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무으타디드
1. 개요
알-무으타디드는 892년부터 902년까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다. 그는 "사마라의 혼란" 시기에 성장했으며, 아버지 알 무와파크의 섭정 아래 군사 경험을 쌓았다. 알 무으타디드는 제국 재건을 위해 군사력과 외교를 활용했으며, 툴룬 왕조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지라, 남캅카스, 비잔틴 전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했다. 또한, 사파르 왕조와의 협력을 통해 동방 지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종파주의의 대두와 주변부의 분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재정 정책을 개선하고 관료제를 강화했으며, 바그다드로 수도를 이전하고 학문과 과학을 장려했다. 알 무으타디드는 가혹한 사법 집행으로 유명했으며, 902년에 사망한 후 아들 알 무크타피가 뒤를 이었다. 그의 통치는 아바스 왕조의 쇠퇴를 잠시 늦추었지만, 장기적인 회복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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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아부 알-ʿ압바스 아흐마드 알-무으타디드 비'llāh |
|---|---|
| 로마자 표기 | Abū al-ʿAbbās Aḥmad ibn Ṭalḥa al-Muʿtaḍid Biʿllāh |
| 아랍어 표기 | أبو العباس أحمد بن طلحة الموفق المعتضد بالله |
| 칭호 | 칼리파, 신자의 사령관 |
| 칼리파 | 아바스 왕조의 16대 칼리파 |
|---|---|
| 재위 기간 | 892년 10월 15일 – 902년 4월 5일 |
| 이전 | 알무으타미드 |
| 이후 | 알무크타피 |
| 출생 | 854년경 또는 861년경 |
|---|---|
| 출생지 | 사마라, 아바스 왕조 |
| 사망일 | 902년 4월 5일 (41세 또는 48세) |
| 사망지 |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
| 매장지 | 바그다드 |
| 배우자 | 카트르 안나다 |
|---|---|
| 자녀 | 알무크타피 알무크타디르 알카히르 하룬 마이무나 |
| 아버지 | 알무와파크 |
| 어머니 | 디라르 |
| 종교 | 수니 이슬람 |
|---|
| 왕조 | 아바스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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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2년 사망 -
이프리키야의 이브라힘 2세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왕조 아미르인 이브라힘 2세는 초기 경제적 번영과 건축 사업을 이뤘으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공포 정치를 펼쳐 폭군으로 악명을 떨쳤고 말년에 시칠리아 정복을 완수했으나 이질로 사망하며 왕조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 -
9세기 출생 -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신라 경문왕의 딸로, 정강왕 사후 887년에 즉위하여 음란한 행실과 국정 문란, 민란 발생으로 혼란을 겪다가 897년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사망했다. -
9세기 출생 -
랑다르마
랑다르마는 토번의 짼뽀로서 초기에는 무위정치를 펼쳤으나, 839년 이후 재난으로 인한 사회 혼란 속에서 불교 탄압을 단행하여 티베트 불교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승려에 의해 암살된 후 토번 멸망의 원인이 되었고, 폭군이라는 부정적 평가와 혼란 수습을 위한 통치자라는 재평가가 공존한다.
2. 초기 생애
알무으타디드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타와킬(재위 847년~861년)의 아들인 탈하와 비잔틴 제국 출신 노예였던 디라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즉위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854년 또는 861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861년, 알무타와킬이 맏아들 알문타시르(재위 861년~862년)와 공모한 튀르크 근위병에게 살해당하면서 아바스 왕조는 '사마라의 혼란'으로 불리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아흐마드의 삼촌 알무타미드(재위 870년~892년)가 즉위한 870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실권은 튀르크족 노예 병사(ghilmān아랍어)와 아흐마드의 아버지 탈하에게 있었다. 탈하는 칼리프 정부와 튀르크족 사이의 주요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알무와파크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칼리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882년, 알무타미드가 이집트로 도망치려다 실패하여 가택 연금되면서 알무와파크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사마라의 혼란 기간 동안 칼리프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870년대에 중앙 정부는 이라크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서쪽에서는 이집트가 튀르크족 노예 병사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시리아를 두고 알무와파크와 대립했다. 호라산과 동부 지역 대부분은 사파르 왕조에게 넘어갔다.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도 지역 권력자들에게 넘어갔으며, 타바리스탄에서는 자이드파 왕조가 권력을 잡았다. 이라크에서조차 잔지 반란이 일어나 바그다드를 위협했고, 남쪽에서는 카르마타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알무와파크는 칼리프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이븐 툴룬에게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기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이븐 툴룬은 영토를 확장하고 세습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알무와파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려는 사파르 왕조의 침략을 격퇴하고 잔지를 진압하여 이라크의 핵심 지역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알 무타디드는 아불 아바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잔지 반란 진압에 참여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알 무와파크는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군사 훈련을 시켰고, 알 무으타디드는 뛰어난 기수이자 병사와 말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는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879년, 야쿠브 알-사파르가 사망하면서 압바스 정부는 잔지 반란 진압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부 알 아바스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883년, 압바스 군대는 잔지의 수도 알-무크타라를 함락시키며 반란을 종식시켰다.
