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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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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도릭은 1286년경 이탈리아 포르데노네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 1318년부터 1330년까지 동방으로 여행하며 선교와 탐험을 수행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인도를 여행했으며,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등 동남아시아 섬들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3년간 중국에 머물며 항저우의 웅장함을 묘사하고, 대칸의 제국 도시 칸발리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1330년 귀환 후 여행담을 기록했으며, 1331년 사망했다. 그의 《동방 여행기》는 유럽에 동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큰 영향을 미쳤고, 사후 복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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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릭
기본 정보
이름복자 오도리코
다른 이름오도리코
오도리쿠스
오도리코 데 포르데노네
출생1286년경
출생지포르데노네, 프리울리 파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사망1331년 1월 14일 (44–45세)
사망지우디네, 프리울리 파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기념일1월 14일
시복일1755년 7월 2일
시복 장소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령
시복자교황 베네딕토 14세
주요 성지카르멜 산의 성모 교회, 우디네, 이탈리아
숭배 대상로마 가톨릭교회 (프란치스코회)
오도리코의 출발
오도리코의 출발
오도리코 데 포르데노네
오도리코 데 포르데노네
추가 정보
속성긴 턱수염을 기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동양인을 짓밟고 서 있다.
순례자의 옷을 입고 있다.
지팡이와 성경책, 십자가를 들고 있다.
수호알려진 바 없음

2. 생애

이탈리아 프리울리 포르데노네 인근 빌라노바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이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나, 128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문 배경에 대해서는 오토카 2세 휘하 군인의 아들이라는 설, 체코 출신 가문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명확히 입증되지는 않았다.[11][12] 오도릭은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으며, 1296년부터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1318년경, 오도릭은 동방으로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 여행은 선교 목적과 개인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플, 흑해를 거쳐 트라페준트에 도착한 후, 육로를 통해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렀다. 특히 인도에서는 순교한 동료 수도사들의 유해를 수습하기도 했으며, 자바섬, 보르네오섬 등을 방문한 기록을 남겼다. 중국에서는 남부 광저우에 도착하여 취안저우, 항저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수도인 칸발리크(현재의 베이징)에 도착하여 약 3년간 머물렀다.

오도릭이 통과한 고대 페르시아 도시 페르세폴리스. 외젠 플랑댕의 1840년 그림.


1327년경 베이징을 떠나 육로를 통해 귀국길에 올랐으며, 티베트를 거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약 50000km에 달하는 긴 여정을 마치고 1329년 말 또는 1330년 초에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귀국 후 파도바에서 자신의 여행 경험을 구술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아비뇽교황에게 선교 상황을 보고하려 했으나, 피사에서 병을 얻어 고향 우디네로 돌아가 1331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여정에는 아일랜드 출신 수사 제임스가 동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도릭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그의 여정과 사후 기적 이야기가 널리 퍼지며 존경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

오도릭은 이탈리아 프리울리 포르데노네에 속한 작은 마을 빌라노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286년경[11] 또는 1265년에서 1285년 사이로 추정되어 왔다. 하지만 2002년 그의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검사 결과, 1331년 사망 당시 약 50세였음이 밝혀져 128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의 가문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오토카 2세 국왕의 이름으로 포르데노네를 방어하던 마티우시(Mattiussi) 가문 출신이라는 설[11]과 그의 가문이 체코 출신이라는 주장[11]이 있지만, 이는 입증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12] 다른 전승에서는 그가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이라고도 하지만, 최근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설들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도릭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고, 사후에 형성된 이야기들로 인해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다.

14세기 교회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오도릭은 아주 어린 나이에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하여 수도 서약을 했다. 일부 기록에는 프리울리의 주도인 우디네에서 입회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프란체스코회 소속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96년 작은 형제회의 일원으로 서명한 법적 문서이다. 이후 1316년, 1317년, 1318년에도 다른 문서에 서명한 기록이 남아있어, 이 기간 동안 그가 프리울리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그가 당시 상당한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누렸음을 시사한다.

2. 2. 동방 여행 (1318년? ~ 1329/1330년)

오도릭의 동방 여행은 그의 선교 활동과 탐험 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의 여행은 몽골 제국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고, 교황청이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던 시기 이후에 이루어졌다. 13세기 중반 몽골의 침략 이후, 14세기에는 원나라 치하의 비교적 안정된 상황 속에서 유럽중국 간의 교류가 증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마르코 폴로나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와 같은 인물들이 동방을 여행했으며, 오도릭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방으로 향했다.[3]

오도릭은 자신의 여행이 외교적 임무가 아닌, "불신자들의 나라를 방문하여 영혼의 수확을 얻기 위한" 선교 목적과 개인적인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그가 교회의 공식적인 파견 명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의지로 허가를 얻어 출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포르데노네의 오도릭의 여정


