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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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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융중대는 삼국 시대 촉한의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천하 통일 전략이다. 3세기 말 진수의 삼국지 제갈량전에 기록된 이 전략은, 당시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점령하고 손권과 동맹을 맺어 조조에 대항하며, 기회를 보아 북벌을 통해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융중대는 삼국 시대의 삼분할을 예견하고 손권과의 동맹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대에도 세력 균형과 전략 수립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형주 상실과 이릉 전투 패배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으며, 전략적 목표의 비현실성과 양면 공격의 문제점 등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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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중대
개요
명칭융중대
별칭천하삼분지계
발생 시기207년
관련 인물유비
제갈량
배경
시대적 배경후한 말기
유비의 상황조조에게 의탁했으나 벗어나고자 함
자신의 기반이 없음
인재 부족
내용
핵심 내용조조의 세력이 강대하여 직접적인 대결은 피해야 함
손권이 강동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와 연합해야 함
형주익주를 차지하여 기반을 마련해야 함
천하삼분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조조를 타도하고 한실을 부흥시켜야 함
구체적인 계획형주유표를 설득하여 형주를 얻음
익주유장을 설득하거나 공격하여 익주를 얻음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형주와 익주를 지킴
유비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민심을 얻음
기회를 틈타 조조를 공격하여 천하를 통일함
결과 및 영향
역사적 의의유비가 촉한을 건국하는 기반이 됨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략적 구상을 제시함
후대의 전략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침
평가제갈량의 뛰어난 통찰력과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유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그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다만, 천하통일에는 실패하여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함

2. 배경

당시 조조는 여남 원씨를 무너뜨리고 중원 지방을 지배했으며, 중국 전토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양주의 손권, 형주유표, 익주유장, 한중장로, 량주의 마초·한수 등을 쳐부숴야 했다.

그 무렵, 유비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형주는 양주와 익주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2. 1. 후한 말의 정세

당시 조조는 여남 원씨를 무너뜨리고 중원 지방을 지배했으며, 중국 전토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양주의 손권, 형주유표, 익주유장, 한중장로, 량주의 마초·한수 등을 쳐부숴야 했다.[1]

그 무렵, 유비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1] 형주는 양주와 익주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1]

3. 내용

3세기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의 제갈량 전에 융중에서 제갈량과 유비가 나눈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유비는 한나라가 쇠퇴하고 간신들이 권력을 찬탈하여 황제가 유배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은 재주와 덕이 부족하지만 천하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나 지혜롭지 못하여 실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제갈량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었다.[2]

제갈량은 동탁이 권력을 찬탈한 이래로 많은 군벌들이 일어났고, 조조원소에게 열세였지만 그를 물리치고 강자로 변모한 것은 사람의 지혜와 슬기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조조는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명의로 다른 군벌들을 지휘하고 있으니 직접 경쟁할 수 없다고 보았다.[3] [4]

제갈량은 유비에게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책략으로, 조조의 능력과 권세는 커서 이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형주익주를 영토로 삼고, 남방의 이민족을 위무하고 손권과 동맹을 맺어 방비를 굳건히 한 뒤,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낙양과 진령 산맥으로 진격하여 조조를 타도하면 한나라를 재흥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비는 제갈량의 원대한 식견을 인정하고 그를 군사로 기용했다.

214년 이후 유비는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점령한 후 형주와 익주를 모두 장악했다. 219년에는 조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한중을 점령했다. 그해 가을, 형주에 있던 그의 지휘관 관우한강의 조조 진지를 공격했다. 이 공세는 계획된 양면 공격의 일부였을 수 있다. 처음 몇 달 동안 관우의 공격은 놀랍도록 성공적이었고 조조는 심지어 수도 허창을 피난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손권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형주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유비는 222~223년의 이릉 전투에서 형주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직후 사망했다. 형주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북벌의 형태로 융중 계획의 수정된 버전을 수행하려 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원정들이 서로 다른 전술적,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3. 1. 제갈량의 제안

제갈량은 유비에게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시했다.[3] [4] [5] [6] [7] [8] [9]

  • 조조는 이미 세력이 커서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 손권은 강동 지역을 3대째 다스리고 있어 지리적 이점, 백성의 지지, 유능한 조언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으므로 동맹을 맺어야 한다.
  • 형주는 북쪽으로는 한수와 면수, 남쪽으로는 바다, 동쪽으로는 오와 회계군, 서쪽으로는 파와 촉에 연결된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통치자인 유표는 지킬 능력이 없으니 차지해야 한다.
  • 익주는 지리적으로 전략적인 위치에 있고,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어 "천부지국"이라 불리며,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통일할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현재 통치자 유장은 무능하고 약하며, 북쪽의 장로의 위협을 받고 있고, 인재들은 현명한 통치자를 원하고 있으니 차지해야 한다.
  •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방어하고, 서쪽의 서융, 남쪽의 동이 및 백월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기회가 오면, 장수 한 명에게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완현과 낙양을 공격하게 하고, 유비는 직접 익주의 군대를 이끌고 진령 산맥을 통해 나아가면 백성들이 환영할 것이고, 그러면 한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다.


