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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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모자상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예술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중세 이탈리아어 "마돈나"에서 유래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사 용어로 정착되었다. 성모자상은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성모 마리아가 혼자 서 있거나, 아기 예수를 안고 있거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 등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이러한 묘사 방식은 비잔틴 미술에서 시작되어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발전했다. 이슬람에서도 마리아는 존경받는 인물로 묘사되며, 주요 작품으로는 에센의 황금 마돈나, 체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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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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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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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종류 | 기독교 미술, 회화, 조각 |
주제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
설명 | 성모자(聖母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함께 묘사한 기독교 미술의 주제이다. 성모자상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미지 중 하나이며, 회화, 조각, 모자이크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왔다. |
역사 | |
기원 | 성모자상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카타콤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 성모자상은 주로 동방 기독교에서 발전하였으며,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아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다. |
발전 |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성모자상은 서방 기독교 세계에서도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는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성모자상을 제작하였으며, 이들은 성모 마리아의 인간적인 면모와 모성애를 강조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자상은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특징 | |
일반적인 묘사 | 성모자상은 일반적으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거나 무릎에 앉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성모 마리아는 보통 푸른색 망토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후광이 그려져 있다. 아기 예수는 벌거벗은 모습이거나 흰색 옷을 입고 있으며,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거나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다양한 표현 | 성모자상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함께 놀고 있는 모습,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 등 다양한 장면이 묘사될 수 있다. 또한, 성모자상은 성인이나 천사 등 다른 인물들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 |
예술적 가치 | |
종교적 의미 | 성모자상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성모자상은 성모 마리아의 모성애와 헌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
문화적 영향 | 성모자상은 서양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모자상은 미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영감을 주었으며, 많은 예술가들이 성모자상을 주제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또한, 성모자상은 서양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
2. 용어
마리아를 강력한 중재자로 묘사하는 전례 (예: ''아카티스트'')는 8세기에 그리스에서 라틴 전통으로 유입되었다. 그리스어 칭호 Δεσποινα (''데스포이나'')는 라틴어 ''도미나'' ("여주인")로 채택되었다. 중세 이탈리아어 ''마 돈나'' maˈdɔnna|마돈나it ("나의 여주인")은 ''메아 도미나''를 반영하며, ''노스트라 도미나'' (δεσποινίς ἡμῶν)는 프랑스어에서 ''노스트르 담'' ("우리 여인")으로 채택되었다.[4]
성모 마리아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요 유형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이름들은 성모 숭배의 중요성 증가와 중세 후기에 마리아 헌신을 위한 예술의 두드러짐을 나타낸다. 마돈나는 순결이나 처녀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신학적 개념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그녀의 의복 색상으로도 표현되었다. 파란색은 순결, 처녀성, 왕족을 상징했다.[7][8]
이탈리아어 용어 ''마돈나''는 중세 후기 마리아 헌신에서 영어 ''우리 여인''과 유사했지만, 1640년대에 미술사 용어로 영어에 유입되어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리아 예술을 지칭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돈나" 또는 "아기와 함께 있는 마돈나"는 특정 예술 작품, 역사적으로 대부분 이탈리아 작품에 사용된다. "마돈나"는 "성모" 또는 "우리 여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마돈나"는 일반적으로 동방 작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의 테오토코스''는 영어로 "블라디미르의 우리 여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블라디미르의 마돈나"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9]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모자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성모 마리아의 이콘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굳이 "성모자"라고 칭할 필요가 없다. 이콘의 명칭은 주로 "생신녀" 혹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3. 표현 방식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모자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생신녀" 혹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성모 마리아의 이콘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Ιησούς Χριστός|예수스 흐리스토스el)도 함께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3. 0. 1. 겸손의 성모
프란치스코회의 경건함에서 비롯된[11][12] 겸손의 성모는 성모 마리아가 땅에 앉아 있거나 낮은 쿠션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기도 하다.[10] 시모네 마르티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양식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1375년경에는 스페인, 프랑스, 독일에서도 겸손의 성모 도상이 나타났으며, 초기 트레첸토 예술 시대에 가장 널리 유행하였다.[13]
3. 0. 2. 반신상
반신상 성모는 동방 정교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형태이며, 각 그림이 "하느님의 어머니"의 특정 속성을 표현할 정도로 주제가 매우 공식화되어 있다.[10] ''성모자와 아기''의 반신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서도 흔하며, 특히 베네치아에서 많이 사용된다.
