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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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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나스는 고대 이집트 제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원전 24세기 후반에 통치했다. 그는 아비도스 왕 목록, 사카라 석판, 토리노 왕 목록 등 여러 역사적 기록에 등장하며, 토리노 왕 목록은 그의 재위 기간을 30년으로 기록한다. 우나스는 제드카레 이세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피라미드 단지에서 발견된 부조와 유물들을 통해 그의 통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우나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위치하며, 최초로 '피라미드 텍스트'가 새겨진 것으로 유명하다. 우나스의 통치 시기에는 종교적 변화가 있었으며, 오시리스 숭배가 중요해지고 라 숭배는 쇠퇴했다. 우나스는 사후에도 숭배되었으며, 그의 장례 신앙은 중왕국 시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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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스
기본 정보
이름우나스
다른 이름오에나스, 온노스, 유니스, 웨니스
즉위명우나스
즉위명 (히에로그리프)<-G39-N5-E34:N35-M17-S29-> 다음과 같은 표기 예시도 있음: <-E34:N35-M17-S29->
탄생명우나스
탄생명 (히에로그리프)M23:t-L2:t-<-G39-N5-E34:N35-M17-S29->
황금 호루스 이름비크-네브-와지
황금 호루스 이름 (히에로그리프)M13*G5:S12
네브티 이름 (두 여신 이름)와젬네브티
네브티 이름 (두 여신 이름) (히에로그리프)M13-G17
호루스 이름와지타위
호루스 이름 (히에로그리프)M13-N19
재위 기간정확한 기간은 불명 (기원전 24세기 중엽의 15-30년 정도)
무덤우나스의 피라미드(en)
알 수 없는 여신에게 젖을 먹이는 이집트 왕 우나스
알 수 없는 여신에게 젖을 먹이는 이집트 왕 우나스. 이집트 박물관
통치
통치 기간30년 (투린 왕 목록), 33년 (아프리카누스)
신분
왕조제5왕조
선임자제드카레
후임자테티(제6왕조)
배우자네베트(en), 케누트(en)
자녀헤메트레 헤미, 켄트카우에스, 네페루트, 네페르트카우에스 이쿠, 세셰셰트 이두트, 우나스-앙크 (진위 불명), 이푸트(en) (진위 불명), 네브카우호르 (추정), 셰프세스푸프타 (추정)
아버지제드카레(추정)
어머니세티브호르(en)

2. 역사적 증거

우나스는 신왕국 시대에 작성된 세 개의 고대 이집트 왕조 목록과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에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우나스의 활동을 증명하는 주요 동시대 자료는 피라미드 단지에서 나온 많은 부조물들이다. 하지만 우나스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 문서들은 그의 통치 기간을 30년으로 언급한 후대의 기록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나스는 누비아 나일강의 제1 급류 옆 엘레판틴 섬에 암석 비문을 남기기도 했다.

우나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몇 개의 설화 석고 화병도 알려져 있다.

2. 1. 문헌 기록

우나스의 피라미드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발견자들은 우나스의 피라미드에 세로로 적힌 이집트 상형문자가 뒤덮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글은 228개의 주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죽은 자의 저승길을 돕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우나스를 시작으로 이러한 형식의 글을 새겨넣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제6왕조에서도 총 100여개가 넘는 주문이 발견되었다. 중왕국 시대에는 관에 새겨넣는 관 문서가 출현하였고, 신왕국 시대에는 '사자의 서' 파피루스가 이를 대체하였다.

우나스는 신왕국 시대에 작성된 세 개의 고대 이집트 왕조 목록에서 언급되면서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1] 우나스는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 치세에 작성된 아비도스 왕 목록의 33번째 자리에 기록되어 있다. 우나스의 이름은 사카라 석판(32번째)[2]과 토리노 왕 목록(세 번째 열, 25번째 행)에도 나타나는데, 이 두 자료는 모두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년) 치세에 작성되었다.[1] 토리노 왕 목록은 우나스의 재위 기간을 3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1] 이 자료들은 모두 우나스를 제5왕조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통치자로, 제드카레 이세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테티보다 앞선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대적 연대기는 고고학적 증거, 예를 들어 이 왕들을 섬긴 관료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증거와 일치한다.

