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의 서안 지구 합병
1. 개요
요르단의 서안 지구 합병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요르단이 서안 지구를 점령하고 합병한 사건이다. 1947년 유엔 분할안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이 분할될 예정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구 대부분을 점령했다. 압둘라 1세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요르단에 편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했고, 1950년 4월 공식적으로 합병을 선언했다. 이 합병은 영국으로부터 부분적인 승인을 받았지만, 아랍 연맹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으며,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이어졌다. 1988년 요르단은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유일한 합법 대표로 인정했다.
| 공식 명칭 | 아랍: الضفة الغربية (Aḍ-Ḍiffah l-Ġarbiyyah) |
|---|---|
| 일반 명칭 | 서안 지구 |
| 상태 | 요르단 하심 왕국에 합병된 지역 |
| 이전 국가 |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 |
| 계승 국가 |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점령 |
| 현재 상태 |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점령, 팔레스타인의 영유권 주장 지역, 팔레스타인 영토로 널리 인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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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 암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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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용어 | 아랍어 |
|---|---|
| 종교 | 수니 이슬람 (다수), 기독교 (소수) |
| 사건 시작 |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1948년 5월 14일) |
|---|---|
| 합병 | 1950년 4월 24일 |
| 사건 종료 | 6일 전쟁 (1967년 6월 5일–10일) |
| 이후 사건 | 요르단의 영유권 포기 (1988년 7월 31일) |
| 통화 | 요르단 디나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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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요르단 -
제3차 중동 전쟁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하여 6일 만에 승리한 제3차 중동 전쟁은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요르단강 서안 지구, 골란 고원을 점령하고 중동 지역의 정치 지형과 아랍-이스라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요르단-이스라엘 관계 -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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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이스라엘 관계 -
평화의 섬 학살
평화의 섬 학살은 1950년 8월 17일에 발생하여 무고한 주민들과 부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어린 여학생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추모지가 조성되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으며, 1997년에는 이스라엘 여학생 공격 사건과 가해자 석방 논란이 있었다. -
1948년 요르단 -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 독립 선언 직후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시작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같은 중동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 -
1948년 요르단 -
예리코 회담
1948년 12월 1일 예리코에서 열린 예리코 회담은 제1차 중동 전쟁 이후 압둘라 1세의 주도로 팔레스타인 잔여 영토의 요르단 합병을 결의했으나, 아랍 연맹의 반발과 팔레스타인 내부 이견으로 논란이 된 사건이다.
2. 배경
1948년 적대 행위가 시작되기 전,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오늘날의 서안 지구)은 1917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점령한 후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에 따라 영국이 관리했다. 영국은 이 땅의 관리자로서 1858년 오스만 토지법에 정의된 바와 같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팔레스타인의 토지 보유법을 시행했다. 영국 위임 통치령이 만료될 무렵, 아랍인들과 현지의 유대인들은 모두 자치와 독립을 열망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유대 국가, 예루살렘 시로 분할하는 결의안 181을 통과시켰다.
1948년 3월, 영국 내각은 팔레스타인의 민간 및 군사 당국이 유대 국가 수립이나 트란스요르단으로부터의 팔레스타인 진입에 반대하는 어떠한 노력도 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트란스요르단의 합병을 지지했다. 영국은 압둘라 1세 국왕이 가능한 한 빨리 이 영토를 합병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미국은 팔레스타인 조정 위원회가 중재한 협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선호했다.
2.1. 분할 계획
영국은 1917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영토를 받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운영했다. 위임통치령 종료가 가까워지자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 독립과 자결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 181을 통과시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 아랍인 국가, 예루살렘 시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유대인 국가는 갈릴래아 동부, 하이파부터 레호보트까지 이어지는 해안 평야, 네게브 사막 대부분을 포함하고, 아랍인 국가는 아크레를 포함한 갈릴래아 서부, 사마리아, 유대, 야파 월경지, 아슈도드 북쪽에서 가자 지구까지 이어지는 남쪽 해안과 이집트 국경의 사막 지역을 포함하기로 했다. 예루살렘 분할체에는 베들레헴 주변 도시가 포함되었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전체를 기준으로, 유대인 국가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면적의 56.47%를 차지하고 인구는 유대인 49만 8천 명, 아랍인 32만 5천 명이었으며, 아랍인 국가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면적의 43.53%를 차지하고 인구는 아랍인 80만 7천 명, 유대인 1만 명이었다. 예루살렘 지역의 인구는 유대인 10만 명, 아랍인 10만 5천 명이었다.
1948년 3월 영국 내각은 팔레스타인의 민간 및 군 당국이 유대 국가 수립이나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진입에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국도 영국과 함께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합병을 지지했다. 영국은 압둘라 1세에게 최대한 빨리 합병을 진행하라고 했지만, 미국은 유엔 조정 위원회의 합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권고했다.