1318년 이후 어느 시점, 오도릭은 베네치아를 떠나 동방으로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인도 여정 (1321년 이후): 호르무즈에서 배를 타고 인도의 타나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이슬람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순교한 토마스 오브 톨렌티노와 그의 동료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3명의 유해를 수습하여 여행길에 지니고 다녔다.[3] 이 유해는 도미니코회 선교사 조던 오브 세베락에 의해 수습되어 매장되었던 것이다. 오도릭은 타나를 떠나 말라바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코둥갈루르(싱기린)와 콜람(퀼론) 등을 방문했다. 이후 인도의 남단을 돌아 코로만델 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첸나이 근처에 있다고 전해지는 사도 토마스의 성지를 방문했다.

  • 동남아시아 및 중국 여정: 인도에서 정크선을 타고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를 방문했다. 특히 보르네오 방문은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록된다. 자바에 대해서는 당시 자바의 왕이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과 여러 차례 싸워 격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참파(현재의 베트남 중남부), 니코바르 제도, 실론을 거쳐 중국 남부의 광저우(당시 '친칼란' 또는 '마하친'으로 불림)에 도착했다.[5][6] 광저우에서 육로로 주요 항구 도시인 취안저우(자이톤)로 이동하여, 그곳에 있던 두 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중 한 곳에 인도에서 가져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이후 푸저우, 항저우(칸사이), 난징(치렌푸), 양저우(이엄자이) 등 주요 도시들을 거쳐 대운하를 따라 북상하여 원나라의 수도인 칸발리크(현재의 베이징)에 도착했다.[7] 항저우에 대해서는 마르코 폴로나 이븐 바투타처럼 그 웅장함과 번영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며 "세계 어느 도시보다 더 큰 도시로, 둘레가 100마일에 달하며 인구가 매우 많다"고 기록했다.

  • 베이징 체류 (1324년? ~ 1327년?): 오도릭은 베이징에서 약 3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베이징에는 고령의 프란치스코회 대주교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가 있었으며, 오도릭은 그가 세운 교회 중 한 곳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 귀국 여정 (1327년? ~ 1329/1330년): 베이징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황제의 요청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귀국길은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프레스터 존의 땅(아마도 몽골 지역), '칸산'(아마도 산시성) 등을 거쳤다고 기록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티베트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후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을 거쳐 트레비존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1329년 말 또는 1330년 초에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오도릭의 여정은 1330년 5월,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교회에서 소라냐의 구리엘모 수사에 의해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귀국 후 오도릭은 아비뇽교황을 만나러 가려 했으나, 피사에서 병을 얻어 고향 우디네로 돌아왔고, 1331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우디네에 있는 오도릭의 무덤

2. 3. 귀환과 사망

10년이 넘는 긴 여행 끝에 약 50000km를 이동한 오도릭은 1329년 말이나 1330년 초 무렵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직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에 머물렀고, 1330년 5월 그곳에서 자신의 상세한 여행담을 이야기했다. 이 내용은 솔라냐의 윌리엄 수사에 의해 간단한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이후 오도릭은 극동 지역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고 카타이 선교를 위한 새로운 인력을 요청하기 위해 아비뇽의 교황청으로 가고자 했다. 이를 위해 배를 타려고 피사로 갔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고향인 프리울리로 발길을 돌렸다. 결국 1331년 1월 14일, 우디네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도원의 수사들은 조용히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이 소식이 도시에 알려지자 오도릭을 존경했던 우디네의 최고 행정관 콘라트 베르나르디지가 개입하여 다음 날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그의 놀라운 여정에 대한 이야기와 사후에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는 기적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장례식은 여러 차례 연기되었고, 마침내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와 지역의 여러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오도릭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이 커지면서, 총대주교는 그의 시신을 우디네 공동체가 의뢰하여 베네치아 예술가 필리포 데 산티스가 조각한 석관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오도릭은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안치되었고, 그에게 헌정된 예배당은 15세기에 그의 여정과 기적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이 석관은 176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탄압으로 철거된 후 여러 곳을 거쳐 현재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오랜 여행 동안 아일랜드 출신 수사 제임스가 그와 동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임스 수사는 오도릭이 사망한 직후 우디네의 공적 기록에 '수도사 오도릭의 축복받은 동료, 신과 오도릭을 사랑하는 자'(Socio beau Fratris Odorici, amore Dei et Odoricilat)라는 기록으로 이름이 등장한다.