이 계획은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조조,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하는 것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는 것과 경제, 법률, 행정 개혁, 비한족과의 우호 관계 발전을 통해 저항을 줄이고 인력과 자원을 늘리는 것도 포함했다.

3. 2. 전략의 핵심

제갈량은 유비에게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 우선 조조의 강력한 힘을 인정하며 직접적인 대결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신 형주와 익주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울 것을 제안했다.[4]

형주는 북쪽으로는 한수와 면수, 남쪽으로는 풍부한 자원을 가진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통치자 유표는 이를 지킬 능력이 부족했다.[6] 익주는 비옥한 땅과 지리적 이점을 가진 "천부지국"이라 불리는 곳이었으나, 통치자 유장은 약하고 북쪽의 장로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7] 제갈량은 이 두 지역을 차지하여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손권과의 동맹을 통해 조조에 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권은 강동 지역을 3대에 걸쳐 다스리며 지리적 이점, 백성의 지지, 유능한 조언자들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정복보다는 동맹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5]

장기적으로는 북벌을 통해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회가 오면 형주의 군대는 완현과 낙양으로, 익주의 군대는 진령 산맥을 통해 진격하여 조조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재건할 수 있다고 보았다.[9]

이러한 전략은 경제, 법률, 행정 개혁과 서쪽 및 남쪽의 비한족 민족과의 우호 관계 발전을 통해 저항을 줄이고 인력과 자원을 확보하는 것을 포함했다.

4. 전개

3세기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제갈량 전에 융중에서 그와 유비가 나눈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 유비는 한나라가 쇠퇴하고 간신들이 권력을 찬탈하여 황제가 유배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이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나 지혜롭지 못하여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말하며 제갈량에게 조언을 구했다.[2]

제갈량은 동탁이 권력을 찬탈한 이래로 천하의 많은 군벌들이 일어났다고 말했다.[3] 조조원소에게 열세였지만, 사람의 지혜와 슬기 덕분에 원소를 물리치고 강자로 변모했다고 설명했다.[4] 이제 조조는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명의로 다른 군벌들을 지휘하고 있으니, 직접 경쟁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4]

손권강동을 3대에 걸쳐 다스리고 있으며, 지리적 이점, 백성의 마음, 현명하고 재능있는 조언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5] 그의 영토를 정복하려 하기보다는 동맹을 맺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5]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와 면수, 남쪽으로는 바다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오와 회계군에, 서쪽으로는 파와 촉에 연결되어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고 설명했다.[6] 그 통치자는 그것을 방어할 능력이 없으니, 유비에게 하늘이 내린 특별한 선물이라고 말했다.[6]

익주는 지리적으로 전략적인 위치에 있으며, 수천 리의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어 "천부지국"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7] 한 고조가 천하를 정복할 때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설명했다.[7] 유장은 무능하고 약하며, 북쪽에서 장로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7] 그의 영토가 부유하고 번영하지만, 그는 그것을 소중히 할 줄 모르며, 그곳의 모든 인재들은 현명한 통치자 밑에서 일하기를 희망한다고 조언했다.[7]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와 익주를 장악하고 그들의 전략적인 지리를 활용하여 잘 방어하라고 조언했다. 동시에, 서쪽의 서융 민족과 좋은 관계를 맺고, 남쪽의 동이와 백월 민족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8]

기회가 오면, 고위 장교 중 한 명에게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완현과 낙양을 공격하게 하고, 유비는 직접 익주의 군대를 이끌고 진령 산맥을 통해 나아가라고 조언했다.[9]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환영할 것이고, 한나라는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9]

이 계획은 유비가 형주익주를 차지하는 것을 상정했다. 조조가 화북 평원을 장악하고, 손권강동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형주와 익주를 점령하는 것은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이 계획은 삼국 시대의 삼분할을 예견하는 놀라운 선견지명이 담겨 있었다. 또한 조조를 억제하고 저항하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는 제안, 경제, 법률, 행정 개혁의 시행과 비한족 민족과의 우호적인 관계 발전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계획의 절정은 화북 평원을 장악하고 한나라를 재건하는 두 갈래의 북방 원정이었다. 한 갈래는 익주에서 진령 산맥을 통해 위수 계곡으로 진입하여 관중 지역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진군은 형주에서 낙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원정은 조조 정권의 불안정이 일어나는 절호의 순간에 발생할 것이었지만, 그 순간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또한 손권이 공세에서 수행할 역할도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는 적어도 조조의 군대 일부를 묶어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1. 형주와 익주 점령

적벽 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 남부를 차지했고, 214년에는 유장에게 불만을 품은 법정 등의 내응으로 익주를 점령하여[7] 융중대의 초기 목표를 달성했다.