884년, 이븐 툴룬이 사망한 후 아바스 왕조는 시리아의 툴룬 왕조를 공격했으나, 초기 승리 이후 실패했다. 알 무타디드는 툴룬 왕조를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몰아냈지만, 다른 장군들과의 불화로 작전을 포기했다. 타와힌 전투에서 알 무타디드는 이븐 툴룬의 아들 후마라와이흐에게 패배했다. 886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알 무와파크는 후마라와이흐를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습 총독으로 인정해야 했다.
알 무타디드와 알 무와파크의 관계는 악화되어 889년 알 무타디드는 투옥되었다. 891년, 알 무와파크가 사망 직전에 이르자, 알 무타디드는 석방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알 무타디드는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고, 알 무타디드 빌라라는 칭호를 얻었다. 892년, 알 무타미드가 사망하자 알 무타디드는 칼리프로 즉위했다.
2.1. 출생과 배경
알무으타디드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타와킬(재위 847년~861년)의 아들 탈하와 비잔틴 제국 출신 노예 디라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즉위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854년 또는 861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861년, 알무타와킬이 튀르크 근위병에게 살해당하면서 아바스 왕조는 '사마라의 혼란'으로 불리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아흐마드의 삼촌 알무타미드(재위 870년~892년)가 즉위한 870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실권은 튀르크족 노예 병사(ghilmān아랍어)와 아흐마드의 아버지 탈하에게 있었다. 탈하는 칼리프 정부와 튀르크족 사이의 주요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알무와파크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칼리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2.2. 잔지 반란 진압
알 무으타디드는 아부 알 아바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잔지 반란 진압에 참여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군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통치 기반이 되었다. 알 무와파크는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군사 훈련을 시켰고, 알 무으타디드는 뛰어난 기수이자 병사와 말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는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869년 반란 발발 이후 10년 만에 잔지 세력은 바스라와 와시트를 비롯한 이라크 남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후제스탄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바그다드를 위협했다. 879년, 야쿠브 알-사파르가 사망하면서 압바스 정부는 잔지 반란 진압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부 알 아바스는 879년 12월,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아부 알 아바스와 그의 ghilmān아랍어 (특히 지라크 알-투르키)은 메소포타미아 늪지에서 벌어진 수륙 양면 작전을 포함한 장기간의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압바스 군대는 증원군, 자원병, 잔지 탈영병의 합류로 병력이 늘어났지만, 정예 ghilmān아랍어 부대가 군대의 중추를 이루어 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의 주된 부분을 담당했으며, 아부 알 아바스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883년 8월, 압바스 군대는 잔지의 수도 알-무크타라를 함락시키며 반란을 종식시켰다. 알-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알-무와파크와 아부 알-아바스는 이슬람 국가를 수호한 영웅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칼리프의 권력을 사실상 찬탈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2.3. 툴룬 왕조와의 관계
884년, 이븐 툴룬이 사망한 후 아바스 왕조는 시리아의 툴룬 왕조를 공격했으나, 초기 승리 이후 실패했다. 알 무타디드는 툴룬 왕조를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몰아냈지만, 다른 장군들과의 불화로 작전을 포기했다. 타와힌 전투에서 알 무타디드는 이븐 툴룬의 아들 후마라와이흐에게 패배했다. 886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알 무와파크는 후마라와이흐를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습 총독으로 인정해야 했다.
893년 봄, 알 무으타디드는 후마라와이흐를 이집트와 시리아의 자율적인 에미르로 재확인하고, 연간 30만 금 디나르의 조공과 체납된 20만 디나르, 그리고 디야르 라비아와 디야르 무다르 두 자지란 지역을 칼리프 통치로 반환하는 대가로 이 지위를 인정했다.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후마라와이흐는 자신의 딸 카트르 알-나다(이슬 방울)를 칼리프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신부로 제안했지만, 알 무으타디드는 그녀와 직접 결혼하기로 선택했다. 툴룬 공주는 지참금으로 100만 디나르를 가져왔는데, 이는 "중세 아랍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결혼 선물"로 여겨졌다. 그녀가 바그다드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수행원의 사치와 낭비는 가난한 칼리프 궁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알 무으타디드의 수석 내시는 철저한 수색 끝에 궁전을 장식할 정교한 은과 금 촛대 다섯 개만을 찾을 수 있었지만, 공주는 각자 그러한 촛대를 들고 있는 150명의 하인과 동행했다. 그러자 알 무으타디드는 "가서 우리 가난함 속에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숨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 무으타디드는 툴룬 재무부를 거의 파산시킬 정도로 막대한 지참금을 "재정적 함정"으로 의도적으로 꾸민 것일 수도 있다. 칼리프 왕조와 연결되는 영예 외에 툴룬은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카트르 알-나다는 결혼 직후 사망했고, 896년 후마라와이흐의 살해로 인해 툴룬 국가는 미성년 아들들의 불안정한 손에 놓였다. 알 무으타디드는 이를 신속하게 이용하여 897년에 수구르 국경 에미레이트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는데, 마이클 보너는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연례 여름 원정을 명령하고 비잔틴 제국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는 오래된 칼리프 특권을 맡았다"라고 언급했다. 게다가 그의 지위에 대한 칼리프의 인정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툴룬 통치자 하룬 이븐 후마라와이흐는 홈스 북쪽의 모든 시리아를 반환하고 연간 조공을 45만 디나르로 늘리는 추가 양보를 해야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남은 툴룬 영토 내에서 국내 혼란이 증가하고 카르마티아 공격이 확대되면서 많은 툴룬 추종자들이 부활하는 칼리프에게 망명하도록 장려했다.
