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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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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릴래아는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고대부터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공존해왔다. 솔로몬 시대에는 페니키아에 도시가 할양되었고, 로마 시대에는 예수의 활동 무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일부로, 상갈릴리, 하갈릴리, 서갈릴리, 갈릴리 호수로 구분된다. 유대인, 아랍인(무슬림, 드루즈, 기독교인) 등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며, 농업, 관광, 산업을 통해 경제 활동이 이루어진다. 갈릴리 호수, 예수 길 등 관광 자원이 풍부하며, 독특한 갈릴리 요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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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개요
국가이스라엘
면적4,800km²
인구약 150만 명
갈릴리 지형도
갈릴리 지형도
지리
위치주로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
구성상부 갈릴리
하부 갈릴리
지형산지
비옥한 평야
역사
어원'갈릴(גָּלִיל)'은 히브리어로 '지역' 또는 '원통'을 의미
고대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교류 지역
신약 시대예수의 활동 중심지
현대이스라엘의 중요한 지역
문화
특징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
관광기독교 성지
아름다운 자연 경관
유적지텔 하초르
므깃도
가버나움
행정 구역
주요 도시나사렛
티베리아스
사페드
관련 지역북부 지구
언어
사용 언어히브리어
아랍어
영어

2. 용어

솔로몬이 나프탈리의 평야를 히람 1세에게 선사하자, 왕은 이 선물에 불만을 품고 "카불의 땅"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유대인은 이를 "갈릴"이라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3] 게네사렛 호수를 포함하여, 그 지역 전체를 '하갈릴'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의 히브리어 이름은 גָּלִיל|gālílhe로, '지역' 또는 '원'을 의미한다.[3] 이사야서 9:1에는 גְּלִיל הַגּוֹיִם|gəlil haggóyim|이방인들의 갈릴리he라고 나오는데, 이는 책이 쓰여진 당시 그곳에 정착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또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재정착 정책의 결과로 정착했다.[3]

3. 역사

갈릴래아는 신약성경에 따르면 로마 제국 시대에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북쪽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다. 북쪽으로는 페니키아,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경계를 이루었다. 이 지역은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의 빈곤은 로마 제국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은 세리, 대리정권인 헤로데 정권, 사제 계급의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수탈했으며, 이에 민중들이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학살함으로써 탄압했다. 이 지방의 나자렛은 예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갈릴래아의 히브리어 이름은 גָּלִיל|갈릴he로, '지역' 또는 '원'을 의미한다.[3] 이사야서에 나오는 גְּלִיל הַגּוֹיִם|겔릴 하-고임he은 "이방인들의 갈릴리"라는 뜻으로, 당시 그곳에 정착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재정착 정책의 결과로 정착했다.[3]

갈릴래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시대별로 구분할 수 있다.

시대주요 내용
고대 이스라엘 시대성경에 따르면, 갈릴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름 붙였으며 납달리 지파단 지파의 지역이었고, 때로는 아셀 지파의 땅과 겹치기도 했다. 솔로몬 왕은 페니키아의 동맹국인 시돈의 히람 1세에게 갈릴리 땅에 있는 20개의 도시를 주었다.
아시리아 시대철기 시대 II기에 갈릴리는 이스라엘 왕국의 일부였으나, 아시리아에 함락되었다. 기원전 732년 이후 이스라엘 주민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갔다.
헬레니즘 시대헬레니즘 시대 말기와 하스모네아 왕조 정복 이전까지 갈릴래아는 인구 밀도가 낮았으며, 주민들은 서부와 중앙 계곡 가장자리의 큰 요새 도시에 집중되어 살았다.
하스모네아 왕조 시대하스모네아 왕조의 확장 과정에서 갈릴래아 지역의 상당 부분이 아리스토불루스 1세에 의해 정복되었고,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로마 초기 갈릴래아는 주로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며, 기원전 63년 로마 정복 이후 유대인 정착민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의 4두정치 통치자였다. 66년, 대유대반란 동안 요세푸스는 갈릴리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대3세기 초, 유대교는 갈릴리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정점에 도달했다. 4세기에는 인구가 크게 감소하여 여러 정착지가 버려졌다.
이슬람 시대7세기 레반트의 이슬람 정복 이후 갈릴리는 요르단 군관구의 일부가 되었고, 빌라드 알샴(이슬람 시리아)에 속했다. 10세기에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 지역을 정복했다.
십자군 시대십자군 시대에 갈릴리는 갈릴리 공국으로 조직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초기 오스만 제국 시대에 갈릴래아는 사파드 산자크(Safad Sanjak)로 통치되었다. 알함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환영을 받아 갈릴래아의 유대인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영국 위임통치 시대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무드로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갈릴래아는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현대 이스라엘 시대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갈릴리 지역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레바논에서 출발하여 상부 갈릴리와 서부 갈릴리의 마을과 도시들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분쟁에서 헤즈볼라는 갈릴리 전역에 로켓 공격을 가했다.


3. 1. 고대 이스라엘 시대

성경에 따르면, 갈릴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름 붙인 곳이며 납달리 지파단 지파의 지역이었고, 때로는 아셀 지파의 땅과 겹치기도 했다.[6] 일반적으로 갈릴리는 "납탈리"로 불린다.

