장을 피하기 위해 영국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선포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때조차, 영국은 아프리카 지하드를 두려워했다.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기 위해, 1916년에 일부 원로들이 이집트로 가서 영국 제국의 군사력을 보게 되었다. 전함, 철도, 그리고 독일과 오스만 군인들로 가득 찬 포로 수용소는 큰 인상을 주었고, 6월 아랍 반란의 발발로 인해 더욱 커졌다.[4]

4. 서아프리카 전선

독일 제국은 1880년대에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었으나, 이 식민지들은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의 식민지에 둘러싸여 방어에 취약했다. 식민지 군대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무장이 제대로 되지 않아 치안 유지 목적이 컸다. 19세기 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노예 확보가 주 목적이었으나, 이후 영토 정복으로 바뀌었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는 유럽 전쟁 발발 시 아프리카 식민지는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으나,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유럽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를 둘러싸고 싸울 계획이 없었다.[1]

영국은 1914년 8월 5일 제국 방위위원회 부위원장을 임명하고, 독일의 석탄 저장소와 무선 연결지점에 대한 공격을 우선시했다. 특히 칭다오를 비롯한 극동 지역과 윈드호크, 두알라, 다르에르살람, 그리고 영국령 골드코스트 바로 옆 토골란트의 무선 연결지점이 연합군의 공격에 취약했다.[2]

서아프리카에서는 독일 식민지였던 토골란트(후에 토고)와 독일령 카메룬(후에 카메룬나이지리아 동부 일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 작전이 벌어졌다.

4. 1. 토고랜드 작전 (1914년)

토고 작전(1914년 8월 9일~26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와 영국이 서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 토고랜드(독립 후 토고와 가나의 볼타 지역이 됨)를 침공한 작전이었다. 8월 6일, 동쪽 다호메이(현 베냉)에서 프랑스군이, 8월 9일에는 서쪽 골드코스트(현 가나)에서 영국군이 식민지를 침공했다. 독일 식민군은 수도 로메와 해안 지방에서 철수한 후, 베를린을 토고랜드, 대서양, 남아메리카와 연결하는 새로운 무선국이 있던 카미나 북쪽으로 이동하며 지연 작전을 펼쳤다. 이웃 식민지인 골드코스트와 다호메이의 주요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해안에서 도로와 철도를 따라 북상했고, 소규모 부대는 북쪽에서 카미나로 집결했다.[2] 독일 방어군은 바필로, 아겔루브호에, 크라 전투에서 침략군을 수일간 지연시켰지만, 1914년 8월 26일 식민지 점령을 항복했다.[2]

1916년, 토고랜드는 승전국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1922년 7월에는 영국령 토고와 프랑스령 토고가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설립되었다.[2] 프랑스는 해안을 포함한 식민지의 약 60%를 차지했다. 영국은 토고랜드 서쪽의 인구가 적고 개발이 덜 된 작은 지역을 할당받았다.[2] 토고랜드의 항복은 아프리카에서 독일 식민 제국의 종말의 시작이었다.[2]

작은 식민지였던 독일령 토고란트는 개전 직후 거의 정복되었다. 연합군은 영국령 골드코스트(후의 가나 공화국)의 왕립 서아프리카 국경군(Royal West African Frontier Force; RWAFF)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다호메이(후의 베냉 공화국)의 Tirailleurs senegalais프랑스어(세네갈 원주민 부대)[2]가 침공하였고(프랑스군은 소규모 부대였음), 전투는 1914년 8월 27일까지 끝났다.

4. 2. 부사 반란 (1915년)

나이지리아 식민지(현재 나이지리아)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 식민 장교와 군대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철수하면서 지역 대리인을 통한 영국의 간접 통치 정책이 확대되었다. 영국은 지역 에미르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지만, 부사에서는 1912년 지방 정부의 재편으로 기존 통치자의 권위가 무너졌다.[1] 부사의 세습 에미르 키토로 가니는 물러나고 보르구 토후국이 분할되었으며, 각 지역은 바이트 알말|베이트-엘-말ar(토착 행정부)에 의해 통치되었다.[2]

1915년 6월, 약 600명의 반군이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부사를 점령하여 새로운 토착 행정부의 절반을 사로잡아 살해했고, 생존자들은 지역에서 도망쳤다. 영국 당국이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 반란은 공황을 야기했다.[3] 서아프리카 국경 방위군과 나이지리아 경찰의 소규모 부대가 부사로 진입하여 반군과 교전했다. 군인 사망자는 없었고, 150발의 총격만 있었다. 주동자 중 한 명인 사부키는 인근 프랑스 다호메이로 도망쳤고, 반란은 진압되었다.[4]

4. 3. 카메룬 작전 (1914년-1916년)

1915년 카메룬의 영국군 포병


1914년 8월 25일, 나이지리아의 영국군은 카메룬 북쪽 끝의 마라, 중앙의 가루아, 남쪽의 ㄴ산아캉을 향해 진격했다. 맥리어 대령의 지휘하에 가루아로 진군하던 영국군은 가루아 근처 테페의 독일 국경 초소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에서 영국군과 독일군 간의 첫 교전은 테페 전투에서 벌어졌고, 결국 독일군의 철수로 이어졌다. 북쪽의 영국군은 모라에 있는 독일 요새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작전이 끝날 때까지 공성전을 벌였다.[1] 남쪽의 영국군은 ㄴ산아캉을 공격했지만 독일군의 반격으로 패배하고 거의 전멸했다. 이것이 바로 ㄴ산아콩 전투이다.[2] 맥리어는 그의 부대를 독일의 거점인 가루아로 더 깊숙이 진격시켰지만 8월 31일 가루아 제1차 전투에서 격퇴당했다.[3]

