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 (평정공)
1. 개요
윤호(尹壕)는 고려 말 문하평리 윤승순의 증손이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다. 세조의 장인 윤번의 재종손이며,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아버지이다. 144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 양주 목사, 경기 관찰사 등을 거쳐 1480년 정현왕후가 성종의 계비가 되면서 영돈령부사에 임명되고 영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493년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구급간이방》과 아들 윤탕로와 공저한 《파천집》이 있다. 사후 평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검소한 성품으로 외척으로서의 세도를 부리지 않았으나, 자기 주장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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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년 출생 -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크리스토포로 란디노는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이자 작가로, 피렌체 스튜디오 교수, 플라톤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철학, 문학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치며 이탈리아어 사용을 옹호하고 《아이네이스》와 《신곡》에 대한 주석을 남기는 등 르네상스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424년 출생 -
아부 사이드 미르자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티무르 제국의 왕공으로서, 트란스옥시아나 지배를 두고 경쟁하다 1451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지배자가 되었으나, 티무르 제국 재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1469년 백양조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처형당했다. -
연천군 -
적성군
적성군은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였던 칠중현에서 유래하여 고려시대에 적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조선시대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연천군에 편입된 후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으로 나뉘어진 지역이다. -
연천군 -
연천군보건의료원
연천군보건의료원은 1963년 보건소로 시작하여 1989년 보건의료원으로 출범, 진료와 보건사업을 병행하며 다양한 진료과목과 건강 증진 사업, 그리고 치매안심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의 운영을 통해 연천군 지역 주민들에게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
1496년 사망 -
히노 도미코
히노 도미코는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로,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닌의 난 권력 다툼 개입, 쇼군 후계자 옹립 역할 수행, 막부 좌지우지, 민중 반발 야기 등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며, 후지와라 도미코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고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
1496년 사망 -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형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와 함께 활동하며 고전주의와 인체 해부학에 대한 관심을 작품에 반영했고, 소규모 제단화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2. 생애
2.1. 가계와 생애 초반
고려말 문하평리를 지낸 윤승순의 증손이자 윤곤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증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영천부원군에 추증된 윤삼산(尹三山)의 아들이다. 윤승순의 형제 판도판서 윤승례는 세조의 장인 정정공 윤번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세조의 장인 윤번은 윤호의 재종조부, 세조비 정희왕후는 7촌 재종고모가 된다.
1447년(세종 29년)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응시하여 3등으로 입격하여 생원(生員)되었다. 그 뒤 음서로 관직에 올라 군기시주부, 의금부도사 등을 지내고 신창현감으로 발령되었다가 밀양부사, 양주목사 등을 지냈다.
행종부시승(行宗簿寺丞)으로 재직 중 1455년(세조 1년) 세조 반정 이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 그 뒤 천릉도감의 민혜(閔憓)가 뇌물을 받고 군사를 놓아준 일이 발각되었는데 이를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의금부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했다. 그러나 예종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이후 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2.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470년(성종 1년) 영응대군의 종 금희(金希)를 도둑으로 몰아 매질하여 발을 부러뜨리고, 계속 때려 죽게 하였다. 정희왕후는 영응대군 종 금희 사건으로 특명을 내려 윤호를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였다.
1472년 성종의 광릉 참배에 배종하였고, 그해 3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다시 행양주 목사(行楊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6월 병조참지가 되었다. 1473년 딸 윤씨가 성종의 후궁 숙의(淑儀)로 간택되어 입궐하였다. 1475년(성종 6년)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그해 조정에 입궐하여 사직 상소를 내렸으나 왕이 무마시켜 되돌려보냈다. 1476년(성종 7년)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7년 병조참지(參知)를 지냈다. 그 뒤 병조참판을 지냈고 1478년 4월초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4월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전임되었다.
1478년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왔다. 그해 말 귀국한 뒤,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극기(李克基) 등으로부터 관찰사 제수가 부당하다며 체직을 청하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은 처음에 체직하려 했다가 취소하였고 이후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당했다. 이후 계속 체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입조하여 스스로 사퇴하였으나 왕이 무마시키고 되돌려보냈다.