열왕기상 9장에는 솔로몬페니키아의 동맹국인 시돈의 히람 1세에게 갈릴리 땅에 있는 20개의 도시를 상으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도시들은 히람 통치 기간과 그 이후에 외국인들이 정착했거나, 신아시리아 제국과 같은 후대 정복자들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에 의해 정착되었을 것이다.[7] 히람은 다윗에게 받았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납탈리 산맥 사이의 고지대 평원을 받아들였고, 한동안 그곳을 "가불 땅"으로 개명했다.[7]

갈릴리 지도, 서기 50년경


철기 시대 II기에 갈릴리는 이스라엘 왕국의 일부였으며, 아시리아에 함락되었다. 즈비 갈이 갈릴리 저지대에서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8세기 아시리아 정복 이후 이 지역은 황폐해졌고 수 세기 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지역 이스라엘 주민들은 기원전 732년 이후 아시리아로 끌려갔다.[8][9] 야르데나 알렉산드레는 아시리아 정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설한 나할 짚포리 분지에 소규모의 짧은 기간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발견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갈릴리가 인구가 감소했다.[10] 그러나 가나에서 발견된 유물을 바탕으로 아시리아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있으며,[11] 콘라트 슈미트와 옌스 슈로터는 아시리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12]

3. 2. 아시리아 시대

성경에 따르면, 갈릴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름 붙인 곳이며 납달리 지파단 지파의 지역이었고, 때로는 아셀 지파의 땅과 겹치기도 했다.[6]

열왕기상 9장에는 솔로몬이 페니키아의 동맹국인 시돈의 히람 1세에게 갈릴리 땅에 있는 20개의 도시를 상으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도시들은 히람 통치 기간과 그 이후에 외국인들이 정착했거나, 신아시리아 제국과 같은 후대 정복자들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에 의해 정착되었을 것이다.[7] 히람은 다윗에게 받았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납탈리 산맥 사이의 고지대 평원을 받아들였고, 한동안 그곳을 "가불 땅"으로 개명했다.[7]

철기 시대 II기에 갈릴리는 이스라엘 왕국의 일부였으며, 아시리아에 함락되었다. 즈비 갈이 갈릴리 저지대에서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8세기 아시리아 정복 이후 이 지역은 황폐해졌고 수 세기 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지역 이스라엘 주민들은 기원전 732년 이후 아시리아로 끌려갔다.[8][9] 야르데나 알렉산드레는 아시리아 정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설한 나할 짚포리 분지에 소규모의 짧은 기간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발견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갈릴리가 인구가 감소했다.[10] 그러나 가나에서 발견된 유물을 바탕으로 아시리아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있으며,[11] 콘라트 슈미트와 옌스 슈로터는 아시리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12]

3. 3.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 시대 말기와 하스모네아 왕조의 정복 이전까지 갈릴래아는 인구 밀도가 낮았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서부와 중앙 계곡 가장자리의 큰 요새 도시에 집중되어 살았다. 텔 아나파, 케데시, 아슈슈하라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상갈릴래아에는 당시 페니키아 해안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이교도(가나안 종교)들이 살았다.[23]

3. 4. 하스모네아 왕조 시대

하스모네아 왕조가 확장하면서 갈릴래아 지역 대부분은 하스모네아 왕조의 첫 왕인 아리스토불루스 1세(기원전 104-103년)에게 정복되어 합병되었다. 하스모네아 왕조의 정복 이후, 이 지역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왔다. 요드파트(Yodfat), 메이론(Meiron), 셉포리스(Sepphoris), 시킨(Shikhin), 카프르 칸나(Kafr Kanna, Qana), 베르사베(Bersabe), 젤라민(Selamin, Zalmon), 밈라(Mimlah), 막달라(Magdala, Migdal), 아르벨(Arbel), 케파르 히타야(Kefar Hittaya), 벳 마온(Beth Ma'on) 등 유적지에서 이러한 정착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었다.[23]

고대 요드파트(Yodfat)가 있었던 언덕


요세푸스는 티마게네스(Timagenes of Alexandria)의 기록을 바탕으로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이투리아(Iturea) 지역의 일부를 합병하면서 이투리아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했다. 슈레르(Schürer)는 이 주장이 정확하다고 믿었으며, 예수 시대의 "유대인" 갈릴래아는 사실상 이투리아에서 개종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다른 학자들은 이투리아인들이 갈릴래아 상부, 또는 적어도 갈릴래아 상부 동부에서 자발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최소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이러한 제안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이투리아의 물질 문화는 북부 골란 고원과 헤르몬 산에서 명확하게 확인되었지만 갈릴래아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 지역이 하스모네아의 국경 밖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23]

3. 5. 로마 제국 시대

신약성경에 따르면, 로마 제국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갈릴래아는 그 북쪽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다. 북쪽으로는 페니키아,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경계를 이루었다.[13] 이 지역은 남쪽의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은 세리, 대리정권인 헤로데 정권, 사제 계급을 통해 세금을 징수하여 주민들을 수탈했으며, 민중들이 저항하면 십자가형으로 학살하여 탄압했다.[13] 이 지방의 나자렛은 예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초기 갈릴래아는 주로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회암 용기 사용, 의식 목욕탕(율법적 순결을 위한), 그리고 2차 매장 풍습 등 유대인들의 관습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었다.[13] 기원전 63년 로마의 정복 이후 유대인 정착민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23] 케파르 하나냐, 파로드, 라비드, 마쉬카네, 사반, 티베리아스와 같은 대도시들은 기원전 1세기 말이나 기원후 1세기 초에 건설되었다.[23] 기원후 1세기 말까지 갈릴래아는 작은 도시들과 마을들로 점점 채워졌다. 요세푸스는 작은 도시가 204개였다고 기록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과장된 수치로 본다.

