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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레시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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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글레시아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카르보니아, 칼리아리, 오리스타노 등 주변 도시들과의 거리를 가지며,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은 광산 개발을 통해 번성했다. 아라곤 왕국과 사보이 왕가를 거치며 근현대에는 광산 산업의 부흥과 쇠퇴를 겪었다. 현재는 중세 관광, 광산 유적, 해안 관광 등이 주요 경제 활동이며, 오버하우젠(독일) 및 피사(이탈리아)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2. 지리

이글레시아스는 카르보니아에서 북쪽으로 약 16km, 주도인 칼리아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51km, 오리스타노에서 남쪽으로 약 67km 지점에 있다.

2. 1. 인접 코무네


  • 부제루
  • 카르보니아
  • 돔스노바스
  • 플루미니마조레
  • 곤네사
  • 무제이
  • 나르카오
  • 실리쿠아
  • 발레르모사
  • 빌라치드로
  • 빌라마사르자

2. 2. 기후

이글레시아스 (1981–2010) 기후[9]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
최고 기온 (°C)13.2°C13.5°C16.1°C18.4°C23.7°C28.4°C32.1°C32.5°C27.7°C23.3°C17.4°C13.9°C
평균 기온 (°C)9.3°C9.5°C11.6°C13.7°C18.1°C22.2°C25.4°C25.9°C22.2°C18.5°C13.5°C10.3°C
최저 기온 (°C)5.4°C5.4°C7°C8.9°C12.4°C15.9°C18.6°C19.2°C16.6°C13.6°C9.6°C6.7°C
강수량 (mm)80.4mm71.8mm56.7mm73.6mm35.2mm19.8mm1.6mm7.5mm49.3mm48.2mm111.5mm102.2mm


3. 역사

9세기경 사람이 살지 않던 곳에 작은 마을이 생겨났고, 그곳에는 비잔틴 교회가 세워졌다(산 살바토레 교회). 비잔틴의 영향력이 사르데냐에서 사라지자, 섬의 남부 지역은 칼리아리 재판관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258년 칼리아리 재판관국이 멸망한 후, 사르데냐 남서부(치세리 및 술키스 쿠라토리아)는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에 할당되었고, 치세리 지역은 우골리노 델라 게라르데스카가 통치했다.[1] 그는 이 지역의 은 자원을 활용하여 '빌라 에클레지아'(교회 도시)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오래된 건물을 개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은 중세 시대의 살바테라 성, 방어벽, 병원 및 수로를 건설했다.

이글레시아스의 ''토레 피사나''


1289년 3월 우골리노가 피사의 무다 타워에서 사망한 후, 치세리 지역의 사르데냐 영지는 그의 아들 구엘포 델라 게라르데스카에게 상속되었다. 구엘포는 피사 정부에 적대적이었고, 빌라마사르지아의 조이오사 과르디아 성을 점령했다. 1295년 피사 공화국 군대는 아르보레아의 마리아누스 2세의 지원을 받아 빌라 디 키에사를 공격했다. 구엘포는 도무스노바스 근처에서 부상을 입었고, 사사리로 탈출하려다 시에테 푸엔테스 병원에서 감염으로 사망했다. 빌라 디 키에사는 1301년에서 1302년 사이에 피사의 지배를 받기 전에 잠시 아르보레아의 통치를 받았다.[2]

피사 지배 하에서 빌라 디 키에사는 납과 은 자원 덕분에 사르데냐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14세기 초, 이곳의 광산은 유럽 유통 은의 약 10%를 생산했다.[4] 이 도시는 빌라 디 키에사의 브레베(Breve di Villa di Chiesa)라는 자체 법률 코드로 통치되었으며, 1327년 버전은 시립 문서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 주조소가 도시에 설립되었다.

7개월 이상의 포위 공격 끝에 1324년 2월 7일 아라곤에 정복된 빌라 디 키에사는 이베리아인에게 함락된 최초의 사르데냐 도시였으며, 1327년 6월에는 새로운 사르데냐 왕국의 도시로 인정받았다. 아라곤 시대 동안 도시의 이름은 빌라 디 키에사에서 이글레시아스로 변경되었다.

