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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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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수는 후한 시대의 문인으로, 명문가인 홍농 양씨 가문 출신이다. 그는 조조 휘하에서 정원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술병의 글자를 해독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조조의 아들 조식과의 친분으로 인해 후계자 다툼에 연루되기도 했다.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가 닭갈비탕을 보고 "계륵"이라고 말한 것을 철수 명령으로 해석하여 조조의 미움을 사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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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수
본관사례홍농군화음현
덕조(德祖)
출생175년
사망219년
사인조조에 의해 처형
관직
주요 관직낭중(郎中)
승상주부(丞相主簿)
섬긴 세력조조
가족 관계
아버지양표
어머니원술의 누이
자녀양소(楊囂)
기타 정보
활동 시기후한
관련 인물조조, 조식

2. 생애 및 가계

양수는 양표의 아들이자 양사의 손자였다. 그의 어머니 원씨 부인은 원술의 누이였다.[3]

200년대 어느 시점에 양수는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재상인 조조 휘하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고 조조를 잘 이해하여 정부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양수는 조조의 아들 조식의 절친이었으며, 조식과 그의 형제 조비 사이의 후계자 다툼에 연루되었다. 양수는 조식의 측근으로 하여금 회의 의제를 조식에게 유출한 것이 발각되었고, 원술과의 관계로 인해 조조는 양수를 처형했다.

조비는 개인적으로 양수를 싫어하지 않았다. 조비가 가장 아끼는 검은 양수에게 받은 선물이었고, 조비는 정기적으로 그 검을 곁에 두었다. 후에 황제가 된 조비는 양수가 언젠가 그 검이 원래 왕모(王髦)의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여 왕모의 행방을 찾았고, 왕모에게 음식과 옷을 하사했다.[4]

양수의 죽음은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5]에 언급되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대중화된 "계륵" 이야기와 흔히 관련이 있다. 양수의 죽음은 조식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 금기였고, 부주의하게 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이 더욱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조조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신비화하고 정치적인 비밀을 가지기를 원했다.[6]

양수가 죽기 전에 조조는 그의 아버지 양표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의 오만함을 꾸짖었다. 그의 처형 소식을 들은 후 양표는 슬픔과 자책감에 빠졌다. 조조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양표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다.

겸손하고 다재다능한 인물로,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었다. 낭중으로 발탁되었고, 조조의 요청으로 창조속주부를 맡게 되었다.[9]。 당시 승상부는 내정 및 군사 과제가 누적되어 있었지만, 양수는 그 격무를 잘 처리하여 조조의 마음에 들었다.[10]조비 이하, 양수와 친교를 맺으려는 자도 많았다. 양수는 특히 조식과 깊은 친교를 맺어,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11]

익주유장이 조조에게 장송을 보냈을 때, 조조는 별로 예우하지 않았다. 양수는 장송을 높이 평가하여, 조조에게 장송을 등용할 것을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수가 조조가 편찬한 병서를 장송에게 보여주자, 장송은 연회 중에 통람하고 즉시 암송했다. 그 때문에 양수는 더욱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12]

219년(건안 24년), 조조는 한중으로 원정했지만, 유비와의 사이에 지구전이 이어졌다. 이때 조조가 말한 "계륵"이라는 말에 대해, "계륵(닭의 아랫갈비)은 버리기는 아깝지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고기가 붙어 있지 않다", 즉 "한중은 아깝지만 지금이 철수할 때"라는 의미라고 혼자서 해석하고, 철수 준비를 명령했다고 한다[13]。 같은 해 여름 5월에 조조는 철수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에 의해 처형되었다. 219년(건안 24년) 가을의 일이었다. 향년 45세.

살해 이유는, 양수가 조식에게, "답교"라는 교과서를 사용하여 조조의 의향을 미리 가르쳐주거나, 함부로 제후(조식)와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양수는 정의 형제와 함께 날개가 되어, 조식을 도왔다고도 한다[14]。 조조는 조식에 대한 총애가 옅어지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양수에게 죄를 덮어씌워, 처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양수도 조식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몸에 위험이 미칠 것을 짐작했지만, 조식과의 교제를 적극적으로 끊지는 않았다고 한다.