이러한 자료 외에도, 우나스는 또한 이집트 사제 마네토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246년) 치세에 기원전 3세기에 저술한 이집트 역사서인 ''아이깁티아카''에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이깁티아카''는 현재까지 사본이 남아 있지 않으며,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의 후대 저술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아이깁티아카''가 제5왕조 말기에 33년간 통치한 파라오 "오노스"를 언급했다고 전한다. 오노스는 우나스를 헬레니즘화한 형태로 여겨지며, 아프리카누스의 33년이라는 기록은 토리노 왕 목록에 기록된 우나스의 재위 기간 30년과 잘 부합한다.[1]

2. 2. 동시대 자료

노란색 구형 물병. 원으로 둘러싸인 매가 그려져 있다.
200px


우나스의 활동을 증명하는 주요 동시대 자료는 그의 피라미드 단지에서 나온 많은 부조물들이다. 이를 제외하면, 우나스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 문서들은 이후 기록에서 그의 통치 기간을 30년으로 언급한 것을 고려할 때, 오늘날까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의 왕실 묘지인 아부시르에서 발굴된 것은 우나스의 것으로 확실하게 추정되는 단 4개의 연대기록 비문뿐이다. 이들은 그의 즉위 3년, 4년, 6년, 8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2] 우나스는 또한 누비아 나일강의 제1 급류 옆에 있는 엘레판틴 섬에 암석 비문을 남겼다.

우나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몇 개의 설화 석고 화병도 알려져 있다. 레반트 해안의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완전한 용기 하나와 추가 조각들은 현재 베이루트 국립 박물관에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화병은 피렌체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으며 "호루스 와드타위, 영원히 살아있는 자, 상·하 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 우나스, 영원히 살아있는 자"라고 적혀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출처 불명의 용기는 높이 17cm, 너비 13.2cm인 둥근 설화 석고 화병으로, 펼쳐진 날개를 가진 매와 우나스의 카르투슈를 둘러싼 두 개의 우라에우스(솟아오르는 코브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1] 우나스의 카르투슈와 호루스 이름이 새겨진 연고 단지는 브루클린 박물관에 있으며, 페트리 박물관에는 우나스의 카르투슈 두 개가 새겨진 방해석 화병 가장자리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3. 통치

우나스는 그의 선임자인 제드카레 이세시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 제드카레 이세시가 우나스의 아버지라는 증거는 없지만, 왕위 계승은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우나스는 적어도 두 명의 왕비, 네베트와 케누트를 두었는데, 이들은 남편의 피라미드에 인접한 커다란 이중 마스타바에 묻혔다. 우나스는 남자 후계자 없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우나스의 치세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 이집트 왕조는 경제적으로 쇠퇴하는 상황이었다.[2] 레반트 연안부 및 누비아와의 교역을 계속하는 한편, 가나안 남부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배권의 분산으로 인해, 우나스의 치세 중에도 왕권은 약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약 200년 후의 이집트 고왕국 붕괴로 이어졌다.

우나스는 사카라에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이는 고왕국 시대에 건설된 왕의 피라미드로서는 가장 작은 규모이다. 묘실 부분과 상하 장제전을 연결하는 750m의 통로는 다른 왕묘 이상으로 다양하고 훌륭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우나스는 자신의 피라미드 내 묘실에 ''피라미드 텍스트''를 조각·기재한 최초의 파라오이다. 피라미드 텍스트는 그 후 이집트 제1중간기(기원전 2160년경–기원전 2050년경)에 이르기까지 모방되었다. 이 텍스트는 왕을 오시리스와 동일시하는 내용으로, 이러한 형태의 신앙은 우나스의 치세 시대에 나타났으며, 왕의 사후 세계에서의 여정을 지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우나스의 죽음에 따라 확립된 장례 의식은 고왕국이 종언을 맞이한 후에도 끊이지 않고, 혼란의 시대인 이집트 제1중간기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사한 의식은 더욱 후세의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0년경–기원전 1650년경)에 이르러서도 지속·부활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나스의 묘소는 아멘엠하트 1세나 센우세르트 1세(기원전 1990년경–기원전 1930년경)에 의한 자재 확보를 위한 부분적인 해체를 면치 못했다.