이글레시아 주조소에서 주조된 아라곤의 알폰소 4세를 기념하는 14세기 레알


1353년 말, 아라곤 왕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시작되었고, 아르보레아의 마리아누스 4세와 협력했다. 1355년 산루리 평화 조약 이후, 이 도시는 아라곤으로 반환되었고, 1365년 아르보레아 재판관국과 사르데냐 왕국 간의 분쟁이 재개되면서 빌라 디 키에사는 다시 점령되었다. 이 도시는 1388년 아르보레아의 엘레노어와 아라곤의 후안 1세 간의 조약 이후 아라곤으로 반환될 때까지 아르보레아의 손에 남아 있었다. 1391년 이 도시는 다시 아라곤에 반란을 일으켰고, 브란칼레오네 도리아가 이끄는 재판관의 군대를 환영했다. 1409년 여름 이베리아인에게 점령되었다.[6]

1436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는 봉토로서 엘레오노라 카로즈에게 5,000 플로린을 지불했지만, 몸값을 지불한 후 빌라 디 키에사는 1450년에 왕립 도시의 지위를 회복했다.

3. 1. 선사 및 고대 시대

오늘날 이글레시아스 주변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가장 오래된 인류 정착 흔적은 기원전 4천년기의 도무스 데 야나스로 오지에리 문화에 속하며, 산 베네데토의 산악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폭스 동굴의 종 모양 비커
인근 동굴에서는 누라게 이전의 몬테 클라로 문화, 종 모양 비커 문화 및 보나나로 문화에 속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3] 이후 누라게 시대, 포에니 시대, 고대 로마 시대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고대 로마 자료에는 플루미니마조레와의 경계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메탈라라는 도시가 기록되어 있다.

3. 2. 중세 시대

9세기경, 사람이 살지 않던 곳에 작은 마을이 생겨났고, 그곳에는 비잔틴 교회가 세워졌다(산 살바토레 교회). 비잔틴의 영향력이 사르데냐에서 사라지자, 섬의 남부 지역은 칼리아리 재판관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258년 칼리아리 재판관국이 멸망한 후, 사르데냐 남서부(치세리 및 술키스 쿠라토리아)는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에 할당되었고, 치세리 지역은 우골리노 델라 게라르데스카가 통치했다.[1] 그는 이 지역의 은 자원을 활용하여 '빌라 에클레지아'(교회 도시)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오래된 건물을 개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은 중세 시대의 살바테라 성, 방어벽, 병원 및 수로를 건설했다.

1289년 3월 우골리노가 피사의 무다 타워에서 사망한 후(그는 1288년 여름 반역과 반역죄로 투옥되었다), 치세리 지역의 사르데냐 영지는 그의 아들 구엘포 델라 게라르데스카에게 상속되었다. 구엘포는 1288년 피사에서 탈출하여 빌라 디 키에사에 정착했다.[2] 그는 피사 정부에 적대적이었고, 게라르도 델라 게라르데스카의 상속인이 소유한 옛 칼리아리 재판관국(술키스)의 6분의 1을 점령하려 했으며, 빌라마사르지아의 조이오사 과르디아 성을 점령했다. 피사의 대응은 신속했다; 1295년 공화국 군대는 아르보레아의 마리아누스 2세의 지원을 받아 빌라 디 키에사를 공격했다. 구엘포는 도무스노바스 근처에서 부상을 입었고, 사사리로 탈출하려다 시에테 푸엔테스 병원에서 감염으로 사망했다. 빌라 디 키에사는 1301년에서 1302년 사이에 피사의 지배를 받기 전에 잠시 아르보레아의 통치를 받았다.[2]

피사의 지배 하에서 빌라 디 키에사는 납과 은 자원 덕분에 사르데냐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14세기 초, 이곳의 광산은 유럽 유통 은의 약 10%를 생산했다.[4] 주로 사르데니아인과 피사인으로 구성된 이 도시에는 토스카나, 이탈리아 반도, 코르시카독일 출신의 다른 공동체도 거주했다. 이 도시는 빌라 디 키에사의 브레베(Breve di Villa di Chiesa)라는 자체 법률 코드로 통치되었으며, 1327년 버전은 시립 문서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 주조소가 도시에 설립되었다.

7개월 이상의 포위 공격 끝에 1324년 2월 7일 아라곤에 정복된 빌라 디 키에사는 이베리아인에게 함락된 최초의 사르데냐 도시였으며, 1327년 6월에는 새로운 사르데냐 왕국의 도시로 인정받았다. 아라곤 시대 동안 도시의 이름은 빌라 디 키에사에서 이글레시아스로 변경되었다.

