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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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사제강은 조선 후기 유계가 저술한 고려 시대 강목체 역사서이다. 유계는 기자 이후의 역사 서술의 부재, 기존 고려사 서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병자호란 이후 서인의 정치 노선을 반영하여 반청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요전쟁, 이자겸의 난, 여몽전쟁 등 고려 시대 주요 사건들을 비중 있게 다루고, 다양한 사료를 참고하여 저술되었다. 이후 조선의 강목체 역사서에 영향을 미쳐, 동사회강, 동사강목, 송원화동사합편강목, 동감강목 등에서 여사제강의 내용과 사론을 계승했다.
유계는 《고려사》의 세가 강령과 여러 서적의 특필자를 강으로 하고, 열전과 잡지 및 여러 책에 실린 사적들을 목으로, 그 아래에 분주를 두는 방식으로 《여사제강》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서술 형식뿐만 아니라 사대교린, 칭호, 제배, 인물사적 등의 내용에 있어서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을 많이 모방하였다. 또한 고려가 사용했던 천자국 제도 및 용어에 대해서도 "비록 참람하고 거짓된 것이지만 이제 모두 다 빼버리기는 불가능하므로 당시에 칭하고 쓰던 대로 따른다"고 하여 그대로 기술하였다.
《여사제강》은 병자호란 이후 반청(反淸) 운동을 주도하던 서인의 정치 노선이 반영된 역사서이다. 저자 유계는 '분쟁'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병자호란을 직접 경험한 결과로 해석된다. 거란의 침입, 이자겸의 난, 몽골의 침입과 간섭이 심했던 시기 등 이민족과의 전쟁 및 장수들의 활동에 대한 서술 분량이 많으며, 관련 기사는 《동국병감》을 인용하였다.
2. 역사적 배경 및 간행
현종 8년(1667년)에 그의 문우였던 송시열이 쓴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유계가 사망하고 3년 만인 현종 8년에 《여사제강》이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1. 저술 배경
유계는 19세 때 김장생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계열 학자들과 함께 수학하며 호서 학파의 학문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송시열과는 혼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송시열은 《여사제강》의 서문과 별록을 써 주고, 1681년(숙종 7년) 조정에 건의하여 국왕이 《여사제강》을 열람하게 하는 등 각별한 관계였다.
1630년(인조 8년) 23세에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 11년) 식년 문과 을과 1등으로 급제한 유계는 승정원 주서, 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자였던 유계는 전쟁 이후 소현세자를 배종하지 못하고, 삭탈관직 당한 채 충청도 임천군에 유배되었는데, 《여사제강》은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유계는 한국사 전반이 아닌 고려 시대만을 서술 대상으로 삼은 이유로 기자 이후 저술들이 전해지지 않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황탄하여 믿을 수 없으며, 삼국 시대는 너무 멀어 고증이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기존 고려사 저술들에 대해 《고려사》는 내용이 산만하고 권질이 많으며, 《동국통감》은 강목체가 아니라 요점 파악이 어렵고, 오운의 《동사찬요》는 기년이 간략하고 사실 서술이 열전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였다.
《여사제강》은 병자호란 이후 반청(反淸) 운동을 주도하던 서인의 정치 노선이 반영되어 있다. 유계는 '분쟁'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병자호란을 직접 경험한 결과로 해석된다. 전쟁 관련 기사는 《동국병감》을 인용, 이민족과의 전쟁 및 장수들의 활동을 기록했으며, 거란, 이자겸의 난, 몽골 침입 및 원 간섭 관련 서술 분량이 많다. 반면, 영남 남인 계열 홍여하의 《휘찬여사》는 서인과 반대 시각에서 저술되었다.
유계는 관찬, 사찬 사서, 야사류, 《동국병감》, 《동국여지승람》, 여말선초 학자들의 문집까지 참고하였다. 이인로, 최자 문집은 인용했으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은 인용하지 않고 비판했는데, 이는 《동국통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훈구계 인사들의 책은 인용했으나, 사림계 인사들의 책은 인용하지 않아 기호 서인이라는 당색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엿보인다.
2. 2. 간행 과정
崇禎중국어 정미년 즉 현종 8년(1667년)에 유계의 문우였던 송시열이 쓴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유계가 사망하고 3년 뒤인 현종 8년에 《여사제강》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의 서문에는 총 1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23권이다.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여 이색이 판문하부사, 심덕부와 이성계가 시중, 정몽주와 지용기가 찬성사로 들어서는 일련의 정계 개편 작업에서 내용이 끝나는데, 원래 초판본에는 그 뒷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영조 때 고려와 조선,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에 얽힌 대의명분 및 춘추필법 문제에서 '정몽주를 죽였다(殺)'거나, 이성계의 조선 왕조 개창을 '고려(高麗)는 30여 임금을 거쳐 이제 바야흐로 권신(權臣)에게 찬탈(簒奪)된 바가 되어 성(姓)을 바꾸게 되었다'(高麗歷五十餘主, 今此方爲權臣所簒而易姓)라고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고의로 없앴고, 그 부분만을 따로 《여사제강별록》이라 부르고 있다.
숙종 7년(1681) 2월, 송시열의 상주로 국왕이 경연에서 열람하는 도서가 되었고, 3월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로 영남 지역에서 간행, 반포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이후 영조-정조 시대까지 《여사제강》은 국왕의 경연 교재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에까지 배포되었다.