2.2. 요르단군의 팔레스타인 진입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종료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자, 존 배것 글럽 경(글럽 파샤)이 지휘하는 아랍 군단은 유엔이 정한 아랍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3. 휴전
1949년 4월 3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요르단군은 동예루살렘과 구시가를 포함, 서안 지구 대부분의 점령 영토를 유지하였다.
* 요르단군은 샤론 평지에서 철수하였고, 이스라엘은 이라크군이 점령했던 서안 지구를 요르단군이 점령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스코푸스산 캠퍼스 간 안전한 이동, 라트룬-예루살렘 고속도로, 성지로의 접근 등 여러 문제에 대해 합의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특별 위원회는 결성되지 못했고, 이스라엘인은 성지로 접근할 수 없었다.
3. 요르단의 점령 및 합병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직후,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아랍 지역에 대한 점령을 영속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압둘라 1세 국왕은 아랍 군단이 점령한 라말라, 헤브론, 나블루스, 베들레헴, 람레 및 아랍이 통제하는 예루살렘 지역에 자신의 대리인인 총독을 임명했다. 이 총독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인이었으며(아레프 알-아레프, 이브라힘 하셈, 아흐메드 힐미 파샤 포함), 요르단은 이들을 "군사" 총독이라 칭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 지역을 왕국에 편입하려는 요르단의 계획에 반대하는 다른 아랍 국가들을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국왕은 서안 지구 합병을 위한 다른 조치들도 취했다. 팔레스타인 경찰에게 요르단 경찰의 제복과 상징을 착용하도록 명령했고, 영국 우편 대신 요르단의 우표 사용을 시행했으며, 팔레스타인 지방 자치 단체는 세금을 징수하고 면허를 발급할 수 없게 했다. 또한 라말라의 라디오는 현지인들에게 친 후세이니 관계자들의 지시를 따르지 말고 요르단이 지원하는 총독들의 지시를 따르라고 촉구했다.
1948년 12월 예리코 회의는 압둘라 1세 국왕이 소집한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의 회의로, 당시 트란스요르단으로의 합병에 찬성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트란스요르단은 1949년 4월 26일 요르단 하심 왕국이 되었다. 1949년 11월 2일 팔레스타인 공공 행정법 개정법의 공포를 통해 군사 점령이 종료되었으며,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법률이 계속 적용된다고 선언했다. 요르단 의회에서 서안 지구와 동안 지구는 각각 약 30석을 차지했으며, 인구는 거의 같았다. 첫 선거는 1950년 4월 11일에 치러졌고, 서안 지구가 아직 합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주민들은 투표가 허용되었다.
3.1. 합병 과정
요르단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직후부터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역을 영구히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압둘라 1세는 헤브론, 베들레헴, 라말라, 나블루스, 라믈라와 아랍 점령하의 예루살렘 등 주요 아랍 도시의 시장을 직접 임명하였는데, 요르단에서는 이를 '군정 장관'으로 불렀다. 이는 합병 계획을 반대했던 다른 아랍 국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군정 장관 대다수는 아랍계 팔레스타인인이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경찰에게 요르단 경찰의 제복을 입을 것을 요구하고, 영국 대신 요르단 우표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팔레스타인의 지방 자치 정부에서 세금을 걷거나 면허증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였고, 팔레스타인 가문 대신 요르단 정부 요인을 따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1948년 12월, 압둘라 1세와 팔레스타인 주요 인사들 간에 열린 예리코 회담에서는 요르단으로의 합병을 결의했다. 1949년 11월 2일 팔레스타인의 기존 법령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팔레스타인 공공 행정법이 발효되며 군사 점령은 종료되었다. 요르단 의회에서 서안 지구와 동안 지구는 각각 의석 30석씩을 받았다. 1950년 4월 11일 최초의 선거가 열렸는데, 당시 서안 지구는 공식적으로 합병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팔레스타인인의 투표가 허용되었다.
1949년 영국 위임통치령의 1928년 국적법 개정안은 1950년 4월 24일 공식적인 합병에 앞서 사실상 이 지역의 42만 명의 현지 팔레스타인인, 서안 지구의 28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 및 동안 지구의 7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했다.