3. 오도릭의 여행 배경

오도릭의 여정은 약 한 세기 전 몽골 제국이 유럽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교황청의 외교 사절단 파견 시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1237년에서 1238년 사이 몽골군은 러시아 대부분을 약탈했고, 1241년까지 폴란드와 헝가리를 황폐화시켰으나 이후 갑작스럽게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제1차 리옹 공의회를 통해 1245년, 프란치스코회에 대칸 타타르에게 보낼 첫 외교 사절단을 맡겼으며,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교황 사절단 파견의 시작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였다.[3][4]

1260년대에 들어서면서 또 다른 몽골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가라앉자, 이후 약 100년 동안 유럽과 중국 사이에는 무역 기회 증진과 종교적 개종을 목표로 한 수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류는 원나라 치하에서 통일되고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던 몽골 제국,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 덕분에 더욱 활발해질 수 있었다. 당시 몽골은 다신교 사회였기에 기독교를 포함한 외래 종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여행자로는 1260년과 1271년에 두 차례 동방을 여행한 니콜로, 마페오, 마르코 폴로 부자(父子)와, 1294년 교황 니콜라오 4세의 명을 받아 중국으로 떠난 선교사 몬테코르비노의 요한 등이 있다. 이들의 여행을 통해 극동 지역에 대한 정보가 유럽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도릭이 여행을 시작할 당시, 그에게 특별한 외교적 임무가 주어졌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주로 복음을 전파하고, 개인적인 탐구심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에서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여행기 첫 장에는 "나의 소원에 따라, 나는 바다를 건너 이교도들의 나라를 방문하여 영혼의 수확을 얻고자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의 여행이 외교적 목적보다는 선교와 탐험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음을 시사한다.

4. 《동방 여행기》

오도릭의 여행기는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인 1330년 5월, 볼로냐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 윌리엄 오브 솔라냐(William of Solagna)에게 구술한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다. 원본 필사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연구자들은 최소 117개의 사본을 확인했으며, 이 중 79개는 라틴어, 23개는 이탈리아어, 8개는 프랑스어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본에는 제목이 없어 학자들은 관례적으로 Relatio|렐라티오la(보고서)라는 제목을 사용한다.

이 여행기는 당시 유럽에서 널리 읽혔으며, 대륙 전역의 도서관에서 필사본이 발견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아시시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사본 3개가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도릭의 이야기는 여러 편집본으로 전해지는데, 윌리엄 오브 솔라냐가 기록한 것 외에도 하인리히 오브 글라츠(Heinrich of Glatz)가 아비뇽의 교황 도서관에서 본 사본을 필사한 버전(1331년경 추정) 등이 있다. 이후 편집자나 필사자들은 원본 라틴어 문법을 다듬거나 세부 내용을 추가하고, 심지어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일어 필사본에서는 오도릭이 중국 도시와 이탈리아 도시를 비교한 부분을 독일 도시와의 비교로 바꾸었고, 프랑스어 필사본에서는 프랑스 도시와의 비교가 이루어졌다. 일부 판본에서는 오도릭 사후에 그에게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기적 이야기를 추가하여 그의 시복을 뒷받침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여행기는 1513년 페사로에서 처음 인쇄되었는데, 아포스톨로 제노(1668–1750)는 이 판본의 언어를 lingua inculta e rozza|링구아 인쿨타 에 로차it(조잡하고 거친 언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후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가 1574년 자신의 저서 《항해와 여행》(Navigazioni e Viaggi) 제2판에 오도릭의 여행기를 이탈리아어 번역본으로 수록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볼란디스트회가 편찬한 《Acta Sanctorum》(성인전)에도 라틴어 판본이 실려 있다.

오도릭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중세 유럽인들에게 동방, 특히 중국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그는 수마트라의 정확한 이름을 언급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으며(마르코 폴로는 '사마라'(Samara) 등으로 표기), 마르코 폴로가 언급하지 않은 중국의 가마우지를 이용한 낚시 방법이나 전족 풍습 등을 기록하여 독자적인 관찰을 보여준다. 그의 기록은 후대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유명한 여행기 작가인 존 맨더빌은 인도와 중국에 대한 묘사에서 오도릭의 기록을 상당 부분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1. 주요 내용 (한국 관련)

오도릭의 여행기에 고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방문했던 14세기 초 원나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기록은 당시 원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오도릭이 자바섬에 대해 남긴 기록이 주목된다. 그는 자바의 왕이 '카타이'(Cathay, 당시 유럽에서 중국을 부르던 명칭, 여기서는 원나라를 지칭)의 대칸과 여러 차례 싸워 물리쳤다고 적었는데[5][6], 이는 쿠빌라이 칸이 주도했던 자바 원정(1292년 ~ 1293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기록은 당시 원나라의 팽창 정책이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원나라의 대외 팽창에는 고려 역시 자유롭지 못했는데, 고려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1274년, 1281년)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야만 했다.