피사에서 아라곤 통치로 전환되는 동안 빌라 디 키에사에는 6,000~7,000명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1348년의 흑사병으로 인구의 상당 부분이 사망했다.[5] 1353년 말, 아라곤 왕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시작되었고, 아르보레아의 마리아누스 4세와 협력했다. 1355년 산루리 평화 조약 이후, 이 도시는 아라곤으로 반환되었고, 1365년 아르보레아 재판관국과 사르데냐 왕국 간의 분쟁이 재개되면서 빌라 디 키에사는 아르보레아의 마리아누스 4세에게 다시 점령되었다. 이 도시는 1388년 아르보레아의 엘레노어와 아라곤의 후안 1세 간의 조약 이후 아라곤으로 반환될 때까지 아르보레아의 손에 남아 있었다. 1391년 이 도시는 다시 아라곤에 반란을 일으켰고, 브란칼레오네 도리아가 이끄는 재판관의 군대를 환영했다. 1409년 여름 이베리아인에게 점령되었다.[6]

1436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는 봉토로서 엘레오노라 카로즈에게 5,000 플로린을 지불했지만, 몸값을 지불한 후 빌라 디 키에사는 1450년에 왕립 도시의 지위를 회복했다.

3. 3. 근현대

1720년, 거의 400년간 이어진 아라곤-스페인 통치가 끝나고 이글레시아스는 사르데냐의 다른 지역과 함께 사보이 왕가에 넘어갔다. 19세기 중반, 인근 광산들이 다시 문을 열면서 이글레시아스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했다. 사르데냐의 다른 지역과 이탈리아 북부에서 많은 광부, 노동자, 기술자들이 이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인구는 1850년대 5,000~6,000명에서 20세기 초에는 약 20,000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르데냐 광산 부문은 위기를 겪었고, 그 여파는 이글레시엔테의 광산과 이글레시아스 마을에도 영향을 미쳤다.

A building with graffiti
라 마르모라 광장


Narrow city street
마테오티 거리


See caption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들


Six women in headdresses resembling nuns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

4. 인구

연도인구
18614951
18717222
188110679
190118879
191120505
192118878
193122335
193620685
195126146
196128004
197128081
198130118
199130134
200128170



2015년 12월 31일 기준, 이글레시아스에는 418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장 큰 이민자 집단은 루마니아, 세네갈중국에서 왔다.[7] 이 도시의 인구는 압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

1948년에서 1955년경 몬테포니 광산에서 솟아오르는 증기

5. 경제

이글레시아스의 경제는 주로 광물 자원에 집중되어 쇠퇴와 번영을 반복해 왔다. 21세기에는 채굴 활동이 거의 없어지면서, 중세 시대의 퍼레이드, 궁수 토너먼트, 살아있는 체스 게임을 통해 중세 관광을 강조하려 노력하고 있다.

6. 명소

이글레시아스에는 중세 시대 유적, 종교 건축물, 광산 유적, 박물관, 자연 명소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중세 유적으로는 13세기 후반에 건설된 살바테라 성과 피사 공화국 시대의 성벽이 남아있다. 살바테라 성은 도시와 주변 은광을 감시하는 요새였으며, 성벽은 도시를 둘러싸고 4개의 관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었다.[1]
종교 건축물로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 산 프란체스코 성당, 산타 마리아 디 발베르데 성당 등 다양한 시대와 양식의 성당들이 있다. 산타 키아라 대성당은 여러 차례 변형되었으며, 특히 19세기에 변화가 컸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은 16세기에 예배당과 성가대석이 추가되었고, 산타 마리아 디 발베르데 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 고딕 건축 특징을 더했다.[8]
광산 유적으로는 몬테포니 광산과 포르토 플라비아 항구가 대표적이다. 몬테포니 광산은 19세기 중반부터 채광 작업이 활발했던 곳으로, 현재는 노동자 마을과 4층 규모의 정착지가 남아있다.[2] 포르토 플라비아는 광석 운송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1920년대에 건설된 혁신적인 항구로, 바다 위 높은 곳에 아치와 탑이 있는 입구가 특징이다.[1]
박물관으로는 조르지오 아스프로니 광업 연구소 지하에 설립된 광부 박물관역사 아카이브[1], 광물 박물관[4] 등이 있다.
자연 명소로는 1952년 발견된 산타 키아라 동굴[3]과 다양한 해변과 만이 있는 해안 지역이 있다. 특히 판 디 주케로(설탕빵 섬)는 높이 133m의 인상적인 섬이다.[1]