1915년, 모라와 가루아에 있는 병력을 제외한 독일군은 새로운 수도인 야운데 근처 산악 지대로 철수했다. 봄에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거나 격퇴했고, 가루아 출신 크라일스하임 대위 지휘하의 부대는 나이지리아로 공세를 감행하여 구린 전투를 벌였다.[4] 프레드릭 휴 컨리프 장군은 6월에 가루아 제2차 전투를 시작했고, 이 전투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5] 카메룬 북부의 연합군 부대는 내륙으로 진격하여 6월 29일 응아운데레 전투에서 독일군을 패퇴시켰다. 컨리프는 남쪽으로 야운데로 진격했지만 폭우로 발이 묶였고, 그의 부대는 모라 공성전에 합류했다.[6] 날씨가 좋아지자 컨리프는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11월 6일 반조 전투에서 독일 요새를 점령했고, 연말까지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7] 12월에 컨리프와 도벨의 부대가 접촉하여 야운데 공격을 준비했다.[8] 이 해에 벨기에군과 프랑스군이 노이카메룬|Neukamerunde 대부분을 점령했고, 야운데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9]

1916년 카메룬의 세네갈 티라유르


1915년 12월 23일, 독일군은 리오 무니 스페인 식민지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연합군이 야운데를 사방에서 압박하자 독일 사령관 칼 짐머만은 남은 독일 부대와 민간인들에게 리오 무니로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2월 중순까지 약 7,000명의 Schutztruppen|슈츠트루펜de과 약 7,000명의 민간인이 스페인 영토에 도착했다.[10][11] 2월 18일, 모라 공성전이 끝나고 수비대가 항복했다. 대부분의 카메룬 주민들은 무니에 남았지만, 독일인들은 결국 페르난도 포로 이동했고, 일부는 스페인의 허가를 받아 네덜란드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베티족의 최고 족장을 포함한 일부 카메룬 주민들은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독일 자금으로 귀족처럼 생활했다. 독일군은 소위 "인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토착 두알라족에 대해 초토화 작전을 명령했다. 두알라 여성들은 독일군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였다. 독일군은 많은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중에는 백인 사령관이 "보이는 원주민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진 자바시도 포함된다.

4. 4. 아두비 전쟁 (1918년)

아두비 전쟁은 1918년 6월과 7월에 영국의 나이지리아 식민지와 보호령에서 발생한 봉기였다. 이는 식민 정부가 도입한 세금 때문이었다.[1] 식민 정부는 기존의 강제 노역 의무와 여러 가지 수수료와 함께 직접세를 도입했다. 6월 7일, 영국은 70명의 에그바족 추장들을 체포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세금을 내며 지역 지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6월 11일, 동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투입되었고, 7월 13일 에그바 반군들은 아그베시(Agbesi)에서 철로를 파괴하고 기차를 탈선시켰다. 다른 반군들은 와시미(Wasimi) 역을 파괴하고 영국 대리인을 살해했으며, 오실레(Osile) 오바도 공격받았다. 반군과 식민군 간의 적대 행위는 오티테(Otite), 타포나(Tappona), 모콜로키(Mokolaki), 라라코(Lalako)에서 약 3주 동안 계속되었지만, 7월 10일까지 반란은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영국 대리인과 에그바 북동부 지역의 아프리카 지도자인 오실레 오바를 포함하여 약 600명이 사망했지만, 이는 토지 분쟁 때문일 수도 있으며 봉기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2] 이 사건으로 1918년 아베오쿠타(Abeokutan)의 독립이 폐지되고 그 지역에 강제 노역이 도입되었으며, 직접세 부과는 1925년까지 연기되었다.[3][4]

5. 남서아프리카 전선

독일 제국은 1880년대에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었지만, 이 식민지들은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 식민지에 둘러싸여 방어에 취약했다. 아프리카 내 식민지 군대는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되었고, 수가 적고 무장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세기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노예 획득이 주 목적이었으나, 이후 영토 정복으로 바뀌었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아프리카 식민지는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유럽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를 두고 싸울 계획이 없었다. 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전쟁 소식에 열정적이지 않았다. 8월 22일 동아프리카 스탠다드 지는 전쟁 대신 협력을 주장했다. 유럽 백인들은 소수였고, 식민지 정복은 최근의 일이라 불안정했으며, 지역 권력 구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지속되었기 때문에 전쟁은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914년 8월 5일 제국 방위위원회 부위원장을 임명하고, 독일의 석탄 저장소와 무선 연결지점에 대한 공격을 우선시했다.[1] 칭다오를 비롯한 극동 지역과 빈트후크, 두알라, 다르에스살람, 토고란트 등의 아프리카 지역이 공격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을 대신하여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를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광대하고 건조한 지역이었다. 나미브 사막이 해안에 인접해 있었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대서양으로부터 약 320km 내륙에 위치한 식민지 수도 빈트후크 주변에 거주했다. 현지에는 방위군(Schutztruppede) 3,000명과 성인 남성 이주민 약 7,000명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1914년 8월,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는 독일 식민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중요성을 인식했다. 남아프리카 연방 총리 루이스 보타는 런던에 남아프리카가 스스로 방어할 수 있으며, 주둔 영국군을 프랑스에 파병할 수 있다고 알렸다. 영국 정부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침공 가능성을 묻자, 보타는 가능하다고 답했다.

5. 1.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작전 (1914년-1915년)

1914년 9월, 남아프리카 연방군은 헨리 루킨과 살로몬(마니) 마리츠 중령의 지휘 아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의 국경 지역에 배치되었다. 얼마 후, 다른 부대가 뤼데리츠 항을 점령했다.