로마 지배하의 갈릴리 경제는 농업, 어업, 그리고 전문적인 수공업의 조합으로 번영했다. 나자렛과 같은 마을에서의 발굴은 수많은 올리브 압착기와 곡물 창고를 포함한 광범위한 농업 기반 시설을 보여준다.[13] 갈릴리 상부 지역에서는 올리브가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다.[14] 특히 갈릴리 호수 주변의 많은 도시와 마을들은 비옥한 토지와 번영하는 어업 산업 모두의 혜택을 받았다.[13] 타리케아(막달라)에서는 소금에 절인 생선, 건조한 생선, 그리고 절인 생선이 중요한 수출품이었다.[13][14] 갈릴래아에는 전문 생산 센터도 있었다.[13] 셉포리스 근처 시힌에서는 이 지역의 대부분의 저장 항아리를 생산했다. 갈릴리 상부 지역의 케파르 하나냐에서는 다양한 식기류를 제조하여 갈릴리, 골란 고원, 데카폴리스, 해안 지역, 그리고 벳산 계곡 전역의 시장에 공급했다.[13]

요세푸스는 갈릴래아의 유대인 인구를 유대인 도시 거주자들에게 적대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며, 이들이 유대-로마 전쟁 중 로마인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바르길 픽스너는 그들이 바빌로니아 출신의 다윗 계보 유대인 족에서 내려왔다고 믿는다.[11] 그러나 고고학적 및 문학적 증거에 따르면, 갈릴리 상부와 하부는 '그들을 둘러싼 이방인 그리스어 사용 도시들과 끊임없이 접촉해 있었다.' 많은 갈릴리 사람들은 이중언어 사용자였으며 예루살렘과 로마 영토 주변의 이방인들과 매일 접촉했다.[15]

마르쿠스 크롬하우트는 갈릴리인, 유대인,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두 유대인이었지만, 갈릴리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민족적으로 갈릴리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여겼던 유대인이었지만, 셉포리안과 같은 지역적 특징으로도 구분될 수 있었다.[16] 다른 학자들은 갈릴리인과 유대인이 별개의 민족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헬레니즘-로마 문화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다양한 집단과 그들의 관련 디아스포라들을 "유대인"으로 묶었기 때문에 외부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혼동했다.[17]

로마의 속국 통치자였던 헤롯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의 4두정치 통치자로서 자신의 주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18]

기원전 4년, 유다라는 반란군이 갈릴리의 가장 큰 도시인 셉포리스를 약탈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는 셉포리스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지만, 이 지역의 고고학적 증거에는 그러한 파괴의 흔적이 없다.[19][20] 같은 해 헤롯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릴리의 4두정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갈릴리는 로마의 속주로 남았고 안티파스는 로마 제국에 조공을 바쳤다.[18]

로마는 갈릴리에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지만, 갈릴리를 공격하는 자에 대한 보복을 위협했다. 안티파스가 계속 조공을 바치는 한, 그는 원하는 대로 통치할 수 있었고[18] 자신의 주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안티파스는 유대인의 법과 관습을 상당히 준수했다. 그의 궁전은 많은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 금지 법에 대한 위반으로 여겼던 동물 조각으로 장식되었지만, 그의 주화에는 그의 백성이 받아들일 만한 농업 디자인만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안티파스는 능력 있는 통치자였다. 요세푸스는 그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사례를 기록하지 않았고, 그는 오랫동안 번영하는 통치를 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그가 충분히 독실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8] 안티파스는 셉포리스를 재건했고,[20] 기원후 18년 또는 19년에 새로운 도시 티베리아스를 건설했다. 이 두 도시는 갈릴리의 가장 큰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18] 그들은 그리스-로마의 영향력의 주요 중심지였지만, 여전히 주로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지만,[20] 반란이 없었다는 것은 세금이 과도하게 높지 않았고 대부분의 갈릴리 사람들은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음을 시사한다.[18]

말년에 안티파스는 이미 다른 삼촌과 결혼한 그의 이복 조카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그가 이혼한 그의 아내는 아랍 왕인 그녀의 아버지 아레타스에게 도망쳤고, 아레타스는 갈릴리를 침략하여 안티파스의 군대를 물리친 후 철수했다. 요세푸스와 마가복음[21] 모두 순회 설교자 세례자 요한이 그의 결혼에 대해 안티파스를 비난했고, 안티파스는 그를 투옥시킨 후 참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 기원후 39년경, 헤로디아의 촉구로 안티파스는 로마에 가서 4두정치 통치자에서 왕으로 격상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로마인들은 그가 무기를 비축한 죄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 추방하여 43년간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반란(66-73년) 동안, 유대인 폭도들은 헤롯 안티파스의 궁전을 파괴했다.[18]