양수의 처형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원술과 인척 관계였던 것을 조조가 고려했다고도 하며,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조는 이미 은퇴한 아버지 양표에게, 스스로 양수의 죽음을 알리고 반응을 보려고 했다. 양표는 눈에 띄게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당당했기 때문에, 조조 쪽이 오히려 주저했다고 한다.[15]

양수가 죽은 후, 수백 일이 지나 조조는 사망했다. 선양으로 위를 세운 조비(문제)는 과거 양수에게서 헌상받은 칼을 가지고 있었고, 양수의 자신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양수의 직계 자손은 서진에서 벼슬하여 고관에 올랐다. 양수의 직계 자손은 동진 말기까지 이어졌으나, 안제 시기인 의희 4년 (408년)에 양사평(양준의 증손으로, 양전기의 동생)이 처형된[16]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2. 1. 가계

홍농 양씨 가계도


양수의 가계
관계인물
아버지양표
할아버지양사
어머니원씨 부인 (원술의 누이)[3]



홍농 양씨는 후한의 명문가로, "4대에 걸쳐 태위(사세 태위)"를 배출한 가문이다. 전한 초기의 적천후 양희나 소제 시기 승상을 지낸 안평후 양창(사마천의 사위)을 선조로 여기지만,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후한서』 「양진전」 참고).

3. 재능과 일화

양수는 뛰어난 재능과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다재다능하여 건안 연간(196년 ~ 220년)에 효렴으로 추천되었고, 낭중으로 발탁된 후 조조의 요청으로 창조속주부를 맡았다.[9] 당시 승상부는 내정과 군사 업무가 쌓여 있었지만, 양수는 이를 훌륭하게 처리하여 조조의 신임을 얻었다.[10]

양수는 조조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 유장장송을 보냈을 때, 조조는 그를 별로 예우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수는 장송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등용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수가 조조의 병서를 장송에게 보여주자, 장송은 연회 중에 이를 모두 암송하여 양수를 더욱 놀라게 했다.[12]


양수는 조식과 각별한 사이였으며,[11] 조비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양수와 친분을 맺으려 했다.[10]

3. 1. 정원 사건

조조가 부하들에게 정원을 하나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얼마 후 정원이 완성되자 조조가 정원을 구경하러 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정원 문에 活(살 활)자만을 쓴 채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본 양수는 "門(문)에다 活(활)자를 써 놓았으니 이것은 곧, 闊(넓을 활)자이니, 승상께서 정원이 너무 넓다는 뜻으로 쓰신 것이 아니겠소?"라 말하고 정원 크기를 줄여놓았다고 한다.[18]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낙(酪)이라는 술을 한 병 선물하였다. 조조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 병에 일합(一合)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옆의 신하들에게 돌렸다. 合자를 본 신하들은 의아해하였다. 양수의 자리에 병이 오자 양수는 "합(合)자를 나눠 풀이해보면 일인일구(一人一口), 즉 한 사람당 한 모금이라는 뜻이오."하고는 낙을 한 모금 마셨다.[18]

조조가 아들 조비조식의 재간을 시험해 보려고 두 아들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 (鄴)의 궁궐을 지나가라고 시켰다. 그리고 궁궐의 문지기에게는 절대로 아들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 아들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나와 조조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조비는 궁궐을 통과하려다 문지기가 막자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조식이 궁궐을 통과하려고 할 때, 문지기가 막자 "나는 승상의 명령을 받들고 지나가는데, 어느 놈이 감히 내 앞길을 막는단 말이냐?"라고 말하고 문지기를 베었다. 조조는 조식의 재간이 놀라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고 묻자, 조식은 "그것은 양수가 가르쳐 주었사옵니다."하고 말했다.

