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카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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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카타나(打刀)는 일본 무사 계급의 전투 방식 변화와 함께 발전한 일본도이다. 12세기경 사토에서 유래하여, 무로마치 시대 중기 이후 보병전의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칼 사냥과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다이쇼 제도를 통해 무사의 신분 표식으로 자리 잡았다. 우치카타나는 허리띠에 칼날을 위로 향하게 꽂아 사용하며, 착용 방식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칼날 길이는 시대와 소지자의 신분에 따라 규제되었으며, 기존의 타치를 우치카타나로 개조하는 마루아게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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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카타나 | |
|---|---|
| 도검 정보 | |
| 종류 | 일본도 |
| 길이 | 60cm 내외 |
|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 사용 | 에도 시대 |
| 개요 | |
| 정의 | 일본도의 한 종류 |
| 특징 | 칼날의 길이가 60cm 내외인 도검 타치에 비해 짧고, 협차보다는 긴 것이 일반적임 칼집에 넣어 허리에 차고 다니기에 편리함 무로마치 시대에 실전용으로 발전함 |
| 역사 | 무로마치 시대에 주로 사용됨 에도 시대에는 무사의 패용 의무가 있는 칼이 됨 |
| 용도 | 실전용 무사의 패도 |
| 제작 | 칼날을 단조하여 만듦 다양한 칼집과 칼자루를 사용함 |
| 특징 | |
| 칼날 | 비교적 짧은 칼날을 가짐 휘어진 정도가 타치보다 약함 |
| 칼자루 | 쥐기 편한 형태로 만들어짐 다양한 재료와 장식 사용 |
| 칼집 | 나무로 만들어짐 옻칠 등으로 마감하여 내구성을 높임 |
| 패용 방식 | 허리에 차고 다님 칼자루가 위로 향하게 착용함 |
2. 역사
도의 역사는 일본 무사 계급의 성장과 전투 방식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 다치는 강도나 일상적인 싸움의 도구였고, 습격자에 대비하여 취침 시에 머리맡에 두는 습관도 있었다.[12]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 중기 이후, 전장에서의 전투 형태가 활을 사용한 무사 간의 기사전(騎射戦) 중심에서 대량 동원된 아시가루의 대집단에 의한 보병전으로 변화하면서 다치는 점차 도로 대체되었다.[15]

오닌의 난 이후의 전국 시대에는 대량으로 동원된 보병 아시가루가 창이나 조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전장에서는 나기나타가 쇠퇴하여 창으로 대체되었고, 활과 조총이 혼용되었으며, 다치보다 가볍고 휴대하기 쉬운 도가 주류가 되었다.[15]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정권의 칼 사냥을 거쳐,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는 도와 와키자시를 함께 차는 다이쇼(2자루 칼)를 무사의 정장(신분 표식)으로 확립했다. 이전까지 무사의 상징은 궁술이었으나, 이후에는 도검이 무사의 상징이 되었고 검술을 우선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칼 사냥으로 무사 계층 이외의 사람의 칼 소지는 규제되었지만, 에도 시대에도 민중은 도와 와키자시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마을 간의 다툼에서 흉기로 사용되기도 했다.[16] 막말에는 도시부에서 소규모 전투가 다발하여 도가 활약했다는 설이 있다.[2]
2. 1. 초기 역사 (12세기 ~ 14세기)
도(打刀, 우치카타나)의 초기 형태는 12세기경 등장한 사토(刺刀)에서 비롯되었다.[7] 刺刀|사토일본어는 주로 하급 무사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단도와 유사한 형태였으나 츠바(鍔, 칼날받이)가 달려 있어 츠바도(鍔刀)라고도 불렸다. 사토는 칼날 길이가 36cm 정도였으며,[8] 현대의 단도에 해당한다. 허리칼 또는 도(刀)라고 불리기도 했다.[9]1107년에 쓰여진 『라이겐게(頼源解)』에 도(打刀)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며,[7] 『반 다이나곤 에마키(伴大納言絵巻)』 하권의 검비위사(検非違使)의 하인에게도 묘사되어 있다. 미야기현 주손지(中尊寺)에 있는 후지와라 기요히라(藤原清衡)의 관 위에 놓여 있던 "아쿠로오의 대도(悪路王の大刀)"도 도(打刀)의 칼날로 여겨지고 있다.[7]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도(打刀)는 12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조 시대 이전에는 단도와 마찬가지로 히라즈쿠리(平造)가 주류였지만, 그 이후에는 다치(太刀)와 같은 시노기즈쿠리(鎬造) 형태가 나타난다.