4. 2. 형주 상실과 이릉 전투

219년 관우여몽에게 패하여 형주를 잃고(번성 전투[2]), 형주 탈환을 위해 침공한 유비 또한 육손에게 대패했다.([2]이릉 전투) 이로 인해 영토, 병력, 백성, 물자를 잃으면서 융중대는 좌절되었다.

5. 결과 및 평가

융중대는 삼국 시대의 삼분할을 예견한 계획으로, 조조를 억제하고 저항하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고, 경제, 법률, 행정 개혁과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비한족 민족과의 우호적인 관계 발전을 통해 저항을 줄이고 인력과 자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최종적으로는 화북 평원을 장악하고 한나라를 재건하는 두 갈래의 북방 원정을 계획했다.[9]

북방 원정은 진령 산맥을 통해 위수 계곡으로 진입하여 황하의 큰 굴곡과 관중 지역을 지배하고, 형주에서 북쪽으로 낙양과 그 주변 평원을 향하는 것이었다. 이 원정은 조조 정권의 불안정이 일어나는 시점에 발생할 예정이었으나, 구체적인 시점과 손권의 역할은 명시되지 않았다.

214년 유비는 익주를 점령하고, 219년 한중을 점령했다. 관우한강의 조조 진지를 공격했으나, 손권의 기습 공격으로 형주를 잃었다. 이릉 전투에서 패배 후 유비는 사망했고, 제갈량은 북벌을 통해 융중 계획의 수정된 버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전술적, 전략적 목표가 달랐다는 주장도 있다.

유비제갈량이 융중대책을 논의하는 모습. 베이징 이화원의 장랑 벽화


청나라 학자 왕부지는 융중대책의 양면 공격이 어느 쪽이 주력인지 구분하지 않아 병법의 미묘함이 없고, 정(正)과 기(奇)의 상호 작용에 대한 암시도 없다고 비판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은 융중대책의 한나라 부활 목표가 비현실적이며, 형주 점령 아이디어는 손권강남의 안보에 중요한 형주를 유비가 통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에 결함이 있다고 비판한다.

"세 세력이 대립하여 균형을 유지한다"는 전략은 초한전쟁 시대 괴통이 한신에게 제안한 천하 삼분 계획과 유사하나, 제갈량의 계책은 "중국 전토의 통일"이 최종 목적이며, 형주와 익주 영유는 통일을 위한 수단이었다. 현대에도 국가나 기업 수준에서 세 세력이 대항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수법을 "천하 삼분지계"라고 표현한다.

5. 1. 삼국 정립

동탁이 권력을 찬탈한 이래로, 천하의 많은 군벌들이 일어나 영토를 점거했다.[3]

조조원소에게 군사력에서 열세였지만, 원소를 물리치고 약자에서 강자로 변모했다. 이제 조조는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명의로 다른 군벌들을 지휘하고 있으니, 그와 직접 경쟁할 수는 없다.[4]

손권강동을 다스리고 있고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이 지역을 지배해 왔다. 그는 지리적 이점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영토를 정복하려 하기보다는 그와 동맹을 맺는 것이 좋다.[5]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와 면수와 같은 자연 지리적 방어벽을 가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 군사 전략가들의 눈에는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그 통치자는 그것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 익주는 지리적으로 전략적인 위치에 있으며 수천 리의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다. 유장은 무능하고 약하며 북쪽에서 장로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의 영토가 부유하고 번영하지만, 그는 그것을 소중히 할 줄 모른다.[6][7]

형주와 익주를 장악하여 잘 방어하고, 서쪽의 서융 민족과 좋은 관계를 맺고, 남쪽의 동이와 백월 민족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8]

기회가 오면,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완현과 낙양을 공격하게 하고, 익주의 군대를 이끌고 진령 산맥을 통해 나아가게 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환영할 것이고, 한나라는 부활할 것이다.[9]

이 계획은 유비가 형주익주를 차지하는 것을 상정했다. 조조가 중국 지배의 핵심인 화북 평원을 장악하고 있으며, 손권강동 지역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형주와 익주를 점령하는 것은 성공에 필수적이었다. 이 계획은 삼국 시대의 삼분할을 예견했다. 조조를 억제하고 저항하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는 제안, 경제, 법률, 행정 개혁, 비한족 민족과의 우호적인 관계 발전은 저항을 줄이고 인력과 자원을 증가시킬 것이다. 화북 평원을 장악하고 한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서쪽 익주에서 북쪽으로 진령 산맥을 통해 나아가 위수 계곡으로 진입하여 황하의 큰 굴곡과 관중 지역을 지배할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고, 형주에서 북쪽으로 낙양과 그 주변 평원을 향하는 두 갈래의 북방 원정을 계획했다.