3. 0. 3. 수유하는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리타의 성모와 같이, 수유하는 성모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모자와 아기의 도상학이다.
4. 역사
성모자상의 가장 초기 묘사는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 벽화로 추정되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기는 고개를 돌려 관람자를 바라본다.[15]
성상 파괴 경향에도 불구하고, 성모와 아기 예수의 초기 묘사는 동로마 제국에서 발전했다. 반복되는 이미지는 성상으로 불렸으며, 536년 교황 아가피토는 "테오토코스" 경배와 교회 내 이미지 묘사를 반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16] 동방의 예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안고 닫힌 비잔틴 진주 장식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17]
서방에서는 초기 중세 시대에 비잔틴 양식을 따랐지만, 12세기와 13세기에 성모 숭배가 중요해지면서 더욱 개인적인 신앙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유형이 발전했다. 고딕 및 르네상스 시대에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초기 묘사에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있고 아기는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기도 한다. ''세지올라의 성모''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껴안고, 세례자 요한이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기 고딕 양식의 성모자상 조각은 팔에 아기를 안고 서 있는 성모를 보여준다. 도상학은 공공 이미지와 개인 헌신을 위한 소규모 이미지 사이에서 다양했다. 아기에게 수유하는 성모 (''리타의 성모'' 등)는 주로 개인 헌신 성상에 국한되었다.[15]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도시 건물 외부나 도로변의 작은 울타리 안에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설치하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조각상을 '하우스마돈나'라고 부르는데, 일부는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며 오늘날에도 제작되고 있다. 마인츠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200개 이상의 하우스마돈나가 있었다고 한다.[23] 이탈리아에서는 '길가의 성모 마리아'가 건물 옆이나 도로변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흔히 발견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위안을 준다.[25]
1920년대에 미국 독립 혁명 딸들은 구 국도와 산타페 트레일의 경로를 표시하면서 해안에서 해안까지 '길 위의 성모' 조각상을 설치했다.[27]
레이 마틴 아베이타는 쿠스코 양식의 성모 마리아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유럽인과 메소아메리카인 사이의 만남을 나타내는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라틴계 주제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했다.[28][29]
2015년, 도상학자 마크 듀크스는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일어난 마이클 브라운 총격 사건과 관련하여 성모 마리아와 아기를 묘사한 아이콘 퍼거슨의 성모를 제작했다.[30]
4. 1. 초기
성모자와 아기 예수의 가장 초창기 묘사는 로마의 프리실라 카타콤 벽화로 추정되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때 아기는 고개를 돌려 관람자를 바라본다.[15]성모와 아기 예수의 초기 묘사는 성상 파괴 경향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에서 발전했다. 반복되는 이미지는 성상으로 불렸으며, 536년 교황 아가피토는 "테오토코스" 경배와 교회 내 이미지 묘사를 반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16] 동방의 예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안고 닫힌 비잔틴 진주 장식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17]
서방에서는 초기 중세 시대에 비잔틴 양식을 따랐지만, 12세기와 13세기에 성모 숭배가 중요해지면서 다양한 유형이 발전했다. 일반적인 고딕 및 르네상스 공식에서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팔에 안고 있다. 초기 묘사에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있고 아기는 축복을 내릴 수 있다. 15세기 이탈리아 변형에서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기도 한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테오토코스 ("하느님의 어머니") 지위가 확정되면서 마리아 숭배가 크게 확산되었다. 432년부터 440년까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모자이크에는 마리아가 후광을 두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음 세기까지 아기 예수를 안고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의 성상 묘사가 확립되었으며, 이집트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이 시기의 성상을 볼 수 있다. 이 묘사는 마리아의 겸손과 존귀함을 결합하고 있으며, 위에는 신의 손이 있고 대천사들이 이를 바라본다. 초기 여왕으로서의 성모상은 로마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에 있으며, 705~707년으로 추정된다. 6~8세기 로마의 성모자상은 이 시기 묘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18]
이 시기에 성상학은 동방 정교회에서 유지되고, 서구의 묘사가 중세 성기까지 기반을 둔,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로 서구 교회는 성상학 발전에 어려움을 겪었고, 비잔틴의 발전에 크게 의존했다.