이글레시아스의 해안 지역(시내 중심에서 8km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만과 해변이 있다(북쪽에서 남쪽 순):

이름설명
칼라 도메스티카스페인식 탑이 있음
수 포루(Su Forru)동굴
포르투 시우스치아우(Portu Sciusciau) 해안최대 100m 높이의 절벽
점다랑어 동굴
푼타 코르 에 코르티(Punta Corr'e Corti) 해안최대 103m 높이의 절벽
포르토 디 카날 그란데(Porto di Canal Grande) 해안
사르디냐(Sardigna) 동굴사르데냐 모양의 작은 동굴
푼타 세다 e 루아스(Punta Sedda e Luas) 해안최대 115m 높이의 절벽
스키나 e 몬티 나이(Schina e Monti Nai) 해안최대 162m 높이의 절벽
푼타 부치오네(Punta Buccione) 해안최대 167m 높이의 절벽 (푼타 부치오니(Punta Buccioni)라고도 함)
판 디 주케로높이 133m의 섬 (설탕빵 섬)
포르토 베가 사 카나(Porto Bega Sa Canna)갈대 계곡 항구
마수아해변
포르투 카울리(Portu Cauli) 해변
푼타 코랄로(Punta Corallo)의 만산호 곶
포르투 페루(Portu Ferru) 해안
포르투 브룬쿠 코베르투(Portu Bruncu Cobertu) 해안
포르투 반다(Portu Banda) 해안
포르토 기아노(Porto Ghiano) 해안
네비다 해안
사구스테리(S'Agusteri) 섬높이 35m, 바다가재 어업 지역
포르투 라파(Portu Raffa) 만
포르토 플라비아



칼라 도메스티카


판 디 주케로


마수아

6. 1. 중세 유적

살바테라 성은 1258년 우골리노 델라 게라데스카(Ugolino della Gherardesca) 시대 이후 도시화의 일환으로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성은 도시와 은광까지 주변 지역을 감시하는 요새로 설계되었다.[1]

1297년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아라곤 왕관에 의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1324년까지 점령되지 않았다. 산 구안티노 성은 살바테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지위를 변경했다. 1325년의 석비에는 이를 'castris regalis', 즉 왕실 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

사각형 성의 북쪽과 동쪽 면은 석재와 벽돌을 번갈아 가며 쌓아 올렸으며, 이는 원래 중세 시대의 계획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며 견고함을 더한다. 이 성에는 처음에는 산 구안티노에게, 나중에는 바르셀로나의 에울랄리아에게 헌정된 예배당이 있었다. 성의 우물은 내부 안뜰에서 재건되었다.[1]

좁고 굽은 거리를 따라 늘어선 벽과 탑
도시 성벽


피사 성벽은 도시의 불규칙한 윤곽을 따라 살바테라 성과 함께 경사를 이용하여 도시의 역사적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다. 도시의 확장으로 인해 성벽의 여러 부분이 개인 주택으로 편입되었지만, 그 잔해는 중세 군사 요새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수평으로 배열된 다양한 돌로 만들어져 공격에 저항하는 불규칙한 덩어리를 형성하는 맹목적인 정면. 23개의 탑이 있는 성벽은 포르타 마에스트라, 포르타 카스텔로, 포르타 산트 안토니오, 포르타 누오바의 4개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1]

6. 2. 종교 건축물

도나티코 델라 게라데스카 가문이 주도한 인구 및 도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산타 키아라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이 대성당은 다양한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수 세기에 걸쳐 여러 통치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변형되었는데, 특히 19세기에 변화가 컸다. 대성당의 정면은 박공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출입구 상부의 아치트레이브 수준에서 수평 몰딩된 처마 돌림띠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여섯 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는 넓은 네이브가 있으며, 조각된 주두가 있는 기둥이 지지하는 교차 볼트 지붕이 있다. 대성당의 종탑에는 1337년 제작된 안드레아 피사노의 청동 종이 있으며, 1862년에 탑을 석고로 덮고 첨탑을 추가했다. 성 미술관은 대성당의 지하실에 있다. 20세기 말에 이 교회는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으며, 2013년까지 지속되었다. 복원 작업 동안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 타일과 19세기 제단이 제거되었다.[8]