조조와 유비가 한중(漢中)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칠 때의 이야기이다. 조조는 유비에게 번번이 패하고 후퇴하여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였다. 식량도 떨어져 조조는 더욱 초조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저녁상에 닭갈비탕이 있었다. 마침 하후돈(夏候惇)이 들어와 보고하기를, "오늘 암호는 무엇으로 하리오?" 이에 조조는 먹고 있던 닭갈비탕을 보면서 "계륵(鷄肋), 계륵이다."라고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하후돈은 밖의 병사들에게 "오늘의 암호는 계륵이로다."라고 전달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계륵의 뜻을 알 수 없자 수군대었다. 양수가 그때 나섰다. "닭의 갈비는 버리기는 아까우나 먹을 것이 없는 것, 즉 승상께서는 이 한중을 [유비에게 내주기는 아깝지만 이득이 없으니 철수하라]라는 뜻으로 암호를 계륵이라 정하신 것이오."라 말했다. 그 말은 적중하여 이튿날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19]

3. 2. 술병 사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낙(酪)이라는 술을 한 병 선물하였다. 조조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 병에 일합(一合)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옆의 신하들에게 돌렸다. 合(합)자를 본 신하들은 의아해하였다. 양수의 자리에 병이 오자 양수는 "합(合)자를 나눠 풀이해보면 일인일구(一人一口), 즉 한 사람당 한 모금이라는 뜻이오."하고는 낙을 한 모금 마셨다.[18]

3. 3. 조식과의 관계

양수는 조식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조조조비와 조식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고민할 때, 양수는 조식을 지지하며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18]

'''아들의 재간 시험'''

조조는 조비와 조식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의 궁궐 문을 지나가게 하고 문지기에게는 절대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비는 문지기에게 막혀 돌아갔지만, 조식은 문지기를 베고 지나갔다. 조조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묻자, 조식은 양수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답했다.[19]

'''조식에게 유리한 조언'''

양수는 조조가 낸 문제의 답을 미리 조식에게 알려주어 조식이 조조의 신임을 얻도록 도왔다.[14]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양수는 조조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처형당하는 원인이 되었다.[6]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양수가 조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이 때문에 조조의 의심과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3. 4. 한중 공방전과 계륵

조조유비가 한중(漢中)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였다. 조조는 유비에게 계속 패하고 후퇴하여 더 이상 진격이 어려웠고, 식량도 떨어져 매우 초조했다. 저녁 식사로 닭갈비탕을 먹던 중, 하후돈(夏候惇)이 그날의 암호를 묻자 조조는 "계륵(鷄肋), 계륵이다."라고 답했다.[19]

양수는 이 말을 듣고 "닭의 갈비는 버리기는 아까우나 먹을 것이 없는 것, 즉 승상께서는 한중을 유비에게 내주기는 아깝지만 이득이 없으니 철수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양수는 병사들에게 철수 준비를 시켰고, 다음날 실제로 조조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19]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양수의 지나친 총명함과 자신감을 경계하여 "계륵" 사건을 계기로 그를 처형했다고 묘사한다.

실제 역사에서 건안 24년(219년), 조조는 한중 원정에서 유비와 장기전을 벌였다. 조조가 "계륵"이라고 말하자, 양수는 "한중은 아깝지만 지금이 철수할 때"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철수 준비를 명령했다.[13] 실제로 같은 해 여름 5월에 조조는 한중에서 철수했다.

4. 죽음

양수는 조조의 "계륵"이라는 암호를 철수 명령으로 해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 몹시 불쾌하여 양수를 참했다고 묘사한다. 정사에서는 조조가 한중에서 돌아와서 몇 달 후에 군기를 누설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계륵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3]

양수가 왜 죽었는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조는 재능을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양수를 신임했다. 훗날, 조조는 자신의 아들 중 조비, 조식을 두고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 고민했다. 신하들도 조비파와 조식파로 갈라졌다. 양수는 조식파였는데 조식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고, 조식에게 「답교」라는 책을 이용해 정치적인 수를 가르쳐 위의 후계 문제에 관여했다. 이 때문에 조조의 의심을 사 양수를 죽였다고 한다.[14] 양수가 조식을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자, 조조는 양수가 점점 성가시어지기 시작했고 양표 가문을 제거할 때라고 생각하여 양수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 계륵 사건이 일어나자 양수를 참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조는 청류파인 양씨 일가의 세를 끊기 위하여 양수를 참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조식에게 처세술을 가르쳐 주었던 것도 조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 양수의 어머니는 원술의 누이이며, 양수는 원술의 외조카였다.[3] 그래서 양수가 적이었던 원술의 조카라는 점도 조조가 양수를 참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양수의 죽음은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5]에 언급되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계륵" 이야기와 관련되어 대중화되었다. 양수의 죽음의 진정한 이유는 조식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 금기였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이 더욱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6] 조조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신비화하고 정치적인 비밀을 가지길 원했다. 따라서 양수와 같은 부하들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양수가 죽기 전에 조조는 양표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의 오만함을 꾸짖었다. 양표는 아들의 처형 소식을 듣고 슬픔과 자책감에 빠져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야위어졌다. 조조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양표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다.[15]