전반적으로 안티파스 통치하의 갈릴리는 상당한 인구 불안정으로 특징지어진다.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이 만연했고, 도시와 시골 지역 사이의 내부 이동이 잦았으며,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하여 어린 나이에 출산했다. 영아 살해를 포함한 피임은 행해지지 않았다. 특히 변두리 마을의 많은 젊은 남성들은 아내를 찾거나 직업을 찾기 위해 도시 지역으로 이주했다. 과부들은 미망인보다 30세 이후 결혼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내를 찾는 것은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여겨졌다. 조나단 L. 리드에 따르면, 이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기적적인 치유와 순회 생활과 같은 신약 성서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22]

66년, 대유대반란 동안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임시 정부에 의해 갈릴리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지역은 셉포리스와 티베리아스와 같은 도시들 사이에 내부 갈등을 겪었고, 요세푸스의 권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셉포리스와 다른 강력한 도시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함으로써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내부 평화를 확보하고 로마의 침략에 대비하여 19개 도시를 요새화했는데, 그중 거의 절반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67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아크레에 도착했다. 요세푸스의 저서 ''유대 전쟁''은 가바라의 포위와 함락으로 시작하여 요타파타(요세푸스가 포로로 잡힌 곳), 티베리아스, 타리케아, 가말라, 타보르를 거쳐 기스칼라에서 끝나는 갈릴리 원정에 대한 로마의 갈릴리 원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갈릴리 전체가 황폐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복된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노예로 팔렸다.[9]

갈릴리 호수에서의 예수와 기적의 낚시. 로마 시대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이 어부였다.
[20]

유대교는 3세기 초반 갈릴리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랍비 자료에 따르면, 유다 하나시(Judah ha-Nasi)의 정치적 지도력은 이 시기에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 디아스포라(Diaspora), 그리고 로마 당국과 관련하여 가장 강력했다. 이 시기에 유다가 미슈나(Mishnah)를 편찬한 것은 활발한 문화 활동의 정점을 보여준다. 갈릴리 지역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이 시기에 이 지역이 번영하는 정착지의 절정기를 경험했음을 보여준다.[23]

중세 히브리어 전설에 따르면, 타나임(tannaim)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시몬 바르 요카이(Shimon bar Yochai)는 갈릴리에 살면서 졸하르(Zohar)를 저술했다.[24]

3. 6. 비잔틴 제국 시대

3세기 초, 유대교는 갈릴리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정점에 도달했다. 랍비 자료에 따르면, 유다 하나시의 정치적 지도력은 시리아 팔레스티나, 디아스포라, 그리고 로마 당국과 관련하여 가장 강력했다. 이 시기에 유다가 미슈나를 편찬한 것은 활발한 문화 활동의 정점을 보여준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이 지역이 번영하는 정착지의 절정기를 경험했음을 보여준다.[23]

중세 히브리어 전설에 따르면, 타나임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시몬 바르 요카이는 갈릴리에 살면서 졸하르를 저술했다.[24] 미슈나의 완성으로 타나이즘 시대가 끝나고, 이후 아모라 시대가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 아모라인들의 주요 작품인 예루살렘 탈무드는 주로 미슈나에 대한 논의와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학계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 티베리아스에서 편집되었다.[23] 거기에 언급된 아모라인 대다수와 언급된 정착지 또는 지명의 대다수는 갈릴리 사람들이었다.[23] 4세기 중반 무렵, 예루살렘 탈무드의 편찬 및 편집 과정은 갑자기 중단되었는데, 탈무드 학자 야아코브 수스만은 이를 두고 "예루살렘 탈무드의 발전은 마치 날카롭고 갑작스러운 칼날에 잘린 것처럼 갑자기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했다.[25][23]

4세기 동안 이 지역 전체는 인구가 크게 감소하여 여러 주요 정착지가 버려졌다.[23] 320년경, 기독교 주교 에피파니우스는 갈릴리의 모든 주요 도시와 마을이 완전히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했다.[26] 그러나 비잔틴 시대 동안 갈릴리의 유대인 인구는 감소한 반면 기독교 정착민은 증가했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3세기와 4세기에 여러 유대인 거주지가 버려졌고, 이러한 버려진 지역 또는 그 근처에 일부 기독교 마을이 세워졌다. 로마 시대에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라메, 막달라, 카프르 칸나, 다부리야, 익살과 같은 특정 정착지는 이제 기독교인이 주로 거주하거나 상당한 기독교 인구를 보유하게 되었다. 사프라이와 라이브너는 이 지역에서 유대인 인구 감소와 기독교 인구 증가는 서로 다른 시기에 발생한 별개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간 동안 기독교인과 유대인 마을 사이의 종교적 분리는 카페르나움과 나사렛과 같이 기독교 전통에서 신성함을 지닌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계속되었다.[23]

라이브너는 팔레스타인 아모라 시대의 종말,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및 팔레스타인의 기독교화와 같은 역사적 사건의 영향, 적어도 일부 베이트 미드라시 활동의 중단, 그리고 갈릴리가 인구 밀도가 높은 유대인 지역에서 비유대인 지역으로 둘러싸인 여러 공동체의 집합체로 변모한 것을 이 인구 위기에 연결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갈릴리의 기독교 인구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이는 비잔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기독교 개종을 언급하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 서부 제국의 기록과 달리 전체 마을이 아닌 개별 사례를 언급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23]

갈릴리 동부는 적어도 7세기까지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했다.[27]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지역은 유목민 집단의 습격과 중앙 정부의 보호 부족으로 인구가 감소했다.[28]