서구 필사본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성모자와 아기 예수 이미지는 약 800년의 켈스 서에서 유래한다.[19] 13세기 성무일도서가 고안되기 전까지 성모의 이미지가 필사본 예술에 대량으로 나타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의 ''겸손의 성모'' (1433년)는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혁신적인 경건한 이미지 중 하나로 여겨진다.[20]
4. 2. 중세
중세 시대 성모자상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인해 육체적인 묘사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성모자상은 성상으로 존경받으며 좁은 범위의 관례화된 유형으로 반복되어 표현되었다.[16] 536년 콘스탄티노폴 방문 중 교황 아가피토는 "테오토코스"(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배와 교회 내 성모자상 묘사를 반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16] 동방의 예시에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안고 닫힌 비잔틴 진주 장식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7]서방에서는 초기 중세 시대에 비잔틴 양식을 따랐지만, 12세기와 13세기에 성모 숭배가 중요해지면서 다양한 유형이 발전했다. 고딕 및 르네상스 시대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초기 묘사에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있고 아기 예수는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기도 한다.

성모 마리아의 초기 이미지는 많지 않지만, 성모자상의 묘사는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전역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영향을 준 고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에서 제작된 비잔틴 미술의 이콘은 이탈리아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틴 제국은 고대 로마로 여겨졌으며, 이탈리아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보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 후반에는 크레타 미술 학교가 서방 세계 이콘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비잔틴 이미지는 이탈리아로 유입되었으며,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잔틴에서 마리아는 테오토코스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렸으며, 구원은 하느님의 성육신 순간에 전달된다고 믿었다. 이 신학적 개념은 아들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이미지로 시각화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가장 초기의 독립적인 이미지는 로마에서 발견된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과 판테온에 있는 이미지는 비잔틴 전통을 연상시키며, 나무 패널에 템페라로 그려졌다. 이들은 주로 7세기와 8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12, 13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패널화가 부활하면서 성모자상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탁발 수도회 회원들이 이 주제를 묘사한 패널을 의뢰했으며, 이러한 작품들은 수도원, 교구 교회, 가정에서 인기를 얻었다. 성모자상의 일부는 평신도 단체에서 비용을 지불했으며, 이는 헌신의 한 형태였다.
두초는 루첼라이 성모자상(1285년경)과 ''마에스타''(1308-1311) 등 웅장한 성모자상을 제작했다. 런던 국립 미술관에는 아들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작고 겸손한 규모의 이미지가 있는데, 이는 개인적인 헌신을 위해 만들어졌다.
13, 14세기의 성모자상 화가들은 초기 그림적 관례를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마리아는 진한 파란색 망토를 붉은 옷 위에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은 기도의 도관 역할을 했다. 후기 중세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발전시켰으며, 때로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사이의 복잡한 유대를 친밀한 순간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는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벽화 장식에도 나타나며, 조각 형태로도 발견된다. 파두아의 아레나 예배당에 있는 조토의 서사 주기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15세기 이후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13, 14세기에 확립된 전통을 바탕으로 성모 마리아를 묘사했다.