1915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남쪽에서의 독일 남서아프리카 침공은 샌드폰테인 전투(1914년 9월 25일)에서 케이프 식민지와의 국경 근처에서 실패했다. 독일 용기병들은 영국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생존자들은 영국 영토로 돌아왔다.[3] 독일군은 또 다른 침공 시도를 막기 위해 남아프리카 연방을 침공했고, 1915년 2월 4일 연방 방위군과 독일 ''보호군'' 사이에 오렌지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 건널목을 장악하기 위한 작은 전투인 카카마스 전투가 벌어졌다. 남아프리카인들은 독일군이 강 건널목을 장악하고 강을 건너는 것을 막았다.[3]

1915년 2월, 남아프리카인들은 독일 영토를 점령할 준비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총리 루이스 보타는 북부군을 지휘하고, 얀 스무츠는 남부군 사령관을 맡았다.[6] 보타는 2월 11일 스와코프문트에 도착하여 독일 남서아프리카 해안 중간쯤에 있는 남아프리카 영토인 월피시 베이(또는 월비스 베이)에서 침공군을 계속 증강했다. 3월, 보타는 스와코프문트에서 스와코프 강 계곡과 그 철도를 따라 진격을 시작하여 오트짐빙웨, 카리빕, 프리드리히스펠데, 빌헬름스탈, 오카한자를 점령한 후 1915년 5월 5일 빈투크에 진입했다.[7]

독일군은 항복 조건을 제시했지만 보타는 거부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6] 5월 12일, 보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의 부대를 네 개 부대로 나누었다. 이들은 내륙의 독일군을 쿠네네와 카오코펠트의 해안 지역으로부터 격리시켰고 북동쪽으로 퍼져나갔다. 루킨은 스와코프문트에서 츠메브까지 철도선을 따라 이동했다. 다른 두 부대는 우익에서 빠르게 진격했는데, 마이부르크는 오타비 교차로로, 마니 보타는 츠메브와 철도 종착역으로 진격했다.[7] 북서쪽의 독일군은 7월 1일 오타비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고, 1915년 7월 9일 코랍에서 항복했다.[8]

사막에서 견인되는 남아프리카 군의 4.7인치 속사포


남쪽에서는 스무츠가 남서아프리카 해군 기지인 뤼데리츠부흐트에 상륙한 후 내륙으로 진격하여 5월 20일 케트만스호프를 점령했다. 남아프리카군은 남아프리카에서 국경을 넘어 진격한 두 부대와 합류했다.[8] 스무츠는 철도를 따라 북쪽으로 베르세바까지 진격했고, 5월 26일 이틀간의 전투 끝에 기베온을 점령했다.[6][9] 남쪽의 독일군은 북쪽으로 보타의 부대를 향해 후퇴해야 했다. 7월 9일, 남쪽의 독일군이 항복했다.[7]

5. 1. 1. 마리츠 반란 (1914년-1915년)

1914년 12월 케이프타운에 있는 로디지아 연대(Rhodesia Regiment) 병사들


코오스 더 레이(Koos de la Rey) 장군은 "미친 예언자"로 알려진 시에너 판 렌스부르크(Siener van Rensburg)의 영향을 받아 전쟁 발발이 공화국의 부활을 예고하는 징조라고 믿었으나, 8월 13일 보타와 스무츠에게 설득되어 반란을 일으키지 않기로 하고 8월 15일 지지자들에게 해산할 것을 지시했다.[4] 8월 26일 열린 회의에서 더 레이는 영국이나 독일이 아닌 남아프리카에 대한 충성을 주장했다. 연합 방위군(Union Defence Force) 사령관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바이어스(Christian Frederick Beyers) 준장은 전쟁에 반대하여 다른 반군들과 함께 9월 15일 사임했다. 코오스 더 레이 장군은 바이어스와 함께 9월 15일 포체프스트룸(Potchefstroom)에 있는 다량의 무기와 약 2,000명의 병력(그중 상당수가 동조자로 여겨짐)을 보유한 얀 켐프(Jan Kemp) 소령을 방문했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이것이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라고 판단했다. 바이어스는 아일랜드의 커러 반란(Curragh incident)과 유사하게 주요 군 장교들의 동시 사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후에 더 레이는 포스터 일당(Foster gang)을 찾기 위해 설치된 검문소에서 경찰관의 실수로 사살되었고,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더 레이가 암살당했다고 믿었다. 장례식 후 반군들은 전쟁을 비난했지만, 보타가 남서아프리카에서 군 복무를 자원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4] 마니 마리츠(Manie Maritz)는 10월 7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국경에 있는 연합군 부대를 이끌고 독일군과 연합하여 10월 9일 잠정 정부를 대표하는 선언을 발표하고 영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4] 바이어스, 크리스티안 더 웻(Christiaan de Wet), 마리츠, 켐프, 베주이덴하우트(Bezuidenhout) 장군은 부활한 남아프리카 공화국(1914-1915)의 초대 지도자가 될 예정이었다. 마리츠는 업핑턴(Upington) 지역의 케이모스(Keimoes)를 점령했다. 더 웻 장군이 이끄는 리덴부르크(Lydenburg) 부대는 하일브론(Heilbron)을 점령하고 기차를 습격하여 정부 물자와 탄약을 탈취했다.[4]

그 주말까지 더 웻은 3,000명의 병력을 확보했고, 바이어스는 마갈리에스베르크(Magaliesberg)에 약 7,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모았다. 루이스 보타 장군은 정부군 약 30,0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4] 정부는 10월 12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루이스 보타 장군과 얀 스마츠 휘하의 충성파들이 반란을 진압했다.[4] 마리츠는 10월 24일 패배하고 독일군에게 피신했으며, 바이어스 부대는 10월 28일 커미셔너스 드리프트(Commissioners Drift)에서 해산되었고, 이후 바이어스는 켐프와 합류했다가 12월 8일 발강(Vaal River)에서 익사했다.[4] 더 웻은 12월 2일 베추아날랜드(Bechuanaland)에서 체포되었고, 칼라하리 사막(Kalahari Desert)을 건너 800명 중 300명과 대부분의 말을 잃고 약 1,100km를 이동한 켐프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마리츠와 합류하여 12월 22일 오렌지 강(Orange River)을 건너 공격했다. 마리츠는 1915년 1월 13일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여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1월 24일 업핑턴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그 후 대부분의 반군은 1월 30일 항복했다.[4]