산 프란체스코 성당은 부드러운 석조로 된 박공형 파사드를 가지고 있으며, 중앙의 문 위에는 장미 창이 있고 양쪽에는 두 개의 측면 안구창이 있다. 나무 천장으로 된 성당의 본당은 7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으며, 7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16세기에 추가되었다. 예배당은 모두 단순한 십자형 아치형 천장(매달린 펜던트에서 만남)을 가지고 있으며, 십자가 예배당은 예외이다. 석조 성가대석은 20세기 초에 철거된 원래의 나무 성가대석을 대체했다. 이 교회에는 대리석 세례반과 예배당의 예술 작품들이 있으며, 여기에는 안티오코 마이나스(Antioco Mainas)의 레타블로가 포함되어 있다.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포함한 수도원은 16세기에 교회에 부속되었다.

산타 마리아 디 발베르데 성당은 도시 성벽 밖에 위치하며, 성당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져 유사한 양식과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성당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 고딕 건축 특징을 더했다. 이 성당의 정면은 20세기까지 보존 및 복원 공사를 거쳤다. 분홍색 트라키테 전돌로 지어진 건물은 수평 몰딩된 코니스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본당은 원래 더 낮은 나무 지붕으로 되어 있었으며, 4개의 펜던트가 있는 크고 사각형의 십자형 볼트 제단으로 끝난다. 다른 펜던트보다 큰 중앙 펜던트에는 성모자상이 묘사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 데레 그라치에 성당은 12세기와 13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처음에는 칼리아리 순교자 성 사투르노에게 봉헌되었다. 건물을 변경한 공동체의 흔적은 정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중앙에 위치해 있다. 교회의 본당은 뾰족한 트라키테 아치로 6개의 만(bay)으로 나뉘며, 노출된 보가 있는 나무 볼트를 지지한다. 두꺼운 외벽의 개구부는 예배당을 모방했다. 사제단 양쪽에는 두 개의 예배당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 성심에게, 다른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되었다.

아라곤 시대에 건축된 이 교회는 산토 몬테 성모회의 대(大) 형제회와 관련이 있다. 정면을 세속적인 건물과 구별짓는 유일한 특징은 원형 창과 몰딩된 아치형 상인방이다. 내부는 작은 홀과 본당으로, 뾰족한 아치로 두 개의 만(bay)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제단의 중앙에는 최후의 만찬의 부조로 장식된 석조 제단이 있고, 그 뒤에는 성 미카엘 상이 있는 벽감이 있다. 1727년에 지어진 묵주기도의 신비를 위한 예배당에는 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행렬 조각상이 있다. 대접에 물고기 4마리가 조각된 석조 세례반은 16세기 또는 17세기에 만들어졌다.

산타 루치아 교회 근처에 지어진 산 조세페 성당은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부속 병원이 있었다. 산타 루치아가 사용되지 않게 되자, 산 조세페 성당이 산타 루치아 형제단(이후 이름을 변경)의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 단순한 정면은 박공으로 덮여 있으며, 중앙의 눈에는 성 요셉과 예수 아기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색유리가 있다. 본당에는 뾰족한 아치형 천장이 있으며, 사각형 앱스가 있는 사제관에는 교차 돔 천장이 있다. 두 개의 예배당에는 나무로 된 벽감을 포함한 상이 비치되어 있다.

이글레시아스에서 반종교개혁 건축의 유일한 사례인 이 교회의 주요 특징은 내부와 외부의 일치이다. 정면은 흰색 석고와 붉은색 트라키테가 대조를 이룬다. 시계탑 역할을 하는 종탑은 20세기에 재건되었다. 내부는 3개의 측면 예배당과 대리석 장식이 있는 넓은 본당을 갖추고 있다. 예수회 교단이 해산된 후 1774년 이후 추가된 장식적 특징은 교회의 전반적인 절제와 대조를 이루며, 그림은 실제로 20세기 초에 제작되었다. 술치스-이글레시엔테의 성스러운 건축에 관한 전시회가 교회의 지하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이 교회는 자수 기법을 연상시키는 차분하고 장식적인 정면으로 독특함을 자랑한다. 코린트식 기둥과 Cannavera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아키트레이브로 둘러싸인 출입구는 고딕-카탈루냐 양식이다. 본당은 아치형 천장으로, 뾰족한 아치로 4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양쪽에는 각각 두 개의 예배당이 있으며, 이 예배당은 공사를 지원한 기업에 헌정되었다. 1910년에 추가된 예배당은 노출된 암석을 드러내면서 원래 건물과 차이를 보인다. 네 개의 기념 명판 중에는 교회를 건축한 니콜로 카나베라 주교에게 헌정된 명판도 있다.