2.4. 투옥과 즉위
알 무타디드와 그의 아버지 알 무와파크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889년 알 무타디드는 투옥되었다. 891년, 알 무와파크가 사망 직전에 이르자, 알 무타디드는 석방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알 무타디드는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고, 알 무타디드 빌라라는 칭호를 얻었다. 892년, 알 무타미드가 사망하자 알 무타디드는 칼리프로 즉위했다.
884년, 아불 아바스(알 무타디드)의 ghilmān(군인 노예)들은 급여 미지급 문제로 추정되는 이유로 알 무와파크의 재상 사이드 이븐 마클라드에 대항하여 바그다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889년, 아불 아바스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그에게 충성하는 ghilmān들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갇혀 있었다.
891년 5월, 통풍으로 고통받던 알 무와파크는 죽음에 가까워졌고, 재상 이스마일 이븐 불불과 바그다드 시장 아불 사크르는 후계자 알 무파와드를 포함한 알 무타미드와 그의 아들들을 도시로 불렀다. 아불 아바스를 소외시키려는 이 시도는 병사들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로 인해 실패했다. 아불 아바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풀려났고, 6월 2일에 알 무와파크가 죽자마자 즉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바그다드 폭도들은 그의 반대자들의 집을 약탈했고, 이븐 불불은 해임되어 투옥되었으며, 몇 달 후 학대로 사망했다.
"전능"해진 아불 아바스는 아버지의 모든 직위를 물려받았고, 알 무타디드 빌라라는 칭호와 칼리프 및 알 무파와드 다음의 계승 서열을 얻었다. 몇 달 후인 892년 4월 30일, 알 무타디드는 그의 사촌을 계승 서열에서 완전히 제거했다. 그리하여 892년 10월 14일에 알 무타미드가 사망하자 알 무타디드는 칼리프로 권력을 잡았다.
3. 통치
알 무으타디드는 아버지 알 무와파크처럼 군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는 이슬람의 전사([[가즈이 (전사)아랍어)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직접 원정에 나섰다. 그는 아바스 칼리프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군사력과 외교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는 패배시키기 어려운 상대와는 타협할 줄 아는 노련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알 무으타디드는 자지라(메소포타미아 상류 지역)에서 여러 세력과 대립했다. 893년, 하와리즈파의 내분을 틈타 모술을 점령했다. 895년, 타글리브족의 지도자 함단 이븐 함둔을 사로잡았다. 896년, 함단의 아들 후세인 이븐 함단이 하와리즈파 지도자를 체포하여 바그다드로 압송, 십자가형에 처했다. 후세인은 이를 계기로 칼리프 군대에서 경력을 쌓고 함단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898년 샤이반족의 아흐마드 이븐 이사 알 샤이바니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알 샤이바니가 아미드를 계승했다. 그러나 899년, 알 무으타디드는 자지라로 돌아와 무함마드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알 무크타피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자지라 전역을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남캅카스 지역에서는 칼리프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중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사실상 독립 왕조의 손에 넘어갔다. 사지 왕조의 데브다드 이븐 무함마드는 이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굳혔다. 900년, 타르수스 유력자들이 디야르 무다르 지방을 점령하려 하자, 알 무으타디드는 이들을 체포하고 함대를 불태웠다. 이는 아랍-비잔틴 전쟁에서 큰 손실이었는데, 타르수스는 비잔틴 국경 습격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다미안 오브 타르수스가 이끄는 시리아 함대는 데메트리아스 항구를 약탈하는 등 에게 해에서 아랍 함대가 활약했지만, 멜리아스 등 아르메니아 난민 유입으로 비잔틴은 육상에서 강화되어 국경 통제를 확대했다.
알 무으타디드는 정의를 집행할 때 가혹한 면모를 보였다. 죄수들에게 다양한 고문을 가하고, 공개 처형을 통해 본보기로 삼았다. 연대기 작가들은 알 무으타디드의 잔혹함을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정당화했다.