왕가의 취급과는 대조적으로, 우나스는 사카라의 토착신으로서 숭배를 받았으며, 사후 2000년 가까이 지난 말기 왕조 시대 (기원전 664년–기원전 332년)에 이르러서도 숭배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네토의 이집트사 기록에 따르면, 제5왕조는 우나스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우나스가 후계자가 될 남자를 두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Unas-Ankh는 우나스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점테티가 즉위 시에 칭한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는데 ''Seheteptawy''는 "두 나라를 조정/진압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테티는 우나스의 딸로 추정되는 이푸트와의 혼인 관계를 바탕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푸트 1세의 칭호가 왕의 딸이라는 의미인지가 확정되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 나아가 테티가 왕족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는 설 자체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왕조 교체에 관해서는 마네토의 기록 외에도, 마네토가 고안한 왕조 구분에 의존하지 않는 토리노 왕명표에서도, 우나스와 후계자 테티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 사학자 Jaromir Malek은 "토리노 왕명표에서 이와 같은 구분을 하고 있는 곳은, 모두 왕도나 왕궁의 이전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Malek의 설에 따르면, 이네브 헤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집트의 왕도는, 이 시기에 좀 더 남쪽인 사카라 남부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옮겨졌고, 우나스의 왕궁도 그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도시들은 최종적으로 기원전 2000년경, 멤피스의 도시로 통합되었다.

마네토가 무엇을 근거로 제5왕조가 우나스의 대에서 끝났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이집트인들은 제5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가 수립된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정상으로도 어떠한 소동이 일어난 흔적은 없었고, Mehu나 Kagemni, Nikau-Isesi, 에드푸의 감독관 Isi 등 우나스를 섬겼던 다수의 관료들은 테티의 즉위 후에도 변함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들이 왕조의 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제5왕조와 제6왕조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없을 가능성도 높다.

3. 1. 가족 관계

이름역할기타
네베트왕비남편의 피라미드에 인접한 이중 마스타바에 묻힘
케누트왕비남편의 피라미드에 인접한 이중 마스타바에 묻힘
우나스-앙크"왕의 아들", "왕실 시종", "마아트의 사제", "상 이집트의 감독관"우나스 통치 10년 쯤에 사망. 부계는 불확실하나, 이름과 칭호, 무덤 위치로 보아 우나스와 네베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음. 그러나 "왕의 아들" 칭호는 왕족이 아닌 고위 관리에게도 주어졌기에 확실하지 않음.
넵카우호르아들 (추정)부계는 추측에 불과하며 논쟁 중.
셉세스푸타아들 (추정)부계는 추측에 불과하며 논쟁 중.
헴메트레 헤미
켄트카우에스
네페르트
네페르트카우에스 이쿠
세세셰트 이두트
이푸트딸 (추정)신분 불확실



우나스는 아마도 남자 후계자 없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2. 통치 기간

우나스의 재위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 기록에는 그가 30년에서 3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나와 있으며, 플린더스 페트리,[1] 윌리엄 C. 헤이즈,[2] 다렐 베이커, 페터 문로, 그리고 야로미르 말렉을 포함한 많은 이집트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한다. 우나스의 장제 신전에서 발견된 세드 축제 장면은 이러한 긴 재위 기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 축제는 보통 재위 30년 후에 열렸으며 파라오의 힘과 권력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축제를 묘사한 것만으로는 반드시 긴 재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파라오 사후레가 세드 축제 튜닉을 입은 모습이 그의 장제 신전에서 발견되었지만,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 모두 그가 14년 미만으로 이집트를 통치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꼭 맞는 로브에 가짜 수염과 왕관을 쓴 앉아있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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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집트학자들은 우나스의 재위 기간이 30년 미만일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의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유물이 부족하고, 재위 8년 이후로 기록된 문서가 없기 때문이다. 위르겐 폰 베케라트는 우나스가 2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믿는 반면, 롤프 크라우스, 데이비드 워버턴, 에리히 호르눙은 2012년 이집트 연대기 연구에서 이 숫자를 15년으로 줄였다. 크라우스와 미로슬라프 베르너는 제4왕조와 제5왕조에 관한 토리노 왕명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왕명록이 우나스에게 부여한 30년이라는 숫자가 신뢰할 수 없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카라에서 나기브 카나와티의 지휘 아래 니카우-이세시의 무덤 발굴은 짧은 재위에 대한 증거를 제시했다. 니카우-이세시는 제드카레 이세시의 재위 기간 동안 경력을 시작한 관료였다. 그는 우나스의 시대를 거쳐 우나스의 후계자인 테티 치하에서 상이집트의 감독관으로 사망했다. 니카우-이세시는 테티의 재위 11번째 가축 조사의 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징수할 세액을 평가하기 위해 전국 가축을 세는 행사였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조사가 고왕국 시대에는 2년에 한 번, 후기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년경~기원전 1650년경)에는 매년 열렸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니카우-이세시는 테티가 왕위에 오른 후 22년을 더 살았을 것이고, 우나스에게 부여된 30년의 재위 기간과 합쳐 70세 이상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미라에 대한 법의학적 검사 결과 사망 당시 나이가 45세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축 조사가 우나스와 테티 시대에 2년에 한 번 이상, 어쩌면 불규칙적으로 발생했음을 시사한다. 만약 그렇다면, 토리노 왕명록에 기록된 우나스의 30년이라는 숫자(15번의 가축 조사로 이해됨)는 15년으로 축소될 수 있으며, 이는 테티의 재위 기간 11년과 합쳐 니카우-이세시가 40세에서 45세 사이에 사망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3. 3. 활동