산 마르첼로 성당은 19세기 말까지 산 마르첼로 형제단의 본부였으며,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 인접해 있었으나 초등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전되었다. 재건축 프로젝트는 1901년 엔지니어 루이지 데그로시가 계획했으며, 내부 바닥을 위한 슬레이트 판을 포함하여 원래 성당에서 회수한 자재를 사용했다. 붉은색 경사형 네오 고딕 양식의 정면, 뾰족 아치가 있는 출입구가 원래 건물의 유일한 잔해이다. 아치의 꼭대기에는 그리스 정교 십자가가 위에 있는 장미 창을 가리키고 있으며, 정면 상단에는 주교 궁전 창문과 동일한 작은 고딕 아치 모티프가 있다.

성 안토니오 아보트 교회는 이글레시아스 마을 건설 이전(1258년 이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체리 계곡 근처 언덕에 위치한 이 교회는 작은 마을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여러 차례 재건축을 거친 이 건물은 비잔틴 양식의 박공 지붕을 가진 단순한 정면을 가지고 있다. 현재 성구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교회의 정면은 교회의 연대를 보여주며, 인접한 건물들은 원래 건물의 세 개의 예배당 중 하나를 흡수했다. 내부는 비교적 작은 사각형 방으로, 네 개의 뾰족 아치가 네 개의 만(bay)을 표시하고 있으며, 큰 말굽 모양의 앱스(apse)로 끝난다.

생 살바토레 교회는 도시가 건설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도시 성벽 외부에 위치해 있다. 이티레두의 산타 크로체 교회와 비교해 보면 9세기 또는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회는 성장하는 정착지 근처에 지어진 십자형 평면의 중간 규모 교회들의 구조적 배치를 따른다. 단순한 건물은 경사진 정면을 가지고 있으며, 아치형 출입구가 지배적이며, 여기서 무게가 외부 벽으로 분산된다. 본당은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고대 앱스를 따라 창문에서 끝난다.

6. 3. 광산 유적

조르지오 아스프로니 광업 연구소 지하에 1998년 설립된 박물관에는 축척 모형, 광산 관련 신문 기사,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굴착, 시추, 운송 기계와 현대식 기계 공장이 재현되어 있으며, 건물 아래 터널에서는 광산 작업 환경을 볼 수 있다.

포르토 플라비아 항구는 사르데냐 광산 건설의 혁신적인 장소이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벨기에의 비에유 몽타뉴 회사는 엔지니어 체사레 베첼리에게 광석 운송 비용 절감 계획을 맡겼다. 산을 관통하는 600m 길이의 터널은 바다 위 높은 곳에서 "포르토 플라비아"라는 비문이 새겨진 아치와 탑이 있는 입구로 이어진다. 자연 동굴을 확장하여 9개의 광석 저장소를 만들었고, 이 저장소는 작은 섬인 판 디 주케로(설탕빵) 맞은편 두 개의 터널로 연결된다.[1]

붉은색 바위의 넓은 지대
몬테포니


몬테포니 지역의 채광 시작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1324년 피사 출신 상인 베르토 다 산 미니아토의 유언장에 언급되었다. 1850년까지 채광 작업이 반복되다가, 리구리아 출신 파올로 안토니오 니콜라이가 이끄는 투자자들이 몬테포니 회사를 설립하여 30년 채광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4층 규모의 정착지는 노동자 마을이었다. 2008년 건축가 헤르초크 & 드 뫼롱은 이 산업 지역을 관광 및 문화 시설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2]

6. 4. 기타

이글레시아스에는 여러 박물관, 역사 유적, 묘지, 동굴 등이 있다.