3.1. 제국 재건 노력
알 무으타디드는 즉위 초부터 아바스 칼리파 제국의 분열을 막고 재통합을 시도했다. 그는 군사력과 외교를 병행하여 이 목표를 추진했다. 알 무으타디드는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숙련된 외교관이기도 했다.
이슬람 세계 동부에서 알 무으타디드는 사파르 왕조의 지배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타히르 왕조가 이전 수십 년 동안 누렸던 것과 유사한 파트너십으로 그들을 활용하려는 희망으로 그들과 모두스 비벤디(잠정 협정)를 맺었다. 그 결과, 사파르 왕조의 통치자 암르 이븐 알-라이스는 호라산과 페르시아 동부, 파르스 지역에 대한 소유를 인정받았고, 아바스 왕조는 지발, 레이와 이스파한을 포함한 페르시아 서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칼리프에게 이스파한과 니하반드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반독립적인 지방 왕조인 둘라프 왕조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893년 둘라프 왕조의 아흐마드 이븐 압드 알-아지즈 이븐 아비 둘라프가 사망하자, 알 무으타디드는 그의 아들인 알무크타피를 레이, 카즈빈, 곰 및 하마단의 총독으로 임명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둘라프 왕조는 카라지와 이스파한 주변의 핵심 지역에 갇히게 되었고, 896년에 완전히 폐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이디 토후국이 타바리스탄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아바스 왕조의 이러한 영토에 대한 지배는 불안정했다. 897년에는 레이가 사파르 왕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란에서의 아바스-사파르 왕조의 파트너십은 레이에 근거지를 두고 이 지역에서 칼리프와 사파르 왕조의 이익을 위협했던 장군 라피 이븐 하르타마에 대한 공동 노력으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 알 무으타디드는 아흐마드 이븐 압드 알-아지즈를 보내 라피로부터 레이를 빼앗았고, 라피는 도망쳐 사파르 왕조로부터 호라산을 빼앗기 위해 타바리스탄의 자이디와 협력했다. 그러나 암르가 그에 맞서 대알리드 감정을 동원하고 자이디로부터 예상된 지원이 실현되지 않자, 라피는 896년 호라즘에서 패배하고 살해되었다. 이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암르는 패배한 반란군의 머리를 바그다드로 보냈고, 897년 칼리프는 레이에 대한 통제권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 파트너십은 알 무으타디드가 898년에 암르를 그의 라이벌 사만 왕조가 통치하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에 마침내 붕괴되었다. 알 무으타디드는 암르가 사만 왕조와 대립하도록 의도적으로 장려했고, 암르는 900년에 그들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사만 왕조의 통치자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그를 사슬에 묶어 바그다드로 보냈고, 그곳에서 알 무으타디드의 죽음 이후 902년에 처형되었다. 알 무으타디드는 차례로 암르의 칭호와 총독직을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에게 부여했다. 칼리프는 또한 파르스와 키르만을 되찾기 위해 움직였지만, 암르의 손자 타히르 아래의 사파리 잔존 세력은 압바스 왕조가 수년 동안 이 지역을 점령하려는 시도를 좌절시킬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910년이 되어서야 압바스 왕조는 탐내던 파르스 지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
3.2. 툴룬 왕조와의 관계 개선
알 무으타디드는 즉위 후 툴룬 왕조에 대해 화해적인 태도를 보였다. 893년 봄, 알 무으타디드는 후마라와이흐를 이집트와 시리아의 자율적인 에미르로 재승인하고, 연간 300의 조공과 체납된 200, 그리고 디야르 라비아와 디야르 무다르 두 자지란 지역을 칼리프에게 반환하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이 조약을 맺기 위해 후마라와이흐는 자신의 딸 카트르 알-나다("이슬 방울")를 칼리프의 아들에게 신부로 제안했으나, 알 무으타디드는 그녀와 직접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툴룬 공주는 지참금으로 1를 가져왔는데, 이는 "중세 아랍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결혼 선물"로 여겨졌다. 바그다드에 도착한 그녀의 수행원들은 엄청난 사치와 낭비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가난한 칼리프 궁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알 무으타디드의 수석 내시는 궁궐을 장식하기 위해 정교한 은과 금 촛대 다섯 개만을 찾을 수 있었지만, 공주는 각자 그러한 촛대를 들고 있는 150명의 하인을 대동했다고 한다. 이에 알 무으타디드는 "가서 우리 가난함 속에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숨자"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모든 것은 알 무으타디드가 툴룬 왕조의 재정을 파산시킬 정도의 막대한 지참금을 "재정적 함정"으로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칼리프 왕조와의 연결되는 영예 외에 툴룬 왕조는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카트르 알-나다는 결혼 직후 사망했고, 896년 후마라와이흐가 살해되면서 툴룬 국가는 미성년 아들들의 불안정한 손에 놓였다. 알 무으타디드는 이를 이용하여 897년에 수구르 국경 에미레이트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는데, 마이클 보너에 따르면, "[그는]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연례 여름 원정을 명령하고 비잔틴 제국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는 오래된 칼리프 특권을 맡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지위에 대한 칼리프의 인정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툴룬 통치자 하룬 이븐 후마라와이흐는 홈스 북쪽의 모든 시리아를 반환하고 연간 조공을 450로 늘리는 추가 양보를 해야 했다. 이후 몇 년 동안 툴룬 영토 내에서 국내 혼란이 증가하고 카르마티아 공격이 확대되면서 많은 툴룬 추종자들이 칼리프에게 망명하게 되었다.
