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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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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순신(155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53년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577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1545년) 휘하에서 수군으로 활약하며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옥포 해전, 한산도 해전 등 주요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후 충청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 탄핵을 당하기도 했으며, 1611년 전라 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사망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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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55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순신
한자 표기李純信
로마자 표기I Sunsin
별명입부
시호무의
생애
출생일1554년 1월 30일
출생지경기도 시흥군
사망일1611년 9월 11일
사망지전주
가족 관계
배우자미상
자녀이탁(아들), 이숙(아들)
아버지완원군 이진
어머니안동 김씨 부인
친척이억기(12촌 남동생)
경력
소속조선
복무 기간1578년 ~ 1611년
최종 계급종2품
최종 관직전라도 병마절도사
주요 지휘조선 해군
주요 참전 전투
임진왜란옥포 해전
사천 해전 (1592년)
한산도 대첩
정유재란노량 해전

2. 생애

이순신은 1554년 1월 30일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1577년 무과 시험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 임진왜란 발발 전에는 선전관, 강진현감, 온성 판관, 의주 판관, 혜산첨사, 방답첨사 등을 역임했다.[2][3][1][4]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제독 휘하에서 중위장으로 참전하여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주요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4][5] 충무공 이순신의 추천으로 절충으로 승진하여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엄격한 형벌 적용으로 파직되기도 했다.[4]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후에는 조선 수군을 지휘했다.

전쟁 이후, 명나라 장군 진린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추천했으나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 1599년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지만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파직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부침을 겪었다.[5][7]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완산군에 봉해졌으며,[8][9][10] 1607년에는 완천군으로 봉작이 바뀌었다.[11][12]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의 죽음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610년 전라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1611년 9월 11일 사망했다.

2. 1. 임진왜란 이전

이순신은 1554년 1월 30일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1577년 무과 시험에 급제했다.[1] 선전관을 거쳐 1582년 강진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2] 1585년 호족과의 마찰로 파직되었다.[3] 1586년 김성일의 추천으로 온성 판관이 되었고,[1] 1588년 의주 판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면서 뇌물 요구를 거절하고 사직했다.[3] 이후 여진족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혜산첨사로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4] 1591년 방답첨사로 임명되어 군비를 정비하며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했다.[4]

2. 1. 1. 출생 배경

이순신은 1553년(명종 8) 12월 27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녕대군의 5대손인 완원군 이진(李眞)이고, 어머니는 안동 김씨 성균관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김씨였다.[15] 그는 덕수 이씨인 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학에 힘썼으며, 김성일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지혜와 인격을 길렀다.

2. 1. 2. 관료 생활

1577년(선조 10) 9월 알성별시(謁聖別試) 무과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활쏘기 대회에서 장원하여 북방 방위에 차출되는 것을 면제받았다.[1] 1580년(선조 13)에 탄핵을 받고 선전관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복관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선조 15)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고 이듬해 4월 강진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2] 강진의 지역 호족(豪族)들과 마찰을 빚어 1585년(선조 18)에 파직당하였다.[3]

그 뒤 특별 별명(別命)을 받아 선전관에 복직되어 어전을 호위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의 천거로 1586년(선조 19) 함경도 온성부 판관이 되었다.[1]

1588년(선조 21) 아버지상을 탈상하고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명나라 사신 수행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 사절단의 행차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노자만 주고 모르는 체하자 명나라 사절단이 귀국길에 문책하려 함에 군무를 잠시 떠났다가 탄핵당하여 파직됐다.[3] 1589년(선조 22)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발병하여 적군이 관하(管下)의 운총벽(雲寵壁)을 네 차례나 침입함을 막지 못하여 함경도 조방장 한극성(韓克誠)의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선조가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감율(減律)을 명했다. 전 상사와의 불화로 부하관과 함께 삼수(三水)로 가게 되자 선조는 그를 파직하여 귀양보냈다.[4]

2년 후 일본통신사 일행이 왜구의 변을 고하자 재등용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부임되어 무신끼리의 사보연통(私報緣通)으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戰船) 제작에 자문하였고, 관내의 성지(城池), 기계(機械), 축성과 제작에 전력함으로써 망루(望樓), 주로(舟櫓), 군기영기(軍旗令旗)들이 일제히 정비되었다.[4]

2. 2. 임진왜란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수군 장수였다. 임진왜란 직전, 방답진 첨사로서 이순신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조선 수군을 이끌었다.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은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며 여러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주요 해전과 그 전과는 다음과 같다.