3. 7. 이슬람 시대

7세기 630년대 레반트의 이슬람 정복 이후 갈릴리는 요르단 군관구(Jund al-Urdunn)의 일부가 되었고, 이 군관구는 다시 빌라드 알샴(Islamic Syria, 이슬람 시리아)에 속해 있었다. 주요 도시로는 지방의 수도인 티베리아스, 카다스(Qadas), 베이산(Beisan), 아크레, 사푸리야(Saffuriya), 카불이 있었다.[29] 초기 이슬람 시대 동안 갈릴리는 이 지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랍화와 이슬람화 과정을 거쳤다. 우마이야 통치하에 이슬람 통치는 새로 정복한 영토에서 점차 강화되었고, 일부 무슬림들은 마을에 정착하여 거주했다.[30] 나중에 압바스 통치하에 지리학자 알야쿠비(al-Ya'qubi)(891년 사망)는 이 지역을 '''Jabal al-Jalil'''이라고 언급하며 주민들이 아밀라(Amila) 부족 출신 아랍인이라고 기록했다.[31]

마이클 에를리히(Michael Ehrlich)에 따르면, 유목 부족의 정착으로 시작된 이슬람화 과정은 초기 이슬람 시대 서갈릴리와 하갈릴리의 대다수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반면, 동갈릴리에서는 맘루크 시대까지 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고 한다.[32] 모세 길(Moshe Gil)에 따르면, 시골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은 우마이야 시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여러 갈릴리 유대인 공동체가 "고대의 특징을 유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30]

10세기에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 지역을 정복했다. 파티마 칼리파 알하킴을 숭배하는 분파가 드루즈교를 형성했고, 이는 레바논 산맥과 갈릴리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십자군 시대에 갈릴리는 가장 중요한 십자군 영지 중 하나인 갈릴리 공국으로 조직되었다. 모세 길(Moshe Gil)은 파티마 왕조와 십자군 통치 시대에 갈릴리의 시골 유대인 인구가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이주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1세기 카이로 게니자 문서를 근거로 람라 및 팔레스타인 중부 지역의 다른 지역에서 거래와 관련된 유대인들이 구쉬 할라브(Gush Halav), 달튼, 또는 암무카와 같은 곳에 조상과의 유대감을 주장하는 내용을 들어 당시 갈릴리에서 유대인들의 이주가 있었음을 시사한다.[30]

아이유브 왕조 시대, 특히 맘루크 시대부터 수니파 무슬림들이 사파드(Safed)와 그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이주민들 중에는 수피 설교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사파드 시골 지역 주민들의 이슬람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291년 티레와 아크레가 멸망한 시기, 특히 1492년 스페인 유대인 추방 이후에도 유대인 이민자들이 여러 차례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학자들과 다른 도시 엘리트들을 포함한 이 이민자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시골 공동체에서 갈릴리 상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 중심지로 바꾸었다.[32]

3. 8. 십자군 시대

10세기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 지역을 정복했다. 파티마 칼리파 알하킴을 숭배하는 분파가 드루즈교를 형성했고, 이는 레바논 산맥과 갈릴리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십자군 시대에 갈릴리는 가장 중요한 십자군 영지 중 하나인 갈릴리 공국으로 조직되었다. 모세 길(Moshe Gil)은 파티마 왕조와 십자군 통치 시대에 갈릴리의 시골 유대인 인구가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이주했다고 주장하며, 11세기 카이로 게니자 문서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 문서는 람라 및 팔레스타인 중부 지역의 다른 지역에서 거래와 관련된 것으로, 유대인들이 구쉬 할라브(Gush Halav), 달튼, 또는 암무카와 같은 곳에 조상과의 유대감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갈릴리에서 유대인들의 이주가 있었음을 시사한다.[30]

3. 9. 오스만 제국 시대

초기 오스만 제국 시대에 갈릴래아는 사파드 산자크(Safad Sanjak)로 통치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마스쿠스 에얄레트(Damascus Eyalet, 1549–1660)의 일부였다가 나중에는 시돈 에얄레트(Sidon Eyalet, 1660–1864)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에는 갈릴래아의 행정 구역이 아크레 산자크(Acre Sanjak)로 이름이 바뀌었고, 에얄레트 자체는 아크레를 중심으로 하여 1775년부터 1841년까지 사실상 아크레 에얄레트(Acre Eyalet)가 되었다.

알함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환영을 받으면서 갈릴래아의 유대인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한때 그 지역 사회는 사파드를 직물 직조 및 제조의 국제적인 중심지이자 유대교 학습의 주요 장소로 만들었다.[33] 오늘날에도 사파드는 유대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이자 카발라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17세기 중반, 갈릴래아와 레바논 산맥은 드루즈 세력 다툼의 현장이 되었는데, 이는 그 지역의 많은 파괴와 주요 도시의 쇠퇴와 동시에 일어났다.

18세기 중반, 갈릴래아는 아랍 지도자 자히르 알 우마르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제국 당국 사이의 투쟁에 휘말렸다. 자히르는 25년 동안 갈릴래아를 통치하다가 1775년 오스만 충성파 제자르 파샤에게 그 지역을 정복당했다.