2. 2. 발전과 확산 (14세기 ~ 16세기)
남북조 시대에는 오오타치와 같은 대형 도검이 유행하면서 사토도 함께 길어졌고, 점차 도의 형태로 발전했다.[10][11] 무로마치 시대 중기 이후, 전투 방식이 기마전에서 보병전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타치보다 가볍고 휴대하기 편리한 도가 무사들의 주력 무기로 자리 잡았다.[15]오닌의 난(1467~1477) 이후 전국 시대에는 대량 동원된 보병 아시가루(足軽)들이 창과 조총으로 무장하면서, 도는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15]
2. 3. 에도 시대와 규제 (17세기 ~ 19세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정권은 칼 사냥을 통해 무사 계급 외의 칼 소지를 규제했다.[16]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는 도(打刀)와 와키자시를 함께 착용하는 다이쇼(大小)를 무사의 정장(신분 표식)으로 확립했다. 이전까지 무사의 상징은 궁술이었으나, 이후에는 도검이 무사의 상징이 되었고 검술을 우선적으로 배우게 되었다.칼 사냥으로 무사 계층 이외의 사람의 칼 소지는 규제되었지만, 에도 시대에도 민중은 도와 와키자시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마을 간의 다툼에서 흉기로 사용되기도 했다.[16]
2. 4. 막말과 근대 (19세기 후반 ~ )
막말에는 존왕양이파 지사들 사이에서 근왕도(勤王刀)라 불리는 장대한 도가 유행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6년 폐도령으로 무사 계급의 도검 소지가 금지되었고, 도는 실전 무기로서의 역할을 잃었다.[2]3. 착용 방식
도는 착용 방식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 떨어뜨려 차기: 칼집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 띠에 꽂는 방식이다. 에도 시대에는 이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 빗장 차기: 칼집이 지면과 평행이 되도록 띠에 꽂는 방식으로, 칼을 빠르게 뽑을 수 있다.
- 천신 차기: 말을 탈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태도처럼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칼집이 위로 휘어지도록 하여 칼집 끝(고지리)이 말에 닿지 않도록 했다.[17]

3. 1. 떨어뜨려 차기
칼집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 띠에 꽂는 방식이다. 칼을 뽑을 때는 칼자루 머리를 오른손으로 밀어 내리고 왼손으로 고이구치 부근을 잡고 칼집과 고지리(칼집 끝)를 올리면서 했다. 에도 시대에는 떨어뜨려 차는 방식이 많은 무사들에게 일반적이 되었다 (태평성대를 맞아 칼을 재빨리 뽑을 필요가 줄어들고 앞뒤 공간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3. 2. 빗장 차기
칼집이 지면과 평행이 되도록(고지리가 내려가지 않도록) 띠에 꽂는 방식이다. 칼을 빠르게 뽑을 수 있는 방식이다.3. 3. 천신 차기
천신 차기는 말을 탈 때 칼을 차는 방식으로, 태도처럼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칼집이 위로 휘어지도록 하여 칼집 끝(고지리)이 말의 몸에 닿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다.[17]4. 칼날과 명문
도는 칼날을 위로 향하게 하여 허리에 꽂았기 때문에, 명문(銘文)은 칼을 찼을 때 바깥쪽(왼쪽)에 새겨졌다.[2] 하지만 예외적으로 막말기 신신도 시대에는 명문의 위치가 다른 경우도 있었다. 빗추국아오에 파의 도공처럼 뒷면에 명문을 새기는 경우도 있는 등 예외가 많아,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2] 유서 깊은 칼은 칼을 갈아 (스리아게) 형태는 "우치카타나"가 되었지만, "시키세이노 토(式正の刀)"(태도)임을 나타내기 위해 후세의 감정가에 의해 "태도명"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세베 구니시게: 헷시키리(헤시키리 하세베), 마사무네: 나카쓰카사 마사무네, 모두 국보)[2]
5. 사용법
도는 타치(太刀)와 마찬가지로 베는 것을 주 기능으로 하는 참격(斬擊) 주체의 도검이었다.[18] 일본 검술은 도와 와키자시를 사용하는 것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한 번의 방어 실패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받으면서 공격"하는 방어법이 중시되었다.[21][22][23]
6. 칼날 길이
도의 칼날 길이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무로마치 시대 전반까지는 약 40cm에서 50cm였으나, 무로마치 시대 후반부터는 약 60cm (2척) 이상의 장척(長尺)의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25] 무로마치 시대에는 평균 2척 3치 5분 정도였다. 태합 도수령 이후에는 2척 3치 3분 이하(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마모되었다)였다.
에도 시대에는 소지자에 따라 허가되는 길이가 달라졌다. 대도(大刀) 허가자 및 무예·검술 수련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까지는 2척 3치 이하, 도쿠가와 이에쓰나 이후에는 2척 2치 8분 이하가 되었다. 그 외의 계급이 허가를 얻어 대도하는 경우(체포리, 신관 및 제사·신인·제사시의 분장 역할, 코무소, 오제키 이상의 스모 선수, 예능·길거리 공연 흥행자, 공가 귀족, 창지기 등 무가 봉공인, 그 외 무관이나 경비직 등 특별 신분 대도 허가 등)는 2척 2치 3분까지였다.