당시 남아프리카 연방의 아프리카너(부어르인)들 사이에는 독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것은 제2차 보어 전쟁에서 독일이 그들을 지원했고, 그로부터 불과 12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베이어스는 독일과의 개전에 반대하여 남아프리카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고, 오라니에 자유주 총독 대리 크리스티안 드 웻 등과 함께 보타와 대립했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의 국경에 배치된 남아프리카 연방군 부대 사령관 마리츠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과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4] 및 오라니에 자유주는 케이프주와 나탈뿐만 아니라,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며, 이들 지역에 거주하거나 국적을 가진 모든 백인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남아프리카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이상을 실현할 것을 여기에 요구한다.[5]

마리츠와 몇몇 고위 장교들은 곧바로 총 1만 2천 명에 달하는 반란 부대를 트란스발 주와 오라니에 자유주에 집결시켜 전투 준비를 했다. 이것이 부어르 반란(마리츠 반란)의 시작이다.

1914년 10월 14일,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루이스 보타의 지휘 아래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얀 스마츠는 반란 진압을 시작했다. 10월 24일, 마리츠는 패배하고 독일령으로 탈출했다. 반란은 1915년 2월 초에 사실상 진압되었다. 드 웻 등 부어르 반란의 주모자들은 6~7년의 징역형과 2000GBP 전후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하지만 1~2년 후에 석방되었다).

5. 1. 2. 앙골라에서의 독일군 작전 (1914년-1915년)

앙골라로 출병하는 포르투갈군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현재 앙골라) 남부에서의 작전은 1914년 10월부터 1915년 7월까지 진행되었다. 앙골라 남부의 포르투갈군은 알베스 로사다스(Alves Roçadas) 중령이 이끄는 군사 원정대에 의해 증강되었고, 이 원정대는 1914년 10월 1일 나미베(Moçâmedes)에 도착했다. 토골란드 카미나(Kamina)의 무선 송신기가 함락된 후,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은 쉽게 통신할 수 없었고, 1915년 7월까지 독일과 포르투갈이 전쟁 중인지 여부를 알지 못했다(독일은 1916년 3월 9일에 포르투갈에 선전포고).

1914년 10월 19일, 15명의 독일인이 허가 없이 앙골라에 들어온 사건이 발생했고, 나우릴라(Naulila) 요새에서 체포되었으며, 격전 끝에 3명의 독일인이 포르투갈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10월 31일, 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군이 쿠앙가르(Cuangar)의 작은 포르투갈군 전초 기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쿠앙가르 학살"로 알려졌으며, 8명의 병사와 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2월 18일, 비크토르 프랑케(Victor Franke) 소령이 이끄는 500명의 독일군이 나우릴라의 포르투갈군을 공격했다. 독일군의 포탄이 포르테 로사다스(Forte Roçadas)의 탄약고를 폭파시켰고, 포르투갈군은 오반보(Ovambo) 지역에서 움베(Humbe)로 철수해야 했으며, 69명이 사망하고 76명이 부상당했으며 79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12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다.[1] 현지 민간인들은 포르투갈군의 무기를 수집하여 식민 정권에 맞서 봉기했다.[2] 1915년 7월 7일, 페레이라 데 에사(Pereira d'Eça) 장군이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움베 지역을 재점령하고 주민들에게 공포 정치를 가했다.[2] 독일군은 남쪽으로 후퇴했고, 북쪽 국경은 오반보 봉기 동안 안전했으며, 이는 포르투갈군의 남쪽 작전을 방해했다. 이틀 후,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이 항복하여 남서아프리카 작전이 종식되었다.[2]

6. 동아프리카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제국은 1880년대에 획득한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 식민지들은 방어에 취약했다. 이들은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의 식민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프리카 내 식민지 군대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무장이 빈약했으며, 군사적 목적보다는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되었다. 19세기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주로 노예 확보를 목적으로 했고, 이후 영토 정복으로 바뀌었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아프리카 식민지는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유럽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를 두고 싸울 계획이 없었다. 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도 열정적이지 않았다.[1] 8월 22일 동아프리카 스탠다드 지는 전쟁 대신 협력을 주장했다. 유럽 백인들이 소수였기 때문에 전쟁은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식민지 정복은 최근의 일이었고 불안정했으며 지역 권력 구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유럽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아프리카 경제 내 조직들도 최근에 설립되었다.[2]

영국에서는 8월 5일 제국 방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임명되었고, 역내 병력이 예속되고 목표는 영국의 제해권이 확보된 상황에서 지원할 수 있다면 주요 목표를 고려하겠다는 것과 해안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독일의 석탄 저장소와 무선 연결지점에 대한 공격은 독일 해상 탐지 시설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칭다오를 비롯한 극동 지역뿐만 아니라 윈드호크, 두알라, 다르에스살람과 같은 아프리카 지역, 영국령 골드코스트 바로 옆에 있는 토고란트에 위치한 무선 연결지점은 연합군의 공격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3]

영국 제국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독일 식민지를 정복할 능력과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는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어 체계가 미흡했지만, 파울 폰 레토-폴베크가 이끈 독일령 동아프리카군은 예외적으로 전쟁 기간 내내 저항했고, 본국 독일의 휴전 협정 서명 이후에야 항복했다.