1831년, 오스만 시리아의 일부인 갈릴래아는 오스만으로부터 이집트이브라힘 파샤에게 넘어갔다가 1840년에 다시 오스만의 손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공격적인 사회 정치 정책이 도입되어 격렬한 1834년 아랍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반란 과정에서 반군에 의한 사파드 약탈 사건으로 사파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크게 감소했다. 아랍 반군은 이후 이집트군에 의해 패배했지만, 1838년 갈릴래아의 드루즈족이 또 다른 봉기를 일으켰다. 1834년과 1837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마을이 파괴되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1864년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 개혁 이후 갈릴래아는 아크레 산자크에 남아 있었지만, 시돈 에얄레트에서 새로 설립된 시리아 빌라예트로 이관되었고, 곧 1888년부터 베이루트 빌라예트에서 관리되었다.

1866년, 미국계 아르메니아인 선교사인 칼루스트 바르탄 박사가 독일 선교사 존 젤러의 도움을 받아 갈릴래아 최초의 병원인 나사렛 병원을 설립했다.

20세기 초, 갈릴래아는 오스만 시리아의 아크레 산자크의 일부로 남아 있었으며, 베이루트 빌라예트의 최남단 지역으로 관리되었다.

3. 10. 영국 위임통치 시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무드로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갈릴래아는 점령지 적국 행정(Occupied Enemy Territory Administration)의 일부로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곧이어 1920년에 이 지역은 영국 위임통치령에 포함되었고, 1923년부터는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일부가 되었다.

3. 11. 현대 이스라엘 시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갈릴리 지역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많은 주민들이 떠나거나 강제로 이주당해 수십 개의 마을이 비워졌지만, 나사렛, 아크레, 탐라, 사크닌, 셰파암르 등의 도시와 그 주변에는 상당수의 이스라엘 아랍인 공동체가 남았다. 이들은 드루즈족과의 성공적인 화해 덕분에 잔류할 수 있었다.[1] 갈릴리 호 주변의 키부츠들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골란 고원 서부 지역을 점령할 때까지 시리아군의 포격을 받았다.[1]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레바논에서 출발하여 상부 갈릴리와 서부 갈릴리의 마을과 도시들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1] 이는 레바논 남부의 격렬한 종파 간 분쟁으로 인한 레바논 내전과 맞물려 발생했다.[1] 이스라엘은 레바논 내 PLO 기반 시설 파괴, 갈릴리 주민 보호, 연합 기독교 레바논 민병대 지원을 목표로 1979년 리타니 작전과 1982년 갈릴리 평화 작전을 시작했다.[1] 이스라엘은 1985년 기독교 레바논 민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레바논 남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가, 이후 좁은 안전 보장 지역으로 철군했다.[1]

1985년부터 2000년까지 헤즈볼라와 이전의 아말 운동이스라엘 방위군의 지원을 받는 남부 레바논 군과 교전했으며, 때때로 카튜샤 로켓 발사기로 상부 갈릴리 지역 사회에 포격을 가했다.[1] 2000년 5월, 에후드 바락 이스라엘 총리는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방위군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고, 유엔이 인정한 국제 국경(블루 라인)의 이스라엘 측에 보안군을 유지했다.[1] 이 조치로 남부 레바논 군이 붕괴되고 헤즈볼라가 레바논 남부를 장악하게 되었다.[1] 그러나 이스라엘 철수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의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고, 유엔 감찰관들은 양측의 공격을 비난했다.[1]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분쟁에서 헤즈볼라는 갈릴리 전역에 밤낮으로 카튜샤 로켓 공격을 가했으며, 장거리 지상 발사 미사일은 갈릴리 호 아래 샤론 평원, 예즈르엘 계곡, 요르단 계곡까지 남쪽으로 날아갔다.[1]

4. 지리

신약성경에 따르면, 갈릴래아는 로마 제국 시대에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북쪽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다. 북쪽으로는 페니키아,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경계를 이루었다. 이 지역은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은 세리, 헤로데 정권, 사제 계급을 통해 세금을 걷어 주민들을 수탈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은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3]

갈릴리 상부의 과수원


갈릴래아 대부분은 해발 500~700m의 암석 지형이다. 타보르 산(Mount Tabor)과 메론 산(Mount Meron) 등 여러 고산이 있으며, 비교적 기온이 낮고 강수량이 많아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한다. 또한 많은 새들이 매년 추운 지역에서 아프리카로, 그리고 다시 이 지역을 통해 이동한다. 상부 갈릴래아의 계곡과 폭포, 푸른 들판과 다채로운 야생화, 그리고 많은 성서적 중요성을 지닌 도시들은 이 지역을 인기 있는 관광지로 만들고 있다.

높은 강수량(900~1200mm), 온화한 기온, 높은 산들(메론 산의 높이는 1000~1208m) 때문에 상부 갈릴래아 지역에는 가시가 있는 주니퍼(Juniperus oxycedrus), 메론 산의 작은 숲에 자라는 레바논 삼나무(Cedrus libani), 시클라멘, 모란(Peony|paeonias), 로도덴드론(Rhododendron ponticum)과 같은 독특한 동식물이 서식한다.

서부 갈릴래아(Galil Ma'aravi)는 상부 갈릴래아 서부와 해안 지역, 하부 갈릴래아 북서부를 가리키는 현대 용어로, 주로 아크레 부현(Acre sub-district)과 겹친다. 갈릴래아 핸들(Galilee Panhandle)은 동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서쪽으로 레바논이 있는 "손잡이"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상부 갈릴래아의 훌라 계곡(Hula Valley)과 나프탈리 산맥(Naftali Mountains|Ramot Naftali mountains)을 포함한다.