214년 이후 유비는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점령한 후 형주와 익주를 모두 장악했다. 219년, 그는 조조에게 승리하고 한중을 점령했다. 그해 가을, 형주에 있던 그의 지휘관 관우한강의 조조 진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손권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형주를 점령했다. 유비는 이릉 전투에서 형주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직후 사망했다. 형주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북벌의 형태로 융중 계획의 수정된 버전을 수행하려 했을 수 있다.

"세 세력이 대립하여 균형을 유지한다"는 전략은 후한 말기보다 훨씬 전에 등장했다. 초한전쟁 시대에는 괴통이 한신에게 초, , 에 의한 천하 삼분 계획을 제안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제갈량의 계책은 "균형을 유지"하고 "천하를 삼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중국 전토의 통일"이 최종 목적이며, 형주와 익주를 영유하는 것은 통일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5. 2. 장기적 실패

유비는 형주를 잃고, 이릉 전투에서 육손에게 대패하면서 영토, 병력, 백성, 물자를 잃었다. 이로 인해 융중대는 좌절되었다.[11][12]

5. 3. 역사적 의의

3세기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의 제갈량 전에 융중에서 제갈량과 유비가 나눈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화에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를 삼분하여 조조, 손권과 대립하고, 최종적으로는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전략을 제시한다. 이 계획은 형주익주를 점령하여 기반을 다지고, 손권과 동맹을 맺어 조조에 대항하며,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과 우호 관계를 맺어 저항을 줄이고 인력과 자원을 확보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2][3][4][5][6][7][8]

융중대는 난세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 했던 시도로, 훗날 삼국 시대의 삼분할을 예견한 제갈량의 뛰어난 통찰력과 전략적 식견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특히, 화북 평원을 장악한 조조와 강동 지역을 점유한 손권의 세력을 고려하여 형주와 익주를 점령하는 것이 성공의 필수 조건임을 강조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손권과의 동맹, 경제, 법률, 행정 개혁, 이민족과의 우호 관계 발전 등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하여 단순한 군사 전략을 넘어선 종합적인 국가 경영 전략을 제시했다는 의의를 갖는다.[9]

5. 4. 비판적 시각

청나라 학자 왕부지는 융중대에서 제시된 양면 공격 전략이 구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어떤 쪽이 주 공격이고 어떤 쪽이 미끼인지 구분하지 않았으며, 정규적인 군사 작전(正)과 기습적이고 은밀한 군사 행동(奇)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한 언급도 없다고 지적했다. 왕부지는 상대적으로 약한 세력이 제국을 차지하려면 전략적 계획에서 유연성을 가지고 기(奇)를 활용하여 승리할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1][12]

현대의 일부 군사 역사학자들은 융중대의 정치적 목표, 즉 한나라 부흥이 비현실적이었다고 비판한다. 조위는 제갈량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나라의 정통 계승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및 정치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베이징의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의 군사 역사학자들은 제갈량의 정치적 목표가 융중대가 수립된 207년에도 부적절했으며, 북벌 시점에는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융중대에서 형주를 점령하려는 구상 자체가 결함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손권은 자신의 근거지인 강남의 안보에 중요한 형주를 유비가 통제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량은 207년 당시의 정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1][12]

6. 현대적 해석

초한전쟁 시대에 괴통은 한신에게 초, , 의 천하 삼분 계획을 제안했지만, 이는 채택되지 않았다. 반면 제갈량의 계책은 "균형 유지"와 "천하 삼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중국 전토의 통일"을 최종 목적으로 하였다. 형주와 익주를 영유하는 것은 이러한 통일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현대에도 국가나 기업 수준에서 세 세력이 대항하여 균형을 이루는 전략을 융중대의 고사에 따라 "천하삼분지계"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스즈키 상점의 번두였던 가네코 나오키치는 런던 지점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미쓰이, 미쓰비시를 압도하거나, 또는 '''그 둘과 나란히 천하를 삼분한다'''"고 언급했다.[11][12]

참조

[1] 서적 漢晉春秋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名言で読み解く中国の思想家 미ネルヴァ書房
[11] 뉴스 ニッポンの企業家、金子直吉 日本経済新聞 2005-11-21
[12] 서적 その時歴史が動いた コミック版 経済立国編 日本放送協会 200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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