건안 24년 (219년), 조조는 한중으로 원정했지만, 유비와 지구전을 벌였다. 이때 조조가 말한 "계륵"이라는 말에 대해, 양수는 "계륵(닭의 아랫갈비)은 버리기는 아깝지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고기가 붙어 있지 않다", 즉 "한중은 아깝지만 지금이 철수할 때"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철수 준비를 명령했다.[13] 같은 해 여름 조조는 철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양수를 처형했다. 건안 24년 가을의 일이었다. 향년 45세.

4. 1. 죽음의 배경

양수는 조조의 '계륵'이라는 암호를 철수 명령으로 해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에 불쾌해 양수를 참했다고 묘사된다. 정사에서는 조조가 한중에서 돌아온 후 몇 달 뒤에 군기를 누설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계륵 사건과의 연관성은 명확하지 않다.[13]

양수가 죽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조조는 재능을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처음에는 양수를 신임했다. 그러나 조조가 후계자 문제로 조비와 조식을 두고 고민할 때, 양수는 조식파로서 조식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양수는 조식에게 「답교」라는 책을 통해 정치적인 술수를 가르치는 등 후계 문제에 깊이 관여했고, 이로 인해 조조의 의심을 샀다.[14] 조조는 양수가 조식의 후계자 추대를 위해 힘쓰는 것을 성가시게 여겼고, 양표 가문을 제거할 때라고 생각해 양수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 계륵 사건이 발생하자 양수를 처형했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청류파의 일류인 양씨 일가의 세를 끊기 위해 양수를 처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양수가 조식에게 처세술을 가르친 것도 조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 양수의 어머니가 원술의 누이로, 양수가 원술의 외조카라는 점도 조조가 양수를 처형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다.[3]

양수의 죽음은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5]에 언급되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대중화된 "계륵"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수의 죽음의 진정한 이유는 조식과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조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 금기였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이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6] 조조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신비화하고 정치적인 비밀을 가지기를 원했기에, 양수와 같은 부하들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6]

양수가 죽기 전, 조조는 양표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의 오만함을 꾸짖었다. 양표는 슬픔과 자책감에 빠져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야위어졌다. 조조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양표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다.[15]

양수가 죽은 후 수백 일이 지나 조조는 사망했다. 조비(문제)는 과거 양수에게서 받은 칼을 가지고 있었고, 양수의 자신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떠올렸다고 한다.[4]

4. 2. 죽음의 과정

양수는 조조의 암호 '계륵'을 철수 명령으로 해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 불쾌하여 양수를 참했다고 묘사된다. 정사에서는 조조가 한중에서 돌아온 후 몇 달 뒤 군기 누설 죄로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계륵 사건과의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양수가 죽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조조는 재능을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처음에는 양수를 신임했다. 훗날 조조는 조비조식 중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로 고민했고, 신하들도 조비파와 조식파로 나뉘었다. 양수는 조식파로서 조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조식에게 「답교」라는 책을 통해 정치적 술수를 가르치는 등 위의 후계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조조의 의심을 샀다.[3] 양수가 조식을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해 노력하자, 조조는 양수를 성가시게 여기기 시작했고, 양표 가문을 제거할 때라고 생각하여 양수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 계륵 사건이 발생하자 양수를 참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조는 청류파의 일류인 양씨 일가의 세를 끊기 위해 양수를 참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조식에게 처세술을 가르쳐 준 것도 조조의 분노를 샀을 것으로 보인다. 양수의 어머니는 원술의 누이로, 양수는 원술의 외조카였다.[3] 양수가 적이었던 원술의 조카라는 점도 조조가 양수를 참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양수의 죽음은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5]에 언급되었고, 소설 ''삼국지연의''의 "계륵"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양수의 죽음의 진정한 이유는 조식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조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 금기였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이 더 큰 문제였다고 여겨진다.[6] 조조와 같은 인물들은 자신을 신비화하고 정치적 비밀을 유지하길 원했기에, 양수와 같은 부하들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6]