3.3. 자지라, 남캅카스, 비잔틴 전선
알 무으타디드는 자지라(메소포타미아 상류 지역)에서 여러 반란 세력 및 지역 영주들과 맞서 싸웠다. 893년, 모술을 점령하고 895년에는 함단 이븐 함둔을 체포하였다. 896년, 하와리즈의 반란을 진압했다. 899년에는 아미드를 점령하여 자지라 전역을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남캅카스 지역에서는 칼리프의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900년, 타르수스의 유력자들을 체포하고 함대를 불태웠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3.4. 동방 지역과 사파르 왕조
알 무타디드는 이슬람 세계의 동방에서 사파르 왕조의 지배를 인정하고 잠정 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케네디에 따르면, 칼리프는 타히르 왕조가 이전 수십 년 동안 누렸던 것과 유사한 협력 관계를 통해 사파르 왕조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 협정으로 사파르 왕조의 통치자 암르 빈 알-라이스는 호라산과 페르시아 동부, 파르스 지역의 소유를 인정받았고,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 서부의 지발, 레이, 이스파한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이 정책으로 칼리프는 이스파한과 네하반드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반독립 지방 정권인 둘라프 왕조의 지배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893년 둘라프 왕조의 아흐마드 빈 압드 알-아지즈 빈 아비 둘라프가 사망하자, 알 무타디드는 자신의 아들 알 무크타피를 레이, 카즈빈, 곰, 하마단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카라지와 이스파한 주변으로 세력이 좁혀진 둘라프 왕조는 896년에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아바스 왕조의 지배는 자이드파 정권과 인접한 타바리스탄 때문에 불안정했고, 897년에는 레이가 사파르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아바스 왕조와 사파르 왕조의 협력은 레이를 근거지로 이 지역 양측의 이익을 위협하던 라피 이븐 하르타마에 대한 공동 공격으로 가장 큰 성과를 냈다. 알 무타디드는 아흐마드 빈 압드 알-아지즈를 보내 라피에게서 레이를 빼앗았다. 라피는 사파르 왕조에게서 호라산을 빼앗기 위해 타바리스탄의 자이드파와 연합했지만, 암르 빈 알-라이스가 반(反) 알리 감정을 선동하여 자이드파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자 896년 호라즘에서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암르는 패배한 반란군의 머리를 바그다드로 보냈고, 897년 칼리프는 레이의 지배권을 암르에게 넘겼다.
이 협력 관계는 알 무타디드가 898년 암르를 마와라안나흐르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무너졌다. 마와라안나흐르는 암르의 대항 세력인 사만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알 무타디드는 암르가 사만 왕조와 대립하도록 조장했다. 900년 암르는 사만 왕조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사만 왕조의 통치자 이스마일 빈 아흐마드는 암르를 쇠사슬에 묶어 바그다드로 보냈고, 암르는 902년 알 무타디드 사후 처형되었다. 알 무타디드는 이스마일에게 암르의 칭호와 총독직을 부여했다. 알 무타디드는 파르스와 케르만을 되찾으려 했으나, 암르의 손자 타히르 이븐 무하마드 이븐 암르가 이끄는 사파르 왕조 잔존 세력은 아바스 왕조의 점령 시도를 수년간 저지했다. 아바스 왕조가 파르스를 되찾은 것은 910년이었다.
3.5. 종파주의의 대두와 주변부의 분열
9세기 동안 시아파 교리에 기반한 다양한 새로운 운동이 등장하여, 아바스 왕조에 대한 주요 반대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아바스 왕조 변방에서 처음 성공을 거두었다. 타바리스탄에서 자이드 정권이 장악되었고, 897년 알하디 일라 알하크 야흐야에 의해 예멘에서도 자이드파 국가가 세워졌다. 알무으타디드 재위 기간 동안, 칼리프국의 수도권에 더 가까운 곳에서 카르마트파라는 새로운 위협이 나타났다. 874년경 쿠파에서 창시된 급진적인 이스마일파 종파인 카르마트파는 897년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아부 사이다 알자나비의 지도하에, 그들은 899년 바레인을 점령했고, 다음 해 칼리프 군대를 격파했다. 알무으타디드 사후, 카르마트파는 아바스 왕조가 직면한 가장 위험한 적임이 증명되었다. 동시에 이스마일파 선교사 아부 압달라 알시이는 쿠타마 베르베르인을 개종시키고, 902년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비드 토후국을 공격하여 909년에 정복하고 파티마 칼리파조를 건국했다.