3.2. 합병
1950년 공식 합병 이전부터 서안 지구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인 42만 명, 서안 지구 난민 28만 명, 동안 지구 난민 7만 명은 실질적으로 요르단 시민권을 누리고 있었다. 요르단은 1954년 국적법을 개정하여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국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제1차 중동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인이 탈출한 국가 중 요르단만 유일하게 난민에게 기존 국민과 동등한 자격의 시민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법적 정당성이 전혀 없는 조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르단의 서안 지구 합병은 요르단의 확장과 관련한 '대시리아 계획'의 일부로써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는 이집트와 함께 요르단을 아랍 연맹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예멘과 이라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50년 6월 12일, 아랍 연맹은 요르단의 합병이 임시적이자 현실적인 조치이며, 요르단은 미래에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신탁'으로서 영토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후세인 1세는 동예루살렘을 '하심 왕국의 다른 수도'로 선포하고, 요르단의 '분리 불가능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후세인 1세는 1960년 의회에서 예루살렘을 '요르단 하심 왕국의 두 번째 수도'로 칭했다.
영국은 서안 지구 합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950년 영국은 하심 왕국과 요르단이 통제하는 팔레스타인 부분과의 통일을,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승인하였다. 영국 정부는 1948년 체결된 영국-요르단 조약이 통일된 영토 전역에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고 발표하였다. 미국 국무부 또한 요르단의 통치 범위가 확장된 것을 인정하였다. 파키스탄 또한 요르단의 합병을 인정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에는 논란이 있다. 아랍 연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안 지구의 거주민은 모두 요르단 시민권을 받았다.
1950년대 내내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은 높게 유지되었으며,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이스라엘 특공대 모두 그린 라인을 넘어다녔다. 1921년 트란스요르단의 아미르가 된 압둘라 1세는 1951년 7월 동예루살렘 성전산의 알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던 중,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논의하러 왔다는 소문을 믿었던 무장한 팔레스타인인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이 암살은 과거 예루살렘의 군정 장관이었던 압둘라 엘텔 중령이 계획했던 것임이 드러났다. 요르단의 왕위는 이후 아들인 탈랄 1세와 손자인 후세인 1세로 이어졌다.
3.3. 성지 접근
1949년 4월 3일 휴전 협정에는 이스라엘인이 동예루살렘의 성지를 방문할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요르단은 이스라엘이 서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인의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조항의 발효를 거부하였다. 동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세례증 등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야 했다.
성지 방문을 조율해야 할 특별 위원회는 결성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인은 종교와 무관하게 예루살렘 구시가의 진입이 거부되었고, 후르바 회당을 포함해 유대인 거주 구역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올리브산에 있던 유대인 공동묘지의 묘지석을 파해쳐 요르단 군사 기지와 도로 건설에 사용하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존 외스터라이허는 "구시가의 회당 35개 중 34개가 파괴되었다. 일부는 마구간으로, 일부는 닭장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였다.
4. 이후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요르단은 서안 지구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했고, 이스라엘 군정 하에 놓이게 되면서 약 3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으로 이동하였다. 성전산은 예루살렘 이슬람 와크프의 통제하에 유지되었지만, 각 종교 단체는 자기 종교 성지에 대한 관리 권한을 얻었다.
이후 요르단은 '오픈 브리지' 정책을 통해 서안 지구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1972년 후세인 1세는 요르단과 서안 지구를 포함하는 아랍 연방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아랍 연맹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하면서, 후세인 1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고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해야 했다.
1988년 요르단은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및 기독교 성지 보호자 역할을 제외한 서안 지구의 모든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 대표자'로 인정했다.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체결로 양국 간 영토 분쟁이 해결되고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4.1. 제3차 중동 전쟁 및 요르단의 통제 상실
제3차 중동 전쟁 후기에 요르단이 통치하던 서안 지구는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난민 약 30만 명이 요르단으로 탈출하였다. 6일 전쟁이 끝날 무렵, 이전의 요르단 통치하에 있던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인구가 거주하는 서안 지구는 이스라엘의 군정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약 3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으로 추방되거나 도망쳤다.
1967년 이후 각 종교 단체는 자기 종교의 성지를 직접 관리할 권리를 얻었으며,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인 성전산은 예루살렘 이슬람 와크프의 통제 상태가 유지되었다.
4.2. 요르단의 철수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요르단은 '오픈 브리지' 정책을 통해 서안 지구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1972년 후세인 1세는 요르단과 서안 지구를 포함하는 아랍 연방 계획을 제안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974년 아랍 연맹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했다. 이로 인해 후세인 1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해야 했다.
1988년 7월 28일, 후세인 1세는 1300 규모의 서안 지구 개발 계획 중단을 발표했다. 이틀 뒤, 서안 지구 주민이 의석 절반을 차지하던 요르단 하원을 해산했다.
1988년 7월 31일, 요르단은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및 기독교 성지 보호자 역할을 제외한 서안 지구의 모든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 대표자'로 인정했다. 후세인 1세는 이 조치가 팔레스타인인의 국가 건설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은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의 독자적인 협상 길을 열었다.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 영토 분쟁이 해결되고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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