1479년 성종이 거동할 때 횃불의 수가 적었다 하여 장령(掌令) 신형(申泂)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하였고, 이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박안성(朴安性) 등이 여러번 탄핵하였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그해 윤 10월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1480년 딸이 성종의 계비로 책봉되어 정현왕후가 되자, 성종의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에 임명되고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82년 사복시제조, 1483년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1485년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를 거쳐 1488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고 다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1489년 사복시제조를 겸하였고, 유도 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복시제조를 겸하였다. 1490년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2.3. 왕실과의 인연과 국구
1476년(성종 7년)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7년 병조참지(參知)를 지냈다. 그 뒤 병조참판을 지냈고 1478년 4월초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4월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전임되었다.
1478년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해 말 귀국한 뒤,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극기(李克基) 등으로부터 관찰사 제수가 부당하다며 체직을 청하는 탄핵을 받았다. 왕은 처음에 체직하려 했다가 취소하였고 이후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당했다. 이후 계속 체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입조하여 스스로 사퇴하였으나 왕이 무마시키고 되돌려보냈다.
1479년 성종이 거동할 때 횃불의 수가 적었다 하여 장령(掌令) 신형(申泂)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하였고, 이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박안성(朴安性) 등이 여러번 탄핵하였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그해 윤 10월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1480년 딸이 성종의 계비로 책봉되어 정현왕후가 되자, 성종의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에 임명되고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82년 사복시제조, 1483년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1485년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를 거쳐 1488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고 다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1489년 사복시제조를 겸하였고, 유도 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복시제조를 겸하였다. 1490년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2.4. 생애 후반
1493년(성종 24년) 4월 의정부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 대사헌 허침(許琛) 등으로부터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탄핵을 받았다. 그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0월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함이 없었으며, 외척으로서 세도는 추호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다시 영돈령부사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구급간이방 (救急簡易方)》이 있고, 아들 윤탕로와의 공저 《파천집 坡川集》이 있다.
(연천군 미산면 아미2리 대로변)
2.5. 사후
그의 묘는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현, 연천군 미산면 아미2리 산131-1)에 있다. 묘소는 후에 연천군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신도비문은 임사홍이 비문을 썼다.
4.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윤곤(尹坤)
아버지 : 윤삼산(尹三山, 1406 ~ 1457) - 한명회의 고종형이자, 정희왕후의 재종형이다.
어머니 : 고성이씨(固城李氏), 의정부좌의정 이원(李原)의 딸
형 : 윤오(尹塢) - 선공감 부정
형 : 윤당(尹塘)
동생 : 윤해(尹垓)
동생 : 윤탄(尹坦)
동생 : 윤파(尹坡)
부인 : 연안부부인 연안전씨(延安府夫人 延安田氏, 부승(副丞) 전좌명(田佐命)의 딸)
장남 : 윤은로(尹殷老)
장녀 : 정현왕후
사위 : 제 9대 성종
차남 : 윤탕로(尹湯老)
사돈 : 덕종, 인수대비
장인 : 전좌명(田佐命)
5. 평가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하지 않아서 외척으로서의 세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저서는 파천집이 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없고 매양 조정에서 크게 의논할 적을 당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소서.’라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아뢴 바에 의하는 재상(依所啓宰相)'이라 불렀다며 비꼬기도 했다.
5.1. 긍정적 평가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하지 않아서 외척으로서의 세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저서는 파천집이 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없고 매양 조정에서 크게 의논할 적을 당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소서.’라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아뢴 바에 의하는 재상(依所啓宰相)'이라 불렀다며 비꼬기도 했다.
5.2. 부정적 평가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하지 않아서 외척으로서의 세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없고 매양 조정에서 크게 의논할 적을 당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소서.’라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말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는 재상(依所啓宰相)'이라 불렀다며 비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