3.6. 국내 통치
알-무타디드는 자지라에서 여러 반란 세력과 맞서 싸웠다. 893년, 내부 분쟁 중이던 하지파 반란 세력에게서 모술을 탈환했고, 895년에는 바누 타글리브의 지도자 함단 이븐 함둔을 체포했다. 896년에는 함단의 아들 후사인 이븐 함단이 하지파 지도자를 잡아 바그다드로 압송, 십자가형에 처했다. 후사인은 칼리프 군대에서 경력을 쌓고 함단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898년 바누 샤이반의 아흐마드 이븐 이사 알-샤이바니 사후, 그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알-샤이바니가 아미드를 계승했으나, 알-무타디드는 자지라로 돌아와 그를 몰아내고 아들 알리 알-무크타피를 총독으로 임명, 자지라를 중앙 정부 통제하에 두었다.
트란스코카서스 지역에서는 칼리프의 통제가 약화되어 중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사실상 독립 왕조의 손에 넘어갔다. 사지 왕조의 데브다드 이븐 무함마드는 이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굳혔다. 900년, 타르수스 유력자들이 디야르 무다르 지방을 점령하려 하자, 알-무타디드는 이들을 체포하고 함대를 불태웠다. 이는 아랍-비잔틴 전쟁에서 큰 손실이었는데, 타르수스는 비잔틴 국경 습격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다미안 오브 타르수스가 이끄는 시리아 함대는 데메트리아스 항구를 약탈하는 등 에게 해에서 아랍 함대가 활약했지만, 멜리아스 등 아르메니아 난민 유입으로 비잔틴은 육상에서 강화되어 국경 통제를 확대했다.
동부에서는 사파리 왕조의 지배를 인정하고, 타히르 왕조와 유사한 협력 관계를 맺으려 했다. 암르 이븐 알-라이스는 호라산, 파르스 등의 소유를 인정받았고, 압바스 왕조는 지발, 레이, 이스파한 등 서부 페르시아를 통치했다. 893년 둘라프 왕조의 아흐마드 이븐 압드 알-아지즈 사후, 알-무타디드는 아들 알-무크타피를 레이, 카즈빈, 곰, 하마단 총독으로 임명했다. 둘라프 왕조는 896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자이디 토후국의 존재로 압바스 왕조의 지배는 불안정했고, 897년 레이는 사파리 왕조에 넘어갔다.
이란에서 압바스-사파리 왕조의 협력은 라피 이븐 하르타마 진압에서 두드러졌다. 알-무타디드는 아흐마드 이븐 압드 알-아지즈를 보내 레이를 탈환했고, 라피는 호라즘에서 패배, 살해되었다. 897년, 알-무타디드는 레이 통제권을 암르에게 넘겼다. 898년, 알-무타디드는 암르를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으로 임명, 사만 왕조와 대립시켰다. 900년, 암르는 사만 왕조에 대패, 포로가 되어 바그다드로 보내졌고, 902년 처형되었다. 알-무타디드는 암르의 칭호를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에게 부여했다. 파르스와 키르만을 되찾으려 했으나, 사파리 잔존 세력은 이를 저지했다. 910년에야 압바스 왕조는 파르스를 되찾았다.
9세기 동안 시아파 운동이 하자리지를 대체하는 주요 반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타바리스탄의 자이디 정권 장악은 897년 예멘에서 반복되었다. 카르마트파는 897년 이후 급성장하여 899년 바레인을 점령, 다음 해 칼리프 군대를 격파했다. 알-무타디드 사후, 카르마트파는 아바스 왕조의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아부 압달라 알시이는 쿠타마 베르베르인을 개종시켜 902년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비드 토후국을 공격, 909년 정복하고 파티마 칼리파조의 기반을 닦았다.
3.6.1. 재정 정책
알무타심의 개혁 이후 아바스 군대는 규모는 작아졌지만, 더욱 전문적인 전투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 효과와는 별개로 아바스 정권의 안정에 잠재적인 위험을 초래했다. 군대가 칼리프 제국 외곽 출신의 투르크인 등으로 구성되어 사회와 소외되었고, 병사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가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면 군사 반란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고, 이는 실제로 사마라의 무정부 상태에서 반복되었다. 따라서 군대의 정기적인 급여 지급은 국가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알무타디드 즉위 당시 재무 문서에 따르면, 총 지출 7,915 디르함 중 약 5,121 디나르가 군사비였고, 1,943 디나르는 군사 및 비군사 양쪽에 사용되었으며, 순수 민간 영역에는 851 디나르만 사용되었다. 정부 지출의 80% 이상이 군대 유지를 위해 사용된 것이다.