우나스의 활동을 보여주는 সমসাময়িক(동시대) 자료는 그의 피라미드 단지에서 나온 많은 부조물들이다. 제5왕조의 왕실 묘지인 아부시르에서 발굴된 우나스의 것으로 확실하게 추정되는 연대기록 비문은 단 4개뿐이며, 그의 즉위 3년, 4년, 6년, 8년을 명시하고 있다.[1] 우나스는 누비아의 나일강 제1 급류 옆에 있는 엘레판티네 섬에 암석 비문을 남겼다.[2]

우나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alabaster 화병 몇 개가 알려져 있는데,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완전한 용기 하나와 추가 조각들은 현재 베이루트 국립 박물관에 있다. 피렌체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화병은 "호루스 와드타위, 영원히 살아있는 자, 상·하 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 우나스, 영원히 살아있는 자"라고 적혀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둥근 alabaster 화병은 펼쳐진 날개를 가진 매와 우나스의 카르투슈를 둘러싼 두 개의 우라에우스로 장식되어 있다. 우나스의 카르투슈와 호루스 이름이 새겨진 연고 단지는 브루클린 박물관에, 우나스의 카르투슈 두 개가 새겨진 방해석 화병 가장자리의 조각은 페트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무역과 전쟁

우나스 치세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여 그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비블로스를 포함한 외국과의 기존 무역 관계가 우나스 시대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피라미드 단지 참도에서 발견된 부조는 레반트 해안으로 원정을 떠났다가 시리아-가나안인과 함께 돌아오는 대형 항해선 두 척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배의 선원이었거나 노예였을 것이다. 또 다른 부조는 군사 작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집트인들이 활과 단검으로 샤수라고 불리는 가나안 유목민을 공격하는 모습이다. 사후레의 피라미드와 같은 이전 피라미드 단지에서도 유사한 부조가 발견되었으며, 따라서 실제 사건의 묘사라기보다는 표준적인 주제일 수 있다. 웨니의 자서전은 제6왕조 초기에 가나안 유목민에 대한 많은 징벌적 습격을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 남쪽, 엘레판틴에 있는 우나스 비문에는 현지 추장으로부터 조공을 받기 위해 또는 이 지역의 불안이 고조되어 왕이 하부 누비아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우나스의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참도에서 발견된 부조는 기린을 묘사하고 있어 누비아와의 무역 관계를 시사한다.

; 국내

사카라에 있는 우나스의 참도에서 발견된 굶주린 유목민을 묘사한 부조


우나스의 치세는 경제적 쇠퇴의 시기였지만, "결코 쇠퇴의 시대는 아니었다"라고 한다. 실제로 이집트 국가는 여전히 왕의 피라미드 단지를 위한 건축 석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정은 우나스의 참도에서 발견된 독특한 부조에 묘사되어 있으며, 행정 관리의 자서전적인 석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이 관리는 10.4m 팜형 붉은 화강암 기둥을 엘레판틴에서 사카라까지 단 4일 만에 운송했다고 보고했는데, 이 업적으로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피라미드 단지 건설을 위해 사카라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건설 작업 외에도 엘레판틴에서도 건축 활동이 이루어졌다.