막말에는 존왕양이파 지사들 사이에서 '''근황도'''나 '''근왕 갖춤'''이라고 불리는 약 90cm(3척) 전후의 장대한 도가 유행했으며, 좌막파도 대항하여 장대한 칼을 사용하게 되었다.[2]
7. 마루아게(磨上げ)
무로마치 시대 이후, 전투 방식의 변화와 당시 정권의 길이 규제로 인해, 기존의 긴 태도의 칼자루 부분을 잘라내고 칼날을 짧게 만들어 도(刀)로 개조하는 '''마루아게(磨上げ)'''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명문이 손상되거나 못 구멍이 새로 뚫리는 등 칼자루의 외관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다.[2]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나 중요한 명검 등은 예외적으로 허용되기도 했지만, 일부는 칼자루를 조금 길게 하거나 칼날을 마루아게하지 않고 칼자루 속에 묻어 마루아게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하기도 했다. 또한, 창고나 벽, 기둥, 흙 속에 방·내식 처리(밀랍 등의 기름으로 덮어 굳히고, 흰 칼집째 유산지로 싸서 짚 등으로 여러 겹으로 감는)를 하여 일시적으로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칼끝 쪽에서 잘라내고 새롭게 칼끝을 만드는 형태로 마루아게한 것은 "사쓰마아게"라고 부른다.
8. 에도 시대의 소지 규제
에도 시대에는 무사 계급 외에도 특정 신분이나 직업, 상황에 따라 도검 소지가 허용되거나 제한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무사의 정장(신분 표식)으로 다이쇼(2자루 칼), 즉 도(打刀)와 와키자시의 동시 휴대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무사 계층 이외의 사람들의 칼 소지는 규제되었지만, 에도 시대에도 민중은 도와 와키자시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마을 간의 다툼에서 흉기로 사용되기도 했다.[16]
기본적으로 무사들에게 소지가 허가되었지만, 그 외에도 길이 정도가 이와 비슷한 가는 와키자시의 휴대는 제한되지 않았다. 덴나 3년(1683년)까지는 백성·상인 등도 칼을 찰 수 있었다. 그 이후 행사 시에는 칼날을 무디게 하거나 칼날이 없는 칼, 모조 칼, 철도(≒투구 가르기)라고 불리는 칼을 본뜬 포구 등을 차는 것이 허가되었다.
다만 각 번에 따라 규제의 내용은 달랐으며, 각 번마다 규정이 각각 달랐다. 예를 들어 사쓰마 번에서는 사쓰마타치(さつまたち)라고 불리는 전체 길이 약 115cm - 120cm 정도의 오오타치(노다치)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오제키나 요코즈나 등 상위의 스모 선수들은 체격에 맞춰 가는 칼을, 예능·거리 공연 흥행자, 제사 및 행사의 분장역은 보기 좋다는 관점에서 2척 3촌을 넘는 큰 와키자시를 차는 것이 시대에 맞는 풍기상의 판단에 의해 마치부교소 등 관청으로부터 띠칼 허가가 내려졌다. 하치오지 천인 동심은 견고하고 투박한 길이 2척 5촌 - 2척 6촌 전후의 칼의 띠칼이 허가되었다.
또한, 백성이나 상인이라도 에도 중기까지 대부분 일상적으로 와키자시를 차고 있었다. 긴 와키자시는 곧 금지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여행이나 연초의 인사,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와키자시를 찼다. 그 때문에 폐도령에서는 많은 평민의 적발 사례가 나타난다.
9. 현존하는 도의 예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우키 히데야스의 지료(사시료)로서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에 전래되었다. 칼날은 14세기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비젠 국 나가후네 파의 모토시게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모토시게는 이 파의 카네미츠나 나가요시와는 다른 계통의 도공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타치였지만 후에 연마되어 치수가 짧아져 무명이 되었다. 칼과 코시라에(칼집)는 모두 중요 문화재이며, 도쿄 국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칼날 길이는 68.5cm이다.

10. 한국의 환도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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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かちいくさ。徒歩で行う戦闘。
[2]
웹사이트
打刀とは
https://www.touken-w[...]
2022-01-20
[3]
문서
右手で柄を握って鞘から刀を抜く際は、左手で鞘口を握り操作しながら抜く必要があり、太刀とは異なり右手だけを使って抜くことは難があった。
[4]
문서
鞘の中では刀身の峰が支えられ、上を向いた刃は峰の中で接触しておらず、滑らかに鞘から抜くことができた。
[5]
문서
これに対して、[[太刀]]は正座の時も外す必要がなかった。また[[太刀]]は高い身分の武士が儀式などの佩刀として、その後も用いられた。
[6]
문서
打刀を外した時にも、[[脇差]]は常に差していた。
[7]
서적
騎兵と歩兵の中世史
吉川弘文館
[8]
서적
武器と防具(日本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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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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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人 2020年9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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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日本刀関連」用語一覧 4/9 "刺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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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eb.archive.[...]
[16]
서적
刀狩り
[17]
문서
馬に刺激を与えると言うことを聞かなくなるおそれがあることか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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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研パブリッシ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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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流剣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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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具の日本史
平凡社新書
201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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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武具の日本史
平凡社新書
201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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