4. 1. 지역 구분

전통적으로 갈릴래아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3]

  • 상 갈릴(גליל עליון|Galil Elyonhe)
  • 하 갈릴(גליל מערבי|Galil Ma'aravihe)
  • 서 갈릴(גליל תחתון|Galil Tahtonhe)
  • 킨네렛 호수(יָם כִּנֶּרֶת|Yam Kinnerethe)


갈릴리는 크게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로 나뉘며, 그 경계는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에 기록되어 있다.[4]

갈릴리 나할 베체트(Nahal Betzet) 북쪽 산등성이에 있는 케셰트 동굴(Keshet Cave, 무지개 동굴 또는 아치 동굴), 자연 아치


오늘날 이스라엘의 갈릴리는 종종 다음과 같은 하위 지역으로 나뉜다.

  • 상갈릴리는 베이트 하케렘 계곡에서 레바논 남부까지 북쪽으로 뻗어 있다. 동쪽 경계는 훌라 계곡과 갈릴리 호수이며, 골란 고원과 구분된다.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구분되는 해안 평야에 이른다.
  • 하갈릴리는 예스르엘, 하로드, 베이트 샨 계곡의 북쪽과 베이트 하케렘 계곡의 남쪽에 있는 지역을 포함한다. 동쪽 경계는 요르단 협곡이다. 아랍 도시 나자렛과 마을 가나가 있다.
  • "갈릴리 손잡이"()는 레바논 국경과 골란 고원 사이에 끼어있는 손잡이 모양의 훌라 계곡을 따라 뻗어 있다. 메툴라와 키리야트 셰모나 마을과 단 강, 그리고 바니아스 강의 일부를 포함한다.


다음 하위 지역들은 때때로 갈릴리와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 훌라 계곡
  • 코라짐 고원
  • 갈릴리 호수와 그 계곡
  • 갈릴리 호수 남쪽 끝에서 베이트 샨까지의 요르단 계곡
  • 아훌라와 베이트 샨 계곡 사이에 뻗어 있는 동쪽 부분의 하로드 계곡을 포함한 예스르엘 계곡
  • 요르단 계곡과 확장된 예스르엘 계곡의 교차점에 있는 베이트 샨 계곡
  • 길보아 산
  • '''서갈릴리'''는 현대 이스라엘 용어로, 상갈릴리 서쪽 해안 평야를 가리키며, 아셀 평야 또는 갈릴리 평야로도 알려져 있으며, 아크레 북쪽에서 로시 하니크라의 이스라엘-레바논 국경까지 뻗어 있다.

5. 인구

신약성경에 따르면, 갈릴래아는 로마 제국 시대에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북쪽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다. 이 지역은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는 로마 제국의 수탈 때문이었는데, 세리, 헤로데 정권, 사제 계급의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착취했으며, 저항하는 민중들은 십자가형으로 학살당했다.[3]

로마 초기 갈릴래아는 주로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는 석회암 용기 사용, 의식 목욕탕(율법적 순결을 위한), 그리고 2차 매장 풍습 등 유대인들의 관습을 보여준다.[13] 기원전 63년 로마의 정복 이후 이 지역에는 유대인 정착민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23] 케파르 하나냐, 파로드 등 대도시들은 기원전 1세기 말이나 기원후 1세기 초에 건설되었다.[23]

요세푸스는 갈릴래아의 유대인 인구를 유대인 도시 거주자들에게 적대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며, 이들이 유대-로마 전쟁 중 로마인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바르길 픽스너는 그들이 바빌로니아 출신의 다윗 계보 유대인 족에서 내려왔다고 믿는다.[11]

헤롯 안티파스 통치하의 갈릴래아는 상당한 인구 불안정으로 특징지어졌다.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이 만연했고, 도시와 시골 지역 사이의 내부 이동이 잦았으며,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하여 어린 나이에 출산했다. 영아 살해를 포함한 피임은 행해지지 않았다. 특히 변두리 마을의 많은 젊은 남성들은 아내를 찾거나 직업을 찾기 위해 도시 지역으로 이주했다. 조나단 L. 리드에 따르면, 이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기적적인 치유와 순회 생활과 같은 신약 성서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22]

모샤바 키네렛(Kinneret, Israel)에서 바라본 갈릴리 호수


갈릴리 유대-아랍 학교(Galil Jewish–Arab School) 앞 간판.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다니는 초등학교


2006년 갈릴리 지역에는 120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으며, 그중 47%가 유대인이었다.[34] 유대인 기관(The Jewish Agency)은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를 증가시키려고 노력해왔지만,[35] 비유대인 인구 또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34]

갈릴리는 이스라엘 아랍 시민(Arab citizens of Israel) 인구가 많은 곳이며,[39][40] 주로 무슬림이 다수이며, 드루즈와 아랍 기독교인(Arab Christians)이 비슷한 규모의 소수 민족으로 거주한다. 이스라엘 드루즈와 기독교인 모두 갈릴리에 주로 거주한다.[41][42] 그 외 베두인, 레바논 마론파(Maronites in Israel), 체르케스인(Circassians in Israel) 등이 주목할 만한 소수 민족이다.

갈릴리 중북부는 중앙 갈릴리로도 알려져 있으며, 레바논과의 국경에서 예즈르엘 계곡 북쪽 끝까지 뻗어 있다. 나자렛과 사크닌(Sakhnin) 도시를 포함하며, 아랍인 인구가 75%로 다수를 차지하고, 유대인 인구는 상나자렛(Upper Nazareth)과 같은 언덕 위 도시에 주로 거주한다.