1996년까지 우나스 치세의 국내 상황은 앙상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기근의 시기를 암시하는 그의 피라미드 단지 참도에서 발견된 부조를 바탕으로 재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사후레의 피라미드에서 1996년 발견된 유사한 부조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생각은 바뀌었다. 또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굶주린 사람들은 이집트인이라기보다는 특정한 헤어스타일로 구별되는 사막 거주자, 즉 유목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러한 부조는 실제 사건을 언급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왕의 관대함과 이집트와 접한 사막 지역의 고난에 대한 표준적인 묘사로 이해되고 있다.

4. 종교와 왕권의 변화

제드카레와 우나스의 치세는 고대 이집트 종교와 왕권의 형태에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명백한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우나스의 치세 시대였다.[1] 제5왕조 파라오의 호루스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 파편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우나스의 통치 기간 동안 왕의 숭배가 현저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2] 테티 시대에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졌으며, 테티의 호루스 이름이 기록된 봉인은 겨우 2점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지방 행정관과 신관의 권력이 증대됨에 따라 왕권이 약화되어 가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한편 오시리스 신앙이 점차 강해졌으며, 파라오를 대신하여 사후의 안녕을 보장하는 신으로서 오시리스가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독일의 이집트학 학자 하르트비히 알텐뮐러(Hartwig Altenmüller)는 당시 이집트인의 신앙에 대해 "사후 세계는 더 이상 개인의 필멸자와 왕의 관계에 달려 있지 않고, [...] 대신 오시리스와 직접적인 관계에서 그의 윤리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라고 썼다.

이집트 신전에서 태양신 가 최고신이라는 지위 자체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라에 대한 신앙은 감소했다. 제드카레와 우나스는 제5왕조의 다른 파라오들과 달리, 태양 신전을 하나도 건설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5왕조의 왕의 이름에는 라에 관한 어구를 포함시키는 것이 초대 파라오 우세르카프부터 1세기 정도 이어져 온 전통이었지만, 멘카우호르와 우나스의 이름에는 그러한 요소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우나스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피라미드 텍스트''는 당시 이집트에서 오시리스와 라의 두 신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양자는 모두 사후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으로, 라는 생명의 근원이며, 오시리스는 내세에 도달하기 위한 힘을 가진 존재로 믿어졌다.

5. 우나스 피라미드

우나스의 묘실에 새겨진 피라미드 텍스트


우나스 피라미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 텍스트로, 고대 이집트 종교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나스는 묘실에 피라미드 텍스트를 새김으로써 제6왕조부터 고왕국 시대 마지막 제8왕조에 걸쳐 약 200년 동안 지속된 신앙 형태를 선도했다.

총 283개의 주문은 소리 내어 외우는 것이었지만, 우나스 피라미드에서는 통로, 대기실, 묘실의 각 벽면에 새겨져 있으며, 기호는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들은 현존하는 피라미드 텍스트 중 가장 완전한 형태에 가깝다. 이 주문은 사후 세계에서 장애가 되는 적이나 힘으로부터 왕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내세에서 왕의 신성한 아버지인 태양신 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우나스 피라미드의 건설자들은 이 텍스트를 피라미드 내실에 새겨 넣어 장례 의식이 끊어진 후에도 왕이 주문의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우나스 피라미드에 텍스트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파라오의 바(영혼)가 읽을 수 있도록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파라오의 바는 재생의 주문에 의해 석관에서 나타나며, 그 주위는 방어의 주문과 공물로 보호받는다. 바는 그 후, 파라오를 두아트에 사는 오시리스 신과 동격화하는 주문의 효력에 의해 묘실을 나와, 아케트를 본뜬 대기실로 이동한다. 우나스 묘소의 대기실 앞에 새겨진 주문군에는 「식인의 찬가」로 알려진 2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파라오가 신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먹으면서 폭풍우 치는 하늘을 날아 천계로 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행위를 통해 파라오는 신들의 생명력을 얻는다.

우나스 피라미드의 주문의 예는 제217번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레-아툼이시여, 이 우나스가 당신에게 옵니다.

> 파괴할 수 없는 영혼.

> 당신의 아들이 당신에게 옵니다.

> 이 우나스가 당신에게 옵니다.

> 어둠 속에서 연합하여 하늘을 건너가소서.

> 당신이 빛나는 곳, 빛의 땅에서 일어나소서!