2. 3. 판본 문제
崇禎|숭정중국어 정미년, 즉 현종 8년(1667년)에 유계의 문우였던 송시열이 쓴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유계가 사망하고 3년 뒤인 현종 8년에 《여사제강》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의 서문에는 총 1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23권이다.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여 이색이 판문하부사, 심덕부와 이성계가 시중, 정몽주와 지용기가 찬성사가 되는 일련의 정계 개편까지 서술되어 있는데, 원래 초판본에는 그 뒷부분이 있었으나 영조 때에 문제가 되었다. 고려와 조선,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에 얽힌 대의명분 및 춘추필법 문제에서 '정몽주를 죽였다(殺)'거나, 이성계의 조선 왕조 개창을 '고려(高麗)는 30여 임금을 거쳐 이제 바야흐로 권신(權臣)에게 찬탈(簒奪)된 바가 되어 성(姓)을 바꾸게 되었다'(高麗歷五十餘主, 今此方爲權臣所簒而易姓)라고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왕명에 의해 고의로 없애고 그 부분만을 따로 《여사제강별록》이라 부르고 있다.
3. 내용 및 서술 방식
유계는 기자 이후 저술들이 전해지지 않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황탄하여 믿을 수 없으며, 삼국 시대는 너무 멀어 고증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고려를 서술 대상으로 삼았다.
3. 1. 주요 사료
유계는 《고려사》가 내용이 산만하고 권질이 많으며, 《동국통감》은 강목체가 아니라 요점 파악이 어렵고, 오운의 《동사찬요》는 기년이 간략하고 사실 서술이 열전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여사제강》은 관찬 및 사찬 사서, 조선 초기 야사류 및 병서 《동국병감》,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이제현, 정몽주, 이색 등 여말선초 학자들의 문집까지 광범위하게 참고했다. 무신집권기 서술에는 이인로, 최자의 문집을 인용했지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은 인용하지 않고 오히려 이규보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동국통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부, 서거정, 성현 등 조선 초기 훈구계 인사들의 책을 인용하면서도, 《동사찬요》에 인용된 사림계 인사들의 책은 인용하지 않아 유계가 기호 서인이라는 당색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3. 2. 역사관
유계는 한국사 전반이 아닌 고려를 서술 대상으로 삼은 이유로, 기자 이후 저술들이 전해지지 않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황탄하여 믿을 수 없으며, 삼국 시대는 너무 멀어 고증이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기존 고려사 저술에 대해 《고려사》는 내용이 산만하고 권질이 많으며, 《동국통감》은 강목체가 아니고, 오운의 《동사찬요》는 기년이 간략하고 사실 서술이 열전에 쏠려 있다고 비판했다.
《여사제강》은 병자호란 이후 반청(伐胡) 운동을 주도하던 서인의 정치 노선이 반영되었다. 유계는 '분쟁'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병자호란을 직접 경험한 결과로 해석된다. 전쟁 관련 기사는 《동국병감》을 인용하여 이민족과의 전쟁 및 장수들의 활동을 기록했고, 거란의 침입, 이자겸의 난, 몽골의 침입과 간섭이 심했던 시기의 서술 분량이 많다.
유계는 관찬, 사찬 사서, 야사류, 《동국병감》, 《동국여지승람》, 여말선초 학자들의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인로, 최자의 문집은 인용했지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은 인용하지 않고 비판했는데, 이는 《동국통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전기 훈구계 인사들의 책은 인용했지만, 사림계 인사들의 책은 인용하지 않아 기호 서인이라는 당색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보인다.
4. 후대에 미친 영향
《여사제강》은 이후 조선에서 강목체 역사서가 나오는 데 모범이 되었다. 안정복은 《여사제강》에 대해 "우수하기는 하지만 고려사 하나만 다루었을 뿐"이고, 강목체 서술 방식을 따랐지만 입강(立綱), 즉 강과 목의 분류에 있어 기존의 강목체와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며 근엄성을 많이 잃었다고 평가했다.
4. 1. 조선 후기 역사서
임상덕의 《동사회강》과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모두 《여사제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안정복은 《여사제강》에 대해 "우수하기는 하지만 고려사 하나만 다루었을 뿐"이고, 강목체 서술 방식을 따랐지만 입강(立綱), 즉 강과 목의 분류에 있어 기존의 강목체와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며 근엄성을 많이 잃었다고 평가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고대사는 《삼국사기》를, 고려 시대사는 《고려사》와 《여사제강》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유계의 사론이 55편 정도 실려 있다.구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서인 《송원화동사합편강목》과 《동감강목》 역시 《여사제강》을 저본으로 삼았다.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한 이항로의 제자 류중교와 김평묵이 편찬한 것으로, 편찬, 판각 및 간행까지 50년(1852~1907)이 걸렸다. 이 책은 유계가 《여사제강》에서 보인 대명의리론을 이어받아 서양 세력의 배척과 정학(성리학)을 지키려는 정신을 담고 있으며, 사론 또한 《여사제강》의 것을 거의 수록하고 있다. 《동감강목》은 송시열의 9대 손 송병선이 저술한 책으로, 유계의 사론 상당수가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4. 2. 위정척사파의 역사서
이항로의 제자 류중교와 김평묵이 편찬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였으며, 편찬, 판각 및 간행까지 50년(1852~1907)이 걸렸다. 이 책은 유계가 《여사제강》에서 보인 대명의리론을 이어받아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정학(성리학)을 지키려는 정신을 담고 있으며, 사론 또한 《여사제강》의 것을 거의 수록하고 있다. 송병선이 저술한 《동감강목》에도 유계의 사론 상당수가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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