양수가 죽기 전 조조는 양표에게 편지를 써 아들의 오만함을 꾸짖었다. 양표는 아들의 처형 소식에 슬픔과 자책감에 빠져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야위어졌다. 조조는 아들을 잃은 양표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 보상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는 양수가 지나치게 총명함에 자신감을 보인다고 생각하여 "계륵" 사건 이후 그를 죽인다. 당시 조조군은 유비와의 한중 공방전에서 불리한 상황이었다. 조조는 퇴각을 계획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암호를 묻는 질문에 조조는 "계륵"이라고 답했다. 양수는 이를 "퇴각"의 의미로 해석하고 철수 준비를 지시했다. 조조는 양수의 행동에 분노하여 양수를 처형했다. 이후 전투가 더욱 불리해지자 조조는 퇴각을 명했다. 양수의 예언을 떠올린 조조는 양수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건안 24년 (219년), 조조는 한중 원정에서 유비와 지구전을 벌였다. 이때 조조가 말한 "계륵"이라는 말에 대해, 양수는 "계륵(닭의 아랫갈비)은 버리기는 아깝지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고기가 붙어 있지 않다", 즉 "한중은 아깝지만 지금이 철수할 때"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철수 준비를 명령했다.[13] 같은 해 여름, 조조는 철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양수를 처형했다. 건안 24년 가을, 양수의 나이 45세였다. 살해 이유는 양수가 조식에게 "답교"라는 교과서를 사용하여 조조의 의향을 미리 가르쳐주거나, 함부로 제후(조식)와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양수는 정의 형제와 함께 조식을 도왔다고도 한다.[14] 조조는 조식에 대한 총애가 옅어지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양수에게 죄를 덮어씌워 처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양수도 자신의 위험을 짐작했지만, 조식과의 교제를 끊지 않았다.

양수의 처형에는 어머니가 원술과 인척 관계였던 점도 고려되었다고 하며,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조는 은퇴한 양표에게 양수의 죽음을 알리고 반응을 살폈다. 양표는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당당했고, 조조는 오히려 주저했다.[15]

양수가 죽은 후 수백 일이 지나 조조는 사망했다. 선양으로 위를 세운 조비(문제)는 양수에게서 받은 칼을 가지고 있었고, 양수의 냉담한 태도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4. 3. 죽음 이후

양수는 조조의 아들 조식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조식과 그의 형제 조비 사이의 후계자 다툼에 휘말렸다. 양수가 조식에게 회의 의제를 유출한 것이 발각되자, 조조는 양수를 처형했다.[3] 이는 원술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쳤다.

양수의 죽음은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5]에 언급되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대중화된 "계륵"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양수가 죽은 진정한 이유는 조조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 금기였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낸 것이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조조는 자신을 신비화하고 정치적 비밀을 유지하길 원했기에 양수는 위협적인 존재였다.[6]

양수가 죽기 전, 조조는 그의 아버지 양표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의 오만함을 꾸짖었다. 양표는 슬픔과 자책감에 빠졌고, 조조는 양표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 보상했다.

건안 24년(219년), 조조는 한중 원정에서 유비와 대치하던 중 "계륵"이라는 말을 남겼다. 양수는 이를 "한중은 버리기 아깝지만 철수할 때"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철수 준비를 명령했고[13], 실제로 조조는 그해 여름 철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수는 조조에 의해 처형되었다. 향년 45세였다. 양수가 조식에게 조조의 의향을 미리 가르쳐주거나, 함부로 제후와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4] 조조는 조식에 대한 총애가 옅어지면서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양수를 처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양수도 위험을 짐작했지만, 조식과의 교제를 끊지 않았다. 양수의 처형에는 어머니가 원술과 인척 관계였던 점도 고려되었다고 하며,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조는 양표에게 양수의 죽음을 알렸고, 양표는 쇠약해졌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여 조조가 오히려 주저했다고 한다.[15]

양수가 죽은 후, 수백 일이 지나 조조는 사망했다. 선양으로 위를 세운 조비(문제)는 양수에게서 받은 칼을 가지고 있었고, 양수의 자신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떠올렸다고 한다. 조비는 개인적으로 양수를 싫어하지 않았고, 가장 아끼는 검은 양수에게 받은 선물이었다.[4]