동시에 칼리프 제국의 재정 기반은 많은 조세 징수 지역이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크게 축소되었다. 칼리프 정부는 농업 생산성이 급감한 사와드와 이라크 남부 지역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룬 알라시드 시대에 사와드는 연간 102,500,000 디르함의 수입을 제공했지만, 10세기 초에는 3분의 1 미만으로 감소했다. 상황은 반 자치 총독 등이 조세 농업의 한 형태인 muqāṭa'a아랍어 시스템을 통해 라티푼디움을 설립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알무타디드는 직접 수입 감독에 전념하여 "구두쇠에 가까운 절약 정신"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평민이 고려하는 것을 경멸할 하찮은 계정을 검토"했다. 그의 통치 하에서 벌금과 몰수가 증가했고, 수입은 왕실 영지와 지방 세금의 일부와 함께 칼리프의 개인 금고(bayt al-māl al-khāṣṣa아랍어)로 흘러 들어갔다. 개인 금고는 재정 부서 중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종종 공공 재무부(bayt al-māl al-ʿāmma아랍어)보다 더 많은 돈을 보유했다. 알무타디드의 통치가 끝날 무렵, 개인 금고에는 천만 디나르가 들어있었다. 한편,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895년에 세금 연도의 시작을 3월의 페르시아 새해에서 6월 11일로 변경하여 Nayrūz al-Muʿtaḍid아랍어, '알무타디드의 새해'로 알려지게 되었고, 토지세(kharaj아랍어)는 수확 후에 징수되었다.
3.6.2. 관료제의 강화
9세기 동안 아바스 왕조의 행정 시스템은 전문화되었다. 지방 행정은 면밀한 연구 대상이 되었고, 이븐 쿠르다드베와 같은 지리학 저술은 칼리프국의 지방과 도로망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븐 쿠타이바와 같은 인물들은 문서 작성 기술을 매우 정교한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알무으타디드의 재정 정책은 행정 관료의 지위를 더욱 강화했으며, 그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고, 특히 칼리프의 대변인으로 존경받게 된 와지르의 영향력이 컸다. 알무으타디드는 화요일과 금요일을 정부 직원들의 휴일로 도입했다.
인사 면에서 알무으타디드의 통치는 국가 고위 지도부의 연속성을 특징으로 했다. 우바이드 알라 이븐 술라이만 이븐 와합은 통치 시작부터 901년 사망할 때까지 와지르로 재직했고, 그의 아들 알-카심 이븐 우바이드 알라가 그의 뒤를 이었다. 알-카심은 아버지의 수도 부재 기간 동안 처음부터 그의 대리인 역할을 해왔다. 해방 노예 바드르는 알무와파크 밑에서 복무했으며 그의 딸이 칼리프의 아들과 결혼한 베테랑으로 군 사령관으로 남았다. 특히 사와드의 재무 부서는 처음에는 바누 알-푸라트 형제 아흐마드 이븐 알-푸라트와 알리 이븐 알-푸라트가 관리했고, 899년 이후에는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와 그의 조카 알리 이븐 이사 알-자라 밑의 바누 알-자라가 관리했다. 11세기 역사가 힐랄 알-사비에 따르면, 원래의 행정 팀은 매우 효과적이고 조화로웠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알무으타디드, 우바이드 알라, 바드르, 아흐마드 이븐 알-푸라트와 같은 칼리프, 와지르, 사령관 및 디완의 수장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미셸 보너가 지적했듯이, 알무으타디드의 후기 통치는 "군대와 도시 민간인의 삶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이 관료 내에서의 파벌주의의 성장을 보았다". 바누 알-푸라트와 바누 알-자라의 두 관료 왕조 간의 치열한 경쟁은 당시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광범위한 고객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칼리프와 와지르는 이러한 적대감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파벌이 번갈아 가며 공직을 맡고 종종 전임자들에게 돈을 빼앗기 위해 벌금을 부과하고 고문하는 잘 확립된 관행에 따라, 다음 수십 년 동안 아바스 왕조 정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알-카심 이븐 우바이드 알라는 그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와지르에 임명된 직후, 알-카심은 알무으타디드를 암살할 음모를 꾸몄고, 바드르를 그의 계략에 끌어들이려 했다. 장군은 그의 제안을 분개하며 거절했지만, 알-카심은 칼리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발각과 처형을 면했다. 와지르는 그 후 알-무크타피를 지배하려 했고, 바드르를 비난하고 처형하려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바누 알-푸라트에 대한 더 많은 음모에 연루되었다.