동아프리카 전선은 독일령 동아프리카(현재의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에서 시작되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현재의 모잠비크), 영국령 동아프리카(현재의 케냐),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 영국 보호령 우간다(현재의 우간다), 벨기에령 콩고(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로 확대되었다.

6. 1. 동아프리카 작전 (1914년-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동아프리카 전역은 1914년 8월 3일부터 1918년 11월 23일까지 탄자니아, 잠비아, 모잠비크, 르완다, 부룬디, 케냐,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진 연합국독일 제국 사이의 군사 작전이다. 이 전역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영국군은 4년간의 노력과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일 식민지 점령이나 독일군 진압에 실패했다.

파울 폰 렛토우-베르베크 대령(후일 소장)이 이끈 독일 식민지군은 기습, 타격 후 철수, 매복 공격 전술을 펼치며 연합군에 맞섰다. 독일군은 현지 물자를 이용하고 영국과 포르투갈의 군수품을 빼앗으며 전쟁 내내 저항했고, 독일의 휴전 협정 조인 후에야 항복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일부, 탕가니카호빅토리아호를 포함하는 광대하고 복잡한 지형이었다. 북서부의 비옥한 땅, 건조한 중앙부, 북동부의 초원, 남동부의 무인 삼림 지역 등 다양한 지형과 풍부한 수원을 가진 산맥이 있었다. 연안 지역에는 스와힐리족과 아랍인 상인들이 거주하며 중앙아프리카와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식민지 책임자인 하인리히 폰 슈네 총독은 적대 행위를 하지 않도록 지시했고, 북쪽의 영국령 동아프리카(케냐) 총독도 전쟁에 관심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6] 그러나 폰 레토우-폴베크 대령은 슈네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당시 독일 방위군(Schutztruppe)은 약 200명의 장교와 1,700명의 독일인 병사, 2,500명의 아스카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6. 1. 1. 군사 작전 (1914년-1915년)

1914년 탕가 전투에서 연합군의 패배를 묘사한 당시 그림


전쟁 발발 당시 동아프리카에는 독일 보호군(Schutztruppen) Schutztruppen|슈츠트루펜de 2,760명과 영국령 동아프리카 군대(King's African Rifles) 2,319명이 있었다.[7] 1914년 8월 5일, 우간다 보호령 출신의 영국군이 빅토리아 호 근처의 독일군 전초기지를 공격했고, 8월 8일에는 영국 해군 함정 아스트라에아(HMS Astraea)와 페가수스(HMS Pegasus)가 다르에스살람을 포격했다.[7] 8월 15일, 노이모시(Neu Moshi) 지역의 독일군이 킬리만자로 산의 영국령 측에 있는 타베타(Taveta)를 점령했다.[7]

9월에는 독일군이 케냐(영국령 동아프리카)와 우간다로 더 깊숙이 침투하여 1파운드 포(QF 1 pounder pom-pom)를 장착한 독일 보트가 빅토리아 호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영국은 우간다 철도의 호수 증기선 윌리엄 매킨넌(SS William Mackinnon), 카비론도(SS Kavirondo), 위니프레드(SS Winifred)와 시빌(SS Sybil)에 무장을 하고, 영국 보트 두 척이 독일 예인선을 포위하여 승무원이 자침시킴으로써 빅토리아 호의 지휘권을 되찾았다. 독일군은 나중에 예인선을 인양하고, 포를 회수하여 보트를 수송선으로 사용했다.[7]

thumb

영국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약탈을 진압하고 독일 식민지 북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인도 원정군 B(Indian Expeditionary Force B) 8,000명의 병력이 두 개 여단으로 나뉘어 1914년 11월 2일 탕가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우삼바라 철도의 인도양 종착역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킬리만자로 근처에서는 인도 원정군 C(Indian Expeditionary Force C) 4,000명의 병력이 한 개 여단으로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11월 3일 노이모시로 진격하여 철도의 서쪽 종착역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탕가를 점령한 후 B부대는 북서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C부대와 합류하고 나머지 독일군을 소탕할 계획이었다.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 지휘하의 독일 보호군은 탕가에서 8:1, 롱기도에서 4: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영국의 공식적인 ''제1차 세계 대전사''에서 찰스 호던(Charles Hordern)은 이 작전을 "...영국 군사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실패 중 하나"라고 적었다.[7]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1914년 8월에 시작되었다. 8월 15일, 루안다-우룬디의 독일군은 벨기에령 콩고의 여러 마을을 포격했다. 8월 22일, 탕가니카 호의 독일 군함은 알베르트빌(후의 칼레미) 항구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9월, 독일군은 인접한 영국령 동아프리카와 영국 보호령 우간다에 침입했다. 또한, 레토우-폴베크는 빅토리아 호에 소규모 함대를 창설했고, 그것은 작은 전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군은 빅토리아 호에서 제해권을 회복하기 위해 몇 척의 포정을 분해하여 철도로 호수로 운반했다. 1914년 11월 2일, 영국령 인도군 2개 여단탕가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은 상륙 부대를 격퇴했다(탕가 전투). 정확하고 치열한 포격이 해변 상륙 부대의 진격을 저지했고, 3일 후에는 상륙 부대를 배로 밀어냈다. 모래사장에는 독일군이 이듬해까지 거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물자들이 남아 있었다.[7]

6. 1. 2. 칠렘베 봉기 (1915년)

존 칠렘베는 말라위(당시 나이아살란드) 치라줄루 지구에서 활동한 천년왕국주의적 기독교 신자이자 워치 타워 협회 목사였다. 1915년 칠렘베가 주도한 봉기는 식민지 강제 노역, 인종 차별,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한 주민에 대한 새로운 요구 때문에 일어났다. 칠렘베는 아프리카인들에게서 재산과 인권을 빼앗은 유럽인들과의 전쟁 협력을 거부했다.[1]