5. 평가

양수는 양표의 아들이자 양사의 손자였다. 그의 어머니 원씨 부인은 원술의 누이였다.[3] 양수는 문무를 겸비하고 조조를 잘 이해했기 때문에 정부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양수는 조조의 아들 조식과 친했으며, 조식과 그의 형제 조비 사이의 후계자 다툼에 연루되었다. 양수는 조식의 측근으로 하여금 미리 준비하고 조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회의 의제를 조식에게 유출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처형당했다.[4]

양수의 죽음은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5]에 언급되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대중화된 "계륵" 이야기와 흔히 관련이 있다. 양수가 죽은 진정한 이유는 조식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 금기였고, 부주의하게 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이 더욱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6]

예형은 "허창에는 공융과 양수 외에는 인재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7]

6. 삼국지연의에서의 양수

삼국지연의에서 조조는 양수가 너무 과장되고 자신의 총명함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보인다고 생각하여, 결국 "계륵" 사건 이후 그를 죽였다.[14]

당시 조조의 군대는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와 싸우고 있었다. 전투는 조조에게 불리하게 흘러갔고 그는 퇴각을 계획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한 사자가 그날 밤의 암호를 묻자, 조조는 수프에서 닭갈비를 보고 무심코 "계륵"이라고 대답했다. 양수는 조조의 이 말을 "퇴각"의 은유로 해석하고 모든 장군들에게 병사들에게 짐을 싸고 진영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양수의 논리는 닭갈비는 먹을 수 없지만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며, 이는 조조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양수의 행동에 대해 경고를 받자 분노하여 양수를 처형했다.[14]

나중에 전투가 더욱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조는 마침내 퇴각을 명령했다. 양수의 예언을 기억한 조조는 부하의 시신을 수습하여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었다.[14]

이보다 앞선 장에서 양수는 미형에 의해 조조 휘하의 두 명의 유일한 "재능 있는" 관리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다(다른 한 명은 공융이었다). 그러나 미형의 다른 의견, 행동, 그리고 최후의 운명을 보면 인물 판단에 좋지 않은 사람이므로 이 묘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14]

삼국지연의에서 양수는 예형의 등장 장면에 이름만 언급되고, 잠시 후 익주에서 찾아온 장송의 접대역으로 등장한다. 장송과 접촉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조조에게 면회를 신청하지만, 오히려 조조의 노여움을 산 장송이 백 대의 벌을 받고 양수의 앞에서 떠나게 된다.[14]

그 후, 한중 공방전에서 닭고기 수프를 먹던 조조가 "계륵"이라고 중얼거린다. 양수는 이 말을 듣고 조조가 철수 결정을 내렸다고 해석하여 그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조조는 그것을 제멋대로의 행동이라 분노하여 양수를 처형한다. 조조는 "계륵"이라는 말이 군대를 물린다는 뜻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유비군을 공격했지만, 열세에다가 장정으로 피로해진 병사로는 유비군을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참패하여, 조조 자신도 화살에 앞니가 부러진 채 간신히 도망쳐 돌아오게 된다. 그 때문에 조조는 "양수의 말대로 군대를 물렸더라면, 손해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철수를 결정한다. 또한 철수 후, 조조는 양수의 유해를 후하게 장례지내도록 지시한다.[14]

참조

[1] 서적 "Continuation of the Book of Han"
[2] 서적 Dianlüè
[3] 서적 Houhanshu
[4] 서적 Analysis of the Three Kingdoms. Vol. 2 Publisher of People's Public Security 2010
[5] 서적 Jiuzhou Chunqiu
[6] 서적 Analysis of the Three Kingdoms. Vol. 2 Publisher of People's Public Security 2010
[7] 서적 Shishuo Xinyu
[8] 서적 삼국지전인명사전 [[徳間書店]] 1994-11
[9] 서적 『世語』
[10] 서적 『世語』
[11] 서적 『典略』
[12] 서적 『益部耆旧雑記』
[13] 서적 『九州春秋』
[14] 서적 『世語』
[15] 서적 『後漢書』
[16] 서적 『晋書』
[17] 서적 『平原禰衡伝』
[18] 서적 『세설신어』
[19]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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