또한 오도릭은 항저우(당시 기록에는 "칸세이"(Cansay)로 표기)를 방문하여 그 규모와 번영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항저우를 "세계 어느 도시보다 크며 둘레가 100마일에 달하고, 도시 안에는 빈 곳 없이 사람이 살고 있으며, 한 집에 10~12가구가 함께 사는 경우도 흔하다"고 묘사하며 그 거대함에 놀라움을 표했다. 당시 항저우는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이자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원나라를 방문하는 고려 사신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도릭이 전하는 항저우의 모습은 당시 활발했던 국제 교류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교류 양상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가 된다.

5. 사후 평가 및 영향

오도릭은 1331년 1월 14일 고향 프리울리에서 사망했다. 수도원 수사들은 조용히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그를 존경했던 우디네의 최고 행정관 콘라트 베르나르디지가 개입하여 다음 날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오도릭의 긴 여행에 대한 소문과 그에게 기인한 사후 기적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대중적인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장례식은 여러 차례 연기되었고, 결국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와 많은 지역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복자 오도릭의 중국 묘사


대중의 존경심이 커지자, 총대주교는 오도릭의 유해를 우디네 공동체가 의뢰하여 베네치아 예술가 필리포 데 산티스가 조각한 석관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유해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안치되었고, 그에게 헌정된 예배당은 15세기에 그의 여정과 기적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이 석관은 이후 여러 곳을 거쳐 현재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오도릭에 대한 숭배가 확산되면서 그의 유해를 위한 예배당이 세워졌고, 성자이자 여행가로서 그의 명성은 14세기 중반 이미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교황청이 그의 시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4세기가 지난 1755년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오도릭의 무덤에서 일어난 많은 기적에 감동하여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고 복자로 선포했다.[1] 1881년에는 그의 고향 포르데노네 시가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흉상)를 세웠다.[1]

여행가로서 오도릭은 마르코 폴로 이후 수마트라의 이름을 분명히 언급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그 섬이나 인근 섬들에서 행해지는 인간 식인 풍습과 공동 아내 제도에 대해 기록했다.[1] 군도에서의 사고에 대한 그의 묘사는 일부 오류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목격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 중국과 관련하여, 광저우를 'Censcolam' 또는 'Censcalam'이라는 이름으로 언급한 것, 가마우지를 이용한 낚시 관습, 손톱을 과도하게 기르는 습관, 그리고 전족의 풍습에 대한 그의 묘사는 동시대 다른 여행가들의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내용이다. 마르코 폴로는 이러한 내용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오도릭은 여러 나라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데에도 힘썼다.

5. 1. 존 맨더빌의 표절 논란

오도리코의 여행기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본이 만들어졌으며, 14세기 중반부터 빠르게 퍼져나가 인기를 얻었다. 내용 중 일부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오도리코의 공적은 존 맨더빌의 경우와는 구별된다. 존 맨더빌의 여행기는 다른 자료나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 더해졌을 수 있으나, 특히 인도와 중국에 대한 묘사는 오도리코의 기록을 표절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서적 Cathay and the Way Thither: Being a Collection of Medieval Notices of China, Issue 36 https://books.google[...]
[2] 간행물 (4637) 1989 CT Minor Planet Center
[3] 웹사이트 Odoric of Pordenone."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2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3-03-27
[4] 웹사이트 Blessed Odoric Matiussi of Pordenone http://www.francisca[...] Franciscan Herald Press
[5] 문서 一度南ベトナムのチャンパーに達してから南下してインド洋の島々(セイロン島、ニコバル諸島、アンダマン諸島の記述が続いている。写本の順番が誤っているか、またはザンパをチャンパーとする比定が誤っているかいずれかだと思われる(家入敏光訳pp249-250)
[6] 문서 チェンスカランは上部インド地方、或いはManziと表記されており、蛮子(元代北方人が南宋旧領の人々を卑下した呼称)、ペルシア語のMachin(マーチーン(大シナ))、サンスクリットのMaha China(大シナ)など諸説ある。第26章に、マンジは大汗の支配する12の領域の一つと記載がある(家入敏光訳p118)
[7] 문서 カンバリクはKhan-baliq(モンゴル語で汗の都)。大都(Taido)とも表記されている(家入敏光訳p272)
[8] 문서 この地はフレグが陥落させたラシード・ウッディーン・スィナーン|山の老人]]がいた地との記載がある(家入敏光訳pp132-133)
[9] 문서 初刊は、家入敏光訳「東西交渉旅行記全集2 東洋旅行記」桃源社、1966年
[10] 뉴스 700년 전 오도릭의 여행, 기독교의 동방 전파사 실감나게 담아내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2-05-04
[11] 웹사이트 Odoric of Pordenone."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1-01-01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년도만 표기
[12] 웹사이트 ODORICO da Pordenone."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https://www.treccani[...] Tilatti, And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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