4. 3. 르네상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인 고딕 및 르네상스 공식이었다. 초기 묘사에서는 성모가 보좌에 앉아 있고 아기는 의식을 갖고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15세기 이탈리아 변형에서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지켜보기도 한다. 소위 ''세지올라의 성모''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껴안고, 세례자 요한이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15]후기 고딕 양식의 성모자와 아기 예수 조각상은 팔에 아기를 안고 서 있는 성모를 보여줄 수 있다. 도상학은 공공 이미지와 작은 규모로 제공되어 개인적인 헌신을 위한 개인 이미지 사이에서 다양했다. 아기에게 수유하는 성모 (예: ''리타의 성모'')는 주로 개인 헌신 성상에 국한된 이미지이다.
12, 13세기 이탈리아에서 기념비적인 패널화가 부활하면서 성모자상은 로마 외 지역, 특히 토스카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탁발 수도회 회원들이 이 주제를 묘사한 패널을 처음 의뢰한 사람들 중 일부였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수도원, 교구 교회, 가정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성모자상의 일부는 'confraternities'라고 불리는 평신도 단체에서 비용을 지불했는데, 그들은 그곳의 예배당에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한 작품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헌신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었다.[16] 그 비용은 패널의 페인트가 칠해지지 않은 모든 부분에 얇은 실제 금박을 사용하여 나타났는데, 이는 중세 금세공인들이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했던 값비싼 덮개와 시각적으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유등과 촛불의 조명으로 성모자상 주변을 감싸는 수단이기도 했다. 더욱 귀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된 청금석으로 채색된 밝은 파란색 망토였다.[17]
두초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라우데시를 위해 가장 유명하고 혁신적이며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를 제작했다. 종종 ''루첼라이 성모자상''(1285년경)으로 불리는 이 패널화는 보는 사람 위로 솟아올라, 라우데시 형제단의 회원들이 이미지를 찬양하며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 앞에 모일 시각적 초점을 제공한다. 두초는 고향인 시에나 대성당의 고제단을 위해 더욱 웅장한 옥좌의 성모자상을 만들었다. ''마에스타''(1308-1311)로 알려진 이 이미지는 복잡하게 조각된 작품의 중앙 부분에서 빽빽하게 채워진 궁정의 중심으로서, 서사적 장면과 예언자 및 성인의 입상으로 구성된 프레델라(제단화 받침대) 위에 궁정을 들어 올린다. 런던 국립 미술관에는 아들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작고 겸손한 규모의 반신상 이미지가 있으며, 이 묘사는 기억에 남을 만큼 친밀하다. 이것은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예술가 중 한 명을 고용할 만큼 충분히 부유한 기독교인의 개인적인 헌신을 위해 만들어졌다.[21]
특권층 소유주는 기도를 하거나 구원을 간청하기 위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나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사적인 계시 행위로 성합 덮개를 여는 것뿐이었다. 두초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전통의 권위에 연결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던 초기 그림적 관례를 물려받았다.
13, 14세기의 성모자상 화가들의 모든 혁신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보통 그녀의 복장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갓 태어난 아이의 젊은 어머니로 묘사될 때, 그녀는 진한 파란색 망토를 붉은 옷 위에 입고 있다. 이 망토는 일반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덮고 있으며, 때로는 린넨 또는 나중에 투명한 실크 베일을 볼 수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아기, 즉 아기 예수를 안고 있으며, 그는 그녀의 후광과 그녀의 위엄 있는 태도를 공유한다. 종종 그녀의 시선은 관람자를 향하고, 기독교인으로부터 그녀에게, 그리고 나서 그녀의 아들에게 흘러가는 기도의 도관 역할을 한다. 그러나 후기 중세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비잔틴 아이콘 페인팅의 경향을 따라,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때로는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작은 아이 사이의 복잡한 유대는 슬픔에 잠긴 친밀한 순간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녀는 그에게만 시선을 둔다.