1915년 1월 23일 저녁, 반란군이 농장을 공격하여 식민 개척민 3명을 살해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1월 24일 새벽 블랜타이어에서 또 다른 공격으로 여러 무기가 노획되었다.[2] 같은 날 식민 정부는 반란 소식을 접하고 정착민 민병대와 카롱가에서 온 영국 왕립 아프리카 소총대 두 개 중대를 동원했다. 1월 25일, 군인과 민병대는 봄브웨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반란군은 이후 인근 기독교 선교부를 공격했고, 밤에 봄브웨에서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로 도망쳤다.[3]

1월 26일, 정부군이 봄브웨를 점령했고, 칠렘베는 나중에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국경 근처에서 경찰 순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반란 진압 과정에서 40명 이상의 반란군이 사망하고 300명이 투옥되었다.[4]

6. 1. 3. 해군 작전 (1914년-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의 경순양함 SMS 쾨니히스베르크 (1905)de인도양에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잔지바르 항구에서 영국 순양함 HMS 페가수스를 격침시킨 후 루피지 강 삼각주로 후퇴했다.[7] 영국 케이프 함대의 군함들에 포위되자, 6인치 함포를 장착한 두 척의 모니터 함정, HMS 머지 (1914)영어와 HMS 세번 (1914)영어몰타에서 1915년 6월 루피지 강으로 예인되었다. 7월 6일, 추가 장갑을 장착하고 함대의 포격 지원을 받은 모니터 함정들은 강으로 진입했다. 함정들은 나무와 덤불에 숨겨진 육상 기지의 무기들의 공격을 받았다. 마피아 섬에 기지를 둔 두 대의 항공기는 쾨니히스베르크와의 약 10km 거리에서 포격전 중 포탄의 낙하를 관측했는데, 쾨니히스베르크는 육상 관측병의 지원을 받았다.[7]

머지는 두 차례 피격당해 승무원 6명이 사망하고 함포가 사용 불능이 되었으며, 세번은 탄착이 가까운 곳에 떨어졌지만 쾨니히스베르크를 여러 차례 명중시켰다. 그 후 관측 항공기가 기지로 돌아왔다. 나무 위에서 관측대가 발견되어 사살되었고, 두 번째 항공기가 도착하자 두 척의 모니터 함정은 다시 사격을 재개했다. 독일군의 반격은 양과 정확도가 떨어졌고, 오후 늦게 영국 함정들은 철수했다. 모니터 함정들은 6월 11일에 돌아와 8번째 일제 사격으로 쾨니히스베르크를 명중시켰고, 10분 안에 독일 함선은 3문의 함포만으로 반격할 수 있었다. 오후 12시 52분에 큰 폭발이 관측되었고, 오후 1시 46분에 7차례의 폭발이 발생했다. 오후 2시 20분까지 쾨니히스베르크는 불길에 휩싸였다.[7] 영국군은 페가수스에서 4인치 함포 6문을 인양했는데, 이들은 "페기포"로 알려졌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승무원들은 자함의 4.1인치 주포를 인양하여 보호군에 합류했다.[7]

1914년 8월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 15일, 루안다-우룬디의 독일군은 벨기에령 콩고의 여러 마을을 포격했다. 8월 22일, 탕가니카 호의 독일 군함은 알베르트빌(후의 칼레미) 항구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9월, 독일군은 인접한 영국령 동아프리카와 영국 보호령 우간다에 침입했다. 레토-포어베크는 빅토리아 호에 소규모 함대를 창설했고, 이는 작은 전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군은 빅토리아 호에서 제해권을 회복하기 위해 몇 척의 포정을 분해하여 철도로 호수로 운반했다. 1914년 11월 2일, 영국령 인도군 2개 여단이 탕가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은 상륙 부대를 격퇴했다(탕가 전투). 정확하고 치열한 포격이 해변 상륙 부대의 진격을 저지했고, 3일 후에는 상륙 부대를 배로 밀어냈다. 모래사장에는 독일군이 이듬해까지 거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물자가 남아 있었다.[7]

6. 1. 4. 탕가니카 호수 원정 (1915년)

독일군은 전쟁 발발 이후 3척의 무장 증기선과 2척의 무장하지 않은 모터보트를 이용해 탕가니카 호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1915년, 3파운드포와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 모터보트 두 척, HMS 미미(Mimi)와 HMS 투투(Toutou) (제프리 스파이서-심슨 사령관)가 육로로 약 4800km를 이동하여 탕가니카 호수의 영국령 해안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1915년 12월 26일 독일 선박 ''킹가니(Kingani)''를 나포하여 HMS 피피(Fifi)로 개명하고, 두 척의 벨기에 선박과 함께 독일 선박 ''헤드비히 폰 비스만(Hedwig von Wissmann)''을 공격하여 격침시켰다. MV 리엠바(Liemba)와 무장하지 않은 모터보트 ''와미(Wami)''만이 호수에 남은 독일 선박이었다. 1916년 2월 ''와미''는 승무원에 의해 해안으로 몰리고 방화되었다.[1] 파울 폰 레토브-포어베크는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의 함포를 제거하여 철도로 주요 전선으로 보냈다.[2] ''그라프 폰 괴첸(Graf von Götzen)''은 벨기에군이 영국이 제공한 수상기로 폭격을 가한 후, 벨기에 식민군이 키고마(Kigoma)를 공격하기 전인 7월 중순에 자침되었다. ''그라프 폰 괴첸''은 인양되어 영국군이 사용했다.[3]

6. 1. 5. 군사 작전 (1916년-1918년)

호레이스 스미스도리언 장군이 영국에서 동아프리카 작전 지휘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항해 중 폐렴에 걸려 얀 스무츠 장군으로 교체되었다.[8] 증원과 현지 모병으로 영국군은 1만 3천 명의 남아프리카인, 영국인, 로디지아인과 7천 명의 인도 및 아프리카 병력으로 증가하여, 아프리카 민간인으로 구성된 운반대를 포함해 총 7만 3,300명의 식량 배급 대상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벨기에군과 모잠비크에 주둔한 규모가 더 크지만 효율적이지 못한 포르투갈군 부대도 참전 가능했다. 1916년 얀 스무츠 장군이 레토우포르베크 격파 임무를 맡았다.