  • 광부 박물관: 1998년 광부들의 뜻으로 설립되었다. 조르지오 아스프로니 광업 연구소 지하에 위치하며, 광산 관련 유물과 재현 공간을 갖추고 있다.
  • 역사 아카이브: 카탈루냐-아라곤, 스페인, 사보이 시대부터 빌라 디 키에사(이글레시아스의 옛 이름)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1327년 양피지에 고딕 문자와 피사 방언으로 작성된 법전 ''일 브레베 디 빌라 디 키에사''가 대표적이다.[1]
    오래된 법전
    빌라 디 키에사 법전
  • 묘지: 카푸치니 가와 수 파르두 사이 지역에 있으며, 중앙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절충주의적인 장례 석, 항아리, 부엉이, 천사 조각 등이 특징이며, 주세페 사르토리오의 조각품도 있다.[2]
  • 산타 키아라 동굴: 1952년 발견되었으며, 실루리아기 시대(4억 4400만 년에서 4억 1600만 년 전)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다양한 형태의 아라고나이트 기둥, 석회질 형성물, 연못 등이 있다.[3]
  • 광물 박물관: 1871년 건립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수집된 광물 표본과 광산 도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채굴된 희귀 광물 컬렉션이 유명하다. 아르 누보 양식의 진열장이 특징이다.[4]

6. 5. 해안

이글레시아스의 해안 지역 (시내 중심에서 8km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만과 해변이 있다(북쪽에서 남쪽 순):

이름설명
칼라 도메스티카스페인식 탑이 있음
수 포루(Su Forru)동굴
포르투 시우스치아우(Portu Sciusciau) 해안최대 100m 높이의 절벽
점다랑어 동굴
푼타 코르 에 코르티(Punta Corr'e Corti) 해안최대 103m 높이의 절벽
포르토 디 카날 그란데(Porto di Canal Grande) 해안
사르디냐(Sardigna) 동굴사르데냐 모양의 작은 동굴
푼타 세다 e 루아스(Punta Sedda e Luas) 해안최대 115m 높이의 절벽
스키나 e 몬티 나이(Schina e Monti Nai) 해안최대 162m 높이의 절벽
푼타 부치오네(Punta Buccione) 해안최대 167m 높이의 절벽 (푼타 부치오니(Punta Buccioni)라고도 함)
판 디 주케로높이 133m의 섬 (설탕빵 섬)
포르토 베가 사 카나(Porto Bega Sa Canna)갈대 계곡 항구
마수아해변
포르투 카울리(Portu Cauli) 해변
푼타 코랄로(Punta Corallo)의 만산호 곶
포르투 페루(Portu Ferru) 해안
포르투 브룬쿠 코베르투(Portu Bruncu Cobertu) 해안
포르투 반다(Portu Banda) 해안
포르토 기아노(Porto Ghiano) 해안
네비다 해안
사구스테리(S'Agusteri) 섬높이 35m, 바다가재 어업 지역
포르투 라파(Portu Raffa) 만
포르토 플라비아



7. 국제 관계

이글레시아스는 2002년부터 독일의 오버하우젠과, 2009년부터 피사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8. 행정

이글레시아스에는 다음과 같은 분리 집락(프라치오네)이 있다.

프라치오네
바레가 에 코롱지우 에 타니 (카르보니아 시와 공유)
빈두아
마수아
몬테 아그룩시아우
몬테포니
네비다
산 베네데토
산 조반니 미네라


참조

[1] 간행물 All demographics and other statistics from the Italian statistical institute Italian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ISTAT
[2] 서적 Dizionario di toponomastica. Storia e significato dei nomi geografici italiani GARZANTI 1996
[3] 문서 La collezione Pistis-Corsi ed il patrimonio archeologico del Comune di Iglesias
[4] 서적 Storia medievale p.471
[5] 서적 I codici minerari nell’Europa preindustriale: archeologia e storia p.46
[6] 웹사이트 Il medioevo di Villa di Chiesa: appunti di storia e archeologia https://www.academia[...]
[7] 웹사이트 Cittadini Stranieri. Popolazione residente e bilancio demografico al 31 dicembre 2015 http://demo.istat.it[...]
[8] 웹사이트 Iglesias, la "guerra della cattedrale" divampa su Facebook https://www.sardinia[...] 2013-03-25
[9] 웹사이트 Climatology of Sardinia for the thirty-year period 1981-2010 https://www.snpambie[...] Sistema nazionale protezione ambiente 2024-11-27
[10] 웹사이트 Tavola: Popolazione residente - Cagliari (dettaglio loc. abitat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3-04-06
[11] 웹사이트 Tavola: Superficie territoriale (Kmq) - Cagliari (dettaglio comunal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3-04-06
[12] 웹사이트 Total Resident Population on 1st January 2019 by sex and marital status http://demo.istat.it[...] 20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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