15세기와 16세기는 이탈리아 화가들이 역사적 사건, 독립적인 초상화, 신화적 주제로 레퍼토리를 확장한 시기였지만, 기독교는 그들의 경력에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종교적이다. 종교적 주제의 범위는 구약 성서의 주제와 성경이 정식화된 이후에 숭배가 시작된 성인들의 이미지를 포함했지만, 성모자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도상학에서 지배적인 주제로 남았다.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가장 유명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조르조네, 조반니 벨리니, 티치아노 등이 있다. 그들은 특히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만테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포함한 수많은 15세기 마리아상들의 토대 위에 발전했다. 이 주제는 초기 네덜란드 회화와 나머지 북유럽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기가 있었다.
이 모든 화가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주제는 모성애였으며, 비록 다른 주제들, 특히 수태고지, 그리고 나중에는 원죄 없는 잉태가 아들과 함께 있지 않은 마리아만을 묘사하는 더 많은 그림으로 이어졌지만, 말이다. 기념 이미지로서, ''피에타''는 북유럽의 대중적인 숭배 조각상의 산물인 서사적 순환에서 벗어나 새롭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마리아는 연민, 슬픔, 사랑을 표현하며,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하고 초기의 작품이 애도의 흔적을 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매우 강렬하고 감정적인 예술 작품으로 표현된다. 평범한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느낄 수 있는 부드러움이 포착되어, 그녀가 갓 태어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안았을 때의 순간을 연상시킨다. 결국, 관람자는 공감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절망을 함께 나누도록 의도되었다.
4. 4. 근현대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팔에 안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세지올라의 성모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껴안고, 세례자 요한이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기 고딕 양식의 성모자상 조각은 팔에 아기를 안고 서 있는 성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도상학은 공공 이미지와 개인 헌신을 위한 작은 규모의 이미지 사이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기에게 수유하는 성모 (예: 리타의 성모)는 주로 개인 헌신 성상에 국한된 이미지이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도시 건물 외부나 도로변의 작은 울타리 안에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설치하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건물 외부에 설치된 이러한 조각상을 '하우스마돈나'라고 부르는데, 일부는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며 오늘날에도 제작되고 있다. 마인츠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200개 이상의 하우스마돈나가 있었다고 한다.[23] 이탈리아에서는 '길가의 성모 마리아'가 건물 옆이나 도로변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흔히 발견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한다.[25]
1920년대에 미국 독립 혁명 딸들은 구 국도와 산타페 트레일의 경로를 표시하면서 해안에서 해안까지 '길 위의 성모'라고 불리는 조각상을 설치했다.[27]
화가 레이 마틴 아베이타는 쿠스코 양식의 성모 마리아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유럽인과 메소아메리카인 사이의 만남을 나타내는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라틴계 주제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했다.[28][29]
2015년, 도상학자 마크 듀크스는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일어난 마이클 브라운 총격 사건과 관련하여 성모 마리아와 아기를 묘사한 아이콘 퍼거슨의 성모를 제작했다.[30]
5. 이슬람에서의 관점
이슬람에서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 대한 관점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메카 정복 당시의 사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629년, 무함마드는 무슬림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정복한 후 카바 신전 내부의 이슬람 이전의 이교도 이미지와 우상을 제거하는 "정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븐 이샤크와 알-아즈라키의 기록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마리아와 예수의 그림, 그리고 아브라함의 프레스코화는 손으로 보호하며 훼손하지 않았다고 한다.[31][32] 바나비 로거슨은 "무함마드는 성모와 아기의 성상과 아브라함의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그 외에는 그의 동료들이 헌물, 제사 도구, 조상, 걸린 부적 등 잡다한 물건들을 내부에서 치웠다"라고 설명한다.[33]
이슬람 학자 마틴 링스는 자신의 저서 예언자 전기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성소를 존경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환영받았다. 한 기독교인은 카바 안쪽 벽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성상을 그리는 것을 허락받았고, 이는 다른 그림들과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쿠라이쉬는 이러한 대조에 둔감했고, 그들에게는 단지 우상의 수를 늘리는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들의 관용은 그들을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성상과 아브라함이라고 전해지는 노인의 그림을 제외하고는 내부 벽이 이교 신들의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예언자는 성상을 손으로 보호하며 우트만에게 아브라함의 그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그림을 지우라고 말했다."[34]
6. 주요 작품
- 에센의 황금 마돈나: 서유럽에서 가장 초기의 대규모 조각 작품이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프랑스에서 다색 나무 행렬 조각의 선례이며, 지혜의 왕좌라고 알려진 유형이다.
