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인로는 고려 시대의 문인으로, 평장사 이오의 증손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몰락한 문벌 귀족 가문 출신으로, 승려 요일에 의해 양육되었다. 무신정변 이후 불교에 귀의했다가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예부원외랑, 비서감 우간의 대부 등을 지냈으며, 오세재, 임춘 등과 교류하며 강좌칠현으로 불렸다. 저서로는 《쌍명재집》, 《파한집》 등이 있으며, 《파한집》은 한국의 오래된 시화집으로 알려져 있다. 무신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52년 출생 - 한탁주
한탁주는 남송의 관료이자 정치가로, 효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영종 옹립에 기여하여 13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측근 중용, 성리학 탄압, 개희북벌 실패 등으로 남송 쇠퇴의 원인이 된 인물이다. - 1152년 출생 - 강종 (고려)
강종은 고려의 제22대 왕이며,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은 최충헌에게 있었고, 재위 기간은 1211년부터 1213년까지이며, 능은 후릉이다. - 고려 중기의 문신 - 정습명
정습명은 고려 인종 때 국자감 사업을 지내고 묘청의 난 토벌에 참여했으며 김부식 등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문신으로, 의종 즉위 후 간언을 이어갔으나 왕의 미움을 사 자결했다. - 고려 중기의 문신 - 묘청
묘청은 고려 시대 서경 출신 승려이자 정치가로,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인종에게 서경 천도를 주장하고 금나라 정벌을 역설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 귀족 세력의 반발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 1220년 사망 - 프랑스의 아녜스
프랑스의 공주 아녜스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2세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나, 권력 찬탈로 인해 안드로니코스 1세와 강제로 결혼한 후 테오도르 브라나스와 재혼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1220년 사망 - 볼프람 폰 에셴바흐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중세 독일의 기사이자 시인으로, 성배를 주제로 한 독일 문학 작품 중 현존하는 최초의 작품인 《파르치팔》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후대 문학, 예술,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인로 | |
---|---|
기본 정보 | |
![]() | |
한글 이름 | 이인로 |
한자 이름 | 李仁老 |
로마자 표기 | I In-ro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국적 | 고려 |
활동 | |
직업 | 문인 |
분야 | 시 |
주요 작품 | 《파한집(破閑集)》 |
2. 생애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문인이다. 문벌귀족 가문인 경원 이씨 출신으로,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 이오이며 아버지는 이백선(李伯仙)이다.[1]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승려 요일(寥一)에게 의탁하여 성장했다.[1]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이를 피해 잠시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으나, 곧 환속하여 1180년(명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1] 이후 직사관(直史官)을 시작으로 사관(史館)과 한림원 등에서 14년간 근무했으며,[1] 예부 원외랑, 비서감 우간의대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1] 어려서부터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했으나 성미가 급하여 크게 중용되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1]
관직 생활 중에도 무신정권 하의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임춘, 오세재, 조통, 이담지, 황보항, 함순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와 술을 즐겼다.[1] 이들은 중국 죽림칠현을 본받아 스스로를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칭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1]
이인로는 당대 시단의 중심인물로서 송나라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으며, 특히 소식과 황정견의 시풍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저서로는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이 전하며, 특히 시화집(詩話集)인 "파한집(破閑集)" 3권은 최자의 "보한집(補閑集)"과 더불어 한국 최초의 시화집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가계 및 초기 생애
문벌귀족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 이오이며 아버지는 이백선(李伯仙)이다.[1] 종증조부 이공수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이지저는 재종조부였다.[1] 고조부 이자상은 이자연의 동생으로, 종고조부 이자연의 후손 중에서는 문종, 순종, 선종의 왕비와 후궁이 다수 배출되었다.[1]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화엄종 승려인 승통(僧統) 요일(寥一)에게 의탁하여 자랐다.[1]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에 뛰어났고 초서와 예서 등 글씨에도 능했다.[1]
1170년 의종 때 정중부, 이의방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정중부의 난)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를 피해 잠시 불문에 귀의했다가[1] 다시 환속하여 명종 10년인 1180년에 문과에 급제했다.[1] (일설에는 수석 급제라고도 한다) 이후 직사관(直史官)이 되어 14년간 사관(史館)과 한림원에서 주로 활동했으며,[1] 신종 때는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고종 초에는 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鑑 右諫議大夫)를 지냈다.[1]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성미가 급한 편이어서 관직에서 크게 중용되지는 못했다.[1]
관직 생활 중에도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오세재, 임춘, 조통, 이담(李湛), 황보항, 함순(咸淳) 등과 같은 문인들과 나이를 잊은 벗(망년우, 忘年友)이 되어 시와 술을 즐겼다.[1] 이들은 중국 죽림칠현을 본받아 스스로를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불렀다.[1]
2. 2. 출가와 환속
1170년 의종 때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피해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다시 속세로 돌아와 명종 10년인 1180년에 문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다.과거 급제 후 직사관(直史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14년 동안 사관(史館, 사국)과 한림원에 재직하며 주로 문서를 다루는 일을 맡았다. 신종 대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고, 고종 초에는 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의 관직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관직에서 크게 중용되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으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오세재, 임춘, 조통, 이담, 황보항, 함순 등 당대의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며 시와 술을 즐겼다. 이들은 스스로를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에 빗대어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칭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2. 3. 관직 생활
1170년 의종 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를 피해 잠시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 후 다시 세상으로 나와 명종 10년인 1180년에 문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직사관(直史官)이 되었다. 이후 14년 동안 사국(史局)과 한림원에 재직하며 조칙(詔勅) 제작에 종사하였다.신종 때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고, 고종 초에는 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鑑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나, 성미가 급하여 크게 등용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오세재·임춘·조통·이담지ㆍ황보항ㆍ함순 등과 나이를 잊은 벗(망년우, 忘年友)을 맺어 시와 술을 즐겼다. 이들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을 본받아 스스로를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칭하였다.