주요 공격은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북쪽으로 진행되었으며, 벨기에 콩고의 병력이 두 개의 부대로 서쪽에서 빅토리아 호를 건너 동아프리카 지구대로 진격했다. 다른 부대는 남동쪽에서 냐사 호수를 건너 진격했다. 독일군은 전투를 피했고 1916년 9월까지 다르에스살람 연안에서 우지지까지 이어지는 독일 중앙 철도는 영국군에 점령당했다.[8] 독일군이 독일령 동아프리카 남부로 제한되자 스무츠는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인도군을 왕립 아프리카 소총대로 교체하기 시작했고 1917년까지 동아프리카 영국군의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인이 되었다. 스무츠는 1917년 1월 런던의 제국 전쟁 내각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다.[8]

6. 1. 6. 벨기에-콩고 작전 (1916년)

1918년 동아프리카의 벨기에 프랑스어 군대인 강제 공화국(Force Publique)


1만 2,417명으로 구성된 벨기에 프랑스어 군대인 강제 공화국(Force Publique)은 각각 7,000~8,000명의 운반꾼을 거느린 세 개의 부대로 나뉘었지만,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다. 1915년 수확량은 이미 고갈되었고, 1916년 수확량은 아직 익지 않았다. 벨기에의 징발은 현지 민간인들의 반감을 샀다. 4월 5일, 벨기에군은 독일군에게 휴전을 제안한 후, 4월 12일 적대 행위를 시작했다. 샤를 톰뵈르(Charles Tombeur) 장군, 몰리토(Molitor) 대령, 올센(Olsen) 대령의 지휘 아래 강제 공화국은 키갈리와 냐자 사이를 진격하여 5월 6일 키갈리(Kigali)를 점령했다. 부룬디의 독일군은 후퇴했고, 6월 17일까지 벨기에군은 부룬디와 르완다를 점령했다. 강제 공화국과 영국 호수 부대(Lake Force)는 독일 동아프리카 중부의 행정 중심지인 타보라(Tabora)로 진격했다. 연합군은 세 개의 기둥으로 이동하여 비하라물로(Biharamulo), 므완자(Mwanza), 카레마(Karema, Tanzania), 키고마(Kigoma) 및 우지지를 점령했다. 타보라는 9월 19일 무혈 입성했다.[1] 독일 식민지에 대한 벨기에의 영유권 주장을 막기 위해 스무츠는 벨기에군에게 르완다와 부룬디를 제외한 콩고로의 복귀를 명령했다. 영국은 1917년 벨기에군을 소환해야 했고, 그 후 연합군은 작전 계획을 조정했다.[2]

참전한 벨기에령 콩고군은 상당히 대규모였는데, 전투 부대를 제외한 후방 지원 부대만 해도 약 260,000명의 운반병이 동원되었다. Charles Tombeur 장군, 모리토르 대령 및 올센 대령이 이끄는 벨기에령 콩고의 식민지 군대(공안군)는 1916년 4월 18일에 참전했다. 그들은 5월 6일키갈리를 점령했다. 부룬디의 독일군은 선전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벨기에령 콩고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6월 6일, 그들은 우숨부라를 공략했고, 그 무렵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완전히 제압했다.

벨기에령 콩고군은 그 후 타보라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그들은 3개의 종대(縱隊)로 탕가니카에 진격하여 비하람로, 음완자, 카레마, 키고마 및 우지지를 공략했다. 수일에 걸친 격전 끝에 그들은 타보라를 제압했다. 벨기에가 독일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우려한 스마츠는 서둘러 르완다와 부룬디를 점령한 벨기에군을 콩고로 돌려보냈다. Charles Tombeur 장군 지휘하의 벨기에군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행정 중심지 타보라를 점령했다.

6. 1. 7. 군사 작전 (1917년-1918년)

아프리카 예술가가 그린, 아버콘에서 영국군에 항복하는 폰 레토우-베르베크


1917년 7월, 야코프 판 데벤터(Jacob van Deventer) 소장은 공세를 시작하여 가을 초까지 독일군을 남쪽으로 약 160km 밀어붙였다.[9] 1917년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레토우-포르벡과 영국군은 마히와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는데, 독일군 사상자는 519명, 영국군 사상자는 2,700명이었다.[9] 이 전투 소식이 독일에 전해지자 레토우-포르벡은 소장으로 진급했다.[9]

영국군은 보호군(Schutztruppe)을 더 남쪽으로 밀어붙였고, 11월 23일 레토우-포르벡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로 들어가 포르투갈 수비대의 물자를 약탈했다. 독일군은 9개월 동안 부대, 운반병, 아내, 아이들이 포함된 무리를 이끌고 모잠비크를 행군했다. 레토우-포르벡은 부대를 세 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테오도르 타펠(Theodor Tafel) 대위(Hauptmann)가 이끄는 1,000명의 분견대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항복해야 했다. 레토우-포르벡과 타펠은 서로 하루 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9]

독일군은 독일 동아프리카로 돌아와 1918년 8월 북부 로디지아로 진입했다. 11월 13일, 프랑스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이틀 후, 독일군은 카사마를 무혈 점령했다. 다음 날 잠베지 강에서 레토우-포르벡은 휴전 조인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고, 휴전에 동의했다. 레토우-포르벡은 자신의 군대를 아버콘으로 행군하여 1918년 11월 23일 공식적으로 항복했다.[9] 레토우-포르벡 기념비는 잠비아에 있다.