- 겸손의 마돈나: 땅이나 낮은 쿠션에 앉아 있는 마돈나를 묘사한다.
- 마돈나와 아기: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그림, 1300년경 제작.
- 체스토호바의 검은 성모(''Czarna Madonna'' 또는 폴란드어로 ''Matka Boska Częstochowska''): 전설에 따르면 성 요한 복음사가가 성가족의 집에서 가져온 사이프러스 탁자 위에 그린 것이다.

- 꽃과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시작한 두 작품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 엘레우사의 마돈나(자애의 마돈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모두에서 묘사되었다.
- 계단의 마돈나: 미켈란젤로의 부조
- 델라 세지올라의 마돈나: 라파엘로
- 목이 긴 마돈나: 파르미지아니노
- 포르트 리가트의 마돈나: 살바도르 달리가 1949년과 1950년에 제작한 두 그림의 이름.
- ''아몬드 모양의 성모'': 볼프강 자우버, 12세기
- ''성모와 천사들'': 두초, 1282년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아마도 초기 크레타 작품, 13세기 또는 14세기. 1499년까지 로마에 있었던 매우 인기 있는 가톨릭 이미지.
- 호데게트리아 형식으로 묘사된 성모와 아기: 기념비적 양식의 모자이크 이콘, 13세기 초. 성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이집트.
- 슈테판 로흐너의 ''장미 정원의 성모'': 1448년
- 롤랭 재상과 성모: 얀 판 에이크, 부르고뉴, c. 1435
- 대공의 성모: 라파엘로, 1505년
- 분홍색 카네이션의 성모: 라파엘로, 아마도 1507년 이전
- 퀸틴 마시스의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와 아기'': c. 1509
- 루카스 크라나흐 (원로)의 ''마리아 힐프'': c. 1530
- 한스 발둥의 ''포도나무 그늘의 성모'': c. 1541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미술관)
- 엘 그레코의 스트라스부르의 성모 마리아: c. 1600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 -]* 사소페라토의 ''기도하는 성모'': 1640–1650. 내셔널 갤러리, 런던.
- ''천사,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펠리체 토렐리, 17세기
- 악숨, 에티오피아에 있는 시온의 성모 마리아 교회의 흑인 성모와 예수의 프레스코화
- 이집트 상아 조각상: 후기 비잔틴 시대에 엘레우사 또는 "자애로운 성모"로 불린 가장 초기의 사례 중 하나이다. 7세기.
- 에센의 황금 성모:
- -]* 프레스비터 마르티누스: ''지혜의 자리''로서의 성모, 이탈리아, 1199년
- ''그라스의 성모'': 툴루즈, circa|1480
- ''검은 성모'': 바르셀로나
- 라파엘로의 묘소에 있는 성모: 판테온, 로마


- 모스크바 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밖에 있는 조각상
- 노트르담 대성당, 오타와, 온타리오, 캐나다의 조각상
- 폴란드 오치에카의 길가 성모상
- 이탈리아 프리울리의 길가 성모상 벽감
- 라 콩키스타도라: 뉴멕시코주 샌타페이, 1625년 이전
- -]* 윌싱엄의 성모 성지, 선한 목자 교회 (로즈몬트, 펜실베이니아)
- 치마부에의 장엄한 성모
- 온니산티의 장엄한 성모
- 장미 정원의 성모
- 보티첼리의 성모자와 천사
- 이집트로의 도피 (코레조)
- 이집트로의 도피 (엘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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