해전전과
옥포 해전적선 50여 척 격파
합포 해전적선 5척 격파
고성 해전적선 13척 격파
노량 해전적선 1척 격파
사천 해전적선 12척 격파
당포 해전적선 20여 척 격파
당항포 해전적선 26척 격파, 포구의 적선 5척 격파, 적장 1명 생포
한산도 대첩견내량의 적선 73척을 한산 앞바다로 유인하여 격멸
가덕도 해전한산도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적선 격침
화존포, 서대포, 서평포, 절영도 해전적선 총 24척 격파
부산 해전적선 500여 척 분진 포위 전멸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공은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기습 공격으로 부하들이 적의 수급을 챙길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충무공 이순신난중일기에 이 점을 안타깝게 기록했다.[4]

2. 2. 1. 전란 초기 활동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이순신은 이순신 제독의 제1차 해전에서 중위장으로 복무했다.[4] 그 이후 그는 항상 전부장으로 최전선에 섰다.[5] 그는 선봉을 이끌고 일본군을 유인했다. 한산도 해전 이후, 이순신 제독은 그의 공로가 인정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정부에 승진을 건의했고, 결국 종3품인 절충으로 승진하여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형벌 적용으로 인해 파직되었고, 고룡진 첨사로 강등되었다.

2. 2. 2. 정유재란

1598년 왜군의 재침이 알려지자 비변사에서 이순신을 유부수군장(留部水軍將)으로 임명하였다.[16]

이순신은 전라도 고령도(高嶺島)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전투 준비를 한 뒤, 흥양(興陽)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특별 승진시켰다.

이후 이순신은 이순신의 지휘 아래 중위장으로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16]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해구(海口)를 수비하는 동안,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行長)는 전라남도 순천(順天)에 성을 쌓고 방어하였다. 고니시는 거제도, 해남, 고성의 패잔병을 이끌고 야습을 감행해 왔다. 이순신 휘하 전군은 총공격을 준비하였고, 이순신은 예비 복병으로서 적의 퇴로를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어영담(魚泳潭), 변흥립(邊興立)의 군사와 함께 적과 대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2. 3. 전란 종결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의 뒤를 이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이순신을 천거했다.[6] 비변사는 이에 동의했으나 대간은 반대했다.[6] 1599년(선조 32) 1월, 이순신은 수사직에서 물러나 포도대장 겸 도총사 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파직되었다.[5][7] 이후 그는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기를 반복했다.

1601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재물을 탐한 죄로 다시 파직되었고, 1602년 창원부사로 부임했다가 도임한지 얼마 뒤인 그해 3월 체임되었다.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8][9]

1604년부터 전라방어사·수원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등을 역임했다. 1606년 수원의 부사로 재직한 후, 1607년(선조 40)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고,[11][12] 이후에는 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09년 (광해군 1) 익사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9월 2일 59세로 별세하여 현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 장사되었다. 인조 때 증 의정부좌찬성추증(追贈)되었으며, 1679년(숙종 6년)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 받았다.

무의공 이순신 묘》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으며, 1987년 9월 10일 광명시의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진완원군
어머니안동 김씨성균관진사 김구수의 딸
부인파평 윤씨우후 윤천수의 딸
장남이탁완흥군
며느리광산 이씨이호문의 딸
차남이숙완산군
며느리성주 배씨배흥립의 딸
손자이광보
손녀의령 남씨 남두명의 처호군
손녀문화 류씨 류린의 처현감
손녀이정관의 처
며느리(측실)미상
서손자이광우
측실미상
서녀남이공의 장첩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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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1553년에 태어난 이순신은 조선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대한민국 해군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 이순신함(SS-68)[19]은 무의공 이순신의 이름을 따 1999년에 취역하였다.