동부 갈릴리는 거의 100% 유대인이다. 이 지역에는 갈릴리의 손가락(Finger of the Galilee), 요르단 강 계곡, 갈릴리 호수 연안이 포함되며, 유대교의 4대 성지 중 두 곳이 있다.

예즈르엘 계곡과 길보아 산(Mount Gilboa) 지역을 포함한 갈릴리 남부는 거의 100% 유대인이며, 요르단 서안 국경 근처에 소규모 아랍 마을이 몇 곳 있다. 서부 갈릴리 인구의 약 80%는 유대인이며, 레바논 국경까지 이어진다.

6. 경제

신약성경에 따르면, 로마 제국 시대에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북쪽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으며 북쪽으로는 페니키아, 동쪽으로는 시리아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과 비교하여 당시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산 것으로 전해진다. 갈릴래아 주민들이 빈곤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은 세리, 대리정권인 헤로데 정권, 사제 계급의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수탈했으며, 이에 민중들이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학살함으로써 탄압했다.

7. 문화

갈릴리는 아름다운 경치와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특히, 신약전서에 따르면 예수의 많은 기적들이 갈릴리 호수(Sea of Galilee) 연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 순례객들이 찾는다. 물 위를 걷는 기적, 폭풍을 잠재우는 기적, 5천 명을 먹이는 기적 (탭가에서) 등이 대표적이다.[3] 메깃도, 예스드엘 골짜기, 타보르산, 하솔, 핫틴의 뿔 등 성경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도 갈릴리에 위치해 있다.

'얌 레이얌'(yam leyam, 바다에서 바다까지)으로 알려진 인기 하이킹 코스는 지중해에서 시작하여 갈릴리 산맥, 타보르산, 네리아, 메론을 지나 킨네렛(갈릴리 호수)에 이른다.

2011년 4월, 이스라엘은 기독교 순례객들을 위한 60km 등산로인 예수 길(Jesus Trail)을 개설했다. 이 코스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삶의 중심이 된 장소들을 연결하는 보도, 도로 및 자전거 도로 네트워크를 포함하며, 탭가와 산상수훈의 산이 포함된다. 이 코스는 예수가 그의 가르침을 전파했던 갈릴리 호수 연안의 가버나움에서 끝난다.[44]

타보르산의 변형 교회


많은 키부츠모샤브 가족들은 'Zimmerim'(치메림, 민박을 뜻하는 현지 용어)을 운영하는데, 이는 이디시어 'צימער'(Zimmer, 방)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특히 가을과 봄 휴일 시즌에 일 년 내내 수많은 축제가 열린다. 아크레(아코) 대안극 축제,[45] 올리브 수확 축제, 영미 민속, 클레즈머(klezmer), 르네상스 및 실내악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 축제, 카르미엘 무용 축제(Karmiel Dance Festival) 등이 대표적이다.

7. 1. 갈릴리 요리

갈릴리 지방의 요리는 매우 다양하다. 중부 및 남부 지역보다 음식이 가볍다. 유제품, 특히 상갈릴리의 갈릴리산맥에서 유래한 사파드 치즈의 소비량이 많다. 타임, 민트, 파슬리, 바질, 로즈메리와 같은 허브는 디핑 소스, 고기, 생선, 스튜, 치즈 등 모든 음식에 흔히 사용된다.[3] 갈릴리 동부 지역에서는 고기만큼 민물고기, 특히 갈릴리 호수, 요르단강 및 그 지역의 다른 하천에 서식하는 틸라피아를 많이 먹는다.

생선은 타임을 채우고 로즈메리와 함께 구워 향을 내거나, 오레가노 잎으로 속을 채운 후 파슬리를 얹고 레몬과 함께 제공한다. 이러한 조리법은 지중해홍해 연안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도 존재한다.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는 셀러리, 민트, 레몬즙을 많이 넣어 구운 틸라피아가 있다. 타히니를 곁들인 구운 생선도 티베리아스에서 흔하다. 갈릴리 해안 지역 주민들은 타히니 대신 요구르트를 사용하고 위에 수마크를 뿌린다.

갈릴리는 올리브, 석류, 와인, 특히 피타 빵과 함께 제공되는 라브네와 자아타르로 유명하다. 와인, 석류, 아쿠브, 파슬리, 할미트, 민트, 회향 등의 허브를 넣은 고기 스튜도 흔하다. 갈릴리 쿠바는 보통 커민, 계피, 카르다몬, 농축된 석류즙, 양파, 파슬리, 을 넣어 만들고 타히니 소스와 함께 메제로 제공된다.

케밥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만들며, 카르다몬 대신 수마크를 사용하고 때로는 석류즙 대신 캐롭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후 때문에 양고기보다 쇠고기가 더 인기 있지만, 두 가지 모두 여전히 먹는다. 동갈릴리의 열대 기후에서는 대추야자가 인기 있다.

참조

[1] 사전 Galilee http://www.dictionar[...] Random House 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
[2] 서적 A Latin Dictionary Clarendon Press
[3] 서적 Placenames of the World: Origins and Meanings of the Names for 6,600 Countries, Cities, Territories, Natural Features, and Historic Sites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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