5. 1. 개요



우나스의 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동시대 자료는 그의 피라미드 단지에서 나온 많은 부조물들이다. 이를 제외하면, 우나스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 문서들은 이후 기록에서 그의 통치 기간을 30년으로 언급한 것을 고려할 때, 오늘날까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의 왕실 묘지인 아부시르에서 발굴된 것은 우나스의 것으로 확실하게 추정되는 단 4개의 연대기록 비문뿐이며, 그의 즉위 3년, 4년, 6년, 8년을 명시하고 있다.[2] 우나스는 또한 누비아의 나일강 제1 급류 옆에 있는 엘레판틴 섬에 암석 비문을 남겼다.

우나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몇 개의 alabaster 화병이 알려져 있다. 레반트 해안의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완전한 용기 하나와 추가 조각들은 현재 베이루트 국립 박물관에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화병은 피렌체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으며 "호루스 와드타위, 영원히 살아있는 자, 상·하 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 우나스, 영원히 살아있는 자"라고 적혀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용기는 키가 17cm이고 너비가 13.2cm인 둥근 alabaster 화병으로, 펼쳐진 날개를 가진 매와 우나스의 카르투슈를 둘러싼 두 개의 우라에우스, 즉 솟아오르는 코브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1] 우나스의 카르투슈와 호루스 이름이 새겨진 연고 단지는 브루클린 박물관에 있으며, 우나스의 카르투슈 두 개가 새겨진 방해석 화병 가장자리의 조각은 페트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너진 벽돌과 바위, 모래 등이 대량으로 쌓여 있다. 외형은 거의 흙산이다.
사카라에 있는 우나스 피라미드


우나스는 사카라 북부의 세켐케트의 피라미드와 조세르의 피라미드 단지 남서쪽 모서리 사이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조세르 피라미드의 북동쪽 모서리 근처에 있어 우나스 피라미드와 정반대 위치에 있다. 건설 과정에서, 그 지역에 있던 오래된 묘 몇 개가 묻혔는데, 대표적인 예로 제2왕조 파라오 호테프세케메이(기원전 2890년경)의 묘소가 있다.

우나스 피라미드의 이름은 "우나스를 위한 아름다운 장소(Nefer Isut Unas)"였다. 이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에 건설된 것 중 가장 작으며, 정사각형 기단은 57.7m, 높이는 43m이다.

5. 2. 장례 시설

우나스의 장제 시설 통로 복원 부분


우나스 피라미드는 그 주변에 세워진 더 큰 장례 단지의 일부이다. 이 단지에는 우나스 계곡 신전이 위치한 고대 호수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신전은 왕의 숭배를 위한 물품을 받았고, 제물이 준비되었다. 계곡 신전 뒤편에는 쿠푸의 것과 비견될 만한 750m 길이의 제방이 시작되어 피라미드에 인접한 상부 신전으로 이어졌다. 제방 지붕의 얇은 틈새는 빛이 통과하여 제방 벽 전체를 덮은 채색 부조를 비추었다. 여기에는 이집트의 계절, 이집트의 노메(Nome, 지방)에서 온 사람들의 행렬, 일하는 장인, 제물 운반자, 전투 장면, 그리고 피라미드 단지 건설을 위한 화강암 기둥 운송 장면이 묘사되었다.

제방 끝에는 창고가 있는 기둥이 있는 열린 안뜰로 이어지는 큰 홀이 있었다. 이 안뜰은 왕의 조각상이 안치되고 죽은 자에게 제물이 바쳐지는 장례 신전으로 이어졌다. 이곳은 피라미드의 동쪽에 바로 인접해 있었으며, 피라미드는 신성한 공간을 정의하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왕의 카(영혼)를 위한 작은 위성 피라미드가 있었다. 피라미드의 내부 공간은 1881년 가스통 마스페로에 의해 들어갔고, 그는 피라미드 텍스트를 발견했다. 매장실에는 바닥에 박혀 있는 검은색 회색사암 석관과 카노푸스 용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석관 안에는 흩어진 뼈가 있었는데, 이는 우나스의 뼈일 가능성이 있다.