무의공 이순신은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는데, 1580년(선조 13) 선전관에서 파직되었다가 복관되었고, 1585년(선조 18) 강진 지역 호족들과의 마찰로 파직당했다.[18] 1588년(선조 21) 명나라 사절단의 문책으로, 1589년(선조 22) 함경도 혜산진첨사 부임 도중 발병하여 여진족 침입을 막지 못해 문책을 받았다.[18] 1601년 황해도 병마절도사 재직 중 재물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18]조선왕조실록》에는 이순신이 비난을 받아 여러 번 탄핵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8]

4. 1. 잠수함 이순신함

대한민국 해군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 이순신함(SS-68)[19]은 무의공 이순신의 이름을 따 1999년에 취역하였다. 충무공이순신함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이름을 딴 것이다.

4. 2. 여러 차례의 탄핵

1580년(선조 13) 탄핵을 받고 선전관에서 파직되었으나, 그해 겨울 다시 복관하여 선전관이 되었다.[18] 1585년(선조 18) 강진의 지역 호족들과 마찰을 빚어 파직당했다.[18]

1588년(선조 21) 명나라 사절단이 귀국길에 문책하려 함에 군무를 잠시 떠났다가 탄핵당하여 파직됐다.[18] 1589년(선조 22) 함경도 혜산진첨사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발병하여 적군이 관할 지역의 운총벽을 네 차례나 침입하는 것을 막지 못해 함경도 조방장 한극성의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선조가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감률을 명했다. 그 후 전 상사와의 불화로 부하관과 함께 삼수로 가게 되자 선조는 그를 파직하여 귀양 보냈다.[18]

1601년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재물을 탐한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18]

조선왕조실록》에는 비난을 받아 여러 번 탄핵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18]

무의공 이순신이 여러 차례 탄핵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 의주판관 재임 시(1588년) 명나라 사신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여 파직 및 귀양을 갔다.
  • 충청수사 부임 시(1594년) 전쟁 중 현지 목사의 무절제한 행동과 처신에 대해 죄를 줄 것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상대방의 농간으로 무고를 당했다.
  • 수원부사 겸 방어사 재임 시(1606년) 경기 관찰사의 사사로운 요구를 거절하여 미움을 사서 무함과 파직을 당하였다.


이러한 탄핵의 배경에는 무의공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과 더불어, 당시 조정 관리들의 미움을 산 점,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격변기에 적응하지 못한 무인의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에는 남인과 서인이 서로 반대 진영의 관리를 끌어내리고 자기 진영의 사람을 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핵을 빈번하게 사용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4. 3. 왕실의 후손

이순신은 조선의 왕족으로 덕수 이씨인 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이었다. 1553년(명종 8) 12월 27일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15]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과 안동 김씨 성균관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김씨의 다섯째 아들로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서 태어났다.

5. 관련 작품


  • KBS1의 2004년~2005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전현이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Yi Sun-sin https://terms.naver.[...]
[2] 백과사전 Yi Sun-sin https://terms.naver.[...]
[3] 웹사이트 Yi Sun-sin http://encysillok.ak[...] 2020-07-02
[4] 뉴스 "[Park Jong-pyeong's [[Nanjung ilgi]]-⑦] Chungmu Yi Sun-sin vs Muui Yi Sun-sin" http://www.ilyoseoul[...] Sunday Seoul 2015-08-17
[5] 백과사전 Yi Sun-sin https://terms.naver.[...]
[6]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onjo 31st November 25 http://sillok.histor[...]
[7]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onjo 32nd October 4 http://sillok.histor[...]
[8]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onjo 37th February 29 http://sillok.histor[...]
[9]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onjo 37th June 25 http://sillok.histor[...]
[10] 웹사이트 Yi Sun-sin https://terms.naver.[...]
[11]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onjo 39th June 29 http://sillok.histor[...]
[12]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onjo 40th September 24 http://sillok.histor[...]
[13] 웹사이트 http://www.rfo.co.kr[...]
[14] 웹사이트 http://www.rfo.co.kr[...] 2006-04-03
[15] 문서 뒤에 추증된 작위이다.
[16] 웹사이트 http://enc.daum.net/[...]
[17]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宣祖 161卷, 36年( 1603 癸卯 / 명 만력(萬曆) 31年) 4月 28日 甲寅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18]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선조 142권, 34년( 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0월 4일 무진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19] 문서 대한민국 해군의 함 번호에는 숫자 0과 4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장보고급 제7번함의 함정 번호는 SS67이 아니라 SS68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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