6. 2. 마콘베 봉기 (1917년)

1917년 3월, 마콘데족은 어느 정도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현 모잠비크) 잠베지아 주에서 포르투갈 식민 지배자들에 반기를 들었고, 식민 정권을 패퇴시켰다. 약 2만 명의 반군이 테테에 있는 포르투갈군을 포위했다. 영국은 포르투갈에 병력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약 1만~1만 5천 명의 응고니족이 전리품, 여성, 어린이를 약속받고 포르투갈군에 합류했다. 포르투갈은 테러와 노예화를 통해 연말까지 반란을 진압했다.[1] 1918년 북로디지아의 영국 행정관들은 특히 1917년-1918년 기근 기간 중 전쟁 봉사에 대한 현지 민간인들의 보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란의 여파가 계속되었다. 식민청은 식민지에서 현지 민간인을 강제로 영국군에 동원하는 것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영국군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1]

6. 3. 바루에 봉기 (1917년)

포르투갈 모잠비크 식민 당국은 전쟁 중 점령의 잔혹성을 더욱 증가시켰다. 영국이 비판한 "반란 행위"는 노예 제도 폐지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역과 같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었다. 징집반(''cipais'')은 가장 잔혹한 강제력을 사용하여 노인과 허약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구를 동원했으며, 여성들은 강간당했다.[1] 1916년 말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포르투갈을 피해 남부 로디지아와 트란스발로 도망쳐 생계를 유지했다.[1]

1917년 3월, ''cipais''가 바루에 왕국에서 5,000명의 운반꾼을 더 모으려고 시도하자, 남겨진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1] 포르투갈의 약탈에 대한 분노는 많은 민족을 하나로 묶었지만, 바루에의 마콤베 칭호를 놓고 경쟁하는 세력들은 독립적인 운동을 벌였고 잠베지 계곡의 산적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1] 4월 말, 반군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포르투갈군을 격파하고 테테 주도에 도착했으며, 5월 말까지 자메지아 주 대부분을 점령했다.[1]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폭력을 피해 영국 니아살란드와 로디지아 식민지로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포르투갈 방식에 대한 영국의 냉담함을 거의 바꾸지 못했고, 칠렘베 반란 진압을 돕기 위해 군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군대 파병을 거부하고 국경 너머로 총과 탄약만 보냈다.[1]

5월에 포르투갈은 수천 명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노예로 삼고, 영토를 약탈함으로써 반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1] 반군은 11월까지 버텼고 마콤베 칭호를 놓고 경쟁하는 세력들은 남부 로디지아로 도망쳤다.[1] 6월 동안 포르투갈은 군대를 나누어 수천 명의 포르투갈과 현지 군인을 파견하여, 역시 반란을 일으킨 무아 고원에 사는 마콘데 사람들을 공격해야 했다.[1] 1918년 초에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1]

7. 전후 처리 및 분석

이 전쟁은 독일 식민지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전쟁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자유주의와 계몽의 십자군으로 자처했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여겼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3] 많은 아프리카인 병사들이 민족주의보다는 군사적 전문성에 충실하여 양측에서 싸웠으며, 짐꾼들은 주로 임금에 이끌리거나 강제로 동원되었다.[3] 이 전쟁은 아프리카 분할의 마지막 시기였다.[3] 영토의 통제와 합병은 유럽인들의 주요 전쟁 목표였고, 파울 폰 레토-폴베크의 주요 성과는 남아프리카 식민주의자들의 야망 중 일부를 좌절시킨 것이었다.[3]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의 식민지는 프랑스,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 남아프리카에 분할되었다.[4] 1960년대까지 전 독일 식민지들은 독립을 쟁취했지만,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는 1990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독립을 얻었다.[4]

8. 사상자

제1차 세계 대전의 아프리카 전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상당했으며, 전투와 질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우팡가 로드 묘지


국가전사자기타 사망자총 사상자
영국군3,443명6,558명 (질병)10,001명 이상[10]
프랑스군1,685명117명 (질병)1,802명
남아프리카군113명153명 (질병/사고)266명
독일군103명1,085명 (포로 등)1,188명



토고와 카메룬 전역에서는 영국군 927명, 프랑스군 90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쟁에 동원된 아프리카인 짐꾼들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약 1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짐꾼으로 징집되었으며, 이 중 약 9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질병, 과로에 시달렸으며, 많은 수가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희생되었다.[11]

전쟁은 아프리카 민간인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식량 부족과 기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역기근 사망자스페인 독감 사망자
루안다, 우룬디, 독일 동아프리카300,000명-
영국 동아프리카-160,000~200,000명
남아프리카-250,000~350,000명
독일 동아프리카-인구의 10~20%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1,500,000~2,000,000명



이처럼 아프리카 전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숨겨진 비극 중 하나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통받고 희생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War Losses (Africa) http://encyclopedia.[...] 2016-05-23
[2] 서적 The First World War
[3] 서적 The First World War
[4] 문서 注:日本では一般にトランスヴァール共和国と呼ばれる。
[5] 웹사이트 Hypertext version of The Rise of the South African Reich, Brian Bunting, chapter 1. http://www.anc.org.z[...] 2008-05-07
[6] 서적 The First World War
[7] 서적 The First World War
[8] 서적 The Great War
[9] 웹사이트 The Northern Rhodesia Journal online Vol IV No 5 http://www.nrzam.org[...] 2007-03-07
[10] 서적 The First World War
[11] 문서 訳注: スペインかぜのこ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