5. 3. 피라미드 텍스트

우나스 피라미드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발견자들은 피라미드에 세로로 적힌 이집트 상형문자를 발견했다. 이 글은 283개의 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은 자의 저승길을 돕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우나스를 시작으로 이러한 형식의 글을 새겨넣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제6왕조에서도 총 100여개가 넘는 주문이 발견되었다. 중왕국 시대에는 관에 새겨넣는 관 문서가 출현하였고, 신왕국 시대에는 '사자의 서' 파피루스가 이를 대체하였다.[1]

피라미드 텍스트의 첫 등장은 우나스 피라미드의 주요 혁신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종교 텍스트 중 하나였다.[2] 우나스는 200년 후인 고왕국 말기까지 제6왕조에서 제8왕조의 왕과 여왕의 피라미드에서 이어질 전통을 시작했다.

총 283개의 마법 주문 (발화라고도 불림)들은 우나스 피라미드의 복도, 전실, 매장실 벽에 새겨지고 파란색으로 칠해졌다. 이것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피라미드 텍스트의 가장 완전한 표현을 구성한다. 이 주문들은 왕이 지하 세계에서 적대적인 세력과 권력을 극복하고 사후 세계에서 그의 신성한 아버지인 태양신과 합쳐지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우나스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은 피라미드 내부 방의 벽에 텍스트를 써서 장례 예배가 중단되더라도 왕이 그 효능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우나스 피라미드의 텍스트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부활 발언 덕분에 석관에서 일어난 우나스의 바가 읽을 수 있도록 정렬되었고, 보호 주문과 의식적 제물이 그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바는 두아트에서 왕을 오시리스와 동일시하는 텍스트를 포함하는 매장실을 떠나 아케트를 상징하는 전실로 이동했을 것이다. 우나스의 전실 벽에 쓰여진 주문에는 식인종 찬가라고 알려진 두 개의 발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파라오가 폭풍우가 치는 하늘을 날아 신과 인간을 모두 먹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은 신들의 생명력을 받게 된다.

우나스 피라미드의 주문의 예는 발언 21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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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툼이시여, 이 우나스가 당신에게 옵니다.

파괴할 수 없는 영혼.

당신의 아들이 당신에게 옵니다.

이 우나스가 당신에게 옵니다.

어둠 속에서 연합하여 하늘을 건너가소서.

당신이 빛나는 곳, 빛의 땅에서 일어나소서!

6. 유산

우나스의 가장 큰 유산은 고왕국 시대 말까지 지속된 그의 장례 의식이다. 사카라에 남아 있는 7명의 신관 무덤은 이를 뒷받침하며, 장례 시설에서 행해져야 하는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7개의 무덤 중 3개는 페피 1세 사후 무렵의 제6왕조 초기의 것이다. 다른 3개는 페피 2세 치세 시대의 것이고, 마지막 1개는 고왕국 시대 말기(기원전 2180년경)의 것이다. 우나스의 장례 의식에 참여한 신관들은 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취임 시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우나스의 장례 의식은 혼란스러운 이집트 제1중간기를 거쳐 중왕국 시대까지 이어졌다. 제12왕조 시대(기원전 1990년-기원전 1800년경)에는 신관 우나셈사프와 그 가족이 우나스의 장례 의례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나스의 장례 시설은 아멘엠하트 1세와 세누세르트 1세의 피라미드 건설에 따라, 건축 자재를 재활용하기 위해 일부가 해체되었다.

왕조의 공식적인 제사 의례 외에도 우나스는 사카라의 네크로폴리스의 토착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말(Grimal)은 우나스의 장례 시설의 웅장함이 ಇದಕ್ಕೆ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말레크(Malek)는 고왕국 시대에 우나스 신앙이 일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왕국 시대 이후에는 신앙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이는 중왕국 시대, 사카라의 네크로폴리스에 들어갈 때 우나스의 장례 시설이 있는 곳을 입구로 삼는 관습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나스에 대한 신앙은 약 2000년 정도 지속되었고, 사카라에서는 우나스의 이름이 새겨진 수많은 스카라베가 발견되었다.

우나스의 이름이 새겨진 스카라베


이 스카라베들은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년경-기원전 1077년경)부터 말기 왕조 시대(기원전 664년-기원전 332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우나스 신앙의 중심에는 우나스의 피라미드나 부속 장례 신전이 아니라, 하안 신전에 있던 파라오의 조상이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존재는 람세스 2세 (기원전 1279년-기원전 1213년)의 아들인 왕자 카엠와세트가 적극적으로 신전 재건 사업을 펼치면서 우나스의 피라미드를 재건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를 설명해준다.

참조

[1] 문서 Turin King List
[2] 간행물 セラペイオ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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