3.6.3. 바그다드로의 수도 이전
알무으타디드는 사마라에서 바그다드로 수도 이전을 완료했다. 바그다드는 이미 그의 아버지 대에 주요 활동 거점이었지만, 도시 중심지는 티그리스강 동쪽 기슭으로 이전되었다. 이 지역은 1세기 전에 제2대 칼리프 알 만수르(재위: 754년 - 775년)가 건설한 최초 중심지인 원성보다 하류에 위치했다. 10세기 역사가 알마수디에 따르면, 알무으타디드의 두 가지 열정은 "여성과 건축"이었다. 그는 수도에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다. 사용되지 않던 알 만수르 대 모스크를 보수하고 확장했다. 또한 하사니 궁전을 증축하고, 투라야 궁전(플레이아데스 궁전)과 피르두스(낙원) 궁전을 새로 건설했다. 알무크타피 시대에 완성된 타지 궁전 건설도 시작했다. 알무으타디드는 토사로 막힌 두자일 운하를 정비하여 도시 관개 시설을 복구했고, 이 사업으로 이익을 얻는 지주들의 자금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3.6.4. 신학적 입장과 과학 진흥
알무타디드는 즉위 초부터 수니파 전통주의를 확고하게 지지하며 신학 연구를 금지했다. 한발리 법학에서 위법으로 간주된 재산을 담당하는 재무 부서를 폐지하기도 했다. 동시에 알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이자 알리의 주요 적대자인 무아위야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한 조언자들의 우려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타바리스탄의 자이디 이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친알리파적 자세는 901년 예멘에서 제2의 자이디 정권 수립을 막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알무타디드는 알마문, 알무타심, 알와티크 등 9세기 전반 칼리프들 아래에서 번성했던 학문과 과학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알무타와킬 치하에서 과학적 노력에 대한 궁정 후원이 쇠퇴했지만, 알무타디드는 "자연 과학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어 문헌 번역가이자 수학자인 사비트 이븐 쿠라, 문헌학자 이븐 두라이드와 아부 이스하크 알자자지를 후원했으며, 알자자지는 칼리프 자녀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알무타디드의 개인 교사이자 철학자 알 킨디의 제자인 아흐마드 이븐 알타이이프 알사라크시는 칼리프의 측근이 되어 바그다드 시장 감독관에 임명되었으나, 896년에 처형되었다.
3.6.5. 사법과 형벌
알 무으타디드는 정의를 집행할 때 가혹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죄수들에게 다양한 고문을 가하고, 공개 처형을 통해 본보기로 삼았다. 예를 들어, 죄수들을 부풀리기 위해 풀무를 사용하거나, 거꾸로 구덩이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연대기 작가들은 알 무으타디드의 잔혹함을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정당화했다. 알마수디와 같은 연대기 작가들은 알 무으타디드를 아바스 왕조의 창시자 아스 사파흐와 비교하며 "두 번째 알-사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칼리프 통치의 운명을 회복시킨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알-사파의 이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기도 하다.
4. 죽음과 유산
알 무으타디드는 902년 4월 5일 하사니 궁전에서 40세 또는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의 가혹한 군사 작전과 방탕한 생활이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마지막 병세 동안 의사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의사 중 한 명을 발로 차 죽이기도 했다. 알 무으타디드는 바그다드 시내에 묻힌 최초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였다. 그의 아들들처럼 그는 도시 서부에 있는 이전 타히르 왕조 궁전에 묻혔는데, 이곳은 칼리프들이 두 번째 거처로 사용했다.
카를 빌헬름 제터슈테인에 따르면, 알 무으타디드는 "아버지의 통치자로서의 재능을 물려받았으며, 경제면과 군사면의 능력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의 엄격함과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아바스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알 무으타디드의 유능한 통치는 아바스 칼리프국의 쇠퇴를 한동안 막았다고 평가받았지만, 그의 성공은 정력적인 통치자의 존재에 너무 의존했고, 궁극적으로 그의 통치는 "장기적인 추세를 뒤집고 아바스 왕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재건하기에는 너무 짧았다"고 평가받는다.
알 무으타디드는 아들 알 무크타피를 라이와 자지라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의 역할을 준비하도록 배려했다. 알 무크타피는 아버지의 정책을 따르려 노력했지만 그의 에너지에는 미치지 못했다. 알 무와파크와 알 무으타디드의 고도로 군사화된 시스템은 칼리프가 직접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모범을 보이고, 후원을 통해 통치자와 군인 사이에 충성심을 형성하도록 요구했다. 반면에 알 무크타피는 "그의 성격과 행동에서 [...] 앉아서 지내는 인물이었고, 병사들에게 충성심은커녕 영감을 불어넣지도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칼리프국은 904년 툴룬 왕조 영토를 재병합하고, 카르마타파와의 승리를 포함하여, 그 후 몇 년 동안 주요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908년 알 무크타피가 죽으면서 이른바 "아바스 왕조 부흥"은 정점을 지나갔고 새로운 위기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권력은 약하고 유연한 알 무크타디르를 왕위에 앉힌 고위 관료들이 쥐고 있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궁정과 군대의 지출이 증가했고, 행정 부실이 심화되었으며, 군대와 관료 파벌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932년 알 무크타디르가 암살당했을 때 칼리프국은 사실상 파산했고, 권력은 곧 칼리프와 대 아미르라는 칭호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일련의 군벌들에게 넘어갔다. 이 과정은 946년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절정에 달했고, 심지어 이름뿐인 칼리프의 독립조차 종식시켰다. 그 후 칼리프들은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있었지만, 모든 군사적 또는 정치적 권한이나 독립적인 재정적 자원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