오랫동안 시를 짓는 데 힘써 당대 시단의 중심인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특히 송나라 시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시풍을 높이 평가하였다. 저서로는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이 있으며, 특히 시 비평을 겸한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 3권은 최자의 "보한집(補閑集)"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화집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시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2. 4. 강좌칠현과의 교류
이인로는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무신정권 하의 어지러운 현실에 염증을 느껴 문학 활동에 몰두했다.[1] 당대의 명망 있는 문인들인 오세재, 임춘, 조통, 이담지, 황보항, 함순 등과 나이를 잊은 벗(망년우, 忘年友)이 되어 시와 술을 함께 즐겼다.[1] 이들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을 본받아 스스로를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불렀다.[1]3. 평가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뛰어난 문장과 시로 당대에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저서 《파한집》은 한국 초기 시화집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1] 또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그의 평론 역시 주목받는다. 그러나 무신정권 시기에 활동하며 정권에 협력하거나 이를 묵인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3. 1. 긍정적 평가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한유의 고문(古文)을 따랐고 소식의 시를 좋아했다.[1] 그는 명문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나타냈으며, 문장에 뛰어나 초서와 예서에도 능통했다. 1180년에는 과거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예부 원외랑, 비서감, 우 간의대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오랫동안 한림원과 사관에서 활동하며 조칙(詔勅) 작성에 종사하는 한편, 시 창작에도 힘써 당대 시단의 중심인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는 송나라 시대 시학의 영향을 받아 소식(동파)과 황정견(산곡)의 시풍을 높이 평가했다.
이인로는 《쌍명재집》, 《파한집》, 《은대집》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1] 특히 《파한집》 3권은 한국에서 오래된 시화집(詩話集)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1], 최자의 《보한집》과 더불어 후대 시학 발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저작으로 꼽힌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문인으로 칭송받았으며,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교류하며 강좌칠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3. 2. 부정적 평가
무신정권에 협력 내지는 묵인하였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4. 작품 활동
- 주요 저서로는 《쌍명재집》 20권, 《파한집》 3권, 《은대집》, 《후집》 4권 등이 있다.
-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한림원과 사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시 창작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시단의 중심 인물로서,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 송나라 시의 영향을 받아 소식(동파)과 황정견(산곡)의 시풍을 높이 평가했다.
- 특히 《파한집》은 최자의 《보한집》과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시화집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후대 시문학 비평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 당대의 뛰어난 문인들인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가깝게 지내며 강좌칠현이라 불리기도 했다.
5. 가계
- '''조부''' : 이언림(李彦林)
- '''아버지''' : 이백선(李伯仙)
- '''아내''' : 경주 최씨(慶州崔氏) - 최영유(崔永濡)의 딸
- * '''아들''' : 이정(李程)
- ** '''손자''' : 이승경(李承慶)
- * '''아들''' : 이양(李穰)
- ** '''손자''' : 이승윤(李承胤)
- ** '''손자''' : 이복경(李福卿)
- * '''아들''' : 이온(李昷)
- * '''아들''' : 이세황(李世黃)
- * '''아들''' : 이아대(李阿大)
- * '''딸''' : 봉유검(奉由儉)에게 출가
6. 기타
KBS 드라마 《무인시대》(2003년~2004년)에서 배우 이일웅이 이인로를 연기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